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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2차세계대전(II) 전쟁의 시작,독일의 폴란드 전역과 스칸디나비아 전역, 제1차 쏘련 -핀란드 전쟁

출처: http://winlee96.blog.me/220270246819


추축국동맹의탄생과독-소불가침조약

추축국동맹의 탄생

 

AD 1933년 독일과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AD 1936년 이탈리아 역시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이 후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3국간의 동맹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본래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영국 및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히틀러에게 비우호적인 입 장을 고수하였는데 이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반대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침공 이후 이탈리아가 국제적으로 고립당하는 처지가 되자 독일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접근하 여 동맹을 제안하였고 AD 1936년 10월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 우정 조약이 체결되었다.

같은해 11월 무솔리니가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Axis)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 다"라고 언급한 것을 통해 "추축국(Axis Powers)"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AD 1939년 5 월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간의 우정조약을 강화하여 영구적인 우호관계를 유지와 군사, 경제적인 협력 을 담은 강철 조약을 체결하였다. 참고로 강철 조약의 본래 이름은 '피의 조약'이었으나 어감이 좋지 않 다는 이유로 무솔리니에 의해 '강철 조약'이라고 명명되었다.

이탈리아의무솔리니(좌)와독일의히틀러(우)가함께한모습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는 재군비와 팽창정책을 취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와 마찰을 빚었으나 집권초기부 터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더욱이 소련은 자국의 공산주의 혁명 성공 이후 AD 1919년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을 창설하여 타국의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고 나서면 서 주변국에서는 위기감이 형성되었다. 그러던 중 스페인 내전(AD 1936년 7월 ~ AD 1939년 4월)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즘 세력과 인민전선(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연합)의 공화파 정부 간의 이념대립으로 치닫고 소련이 국제여단이라는 공산주의자 의용병을 동원하여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자 독일도 이탈리아와 함께 파시즘 세력을 도와주면서 스페인에서 소련 측과 대리전을 치르기도 하였다.

 한편 동아시아의 일본 역시 내부적으로 공산주의를 위험한 사상으로 치부하여 탄압을 가하고 있었고 AD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수립된 위성국인 만주국이 소련과 국경을 맞대면서 크고작은 충돌을 거듭하 고 있었다. 이렇게 반공주의라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독일과 일본은 소련과 코민테른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목적으로 AD 1936년 11월 방공협정을 체결하였고 이듬해 이탈리아가 추가서명하였다. 그리 고 마침내 AD 1940년 8월 27일 베를린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사이의 삼국동맹조약이 체결되면 서 이른바 '추축국 동맹'이 형성되었다.

AD1940년삼국동맹조약체결모습


독-소불가침조약


독일의 히틀러가 일본 및 이탈리아와 방공협약을 체결하면서 반공주의를 고수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러시아를 적으로 돌려 동서 양면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AD 1938년에 소련과 상호군사동맹을 맺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시킨 만 큼 소련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으나 독일의 다음 목표는 폴란드였기 때문에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 해서는 관계개선이 필요해졌다. 소련 역시 국제연맹 가입이 AD 1934년이 되어서야 겨우 승인받을 정 도로 등 영국, 프랑스와는 그 다지 사이가 좋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뮌헨 협정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막지 못한 것 때문에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독일의 외무장관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 폴란드 분할점령을 전격 적으로 제안하였고 스탈린은 신뢰할 수 없는 영-프 연합국과의 동맹을 맺기보다는 폴란드 분할의 실익 을 얻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AD 1939년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전격적으로 체결하였 다.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통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은 물론 서로에게 적대적인 단체에 가입하지도 지원하지도 않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비밀의정서를 통해서 독일이 폴란드 서부를 차지하는 대신에 소련은 폴란드 동부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루마니아 북부의 베사라비아에 대한 권리 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하여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동안 소련도 함께 폴란드는 물론 핀란드도 함 께 노리게 된다.


불가침조약체결후악수하는소련의이오시프스탈린(좌)과
독일의요아힘폰리벤트로프(우)의모습


독일의폴란드침공

전쟁의원인


독일의 히틀러가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차례로 병합하면서 이제 다음 목표는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그난스크)임이 분명해졌다. 폴란드 회랑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폴 란드가 신생 독립하면서 차지한 발트해 연안의 좁고 긴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고 단치히는 본래 프로이 센령으로 독일의 영토였으나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립도시인 자유시의 지위를 획득하여 독 일로부터 떨어져 나간 곳이었다. 독일은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로 인하여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 국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 절부터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히틀러 역시 집권 이후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으나 오스트리아 및 체코 병합이 더 시급하였기 때문에 AD 1934년 1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국경문제 를 일시적으로 봉합시켰다. 그러나 체코 병합이 마무리되자 이제는 노골적으로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를 욕심내기 시작하였고 폴란드에게 독일의 단치히 자유시 병합과 폴란드 회랑에 대한 철도 치 외법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로서는 주권을 크게 침해받는 것은 물론 이고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를 독일에게 넘겨줄 경우 유일한 바다로의 출구를 잃어버리게 되는 큰 손실을 입 는 것이었으며 그동안의 사례를 통해 히틀러가 외교협약 이후에도 언제든지 무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AD 1939년 3월 30일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 드에 대한 군사원조를 보증하고 나서며 독일을 외교적으로 압박하였지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병합 과 체코 병합의 2차례 사례로 미루어 볼때 이번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개입을 없을 것으로 확신하 고 4월 28일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모두 파기하며 폴란드 침공준비를 진 행시켰다.


폴란드영토현황(노란색)


한편 폴란드는 소련과도 국경분쟁이 있었다. 소련이 공산주의 혁명 이후 적백내전으로 혼란한 AD 1919년에 폴란드가 소련과 전쟁을 벌여 한때 수도인 바르샤바까지 밀려나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최 종적으로 역습에 성공하여 AD 1920년 10월 리가조약을 체결하고 벨라루스의 서부와 우크라이나의 서 부를 각각 얻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언제가는 폴란드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전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라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소련의 스탈린은 AD 1939년 8월 22일 독일의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경우 소련 역시 반대편에서 폴란드를 공격하 겠다고 비밀리에 약속하게 된다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개전 준비를 마치자 다급해진 영국은 8월 25일 다시 폴란드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독일은 8월 29일 폴란드가 폴란드 회랑의 할양을 요구하는 최 후통첩을 묵살하자 더이상의 외교교섭을 중단하였고 폴란드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아 8월 30일 폴란드 구축함 함대를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여 영국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전시 동원'을 선포 하였으나 폴란드의 이러한 움직임이 오히려 독일을 자극할 것으로 생각한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에게 동원령을 철회하라고 압력을 가하여 철회해야만 했다.

하지만 독일은 벌써 병력동원을 완료하고 폴란 드 국경으로 배치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에 앞서 전쟁명분을 얻기 위하여 AD 1939년 8월 31일 밤에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글라이비츠 방송국을 공격하는 자작극을 일으켰다. 폴란드 군복을 입 은 독일군 병사들이 라디오 방송국을 급습하여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낭독한 후 미리 준비한 죄수들 시체에 폴란드 군복을 입힌 채 남겨두고 나온 것이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9월 1일 새벽 글라이비츠 방 송국 공격을 비난하며 폴란드에 대한 전격적인 침공을 명령하였다.


양측의작전


독일군은 총사령관 발터 폰 프라우히치가 지휘하고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가 보좌하는 2개 집단군으로 이루어졌으며 작전명은 "백색작전(Fall Weiss)"로 명명되었다. 전체적인 전략은 폴란드 국경의 3방향 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바르샤바로 향하고 비수아 강 서쪽에서 폴란드군 주력병력을 포위섬멸하 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주공은 남부 집단군이 맡아 제8군이 우치 방향으로 진격하고 제14군이 크라쿠 프 방향으로 전진하는 동안 제10군이 기갑사단과 함께 폴란드 중앙에서 결정적인 공세를 펼치기로 하였다.

그동안 북부 집단군은 조공으로서 제3군이 동프로이센에서 남진하고 제4군이 폴란드 회랑을 가 로질러 동진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폴란드 남쪽 국경은 독일의 위성국인 슬로바키아에서 새롭게 편성 된 "베르놀라크 육군"이 독일의 남부 집단군 소속의 제14군과 함께 슬로바키아에서 공격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시에 전격전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기동성 향상 을 위해 보병부대 상당수를 차량에 태워 이동시켰을 뿐 본질적으로는 프로이센 시절부터 선호하던 전 통적인 포위섬멸전이었다. 독일의 기갑부대를 담당한 하인츠 구데리안이 전차를 집중운용하여 적 방어 선을 돌파하여 적 후방으로 깊숙히 진격하는 방안을 제안하였으나 아직까지 위험요소가 많다고 판단한 독일군 수뇌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AD1939년8월31일독일군의작전계획


이에 맞서는 폴란드군의 작전은 전 국경에 걸쳐 병력을 배치하고 서서히 후퇴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이 너무 길고 폴란드군의 숫자가 독일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에게 비수아 강이나 산 강과 같은 자연적인 장애물 뒤에 병력을 배치하라고 조언하였으나 폴란드로서는 천연자원과 공업지대, 많은 인구 가 밀집된 슐레지엔이나 포즈난 지방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폴란드는 6개월 정도만 시간을 벌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서쪽에서 공격을 시작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비록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폴란 드를 침공하자 폴란드와의 동맹조약에 포함된 자동참전 조항에 따라 9월 3일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 를 하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과의 국경에 구축한 "마지노 선" 에서 독일에게 소 모적인 참호전을 강요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채택한 상태였다. 결국 이듬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공세를 거의 취하지 않게 되고 이 때문에 '가짜 전쟁'이라는 비아 냥까지 들어야 했다. 폴란드가 간과한 또하나는 소련의 침공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로인해 소련과의 동쪽 국경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전쟁의진행


독일군의 공격은 독일공군(Luftwaffe; 루프트바페)의 기습적인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이 공습으로 폴란 드 공군기지들이 파괴되었지만 개전 직전에 소규모 이착륙장으로 옮겨진 폴란드 공군 역시 분전하여 333대의 손실을 입은 대신에 독일 공군기 285대를 파괴하고 279대에게 손상을 입히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는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제공권을 독일에게 내주고 말았다. 참고로 독일 침공시 폴 란드를 탈출한 많은 폴란드 조종사들이 영국 공군에 합류하면서 조종사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 공군에게 큰 도움을 주며 나중에 독일 공군과 벌어진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대활약을 하게 된다.
독일 공군의 공습과 함께 지상군도 백색작전에 따라 폴란드와의 전 국경에서 일제히 진격을 시작하였 다. 당초 폴란드의 지연작전은 시작부터 차질을 빚게 되는데 특히 폴란드가 제공권을 상실하면서 후방 의 지휘통신체계가 마비되었고 피난민들이 도로에 몰리면서 유기적인 후퇴가 불가능해진 채 각 부대들 이 서로 고립되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몇몇 부대들이 분전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전황은 폴란드에게 절망적으로 흘러갔고 9월 9일 독일의 의도대로 폴란드군 주력병력이 포위망에 갇히게 되자 9월 10일 폴란드 총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가 수도인 바르샤바를 포기 하고 루마니아 국경까지 후퇴하도록 명령하였다. 포위된 폴란드군은 1주일간 벌어진 브주라 전투에서 분전하며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바르샤바에 투입된 독일군까지 브주라로 향하면서 병력차이가 2배 이상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중장비를 모두 버린 채 맨몸으로 비수아 강을 헤엄쳐 건너는 절망적인 퇴각을 벌여야 했다. 브주라 전투에서 폴란드군은 전체 22만5천명의 병력 중 1만5천명이 전사하고 10 만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대참패를 겪고 말았다.

독일군의폴란드진격모습


비록 국경의 주력병력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까지 폴란드군 전체 병력 95만명 중 80%에 해 당하는 75만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폴란드가 전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영국과 프랑스의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최고사령부는 이미 루마니아 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후 게릴라전을 펼칠 각오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9월 17일 소 련군이 전격적으로 동쪽 국경을 넘어오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이미 전병력을 독일을 상대하는 데 집중 한 폴란드로서는 소련군까지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9월 17일과 9월 20일 크라쿠프 군단과 루블린 군 단이 독일군에 의해 차례로 무너졌고 9월 22일에는 소련군에 의해 우크라이나의 르부프(지금의 '리비 우')를 점령당했다. 수도인 바르샤바가 9월 27일 함락되었고 그 다음날에는 바르샤바 북부의 모둘린 요새마저 항복하면서 폴란드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사라졌다. 비록 이후에도 소규모 폴란드군이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그마저도 10월 6일 루블린 교외에서 벌어진 코츠크 전투를 마지막으로 이마저도 모두 소탕되었다.

소련군의폴란드침공모습


바르샤바함락이후


바르샤바가 함락된 다음날인 AD 1939년 9월 28일 독일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기존의 비밀 합의를 수정한 독일-소련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서로 분할점령하였다. 또한 독일과 소련 각각의 위 성국으로서 참전한 슬로바키아와 리투아니아도 일부의 영토를 할양받았다. 독일과 소련이 분할한 폴란 드의 국경선은 부크 강으로 결정되었고 리투아니아령의 소련 병합이 합의되었다. 단치히 자유시의 경 우에는 나치가 의회를 장악하고 이미 개전당일인 9월 1일에 독일과의 병합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회랑과 폴란드 서부 일부분을 자국의 영토로 추가로 편입한 이 후 남은 점령 지역을 폴란드 총독부령으로 재편하였다.
이렇게 하여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분할에 성공하였으나 폴란드가 공식적으로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군은 6만3천여 명이 전사하고 13만3천7백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66만여 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12만명이 루마니아로 탈출하였고 그 중에서 8만3천여명은 다시 프랑스로 탈출하여 영국-프랑스 연합군 편에서 독일과 끝까지 싸우게 된다.

독일의폴란드침공종료후유럽의세력분포현황
(적색:연합국,청색:독일,녹색:소련,흰색:중립국)


독일공군과헤르민괴링


헤르만 괴링은 AD 191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활 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최고의 에이스인 '붉은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제1전투비행단 (JG1)에서 22대를 격추하여 독일군 격추순위 56위에 올랐고 리히트호펜이 전사한 후에는 그 후임 지휘관이 될 정도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대 에 남도록 권유를 받았으나 괴링은 패전 이후 군장교에 대한 민간인들의 푸대접에 분개하여 독일을 떠났고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민간 비행사로 일했다. AD 1921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면서 나치의 일원이 된 괴링은 이후 나치의 돌격대(SA)를 지휘하며 나치의 세력확장과 권력장악에 큰 기여를 하 였다. 그리고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잡은 후 악명높은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하고 내무부 장 관, 국회의장, 재무부 장관 등의 정부요직을 두루 거치며 히틀러에 이은 나치의 2인자가 되었다.

헤르만괴링의모습


한편 독일은 본래 제1차 세계대전 종전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모든 전투기와 폭격기의 개발 및 보유가 전면금지된 상태였다. 이에 독일은 편법을 통해 비밀리에 공군력을 강화시키는 방안을 추 진하였고 베르사유 조약에도 불구하고 민간 항공기는 개발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융커스, 도르 니어, 하인켈과 같은 유명 항공기 제작업체에게 민간 항공기를 개발하도록 하되 유사시에는 전투기나 폭격기로 활용이 가능하도록 하여 융커스 Ju 86, 도르니어 Do 17, 하인켈 He 111 등을 민간항공기로 위장시켰다. 또한 부족한 조종사 양성을 위해 항공스포츠를 장려하여 비행클럽의 학생들에게 글라이 더 조종을 훈련시켰고 공산주의 혁명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된 소련과 AD 1922년 라팔로 조약을 체결 하고 비밀리에 소련의 리페츠크에 300여명의 조종사를 파견하여 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 내 AD 1935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독일공군이 출범 했고 공군 조종사 출신인 헤르만 괴링이 독일 공군(Luftwaffe)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독일공군은 그동안 비밀리에 양성했던 덕분에 AD 1935년 창설과 동시에 이미 1천대의 항공기와 2 만명의 병력을 보유한 상태였고 월 300대 가량의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는 군수공장을 보유하고 있 었다. 그리고 히틀러와 괴링은 신형 항공기 개발에도 나서 제2차 세게대전 초기에 큰 활약을 보일 급강하 폭격기 융커스 Ju 87 슈투카와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09 등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AD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이른바 '콘도르 사단'을 파견하여 융커스 Ju 87 슈투카와 하인켈 He 111, 도 르니어 Do 17, 메서슈미트 BF 109 등에게 실전경험을 쌓게 해줬고 이를 바탕으로 전술교리를 수정 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 공군은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전투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영국과프랑스의가짜전쟁


AD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폴란드와 체결한 동맹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병력동원은 이제 막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독일이 보 유한 병력 대부분을 폴란드 전역에 투입하면서 당시 프랑스는 당시 보유하고 있던 상비군 만으로도 이 미 절대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40개 사단을 동원하여 9월 7일부터 약 10일간 자를란트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는 했지만 독일의 바른트 숲에 설치된 지뢰지대를 만나자 진격을 중단했다. 프랑스 로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으로 인한 막대한 소모전의 기억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한 것 이었다. 더욱이 AD 1939년 9월 12일 프랑스 아브빌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처음으로 열린 전쟁위 원회에서는 오히려 독일이 아직 프랑스를 공격한 것도 아닌데 먼저 공격할 경우 독일에게 전쟁명분만 줄 뿐이므로 모든 공격을 중단하고 마지노 선에서 방어태세를 갖추자고 결정되었다. 이로 인해 자를란 트에서 공세를 펼치며 진군했던 프랑스군이 10월 17일까지 모두 철수하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장소로 선택한 마지노 선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이 재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독일과의 국경에 쌓은 긴 요새로서 AD 1927년부터 AD 1936년까지 프랑스 국방장관인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에서 그러한 명칭이 부여되었다. 프랑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 든 마지노 선이니만큼 프랑스는 독일군에게 마지노 선에서 참호전을 강요하여 병력을 소모시킨 후 반 격을 가하는 것을 큰 전략으로 삼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선전포고 이후에도 폴란 드가 독일과 소련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수수방관한 채 거의 아무런 군사작전을 펼치지 않는 한가로운 모습을 보여줬고 이를 두고 미국 상원의원 윌리엄 보라가 "이 전쟁은 왠지 가짜같다"라는 말에서 유래 한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와 별도로 독일에서는 자신이 폴란드에서 보여준 기동전에 빗대어 "앉은뱅이 전쟁"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가짜전쟁은 독일이 프랑 스를 침공하는 AD 1940년 5월까지 계속된다.

프랑스의마지노선모습


제1차소련-핀란드전쟁(겨울전쟁)


전쟁의원인


핀란드는 AD 1634년부터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인 AD 1808년에 러 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침공을 받아 러시아에게 합병당했다. 그러나 AD 20세기초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지고 소련으로 바뀌고 그로 인해 적백내전의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타고 AD 1917년 12 월 6일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때 핀란드와 함께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제정 러시아의 옛 영토가 모두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이들 지역을 재점령하기를 원 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AD 1939년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의 비밀조항에 따라 핀란드와 발트3 국을 모두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것에 합의된 것이었다. 그리고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 자 소련의 스탈린은 발트3국에게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어버렸다.
소련은 발트3국의 위성국화와 폴란드 분할점령의 목적을 달성하자 이제 남은 핀란드마저 욕심내기 시 작했다. 소련은 지난 AD 1932년에 핀란드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전쟁의 빌미를 삼기 위해 AD 1939년 10월에 핀란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며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소련의 요구조건은 소련의 수도인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방위를 위하여 카렐리아, 라플란 드 지방 등을 할양하여 소련과 핀란드의 국경선을 조정하고 핀란드 만의 수리사르 섬, 코틀린 섬 등의 핀란드 만 4개 섬과 올란드 제도를 추가적으로 소련에게 할양하며 발트 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 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의 군사조차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무리한 요구 에 대하여 핀란드의 대통령인 괴스티 칼리오가 당연히 거절하였고 그러자 소련의 스탈린은 핀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하기 위한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하여 AD 1939년 11월 26일 국경의 마이닐라에서 '발포 사건'의 자작극을 일으켰다. 소련은 마이닐라 발포사건을 핀란드군의 공격으로 꾸며낸 후 이를 구실 로 11월 29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하였고 이튿날 23개사단, 총 46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전격적으로 핀란드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였다.

제1차소련-핀란드전쟁이전의국경현황


전쟁의전개


소련의 침공당시 핀란드군은 총 33만명 정도였고 그 중에서 16만명 정도가 소련과의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다. 장비도 매우 부족하여 상비군만이 군복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 추가로 동원된 병사들은 자 신의 옷과 총을 그대로 사용해야 할 정도였고 무기도 전차 33여대와 항공기 110여대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했다. 이에 반해서 소련이 동원한 총 병력은 무려 54만명이었기 때문에 국경에서 3배 이상의 병력 차이가 발생했고 무기 면에서도 항공기 3,800여대와 전차 3,200여대가 핀란드를 크게 압도하고 있었 다. 그러나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AD 1937년 ~ AD 1938년)으로 인하여 유능한 지휘관의 80%가 이 미 희생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소련 지휘관들은 대규모 부대에 대한 지휘능력이 부족했고 항공기, 전 차, 포병, 보병을 유기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전술교리도 확립되지 않아 비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핀란드의 최고사령관인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은 AD 1918년 핀란드 독립당시 러시아군 무장해제를 주도하고 이어진 핀란드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를 몰아낸 적이 있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비록 AD 1919 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여 은퇴하였지만 조국이 위험에 처하자 72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핀란드 최고사령관으로 복귀하였다. 만네르하임은 소련의 주요진격로인 카렐리야 회랑에 이른바 "만 네르하임 선"으로 불리는 방어선을 구축에 나섰다. 비록 만네르하임 선은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 선 과 같이 잘 만들어진 콘크리트 요새는 아니었지만 호수가 많은 복잡한 지형을 이용하여 철통같은 방어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핀란드의만네르하임선모습


소련군의 작전은 제7군(7개사단과 1개 기갑사단)이 만네르하임 선을 돌파하는 동안 제8군(6개사단과 1개 기갑여단)이 라도가 호수 북부에서 진격하여 만네르하임 선 후방을 공격하고 이와 별도로 제9군(4 개사단)과 제14군(3개사단)은 별도로 우회하여 각각 핀란드 중부와 북부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개전당 일 소련군은 헬싱키, 비푸리, 투르쿠, 항코 등의 대도시를 포함해 21개 지역에 폭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지상군의 진군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국경으로부터 30~75km 떨어진 만네르하임 선에 도달 하였다. 12월 1일 소련은 핀란드 내부의 공산주의자를 회유하기 위하여 핀란드 내전에서 패배하여 소 련으로 망명하였던 오토 빌레 쿠시넨을 앞세워 국경지대의 테르요키에서 위성국인 "핀란드 민주공화 국"를 수립하였으나 AD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패배하여 소련으로 도망친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에 희생된 바 있어서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소련군이 12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만네르하임 선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만네르하임 선이 워낙 단단하 고 핀란드군이 사력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라도가 호수로 향한 소련군도 호수를 우회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이 지역은 숲이 우거지고 도로가 잘 정비되지 않아서 진 격이 더디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고 북극해에 가까운 핀란드의 중부와 북부의 지형상황은 더욱 심각하 여 핀란드가 방어를 위해 1개사단도 배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장복을 입은 스키부대의 지형을 이용하여 펼치는 게릴라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개전초기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전투보다 동상으로 인한 병력손실이 더 많았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개전 1달 만에 전쟁을 지속할 지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겨울전쟁진행모습


국제여론과소련과핀란드의종전합의


개전 당시 세계의 여론은 핀란드에게 유리하였다. 국제연맹이 소련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며 제명을 결 의하였고 미국도 소련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했으며 외국의 여러 단체들은 핀란드에 의약품과 같은 물 자를 제공했다. 그러나 핀란드의 도움 요청에도 불구하고 북유럽의 3국(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이 AD 1940년 2월에 열린 코펜하겐 회의에서 모두 중립을 선언하였다. 다만 스웨덴 만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군수품을 지원하고 8,700명의 의용병이 핀란드로 향하는 것을 묵인해주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영토통과 요청은 결국 거절하였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를 통해 10만의 병력을 투입한 후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로 진입한다는 계획을 제안하였으나 스웨덴으로 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목적이 사실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여 독일로 수출되는 것 을 막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치지 않고 북극해 주변의 핀란드의 항구인 페차모를 통해서 병력을 투입하자는 또다른 제안이 무시된 점에서 사실로 증 명되었다.
한편 소련도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고 핀란드 침공을 벌인 것이었으나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불구하 고 국경부근의 만네르하임 선 조차 돌파하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국제적으로 조롱거리 가 되었다. 이에 소련은 AD 1940년 1월말 중립국인 스웨덴을 통하여 핀란드에게 휴전 제의를 전달했 다. 핀란드로서도 비록 소련의 침공을 저지하고는 있지만 외국의 증원군 없이는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동안 군수물자를 제공해주던 스웨덴이 더이상 전쟁이 장기화 될 경우 자 국까지 전쟁이 번지거나 핀란드의 난민이 대규모로 유입되는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핀란드에게 서둘러 종전에 합의할 것을 종용하고 나서고 있는 형편이었다. 독일 역시 노르웨이에 핀란드를 지원하 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병력이 주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핀란드에게 서둘러 소련과 협약 을 체결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직접적인 병력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태였다.
실제로 2월말이 되자 핀란드의 보유 탄환이 바닥났고 소련군이 병력을 90만명까지 더욱 증강시키자 결국 굳건하게 버티던 만네르하임 선이 돌파당하고 말았다. 결국 어쩔수 없이 핀란드도 소련과 정전협 상에 나서야 했고 3월 12일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핀란드군이 대부분 점령하고 있던 카렐리야 지 방을 소련에게 넘겨야 했다. 이는 핀란드 영토의 10%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공업중심지인 비푸리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핀란드로서는 매우 큰 손실이었다. 그외에도 핀란드는 살라 지방과 바렌츠 해의 칼 라스타얀사렌토 반도, 핀란드 만의 섬 4개도 모두 소련에 할양하고 항코 반도도 소련에게 군사 기지로 30년간 조차해줘야 했다. 핀란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가혹한 조건이었지만 소련에 병합된 발트 3 국과 달리 독립만은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핀란드는 상실한 영토를 포기하지 않았 고 소련군이 예상밖의 졸전을 펼치는 것을 본 독일의 히틀러가 AD 1941년 전격적으로 소련 침공을 결심 할 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일명 "계속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겨울전쟁종료후소련이할양받은영토모습


독일의스칸디나비아침공


베저위붕작전


AD 1940년 3월 소련과 핀란드의 전쟁이 끝나자 이제 관심이 다시 서유럽으로 모아졌다. 독일의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노르웨이가 되었는데 비록 노르웨이가 중립을 선언하고 있었지만 독일로서는 스웨 덴의 북부에 위치한 키루나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키루나와 인접한 노 르웨이의 나르비크 항구를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르비크 항구의 중요성은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핀란드 지원을 빌미로 장악을 시도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독일은 노르웨이 점령과 함께 독일 공군기에 대한 재급유 징검다리 거점으로 삼기 위해 덴 마크 침공도 함께 추진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작전은 '베저강 훈련'이라는 뜻의 '베저위붕(Weserubung)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독일군의 노르웨이 침공은 총 5개 보병사단과 3산악사단 예하 2개 연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해상수 송을 위해 독일 해군함정 대부분을 동원하였다. 총 6개 그룹으로 나뉘어 오슬로, 크리스티안산, 에게르 순, 베르겐, 트롬헤임, 나르비크에 대한 상륙작전이 펼쳐졌고, 세계최초로 공수부대인 "팔시름예거"를 실전에 투입하여 포르네부 공항과 오슬로와 솔라, 스타방게르에 강하시키기로 하였다. AD 1940년 4월 8일 아침에 폴란드 잠수함이 독일 수송함 1척을 침몰시켰으나 통신능력 부족으로 그 사실을 영국과 프 랑스 연합군 사령부에 전달하지 못했다. 또한 같은날 아침에 항공정찰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 역 시 독일의 대규모 함대이동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독일의 의도를 노르웨이 침공이 아닌 연합군의 해상봉쇄를 돌파하여 북대서양 혹은 북해의 영국 함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오판하였다. 결국 4월 8일 아침 독일군은 아무런 방해없이 노르웨이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베저위붕작전시독일의공수부대상륙지점


노르웨이군은 이미 병력도 열세에 있었고 기습까지 허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부의 크리스티안산, 서 부의 베르겐과 스타방게르를 삽시간에 빼았겼다. 다만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에서는 순양함 1척이 해안포에 의해 격침되는 피해를 입으면서 오슬로로부터 24시간 거리의 남쪽 지역에 상륙하면서 노르 웨이 왕실과 정부, 의회가 국고를 가지고 내륙으로 피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4월 9일 노르웨이 정부는 엘베룸을 임시수도로 정했고 국왕 호콘 7세는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사전에 히틀러와 공 모하였던 노르웨이의 전 국방장관 비드쿤 크비슬링이 세계최초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쿠데타를 선언하 였는데 이 때문에 크비슬링은 반역자의 대명사로 유럽 여러나라에서 사용되는 관용어가 되었다.


공수부대의등장


하늘에서 병력을 투하하여 적 후방에서 거점을 확보하는 역할을 맡은 공수부대는 AD 1918년 제1 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의 빌리 미첼에 의해서 처음 개념을 제시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종전 후 이탈리아에서 AD 1927년 이탈리아에서 본격적인 공수부대의 가능성에 대해서 시험이 이루어졌 으나 여전히 정식부대로는 편성되지 않았다. 공수부대의 정규부대 편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나라 는 소련이었다. 기갑부대를 활용한 기동전의 일종인 종심타격이론을 주창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가 후방 파르티잔과의 조속한 연계를 위하여 공수부대 창설에 노력하였고 나중에는 병력 뿐만 아니 라 전차와 야포까지 함께 강하시키는 작전이 훈련되기도 히였다.

그러나 여전히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의 선형전투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럽 각국에서는 공수작전을 소련의 특이한 전술로 치 부할 뿐 별다르게 주목하지 않았다. 실제로 소련군도 독소전쟁 초창기에는 워낙 지상군이 지리멸렬 하고 제공권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수부대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다.
비록 공수부대가 연합국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독일 공군의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에 의해 독 일의 공수부대인 '팔시름예거(Fallschirmjager)'가 창설된다. 독일의 팔시름예거는 글라이더나 낙하 산을 통해 적 후방에 침투하였는데 AD 1940년 4월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덴마크의 올보르 공항 과 노르웨이의 솔라 공항을 탈취하는데 성공하며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같은해 5월에 이어진 프 랑스 침공에서도 팔시름예거 부대는 벨기에의 에방 에말 요새를 기습공격하여 파괴하는 혁혁한 공 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수송기에 탑승했을 때부터 곳곳에서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 는데 수송 도중에 수송기가 격추될 수도, 낙하도중에 저격당할 수도, 늪이나 호수에 낙하하여 익사할 수도, 엉뚱한 곳에 혼자 떨어져 고립무원이 될 수도 있었다. 설사 작전지역에 무사히 강하했다고 하더 라도 기본적으로 소총과 권총의 경무장이었기 때문에 아군의 지원부대가 곧바로 도착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포위섬멸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독일의 히틀러도 AD 1941년 5월의 크레타섬 전 투에서 너무 희생을 치르게 되자 다시는 대규모 강하작전을 추진하지 않게 된다.

크레타전투당시의독일팔시름예거의모습


한편 독일이 크레타섬 전투를 기점으로 공수부대의 전술적 활용을 포기하였으나 오히려 연합군은 크레타섬 전투를 계기로 대규모 공수부대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은 제101공중강습사단과 제82공수사단을 창설하여 훈련을 거듭했고 이들은 AD 1943년 7월의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상륙작 전과 AD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많은 활약을 보이게 된다. 영국군도 제1공수사단을 창설하였고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도 약 1천여명의 자유폴란드 공수여단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연합군 역시 공수부대의 특성상 지상군의 신속한 지원이 없다면 낭패를 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깨 닫게 되는데 연합군의 공수부대가 총동원된 AD 1944년 9월의 마켓가든 작전이 결국 지상부대의 늦은 지원으로 인해 실패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의 강하작전은 지상 으로 가기 힘든 적 후방으로 단숨에 침투하여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명 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헬리콥터의 개발로 인해 헬리본이라는 침투작전이 가능해지면서 낙하산 을 이용한 강하작전의 활용도는 떨어진 상태이다.


독일의덴마크와노르웨이점령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이 시작된 다음날인 4월 9일 총 2개 보병사단과 1개 연대가 덴마크를 침공하였 다. 폴란드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 공군이 올보르의 비행장을 공습하면서 제공권을 장악했고 이어 서 유틀란트 반도 국경선을 넘어가는 한편 수송선을 통해 코펜하겐에 대한 상륙작전도 동시에 이루어 졌다.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에 놓인 덴마크는 독일이 침공한 지 단 하루만에 저항을 포기하고 독일에게 내정을 간섭당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고 말았다. 덴마크가 순순히 항복하면서 독일로부터 관대 한 처분을 받게 되지만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10세는 매일 국왕의 정복을 입은채 말을 타고 코펜하겐 거 리에 나타나 자신이 주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독일의덴마크침공로모습


노르웨이의 전황 역시 독일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 4월 10일 오슬로가 독일군에게 점 령당했고 같은날 독일과 노르웨이의 최종협상이 결렬되면서 4월 11일 독일에서 출발한 독일 공군이 덴마크에서 재급유를 받고 덴마크 상공에 등장하여 엘베룸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다. 다만 바다에서 는 영국 해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뒤늦게 독일군의 목표가 노르웨이였음을 알게 된 영국에서는 4월 10일 급하게 구축함 5척을 파견하여 나르비크에 정박중이던 독일의 구축함 2척과 탄약보급함 1 척, 수송함 6척을 격침시키고 구축함 4척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4월 13일 전함과 항공모함을 보 강하여 재차 나르비크를 공격하여 독일의 구축함 8척과 잠수함 1척을 침몰시켰다. 결국 나르비크 주변 의 제해권을 영국이 확보하였고 4월 14일 영국, 프랑스, 망명 폴란드 출신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상 륙하여 독일군을 몰아내었다. 비록 이렇게 북부의 나르비크는 연합군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나 노르웨이 의 서부와 남부는 모두 독일군에게 점령된 상태였고 4월 19일 돔바스 전투를 끝으로 중앙의 노르웨이 군도 모두 항복하였다. 독일 공군이 장악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노르웨이 곳곳을 폭격하기 시작하자 4 월 28일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노르웨이의 남부와 중부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AD1940년4월유럽의세력분포현황
(적색:연합국,청색:독일,녹색:소련,흰색:중립국)


영국군의노르웨이철군과전시내각등장


5월 1일 노르웨이의 호콘 7세와 정부가 트롬스로 다시 이동하였다. 연합군의 지원으로 노르웨이는 북부 지역만큼은 지켜내었으나 5월 10일 독일이 전격적으로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 르크)를 침공하면서 5월 24일 연합군은 노르웨이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7일 노르웨이의 호콘 7세와 황태자 올라브, 정부 관료들이 모두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결국 남아있던 노르웨이군이 6월 10일 독일군에게 최종적으로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독일은 노르웨이를 점령하면서 당초 목적인 철광 석의 안정적인 수급과 발트해 및 북해 항구의 확보를 달성하였다. 노르웨이를 지배하게 된 독일은 크비 슬링의 쿠데타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수인 요제프 테르보펜을 노르웨 이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독일의 압력에 굴복한 노르웨이 의회의 폐위 요구에도 불구하고 영국으 로 망명한 노르웨이 왕 호콘 7세는 영국 BBC방송을 통해 거절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게 된다.
한편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그동안 유화책을 펼치던 영국 총리인 네빌 체임벌린이 태도를 바꿔 강경 책으로 돌아섰으나 독일의 스칸디나비아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 다.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노동당이 노르웨이 패전과 독일의 서유럽 침공의 책임을 두고 체임벌린을 거세 게 비난하고 나섰고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까지 침공하자 체임벌린으로서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총리 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체임벌린 내각을 대신하여 자유당, 보수당, 노동당을 아우르는 초당적인 전시내각 이 구성되었고 신임 총리로 처칠이 임명되었다. 처칠은 수상 취임연설에서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 물밖에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위기의 영국을 이끌게 된다.

윈스턴처칠의모습



[참고]위키백과제2차세계대전
[참고]위키백과추축국
[참고]위키백과독일-소련불가침조약
[참고]다음백과사전폴란드회랑
[참고]위키백과폴란드침공
[참고]위키백과백색작전(1939년)
[참고]위키백과소련의폴란드침공
[참고]위키백과슬로바키아의폴란드침공(1939년)
[참고]위키백과가짜전쟁
[참고]위키백과겨울전쟁
[참고]위키백과칼구스타프만네르헤임
[참고]위키백과베저위붕작전
[참고]위키백과노르웨이전역(제2차세계대전)
[참고]위키백과독일군의덴마크침공(1940년)
[참고]위키백과강하엽병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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