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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inlee96.blog.me/220108941836 전쟁의 배경 영국 vs 독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4국동맹으로 힘의 균형 을 이루었고 나중에 프랑스까지 추가로 가입하여 5국동맹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중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서유럽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중세적인 낡은 전제군주제와 농노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대에 뒤쳐지고 말았다. 반면에 프로이센은 빌헬름 1 세 시절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참모장 헬 무트 폰 몰트케의 도움을 받아 군사강국으로 발돋움 한 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차례로 물리치고 독일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러시아의 쇠락과 독일의 부상이 맛물리면서 유럽은 점차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함거포주의의 기준이 된 영국 HMS 드레드노트(Dreadnought)의 모습 프랑스 vs 독일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자국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된 독일제국의 선포를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그리고 패전의 대가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상실함에 따라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커졌으나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의해 AD 1881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제국, 러시아의 삼제동맹이 결성되었고 AD 1882년에는 다시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이탈리아 간의 삼국동맹을 구축하면서 외교적으로도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AD 1887년 발칸반도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삼제동맹이 붕괴되었고 AD 1890년 비스마르크마저 실각하면서 프랑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 유럽의 삼국협상(녹색)과 삼국동맹(갈색)의 모습 전쟁의 시작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 분쟁 오스만 제국이 쇠락해지면서 러시아가 동방정교회 보호와 범슬라브주의를 명분으로 지속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며 발칸반도로 진출하였다. 비록 크림전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패배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그리스,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를 독립시키며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독일연방에서 탈퇴당한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의 이중제국 체제로 변경한 뒤 독일지역 대신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노리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인접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까지 병합하는 보스니아의 위기를 일으키자 러일전쟁의 패배 후유증에 시달리던 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승인했지만 여전히 긴장감은 팽배하였다. 또한 세르비아 역시 당초부터 보스니아 병합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보스니아를 차지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암살 직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모습 선전포고 사실 사라예보 사건의 현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영토로 이미 편입된 보스니아였고 범인도 세르비아 계열이긴 했으나 국적은 엄연히 보스니아였다. 하지만 그동안 보스니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세르비아의 은밀한 지원에 불만이 많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는 사라예보 사건을 전쟁의 빌미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는 우선 동맹국인 독일에게 협조요청을 하였고 독일의 빌헬름 2세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세르비아에게 반오스트리아 교육, 단체, 관료, 출판물에 대한 제재조치와 함께 사라예보 사건 재판을 위해 오스트리아 관리의 세르비아 입국 허용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며 48 시간 안으로 응답을 요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뒤에 독일이 있음을 잘 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에게 수용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에 세르비아 측에서는 반오스트리아 교육, 단체, 관료, 출판물에 대한 제재조치는 수용이 가능하지만 오스트리아 관리의 입국 허용에 대해서는 협상이 필요하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쟁을 일으키기를 원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었던 만큼 일방적으로 세르비아와 외교단절을 선언하고 7 월 28일 세르 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AD 1914년 전황
독일과 프랑스의 전략 독일의 슐리펜 계획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전쟁계획인 이른바 '슐리펜 계획'을 진행시켰다. 당초 독일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리 이후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위해 노력했던 비스마르크가 실각하면서 러시아와의 동맹 갱신에 실패하고 오히려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독일은 유사시 프랑스와 러시아를 양면에서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강요받게 되자 독일의 참모총장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전시 작전계획의 수립에 착수하였다. 슐리펜은 낙후된 철도시설과 전신망에 따라 러시아의 병력동원에 소요되는 기간을 6주정도로 예상했고 이에따라 우선 프랑스에게 병력을 집중하여 6주 안에 항복을 받아낸 후 독일의 발달된 철도망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슐리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단기간에 프랑스를 제압하는 방안으로 프랑스가 절실하게 회복을 노리는 알자스-로렌 지방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사이에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네덜란드를 통해 프랑스 군의 배후로 돌아들어가며 포위망을 구축하는 작전을 세웠는데 이럴 경우 슐리펜은 1달 반 만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는 것이 가능한 걸로 계산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 모습 프랑스의 작전계획 XVII 독일에 맞서는 프랑스의 전략은 '작전계획 XVII(Plan XVII)'이라고 불렀다. 작전계획 XVII 은 AD 1913 년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와 조제프 조프르에 의해서 고안되었는데 주요 목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상실한 알자스-로렌 지방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프랑스 육군 대학 교장인 페르디낭 포슈에 의해 주창된 이른바 '엘랑 비탈' 교리로 불리는 사기론이 널리 퍼져 있었다. 본래 엘랑 비탈이라는 말은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이 사용한 말로 '생명의 비약'으로 번역되는데 군사교리에서는 병사들의 '전투의지 '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전투에서 보병의 총검돌격만 지나치게 고집하여 기관총 등의 진보된 화력장비의 위력을 경시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엘랑비탈 교리에 따른 프랑스 병사가 독일 병사보다 더 잘 싸운다는 근거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작전계획 XVII을 세웠다. 작전계획 XVII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전쟁이 선포되면 알자스-로렌 방면의 메츠-티옹빌 요새에 프랑스의 4개 야전군을 배치하여 프랑스 우익이 알자스와 로렌을 공격하는 동안 좌익은 아르덴숲의 남쪽을 경유하여 독일로 진격하거나 룩셈부르크 및 벨기에를 통해서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독일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작전계획 XVII의 맹점은 영국과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조약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독일이 벨기에를 통해서 프랑스를 침공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알자스- 로렌 방면의 독일군 방어선이 약화되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더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작전계획 XVII은 독일의 슐리펜 계획의 의도와 정확하게 맞물리면서 개전 초기에 프랑스를 위기로 몰아가게 된다. 프랑스의 작전계획 XVII의 모습 서부전선 상황 벨기에의 리에주 공략 AD 1914년 8월 1일 독일의 16사단이 룩셈부르크로 진격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시작되었다 .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점령한 독일은 8월 3일 벨기에 정부에게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해 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벨기에 측에서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몰트케는 각 군단으로부터 6개 보병여단과 2개 기병사단을 차출하여 임시 편성한 뮤즈군을 오토 폰 엠미흐의 지휘하에 8월 4일 벨기에 국경요새인 리에주로 진격시켰다. 리에주는 당시 인구 16만4천 명의 산업도시이자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독일군이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중요한 거점이었으므로 몰트케는 8월 10일까지 점령을 완료할 것을 요구했다. 제1차 마른 전투 독일군이 리에주 요새를 함락하였으나 벨기에는 항전 의사를 굽히지 않은 채 또다른 요새인 나무르에서 독일군에게 저항하였고 국왕 알베르 1세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으로 이동하였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 점령은 뒤로 미룬 채 제1군과 제2군을 서둘러 프랑스의 북부로 진입시켰다. 8월 20일 독일 제1군 과 제2군은 벨기에 국경에 배치되었던 프랑스 제5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고 프랑스군이 분전하였으나 독일의 후속부대인 제3군까지 도착하면서 프랑스 제5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1차 마른 전투에서의 양측의 배치모습 이렇게 파리가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옮겨갔고 파리 방어는 군사장관인 조제프 갈리에니에게 맡겨졌다. 갈리에니는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동원해 파리방어를 맡고 있던 제6군을 보강하고 영국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공격에 나섰다. 사실 독일군은 제1군이 진격 방향을 갑자기 전환하였기 때문에 오른쪽 측면이 노출된 위험이 있었고 동부전선으로 병력이 차출된 것 때문에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간격이 50km나 떨어져 있는 문제가 있었다. 9 월 5일 독일의 제1군이 마른 강변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프랑스의 제6군 및 영국 원정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클루크는 파리 방어를 맡고 있던 프랑스 제6군이 마른 강변까지 나와 공격을 할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리적인 기습을 허용한 상태였으나 병력 자체는 독일의 제1군이 우세하여 곧바로 반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갈리에니는 파리에서 동원된 병력을 택시까지 동원하여 9월 7일과 8일 2번에 걸쳐 수송하였다. 600 대의 택시가 1대당 5명의 병사를 태우고 전장으로 향한 병력은 6천명에 불과하여 총 30만명이 격돌한 전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를 발휘하여 전설로 남게 되었다. 제1차 마른전투의 전설로 남은 파리택시의 모습 마른 강을 두고 독일 군과 프랑스 군 대치가 길어지고 있을 때 독일의 룩셈부르크 참모본 부에서 정보참 모 리차드 헨츄 중령이 전권을 부여받고 마른 전투에 투입되었다. 헨츄는 전선을 시찰한 후 제1군과 제 2군 사 이에 50km나 벌어진 간격이 벌어진 것을 무척 위험하게 여겼고 그 사이로 적 부대가 들어와 제1 군과 제2군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제2군 사령관인 카를 폰 뵐로우를 만나 적 부대가 간격 사이로 들어올 경우 후퇴하도록 권고했고 제1군 사령관인 클루크에게도 마찬가지 내용으로 권고 하였다. 9월 8일 마침 정찰기 보고를 통해 영국 원정군 일부가 간격 사이에 들어섰다는 내용을 듣자 독일 제2군이 후퇴를 시작했고 이에 프랑스 제6군을 밀어붙이고 있던 독일 제1군 역시 후퇴하였다. 그러나 간격 사이에 들어온 영국 원정군은 사실 전술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군의 후퇴는 과잉대응이었다. 독일의 제1군과 제2군이 물러나자 나머지 제3군과 제4군, 제5군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9월 11일 독일 군은 엔강 북안에서 전선을 재편하였다. 그러면서 독일은 파리를 조기에 함락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참호전의 시작 비록 독일군을 프랑스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가 아닌 사실상 무승부로 끝이 났지만 프랑스로서는 수도인 파리가 함락되는 위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마른 강의 기적" 이라고 부르며 기뻐하였다. 반면에 독일에게는 조기에 파리를 함락하여 프랑스의 항복을 유도하고 다시 병력을 동부전선에 집중하겠다던 슐리펜 계획이 이제 실패하였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엔강으로 물러난 독일군은 참호선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 역시 맞은 편에서 참호선을 구축하면서 서부전선은 앞으로 5년동안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사상자와 물자소모를 강요하는 참호전 양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슐레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책임을 지고 참모장인 몰트케는 사임하였고 결정적인 오판을 한 헨츄는 권총자살을 하게 된다. 서부전선에서 진행된 참호전 대치 현황 동부전선의 상황 타넨베르크 전투 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 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에서도 차질이 발생했다. 당초 6주는 걸릴 걸로 예상했던 병력동원을 거의 2주만에 끝낸 러시아가 각각 파벨 폰 렌넨캄프와 알렉산드르 삼소노프가 지휘하는 제1군과 제2군을 동프로이센 국경으로 보낸 것이었다. 동프로이센의 국경에 도달한 러시아 군은 국경 주변의 마주리안 호수지대에서 둘로 갈라져 러시아 제1군은 북쪽으로, 러시아 제2군은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에서는 서부의 프랑스를 제압할 때까지 1개 야전군 만으로 러시아 군을 저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임무는 제8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프리트비츠와 지역 예비대에게 맡겨졌다. 비록 러시아 군의 병력이 독일 군보다는 많았지만 서둘러 병력을 동원하느라 무기와 군수품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고 지휘관인 렌넨캄프와 삼소노프 사이도 불화가 있어 사실상 병력이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야전지휘 경험이 일천한 독일의 프리트비츠는 러시아 군의 병력수에 압도되었고 AD 1914년 8월 20일 서전이 되는 굼피넨 전투에서 패배하자 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폴란드의 비수아 강에서 러시아 군에 대한 방어선을 재편하겠다고 몰트케에게 보고하였다. 타넨부르크 전투의 주역, 당초 슐리펜 계획에는 최악의 경우 동프로이센을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에 지연전을 통해 최대한 시간을 버는 동안 프랑스를 제압한 병력과 합세하여 동프로이센을 탈환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동프로이센은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모태가 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컸다. 결국 몰트케는 프리트비츠를 해임하고 은퇴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전에서 활약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새로운 참모장으로 임명하여 함께 동부 전선으로 파견하였다. 루덴도르프는 철도를 통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작전수립에 골몰하였지만 동부전선에 도착했을 때에는 작전참모인 막스 호프만 중령이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임의로 실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호프만의 작전은 러시아 제1군을 1개 기병사단 만으로 견제하는 동안 나머지 병력을 모두 러시아 제2군을 상대하는 데 집중하여 각개격파를 노리는 것이었다. 호프만은 러시아의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마주리안 호수가 있어 기동에 제한이 많고 지휘관 사이에 불화가 있어 유기적인 협력이 어려울 거라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루덴도르프는 호프만이 자신에게 재가도 받지않고 독단으로 작전 계획을 추진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이 타당하였기 때문에 사후승인하여 그대로 진행시켰다. 다만, 몰트 케가 서부전선에서 3개군단과 1개 기병사단을 지원보내는 계획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몰트케는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였다. 결국 루덴도르프 예상대로 이 병력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어느 쪽에서도 활용되지 못하고 만다. AD 1914년 8월 26일 양측 배치현황 8월 26일 러시아 지휘부는 러시아 제1군에게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서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러시아는 전신 암호화기술이 부족하여 평문으로 전송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도청되었다. 러시아 제2군 역시 진군을 시작했는데 이들을 막아선 것은 동프로이센의 예비군으로 편성된 제20군단이었다. 이들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위해 사력을 다해 전투를 벌이며 러시아 제2군을 저지하였고 그 사이 독일 제6군이 러시아 제2군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러시아 제2군 사령관인 삼소노프는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하여 8월 27일과 28일 이틀동안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러시아 제1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결국 독일군의 포위를 벗어나는 데는 실패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러시아 군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고 지휘관인 삼소노프는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그러자 러시아 제2군의 지원을 외면한 렌넨캄프 역시 러시아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루덴도르프가 타전한 전문에 적힌 "타넨 베르크 근처에서 승리를 거뒀다"라는 말에서 타넨베르크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에서 러시아는 제2군의 총 병력 23만명 중 포로가 9만명, 사상자가 8만명으로 총 17 만명의 피해를 입었다. 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타넨베르크 전투의 패배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러시아의 렌넨캄프는 같은 해 11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만다. AD 1914년 8월 27일 전투진행현황 갈리치아-폴란드 전역 독일군을 상대해야 하는 동프로이센과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상대하는 갈라치아 지방(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동부에 해당)에서는 러시아 군이 승리를 거뒀다. 공격 자체는 8월 20일경 병력동원을 마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먼저 시작했으나 곧이어 러시아 군의 반격에 밀려났다. 러시아 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뒤쫓아 국경을 넘어와 9월초 갈리치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물리치고 동부 갈리치아의 수도인 리비우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후퇴하여 산 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쳤으나 이마저도 러시아 군에게 밀리게 되자 폴란드 남부의 프셰미실에 방어병력 5만명만 남긴 채 재차 후퇴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삼았다. 이에 러시아는 일부 부대를 남겨 프셰미실에 대한 공성전을 시작하는 한편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프레미실은 고립된 상태에서도 분전하며 버텨냈으나 결국 이듬해 3월 거의 대부분이 파괴된 싱태에서 러시아 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세르비아 전선의 상황 체르 전투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세르비아 전역은 AD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같은 날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에 대한 포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AD 1914년 당시 유럽에서 러시아와 독일에 이어서 세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경제력 또한 세르비아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전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 러나 러시아 군이 갈리치아 방면으로 처들어오자 세르비아에 투입될 병력 중 일부의 배치가 변경되면서 차질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 아-헝가리 군을 이끌게 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총독인 오스카르 포티어렉은 세르비아 쯤은 2주 일 이내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절반의 병력만 이끌고 세르비아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포티어렉은 오스트 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생일인 8월 18일에 승전보를 선물로 보내겠다는 조급한 욕심에 세르비아 북부의 평원이 아닌 서부의 산악지대를 통해 공격해들어가는 실수를 했다. 결국 8월 15일부터 열흘 간 벌어진 체르 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세르비아 군에게 패배한 채 보스니아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체르 전투 상황도 드리나 전투 9월이 되자 세르비아 군이 오히려 사바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시르미아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군의 목표는 시르미아 지역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포티어렉은 세르비아 군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세르비아 본국으로 처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드리나 강을 통해 세르비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세르비아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는 시르미아를 공격하던 세르비아 군을 서둘러 철수시켰다. 드리나 강 전투는 격전이 벌어진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진격은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투양상은 참호전으로 변화되었다. 사실 참호전은 포병이 부족한 세르비아에게 불리한 것이었고 보스니아를 노린 세르비아 군의 우회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황은 세르비아에게 점점 불리해져 갔다. 콜루바라 전투 세르비아 군이 점차 약화되자 12월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선전 하던 세르비아 군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본격적인 공격에는 열세를 들러낼 수밖에 없어서 200km에 달하는 전선이 전체적으로 밀리고 말았다. 더구나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인 페타르 보요비치 가 드리나 강 전투에서 부상당 하면서 지보인 미시치로 교체되는 지휘공백도 발생하였다. 세르비아 군 이 11월 16일 콜루바라 강에서 밀려나자 세르비아의 푸트니크는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전선을 축소 시키기 위해서 11월 30일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포기를 선언하고 전략적인 후퇴를 명령하였다. 이에 오 스트리아-헝가리 군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채 12월 13일 베오그라드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새로 운 제1군 사령관이 된 미시치는 이 명령에 강력하기 반발하면서 베오그라드 인근에서 병력과 무기, 탄 약 등을 보충하기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미시치에 설득당한 푸트니크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베 오그라드 점령으로 승리감에 도취되어 방심한 기회를 노리기로 결심하였다. 푸트니크는 전 세르비아 군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명령하였고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면 서 베오그라드를 상실한 지 이틀 만에 수 복하였고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AD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세르비아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콜루바라 전투의 상황도 기타 국가들의 상황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처음에는 어느 편을 지지해야 하는 지를 결 정하지 못했 다. 그러나 영국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건조를 의뢰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에 대한 인도를 영국의 해군성 장관인 윈스턴 처칠에게 거절당하면서 반영 감정이 일어났다. 여기에 독일의 순항전함 2척이 지중해에 서 영국 함대에 쫓겨 오스만 제국의 항구로 들어가는 일이 일어났는데 영국의 방해를 뚫고 독일 항구로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빌헬름 2세는 아 예 오스만 제국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 서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오스만 제국의 여론이 급격하게 독일 측으로 돌아섰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AD 1908년 청년투르크당 혁명을 통해 집권한 삼두정치의 일원 중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에 의 해 AD 1914년 8월 2일 독일과 동맹이 추진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크리스마스 휴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당시 술리펜 계획을 가지고 있던 독일은 물론 주요 참전국들 모두 전 쟁이 단기 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고 참전했던 병사들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집으로 되돌아 갈 것으로 기대했 다. 그러나 서 부전선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변경되면서 그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 크리스마스에도 양측의 병사들은 참호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조촐한 행사만 치를 수 있었지만 벨기에의 이푸르 전 역에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 캐롤송을 부르자 양측 모두 잠시 전쟁상황을 잊고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합창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 고 참호 위 로 올라가는 병사도 생겼지만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부대 지휘관들이 서 로 만나 크리스 마스 당일만은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하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뒤이어 참호 사이에 버려진 시신들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병 사들 사이의 친선 축구경기까지 열렸다. 이 크리스마스 휴전 은 벨기에 이프르 전선 뿐만 아니라 서부전선 곳곳에서 자발적 으로 발생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 게 된 양측 군 수뇌부에서 병사들이 임의로 맺은 휴전에 대해 격분하였기 때문에 이후로 는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된 AD 1914년 만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기적이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 세력 측으 로 가담 하여 연합군 측인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카프카스 지역도 전쟁터로 변했다. 이에 남카프카스의 아르메니아에서 일부가 러시아와 내통하여 오스만 제국을 괴롭히는 일이 벌어졌다. 아르메니아는 그리스도교(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신봉 했기 때문에 이슬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 면서 마찰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AD 1894년부터 AD 1895년 까지 대규모 학살을 당하면서 오 스만 제국에게 많은 반감이 더욱더 일어난 상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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