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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1차 세계대전(下) 러시아 혁명과 미국의 참전, 그리고 종전

출처 : http://winlee96.blog.me/220108983539

 

AD 1917년 전황

동부전선

러시아 2월혁명

 

1차 세계대전이 소모전 양상으로 장기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심의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중심의 동맹국 모두 피폐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제력이 낙후된 러시아가 가장 먼저 한계를 들어냈다. 러시아는 이미 AD 1905년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면서 한 차례 혁명이 일어났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차르인 니콜라이 2세가 매우 무능하여 러시아의 사회적 모순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신을 신봉하여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이 기도를 통해 혈우병으로 고생한 황태자 알렉세이 로마노프를 치료했다고 믿으면서 그에게 통치를 의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라스푸틴의 전횡에 러시아의 농민은 물론이고 귀족들마저 니콜라이 2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AD 191612월 라스푸틴은 반대세력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AD 191738일 수도인 페테로그라드(옛이름 상테페테르부르크)에서 식량부족에 의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에 9만명이 넘는 노동자가 참여하였고 니콜라이 2세가 무력진압을 명령한 수도경비대까지 오히려 시위에 가담하면서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혁명이 되었다.

결국 315일 니콜라이 2세가 스스로 퇴위를 선언하면서 300년 이상 지속되어 내려온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고 러시아의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이 혁명이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에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사용하던 구력인 율리우스력으로는 2월이었기 때문에 2월혁명으로 불리게 된다.

 

러시아 2월혁명의 모습

 

러시아의 케렌스키 공세 실패

러시아의 입법의회인 두마는 제정을 대신할 임시정부를 결성했지만 이제 러시아에서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사회주의 세력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이 불가피한 상태였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주의 세력은 우파 세력인 레온 트로츠키의 멘셰비키와 좌파 세력인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로 다시 둘로 나뉜 상태였다. 그러나 AD 1905년 혁명의 실패의 여파로 트로츠키와 레닌이 각각 미국과 스위스에 망명중이었기 때문에 멘셰비키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법무장관이 되어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러시아 임시정부는 5월에 제1차 세계대전을 지속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연합국에 밝히면서 러시아인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일부 장관들이 물러났다. 이에 케렌스키가 육군장관 및 해군장관이 되어 임시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케렌스키 역시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물러나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전쟁을 통해서 분열된 러시아가 하나로 단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6월에 갈라치아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게 된다. 이른바 '케렌스키 공세' 혹은 구력 기준으로 '6월 공세'로 불리는 공세였다.

이에 따라 AD 191771일 브루실로프가 러시아군을 이끌고 르부프를 향해 진격하였다. 러시아의 공격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이미 러시아 병사들은 더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74일이 되자 공세가 둔화되었고 76일부터는 오히려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독일군의 반격을 받아 우크라이나의 즈브루치 강 부근까지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렌스키가 임시정부 조직개편  2대 총리로 선출되자 전황을 수습하기 위해 브루실로프를 해임하고 대신하여 라브르 코르닐로프를 러시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코르닐로프는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켜 8월말에 군대를 이끌고 수로 진격하였다. 이에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서로 간의 정쟁을 일시중지하고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수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코르닐로프 반란을 겨우 막아낼 수 있었지만 이미 케렌스키의 권위는 실추될 데로 실추되고 만다. 

실패한 케렌스키 공세의 전선모습

 

러시아의 10월 혁명과 전쟁 이탈

 

6월공세의 대실패와 코르닐로프의 반란을 겪으면서도 케렌스키는 여전히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스스로 러시아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던 볼셰비키의 노골적인 비난에 직면했고 4월부터 페테르그라드에 돌아온 레닌은 공공연하게 볼세비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렇게 불리해진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케렌스키는 볼셰비키의 수장인 레닌에게 독일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씌워 핀란드로 추방시켰으나 레닌이 10월말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로 다시 돌아온 후 115일 무장봉기를 일으켜 오히려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전복시켰다. 볼셰비키 군이 정부청사와 전신국 및 기타 요충지를 장악하자 케렌스키는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국외로 망명을 떠났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 임시정부는 무너졌고 새롭게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등장하여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혁명 역시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에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었기 때문에 10월혁명으로 불리게 된다. 비록 레닌의 봉기는 무혈혁명으로 마무리되었고 AD 19183월 레닌 정부가 독일과 비밀리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는 제1세계대전에서 빠져나왔지만 러시아 내부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세력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나면서 러시아는 적백내전이라는 또다른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선포하는 레닌의 모습

서부전선

 

미국의 참전선언

 

미국은 AD 1823122일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 의해 제창된 먼로주의를 통해 전통적으로 유럽의

분쟁에는 불간섭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중립을 지켰다. 그러AD 1915년 독일이 벌인 잠수함 공격에 영국 상선에 탄 미국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2차례 일어나면서 미국과 독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독일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해 독일에서는 잠수함 공격에 대한 자제를 약속을 하였으나 AD 1916년 다시 독일의 잠수함 공격에 침몰한 프랑스 선박에서 동승한 미국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한번 독일에서 잠수함 작전의 자제를 약속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지만 AD 19171월 군부의 새로운 실권자가 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한다는 목적으로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다시 승인하였기 때문에 AD 19172월초 이번에는 미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에 침몰하는 사건이 다시 발생하였다. 결국 미국도 독읠과의 외교단절을 선언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전쟁에 참전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2월말 '치머만 전보사건'이 공개되면서 미국 여론이 급격하게 전쟁 참여쪽으로 기울게 된다.

AD 1917116일 독일에서는 멕시코의 독일 대사에게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를 동맹

으로 끌어들이라는 내용의 암호 전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만일 멕시코가 참전하면 그동안 멕시코가 미국에게 상실한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자를 되찾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영국 정보부가 입수하였으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면서 224일이 되어서야 미국 정부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미국도 더이상 참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독일 잠수함에 대항할 수 있도록 자국 상선에 대한 무장을 지시하였고 3월에 다시한번 독일 잠수함 공격에 미국 상선이 침몰하자 46일 마침내 독일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한 미국의 참전은 전쟁수행 때문에 국가재정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던 연합국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았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의 최대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상비군이 없는 미국이 유럽 전장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참전은 이듬해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의회에서 미국의 참전을 선언하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모습

 

프랑스의 니벨 공세 실패

 

독일은 전년도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 대규모 병력을 상실하고 동부전선의 브루실로프 공세를 막아내느라 병력까지 차출하면서 서부전선의 방어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신임 참모총장 힌덴부르크와 그의 보좌관 루덴도르프가 상의하여 반원형의 참호선을 후퇴시켜 직선형으로 바꿈으로써 방어선 길이를 축소시켰다. 대신하여 철조망을 몇 겹으로 보강하고 콘크라트 토치카를 쌓았으며 기관총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오히려 강화시켰다. 다만 후퇴하면서 프랑스인 12만명을 강제노역을 위해 끌고가고 기간시설들을 파괴하여 연합군이 거점으로 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방어선을 독일에서는 지크프리트 선이라고 명명하였으나 연합국 측에서는 힌덴부르크 선이라고 불렀다. 

독일의 힌덴부르크 라인

 

한편 프랑스에서는 지지부진한 전황 때문에 조프르가 경질되고 대신하여 로베르 조르주 니벨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니벨은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 군의 반격을 지휘하여 실지를 모두 회복하면서 명성을 얻은 인물로 힐데부르크 선을 돌파할 '승리의 비책'이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었다. 니벨의 승리의 비책은 영국 원정군이 아라스에 대한 공격을 통해 독일의 예비병력을 끌어내면 프랑스 포병이 앤 강에서 독일의 참호선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미리 대기한 프랑스 보병이 밀고 들어간다는 것이었. 프랑스 내부에서조차 니벨의 계획이 허무맹랑하다는 평가가 많았고 참전을 선언한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견이 개진되었으나 니벨은 48시간 안에 힌덴부르크 선을 돌파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작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에서는 참모총장인 로버트 로버트슨과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헤이그가 모두 니벨의 작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새롭게 총리가 된 로이드 조지가 찬성하였다. 이에 프랑스와 영국은 AD 19174월 이른바 '니벨 공세'을 시작하게 되었다.

AD 191749일 에드먼드 알렌비의 제1군과 헨리 호른의 제3, 허버트 고프의 제5군이 프랑스 아라스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아라스 전투의 초반공세에서 영국군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둬 약 5km 전진에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 군 사이의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더이상의 전과확대가 어려웠고 오히려 재정비에 성공한 독일 군에게 반격까지 허용하면서 전황은 이전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소모전으로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영국의 당초 임무가 프랑스 군의 앤 강 전투에 독일 군이 증원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한 전투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 원정군516일까지 최종적으로 약 7km를 전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사이 영국 측은 15만명, 독일 측은 10만명이라는 막대한 사상자를 낳으면서 단순히 독일의 전선을 일부 후퇴시켰을 뿐 전략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영국 원정군의 아라스 전투가 시작된 지 일주일 뒤인 416일 프랑스 역시 앤 강에서 공격을 시작하

였다. 하지만 프랑스 군의 공격은 독일까지 미리 알고 있던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미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선의 참호를 3겹으로 구축하여 방호력을 대폭 향상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프랑스 군은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군은 개전 24시간 만에 10만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이미 니벨이 공언한 48시간 내 돌파는 불가능한 것이 명백했지만 여전히 니벨은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프랑스 군은 약 20만명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독일에게 비슷한 피해를 입혔지만 무의미한 죽음에 대한 반발이 프랑스 병사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결국 파리에서 군인들이 종군을 거부하며 집단시위까지 벌이기에 이른다. 결국 515일 니벨이 해임되고 베르됭 전투의 또다른 영웅인 필리프 페탱이 새로운 프랑스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로베르 조르주 니벨()과 필리프 페탱()의 모습

 

파스샹달 전투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인 헤이그는 AD 1917년 여름이 되자 벨기에의 플랑드르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계획하였다. 이프르 근처의 파스샹달를 점령한 이후 최종적으로 벨기에 해안에 위치한 독일의 잠수함 기지를 파괴하는 것이 목표로 파스샹달 전투 혹은 제3차 이프르 전투로 불리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헤이그는 영국 원정군 중 고프의 제5군을 주력으로 삼았고 허버트 플러머의 제2군 중 1개 군단과 프랑스 1개 군단으로 좌우를 받치게 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비록 전차가 투입되기 시작했지만 헤이그는 여전히 대규모 준비포격으로 독일의 참호선을 부순 후에 보병들을 돌격시키는 기존의 전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 포병대는 722일부터 731일까지 약 3천문이 넘는 대포를 동원하여 18km에 달하는 전선에 총 425만개의 포탄을 발사하였고 731일 마침내 12개 사단의 총돌격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당시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서 곳곳이 진흙밭으로 변하여 전차는 물론 보병의 이동에 제한이 많았고 영국의 포격으로 독일군 참호의 배수설비가 파괴되어 많은 참호들이 물에 잠긴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군이 참호를 점령하더라도 활용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고프는 더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으나 총사령관인 헤이그는 이를 거부하고 계속 공세를 펼칠 것을 명령하였다. 

물에 잠긴 독일군 참호의 모습

어쩔 수 없이 고프가 816일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결국 엄청난 피해만 입고 독일의 참호선 돌파에는 실패하였다. 이에 헤이그는 고프의 제5군을 물러나게 하고 대신하여 플러머의 제2군을 투입하였다. 러머는 다시 대규모 포격을 통해 보병의 진격로를 여는 작전을 시도하였는데 보병 진격 이전에 수일동안 이루어지던 기존 준비포격과 달리 몇 시간 동안만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한 후 곧바로 보병들을 돌격시켰다. 이것이 독일군에게 기습으로 작용하면서 대성공을 거뒀고 주요 지점의 함락에 성공하였다. 후 계속해서 9월에 펼쳐진 일련의 공세를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109일 헤이그는 이프르로부터 10km 떨어진 파스샹달을 최종적으로 점령하기 위한 총공세를 시작하였지만 독일군이 겨자가스를 동원해 반격해오면서 물러나야 했다. 헤이그가 파스샹달 점령을 포기하지 않은 채 1022일부터 30까지 몇 차례에 걸쳐서 계속 공세를 펼쳤으나 독일군이 높은 고지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고 겨자가스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실패만 거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무수한 사상자를 발생시킨 끝에 캐나다 사단의 활약으로 114일 마침내 파스샹달 함락에는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AD 1917년에 일어난 전투 중 가장 치열하였던 파스샹달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나 3개월 동안 영국은 파스샹달 점령을 위해 무려 30만명이 넘는 병력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캉브레 전투

 

영국에서는 참호전으로 인한 소모전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전차개발에 몰두하였다. 최초의 전차는 AD 1916년 탄생하여 솜 강 전투에 투입된 적이 있었지만 전장이 진흙밭이었기 때문에 이동이 제한되어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영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병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던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차의 잠재력에 주목하여 추가 생산에 들어갔고 AD 19171120일 캉브레 전투에 무려 387대를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이전에 단순히 움직이는 대포에 불과하였던 전차가 캉브레 전투에서는 처음으로 전차가 전술적으로 활용되었는데 전차 3대가 한 조로 편성되어 1개의 전차가 독일군 화력을 제압하는 사이에 나머지 2대가 독일군의 철조망과 참호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전차 공격에 독일군은 깜짝 놀랐고 3중으로 이루어진 참호선마저 돌파당하며 전투 개시 첫날에만 8천명의 포로가 붙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차의 전술적 활용에 미숙한 영국군이 후속 병력과 장비 증원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더이상의 진격이 중단되었고 오히려 독일군의 반격에 밀려 획득한 영토의 절반 이상을 다시 내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캉브레 전투를 통해서 연합군은 전차의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캉브레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포획된 영국 탱크의 모습

이탈리아 전선

 

카포레토 전투(12차 이손초 전투)

AD 191710월까지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이손초 강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총 11차례나 벌인 공세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이제 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년도에 벌어진 러시아의 브로실로프 공세에 많은 병력을 상실하여 더이상 증원할 병력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독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던 독일에서 6개 사단을 파견하여 기존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 9개 사단과 통합하여 오토 폰 뷜로우의 제14군으로 편성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에서는 전년도 트렌티노 공세를 똑같이 재연하고자 하였으나 독일 측에서는 신중한 정찰 끝에 이손초 강 유역의 고리지아 북쪽에 위치한 카포레토를 전장으로 선택하였다. 이탈리아 측에도 탈영병과 정찰기 보고를 통해서 독-오 동맹군의 공격이 감지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총사령관인 카도르나는 이를 무시하고 다시한번 공세를 재개할 준비만 하였다. 

카포레토 전투에서 맞대결을 벌인

독일의 오스카 폰 후티어()와 루이지 카도르나()의 모습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은 그 전달 제8군 사령관인 오스카 폰 후티어가 러시아의 리가를 점령하면서 사용한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후티어가 러시아의 브로실로프 공세에서 착안한 것으로 우선 기존의 장시간의 준비포격이 적에게 공격의도를 경고해주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연막탄과 가스탄 위주로 포격을 가하여 돌격방향을 감춘 후 사전에 정찰한 상대의 취약점을 단시간 동안 집중포격하였다. 이렇게 발생한 틈에 사전에 선발된 소수정예의 돌격대를 투입하여 수류탄, 화염방사기 등의 화력을 집중하고 독가스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틈을 확대하고 이후 후속 예비대를 투입시켜 참호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훗날 연합군에 의해 후티어 전술로 불리는 새로운 전술에 이탈리아 군은 AD 19171024일 첫날에만 25km를 후퇴해야만 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개전이래 유래가 없는 놀라운 결과였다. 참호를 이용한 선형방어의 특성상 한 곳이 무너지자 이탈리아의 방어선은 거침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군은 일방적으로 후퇴만 거듭하기 시작했다 

카포레토 전투의 진행모습

 

이탈리아 군은 1110일 베네치아 근처의 피아베 강까지 물러난 뒤에야 겨우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 동안 이탈리아는 20여만명의 병력을 잃어버렸는데 대부분이 포로로 붙잡힌 것이었고 이손초 강 공세를 위해 그동안 비축해 놓은 막대한 물자와 대포를 고스란히 독-오 동맹군에게 넘겨줘야만 했. 이것은 독-오 동맹군의 예측조차 뛰어넘은 놀라운 성과였고 이탈리아로서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였. 이탈리아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카오도르를 경질하였고 대신하여 아르만도 디아츠가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이제는 그동안 독립작전의 정책을 포기하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전쟁의 많은 부분을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병력 지원으로 재정비를 마친 이탈리아는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공세를 겨우 막아내게 된다.

중동 전선

 

영국은 페르시아만의 석유 이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AD 191411월 페르시아만에 인접한 이라크 남부의 항구인 바스라를 점령하고 이듬해 북진하여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관문인 알-쿠트를 점령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군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알-쿠트를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AD 1916429일 영국군이 알-쿠트를 내어주고 말았다. 이에 8월 새롭게 영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프레드릭 스탠리 모드가 공격을 재개하여 AD 19172월 알-쿠트를 탈환하고 9월 마침내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이렇게 하여 메소포타미아 지방(현재의 이라크)이 영국의 영향 아래로 들어갔다.

AD 19176월 이집트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에드먼드 앨런비가 AD 191710월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11월 가자를 점령하고 12월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9월 팔레스타인 북부와 시리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앨런비는 919일 벌어진 메기도 전투에서 책략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서쪽으로 유인한 뒤 공군의 지원 속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오스만 제국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이튿날 팔레스타인 북부의 아풀라, 베트셰안, 나자렛을 모두 점령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30일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함락시키면서 팔레스타인 일대도 영국의 세력 아래에 편입되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군은 영국에서 파견한 로렌스와 후사인 이븐 알리의 세번째 아들인 파이살의 지휘 아래 게릴라전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을 후방에서 괴롭히고 있었는데 AD 191776일 홍해 연안의 아카바를 장악한 뒤 앨런비의 팔레스타인 진격에 참여하였다. 아랍군은 영국군보다 하루 뒤에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였고 후세인-맥마흔 협정에 따라 파이살이 시리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AD 1920724일 마이세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면서 시리아는 프랑스의 세력으로 들어가고 파이살은 망명을 떠나는 처지가 된다.

 

AD 1918년 전황

독일의 루덴도르프 공세

루덴도르프의 마지막 도박

 

몇 달이면 끝날 줄 날고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이 4년이 넘게 계속되고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대표되는 절망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막대한 인명과 물자가 동원되는 소모전이 이어지면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만 집중하는 총력전 양상이 지속되었다. 생산되는 식량은 모두 전장으로 보내졌고 물자 역시 계속 징발되고 있었으며 동원된 장정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줄을 몰랐기 때문에

이제 양 측 모두 국가 재정 자체가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특히 독일은 영국에게 해상봉쇄당하면서 심각한 물자부족이 시달렸기 때문에 효율적인 물자관리를 위한 전시동원체제가 이루어지면서 국가 전체가 전쟁에만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권력이 군부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고 특히 참모차장인 루덴도르프가 형식상 군부 2인자였지만 사실상은 참모총장인 힌덴부르크를 제치고 군부 최고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루덴도르프는 총리인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가 평화협상을 주장하자 AD 19177월 사임을 강요하고 후임 총리를 자신의 의사대로 지명하였으며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는 모든 주요 사안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등 군사 독재자가 되어 독일을 정치적으로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빌헬름 2(),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모습

 

 

그렇지만 독일의 경제사정은 점점 한계에 직면했고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이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영-프 연합국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숨통이 열린 상태였다. 하지만 독일과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모두 자국의 전선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일은 더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다만 러시아AD 1917년에 일어난 2차례 혁명으로 동부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이 명백해졌고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카포레토 전투를 통해 이탈리아 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기 때문에 이제는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또한 카포레토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인 후티어 전술이 참호선 돌파에 매우 효과적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악몽같은 참호선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이에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미군이 본격적으로 유럽전장에 등장하기 이전에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여 영-프 연합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유리한 입장에서 휴전을 맺는 것이 유일하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임을 깨닫고 AD 1918년 봄 미하일 작전(Operation Michael)이라고 불리는 대공세를 계획하였다. 이른바 '루덴도르프 공세' 혹은 'AD 1918년 춘계공세'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공격의 시작이었다.

 

미하일 작전

 

이렇게 독일이 마지막 남은 역량을 총동원한 공세를 계획하고 있을 때 영-프 연합군은 여전히 지휘권이 분열되어 있는 문제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참호선을 분담하여 영국 원정군이 벨기에 군과 함께 플랑드르 지역을 맡고 있었고 프랑스 군이 샹파뉴 지역을 담당한 상태였다. 비록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인 헤이그와 프랑스군 총사령관 페탱 사이에 협조협정이 맺어져 있었지만 만일 독일군이 연합군의 허술한 연계지점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경우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있는 상황이었다. 독일군이 노린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AD 1918321일 새벽 루덴도르프는 뷜로우의 제17군을 주공으로 게오르그 폰 데어 마르비츠의

2군과 후티어의 제18군을 조공으로 하여 총 74개 사단의 24여만명에게 영국의 담당지역 중 프랑스의 담당지역과 인접한 솜 강 북쪽의 아라스와 라페르 사이를 돌파하도록 하는 '미하일 작전'을 시작하였다. 루덴도르프의 의도는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 군을 둘로 분단시켜 영국 원정군을 고립시킨 후 대서양으로 밀어내어 먼저 영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후티어 전술에 따라 단시간의 집중포격 후 독가스를 살포하여 영국군을 무력화시킨후 돌격대가 선봉에 서서 철조망을 제거하고 영국의 참호선에 구멍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후티어 전술이 큰 효과를 발휘하여 영국의 참호선 중 제1선과 제2선이 삽시간에 무너졌기 때문에 이틀날이 되자 이 지역을 방어하던 영국의 제5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인 헤이그가 다급하게 프랑스 총사령관 페탱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였지만 프랑스가 담당하고 있던 샹파뉴 일대가 뚫리면 파리가 위험해진다는 이유로 지원요청을 거절하였다. 지휘권이 단일화되지 않음에 따라 각국에서는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326일 영국 총리인 로이드 조지와 프랑스 총리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급히 회동하여 군지휘권을 단일화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연합군의 지휘부를 하나로 통일하는 데 합의하면서 재정비에 성공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전진을 아미앵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독일로서는 약 60km를 전진하여 제1세계대전 개전이래 가장 많은 전진을 한 것이었으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당초의 목적달성은 실패하였 

미하일 작전을 통해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 현황

 

게오르게테 작전과 블뤼허-요르크 작전

 

3월에 이루어진 미하일 작전에서 독일군이 상당히 전진하자 루덴도르프는 플랑드르의 이프르를 점령하여 영국 원정군을 전쟁에서 이탈시킬 목적으로 미하일 작전과 비슷한 성격의 게오르게테 작전

(Operation Georgette)이라고 불리는 2차 공세를 계획하였다. 다만 이번에는 프랑스군이 영국 원정군을 지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막기 위하여 327일 제1군과 제7군에게 프랑스가 담당하고 있던 샹파뉴 지역의 앤강을 돌파하도록 하는 새로운 블뤼허-요르크 작전(Operation Blucher-Yorck)을 먼저 시작하였고 이어서 플랑드르에서는 47일 독일의 제6군이 리스 강 일대를 공격하면서 게오르게테 작전이 시작되었다.

게오르게테 작전과 블뤼허-요르크 작전 모두 어느정도 성과를 거둬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 군의 참호선을 밀어내면서 전진하였고 특히 5월초 영-프 연합군 초대 대원수로 임명된 프랑스 참모총장 페르디낭 포슈가 영국 원정군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군을 앤강이 참호선에서 차출하면서 샹파뉴를 공격하던 독일군이 5월말까지 파리로부터 불과 56km 떨어진 지점까지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군이 완전히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동안 독일은 총 8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플랑드르에서도 참호선을 뒤로 물러나게만 했을 뿐 영국 원정군을 전쟁에서 이탈시키겠다는 당초의 계획은 실패했다. 무엇보다 후티어 전술에서 가장 필요한 정예 돌격대도 전투를 거듭하면서 상당수 손실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도 더이상의 전진은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게오르게테 작전과 블뤼허-요르크 작전으로 돌출된 2개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6월 메츠에서 펼쳐진 그나이제나우 작전이 3일만에 프랑스 군의 역습을 받아 실패로 돌아간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미군이 유럽 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루덴도르프는 최후의 힘을 쥐어짠 최종 공세를 다시 펼치기로 마음먹는다.

2차 마른전투

 

715일 독일 군이 마른 강을 돌파하고자 랭스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젠 연합군도 독

일의 후티어 전술을 막아내기 위해 기존의 선형방어를 포기하고 대신하여 종심방어전술을 도입한 상태였다. 종심방어전술은 전방에 최소한의 병력을 배치하는 대신에 주 참호진지를 후방에 배치한 후 예비대를 주 참호진지 바로 뒤에 배치하여 적이 전방의 참호진지를 돌파하더라도 후방의 주 참호진지에서 막아내고 예비대를 이용하여 오히려 역습을 가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더구나 독일군은 그동안의 루덴도르프 공세로 인해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소모한 상태였지만 연합군은 미군 8개사단이 새롭게 증원된 상태였고 346대의 전차까지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호기롭게 마른 강을 건넜지만 10km도 전진하지 못했고 오히려 47km에 달하는 전 전선에서 연합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718일 독일군은 14여만명의 사상자와 3만여명의 포로를 남긴채 마른 강을 다시 건너서 후퇴하면서 독일의 루덴도르프 공세는 AD 1914년과 마찬가지로 마른 강에서 저지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연합군의 역습을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2차 마른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해낸 프랑스군의 모습

 

연합군의 반격, 백일 공세

 

2차 마른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한 뒤 포슈는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하였다. 미군의 증원부대가 계속해서 도착하고 있었고 영국 원정군 역시 팔레스타인과 이탈리아에 투입되었던 병력이 돌아오면서 대대적으로 보강된 상태였다. 반격지점은 아미앵 동쪽의 솜 강으로 선택되었다. AD 1916년 막대한 병력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솜 강 전투가 벌어진 곳의 남서쪽 지역으로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 군 사이에 위치하여 합류가 용이했고 전차가 기동하기에 적합한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AD 191888일 수백대의 전차를 앞세우면서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공격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연합군은 하루 만에 24km를 전진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루덴도르프가 이 날을 "독일군의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독일군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후 연합군의 공세는 다소 둔화되었지만 810일까지 19km를 더 전진했고 독일군은 루덴도르프 공세로 획득한 영토를 모두 포기하고 힌덴부르크 선으로 다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군의 백일공세로 변경된 독일군 참호선의 모습

 

아미앵 전투에서 고무적인 전과를 거둔 연합군이었지만 보급을 위해서 잠시 진격을 멈춘 후 9월말 대대적인 공격을 재개하여 독일의 힌덴부르크 선의 동쪽과 서쪽을 붕괴시켰다. 힌덴부르크 선마저 무너지자 독일로서는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힘을 사실상 상실하고 말았고 930일 동맹국 중 불가리아가 가장 먼저 항복하면서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루덴도르프는 망연자실하여 신경쇠약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빌헬름 2세에게 더이상의 전쟁이 어려우므로 평화협상에 나서도록 요청하였. 그러나 평화협상 요청을 받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제군주제 국가와는 협상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에 104일 독일의 제국의회가 해산되고 자유주의자인 막스 폰 바덴 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민간 내각이 구성되어 입헌군주제를 선언하였다. 루덴도르프는 1026일 사임하였고 새롭게 구성된 바덴 내각은 미국과의 휴전교섭에 들어갔다.

 

총력전

 

중세 시절 전쟁은 봉건영주들끼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쟁터에 휩쓸리지만 않으면 일반 민간인들

은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AD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각국에서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군대의 병사 숫자가 백만이 넘어가면서 이들에 대한 식량과 물자 공급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모병제를 유지하는 국가도 많았고 군수물자 조달 역시 현지 약탈에 의존하

는 형태가 더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징병제를

도입한 프로이센이 상비군을 보유한 프랑스에게 완승을 거두자 유럽 군사체제는 징병제가 일반화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동원된 병력 규모가 수백만명이 되면서 이제 전쟁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모두 전쟁에 집중하는 총력전 양상이 되었다.

총력전의 개념은 프로이센의 전쟁학자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저서인 "전쟁론"에서 이론적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가장 빨리 끝내는 방법으로 국가 내 모든 전력을 총동

원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의 총력전의 양상은 이미 미국 남북전쟁에서 등장하였

. 윌리엄 테쿰셰 셔먼은 유명한 '바다로의 행군'을 통해서 남부의 농장 및 시설을 파괴하여 전쟁

의지 자체를 꺾어버렸는데 이는 전선의 상대편 병력을 물리치는 것 이외에 후방의 군수산업시설을

파괴한다는 점에는 총력전의 개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미국이 군사기술이 부족하여

전쟁이 단기간에 결판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폄하하였을 뿐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 장기화되고 참호전으로 인하여 막대한 사상자와 물자가 소모되면서 국가의 모든 물자를 군수산

업에 몰아넣는 전시경제체제가 가동되고 나서야 비로소 총력전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총력전이라는 말 자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을 지휘한 루덴도르프가 AD 1935년 자신의 저

서인 "총력전론"을 통해서 처음 사용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국 모두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연합국에 가담한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한 피폐함을 견디지 못한 혁명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영국에게 해상봉쇄를 당하면서 해외에서 물자수입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점

령지의 수탈 물자만으로는 점점 한계를 보인 반면에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한 경제력을 갖춘 미국이

연합국을 지원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독일 내부에서는 전투 자체에서는 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전쟁을 다시 벌인다면 기동전을

통한 단기결전으로 다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헛된 기대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오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종전

독일 11월 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비록 독일이 휴전협상에 나섰으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독일에게 휴전이 아닌 항복을 요구하면서

전쟁은 계속되었고 10월말 독일의 해군 지도부에서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각각 1030일과 113일 에 항복한 상황에서 독일의 패전이 시간문제였기 때문에 더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수병들이 킬 군항에서 113일 봉기를 일으켰다. 이미 독일 자체가 한계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병들의 봉기는 곧바로 노동자의 봉기로 이어져 삽시간에 독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119일 빌헬름 2세가 퇴위를 결정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독일의 제정이 무너졌고 바덴 총리도 사임하면서 대신하여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이 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킬 항구의 봉기모습

 

에베르트는 1111일 그동안 독일이 점령한 모든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군대를 라인강 서안으로 철수시키며 라인 지방의 요새를 철거하는 내용의 휴전협정에 조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4년동안 32백만명의 사상자(전사자 9백만명, 부상자 23백만명)의 막대한 희생자를 낳았던 제1차 세계대전이 마침내 종료되었다. 이후 독일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스파르타쿠스단 때문에 정치불안이 계속되었으나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던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여 처형하여 과격 혁명을 탄압하였다. 대신하여 AD 1919119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의회를 구성한 후 새로운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고 AD 1919811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파리강화회의와 종전협정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전후처리를 두고 AD 1919118일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국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이탈리아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이 참석했으며 일본도 승전국의 자격으로 제1전권대사 사이온지 킨모치를 파견하였다. 이 회의에서 AD 191818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14개 조항'을 바탕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사항이 추가된 형태로 강화내용이 결정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서명모습

우선 독일과 AD 1919628일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

었다. 프랑스로서는 AD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하고 독일이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통일된 독일제국의 성립을 선포된 것에 대한 치욕을 만회한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상실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획득한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게 반환하였으며 벨기에와 덴마크, 새롭게 독립한 폴란드에게 상당한 영토를 제공해야 했다. 독일은 면적13%, 인구는 10%에 해당하는 영토상실 이외에도 육군을 10만명, 군함은 10만톤 이내로 제한받았고 참모본부와 의무병역제도가 폐지되었으며 공군과 잠수함의 보유는 금지되었다. 또한 독일은 1,320억 마르크라는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다음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AD 1919910일 프랑스의 생제르맹앙레에서 생제르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4개 조항에서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해체가 결정되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분리하여 신생 독립국인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에 편입되어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 갈라치아-로드메니아는 신생 폴란드에게 반환되었고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에 넘겨졌으며 티롤과 트렌티노는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서로 분리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황제 카를 1세가 퇴위되면서 군주제가 폐지되고 오스트리아 제1공화 이 수립되었으며 헝가리는 해군제독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이 되어 정권을 잡으면서 왕국이

면서도 국왕 자리는 공석인 상태가 되었다. 다만 민족자결주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할 경우에는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도록 하여 사실상 금지하였다. 그 밖에 병력은 3만명 이하로 제한되었고 해군은 해체하기로 하였으며 항공무기 보유도 인정되지 않았다.

세번째로 불가리아와 AD 19191127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뇌이쉬르센에서 뇌이 조약이 체결되었다. 뇌이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는 점령한 새르비아 영토를 모두 반환하고 동부 마케도니아까지 세르비아에게 넘겨야 했으며 남부 도브루자 지방을 루마니아에게, 서브 트라키아를 그리스에게 각각 양도하였다. 그리고 병력은 2만명으로 감축하고 45,000만 달러의 전쟁배상금이 부과되었으나 나중에 4분의 3이 면제되었다. 마지막으로 오스만 제국과 AD 19181030일 체결된 무드로스 정전 협정을 통해 연합국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와 오스만 제국 내 발생할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임의로 영토를 점령할 권리를 얻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사실상 해체하고 연합국이 영토를 차지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곳곳에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고 마침내 무스타파 케말이 AD 19195월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AD 1923년 로잔 조약을 체결하여 현재의 터키 영토를 확정짓는데 성공한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동유럽의 많은 영토를 포기한 채 전쟁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비록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브레스트-토프스크 조약의 파기가 선언되었지만 연합국은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러시아 내부에서도 보수파의 반동으로 적백내전이 일어나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유럽 영토였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란드가 모두 독립을 선언하며 이탈하였다. 그 밖에 단치히(그단인스크)가 자유시로 선포되고 동아시아에서는 독일의 중국과 적도 이북의 태영양 식민지가 일본에게 넘겨졌으며, 아프리카에서는 동부 및 남서부는 영국령으로, 콩고 이북의 서아프리카 지역은 프랑스령으로 각각 재편되었다. 또한 미국의 윌슨대통령의 주창으로 전쟁방지와 세계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결성된 국제연맹이 결성되었으나 막상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하면서 반쪽짜리 국제회의기구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럽에는 4년동안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양측 모두 합쳐서 총 약 31백만명의 사상자(9백만명, 부상 22백만명)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후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전쟁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독일이 지불해야 하는 막대한 전쟁보상금이 독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갈 만큼 가혹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하게 일어났다. 그 중에서 독일은 자국영토를 전혀 점령당하지 않은 채 전쟁이 종료되었기 때문에 패전을 인정못하는 여론이 존재하였는데 특히 독일 군대는 전투에서 지지않았으나 유대인과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의 병역기피와 파업선동, 간첩행위 때문에 졌다는 배후중상설(등 뒤를 찌른 칼 때문에 패배하였다는 뜻)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독일 권력을 장악하는 빌미가 된다. 또한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실에 비해 만족할 만한 영토이익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베니토 무솔로니의 파시스트 정당이 집권하는 배경이 된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은 전후처리가 매끄럽지 못하고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등장시키면서 20년뒤 세계대전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고 만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변경된 유럽의 영토현황

1차 세계대전 종료후 중동의 상황

영국의 모순된 외교정책과 영국-프랑스의 분할통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후방을 교란시키고자 고등판무관인 헨리 맥마흔이 메카의 샤리프인 후세인

빈 알리와 AD 19141월부터 AD 19163월까지 왕복 10회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며 아랍인이

봉기하는 경우 영국이 아랍국가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를 '후세인-맥마흔 서

'으로 부른다. 그러나 영국은 AD 1916516일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분할

하는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를 조약 당사자인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의

이름을 따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라고 부른다. 이 협정을 통해 영국은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

)와 팔레스타인(현재의 이스라엘, 요르단),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각각의 세력범위로 하

기로 하면서 후세인-맥마흔 서한과 모순이 발생했다.

사이크스 피코 협정은 프랑스와 영국의 분할점령 이외에 추가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

하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쪽지방을 아르메니아를 통치하고 있던 러시아에게 내어주고 이스탄불을

포함한 흑해 동남 연안, 보스포루스 해협 , 다르다넬스 해협 역시 러시아의 관할 하에 두기로 하였

는데 AD 191710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고 그러자 새롭게 수립된 볼셰비키 정부

가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의 내용을 폭로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아랍인들이 영국의 이중외교에

분노를 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유럽과 미국의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유대인의

지원을 얻기 위해 AD 191711월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사실상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내용의 밸푸어 선언까지 이어지면서 중동에 대한 영국의 모순된 외교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비록 아랍인들은 영국군과 함께 시리아를 점령한 후 후세인의 3남인 파이살을 왕으로 옹립하였으

나 프랑스군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사이크스 피코 협정에 따라 시리아로 진격하여 AD 19207

24일 마이세른 전투에서 파이살의 아랍군을 대파하고 시리아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AD 1919

72일 성립된 파이살의 시리아 왕국은 17개월만에 붕괴되었고 이후 시리아는 레바논과 함

께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이라크 왕국과 트란스요르단 왕국의 성립,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

 

파이살이 시리아에서 쫓겨난 뒤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영국에 대한 아랍인의 여론이 매우 악화

되었다. 이에 영국은 아랍인을 회유하기 위해 AD 19213월 카이로 회의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파

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고 파이살이 이를 수락하면서 8월 공식적으로 이라크

의 왕인 파이살 1세가 되었다. 비록 이라크는 쿠르드족이 많은 북부지역과 시아파 중심의 남부가

수니파 중심으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으나 파이살 1세는 이라크

에서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의 씨족인 하심 가문 출신이라는 권위를

바탕으로 이라크의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파이살 1세의 즉위 이후에도 영국은 국제연

맹의 위임통치라는 방식으로 이라크에 대한 간섭을 멈추지 않았고 이라크의 공식적인 독립은 AD

193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파이살 1세의 즉위와 함께 영국의 위임통치령 중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처리가 마무리되었지만 영

국이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모두 팔레스타인에서의 독립국가 수립의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에 팔레

스타인의 처리는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은 요르단 강을 중심으로 그 동쪽을 트란스요르

단이라는 이름으로 분리시킨 뒤 후세인 이븐 알리의 차남이자 파이살 1세의 형제인 압둘라 이븐 후

세인을 국왕으로 하는 트란스요르단 왕국을 AD 19235월 성립시켰다. 이후 트란스요르단 역시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AD 1934년 독립이 추진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지연

되었다가 AD 19465월 공식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이후 트란스요르단은 AD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을 통해 요르단강의 서안까지 점령한 이후에는 AD 1949년 국명을 요르단 왕국으로 변경하게

된다.

영국의 남은 위임통치령인 요르단강 서쪽의 팔레스타인 지방은 벨푸어 선언에 따라 유대인들이 자

신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AD 70년 로마제국에게 예루살렘을 점령

당한 이후에도 자신의 나라를 되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AD 19세기 후반에는 팔레스타인에 유

대인의 국가를 되살리자는 시오니즘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밸푸어 선언 이후에는 대규모 유대인들

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여 AD 19253월 공식집계에 따르면 108천명이 되었고

AD 1933년에는 그 숫자가 238천명으로 늘어나 팔레스타인 전체인구의 20%를 차지하기에 이른

. 이러한 유대인의 계속된 유입이 아랍인을 자극하여 AD 1936년부터 AD 1939년까지 여러차례

아랍인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분쟁지역으로 남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탄

당초 메카의 샤리프인 하심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가 영국의 요청에 따라 메카를 중심으로 헤자즈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아랍반란이 일으킨 것은 중동에 아랍인의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었다.

비록 영국의 이중적인 외교정책에 의해 시리아는 상실했지만 이라크와 트랜스요르단의 왕으로 각

각 후세인의 차남인 압둘라와 삼남인 파이살이 즉위하면서 아라비아 반도, 이라크 지방, 트랜스요

르단 지방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후세인의 염원과 달리 영국은 중동에 아랍의 거대한 통일국가가 성립되기를 원치 않았다. 더욱이

오스만 제국을 대신하여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칼리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후세인이 AD

1924년 스스로 칼리프임을 선언하였으나 많은 이슬람 유력자들이 이를 참칭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후세인은 위기에 몰렸다. 그 사이 아라비아 반도 내륙에서 영국의 또다른 비호 세력인 네지드 왕국

의 이븐 사우드가 헤자즈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븐 사우드는 AD 1925년 메카를 점령했고

이듬해에는 메디나마저 빼앗으며 헤자즈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렇게 아라비아 반도를 통합한 이븐

사우드는 AD 1931년 네지드-헤자드 연합왕국을 성립시킨 후 AD 1932년에 왕국의 명칭을 사우디

아라비아 욍국으로 바꾼 후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참고] 다음 백과사전 러시아 혁명

[참고] 다음 백과사전 6월공세

[참고] Wikipedia Nivelle Offensive

[참고] Wikipedia Battle of Passchendaele

[참고] Wikipedia Battle of Cambrai (1917)

[참고] 위키백과 카포레토 전투

[참고] Wikipedia Spring Offensive

[참고] Wikipedia Hundred Days' Offensive

[참고] 위키백과 독일 11월 혁명

[참고] 위키백과 베르샤유 조약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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