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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2차 세계대전(Ⅲ) 서유럽 전역(1) 독일의 전격전, 프랑스 전투 대승리

출처: http://winlee96.blog.me/220279498795


프랑스 전투의 배경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 결심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한 이후 오스트리아 병합(AD 1938년 3월), 체코 병합(AD 1939년 3월), 폴란드 분할점령(AD 1939년 9월), 스칸디나비아 침공(AD 1940년 4월~6월)을 연이어 성공하였 다. 오스트리아와 체코 병합은 영국의 총리인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이용한 결과이었고 폴란드 분할점령은 소련과의 비밀협정으로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침공 역시 영국과 프랑스 의 미온적인 대응 덕분에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독일의 폭주를 효 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한 채 영국은 노르웨이 왕실과 정부를 망명시키는 역할만 수행했고 프랑스는 유 일한 군사행동이었던 AD 1939년 9월의 자를란트 진격마저도 곧바로 취소하며 "가짜전쟁"이라는 비아 냥만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실 독일의 내부사정 역시 그리 좋지 못했는데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탄 약과 포탄의 재고량이 2주 분량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겨우 승리할 정도로 위기상황이었고 스 칸디나비아 침공에서는 독일 함대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했으면서도 그 의도를 북대서양으로 돌파로 오판한 영국 해군의 실수 덕분이었다.

이렇게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계속하여 승승장구하게 되자 히 틀러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스칸디나비아 침공을 일으키기 이전인 AD 1939년 10월 6일 강 화를 제의하는 기만책을 펼치는 한편 아직 영국과 프랑스의 답변이 없던 AD 1939년 10월 9일 총통지 령 6호를 발령하여 프랑스 침공을 공식화했다.

양측의 전략

독일의 황색작전 차질

 

독일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나폴레옹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연이어 전쟁 을 벌이며 프랑스와 앙숙인 관계가 되었고 이 때문에 많은 전쟁수행계획이 검토된 바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아직까지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때까지의 성공은 단 순히 운이 좋아서라는 생각이 독일 참모본부 내부조차 팽배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의 명령으로 프랑스 침공을 검토하게 된 육군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와 그의 참모본부는 고심을 거듭하여 AD 1939년 10월 이른바 "황색 작전(Fall Gelb)"을 입안하였다.

황색 작전의 주요내용은 우익을 주공으 로 벨기에 지역을 크게 우회하여 벨기에와 북프랑스의 방어에 나설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으로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의 슐리펜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 당 시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 지방을 회복하기 위해 공격하는 것을 전제로 한 회전문 효과를 노린 것이 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또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누 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허술한 계획이었다.

 더구나 본래의 슐리펜 계획조차 초반의 대성공에도 불구하 고 제1차 마른전투의 패배로 끔찍한 참호전과 소모전만 야기시킨 실패한 작전이었다. 당연히 군사 문 외한인 히틀러조차도 황색작전을 탐탐치 않게 생각했고 AD 1940년 1월 10일 공군 소속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라인베르거 소령이 황색작전 계획서를 소지한 채 벨기에에 불시착하면서 작전계획서가 연합군 의 손으로 넘어가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황색작전에 대한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독일의 황색작전 초기 다양한 형태


프랑스의 방어전략, 딜 플랜

비록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었지만 북프랑스 지방이 주요 전장이 되면서 많은 희생 을 치뤄야 했다. 이에 프랑스는 독일의 국경에는 고도로 요새화된 방어선인 '마지노 선( Maginot Line) '을 구축하여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방어가 가능하도록 했고 대신하여 주요 병력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주요 침공로였던 벨기에 방면에 병력을 집중배치 하였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총사 령관인 모리스 가믈랭은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지방은 마스 강과 아르덴 삼림지대라는 천연 장애 물이 존재하므로 광활한 개활지인 벨기에 중북부와 네덜란드 방면을 방어하는 것에 가장 크게 신경썼 고 이를 위해 나뮈르에서 안트베르펜으로 이어지는 딜(Dyle) 강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는 이른바 "딜 플 랜(Dyle Plan)" 혹은 "D 플랜"으로 불리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독일의 침공을 벨기에서 저지하여 북 프랑스 지방이 전쟁터로 변하는 것을 방지하기를 원하는 프랑스의 제안에 대하여 벨기에도 비록 중립 국이었지만 독일군에 단독으로 맞서다가 전 국토를 점령당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뼈아픈 경험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프랑스군이 자국 영토에 주둔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영국 역시 벨기에를 유럽 과의 주요 교역로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영국 원정군(BEF; British Expeditionary Force)"을 다시 조직하여 벨기에 방면에 투입하기로 하였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의 모습

AD 1940년 1월 10일 독일의 라인베르거 소령이 벨기에에 불시착한 사건을 통해 독일의 황색작전 계획서 를 입수하자 가믈랭은 딜 플랜의 타당성을 더욱 확신하였다. 다만 가믈랭은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프랑스의 유일한 기갑군단을 벨기에 방면으로 전부 이동시켰고 네덜란드의 브레다까지 방 어선을 연장하면서 20개 보병사단을 추가적으로 투입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 내에는 더이상의 예비병 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일각에서는 독일이 벨기에가 아닌 그 남쪽으로 주공방향을 결정할 경우 프 랑스의 주력군이 벨기에에 고립된 채 포위섬멸될 수 있다는 약점을 지적하였으나 가믈랭은 게의치 않았 다. 이는 가믈랭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참호전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맹신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가믈랭은 개전 직전인 AD 1940년 3월 독일의 기갑부대가 룩셈부르크 방 면에 집중되고 있다는 첩보를 스위스로부터 전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살한 채 자신의 계획을 전 혀 수정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방어전략, 딜플랜의 모습

독일의 새로운 전략, 만슈타인의 낫질작전

라인베르거의 불시착으로 작전계획의 변경이 불가피해진 독일군 내부에서 새롭게 주목받은 작전계획은 A집단군 참모장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이른바 "낫질(Sichelschnitt) 작전"이었다. 만슈타인은 기존의 황색작전이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했던 참호전으로 이어질 뿐이고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소모전으로 이어지며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반복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 때문에 독일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상치 못한 기습작전으로 연합군의 허를 찔러야한다고 생각했다.

만슈타인이 주목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발달된 전차, 차량화보병, 급강하 폭격기, 공수부대로서 이들에게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부여하여 제대로 활용한다면 제1차 세계대전의 소모적인 참호전 대신에 전통적인 프로이센식 기동전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바탕으로 만슈타인은 기갑부대를 하나의 작전술 제대로 집중편성하고 이를 주공으로 삼아 프랑스의 마지노 선과 벨기에 방어선의 연결지 점인 아르덴 지역을 신속하게 돌파하여 대서양 해안까지 진격함으로써 벨기에와 북프랑스에 주둔중인 프랑스군에 대한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만슈타인은 이 작전계획 을 자신의 상관인 A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게 보고하였고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의 작 전계획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모든 작전계획을 참모본부에 보고한다는 내부 전통에 따라 참모 총장인 할더에게 전달하였다.

낫질 작전의 입안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모습

당시까지 기갑부대의 운용은 아직 제대로된 전술교리가 정립되지 않은 초기 상태였기 때문에 만슈타인 이 제안한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 독립 운용은 지나치게 모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만슈 타인이 돌파구로 상정한 아르덴 지역은 삼림으로 우거진 고원지대로 기갑부대의 기동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고 설사 기갑부대가 아르덴 지역의 돌파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보병의 측면보호도 없이 단독으로 진격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으로 여겨졌다.

만슈타인의 작전계획을 지지한 것은 기 갑군단장으로서 독일 전차부대의 운용교리를 수립 중에 있던 하인츠 구데리안 뿐이었다. 결국 만슈타 인의 작전계획은 반려되었고 오히려 프랑스 전선과 정반대에 위치한 폴란드의 제38군단장으로 임명되 는 사실상의 좌천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만슈타인은 포기하지 않았고 부임지로 떠나기 직전에 우 연히 히틀러의 비서실장인 루돌프 슈문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슈문트의 주선으로 히틀러와 독 대할 기회를 잡았다.

당시 히틀러는 군사지식이 부족하였으나 전쟁의 장기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참 모총장 할더의 황색작전에 실망하고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독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작전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명령하였다. 다만 이미 결정된 만슈타인의 폴란드 부임을 되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만슈타인 없이 할더에 의해 작 전계획의 보완이 이루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만슈타인의 작전계획에는 별다른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 고 프랑스 침공계획인 "황색 작전"의 수정안이었으나 훗날 전투의 결과를 보고 '거대한 낫으로 모든 풀 을 베어버리는 것과 같다'라는 의미에서 "낫질(Sichelschnitt) 작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낫질 비유는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이 처음 쓴 것으로 본래는 당연히 영어표현인 "Sickle Cut"이었던 것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독일의 낫질작전 모습(적색 점선)

프랑스 전투의 전개

양측의 배치상황

독일군의 배치상황

독일의 프랑스 침공 작전은 크게 2단계로 구성되어 1단계는 조공이 벨기에를 공격하여 시선을 끄는 동 안 주공이 아르덴 지역을 돌파하여 벨기에에 주둔한 연합군을 포위섬멸하는 "황색상황(Fall Gelb)"이었 고 2단계는 황색 상황이 성공하는 경우 마지노 선을 무너뜨리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적색 상황(Fall Rot)" 이었다.

독일군의 주공 역할을 맡은 A집단군은 룬트슈테트 지휘 아래 제 4군, 제12군, 제16군의 총 3개의 야전군 예하 45.5개 보병사단과 7개 기갑사단이 배치되었고 아르덴 지방의 돌파임무를 맡았다. 비록 임시편성이기는 하였으나 만슈타인의 계획에서 중점을 두었던 작전군 제대의 기갑부대 편성은 '기갑집단(Panzer Group)'이라는 이름으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지휘 아래 편성되어 A집단군과 함께 아르덴 지방을 돌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만슈타인 계획을 가장 적 극적으로 지지하였던 구데리안은 제19기갑군단장으로서 기갑집단에 배속되었다.


프랑스 전투의 선봉에 선 하인츠 구데리안의 모습

조공의 역할을 맡은 B집단군은 페도르 폰 보크 지휘 아래 제6군, 제18군의 2개 야전군을 이끌고 벨기 에 방면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비록 B집단군의 역할은 조공이었으나 연합군의 주력병력을 상대해야 하 는 만큼 독일이 자랑하는 최정예 공수부대가 세계 최초로 사단 규모의 투입이 결정되었고 3개의 기갑 사단도 배속하여 연합군에게는 마치 주공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2개의 야전군(제1군, 제 7군)으로 구성된 C집단군을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지휘 하에 별도로 편성하였는데 C집단군의 역할은 마지노 선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을 견제하는 한편 남쪽의 스위스 방면으로 우회하여 이탈리아군과 함 께 남프랑스로 침공할 것처럼 기만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만일 A집단군의 아르덴 돌파가 성공한 후 "적색 상황(Fall Rot)"이 전개되는 경우 A집단군이 마지노 선의 배후로 진격하는 동안 이에 호응하여 최종적으로 마지노 선을 돌파하는 임무도 함께 부여받았다.

<독일군의 구성현황>

프랑스군의 배치현황

프랑스군 총 3개의 집단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스통 비요트가 지휘하는 제1집단군은 프 랑스의 딜 플랜의 주력부대로서 프랑스의 4개 야전군(제1군, 제2군, 제7군, 제9군)으로 구성되었다. 다 음으로 앙드레 프레틀라가 지휘하는 제2집단군은 3개 야전군(제3군, 제4군, 제5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마지노 선의 방어를 주임무로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앙드레 앙트왕 베송이 지휘를 맡은 제3집단군 은 신설부대로서 아직까지 제대로 병력 충원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노 선의 방어를 보조하는 역할 을 맡았다. 프랑스는 총 117개 사단 중 104개 보병사단을 벨기에 방면에 투입하였고 영국 원정군 13개 사단과 벨기에 22개 사단, 네덜란드 10개 사단, 폴란드 2개 사단도 연합군에 참전하여 베네룩스 방면 의 방어를 맡았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독일과 달리 기갑부대를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전술교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어디까지나 보병을 보조하는 수단으로서 기존 사단에 혼재시켜 배치시킨 상태였다. 더구나 전차 자체 는 독일의 개별 성능 면에서는 우수했으나 독일과 달리 개별 전차별로 무전기를 배치하지 않아 전차끼 리의 연계운용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약점은 개전 후 프랑스 전차부대가 독일 전차부대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된다. 공군의 경우에는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처음부터 열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믈랭은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대비하여 공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만들고자 연합군의 공군 전력 대부분을 대서양 연안에 배치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 때문에 개전 초기 아르덴을 돌파하는 독일 기갑부대가 아무 런 피해를 입지 않게 된다.

프랑스 공격 1단계, 황색 상황

네덜란드 방면

AD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 침공을 시작하였다. 독일의 B집단군은 연합군에게 주공처럼 보여 야 하기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프랑스 방향으로 강력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네덜란드는 비록 중립국 이었지만 독일군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네덜란드로서도 독일이 선전포고도 없이 침공할 줄은 몰랐 다. AD 1940년 5월 10일 밤에 독일 공군기들이 출격하여 네덜란드 공군기 144대 중 110대를 파괴시켰다.

이어서 두 종류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였는데 주로 글라이더나 수송기를 이용하는 제22공중강습 사단과 낙하산을 이용하는 독일공군 제7비행사단 예하 팔시름예거(Fallschirmjager)가 그들이었다. 이 들의 임무는 네덜란드의 행정수도인 헤이그를 장악하는 것과 네덜란드의 주요 비행장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지상군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로테르담, 도르드레흐트, 무어데이크의 주요 다리를 미리 확보하 는 것이었다. 비록 헤이그에서는 수송기 Ju 52의 125기가 네덜란드의 대공포에 격추되고 낙하에 성공 한 낙하부대 4천명 중 1천2백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피해를 입으며 작전에 실패하였지만 나머지 지역 은 대부분 성공을 거둬 로테르담의 발하펀 공항을 확보한 뒤 마스 강의 대교와 무어데이크 대교도 장악 하였다.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공 모습
(보라색: 독일군 점령지역 / 청색선: 네덜란드군 방어선 / 황색선: 벨기에군 방어선)

네덜란드군이 분전하고는 있었으나 독일의 지상군까지 진격해오기 시작하면서 전황은 네덜란드에게 극 도로 불리해져만 갔다. 네덜란드는 우선 5월 12일에 율리아나 공주와 그녀의 자식들을 영국으로 피신 시켰고 빌헬미나 여왕도 다음날 내각 각료들과 함께 영국이 제공한 전함을 타고 영국으로 이동했다. 율 리아나 공주의 남편인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와 총사령관 헨리 빈켈만이 네덜란드에 남아서 독 일의 무조건 항복요구에도 불구하고 끊질긴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에 독일 측에서는 5월 14일 로테르 담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1천명을 사망시키고 2만4천채의 가옥, 1천2백개의 공장, 2천5백개 의 상점, 70개의 학교, 4개의 종합 병원 등을 파괴하였으며 16일 간이나 불타오르는 대화재를 일으켰 다. 독일 공군의 폭격이 로테르담에 이어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에도 이루어지자 네덜란드군의 빈켈만 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결정하였다. 5월 14일 4시 빈켈만이 공식적으로 항복하였고 베른하 르트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도망쳤다. 제이란트의 네덜란드군 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항전에 나섰으나 결국 5월 17일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 하고 빌헬미나 여왕을 중심으로 한 망명정부를 런던에 수립하고 저항의지를 포기하지 않게 된다.

폭격당한 로테르담의 모습

벨기에 방면

네덜란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AD 1940년 5월 10일 오전 4시 벨기에를 대상으로도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선 독일 공군이 1,357대가 동원되어 개전 24시간 동안 벨기에에 주둔 중인 벨기에의 공 군기 179기 중 89기를 파괴하면서 삽시간에 제공권의 우위를 잡은 후 벨기에가 자랑하는 에방 에말 요 새를 공격하기 위해 팔쉬름예거를 투입하였다. 에방 에말 요새는 총 8km의 길이에 걸쳐 17개의 벙커 와 알베르 운하라는 지형적인 이점을 갖추고 있어 "작은 마지노 선"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철벽 요 새로 평가받았으나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침투하는 독일의 팔시름예거의 3차원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이어서 운하의 다리들도 독일의 공수부대에게 점령당하면서 벨기에군은 후퇴해야만 했다.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 모습
(적색원: 에방 에밀 요새 / 청색원 : 아뉘 전투 전장)

독일의 벨기에 공격이 시작되자 프랑스군과 영국군(BEF; 영국원정군)은 사전에 준비한 딜 플랜을 가동 하여 딜 강의 방어선으로 향했다. 연합군의 본격적인 방어는 와브르와 나무르 사이에 위치한 정블루 방 면으로 독일군이 진격하면서 이루어졌다. 정블루 지역은 평탄하여 전차 기동에 유리한 지역으로 5월 12일 정블루의 동부인 아뉘에서 르네 프리우가 지휘하는 연합군의 기병군단과 에리히 회프너가 지휘 하는 독일의 제16기갑군단이 대대적으로 격돌하게 되었다.

아뉘 전투는 양측 총 1천여대의 전차가 격돌한 당시까지 중 가장 큰 규모의 전차전으로서 비록 전차 숫자는 623대의 독일군 전차가 415대의 연 합군 전차를 압도하였으나 프랑스군의 전차가 성능이 월등히 앞서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기갑부대 운용의 전술교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선형으로 늘어서기만 했을 뿐인 반면에 독일군은 모든 전차에 무전병을 배치하여 전차 간의 유기적인 협력이 가능했고 독일 폭격기의 지원까지 받았다.

결국 전차 성능 자체는 프랑스가 앞서 프랑스군이 105대를 잃는 동안 독일군은 160여대의 피해를 입었으나 전력을 집중시킨 독일 기갑부대가 프랑스 기병군단의 선형 방어선 돌파에 성공하였고 프랑스 기병군단으로 서둘러 후퇴해야만 했다. 아뉘 전투에 대해서 프랑스의 프리우는 파괴된 전차의 숫자만 가지고 프랑스의 전술적 승리를 주장하였고 독일의 제19기갑군단 예하의 제4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 고 공세를 중단하였기 때문에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5월 14일 남은 독일의 제3기갑사단 이 단독으로 정블루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해내면서 연합군의 방어선이 더욱 남쪽으로 밀려갔다. 이제 는 독일의 조공에 불과한 공격만으로도 연합군이 총력을 기울여 구축한 딜 강 방어선조차도 위험한 상 황이 된 것이었다.

아뉘 전투에서 파괴된 프랑스의 중전차 소뮈아 S35의 모습

아르덴 방면

독일의 프랑스 침공의 조공 역할인 네덜란드와 벨기에 방면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반 해 작전의 핵심인 기갑집단의 아르덴 돌파는 시작부터 차질을 빚었다. 아르덴을 향하는 도로는 4개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41,000대에 이르는 기갑부대가 동시에 통과하는 데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 었다.

그러나 전차부대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연합군 공군기들이 모두 대서양 연안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기갑집단은 무사히 아르덴 지역을 지나갈 수 있었고 5월 13일부터 독일군은 스당 근처에서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 예하의 제1기갑사단, 제2기갑사단, 제10기갑사단이 일제히 마스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제2군의 제55보병사단에게 스당에서 뫼즈에 이르는 약 6km 방어선의 구축을 맡기고 언덕에 103개의 벙커를 설치하였으나 개전하자마자 독일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에 노출되 면서 통신선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지휘체계가 붕괴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사단 사령부 가 위치한 불송의 방어선을 독일군 기갑부대가 돌파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도주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제55보병사단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붕괴되었다. 사실 이 방면으로 진격한 독일의 제1기갑사단의 등장은 무려 12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프랑스 제55보병사단의 갑작스러운 후퇴는 집단환각증세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독일군의 아르덴 방면 진격 모습

독일 제1기갑사단의 스당 방면 돌파가 성공한 것과 달리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에서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에 노출된 제2기갑사단과 제10기갑사단의 도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나 스당 방면 돌파에 성공 한 제1기갑사단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도하에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 측에서는 가용한 공군기를 총동 원하여 뫼즈 주변의 3개의 다리를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독일군의 조밀한 방공망과 총집결된 공군력에 동원한 공군기 중 44%가 격추되는 피해만 입은 채 물러나야 했다. 그 결과 독일군의 선봉대 역할을 맡 은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이 모두 도하에 성공하였고 5월 14일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에게 하루에 최대 8km만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구데리안은 정찰을 명분으로 내세워 클라이스트의 명령을 사실상 무시하면서 거침없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제2군이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는 한편 제9 군과 신설 제6군을 투입하여 역습을 시도하였으나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의 진격이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역습의 기회를 잡지 못 했다. 5월 15일이 되면 구 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이 스당 서부의 프랑스 제6군과 제9군의 남쪽 측면 사이로 돌파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아르덴의 좁은 도로에 뒤처져 있던 독일의 제41기갑군단과 제15기갑군단이 뒤늦게 합류하였 다. 제41기갑군단에 의해 프랑스의 제9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제15기갑군단이 제19기갑군단의 좌 측을 엄호하면서 프랑스의 제6군 방어선마저 무너졌다. 특히 제15기갑군단에 소속된 제7기갑사단의 에르빈 롬멜은 최선봉으로서 24시간 동안 무려 48km를 진격하면서 프랑스 측으로부터 "유령사단"으 로 불리게 된다.

프랑스 전투 초기(5월 10일 ~ 16일)의 전투진행 모습

독일 기갑집단의 대서양 도착과 낫질작전의 완성

이제 독일의 기갑부대들은 경주라도 하듯이 서쪽으로 거침없이 진격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의 방어선 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5월 15일 아침이 되면 프랑스의 총리인 폴 레노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에 게 "우리는 공격당했고 전투에서 패배했다."라는 전문을 보낼 정도로 전황이 프랑스에 극도로 불리해 졌다. 이튿날인 5월 16일에 처칠이 프랑스의 폴 레노를 다독이기 위해 파리로 직접 갔으나 상황의 심 각성만 깨달은 채 되돌아와야 했다. 이와 함께 벨기에에 주둔 중이던 연합군 제1집단군이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총퇴각을 시작했으나 이를 차단해야 하는 독일의 기갑부대들의 내부사정 때문에 진격 에 제동이 걸렸다. 표면적인 이유는 자체 연료를 모두 소모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독일 기갑부대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 보병부대와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진 것을 우려한 독일 지휘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독일 지휘부는 보병부대의 보호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기갑부대의 측 면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비록 구데리안은 마치 과거의 기병대처럼 기갑부대가 단독으로 돌파할 수 있으며 측면이 노출되는 것은 큰 위험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나 아직 까지 기갑부대의 운용에 대한 전술교리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지휘관들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병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던 히틀러가 제1차 마른전투에서 독일군 우익의 노출된 측면에 대한 프랑스군의 역습을 성공하면서 기나긴 참호전으로 이어진 점을 상 기하고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당분간 보병부대와 함께 방어선을 형성하라고 명령하기에 이른다. 그 러나 롬멜의 제7기갑사단은 정지 명령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프랑스군 잔존병력을 물리 치고 5월 17일 아벤을 점령하였고 5월 18일에는 캉브레까지 무단으로 진출하였다.

에르빈 롬멜의 모습

AD 1940년 5월 19일 독일의 참모총장 할더는 끈질기게 설득하여 히틀러로부터 재진격의 명령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클라이스트의 기갑집단 뿐만 아니라 A집단군의 제15기갑단장 헤르만 호트 에게 제16기갑군단의 지휘까지 맡겨 대서양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가믈랭 이 벨기에 방면에 고립된 연합군을 구출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의 예비병력을 수습하여 독일군 기갑부대 의 측면에 역습을 가하는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5월 19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면서 실시되지 않았 다. 후임으로 임명된 막심 베강은 전황 파악을 이유로 몇 일 동안 파리에 머물렀고 나중에야 가믈랭의 역습작전과 유사한 작전을 제안하였으나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반격의 기회가 사라진 상태였다.

또한 영국 참모총장인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영국군 사령관인 고드 로트와 프랑스의 제1집단군 과 함께 아라스 일대에서 역습을 감행하였으나 프랑스의 제1집단군 사령관인 비요트가 소극적으로 임 하면서 영국군 단독작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벌어진 5월 21일의 아라스 전차전에서 전투 초반 에 영국군의 2개 전차연대가 독일군의 보급부대를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독 일군이 대전차 포를 동원하여 반격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패배하였다. 더구나 프랑스의 비요트가 교통사 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제1집단군의 지휘 공백까지 발생했다. 다만 아라스 전차전에서 보병 의 호위가 없는 전차부대가 보병대에 의해 격퇴될 수 있음이 증명되면서 거침없던 롬멜의 진격에 약간 제동이 걸리게 된다.

프랑스 전투 중기(5월 16일 ~ 21일)의 전투진행 모습

히틀러의 오판과 됭케르크의 기적

전황이 극도로 프랑스에 불리해지자 영국군도 프랑스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향후에 예정된 독일군의 영국 상륙에 대비하기 위하여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대서양 해안으로 전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5월 22일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이 연합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 진격을 개 시하여 제19기갑군단 예하 제1기갑사단과 제2기갑사단에게 각각 칼레, 불로뉴로 향하게 하여 5월 22 일 불로뉴가 함락되고 5월 23일에는 칼레마저 독일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제 독일군은 벨기에 와 북프랑스에 위치한 프랑스군에 대한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하는 낫질작전이 완성되었고 북프랑스 일 대의 항구 대부분을 장악하여 퇴로도 대부분 봉쇄하였다. 연합군이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직 독일의 제10기갑사단이 도착하지 못하여 연합군에게 유일하게 남게 된 됭케르크를 이용하여 바다로 도 망치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병력에 비해 수송함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고 독일군이 5월 24일 됭 케르크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면서 독일군의 포위망이 시시각각으로 좁혀오고 있었 다. 그런데 연합군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전선을 방문한 독일의 히틀러가 갑자기 전군에 진격정지 명령 을 하달한 것이었다.

프 랑스 전투 후기(5월 21일 ~ 6월 4일)의 전투진행 모습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독일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개전 보름 만에 승리를 눈앞에 두 고 있었으나 전쟁이 지나치게 독일 측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히틀러는 연합군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 는 것은 아닌 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계속해서 보병 사령관들이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사이의 간 격이 지나치게 벌어져 있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독일 공군의 총 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이 됭케르크에 갇혀버린 연합군을 공군기 만으로 확실하게 쓸어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나섰다. 결국 히틀러는 5월 24일 전선에 방문하여 지나치게 간격이 넓어진 지상군을 재 정비하고 됭케르크 전투에서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인다는 명분 아래 진격정지 명령을 내렸다. 비록 진격정지 명령이 2일 뒤인 5월 26일에 철회되었지만 독일군의 공격이 멈춘 사이 영국에서는 됭케르크 에 갇힌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구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작전을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동원할 수 있는 군함을 총동원하였고 이것도 부족하자 민간 선박까지 징발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징발 대상이 아닌 선박까지 자진해서 참여하여 여러 가지 화물선, 어선, 유람선, 구명정, 요 트 등까지 총동원되었는데 이들을 "됭케르크의 작은 배들(Little Ships of Dunkirk)"이라고 부른다. 됭케 르크에서의 대규모 구출작전은 영국의 처칠이 작전을 설명한 다이나모 룸에서 유래한 "다이나모 작 전"으로 불렸다. 구출해야 하는 대상은 영국군과 벨기에군, 그리고 프랑스의 3개 야전군으로 5월 27일 부터 6월 4일까지 9일간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괴링이 호언장담한 대로 독일 공군기를 동원하여 공 습에 나섰으나 영국 측도 독일 공군기의 공격으로부터 구출작전을 엄호하기 위하여 영국 공군기들도 총 출동시킨 상태였다. 결국 영국 공군기의 맹활약과 후위 엄호를 위해 남은 프랑스군 2개 사단의 희생 덕 분에 연합군 총 34만명이 영국으로 무사히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원정군의 됭크르크 철수 모습

비록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던 영국군이 무사히 귀환하였지만 프랑스로 가지고 갔던 화포와 차량 등 무기와 군수물자는 모두 버리고 와야만 했다. 또한 6척의 구축함이 격침되고 19척의 구축함이 손상되었으며 총 400척 이상의 연합군 선박이 침몰하거나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퇴각한 프랑스군 중 10만명이 프랑스로 되돌아가면서 영국 내에 남은 연합군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 다. 하지만 군대뿐만 아니라 민간 선박까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패전을 거듭하던 영국인에게 다이나모 작전의 성공은 큰 용기를 주었고 "됭케르크의 기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반면 에 완전한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이를 내처 버린 독일군에게는 낫질작전의 대성공의 큰 오점으로 남았 고 무사히 영국으로 귀환한 연합군은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프랑스로 되돌아오게 된다.

프랑스 공격 2단계, 적색 상황


비록 됭케르크의 철수작전으로 연합군이 괴멸되는 사태 만은 막아내었으나 이제 베네룩스 3국과 북프 랑스의 북해 연안은 모두 독일군의 차지가 되었고 벨기에와 북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주력병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렇게 하여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 중 1단계인 황색상황이 종료 되었고 두번째 단계인 적색 상황이 시작되어 파리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총사령관인 베 강은 남프랑스의 예비병력을 총동원하여 파리 방어에 나섰고 프랑스 병사들 역시 조국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놀라운 분전을 거듭하였으나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동 안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던 이탈리아가 6월 10일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알프스를 넘어 프 랑스를 침공할 뜻을 비추면서 프랑스는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독일은 B집단군을 남하시 켜 파리 점령에 나서게 했고 A집단군은 마지노 선 후방으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그동안 마지노 선을 견 제하던 C집단군에게 마지노 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였으며 이탈리아에게도 프랑스 남부 지방 으로 군대를 보내도록 요청했다.

프랑스 전투의 말기(6월 4일 ~ 12일)의 전투진행 모습

독일의 B집단군의 진격에 프랑스의 방어선이 곳곳에서 무너졌고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6월 10일 파리 를 무방비 도시로 선포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자 독일군은 6월 14일 파리에 입성하였다. 아직 철수하지 못한 영국 원정군은 셰르부르옥트빌와 르마브르를 통해 철수작전을 펼쳐 독일 공군기의 폭격에도 불구 하고 6월 15일부터 열흘간 약 20만명이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6월 18일 롬멜의 제7기갑사단이 노르망 디와 셰르부르옥트빌 항구를 점령하면서 영국의 제51보병사단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비록 6월 15 일 C집단군의 마지노 선에 대한 공격인 타이거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6월 17일 A집단군의 선봉인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이 후방에 도착하면서 견고하던 마지노 선도 더 이상 버티지 못 했다. 프랑스 군 대부분이 6월 25일 항복했고 최후까지 항전하던 일부 프랑스군도 7월 10일 저항을 포기해야만 했 다. 이렇게 하여 마지노 선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제2집단군 50만명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다만 6월 10일 뒤늦게 참전한 이탈리아는 전쟁 준비가 덜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에 12일 동 안 별다른 군사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6월 21일이 되어서야 진격을 시작하였으나 알프스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에게 저지당하면서 지중해 해안으로 겨우 8km만 전진할 수 있었다.

함락된 파리를 방문한 아돌프 히틀러의 모습

정전협정 체결과 비시 프랑스의 수립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에 놓인 프랑스 내부에서는 주전파인 폴 레노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6월 16일 총 리직을 사임하였고 대신하여 화평파인 필리프 패탱이 신임 총리가 되었다. 비록 패탱은 제1차 세계대 전의 승리를 이끈 전쟁영웅이었으나 이제는 독일에 휴전을 간청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6월 25 일 정전이 합의되었고 정전조약의 체결장소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정전조약이 체결되었던 콩피에뉴 숲 이 선택되었다. 독일의 히틀러는 AD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정전협정을 맺은 기념으로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기차까지 다시 가져오는 치밀함을 보였다. 정전협정은 6월 22일 공식 체결되었고 6월 25일 01시 35분부터 발효되었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정전 협정을 통해 북부 지역을 독일에게 넘겨주었고 이탈리아에게는 남동 지역의 니시 부근과 코르시카를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패탱을 비롯한 프랑스 내각은 비시로 수도를 옮기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는데 이를 '비시 프랑스'라고 부른다.

비시 프랑스의 영토모습(청색)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개전 한 달여 만에 독일에게 사실상 항복하였고 비록 비시 프랑스가 프랑스 중남 부와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및 모로코를 통치하게 되었으나 태생적으로 독일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의 처칠은 비시 프랑스를 인정하지 않았 으나 아직까지도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은 비시 프랑스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 제 영국만이 외롭게 독일과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더욱이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들이 비 시 프랑스를 공식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에 영국은 비시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주둔 중인 프랑 스 함대를 독일에 넘기는 것을 우려하여 선제공격을 통해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함대를 모두 침몰시키 게 된다. 이와 별도로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영국으로 탈출했다가 프랑스로 귀환하지 못하고 영국 에 남게 된 프랑스의 잔여 병력들은 아라스 전투에 참전한 제4기갑사단장이자 폴 레노 정부 시절 국방 부 차관이었던 샤를 드 골을 중심으로 '자유 프랑스군'을 구성하였다. 샤를 드 골은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독일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말 것을 호소하며 비시 프랑스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신과 자유 프 랑스군을 중심으로 한 별개의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수립하게 된다.

프랑스 전투 종료후 유럽의 세력분포 현황
(적색: 연합국, 청색: 추축국, 녹색: 소련, 흰색: 중립국)

독일군의 전격전


'전격전'이라는 용어의 유래

프 랑스가 독일에게 한 달도 못 버티고 패배하자 많은 나라들이 큰 충격에 휩싸였고 독일 역시 예상 밖의 대성과에 크게 고무되었다. 독일군이 프랑스 전투에서 보여준 전차, 기계화보병, 항공기, 공수 부대를 이용하여 기동성을 최대한으로 추구한 전술을 '번쩍이다'라는 뜻의 독일어 '블리츠크리크 (Blitzkrieg)'라고 불리게 되었고 요제프 괴벨스의 독일 선전부에서 독일군이 새로운 전술로 폴란드 전과 프랑스전에서 대승을 거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독일의 블 리츠크리크는 일본을 거쳐 한국에 '전격전( 電 ? 戰 )'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널리 퍼져 오늘날까지 사 용하고 있다. 다만 블리츠크리크라는 말도 독일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독일군의 빠른 기동전을 보 고 이탈리아와 미국의 기자들이 사용한 말을 차용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어찌 되었든 독일이 새로 운 전술은 선보인 것은 사실이었고 그 중심에는 전차가 있었다.

전차의 활용방안 초기 연구

본래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선을 극복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잘 구축 된 참호와 그곳에 설치된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소모전으로 지속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꺼운 장갑과 대구경 포를 장비한 무한궤도 차량을 이용하여 참호선 을 돌파하고 보병이 그 뒤를 따르는 방법으로 전차가 등장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처음 개발된 전차 는 제1차 세계대전 말미에 등장하여 전쟁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일등공신 중 하나가 되었고 이 후 전차를 활용하는 다양한 전술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영국의 존 프레드릭 찰스 풀러의 '플랜1919'가 제안되었다.

풀러는 전차가 보병 및 기병 과 제병협동으로 한데 묶어 전차가 전선의 한쪽을 돌파하면 그 돌파구로 보병과 기병이 들어가 적 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는 포위섬멸전을 벌이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풀러는 전차를 독립전술병과로 서 활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이름 그대로 AD 1919년에 사용하도록 제시된 것이었으 나 전쟁이 그 직전인 AD 1918년에 전쟁이 끝나면서 활용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솜강 전투에서 참전했던 경험이 있는 군사이론가 리델 하트는 풀러의 플랜1919 를 더 발전시켜 AD 1938년 '전략론'을 편찬하여 기갑부대의 기동성을 활용한 '간접접근론'을 발표 하였다. 리델 하트는 고대 그리스 전쟁부터 당시까지의 총 30개 전쟁과 280개 전역을 분석하여 얻 은 결론을 집대성한 것으로 적의 방어가 약한 물리적인 최소저항선이나 심리적인 최소예상선으로 기갑부대를 빠르게 기동시켜 적의 배후를 차단함으로써 적의 물리적인 전열이탈이나 심리적인 붕 괴를 이끌어내어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 전격전 유래에 대한 오해와 진실

리델 하트의 간접접근론이 독일의 전격전 개념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동안 서 구 군사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인식이 매우 서구 중심적인 사고라는 것이 알 려지게 되었다. 독일군이 리델 하트의 저서에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크게 의미를 두고 연구했 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리델 하트는 적을 심리적으로 마비시켜 최소한의 전투로 승 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독일군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적 부대 자체를 격멸하는 섬멸전에 초점 을 맞췄고 실제 독일의 전차부대가 직접적인 교전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전차를 독립전술병과로 활용하는 방안도 당시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그 가능성을 제시하던 상황으로 독일이나 영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러시아군 역시 적백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기갑부대를 앞세워 적 종심 깊숙이 타격하는 '종심타격이론'을 독립적으로 만들어낸 바 있었다.

독일의 전격전 사상은 실제로는 프로이센의 기동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고 가깝게는 제1차 세계 대전 시절 독일군이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해 보여준 후티어 전술의 개량형이기도 하다. 프로이센 의 기동전은 고대 로마제국 시절의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보여준 포위섬멸전으로부터 유래된 아 주 고전적인 전술이었다. 또한 후티어 전술은 독일의 장군 오스카 폰 후티어가 개발한 것으로 중화 기를 무장한 엄선된 정예 돌격대가 참호선의 좁은 틈새 안으로 침투하여 배후를 장악하는 것으로 한때 크게 각광받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과 동물로만 구성된 돌격대로는 방호력과 기동성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노출되었다. 전격전은 후티어 전술의 돌격대 임무를 기갑부대에게 맡긴 것으로, 즉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하인츠 구데리안을 중심으로 전차부대 창설한 후 이를 자신들의 전통적인 프로이센식 기동전과 후티어 전술을 응용하여 활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독일의 전격전은 특별한 전술교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참호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형방어와 전차를 보병의 보조지원용으로만 활용하는 구식 전술에서 탈피하지 못하던 폴란드군이 나 프랑스군,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소련군을 상대로는 엄청난 전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상대 가 선형방어 대신에 종심 깊은 방어를 형성하고 대규모 전차부대를 예비대로 보유할 경우 상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느라 전력을 모두 소비하는 공세종말점에서 상대 예비 기동부대에게 역으로 포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소련군과의 쿠르스크 전투 및 미 ㆍ 영 연합군과의 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참고]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
    [참고] 위키백과 프랑스 공방전
    [참고] 위키백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
    [참고] 위키백과 하인츠 구데리안
    [참고] 위키백과 룩셈부르크 침공
    [참고] 위키백과 됭케르크 전투
    [참고] 위키백과 다이너모 작전
    [참고] 위키백과 비시 프랑스
    [참고] 위키백과 자유 프랑스군
    [참고] 위키백과 전격전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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