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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사계사상의 특성--최근덕(성대 유학 동양학부 교수)

沙溪思想의 特性/崔 根 德 (成大 儒學·東洋學部 敎授)

 

穆陵盛際란 말이 있다. 穆陵은 宣祖(朝鮮 第14代王 在位 1567∼1608)의 陵號로 그의 在位期間인 41年間을 文運興盛時代로 규정하고 하는 말이다. 대충 꼽아 봐도 退溪李滉(宣祖 3年卒) 高峯 奇大升(5年卒) 德溪 吳健(7年卒) 一齋 李恒(9年卒) 休庵 白仁傑(12年卒) 栗谷 李珥(17年卒) 思菴 朴淳(22年卒) 蘇齋 盧守愼(23年卒) 鶴峰 金誠一(26年卒) 松江 鄭澈(26年卒) 牛溪 成渾(31年卒) 龜峰 宋翼弼(32年卒) 西厓 柳成龍(40年卒)등이 이 期間에 晩年을 보냈고, 沙溪 金長生·寒岡 鄭逑·旅軒 張顯光·愚伏 鄭經世·愼獨齋 金集등이 旺盛하게 活動을 하고 있었으며, 眉未 許穆·敬堂 張興孝·同春堂 宋浚吉·草廬 李惟泰·美村 尹宣擧·尤庵 宋時烈등 훗날의 巨儒碩學들이 젊음의 情熱을 硏學에 쏟고 있었다.


人物의 興盛이 이와 같은 반면에 葛藤과 挫折과 慘憺도 뒤섞여 갈마들고 있었다. 士禍의 不吉한 꼬리를 물고 朋黨이 싹트는가 싶더니 드디어 東西로 갈라져 黨爭으로 激化되고, 太平聖代를 틈타 島賊이 7年동안 全國土를 짓밟고 焚蕩질을 했다. 참으로 崎嶇하게도 黨爭은 學問·學脈·行誼에다 政治的 命運과 連繫되고, 外敵의 侵奪은 忠君愛國에 義理精神의 試驗臺로 그들을 올려놓았다. 이 期間의 선비들은 누구나 學問的 評價 外에 보다 峻嚴한 義理의 踐履를 要求받는 所以然이 바로 여기에 있다.


沙溪는 龜峰과 栗谷의 門下에 出入해 兩門에서 함께 嫡傳으로 評價받는다. 그만큼 뛰어난 學者다. 儒學史에서 性理學 定着期의 第一世代를 退溪 高峯 栗谷으로 친다면 沙溪는 第二世代에 屬히게 되고 禮學 開花期의 第一世代를 退溪 龜峰 栗谷으로 꼽는다면 역시 沙溪는 第二世代다. 이로 보면 沙溪는 어느 모로나 <위에서 받아 아래로 이어 주는> 곧 繼往開來의 位置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沙溪思想의 特性을 알아보는 것은 그의 學脈 곧 栗谷을 頂點으로 하는 畿湖學派의 主流를 貫通하고 있는 學問的 要訣과 修行方法을 穿鑿하는 일이 된다.



위에 든 觀點을 念頭에 두고 沙溪思想의 特性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學問·行誼의 旨訣을 "直"에다 두었다. 直은 用心의 要訣이다. 그에 따라 修養의 窮極處이기도 하다. 易經을 보자.


{直은 그 바름이고 方은 그 옳음이다. 君子는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 敬과 義가 서서 德이 외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坤卦 六二爻의 爻辭 <直方>에 대한 풀이인데 直은 마음이 부드럽고(柔) 순하며(順) 곧고(貞) 굳은 것(固)이라 했다. 마음이 事物 비추기를 마치 맑은 거울처럼 바르게 해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게 하되 흔들림이 없이 곧고 한결같다는 뜻이다. 일찍이 孔子도 孟子도 이 直에 留意했고 程朱는 平生 行誼의 守則으로 삼았다. 嫡傳弟子라 할 尤庵의 다음 證言에 다 含意되어 있다.


{朱子가 돌아가기 며칠 전 제자 여럿이 問病을 하고서 가르침을 청하자, 그에 대답하기를 "학문하는 요체는 오직 일마다 낱낱이 그 올바른 것을 살피고 求해서 그릇된 것을 決斷해 버리는 데에 있다. 이렇게 해서 공부의 쌓임이 오래 되면 마음이 이치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저절로 發하는 바가 모두 私曲이 없게 되는 것이다. 聖人이 萬事에 應하는 것이나 天地가 萬物을 낳는 것은 直일 따름이다." 라고 했다.} 그는 이어 스승에게서 받은 가르침에 대해 말했다.


{우리 文元公(沙溪)선생께서도 늘 이를 외어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내 평생에 행한 일들에 비록 착하지 않는 일이 있다 치더라도 일찍이 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비록 마음에 發해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치더라도 진실로 착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너는 모름지기 이런 마음을 체득해야 한다. 이 한 直자는 朱子가 실상 받은 바가 있다. 孔子께서는 <사람의 삶은 直이니, 그렇지 않고 사는 것은 요행히 禍나 免하고 사는 것>이라고 하셨고, 孟子는 <스스로 돌이켜서 곧으면 비록 千萬人이라도 나는 가서 對敵할 것>이라 하였으며, 浩然之氣를 論해 <直으로써 길러 害침이 없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고 하였으니, 朱子가 실로 孔孟의 統을 이은 것은 오직 이 한 字뿐이다."라고 하셨다.}


尤庵은 {沙溪선생의 學은 오로지 確 한 字에서 나왔고 매양 直 한 字로써 立心의 要訣로 삼았다.}고 確言하고 있다.


둘째. 禮를 學問의 中心에 두었고, 朱子家禮를 禮의 中心에 두었다.

沙溪의 莊重渾厚함을「地負海涵」(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 주듯이 너그럽고 크다는 뜻.)과 같아서 限界지을 수가 없다고 했거니와 그는 당시 性理學 中心의 學風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禮를 바로세우고 넓히는 作業에 專心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타고난 莊重이 地負海涵의 境地로 익어갔다는 德談을 듣기에 이르렀다. 禮의 踐履 效果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 實例라 할 수 있다. 그는 朱子가 規定한 禮의 定義 「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을 金科玉條로 삼아 <天理의 節文을 排析하고 人事의 儀則을 證定>하는 사이에 어느새 禮를 學問의 核心으로 삼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家禮輯覽 喪禮備要 疑禮問解 祭儀正本 禮記記疑등등 우리 禮學史上 初有의 巨作이 나오게 된 것이다.


沙溪가 『家禮는 사람을 敎化시키고 風俗을 아름답게 하는 책』이라고 했을 때 이미 禮를 모든 學의 中心部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中心部의 師匠이 朱子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朱子尊崇은 스승인 栗谷이나 龜峰에게서 받은 바도 있었다. 그는 일찍이 서슴없이『만약에 朱子가 없었다면 堯舜周孔의 道가 캄캄해졌을 것이다. 비록 二程이 있지만 그들의 經傳註釋에는 疑心할만한 곳이 많고 또 따르기 어려운 곳도 있다. 栗谷은 항상 말씀하셨다. 『내가 다행히 朱子後에 태어나서 學問이 거의 어긋남이 없었다.』 沙溪는 敎學하는 次序도 小學 다음에 朱子家禮를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朱子家禮에 얼마나 篤實하게 精力을 쏟았는가를 스스로 밝힌 逸話가 있다.


{어느날. 家禮 親迎의 附註「圍布?筵」에 대해 강의하시다가 말씀하셨다.


"오래 전에 하루는 송강(松江 鄭澈)이 家禮를 들고 찾아와서는 이 주석을 가리키며 ‘내가 되풀이해서 연구를 해도 끝내 이해할 수가 없으니 좀 자세히 설명해 주게’해서 내가 하나하나 해석해 주었더니 대단히 좋아하면서 ‘이제야 의문이 확 풀렸으니 다행 다행이로세’하고 돌아갔는데 얼마 후 經筵(임금과 신하들이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곧장 나를 찾아와 웃으며 말하기를 ‘오늘 기이한 일이 있었다네. 강론이 끝난 후 상감께서 가례를 내놓으시며 <이 대목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해 새겨 봤지만 끝내 막히는데 여러분 중에 누가 설명해 주겠는가. 사양말고 가르쳐 주오.> 하시는데, 내가 가만히 보니 그저께 자네에게 배워 간 바로 그 대목이더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르겠다고 아뢰더구먼, 내가 나서서 자세히 설명해 드렸지. 그러자 상감께서 <대단하이. 확 뚫렸어.>하시며 재삼 칭찬하시더니 이어 <내가 경서공부에서 이 註처럼 어려운 대목은 처음>이라 하시고는 <정철은 벼슬도 높고 일도 많은 사람이 오히려 경서공부를 이처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대체 왜 못하는가?> 하시는지라 모두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네. 그러니 나도 <실은 신(臣)도 몰랐사온대 그저께 김모(金某=沙溪)한테 배워서 알게 된 것이옵니다.> 하는 말이 입밖에 거의 나왔지만 종내 토설하지 못하고 말았다네. 후에 賞으로 下賜品까지 내려왔으니 정말 모두가 자네 덕이니 나눠 갖어야 하지 않겠나’하더란 말이야.}


沙溪는 덧붙였다.


{상감(宣祖)께서 바쁜 정치의 와중에서도 이런 글들에 관심을 쏟고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옛날 夏의 禹임금이 조그만 일까지 일일이 챙기든 것이나 周公이 밤을 새워 정사를 보던 전례인들 이보다 더 하겠는가. 내가 병자년(선조 9년)에 중국에 가는 使臣편에 家禮중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기록해서 禮部에 문의해 보라고 했더니 사신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예부에 문의했더니 그쪽 벼슬아치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主로 따르는 것은 皇朝禮일 뿐 가례는 알 바가 아니라.'라고 하더래. 대저 가례는 化民成俗하는 책인데 예부에서 평소에 들쳐보지도 않아 군색하게 되자 황당한 소리로 호도하니 참으로 불성실한 작태가 아닌가. 중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朱子學을 숭상하고 있지 않다는 일단이기도 하지.}


沙溪의 가례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자학에 대한 애정도 짐작할 수 있는 逸話다.


셋째. 禮說도 時宜에 맞아야 하고, 經傳註釋도 先正의 說을 굳이 따를 必要는 없다고 했다.

沙溪는 喪禮備要 凡例에서 ①補充해야 할 것은 補充했다.(可補者 補之) ②고쳐야 할 것은 고쳤다.(可改者 改之) ③옮겨야 할 것은 옮겼다.(可移者 移之) 고 했고, {儀禮 家禮가 今制·國制와 서로 異同이 있는 것은 그대로 함께 두어 참고하도록 했다.}(若儀禮家禮今制國制 有相異同者姑幷存之 以備參考) 고 했으며, 家禮輯覽 凡例에서도 {俗制로 便宜한 것은 아울러 두어 使用하는 사람이 選擇할 수 있게 했다.}(旣有家禮儀禮舊制 然亦有俗制之便宜者 則?存之 使其用者 有所擇焉)고 했다. 禮도 時宜에 맞춰야 한다는 것과 時王之制·國制·國俗이 알맞게 參酌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禮思想을 一貫하는 所信이었고 著述에 그대로 反影되어 있다.


그는 一世代인 退溪나 栗谷의 禮說 또는 禮에 대한 接近方式을 明確하게 批判한 적도 있고 同時代의 禮學者인 寒岡 鄭逑에 대해서도 {寒岡의 禮說은 엉성함이 있다.}(寒岡之禮說 有闕)고 指摘한 적이 있지만 禮書나 經傳이나 그 解釋에 있어서 대단히 嚴格했고, 先正의 說이라 해도 檢證없이는 따르지 않았으며, 일단 誤謬가 認定되면 假借없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經傳공부를 하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나 의심이 나는 부분이 있으면 굳이 선생의 해석을 따르려고 애쓰지 않고 따로 적어 놓고는 혼자 연구를 거듭했다.


{어떤 이가 물었다. "先正의 가르침이나 해석을 後學이 마땅히 존중하고 믿어야지, 감히 論議를 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 아닌가?" 내가 대답했다. "義理를 講論하는 것은 天下 公共의 일이다. 先賢도 또한 일찍이 그렇게 생각했다. 中庸或問 大學或問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어찌 감히 先正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인가. 다만 여러분과 더불어 論難하고 商訂해서 그 是非를 바로잡고자 할 따름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沙溪가 책을 끼고 龜峰의 門을 두드렸을 때는 열 세 살의 紅顔少年이었다. 그 以前에는 변변히 공부를 하지 못했다. 열 한 살 때 어머니(申夫人)를 잃었고, 아버님(黃岡 金繼輝)은 자주 外職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어릴 적에 공부할 기회를 잃었다.}(余少而失學)고 述懷하곤 했다. 퍽으나 孤獨한 어린이였다. 性稟만은 莊重했었다. 함부로 웃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 소년이 자기보다 열 네 살 위인 맏형 뻘 되는 二十代 후반의 근엄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여간 껄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말한다.


{나는 龜峰에게 近思錄을 배웠다. 구봉은 대단히 英邁해서 글을 보면 막힘이 없었다. 남도 자기와 같은 줄 알고 한번 읽어 내려가고 나면 다시는 풀이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망연히 배우지 않은 것과 같았다. 물러나 조용히 앉아서 보고 또 보고 무척 辛苦를 했고, 읽고는 생각하고 생각하고는 읽으며 밤낮으로 쉬지 않은 그런 뒤에야 점차 깨우쳐 갔으며, 천번 만번 생각을 거듭해도 깨우쳐지지 않아야 선생에게 물었으니, 글공부에 나처럼 부지런과 수고로움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初學부터 刻苦勉勵의 過程을 거친 것이다. 공부뿐만 아니었다. 아주 가난한 생활이었다. 밥상에 간장조차 오르지 않았다. 그저 한 줌 소금을 입에 털어 넣어 밥을 넘겼다. 한 해를 넘겨 공부하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婢女의 집에 들렸더니 아욱국을 끓여 주었다. 어떻게나 맛있었던지 老年에 이르도록 그 맛을 잊지 못했다. 마치 시우쇠(精鐵)를 달구듯이 孤獨과 辛苦와 勤勞 그리고 困窮속에서 그의 修行은 鍛鍊되어 갔다. 그러기에 나이 여든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衣冠을 整飭해 띠 두르고서 家廟에 展謁하고는 書室에 앉아 조용히 책상을 對하되 결단코 事物이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沙溪는 다시 栗谷의 門下에 들어 공부를 했다. 율곡은 그보다 열 두 살 위였다. 우리 儒學史의 頂點에 서게 되는 두 巨儒에게서 道를 傳해 받게 된 것이다. 沙溪는 두 스승의 嫡傳弟子로 理學과 禮學을 받아 다음 世代로 傳해 주었고 그를 잇는 綺羅星같은 駿足들이 드디어 巨大한 學脈을 이뤄 이 나라의 精神史를 가꿔 왔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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