본문 바로가기

좋은 글

건양다경(建陽多慶)/받은 글

‘建陽多慶 건양다경’
-절대로 써선 안 되는 말

일본에서는 음력을 사용한 적이 없어 ‘정월’이 어떤 달(月)인지도 모르고,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해(年)를 적은 일도 없다. 
양력 사용을 고종(高宗)에게 강요해도 안되자 왜놈들은 친일 대신들을 협박해서 양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총독부의 압박에 굴복한 고종 임금이 을미년(1885) 겨울 어느 날을 ‘양력 1월 1일’ 이라고 정한 뒤부터 이날을 ‘설날’이라며 쉬게 하였다.
이렇게 해야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이뤄진다는 것이 일제의 생각이었다. 
‘내(內)’는 큰 집을, ‘선(鮮)’은 조선을 뜻하는 말이니,
일본이 큰 집이고 조선은 작은 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고종은 왜놈들과 부왜역적(附倭逆賊) 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그러자 분격한 한양 (서울) 군중들은 부왜역적 대신들의 집을 찾아가 그들을 밖으로 끌어내 두들겨 패 죽였다. 

당시 우리 군중들은
양력설을 ‘왜놈 설’ 이라면서
양력설을 지키던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부대신 정병하를 종로 네거리로 끌어내 몽둥이 찜질을 한 것이다.
이때 겁을 먹은 내부대신 유길준은 일본으로 달아났고,
탁부대신 어윤중은 고향 보은으로 달아나다가 용인 군중들에게 들켜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왜놈 설’을 쇤 지 석 달 뒤의 일이었다.

왜놈 설을 쇠기 석 달 전에는 명성황후가 피살되었고,
왜놈 설을 쇠었던 고종임금은 나라를 빼앗기고 독살(毒殺)설 속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붓글씨로 써서 대문과 기둥에 붙이는 풍습은 우리네 것이었으나 대구(對句)로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쓰도록 한 것은 왜놈들이었다.
‘建陽多慶’이란 “양력설을 쇠면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 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왜놈들은 그해를 ‘건양(建陽)1년’ 으로 하라고 시켰고, 그래서 ‘건양’이 고종의 연호(年號)가 되었다.
그러므로 ‘건양다경’을 쓰면 안 된다. 
 
입춘대길의 대구(對句)로는
만사형통(萬事亨通).
소문복래(笑門福來).
길상여의(吉祥如意).
국태민안(國泰民安).
수복강녕(壽福康寧)
등 많은 문구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