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생애
출생지
사망지
서독 바이에른 주 이르센하우젠(Irschenhausen)
복무
독일 제국(1905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1933년 ~ 1944년)
복무 기간
1906년 ~ 1944년
최종 계급
지휘
제18보병사단
제38보병군단
제56기갑군단
제11군
돈 집단군
남부 집단군
주요 참전
서훈 내역
- 1914년 1등 철십자장
- 1914년 2등 철십자장
- 검기사십자 호엔촐레른 가 훈장
- 1등 검기사십자 프리드리히 훈장
- 각근십자장
- 한자 십자장
- 1918년 흑색전상장
- 국방군 장기근속상
- 철십자 전투기장
- 황금 크림 순장
- 2등 용감공 미하이 훈장
- 곡엽검기사철십자장
프리츠 에리히 게오르크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독일어: Fritz Erich Georg Eduard von Lewinski, 1887년 11월 24일 ~ 1973년 6월 10일), 소위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의 장군이다. 최종 계급은 야전원수.
대대로 군인으로 출세한 프로이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만슈타인은 젊어서부터 육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 1918년) 당시 여러 전선에서 복무했다. 대전 종료 때 대위 계급까지 달았으며, 전간기에 독일군 재건에 참여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남부 집단군 참모장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5월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만슈타인의 전략을 채택했다. 만슈타인은 뒷날 "낫질작전(Sichelschnitt)"이라고 불리게 되는 획기적인 전술을 입안했다. 그 요지는 아르덴 숲을 전속력으로 돌파하여 영불해협까지 닿아 벨기에와 플랑드르의 프랑스군 및 연합군 육군을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만슈타인이 입안한 계획은 프란츠 할더를 비롯한 OKH 참모들에 의해 개량되어 실행에 옮겨졌다. 이 작전이 종료될 때쯤 대장 계급을 달게 되었고, 1941년 6월의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과 세바스토폴 포위전 (1941년 ~ 1942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1942년 7월 1일 원수로 승진했다. 이후 레닌그라드 포위전에도 참여하였다.
1942년 이후 독일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특히 만슈타인이 12월에 참여하기도 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파멸적 패배를 당했다. 만슈타인은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1943년 2월 ~ 3월)에서 일부 점령지를 회복하고 소련군 3개 야전군을 궤멸시키고 3개 야전군을 패퇴시켰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1943년 7월 ~ 8월) 당시 최고 지휘관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와의 의견차이로 불화가 심해졌고 1944년 3월 해임당했다. 그 뒤 별다른 보직을 맡지 못하고 있다가 독일이 패망하자 몇 달 뒤인 1945년 8월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만슈타인은 1946년 8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섰으며, 이 때 한 증언 및 이후 쓴 회고록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잔학행위는 순전히 나치의 탓이지 군부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소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구축에 기여했다. 그러나 국방군 조직은 둘째치고 만슈타인 본인이 철저한 나치즘의 부역자였으며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물적 증거가 확실히 존재한다. 1949년 만슈타인은 전쟁범죄 혐의로 함부르크에서 재판을 받았고, 자신의 담당 작전구역에서의 민간인 보호 및 포로 처우에 소홀했던 점 등의 죄목에 대해 9대 8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형량은 18년형이었으나 이후 12년으로 감형되었고, 겨우 4년만 감옥살이를 한 뒤 1953년 석방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서독 정부의 군사고문으로 일하면서 독일 연방군 재건에 기여했다. 1955년 유명한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지도능력을 강도높게 비난하면서도 전쟁의 정치적 민족적 맥락을 거세하고 군사를 논하였다. 1973년 뮌헨에서 죽었다.
목차
성장과정
만슈타인은 1887년 베를린에서 프로이센계 귀족이자 포병대장인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1829년 ~ 1906년)와 그 아내 헬레네 폰 슈페를링(1847년 ~ 1910년) 사이의 열째 아들 프리츠 에리히 게오르크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폰 레빈스키 가문은 카슈비아인 혈통이었으며 브로흐비츠 문장을 사용하는 귀족가였다.[1] 에리히의 이모 헤드비히 폰 슈페를링(1852년 ~ 1925년)이 중장 게오르크 폰 만슈타인(1844년 ~ 1913년)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었기에 에리히를 입양함으로써 에리히는 폰 만슈타인이 되었다. 만슈타인 집안은 그전에도 에리히의 사촌 마르타(헬레네 헤드비히 자매의 죽은 형제의 딸)를 입양했었다.[2]
만슈타인의 생부와 양부는 모두 프로이센 장군들이었고, 외삼촌과 친조부, 외조부, 양조부 모두 마찬가지였다. 보불전쟁 당시 1개 군단을 지휘한 알브레히트 구스타프 폰 만슈타인이 양부의 아버지였다. 레빈스키-슈페를링-만슈타인 집안은 총 열여섯 명의 일가친척이 장교였고, 그들 중 대부분이 장성 계급을 달았다. 훗날 야전원수이자 제국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만슈타인의 또다른 이모 거트루드 폰 슈페를링과 결혼했기 때문에 힌덴부르크는 만슈타인의 이모부가 된다.[3]
만슈타인은 1894년 스트라스부르크에 소재한 가톨릭 김나지움에 입학해 1899년까지 다녔다.[4] 6년간 플뢴과 그로스리히터펠데의 사관후보생 교련단에서 복무하고 1906년 3월 제2보병친위연대에 소위 임관했다. 1907년 1월 중위로 진급했고 1913년 10월 프로이센 전쟁대학에서 3년짜리 장교훈련 프로그램을 수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공부는 1년만에 끝나고 만슈타인은 현역으로 복귀했다.[5] 이후로도 만슈타인은 장군참모 훈련의 나머지 과정을 평생 끝마치지 못했다.[6]
초기 경력
제1차 세계 대전
1차대전 당시 만슈타인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모두 복무했다. 전쟁 개전 시점에서 중위였던 만슈타인은 제2친위예비보병연대에 속하여 벨기에 침공에 종군했다. 만슈타인의 부대는 1914년 8월 나뮈르를 함락시켰고, 9월에는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여 이모부 힌덴부르크가 지휘하는 제8군에 배속되었다. 제1차 마수리안 호 전투에 참여한 뒤 만슈타인의 부대는 제9군에 배속되어 오베어슐레지엔에서 바르샤바로 진군했다. 그러나 제9군은 러시아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했고, 만슈타인은 후퇴 와중 분견대를 이끌고 러시아 참호선을 공격하다가 왼쪽 어깨와 왼쪽 무릎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11월 16일). 총알 한 발이 좌골신경을 끊어서 만슈타인은 다리가 마비되었다. 회복되는 데는 6개월이 걸렸고 그 동안 만슈타인은 비톰과 비스바덴에서 병원신세를 졌다.[7][8][9]
1915년 6월 17일 만슈타인은 복귀하여 막스 폰 갈비츠가 지휘하는 제10군 작전참모장교가 되었다. 얼마 뒤 대위로 승진한 만슈타인은 제10군이 폴란드, 리투아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를 성공적으로 공격하는 과정에서 공세작전 계획 및 수행을 직접 경험으로 체득했다. 1916년 초 베르됭에서 공세작전을 수행하고 그 뒤에는 솜 강 근처의 사령부에서 프리츠 폰 벨로브 장군과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 참모장 밑에서 보급장교로 일했다. 이 일대는 1차대전 내내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전장이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1916년 7월에서 11월에 걸쳐 공세를 펼쳐 겨울쯤에는 독일군을 베르됭-랑스 사이에 구축된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까지 밀어붙였다. 만슈타인 대위는 1917년 10월까지 계속 벨로브 밑에서 일하다가 리가를 점령중인 제4기병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받아 그리로 옮겨갔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자 만슈타인의 부대는 동부전선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고, 만슈타인은 다시 랭스 근교의 제213보병사단으로 옮겨갔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전쟁에서 졌고, 1918년 11월 11일 휴전협정이 조인(1918년 11월 11일 휴전)된다.[10]
전간기
만슈타인은 1920년 슐레지엔 지주 집안의 딸 유타 시빌레 폰 로에슈(Jutta Sibylle von Loesch)와 결혼했다. 만슈타인은 로에슈를 처음 알게 되고 불과 3일만에 청혼했다.[11] 로에슈는 1966년에 사망했고, 슬하에 장녀 기젤라(Gisela, 1921년생), 차남 게로(Gero, 1922년생), 삼남 뤼디게르(Rüdiger, 1929년생)를 두었다.[12] 차남 게로 폰 만슈타인은 국방군 중위로 복무 와중에 1942년 10월 29일 2차대전 동부전선 북부 지역에서 전사했다.[13] 장녀 기젤라 폰 만슈타인은 에델하인리히 폰 차하리아에링겐탈 소령과 결혼했고, 사위 폰 차하리아에링겐탈은 2차대전 당시 제15기갑연대를 지휘했다.[14]
만슈타인은 1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군에 남았다. 1918년 브레슬라우(오늘날의 브로츠와프)에서 전선방위군 참모로 자원했고 1919년까지 거기서 근무했다.[15] 제2군단 사령부에 소속된 만슈타인은 500,000 여명 가량의 독일 제국육군 병력을 국가방위군 전력으로 구조조정하는 데 참여했다. 국가방위군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대로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병력 수가 100,000 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16] 젊어서부터 능력있는 지휘관으로 촉망받느 만슈타인은 베르사유 조약이 허락하는 4,000 명 장교 중 한 명으로 선택되어 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21년 만슈타인은 제5프로이센보병연대 제6중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뒤에는 제2군관구사령부 및 제4군관구사령부 참모가 되어 1927년까지 군사사 및 군사전술 교육을 맡았다. 그 해에 소령으로 승진한 만슈타인은 베를린의 국가방위군 본청 장군참모가 되었고, 외국을 돌면서 군사시설을 탐방하고 육군 동원계획 수립을 거들었다.[17] 이후 중령으로 승진한 만슈타인은 제4보병연대 경보병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어 1934년까지 거기 있었다.[18] 1933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독일의 권력을 잡음으로써(마흐터그라이풍) 바이마르 공화국은 붕괴했다. 국가방위군은 1920년대부터 이미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몰래 재무장을 시작하고 있었으며, 나치당 신정부는 공식적으로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대규모 재무장과 군비확장에 돌입했다.[19][20]
만슈타인은 1934년 2월 베를린으로 돌아와 대령으로 진급하고 제3군관구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21] 1935년 7월 1일 만슈타인은 육군 최고사령부(OKH) 산하 육군장군참모 작전처 처장이 되었다.[22] 작전처장으로 재임하면서 만슈타인은 프랑스의 독일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작전인 적색 작전(Fall Rot) 수립에 참여하였다.[23] 또한 이 시기에 중전차(Panzer)의 역할을 강조하며 전쟁의 과감한 변화를 주장하던 하인츠 구데리안과 오즈발트 루츠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장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고위 장교들은 그런 급격한 변화에 반대했고, 만슈타인은 보병을 직접 화력지원할 수 있는 자주포대 개념의 돌격포(Sturmgeschütz; StuG)의 개발을 대안으로 제안하였다.[24] 결과적으로 돌격포는 2차대전 당시 가장 가격대비 효율이 뛰어난 무기 체계 중 하나로 활약했다.[25]
만슈타인은 1936년 10월 소장으로 진급하며 별을 달았고, 베크 장군의 부관으로 제1상급설영장교(Oberquartiermeister I; 참모차장)이 되었다.[26] 1938년 2월 4일 만슈타인은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레그니차에 주둔한 제18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27] 그해 8월, 만슈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크가 사임했다. 베크는 10월의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었다. 만슈타인은 베크의 후임 참모총장이 되지 못했고, 그 자리는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참모차장 자리를 맡고 있던 프란츠 할더에게 돌아갔다. 이 일로 만슈타인은 할더에게 앙심을 품었다.[28] 1939년 4월 20일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50회 생일 잔칫날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가 하늘이 독일을 구하기 위하사 내려주신 지도자이며, 독일이 독일 인민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적대적 세상”이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썩 행복할 것이라는 둥 따위의 소리를 지껄였다.[29][30]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오메르 바르토브는 만슈타인을 비롯한 기술관료적 장교들이 나치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는 것은 이 시점에서 예견된 바라고 진단한다. 바르토브의 주장에 따르면 국방군은 나치 정권에서 독립적인 정치중립적 조직이 아니었으며, 이미 독일 제3제국에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다.[31]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프랑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마자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곁에서 집단군 참모장으로서 폴란드 침공작전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전역이 독일의 승리로 종결된 후 만슈타인은 룬트슈테트 휘하에 있다가 서부전선으로 옮겼다. 독일 참모본부는 1940년 프랑스 침공을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의 슐리펜 계획을 답습한 작전안을 작성하자, 만슈타인은 이 작전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대신 기갑전력에 의한 돌파를 기본으로 한 작전안을 제출했다.
만슈타인의 작전안은 대다수 독일 장군 뿐만 아니라 참모본부 상층부에서 거부하여, 결국 만슈타인은 동부전선으로 좌천되게 되었다.
이 때 우연찮게 만슈타인이 이 작전안을 알게 된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작전안에 제시된 지역인 스당에 집중하게 되었다. 스당은 1870년 보불전쟁 때 거의 완벽한 3면포위가 이루어진 곳이고, 1차 대전때도 히틀러 그 자신이 병으로 돌파했던 지역이었다. 그는 작전의 핵심을 알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아보이는 이 작전안을 한번 들어보자는 심정에, 곧 자신에게 신고하고 동부전선으로 만슈타인 전출되어갈 때, 만슈타인으로부터 이 작전에 대해 물어나 보기로 한다. 이때 만슈타인은 훗날 지헬슈니트라 불리는 이 작전을 히틀러 마음에 심었고, 감명받은 히틀러는 이 작전을 정식 채용한다. 무엇보다 만슈타인은 작전 개시 이전에 서부 전선의 부대에서 구데리안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고 있어서, 자신이 작성한 작전계획이 실행으로 옮겨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동지와 히틀러를 설득시키고, 일정 수준 참모본부 중 일부 장군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작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단, 12군에 의한 제2차 지헬슈니트를 위한 남부 프랑스 타격에는 한계) 서부전역에서 만슈타인은 스당에서 결정적인 돌파가 이루어진 다음 전선에 복귀하여, 38보병군단장으로서 1940년 5월에 시작한 서쪽으로 진격에서도 급진격했던 에르빈 롬멜의 7 기갑사단에 근접해서 보병을 전진시키는 훌륭한 전투를 지휘해 보였다. 실전지휘관으로서 만슈타인의 뛰어난 능력을 히틀러가 인정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영국
만슈타인은 독일군의 브리튼 섬 상륙침공작전(바다사자 작전)의 지지자였다. 만슈타인은 이 작전이 위험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참모들은 연구 끝에 상륙작전을 전개하려면 제공권 장악이 필수 전제조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공권이 장악되면 1차 공세로 4개 군단이 불로뉴에서 영불해협을 건너 벡스힐로 상륙할 예정이었고, 그 중 하나가 만슈타인의 군단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영국 왕립공군을 압도하지 못하자 바다사자 작전은 무기한 연기된다(1940년 10월 12일). 이후 1940년 말까지 만슈타인은 별 할 일이 없어져서 파리와 독일의 고향집을 오가면서 지냈다.[32][33]
독소전쟁 개전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더불어 만슈타인은 북부집단군의 56기갑군단장으로서 공격의 선두에 섰다. 이리메니 강변의 전투에서 전차에 의한 기습으로 전공을 세워 전장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 전쟁은 장기화되면 독일에게 불리하다는것을 확신한 만슈타인은 휘하의 기갑군단을 한순간도 쉬게 하지 않고 전진시켰다.
KV-1 중전차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소련 전차부대가 전선에 나타나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했다.만슈타인은 Flak18 88mm 대공포의 수평사격과 기동력이 우세한 아군 전차 집단에 의한 포위사격을 명령했다. 이에 더해서 보병의 육탄공격과 합쳐 싸운 결과 만슈타인의 부대는 29대의 KV-1을 합해 전차 200대를 격파하고 소련군의 방위선을 돌파했다. 정신부대가 퇴각하는 소련군을 쫓아넘어간 도비나강에 있던 교량을 확보한 후에 계속해서 만슈타인의 본대가 도하하여 맞은편 교두보를 확보하는것에 성공한다.
이후 진격이 더 놀라운데, 56기갑군단은 4일간 320km를 전진하여, 순식간에 발트 3국 지역을 통과해 전략적으로 레닌그라드와 스몰렌스크를 압박할 수 있는 지점까지 기동을 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낙오된 KV 전차 1대가 56기갑군단 소속 제 6 기갑사단의 진격을 22시간 동안이나 막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일동안 기갑군단이 320km를 전진해 주변 소련군 부대를 거의 와해 시켜버렸다.
크림-세바스토폴
만슈타인은 이미 포위한 레닌그라드에 돌입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전선정리를 해야한다는 이유로 정지를 명령했다. 만슈타인의 부대는 6일간 다리에 묶여있게 되었다. 1941년 9월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11군 사령관으로 전출하여 크리미아 반도의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지휘했다. 이 전장에서 소련군이 독일군 배후에 역으로 상륙하여 일시적으로 고전을 면치못했으나 만슈타인은 전선을 일단 축소하여 전력을 집중시킨뒤 반격으로 전환해 이것을 일거에 격멸시키는것에 성공해 뛰어난 전술능력을 보여주었다. 견고한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각 방면군에서 80cm 열차포 구스타프를 포함한 1,300문의 화포를 모두 모아 집중사격을 퍼부어 요새의 방어망을 분쇄해서 소련 해군이 흑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기지를 점령했다. 1942년 7월, 이 전공으로 만슈타인은 원수로 승진하고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지휘한 만슈타인은 공략에는 실패했으나 소련의 1개 야전군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북부에서 전투가 지속되는 도중에 만슈타인은 급히 편성된 돈집단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 이번 임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 포위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후에 원수)의 6군 구출작전이었다. 호트의 제 4기갑군을 선두로하는 이 구출작전은 시기를 잃어 버린데다가 투입된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짧은 기회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 6군은 괴멸되고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항복해 포로가 되었다. 당시 포위망내의 독일군의 유류비축분은 전차에 한해서 고작 수십킬로미터를 기동할 정도의 유류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도보행군으로는 악화된 독일군의 영양상태로 볼 때 탈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괴링이 보장한 1일 500톤의 보급은 독일공군의 항공자산의 상당부분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 보급량은 일일 300톤이 한계였다. 그나마, 보급을 위해 공항에서 보급용 유류를 다수 소모했고, 보급물자의 우선순위는 탄약과 유류였다.
하리코프
스탈린그라드를 탈환한 소련군은 압도적인 대병력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이때 만슈타인은 적극적인 기동 방어로 전환해 1943년 3월, 한 차례 빼앗겼던 하리코프를 소련군의 손에서 탈환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마치 그림을 그린듯한 공세 방어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성채 작전
돈 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에서 패주한 부대를 포함해 남부 집단군으로 개편되어 만슈타인 자신도 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하리코프를 탈환한 독일군의 전선에 1곳 소련군의 전선이 돌출된 부분이 있었다. 히틀러는 이 돌출부에 포진한 소련군을 남북에서 협공하여 격멸시킨다는 "성채작전"(독일어:Unternehmen Zitadelle)을 계획한다.
작전계획의 존재는 이미 소련측 첩보기관에 의해 이미 알려졌으나, 독일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슈타인은 이 작전에 대해 군사적측면에서 보더라도 별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쿠르스크 공격에서 좌우 협공부분을 맡고 있던 만슈타인과 클루게 장군은 "독일군의 현 상황에서는 소련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어도 우리쪽에서 대규모 공세에 나설 전력적 여유는 없다"라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여 이 상황을 토대로 만슈타인은 2가지의 작전안을 히틀러에게 제시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무시하고, 1943년 5월초에 공격에 나서 쿠르스크 돌출부를 협공한다는 안건을 채택했으나, 여기서 또 히틀러가 작전에 간섭해 만슈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전력을 갖춘다는 이유로 작전개시를 7월까지 연기했다. 그 결과 독일군의 전력은 상당한 정도로 증강했으나 소련측의 병력은 그것을 상회할 정도로 증가하였고, 더해서 독일군 작전의도를 모두 알아차린 소련군은 대규모의 종심진지를 강화하는 시간적인 여유까지 얻게 되었다.
4일 개시한 쿠르스크 전투는 완벽한 방어선을 구축한 소련군에 의해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고, 7월 13일 히틀러는 만슈타인과 귄터 폰 클루게를 불러 작전중지 명령을 내렸다. 쿠르스크 전투의 패전이후,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했다.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은 폴란드 국경까지 한걸음, 한걸음 교묘한 후퇴작전을 개시했다.
쿠르스크에서 드네프르로
쿠르스크 전투 이후 남부집단군에 강타 당해 전력이 부족한 남서전선군을 후속한 스텝전선군이 남부집단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7월부터 8월에 이른 소련군 역공세에 남부집단군에 일대 위기가 닥쳤는데 제 1 기갑군이 포위를 당했다. 이때 제 1 기갑군 사령관인 한스 후베 기갑 대장은 만슈타인 원수에게 보낸 전문에서 체르카시-카메네스크 남방으로 후퇴하여 전선으로 합류하겠다고 전언했으나, 그대로 남쪽으로 갈 경우 카르파디아 산맥에 의해 퇴로가 한정될 것을 우려한 만슈타인은 한스 후베에게 무조건 서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만슈타인은 상대방 무전 감청을 적극 활용하고 한스 후베의 지휘력을 신뢰하여 드네프르 강을 도하토록하여, 소련군 근위 기갑군단이 포위하였던 체르카시-카메네스크를 서쪽으로 돌파토록하여 적 기갑군단 1개를 전열에서 탈락시키고, 후속하는 적군보다 먼저 도강한 제 1 기갑군이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토록하여 기동포위진을 벗어나 전선을 안정시켰다. 이후 전선은 1944년 6월 22일 바그라치온 작전까지 소강상태를 보인다. 이후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은 카르파디아 산맥 중심으로 교착방어를 펼치고, 중요 기갑전력을 중부집단군에 배속하여 중부집단군 강화를 건의하였다. 그리고 중부집단군을 일시 후퇴시켜 전선을 축소할 것을 건의하였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서서히 후퇴하기보다는 일단 크게 후퇴하여 소련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전선을 정리, 축소한 뒤 병력을 재편성하는것이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사고가 경직된 히틀러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고 거듭된 의견 충돌 끝에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켰다. 후임 지휘관으로 발터 모델 원수가 임명되어 헝가리군과 연계하여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퇴각을 지휘하였다.
드네프르 전역
해임
1944년 3월을 끝으로 만슈타인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히틀러 정권의 전복 계획에 참가할것을 타진받았으나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때 만슈타인은 "프로이센 원수는 반역하지 않는다"란 유명한 말을 했다. -헤닝 폰 트레스코프 소장의 친척이었던 트레스코프 소령의 우회적인 반역권유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1945년 5월 히틀러 자살이후 총통으로 지명된 카를 되니츠 제독은 그를 재기용하려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 종전 후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소련은 신병을 인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그는 결국 뉘른베르크 재판에 서게 된다.
전후
전범재판
1941년 11월 20일,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예하 11군의 지휘권을 인계 받으면서 "유대인-볼셰비키 체제는 완전히 근절되어야 한다."며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에 유죄가 인정되어 영국 군사법정은 1949년에 금고형 18년형을 선고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4년후 석방되었다. 그 후 만슈타인은 새로 탄생한 독일 연방군의 창설에 주력하여 당시 서독 정부의 국가방어위원회의 고문역을 맡았다. 만년에 전쟁터에서 사망한 아들 게로의 기억에 애착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녀로는 뢰데게르 폰 만슈타인, 기셀라 린겐탈이 있다. 1973년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원제:독일어: Verlorene Siege)를 남기고 6월 10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반유대주의자 만슈타인
부관과 아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비정치적임을 표방했으며 의회의 당파싸움에 회의적이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이센 군인의 명예로 여겨진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처형부대의 잔혹한 인종 범죄 행위에는 철저히 외면하며 보고 받기를 거부하였고, 현대 독일 전사학계에서는 만슈타인에 대하여 동부전선에서의 나치 인종 범죄에 동조한 장성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취하고 있다.
만년과 회고록
서훈 내역
- 1914년 1등 철십자장 및 2등 철십자장
- 검기사십자 호엔촐레른 가 훈장
- 1등 검기사십자 프리드리히 훈장
- 각근십자장
- 함부르크 한자 십자장
- 1918년 흑색전상장
- 국방군 장기근속상
- 철십자 전투기장(1939년)
- 황금 크림 순장
- 2등 용감공 미하이 훈장(루마니아)
- 곡엽검기사철십자장
- 국방군 보도에 8차례 언급: 1941년 10월 11일, 12일, 31일; 1942년 5월 19일, 20일; 1943년 3월 20일; 1943년 8월 4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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