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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1차 세계대전(上) 전쟁의 시작,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대립

출처: http://winlee96.blog.me/220108941836


전쟁의 배경


영국 vs 독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4국동맹으로 힘의 균형 을 이루었고 나중에 프랑스까지 추가로 가입하여 5국동맹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중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서유럽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중세적인 낡은 전제군주제와 농노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대에 뒤쳐지고 말았다. 반면에 프로이센은 빌헬름 1 세 시절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참모장 헬 무트 폰 몰트케의 도움을 받아 군사강국으로 발돋움 한 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차례로 물리치고 독일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러시아의 쇠락과 독일의 부상이 맛물리면서 유럽은 점차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통일된 독일 제국은 영국과 같은 방대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산업 발달과 인구증가를 경험하며 경제면에서 유럽 최고였던 영국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AD 1888년 독일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성장한 독일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영국을 긴장시켰다.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이집트의 카이로, 인도의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을 오랫동안 추진하였고 특히 인도 식민지와의 교통로 확보를 무엇보다 중 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대외팽챙 정책을 펼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해협(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좁은 해협)으로부터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까지 철도를 부설하는 이른바 '3B정책'(베 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을 추진 하였고 이어서 바그다드로부터 페르시아만까지의 추가적인 철도연결이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자신의 인도 식민지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더욱이 독일이 모로코의 프랑스 식민지화를 반대하며 2번의 모로코 사태(AD 1905년, AD 1911년)를 일으켰으나 영국의 프랑스 지지에 한발 물러나면서 독일과 영국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경제력에서 라이벌이된 영국과 독일은 군비경쟁에도 나서게 된다. 먼저 AD 1905년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본함대에게 궤멸당하면서 해전이 장거리 포격전으로 변하게 된 것을 깨달은 영국은 새로운 개념의 군함 건조에 나섰다. 그 전까지의 군함은 증기기관 철갑선이 등장한 이후 12인치 이상의 대구경포, 8~10인치의 중구경포, 6인치 이하의 소구경포를 혼합하여 탑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력과 사거리는 월등하지만 연사속도가 느린 12인치 이상의 대구경 포가 주포의 역할을 맡고 적당한 위력과 사거리, 연사속도를 지닌 8~10인치의 중구경의 보조포를 주포의 2배가량 탑재하며, 위력과 사거리는 부족하지만 연사속도가 빠른 6인치 이하의 소구경 부포를 다수 탑재하여 위력과 연사속도를 서로 보완시켰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해전이 장거리 포격전으로 개념으로 바뀌면서 주포를 제외한 나머지 함포들은 모두 활용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모든 보조포와 부포를 과감하게 없애고 오로지 대구경 주포만 탑재하는 전함인 '드레드노트 (Dreadnought)'를 만들어 냈다. 드레드노 트는 그 당시까지 존재하던 모든 군함을 2배 이상의 화력으로 압도하며 모두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렇게 드레도노트가 새로운 군함의 기준으 로 자리잡자 다른 나라들도 서둘러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특히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일명 '함대법'을 제정하여 대량의 드레드노트급 군함 건조를 명령하였다. 영국도 이에 지지않기 위해 맞서서 군함건조 경쟁에 나서면서 유럽은 '거함거포주의 건함경쟁 시대' 에 돌입하게 된다.

거함거포주의의 기준이 된 영국 HMS 드레드노트(Dreadnought)의 모습

프랑스 vs 독일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자국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된 독일제국의 선포를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그리고 패전의 대가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상실함에 따라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커졌으나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의해 AD 1881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제국, 러시아의 삼제동맹이 결성되었고 AD 1882년에는 다시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이탈리아 간의 삼국동맹을 구축하면서 외교적으로도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AD 1887년 발칸반도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삼제동맹이 붕괴되었고 AD 1890년 비스마르크마저 실각하면서 프랑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

프랑스는 러시아에게 접근하여 AD 1891년 느슨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이것을 AD 1894년 군사동맹으로 발전시키면서 외교고립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러시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큰 도움이 되지못했고 이에 AD 1898년 프랑스의 외무장관이 된 테오필 델카세는 러시아와 우호관계 를 유지하면서 영국과도 동맹관계를 새롭게 구축할 필요를 느꼈다. 오랫동안 영국은 유럽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에 식민지 확대에만 주력하는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에서의 보어전쟁(AD 1899년 ~ AD 1902년)에서 네덜란드계 이주민인 보어인들의 게릴라전을 봉쇄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을 강제수용소에 수용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비인도적인 정책 때문에 국제 사회에 비난을 받게되자 고립외교에서 탈피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델카세는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인 폴 캉봉을 통해서 협상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AD 1904년 4월 이집트를 영국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에 동의하는 대신에 모로코를 프랑스가 차지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영국과의 외교조약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관계 구축의 위력은 모로코위기에서 증명되었다. 프랑스가 모로코를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독일의 빌헬름 2세가 AD 1905년 3월 31일 모로코의 탕헤르 항구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영토 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여 제1차 모로코 위기를 일으켰으나 영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가 모로코의 치안담당 권리를 확보하면서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후 AD 1911년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가 출병하자 독일 역시 자국민 보호를 내세워 군함을 파견하는 제2차 모로코 위기가 발발하였으나 이번에도 역시 영국이 프랑스에 대한 지지를 강력하게 표명하면서 결국 독일은 프랑스로부터 콩고의 북부지방을 식민지로 넘겨받는 조건으로 모로코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했다.

2번에 걸친 모로코 위기를 통해서 독일은 영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면서 오히려 영국이 그동안의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버리고 프랑스와 함께 독일에게 대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AD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협정을 맺으면서 독일을 대항하기 위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의 협력체제인 '삼국협상'이 완성되었다. 이에 독일에서도 5년기한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및 이탈리아과의 삼국동맹을 AD 1907년과 AD 1912년 2차례 갱신하면서 대응하였기 때문에 이제 유럽은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으로 나뉘어 대결하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방아쇠는 발칸반도(자세한 내용은  http://cafe.daum.net/korjaphistory/Spjh/293 )에서 당겨졌다.

유럽의 삼국협상(녹색)과 삼국동맹(갈색)의 모습

전쟁의 시작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 분쟁


오스만 제국이 쇠락해지면서 러시아가 동방정교회 보호와 범슬라브주의를 명분으로 지속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며 발칸반도로 진출하였다. 비록 크림전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패배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그리스,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를 독립시키며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독일연방에서 탈퇴당한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의 이중제국 체제로 변경한 뒤 독일지역 대신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노리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인접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까지 병합하는 보스니아의 위기를 일으키자 러일전쟁의 패배 후유증에 시달리던 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승인했지만 여전히 긴장감은 팽배하였다. 또한 세르비아 역시 당초부터 보스니아 병합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보스니아를 차지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AD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황태자인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 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인 호엔베르크 소피아가 군대의 사열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이에 남슬라브 인의 통일을 위해 보스니아가 세르비아로 합쳐지는 것을 주장하던 민족주의 단체인 '젊은 보스니아' 소속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비롯한 젊은 대학생들은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을 준비했다. 황태자 부부는 차량 이동중에 당한 첫번째 폭탄테러는 피했으나 테러현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골목길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고 헤메는 도중에 숨어있던 프린치프에게 총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를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부른다.

암살 직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모습



선전포고


사실 사라예보 사건의 현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영토로 이미 편입된 보스니아였고 범인도 세르비아 계열이긴 했으나 국적은 엄연히 보스니아였다. 하지만 그동안 보스니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세르비아의 은밀한 지원에 불만이 많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는 사라예보 사건을 전쟁의 빌미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는 우선 동맹국인 독일에게 협조요청을 하였고 독일의 빌헬름 2세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세르비아에게 반오스트리아 교육, 단체, 관료, 출판물에 대한 제재조치와 함께 사라예보 사건 재판을 위해 오스트리아 관리의 세르비아 입국 허용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며 48 시간 안으로 응답을 요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뒤에 독일이 있음을 잘 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에게 수용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에 세르비아 측에서는 반오스트리아 교육, 단체, 관료, 출판물에 대한 제재조치는 수용이 가능하지만 오스트리아 관리의 입국 허용에 대해서는 협상이 필요하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쟁을 일으키기를 원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었던 만큼 일방적으로 세르비아와 외교단절을 선언하고 7 월 28일 세르 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AD 1914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세르비아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러시아가 즉각 총동원령을 선포하면서 사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에 독일에서는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러시아가 묵살하자 독일 역시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다만 러시아가 독일과 전쟁상황에 돌입하자 이번에는 프랑스가 러시아와의 동맹에 따라 총동원령을 선포하였지만 영국 만은 프랑스 및 러시아와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은 벨기에 마저 침공하자 영국 역시 참지못하고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만다. 이렇게하여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면서 재앙과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AD 1914년 전황

 

독일과 프랑스의 전략

독일의 슐리펜 계획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전쟁계획인 이른바 '슐리펜 계획'을 진행시켰다. 당초 독일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리 이후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위해 노력했던 비스마르크가 실각하면서 러시아와의 동맹 갱신에 실패하고 오히려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독일은 유사시 프랑스와 러시아를 양면에서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강요받게 되자 독일의 참모총장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전시 작전계획의 수립에 착수하였다. 슐리펜은 낙후된 철도시설과 전신망에 따라 러시아의 병력동원에 소요되는 기간을 6주정도로 예상했고 이에따라 우선 프랑스에게 병력을 집중하여 6주 안에 항복을 받아낸 후 독일의 발달된 철도망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슐리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단기간에 프랑스를 제압하는 방안으로 프랑스가 절실하게 회복을 노리는 알자스-로렌 지방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사이에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네덜란드를 통해 프랑스 군의 배후로 돌아들어가며 포위망을 구축하는 작전을 세웠는데 이럴 경우 슐리펜은 1달 반 만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는 것이 가능한 걸로 계산했다.

슐리펜 계획에서는 특히 벨기에를 통해 우회하여[마지노선을 피하기 위해서] 프랑스로 진격하는 우익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참모총장인 헬무트 폰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네덜란드를 통한 진군계획을 삭제하였기 때문에 슐리펜의 최초계획보다 우익이 약화되었다. 참고로 이때의 몰트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의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의 동명의 조카로 역사적으 로는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조카를 소(小)몰트케로 부르기도 한다. 몰트케는 서부전선의 7 개 야전군 중 2개 야전군만 알자스-로렌 방면에 투입하고 나머지 5개 야전군은 메츠-티온빌 지역을 축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서진하거나 남하하여 벨기에 혹은 프랑스로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그중 2개 야전군에게 벨기에를 돌파하는 임무가 맡겼다. 그동안 러시아와의 동부전선은 1개 야전군이 방어를 맡아야 했다. 이렇게 시작된 슐리펜 계획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8월 1일 독일군이 국경을 넘을 때 프랑스의 야전군 대부분이 독일의 예상대로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 모습

프랑스의 작전계획 XVII


독일에 맞서는 프랑스의 전략은 '작전계획 XVII(Plan XVII)'이라고 불렀다. 작전계획 XVII 은 AD 1913 년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와 조제프 조프르에 의해서 고안되었는데 주요 목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상실한 알자스-로렌 지방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프랑스 육군 대학 교장인 페르디낭 포슈에 의해 주창된 이른바 '엘랑 비탈' 교리로 불리는 사기론이 널리 퍼져 있었다. 본래 엘랑 비탈이라는 말은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이 사용한 말로 '생명의 비약'으로 번역되는데 군사교리에서는 병사들의 '전투의지 '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전투에서 보병의 총검돌격만 지나치게 고집하여 기관총 등의 진보된 화력장비의 위력을 경시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엘랑비탈 교리에 따른 프랑스 병사가 독일 병사보다 더 잘 싸운다는 근거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작전계획 XVII을 세웠다. 작전계획 XVII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전쟁이 선포되면 알자스-로렌 방면의 메츠-티옹빌 요새에 프랑스의 4개 야전군을 배치하여 프랑스 우익이 알자스와 로렌을 공격하는 동안 좌익은 아르덴숲의 남쪽을 경유하여 독일로 진격하거나 룩셈부르크 및 벨기에를 통해서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독일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작전계획 XVII의 맹점은 영국과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조약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독일이 벨기에를 통해서 프랑스를 침공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알자스- 로렌 방면의 독일군 방어선이 약화되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더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작전계획 XVII은 독일의 슐리펜 계획의 의도와 정확하게 맞물리면서 개전 초기에 프랑스를 위기로 몰아가게 된다.

프랑스의 작전계획 XVII의 모습

서부전선 상황

벨기에의 리에주 공략


AD 1914년 8월 1일 독일의 16사단이 룩셈부르크로 진격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시작되었다 .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점령한 독일은 8월 3일 벨기에 정부에게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해 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벨기에 측에서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몰트케는 각 군단으로부터 6개 보병여단과 2개 기병사단을 차출하여 임시 편성한 뮤즈군을 오토 폰 엠미흐의 지휘하에 8월 4일 벨기에 국경요새인 리에주로 진격시켰다. 리에주는 당시 인구 16만4천 명의 산업도시이자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독일군이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중요한 거점이었으므로 몰트케는 8월 10일까지 점령을 완료할 것을 요구했다.

8월 4일 리에주 요새 근처의 뮤즈 강을 건넌 독일의 뮤즈군은 8월 5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비록 리에주는 AD 1880년대에 12개의 보루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구성된 강력한 방어요새로 설계되었으나 이미 당시에는 구식요새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손쉽게 점령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뮤즈군의 돌격은 리에주 요새의 보루 곳곳에서 쏟아진 기관총 공격에 실패하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악몽처럼 펼쳐질 기관총 세례에 보병이 무모한 돌격을 반복하게 되는 양상이 시작된 것이었다. 8월 6 일 독일군은 벨기에 군이 기관총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약점을 노렸고 독일 2군 참모장이었으나 제 14보병여단 지휘관의 사망으로 대신 지휘를 맡게 된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제14보병여단을 이끌고 보루와 보루 사이를 돌파하여 리에주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8월 7일 루덴도르프는 리에주 시청 점거에 나섰고 외곽에서는 엠미흐가 후속병력을 속속 보내오면서 8월 8일 리에주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엠미흐는 독일 본국에 리에주 점령이 완료되었다고 보 고했으나 12개의 보루가 여전히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독일군은 210mm 곡사포를 동원하여 보루에 대한 포격에 나섰고 방금 공장에서 출고된 최신형 420mm 곡사포 2문까지 투입하고 나서야 8월 16일에 겨우 리에주의 12 개 보루를 모두 장악할 수 있었다.

리에주 점령이 당초 계획보다 6일이나 지체되면서 슐리펜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비록 독일 병력동원이 8월 14일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리에주에서의 벨기에 군 분전이 실상은 2일 정도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다는 평도 있지만 벨기에 침공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주저하던 영국이 결국 참전을 결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개입은 고려되지 않았던 슐리펜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더욱이 슐레펜 계획상 6주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측했던 러시아의 병력동원이 거의 2주만에 이루어지면서 동부전선에도 차질이 발생했다. 몰트케는 동프로이센을 지키기 위해서 서부전선의 우익에 배치 했던 2 개 사단을 차출하여 동부전선에 보강시키로 결정했다. 이로인해 벨기에 돌파에 많은 힘을 허비한 독일군 우익의 세력이 더욱 약화되고 말았다.

제1차 마른 전투


독일군이 리에주 요새를 함락하였으나 벨기에는 항전 의사를 굽히지 않은 채 또다른 요새인 나무르에서 독일군에게 저항하였고 국왕 알베르 1세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으로 이동하였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 점령은 뒤로 미룬 채 제1군과 제2군을 서둘러 프랑스의 북부로 진입시켰다. 8월 20일 독일 제1군 과 제2군은 벨기에 국경에 배치되었던 프랑스 제5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고 프랑스군이 분전하였으나 독일의 후속부대인 제3군까지 도착하면서 프랑스 제5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초 프랑스 총사령관인 조제프 조프르는 전쟁이 발발하자 작전계획 XVII에 따라 프랑스 제1군과 제2 군을 알자스-로렌 지방에 배치하고 제3군을 아르덴 숲을 통해 독일 국경을 넘도록 했으며 제4군은 예비대로서 제3군을 보좌하게 하고, 제5군은 벨기에를 지원하도록 배치한 상태였다. 독일 군이 벨기에로 진격하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알자스-로렌을 독일군의 주 공격로로 생각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군을 진격시켰다. 그러나 제1군과 제2군의 총검돌격은 알자스-로렌에 배치된 독일 제6 군의 기관총 공격에 격퇴되면서 8월 20일 후퇴하였고, 제3군과 제4군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아르덴 숲에서 독일 제4군과 제5군에게 기습공격을 허용하자 후퇴하여 방어진지 구축에 나선 상태였다. 이 때문에 벨기에 국경을 돌파하여 독일군이 프랑스 영내로 들어섰을 때 이를 막을 병력은 제5군 밖에 없었다. 영국 원정군 4개 군단이 합류하였지만 독일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프랑스의 제5군이 밀려나자 프랑스군 전체가 서둘러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일 제1군과 제2군이 프랑스 영내로 진입에 성공하면서 슐리펜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이자 빌헬름 2세와 몰트케가 룩셈부르크로 지휘본부를 옮겼다. 하지만 사실 독일군의 사정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프랑스 제5군과 영국 원정군이 전략적 후퇴를 감행하면서도 후미에서 포격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고 벨기에 점령이 늦어지면서 보급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슐리펜 계획에 의하면 독일의 우익은 파리를 서쪽으로 우회하여 남쪽 에서 프랑스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매일 40km의 강행군을 거듭하여 병사들 피로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이때 돌연 독일 제1군을 지휘하던 알렉산더 폰 클루크가 파리를 30마일(46km) 앞둔 8월 31 일 프랑스의 제5군을 섬멸하기 위해 파리 북쪽으로 선회하겠다고 몰트케에게 무전을 보냈다. 클루크의 생각은 프랑스 주력군인 조프르의 알자스-로렌 방면의 4개 야전군이 파리로 되돌아오기 전에 독일 제 2군과 함께 프랑스 제5군을 격멸한 후 파리를 점령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클루크의 의견은 슐리펜 계획에 는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이때 몰트케는 허술한 지휘체계와 통신체제 마비로 독일군이 정확하게 어디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야전 지휘관의 의사를 존중하여 승인하고 말았다.

제1차 마른 전투에서의 양측의 배치모습

이렇게 파리가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옮겨갔고 파리 방어는 군사장관인 조제프 갈리에니에게 맡겨졌다. 갈리에니는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동원해 파리방어를 맡고 있던 제6군을 보강하고 영국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공격에 나섰다. 사실 독일군은 제1군이 진격 방향을 갑자기 전환하였기 때문에 오른쪽 측면이 노출된 위험이 있었고 동부전선으로 병력이 차출된 것 때문에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간격이 50km나 떨어져 있는 문제가 있었다. 9 월 5일 독일의 제1군이 마른 강변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프랑스의 제6군 및 영국 원정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클루크는 파리 방어를 맡고 있던 프랑스 제6군이 마른 강변까지 나와 공격을 할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리적인 기습을 허용한 상태였으나 병력 자체는 독일의 제1군이 우세하여 곧바로 반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갈리에니는 파리에서 동원된 병력을 택시까지 동원하여 9월 7일과 8일 2번에 걸쳐 수송하였다. 600 대의 택시가 1대당 5명의 병사를 태우고 전장으로 향한 병력은 6천명에 불과하여 총 30만명이 격돌한 전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를 발휘하여 전설로 남게 되었다.

제1차 마른전투의 전설로 남은 파리택시의 모습



마른 강을 두고 독일 군과 프랑스 군 대치가 길어지고 있을 때 독일의 룩셈부르크 참모본 부에서 정보참 모 리차드 헨츄 중령이 전권을 부여받고 마른 전투에 투입되었다. 헨츄는 전선을 시찰한 후 제1군과 제 2군 사 이에 50km나 벌어진 간격이 벌어진 것을 무척 위험하게 여겼고 그 사이로 적 부대가 들어와 제1 군과 제2군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제2군 사령관인 카를 폰 뵐로우를 만나 적 부대가 간격 사이로 들어올 경우 후퇴하도록 권고했고 제1군 사령관인 클루크에게도 마찬가지 내용으로 권고 하였다. 9월 8일 마침 정찰기 보고를 통해 영국 원정군 일부가 간격 사이에 들어섰다는 내용을 듣자 독일 제2군이 후퇴를 시작했고 이에 프랑스 제6군을 밀어붙이고 있던 독일 제1군 역시 후퇴하였다. 그러나 간격 사이에 들어온 영국 원정군은 사실 전술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군의 후퇴는 과잉대응이었다. 독일의 제1군과 제2군이 물러나자 나머지 제3군과 제4군, 제5군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9월 11일 독일 군은 엔강 북안에서 전선을 재편하였다. 그러면서 독일은 파리를 조기에 함락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참호전의 시작


비록 독일군을 프랑스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가 아닌 사실상 무승부로 끝이 났지만 프랑스로서는 수도인 파리가 함락되는 위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마른 강의 기적" 이라고 부르며 기뻐하였다. 반면에 독일에게는 조기에 파리를 함락하여 프랑스의 항복을 유도하고 다시 병력을 동부전선에 집중하겠다던 슐리펜 계획이 이제 실패하였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엔강으로 물러난 독일군은 참호선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 역시 맞은 편에서 참호선을 구축하면서 서부전선은 앞으로 5년동안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사상자와 물자소모를 강요하는 참호전 양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슐레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책임을 지고 참모장인 몰트케는 사임하였고 결정적인 오판을 한 헨츄는 권총자살을 하게 된다.

이렇게 참호전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자 이른바 '바다로의 행진(진군)'(자세한 것은 http://cafe.daum.net/korjaphistory/Spjh/282 )을 벌이며 독일과 프랑스 양측 모두 10 월과 11월에 걸쳐 참호 선을 서쪽 해안까지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벨기에에서는 10월 10일 안트 베르펜이 함락되었으나 국왕 알베르 1세는 여전히 독일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하며 잔여병력을 이끌고 이세르강으로 후퇴하여 영국 원정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10월 19 일부터 11월 22일까지 벌어진 제1 차 이프르 전투에서 격전 끝에 독일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하면서 플랑드르 남서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엔강부터 도버해협까지 이어지는 참호선이 완성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진행된 참호전 대치 현황

동부전선의 상황

타넨베르크 전투


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 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에서도 차질이 발생했다. 당초 6주는 걸릴 걸로 예상했던 병력동원을 거의 2주만에 끝낸 러시아가 각각 파벨 폰 렌넨캄프와 알렉산드르 삼소노프가 지휘하는 제1군과 제2군을 동프로이센 국경으로 보낸 것이었다. 동프로이센의 국경에 도달한 러시아 군은 국경 주변의 마주리안 호수지대에서 둘로 갈라져 러시아 제1군은 북쪽으로, 러시아 제2군은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에서는 서부의 프랑스를 제압할 때까지 1개 야전군 만으로 러시아 군을 저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임무는 제8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프리트비츠와 지역 예비대에게 맡겨졌다. 비록 러시아 군의 병력이 독일 군보다는 많았지만 서둘러 병력을 동원하느라 무기와 군수품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고 지휘관인 렌넨캄프와 삼소노프 사이도 불화가 있어 사실상 병력이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야전지휘 경험이 일천한 독일의 프리트비츠는 러시아 군의 병력수에 압도되었고 AD 1914년 8월 20일 서전이 되는 굼피넨 전투에서 패배하자 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폴란드의 비수아 강에서 러시아 군에 대한 방어선을 재편하겠다고 몰트케에게 보고하였다.

타넨부르크 전투의 주역,
파울 폰 힌덴부르크(좌)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우)의 모습


당초 슐리펜 계획에는 최악의 경우 동프로이센을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에 지연전을 통해 최대한 시간을 버는 동안 프랑스를 제압한 병력과 합세하여 동프로이센을 탈환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동프로이센은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모태가 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컸다. 결국 몰트케는 프리트비츠를 해임하고 은퇴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전에서 활약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새로운 참모장으로 임명하여 함께 동부 전선으로 파견하였다. 루덴도르프는 철도를 통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작전수립에 골몰하였지만 동부전선에 도착했을 때에는 작전참모인 막스 호프만 중령이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임의로 실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호프만의 작전은 러시아 제1군을 1개 기병사단 만으로 견제하는 동안 나머지 병력을 모두 러시아 제2군을 상대하는 데 집중하여 각개격파를 노리는 것이었다. 호프만은 러시아의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마주리안 호수가 있어 기동에 제한이 많고 지휘관 사이에 불화가 있어 유기적인 협력이 어려울 거라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루덴도르프는 호프만이 자신에게 재가도 받지않고 독단으로 작전 계획을 추진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이 타당하였기 때문에 사후승인하여 그대로 진행시켰다. 다만, 몰트 케가 서부전선에서 3개군단과 1개 기병사단을 지원보내는 계획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몰트케는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였다. 결국 루덴도르프 예상대로 이 병력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어느 쪽에서도 활용되지 못하고 만다.

AD 1914년 8월 26일 양측 배치현황


8월 26일 러시아 지휘부는 러시아 제1군에게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서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러시아는 전신 암호화기술이 부족하여 평문으로 전송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도청되었다. 러시아 제2군 역시 진군을 시작했는데 이들을 막아선 것은 동프로이센의 예비군으로 편성된 제20군단이었다. 이들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위해 사력을 다해 전투를 벌이며 러시아 제2군을 저지하였고 그 사이 독일 제6군이 러시아 제2군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러시아 제2군 사령관인 삼소노프는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하여 8월 27일과 28일 이틀동안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러시아 제1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결국 독일군의 포위를 벗어나는 데는 실패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러시아 군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고 지휘관인 삼소노프는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그러자 러시아 제2군의 지원을 외면한 렌넨캄프 역시 러시아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루덴도르프가 타전한 전문에 적힌 "타넨 베르크 근처에서 승리를 거뒀다"라는 말에서 타넨베르크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에서 러시아는 제2군의 총 병력 23만명 중 포로가 9만명, 사상자가 8만명으로 총 17 만명의 피해를 입었다. 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타넨베르크 전투의 패배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러시아의 렌넨캄프는 같은 해 11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만다.

AD 1914년 8월 27일 전투진행현황


갈리치아-폴란드 전역


독일군을 상대해야 하는 동프로이센과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상대하는 갈라치아 지방(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동부에 해당)에서는 러시아 군이 승리를 거뒀다. 공격 자체는 8월 20일경 병력동원을 마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먼저 시작했으나 곧이어 러시아 군의 반격에 밀려났다. 러시아 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뒤쫓아 국경을 넘어와 9월초 갈리치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물리치고 동부 갈리치아의 수도인 리비우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후퇴하여 산 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쳤으나 이마저도 러시아 군에게 밀리게 되자 폴란드 남부의 프셰미실에 방어병력 5만명만 남긴 채 재차 후퇴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삼았다. 이에 러시아는 일부 부대를 남겨 프셰미실에 대한 공성전을 시작하는 한편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프레미실은 고립된 상태에서도 분전하며 버텨냈으나 결국 이듬해 3월 거의 대부분이 파괴된 싱태에서 러시아 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폴란드가 뚫리면 이제는 독일의 공업지대가 위치한 슐레지엔이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독일도 신규로 동원한 제9군을 투입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연계작전을 벌였다. 비록 이제는 러시아의 병력동원도 마무리되어 7개 야전군의 총병력 130만명의 대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AD 1914년 10월의 비스툴라 강 전투와 11월의 우치 전투에서 독일군 이 패배했지만 러시아 군의 활동을 비스툴라 강 동쪽에 국한시켰기 때문에 슐레지엔을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 동부 전선은 서부전선과 달리 광활한 지역에서 이루어져 참호전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독일 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비 스툴라 강과 카르파티아 산맥을 두고 러시아 군과 서로 맞서는 형태가 되면서 서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쉽게 결판이 나지않고 전황이 일진일퇴가 반복되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세르비아 전선의 상황


체르 전투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세르비아 전역은 AD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같은 날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에 대한 포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AD 1914년 당시 유럽에서 러시아와 독일에 이어서 세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경제력 또한 세르비아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전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 러나 러시아 군이 갈리치아 방면으로 처들어오자 세르비아에 투입될 병력 중 일부의 배치가 변경되면서 차질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 아-헝가리 군을 이끌게 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총독인 오스카르 포티어렉은 세르비아 쯤은 2주 일 이내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절반의 병력만 이끌고 세르비아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포티어렉은 오스트 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생일인 8월 18일에 승전보를 선물로 보내겠다는 조급한 욕심에 세르비아 북부의 평원이 아닌 서부의 산악지대를 통해 공격해들어가는 실수를 했다. 결국 8월 15일부터 열흘 간 벌어진 체르 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세르비아 군에게 패배한 채 보스니아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체르 전투 상황도



드리나 전투


9월이 되자 세르비아 군이 오히려 사바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시르미아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군의 목표는 시르미아 지역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포티어렉은 세르비아 군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세르비아 본국으로 처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드리나 강을 통해 세르비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세르비아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는 시르미아를 공격하던 세르비아 군을 서둘러 철수시켰다. 드리나 강 전투는 격전이 벌어진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진격은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투양상은 참호전으로 변화되었다. 사실 참호전은 포병이 부족한 세르비아에게 불리한 것이었고 보스니아를 노린 세르비아 군의 우회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황은 세르비아에게 점점 불리해져 갔다.

콜루바라 전투


세르비아 군이 점차 약화되자 12월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선전 하던 세르비아 군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본격적인 공격에는 열세를 들러낼 수밖에 없어서 200km에 달하는 전선이 전체적으로 밀리고 말았다. 더구나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인 페타르 보요비치 가 드리나 강 전투에서 부상당 하면서 지보인 미시치로 교체되는 지휘공백도 발생하였다. 세르비아 군 이 11월 16일 콜루바라 강에서 밀려나자 세르비아의 푸트니크는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전선을 축소 시키기 위해서 11월 30일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포기를 선언하고 전략적인 후퇴를 명령하였다. 이에 오 스트리아-헝가리 군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채 12월 13일 베오그라드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새로 운 제1군 사령관이 된 미시치는 이 명령에 강력하기 반발하면서 베오그라드 인근에서 병력과 무기, 탄 약 등을 보충하기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미시치에 설득당한 푸트니크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베 오그라드 점령으로 승리감에 도취되어 방심한 기회를 노리기로 결심하였다. 푸트니크는 전 세르비아 군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명령하였고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면 서 베오그라드를 상실한 지 이틀 만에 수 복하였고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AD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세르비아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콜루바라 전투의 상황도


기타 국가들의 상황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처음에는 어느 편을 지지해야 하는 지를 결 정하지 못했 다. 그러나 영국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건조를 의뢰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에 대한 인도를 영국의 해군성 장관인 윈스턴 처칠에게 거절당하면서 반영 감정이 일어났다. 여기에 독일의 순항전함 2척이 지중해에 서 영국 함대에 쫓겨 오스만 제국의 항구로 들어가는 일이 일어났는데 영국의 방해를 뚫고 독일 항구로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빌헬름 2세는 아 예 오스만 제국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 서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오스만 제국의 여론이 급격하게 독일 측으로 돌아섰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AD 1908년 청년투르크당 혁명을 통해 집권한 삼두정치의 일원 중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에 의 해 AD 1914년 8월 2일 독일과 동맹이 추진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한편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삼국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는 개전 이후에도 좀처럼 참전의 사를 밝히지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는 AD 1902년 11월 1일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AD 1914년 8월 3일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방어전쟁만 수 행하겠다는 의미로 사실상 중립을 선언 하게 된다.

이 밖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영일동맹의 의무를 핑계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쟁은 모두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참전은 독일의 아시아-태평양 식민지를 점령하 기 위함이었다. 결국 일본은 중국 칭다오에 위치한 독일군 기지를 함락시키고 태영양의 독일령 남양군 도를 점령한 후 이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받는 조건으 로 소규모 함대만 지중해에 파견하였 다. 또한 일본을 산둥반도를 점령하고 산둥반도에서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특권을 일본 이 계승하고 남 만주와 내몽고에 대한 조차를 요구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21개조 요구사항을 중국에 전달하여 관철 시키게 된다.

크리스마스 휴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당시 술리펜 계획을 가지고 있던 독일은 물론 주요 참전국들 모두 전 쟁이 단기 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고 참전했던 병사들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집으로 되돌아 갈 것으로 기대했 다. 그러나 서 부전선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변경되면서 그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 크리스마스에도 양측의 병사들은 참호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조촐한 행사만 치를 수 있었지만 벨기에의 이푸르 전 역에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 캐롤송을 부르자 양측 모두 잠시 전쟁상황을 잊고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합창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 고 참호 위 로 올라가는 병사도 생겼지만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부대 지휘관들이 서 로 만나 크리스 마스 당일만은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하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뒤이어 참호 사이에 버려진 시신들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병 사들 사이의 친선 축구경기까지 열렸다. 이 크리스마스 휴전 은 벨기에 이프르 전선 뿐만 아니라 서부전선 곳곳에서 자발적 으로 발생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 게 된 양측 군 수뇌부에서 병사들이 임의로 맺은 휴전에 대해 격분하였기 때문에 이후로 는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된 AD 1914년 만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기적이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 세력 측으 로 가담 하여 연합군 측인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카프카스 지역도 전쟁터로 변했다. 이에 남카프카스의 아르메니아에서 일부가 러시아와 내통하여 오스만 제국을 괴롭히는 일이 벌어졌다. 아르메니아는 그리스도교(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신봉 했기 때문에 이슬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 면서 마찰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AD 1894년부터 AD 1895년 까지 대규모 학살을 당하면서 오 스만 제국에게 많은 반감이 더욱더 일어난 상태였다.

이렇게 발생한 아르메니아 게릴라에 의해 이슬람교 마을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지자 오스만 제국 역 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 살하면서 보복하였다. 급기야 오스만 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잠재적 인 위협인자로 보고 AD 1915년부터 AD 1916년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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