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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한국의 유교 : 상고시대

* 한국의 유교 : 상고시대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대학(大學)’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
서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
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
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음사(淫祀)’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은 ‘신시(神市)’에서 ‘홍익인간’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
과 제기(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
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신시적(神市的)’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신시’와 연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소도(蘇塗)’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
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사한 ‘소도’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고신도적(古神道的)’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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