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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1차 세계대전(中) 전쟁의 장기화와 끝없는 소모전

출처 : http://winlee96.blog.me/220108966627

 

AD 1915년 전황

동부전선

2차 마주리 호수 전투

AD 1914년말 물러난 참모총장 몰트케의 후임으로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임명되었다. 팔켄하인 역시

서부전선을 더 중시하였고 타넨부르크 전투의 승리 이후로 러시아를 얕잡아 보고 있어 동부전선으로는

더 이상의 병력지원을 거절하였다. 특히 팔켄하임은 적극적인 공세보다는 소모전을 통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부전선을 맡은 공격적인 성향의 힌덴부르크 및 루덴도르프와 마찰을 빚

었다. AD 19151월이 되자 러시아는 동프로이센과 갈리치아 전선을 고착화시킨 후 슐레지엔으로 진

격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이에 대해 독일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병력 증원이 없는 상태에서도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공세적인 작전을 시작하였다.

AD 1914131일 보리모우 전투를 시작으로 동프로이센 탈환을 위한 진격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같은 해 4월에 발생하는 서부전선의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가스가 최초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

지만 사실 보리모우 전투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최초로 독가스가 사용된 전투였다.

비록 독가스는 이미 AD 19세기에 개발되었으나 AD 1899년 헤이그 조약에서 독가스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으나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 방향에서 동시에 수행되는 전쟁의 장기화에 부담을 느낀 독일에서는 독가스 사용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용된 양이 적었고 추운 날씨로 인하여 확산되지 않아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보리모우 전투 이후에도 독일군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2월초부터 전년도 탄벤베르크 전투가 벌어진 곳 근처에 있는 마주리 호수에서 공세를 시작했고 악천후에 허를 찔

린 러시아의 4개 사단이 아우구스토프 숲에서 포위당하여 222일 항복하였다. 2차 마주리 호수 전

투에서 러시아는 5만명의 병력과 대포 185문을 잃어버렸다.

2차 마주리 호수 전투(The Battle of Masurian Lakes)의 상황도

 

고르리체 돌파

동프로이센의 독일군과 달리 갈라치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러시아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

었다. AD 191411월부터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던 프셰미실이 AD 19153월 마침내 항복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0만명의 병력을 상실하였고 4월이 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방어선으로

삼고 있던 카르파티아 산맥의 주요지점도 러시아에게 내주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참모총장 팔켄하인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이 지휘하는 신설 제11군을 갈라치

아 방면에 투입했다. 팔켄하인의 작전은 고를리체를 돌파하여 갈리치아의 두나예츠 강 지역에 있는 러

시아군의 중앙부를 강타한다는 것이었다. 52일에 시작된 고를리체 돌파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62일 프셰미실을 탈환하고 619일 우크라이나의 렘베르크(지금의 리보프)까지 진출하여 러시아

군을 둘로 분단시켜 버렸다. 7월이 되자 독일군은 분단된 러시아 군을 더욱더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러

시아 군은 대후퇴를 시작하여 8월 폴란드의 바르샤바까지 상실하는 대위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처

독일군의 포위망이 완전하게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틈을 타고 러시아의 주력부대들이 무사히 동

쪽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 비록 러시아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실패했지만 이로서 동부전선

은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팔켄하인은 더이상의 공세를 중지시키고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차출하여 힌덴

부르크와 다시한번 마찰을 빚게 된다.

고르리체 돌파(Gorlice–Tarnów Offensive )상황도

서부전선

뇌브샤펠 전투

서부전선에서는 AD 1914년과 AD 1915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동안 독일군과 영-프 연합군 모두 참호

에 철조망을 두르고 기관총을 배치하였으며 참호와 침호 사이에 갱도를 파면서 점점 더 방어력을 강화

시켰다. 이렇게 되자 독일과 영-프 연합군 양측 모두 참호전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새로운 전술에 골몰

하였다. AD 1915310일 더글러스 헤이그가 이끄는 영국 제1군이 먼저 뇌브샤펠 전투에서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그것은 포병대가 약 2km 전방을 먼저 포격하여 독일 측 참호를 우선 파괴한 후 사정

거리를 두배를 늘린 포병의 엄호 속에 보병이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탄약부족으로 2번째 포격

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보병대의 공격개시가 5시간이나 지연되었기 때문에 13천명의 사상자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2차 이프르 전투

 

AD 1915415일에는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염소가스를 독가스로 살포하는 새로운 전

술을 시도하였다. 독일의 독가스 사용은 AD 19152월 보리모우 전투의 2번째였으나 그때는 사용된

양이 적었기 때문에 독가스의 본격적인 사용은 제2차 이프르 전투가 처음이었다. 2차 이프르 전투에

서 독일군은 염소가스가 담긴 5,700개의 깡통을 17인치 곡사포를 이용하여 프랑스의 알제리 부대 측

참호에 발사하였다. 이로인해 4마일에 걸쳐 무려 1만명이 염소가스에 노출되었고 삽시간에 반수가 쓰

러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3km 전진에 성공한 독일군은 다음날 다시 이프르 동쪽에 위치한 영국의 캐

나다 부대에게 염소가스 깡통을 발사하여 캐나다 부대에게 약 6천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또다시

4km 전진에 성공했다.

이렇게 독일군의 독가스 사용은 처음에는 대성공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한계였다. 염소가스는 눈

가려움이나 일시적인 호흡장애 이외의 살상력이 미약했고 독일군 역시 독가스에 대한 공포로 염소가스

가 살포된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으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독일군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

게 되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이 많았다. -프 연합군이 물러나 부대를 재정비하자 독일군도 더이상 전

진하지 못했고 9월부터는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 역시 독가스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서부전선은 막대한

사상자만 발생시키는 지루한 참호전이 다시 시작되고 말았다.

2차 이프르 전투(The Second Battle of Ypres)의 모습

발칸 전선

 

영국군의 갈리폴리 전투 대실패

 

AD 1914년 후반 오스만 제국이 독일 측에 가담하면서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이

어 오스만 제국까지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겼다. 그러자 영국 측에서는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

턴 처칠을 중심으로 영국의 우수한 함대를 이용하여 바다로부터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공

략하여 오스만 제국을 조기에 전쟁에서 이탈시키겠다는 작전을 입안하였다. 다만 영국 함대가 이스탄

불로 가기 위해서는 좁은 다르다넬즈 해협을 돌파해야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오스만 제국의 갈리폴

리 항구를 우선적으로 점령할 필요가 있었으나 갈리폴리 점령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육군 상륙부대

제공을 프랑스가 거절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발생했다. 하지만 처칠은 영국 함대만으로 충분히 갈리폴

리를 제압할 수 있다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며 계획을 그대로 강행하였다. 사실 발칸 전쟁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의 허약함이 충분히 알려졌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을 얕잡아 본 것이 사실이었다.

러나 오스만 제국도 그동안 독일의 군사고문단의 지도를 받아 군대의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대포 등의

화기 역시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닌 상태였다. 참고로 훗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면

서 근대 터키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무스타파 케말 대령이 이때 참모장 격으로 방어군을 이끌고 있었

. 

갈리폴리 전투(Gallipoli Campaign )의 전장위치

 

AD 1915219일 영국함대 16척이 포격을 시작하였으나 오스만 제국도 해안포로 맞섰기 때문에 1

주일간 진행된 포격전에서 영국 함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영국 함대는 318

이번엔 다르다넬즈 해협의 돌파하는 2차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처 제거되지 못한 기뢰

에 의해 전함 3척이 좌초되어 오스만 제국의 포격에 침몰하고 순양함 3척이 대파되는 결과만 낳았다.

결국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영국 함대 총사령관인 존 피셔 제독이 사퇴하였고 해군장관인 처칠도 자

리에서 물러나야했다. 사실 이때 영국 함대 못지 않게 오스만 제국의 피해도 컸기 때문에 만일 영국군

이 그대로 전투를 강행했더라면 승리할 수도 있었지만 영국 지휘부는 영국 함대 단독으로 다르다넬즈

해협을 돌파하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에 따라 영국군은 상륙부대를 충원하기 위해

모두 물러나기로 하였고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도 병력을 충원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새롭게 영국군의 지휘를 맡게 된 이언 해밀턴이 425일 갈리폴리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사이 영국

군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충원한 병력인 안작(ANZAC) 군과 프랑스에서 지원받은 병력을

합쳐 총 7만명의 상륙부대를 조직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역시 그동안 10만명의 병력을 보충

하고 요새와 해안진지의 대포를 재구축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

대의 지원포격 속에서 영국의 상륙부대가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오스

만 제국의 의도한 바로서 영국 연합군 부대가 상륙한 지역은 해안의 폭이 너무 좁아 대규모 병력을 운

용하기가 쉽지 않았고 오히려 오스만 제국이 내륙의 고지대에서 참호진지를 통해 방어선을 구축한 상

태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 지휘부는 함대의 지원 포격 속에 상륙부대가 돌격하여 오스

만 제국의 참호진지를 점령하는 전략을 세웠지만 막상 작전을 실행하는 날 상륙부대 지휘관과 함대 지

휘관의 시계가 서로 일치되지 않는 오차가 발생했다. 결국 돌격임무를 맡은 영국의 안작군이 오스만 제

국의 참호진지에 설치된 기관총 세례를 맨몸으로 받으며 8,587명이 사망하고 19,367명이 부상당하

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지금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는 이들의 희생을을 추모하

여 갈리폴리 전투가 벌어진 425일을 우리나라의 현충일과 같은 성격의 '안작데이(ANZAC Day)'

지정하고 있다.

이후에도 영국 연합군은 총 57만명의 병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하였으나 해안선에서 단 1마일도 전진하

지 못한 채 사상자만 25만명을 남겼다. 결국 AD 19161월 사령관 해밀턴이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임

명된 찰스 먼로는 갈리폴리 전투의 실패를 인정하고 전면적인 퇴각을 선언하였다. 비록 오스만 제국도

32만명의 병력 중 절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영국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는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내었고 승리의 주역인 무스타파 케말은 이 공로로 일약 전쟁영웅으로 떠오르며 장군이 되었다. 

갈리폴리 전투의 주역인 무스타파 케말(=아타 튀르크: 맨 위사진)과 오스만 제국군의 모습

 

불가리아의 참전과 세르비아 전역

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제2차 발칸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와 적대감이 높아진 상태였던 불가리

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에 가담한 후 AD 191596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후 여유가 생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10월초 불가리아와 함께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107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도나우 강을 건너 세르비아 북부를 침공했고 1014일 불가리아가 남쪽에서 세르비아 국경을 넘었다. 양 방향의 공격이 세르비아 군의 방어선이 무너졌고 1110일부터 124일까지 벌어진 코소보 전투에서 불가리아 군에게 패배하면서 수도인 베오그라드가 점령위기에 놓였다. 이에 세르비아 총사령관 푸트니크는 세르비아 전군에게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포기하고 몬테네그로를 통해 알바니아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세르비아의 왕인 페타르 1세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까지 이끌고 혹한의 날씨 속에 산을 넘는 강행군을 펼치며 무수한 사상자를 남긴 끝에 마침내 이듬해 2월 알바리아의 아

드리아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연합군 함대의 지원 속에 코르푸 섬으로 이동한 후 세르비아는

망명정권을 수립하며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점령을 마친 불가리아는 이번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모나스티르를 점령

했다. 이에 영-프 연합군은 아직까지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의 살로니카를 통해 지원군을 보냈

고 코르푸의 세르비아 군도 합류하여 반격을 시작하여 AD 191611월 모나스티르를 탈환했다. 그러

나 이후에는 영-프 연합군 50만명이 투입되었음에도 전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 발칸 전선 역시 고

착화되고 만다. 

불가리아의 세르비아 공격 모습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의 연합국 측 참전

 

이탈리아는 본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삼국동맹을 맺고 독일이 프랑스의 공격을 받으면 이탈리

아가 독일을 돕고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는 경우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탈리아를 지원

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

했다. 그러나 AD 1902111일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통해 각각 제3국을 침공할 때 중

립을 지킨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도 방어전쟁

만 수행할 수 있다며 사실상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양 측 모두 이탈리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혈안이 되었고 이탈리아는 고심 끝에 오랫동안

노리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거리의 티롤,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달마티아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AD 1915426일 영국 및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리에 런던조약을 체결하고 523일 오스트리아-헝가

리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는 신속하게 공격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를 점령할 생각으로 총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

에게 약 20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 국경의 이손초 강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때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군은 동쪽의 러시아를 상대하는 데 집중되어 있어 병력 면에서 이탈리아 군의 절반에 불과했지

만 높은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에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623일부터

14일 동안 이탈리아 군미 맹공을 퍼부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포

기하지 않고 718일부터 포병의 화력 지원 속에 2번째 공세를 시작하여 무수한 백병전을 벌였지만 3

주간 전투에서 총 6만명의 사상자만 남긴 채 물러나야 했다. 10월과 11월에 2차례 공세를 더 펼쳤지만

참호진지를 정면돌파하려는 무모한 작전만 반복하면서 또다시 무수한 사상자만 발생시킨 채 카포레토

만 겨우 강을 건너 몇 차례 교두보를 마련했을 뿐 여전히 이손초 강을 돌파하지 못하고 처지가 되고 만

.

이손초 전투의 상황도

AD 1916년 상황

 

서부전선

 

베르됭 전투

 

AD 1915년의 전황이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 군이 모두 후퇴하였고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이탈리아 군

이 이손초 강에서 진격이 멈춰진 상태가 독일의 참모총장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통해 승

기를 잡기 위한 작전을 추진하였다. 그 방법은 서부전선의 한 곳으로 "프랑스가 마지막 병사까지 투입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구전"을 펼침으로써 프랑스에게 소모전을 강요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택된 지점은 베르됭이었는데 베르됭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프랑

스의 최고 요새로 이름이 높았으나 이미 전쟁 초기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가 무너지면서 비슷한 형태의

19세기식 요새로서 평가절하된 상태였다. 더구나 이때 프랑스 측도 독일의 공격을 예상했지만 그 곳이

베르됭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방비를 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베르됭 전투 상황도

 

AD 1916221일 독일군은 제514만명의 병력과 무려 1,400여문의 대포의 물량을 투입하여 베르됭 요새에 대한 대공세를 시작했다.

독일의 작전은 12시간 이상 시간당 10만발의 대규모 포탄을 퍼부으며 요새를 파괴시킨 이후 보병들을 돌격시키는 것으로 4일간 포병 포격과 보병 진격, 다시 포병 포격과 보병 진격을 반복하며 프랑스군에게 무려 10만명의 피해를 입혔다. 224일에는 프랑스의 제2방어선이 무너졌고 225일에는 전방 보루였던 두오몽 요새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앙리 필리프 페탱이 증원군을 이끌고 오면서 프랑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이후 4일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이며 독일군에게 더이상의 진격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가진 후 재개되었고 3월과 4월 동안 뫼즈 강의 동쪽과 서쪽 언덕에서 포격-공격-점령과 반격-탈환이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가 누적되었다.

7월이 되자 영-프 연합군이 솜 강 전투를 시작하면서 많은 병력이 차출되었고 동부전선에서도 러시아

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독일군도 더이상 베르됭 전투에만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게 되었다.

8월이 되자 프랑스군이 반격을 시작하였고 AD 1916년말이 되면 프랑스는 잃어버린 요새와 영토를

탈환하게 된다.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37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독일도 역시 그와 비슷한

34만명의 피해를 입었다. 베르됭 전투가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손실만 낳은 채 아무런 성과를 거

두지 못하자 실패책임을 지고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의 자리에서 경질되었고 그 후임으로 동부전선의 힌

덴부르크가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힌덴부르크의 보좌를 루덴도르프가 맡으면서 이후 독일군에 대한 실

권은 루덴도르프가 갖게 된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비록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독일군의 대공세를

결국에는 막아내는 데 성공한 페탱이 일약 전쟁영웅이 되었다.

베르됭 인근의 독일군 전사자의 묘

 

솜 강 전투

 

독일군이 베르됭 전투를 통해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영-프 연합군도 전년도 말부터 계획했던 작전

을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AD 1915년말 프랑스 총사령관인 조프르에 의해 입안되었고 영국군 총사령

관인 더글러스 헤이그가 동의하면서 추진되기 시작했는데 기본적으로 영토 점령보다는 독일군의 예비

병력을 소모시키겠다는 점에서 베르됭 전투에서 보여준 독일군의 소모전 전략과 대동소이했다. 한편으

로는 독일의 대공세 때문에 프랑스군 대부분이 베르됭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베르됭에 대한 독일군의

압박을 감소시키려는 의도도 추가되었다. 작전의 전권은 영국의 헤이그에게 위임되었고 전장은 솜 강

이 선택되었다. 

솜 강 전투의 상황도

 

AD 1916624일부터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1,500대의 대포를 동원하여 대규모 포격을 시작했

. -프 연합군 역시 베르됭 전투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포병 지원사격으로 참호진지 방어력을 무너

뜨린 후 보병을 돌격시키려는 것이었다. 8일 간의 대규모 포격이 종료된 이후 71일부터 보병의 돌

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동원된 영-프 연합군 병력은 영국군 총 51개 사단과 프랑스군 11개 사단으로

도합 75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포병의 포격만으로는 독일군 참호진지를 모두 무력화시키는 것에 한계

가 있었다. 미처 파괴되지 못한 철조망이 보병의 진격을 방해했고 견고하게 구축된 벙커는 영-프 연합

군의 포격에도 건제하였다. 사실 이때 영국 포병이 사용한 포탄은 인마살상용으로 철조망과 벙커를 파

괴하는 데 부적합하였고 그 나마도 불발탄이 많았다. -프 연합군의 준비포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독

일군은 벙커와 방공호에 숨어있었고 포격이 끝나면 다시 밖으로 나와 돌격하는 영-프 연합군 보병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참호 속의 영국군 모습

 

첫날 공격에서 무려 6만명의 부상자와 2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희생을 치렀지만 영-프 연합군은

독일의 방어진지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711일이 되어서야 겨우 독일의 첫번째 방어진지 점령에

는 성공하였지만 독일 역시 베르됭에서 15개 사단을 차출하여 719일 독일군이 재편되면서 독일의

방어진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915일 최초의 전차가 등장하여 독일군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선사하

기도 하였지만 초기 형태의 전차는 움직이는 포탑과 보병의 엄폐물에 불과하여 그 때까지는 전술적으

로 아무런 도움이 못되었다. 영국군이 자랑하는 기병대가 기관총 앞에 무력화되자 정찰을 위한 비행기

가 투입되었고 이를 제압하기 위한 대공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등 신무기가 잇달아 선보였지만 여전

히 전황은 타개되지 않았다.

영국의 헤이그는 포병의 준비포격 후 보병의 돌격이라는 기본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대한

사상자가 계속해서 발생했다. 하지만 10월에는 폭우가 내려 진흙밭으로 변해버린 전장상황 때문에 11

월 중순까지 겨우 8km 밖에 전진하지 못했고 1113일 최종 공세를 통해 총 12km만 전진할 수 있었

. 그동안 영-프 연합군은 영국군 42만명과 프랑스군 20만명의 도합 62만명의 피해를 입었고 독일

역시 6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단순 계산으로 1km를 전진하는 데 양측이 각각 5만명을 희생시킨

셈이었다. 이렇게 솜 강 전투는 양측에 막대한 피해만 남은 1118일 내린 폭설로 인하여 마침내 중단

될 수 있었다.

참호전의 참상과 대참호전 전술의 변화양상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벌어진 남북전쟁과 보어전쟁, 러일전쟁에서는 후장식 라이플과 기관총의

등장으로 기존의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열보병 전술이 더이상 쓸모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지휘관들은 변방에서 벌어진 앞선 전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AD 19세기식 전술

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참호전의 대치상태에 들어가고 그 참호선이 스위스 국경의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까지 길게 이어지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양 측은 참호선의 방호력 강

화를 위해 대규모 철조망을 설치하고 기관총을 일정간격으로 배치하였으며 참호를 지그재그 모양

으로 여러겹으로 배치하였다.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이라는 3대무기 앞에 두고도 양 측은 모두 무

모한 돌격만 반복하면서 어마어마한 사상자만 발생시키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을 절망으로 몰고간 참호, 철조망, 기관총의 모습

 

전쟁 초창기 참호전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은 독일군과 영-프 연합군 모두 본격적인 공세 이전에 몇

일 동안 이어지는 대규모 준비포격을 통해 참호와 철조망을 파괴시킨 후 전선 전체에 걸쳐서 보병

을 일제돌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포탄은 인마 살상용으로 참호선의 구조물에게는 큰 소용

이 없어 철조망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 참호에 도착하면 별도의 수작업으로 철조망을 제거해야 했

고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기관총 공격에 노출된 수많은 보병들이 무참히 쓰러지고는 했다. 더구나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적의 최전방 참호선을 점령하더라도 참호선이 2, 3중으로 구축되어 있

어 더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오히려 반격을 받아 도로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하여

아군 참호와 적군 참호 사이에 미처 수습되지 못한 시체가 즐비한 '무인지대(No Man's land)'가 형

성되었다. AD 1916년 독일의 베르됭 전투와 영국의 솜 강 전투에서 양 측 모두 수십만명의 인명피

해를 감수했으면서도 적 참호선 돌파에는 실패했다. 독일에서는 독가스를 사용하면서 초기에 상당

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독가스는 바람과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고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

서 점차 큰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어졌다.

참호선을 돌파하는 새로운 시도는 AD 19166월에 벌어진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였다. 러시

아 장군인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는 동부전선에서 몇 일씩 걸리던 준비포격을 6시간으로 단축시키는

대신에 정확한 조준을 통해서 특정 참호만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그 틈으로 보병대를 돌격시키는 전

술을 선보였다. 이러한 브루실로프 공세가 큰 성과를 보이자 독일에서 이를 개선하여 벌어진 참호

틈으로 돌격하는 보병대를 최정예로 엄선하고 화염방사기와 박격포, 수류탄, 독가스 등을 장비시켜

공격력을 극대화한 일명 '후티어 전술'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돌격대가 아

무리 최정예 병사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전투를 거듭할 때마다 사상자가 늘어났고 오히려 연합군

측에서 한 곳만 뚫려도 무력화되는 선형방어를 포기하고 종심방어를 선택하면서 후티어 전술을 무

력화시키게 된다.

참호진지를 돌파하는 세번째 방법은 영국에서 발명한 전차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전차는 AD 1912년 영국의 공병장교 어니스트 던롭 스윈튼이 무한궤도를 이용한 장갑차량 개발을 제안하면서 그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비록 영국 육군에게는 비웃음을 샀으나 당시 해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이 이 아이디어를 채용하면서 육상전함(Water Carrier)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만 최초의 명칭인 Water Carrier의 약자인 W.C가 화장실과 윈스턴 처칠을 동시에 의미하여 조롱받았

기 때문에 탱크(Tank)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전차가 AD 1916년 솜 강 전투에서 최초로 선보이면서 독일군에게 큰 충격을 줬지만 초기 전차는 성능이 매우 뒤떨어졌고 당시 지형여건이 진흙밭이었기 때문에 원할한 기동이 제한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차의 가능성에 고무되어 AD 1917년 캉브레 전투에는 무려 387대를 투입하였고 AD 1918년 백일 전투에서는 500대까지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AD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3,870대와 2,636대의 전차를 생산하게 된다.

 

독가스에 대비하기 위해 방독면을 착용한 모습()과 솜 강 전투에 투입된 영국의 초기 전차 모습()

동부전선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

 

AD 1915년 러시아 군은 동부전선에서 대후퇴하였으나 AD 1916년 상반기가 되자 연합군으로부터 다

시 공세를 펼쳐줄 것을 요청받았다. 프랑스는 러시아 군의 공세를 통해 베르됭에 대한 독일 압박을 느

슨하게 만들고자 하였고 이탈리아 역시 이손초 강의 답답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의 전력을 분산시키기를 원했다. 갈리치아 방면의 독일군 대부분은 이미 서부전선으로 차출되었고 오

스트리아-헝가리군 역시 이탈리아 방면으로 상당수 분산된 상태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방

어선이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니콜라이 2세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서남 집단군을 갈리치아

방면을 진격시키기로 하였다. 이른바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모습

 

AD 191664일 브루실로프는 40개 보병사단 및 15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4개 야전군 총 573

천명을 이끌고 공격을 시작했다. 브루실로프는 6시간 준비포격 후 보병들을 진격시켰는데

이때의 6시간 준비포격은 다른 전선에서 몇일씩 이루어지던 포격에 비하면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이루어졌지만 대신 조준이 상당히 정확해서 목표로 삼은 철조망과 기관총 진지를 부술 정도는 되었다. 이후 브루실로프는 틈이 발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참호진지로 보병대를 투입시켜 그 틈을 크게 벌리는 전술을 선보

였다. 훗날 서부전선에서 선보이는 독일의 돌격대(일명 '후티어 전술')의 원형이 나타난 것이었다.

브루실로프의 러시아 군은 64일 첫번째 공격으로 삽시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을 붕괴시키고

4개 야전군 중 3개 야전군을 전진시켰다. 러시아의 기습적인 공세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오스트리

-헝가리 전선의 곳곳이 붕괴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전면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브루실

로프는 68일 루츠크를 점령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스트리 강을 건너서 철수하였기 때문에

무려 40km의 전진에 성공하였고 20만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으며 6월말에는 코벨과 카르파티아 산맥

으로의 통로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브루실로프 자신도 예상치 못한 대단한 성과였다.

 

브루실로프 공세의 전과 후의 모습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드 회첸도르프는 서둘러 독일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독일의 참모총장 팔켄하인은 회첸도르프에게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2개 사

단을 차출하여 동부전선에 투입하도록 하는 한편 독일의 동부전선을 맡은 힌덴부르크의 휘하 5개 사단

을 서둘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에 증원하여 러시아의 2차 공세를 저지하였다. 독일군과 오스트리

-헝가리 군은 우수한 철도망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증원였으나 러시아는 브루실로프

공세의 초반 성공을 예상하지 못한 데다가 수송을 마차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증원이 늦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실로프의 러시아군은 열악한 보급에도 불구하고 920일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도달은 하였지만 발칸반도에서 새롭게 연합군에 가세한 루마니아에 대한 지원이 필요했기 때

문에 더이상의 병력투입이 어려워 공세를 종료하고 말았다.

러시아는 브루실로프 공세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게 150만명의 병력손실을 입히는 대신에 우

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 볼히니아, 부코비아의 광대한 영토를 모두 회복하고 포로 40만명과 대포

500문을 획득하는 대성과를 거뒀다. 1차 세계대전 시작 이후 부진을 거듭하던 러시아 군으로서는 처

음으로 거둔 의미있는 승리였고 최초의 목표였던 독일의 베르됭 공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탈리

아 방어선의 약화도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브루실로프는 러시아의 전쟁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

에서의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자체는 막대한 병력과 물자 소모로 인하여 더이상 전쟁을 지

속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듬해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탈리아 전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렌티노 공세 실패

 

AD 19163월 이탈리아의 제5차 이손초 전투에서 펼친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에서는 이손초 방면의 이탈리아의 위협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상대적으로 이탈리아의 방어가 느슨한 아

시아고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였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이탈리아 군 후방의 베네치아와 베로나를 점

령하여 이손초 강의 이탈리아 군을 포위섬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탈리아 정보부에서 이러한 움직임

을 감지했지만 이탈리아 총사령관인 카도르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격 가능성을 일축하고 1개군

만 배치하였다.

5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이른바 '트렌티노 공세'를 시작하였고 기습을 허용한 이탈리아 군은

524일까지 10km나 전선을 후퇴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군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이

일대의 잘 정비된 철도를 통해 카도르나가 서둘러 보낸 증원병력이 무려 40만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6

월초가 되면서 전투는 교착상태가 되었다. 더욱이 6월부터 갈리치아 방면에서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

세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 방면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 일부가 차출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

리는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전선을 최초 지역까지 밀고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트렌티노 공세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5만명의 병력을 잃었고 이탈리아

역시 147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만 것이었다.

이탈리아가 전쟁이 참전한 이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트렌티노 공세를 통해 위험에 처

하기도 하자 단기간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참전을 결심하였던 안토니오 살란드라

총리는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임 총리가 된 파올로 보셀리 역시 전쟁을 중단할 생각이 없었

8월초에 벌어진 제6차 이손초 전투에서 고리치아를 점령하면서 처음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자

828일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이후 3차례 벌어진 이손초 전투에서는 카르소

고원을 노렸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포병대와 천연 장애물에 가로막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

고 만다.

그 밖의 전선

발칸전선의 루마니아 참전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가 대성공을 거두는 것을 본 루마니아는 그동안 중립의 입장을 버리고 영-

-러 연합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목적은 역사적으로 자국과 가까웠던 트란실바니아를 오

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빼앗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왕 페르디난드 1세는 AD 1916817

연합국과 동맹을 맺고 83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비록 루마니

아의 병력이 총 50만명에 달하였지만 훈련되어 있지 않은 신병이 대부분이었고 장교들도 전투경험이

없었으며 탄약과 식량 등의 군수물자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는 트

란실바니아로 진격하였고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루마니아의 참전에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도와 즉각적으로 응전에 나섰다. 루마니아에 대한 진

격은 AD 1915년 고를리츠 돌파에서 두각을 나타낸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의 도나우 군과 베르됭 전투

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팔켄하인의 제9군이 맡았다. 또한 불가리아에게 북

진하여 루마니아 남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남북으로 협공이 이루어지자 10월 루마니아는 트

란실바니아에서 퇴각해야만 했고 이후 독일군이 도나우강을 건너 루마니아 본토로 진격하였다. 결국

루마니아가 1125일 부터 123일까지 벌어진 부쿠레슈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26일 수도인

왈라키아의 부쿠레슈티를 버리고 몰다비아의 이아시로 천도해야만 했다. 이로서 루마니아는 제1차 세

계대전에 참전하여 병력 25만명과 영토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왈라키아를 상실하는 피해만 입게 되었

. 

루마니아 전선의 초기(AD 19169)과 후기(AD 19171)의 상황

 

중동 전선의 아랍반란

 

영국 정부는 오스만 제국의 참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중동의 아랍인

포섭에 들어갔다.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은 영국령 이집트의 고등 판무관이었던 헨리 맥마흔이었다. 맥마

흔은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메카의 샤리프인 후사인 이븐 알리에게 접근하였다. 샤리프는 이슬람교

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수호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대대로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제4

대 칼리프인 알리 사이에서 태어난 하산의 후손인 하심 가문이 맡아왔다. 이 때문에 아랍인 사이에서

샤리프의 권위는 대단하였고 오스만 제국에서도 하심 가문에게 메카와 메디나에 대한 통치권을 사실상

위임한 상태였다. 맥마흔은 이러한 후세인 빈 알리에게 AD 19151월부터 AD 19163월까지 10

례의 서한을 보내어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원한다면 이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를 후세인-맥마흔 협정이라고 한다.

사실 후세인-맥마흔 협정은 맥마흔이 임의로 진행시킨 것으로 AD 19165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분할에 대하여 합의한 사이크스 피코 협정은 물론 AD 1917년 팔레스탄인에 유대인

국가가 건설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히게 되는 벨푸어 선언과도 모순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맥마흔

의 약속을 철썩같이 믿은 후세인 이븐 알리는 AD 19166월 이집트와 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르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아랍 제국 건국을 목표로 마침내 스스로를 헤자즈의 왕으로 선포하면서 네 아들과 함

께 이른바 '아랍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영국은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AD 191610'아라비아

의 로렌스'로 알려지게 되는 젊은 장교,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파견하였다. 이후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한 아랍군은 로렌스와 후사인 이븐 알리의 세번째 아들인 파이살의 지휘 아래 헤자즈와 시리아 사

이의 철도를 공격하여 오스만 제국을 후방에서 괴롭히게 된다. 

아랍 반란의 상황도

유틀란트 해전

 

당초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 중 하나가 독일과 영국의 군함건조 경쟁이었던 만큼 개전 초기 대규모 해

전이 예상되었으나 여전히 독일 함대는 영국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에 독일 측에서는 덴마크

의 유틀란트 반도 근처에서 영국 함대 중 일부를 끌어내어 축차적으로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전략을 세

웠고 AD 19165월 순양전함을 미끼로 출항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당시 침몰한 독일 함정으로부터

암호표를 입수하여 독일 해군의 무선을 모두 감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유인책에 넘어가는 척하

면서 순양전함을 먼저 보내고 본 함대가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오후 4시경 영국 순양전함과 독일 순

양전함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이후 독일의 본 함대가 나타나자 영국 순양전함이 영국 본 함대 쪽으로 퇴

각하였다. 오후 6시가 되자 양측 본 함대 간의 교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번에는 영국 본 함대가 나타난

것을 본 독일 측에서 회군하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간의 교전으로 알려진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은 순양전

3, 장갑순양함 3, 구축함 8척의 손실을 입은 반면에 독일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 순양전함

1, 경순양함 4, 어뢰정 5척이 파괴된 것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독일측에서는 유틀란트 해전을 자

신의 승리로 공표하였지만 영국 역시 북해에 대한 재해권을 여전히 확보했기 때문에 영국의 승리로 주

장했다 

유틀란트 해전 상황도

1차 세계대전에서 등장한 3대 신무기

전차

1차 세계대전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이어지며 막대한 인명피해만 발생하자 AD 1912년 영국 공병

장교 어니스트 던롭 스윈튼에 의해 제기된 무한궤도를 이용한 장갑차량의 이용을 제안하면서 처음

으로 전차의 개념이 등장했다.

본래 장갑차량을 전쟁에 활용하려는 생각은 AD 1903년 프랑스에서 구상되었으나 군지휘부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당시 영국 육군 역시 이 아이디어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폄하하였으나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그 가능성에 주목하여 오히려 해군에서 전차를 도입하였다.

이렇게하여 AD 1916년 영국에서 최초의 전차인 MK-1을 개발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프랑스가 이듬

해 선회식 포탑을 처음으로 활용한 르노 FT-17을 제작하며 전차의 전장투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

. 이후 전차는 AD 1916년 솜 강 전투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이래 AD 1917년 캉브레 전투, AD

1918년 백일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차는 전술적인 가

능성을 확인한 것일 뿐 어디까지나 보병부대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취급되었다. 전차의 본격적인 전술

활용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잠수함

AD 19세기말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전쟁무기로 처음으로 등장한 잠수함은 AD 19세기말까지 다양

한 형태로 발달되었는데 특히 AD 1899년에 진수된 프랑스의 나르발호는 수면에서 증기기관을,

수시에는 전기모터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추진력을 제공하면서 잠수함의 장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잠수함을 연안 정찰용이나 기뢰 설치용으로 활용하는 것

이 일반적이었다.

잠수함은 바다 속에서 은밀하게 접근하여 어뢰를 활용하여 격침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해군력에서

열세를 보이던 독일이 연합국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상선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공격형 잠

수함의 시대를 열었다. U-보트라는 이름으로 불린 독일의 잠수함은 불과 38척 만으로 많은 영국 전

함을 연이어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전과에 고무된 독일 측에서 본격적으로 무제한 잠수함 작

전을 시작하였으나 U-보트가 중립국의 미국 상선을 공격한 것이 미국이 연합국 측으로 참전을 결

심하게 된다. 결국 영국에서 호송선단을 도입하고 미국 조선소의 대량생산으로 수많은 미국산 구축

함들이 출현하면서 독일의 U-보트 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만다.

비행기

AD 19031217일 미국의 라이트 형제에 의해 처음으로 발명된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전쟁병기

로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기나긴 참호전으로 이어지고 기관총과 철조망 때문

에 기병대가 무용지물이 되자 기병대 대신에 정찰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비행기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기 정찰기들은 무기를 탑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적 정찰기와 조우하더라도 서

로 인사를 나누는 낭만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서로 간의 적대심이 커지자

상대방 조종사에게 욕을 하거나 심지어 벽돌을 던지기도 하였고 권총사격을 하기도 하였으며 마침

내 기관총을 탑재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기 개념이 등장하여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전투기의 기관총은 처음에는 날개나 동체 후방에 장착하였기 때문에 조종사 이외에 기관총 사수가

별도도 탑승해야 했으나 AD 1915년 프랑스의 롤랑가로(Roland Garros)와 레이먼드 소르니에

(Raymond Saulnier)에 의해 기관총을 전방에 설치하는 '전방기총'이 등장하면서 조종사 혼자서 전투

수행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전방기총을 잘못 발사하였다가는 프로펠러가 파손되어 추락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초기 전투기들은 전방기총을 발사하기 위해 프로펠러를 멈추고 활강상태로 들어가

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도 독일의 앤소니 포커(Anthony Fokker)에 의해 프로펠러 회전동기식 전방

발사 기총이 개발되면서 해결되었다. 이 장치를 통해 조종사가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더라도 프로

펠러가 총구를 가로막지 않을 때만 총탄이 발사되었다. 프로펠러 회전동기식 전방기총이 일반화되

면서 공중전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서로의 후미를 노리기 위해 빙글빙글 돌게 되었는데 이것이 서로

의 꼬리를 잡기 위해 도는 개의 싸움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도그파이트'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도그파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기의 선회력과 조종사의 조종술이었다. 이에 따라 초기 전투

기들은 모두 라이트 형제의 복엽기 형태였으나 선회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날개가 3겹인 삼엽

기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의 포커 삼엽기(Fokker Dr.1)가 뛰어난

성능으로 맹활약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항상 전투기를 붉은색으로 칠하고 다녀서 '붉은 남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포커 삼엽기가 가장 유명하였다. 리히트호펜은 25살의

젊은 나이에 전사할 때까지 격추한 연합군의 항공기가 무려 80대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의 최초 전차 MK-1(), 독일의 유보트 U-9(), 독일의 포커 삼엽기()의 모습

[참고] 다음 백과사전 제1차 세계대전 중 1915년의 서부전선

[참고] 다음 백과사전 제1차 세계대전 중 1915년의 동부전선

[참고] 다음 백과사전 제1차 세계대전 1916년의 전황

[참고] Wikipedia Second Battle of the Masurian Lakes

[참고] Wikipedia GorliceTarnow Offensive

[참고] Wikipedia Battle of Neuve Chapelle

[참고] Wikipedia Second Battle of Ypres

[참고] Wikipedia Gallipoli Campaign

[참고] Wikipedia Serbian Campaign (World War I)

[참고] 다음 백과사전 이손초 전투

[참고] 위키백과 베르됭 전투

[참고] 위키백과 솜 전투

[참고] 위키백과 브루실로프 공세

[참고] 위키백과 트렌티노 공세

[참고] 위키백과 제1차 세계 대전과 루마니아

[참고] 위키백과 후세인-맥마흔 서한

[참고] Wikipedia Arab Revlot

[참고] 다음 백과사전 유틀란트 전투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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