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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2차 세계대전(Ⅳ) 서유럽 전역(2) 영국의 고군분투, 영국본토항공전과 대서양 해전

출처 : http://winlee96.blog.me/220290289675


독일과 영국의 공중대결, 영국본토 항공전

전쟁의 배경


AD 1940년 6월 25일 프랑스를 굴복시킨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에게도 항복에 가까운 강화조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비록 유럽 내 우호세력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영국군이 무사히 철수하였고 여전히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총리 처칠 은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무력으로 영국을 침공할 결심을 굳혔으나 전통적으로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족한 해군력을 우세한 공군력으로 메우기 위해 먼저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공중전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특히 공군력 만으로 충분히 됭케르크 철수를 저 지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다가 실패했던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서 영국본토항공전을 적극추진하였다.

당초 히틀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영국 정복을 자신은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 고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독일 공군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사실 독일 공군은 폴란드와 스칸디나비아 전역은 물론 프랑스 전역에서도 맹활약하여 독일의 폭격기인 슈투카는 연합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주력 전투기인 매서슈미트 Bf 109는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이렇게 독일 공군이 활약한 배경에는 독일 공군 자체의 우수함도 있었으나 지상군이 먼저 상대 지상기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였기 때문이기도 하 였다. 하지만 영국은 섬이라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지상군의 도움없이 항공기 단독으로 공격에 임해 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영국의 신형 전투기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독일의 Bf 109와 대등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더이상 독일 항공기의 질적인 우세함도 자신할 수 없었다.

특히 독일 공군은 유럽 대륙 내에서만 급유가 가능하므로 독일 항공기들은 연료문제 때문에 영국 상공 에 떠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모르고 있었지만 영 국에서는 레이더가 발명되어 독일 공군의 침공이 육안으로 식별되기 이전에 영국 항공기가 미리 출격 할 수 있었으며 도청을 통해 입수한 독일의 암호도 해독이 가능한 상태였다.


영국 항공단의 방어영역 및 레이더망 현황

전투의 전개

1단계, 영국해협 공중전


독일 공군의 1단계 작전은 공중에서 영국 수송선을 공격하여 영국의 해상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AD 1940년 7월 10일 독일 항공기 70기가 출동하였고 영국 공군은 즉각 54기의 전투기를 출동시 켜 응전하면서 첫 공중전이 벌어졌다. 이 대결에서 영국은 3기의 전투기와 1척의 수송선을 잃었고 독 일은 4기의 전투기 손실을 입었다.

이후에도 독일 항공기가 영국 수송함을 공격하면 이를 막기 위한 영 국 항공기가 출동하면서 공중전이 연이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주력 전투기인 Bf 109와 영국 의 주력 전투기인 스핏파이어는 성능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어 파일럿의 능력에 승패가 좌우된다고 평가되었으나 독일의 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10의 경우에는 영국의 전투기 호커 허리케인보다 성능이 뒤떨어짐이 증명되었다.

결국 영국의 스핏파이어가 독일의 Bf 109 를 상대하는 동안 영국의 허리케인이 독일의 Bf 110과 폭격기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영국의 전술이 수 립되었다. 또한 영국 공군은 레이더를 통해서 독일 항공기의 이동경로를 사전에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 에 그 예상경로에 미리 출격하여 공습을 막아내면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이 나타나기 전까지 영국 수 송선을 먼저 공격하고 도망치겠다는 당초의 전술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최종적으 로 8월 8일까지 계속된 공중전에서 영국은 총 148기의 전투기와 12척의 군함을 상실하였고 독일은 총 248기의 항공기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독일은 동원 가능한 항공기가 2천대 이상이었고 주요 피해가 폭 격기에 집중된 반면에 영국은 전체 공군 전력이 900대에 불과한 상태에서 그 피해마저 전투기에 집중 되었기 때문에 전황은 여전히 영국에게 불리한 상태였다.

영국 공군(RAF)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항공기가 단순히 정찰용을 넘어서 적 부대나 철도, 공장 등을 폭격하는 용도로 까지 활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이 체펠린 비행선을 이용하여 영국의 런던에 대한 공습을 계획 하였고 실제로 AD 1916년 9월 2일 14척의 체펠린 비행선이 런던 상공에서 수백 톤의 폭탄을 투하 함으로써 수백 명의 시민들이 사망하고 일부 공장들이 상당기간 생산을 멈추는 피해를 입었다.

 비 록 이후의 독일 비행선 폭격을 잘 막아내기는 했지만 이를 계기로 영국은 자국의 도시를 폭격으로 부터 구하고 또한 독일의 도시에게 보복 폭격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육군 과 해군이 각각 본토와 연안 방어를 위해 육군 관할의 공병대의 한 부분인 육군 항공대와 해군의 동 격인 해군 항공대로 분리하여 관리하고 있던 것을 AD 1918년 4월 21일부로 하나로 합쳐 오늘날까 지 이어지는 영국 공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공군을 별도로 독립시킨다는 것이 혁신적인 시도로 여겨졌는데, 영국은 공군 창설과 동 시에 규모를 30만명의 병력과 3만대의 항공기로 대폭 증강시켜 세계 최고의 공군력을 보유하며 제 1차 세계대전 중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참고로 영국 공군의 공식명칭은 '왕립공군(Royal Air Force)'로서 'RAF'라는 약자로 더 유명한데, 영국 육군은 봉건제 시절의 권리장전에 따라 국왕 이 의회에 동의없이는 상비군을 가질 수 없다는 규정때문에 단순히 'British Army'라고 불리는 반면 에 공군은 해군(Royal Navy)과 함께 '왕립(Royal)'이라는 칭호가 붙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영국 의 해군과 공군은 국가가 아니라 국왕과 왕실에 충성하는 군대인 셈이다.

2단계, 영국 남동부 공중전

AD 1940년 8월 1일 히틀러는 총 16만명 독일군을 영국에 상륙시키기 위한 "바다사자 작전"을 입안하 였고 그 개시일을 9월 21일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제공권 장악을 위하여 영국 본토에 대한 본격적인 공습을 지시하였다. 이에 독일 공군의 총사령관인 괴링은 우선적으로 영국에 최 대한 가까운 프랑스 연안의 공군기지에서 항공기들을 출격시킨 후 영국해협을 마주보고 있던 영국 남 동부를 공격하고 그 지역의 방어를 맡은 영국 제11항공단과 연안 방공포들을 먼저 무력화시키고자 하 였다. 이후 영국이 나머지 공군 전력을 남동부로 이동시킬 경우 스칸디나비아에 주둔 중인 제2항공함 대와 제3항공함대를 출격시켜 취약해진 영국의 북부와 중부를 공격하여 협공하는 것이 최종적인 계획 이었다.
괴링은 작전개시일을 8월 10일로 선택하였으나 당일 날씨가 좋지 않자 공격개시를 8월 13일로 연기하 였다. 8월 13일 당일에도 기상이 악화되어 작전개시를 오후로 연기하였으나 일부 폭격기들이 이를 전 달받지 못하여 그대로 출격하였고 이외의 기습효과를 발휘하여 목표였던 비행장 폭격에 성공하였다. 오후가 되자 본격적인 독일 항공기들이 영국 남동부의 각지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고 영국 역시 남동 부의 방어를 맡은 제11항공단이 각지로 출격하여 요격에 나섰다. 영국이 레이더의 정보를 바탕으로 효 율적인 배치를 하였기 때문에 8월 13일의 독일 공습은 그리 큰 성공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독일 폭격 기 슈투카가 Bf 109의 호위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의 스핏파이어의 공격에 노출되면서 일방적 으로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얼마동안 영국 남동부를 공격하여 영국의 항공기들을 유인하는 사이에 작전의 2단계로서 스칸디나비아에 대기 중인 독일 제2항공함대와 제3항공함대가 영국의 북부 와 중부 지역에 대한 공격에 나섰으나 항속거리가 부족한 Bf 109의 호위없이 진행된 독일의 공습이 진 행되었고 이를 영국이 레이더로 이동경로를 사전에 예측해 내면서 오히려 영국 전투기들에게 스칸디나 비아의 독일 항공기들이 50%가 격추되거나 대파되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하여 스칸디나 비아의 독일 항공기들은 더이상 영국본토항공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영국본토항공전 진행모습

이렇게 독일 항공기의 영국 공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8월 24일 독일도 공격 전술을 변경했다. 일방적으로 격추당하기만 하는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를 공격임무에서 배제하고 폭격기를 호위하기에 는 그 성능이 부족한 것으로 판명된 Bf 110를 대신하여 Bf 109에게 폭격기의 호위 임무를 부여했다. 폭격기 호위임무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긴 항속거리와 넓은 탑재공간을 지니고 있던 Bf 110에게 오히 려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의 임무를 맡겼다. 마지막으로 Bf 109들은 영국의 레이더를 교란하기 위해 일부러 먼저 출격하여 영국의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을 유인하고 그 틈을 타고 폭격기들이 단독으로 폭격에 나서는 기만작전을 펼치게 했다.
독일 공군이 전술을 변화하고 있던 시점에 영국은 생각보다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 록 초기에는 레이더를 이용하여 독일의 공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점점 전투기와 조종사의 피해 가 누적되고 잦은 출격에 생존한 조종사들의 피로도 매우 심각해졌고 이에 훈련과정을 미처 마치지 못 한 훈련병까지 동원하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폴란드 출신 등의 외국인 조종사까지 투입하면서 조종사 를 보충하였으나 계속된 공군기지와 항공기 공장의 파괴 때문에 전투기 피해만은 단기간에 회복시키기 어려웠다.

또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그 동안 영국 항공기의 유일한 이점이었던 레이더와 연안 방공포마 저도 독일의 연이은 폭격으로 곳곳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방공망도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영국 남동부의 방어를 맡은 제11항공단이 출격하는 사이에 런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12 항공단이 제11항공단의 비행장을 엄호하기로 하였으나 제12항공단장 트래퍼드 리맬러리가 공명심에 불타 독일 항공기 요격에만 열중하면서 제11항공단의 공군기지들이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 다.
이렇게 하여 9월 4일까지 진행된 독일의 2번째 공습에 영국 제11항공단의 피해는 회복 불능한 상황까 지 이르렀고 이제 9월 21일의 바다사자 작전을 앞두고 독일이 영국 남동부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됭케르크의 기적에 이어서 영국에게 다시한번 기적이 일어났다. 독일이 확 실해 보였던 영국 남동부의 제공권 장악을 미뤄두고 불확실한 런던 공습에 나선 것이었다.

3단계, 런던 대공습

독일이 런던 공습에 나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런던에 대한 오폭 사고 때문이었다. 8월 24일 독일의 야간 폭격시 항로를 이탈한 폭격기 2대가 우연히 런던에 폭탄을 투하하고 귀환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 는 단순한 사고였으나 영국의 처칠은 독일의 민간인 공격을 맹렬히 비난하고 베를린에 대한 보복 폭격 을 지시하였다. 이에 베를린에 대한 영국의 폭격이 8월 25일 시작되어 9월 4일까지 2주간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틀러가 매우 분노하여 괴링에게 런던에 대한 대규모 보복폭격을 명령하였다. 독일 공군 내부에서는 주력 전투기인 Bf 109의 항속거리가 짧아서 런던 폭격시 효과적으로 폭격기를 호위 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으나 괴링은 런던 폭격이 영국 전투기를 모두 한곳으로 불러모아 한번에 일소시 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런던 공습을 강행하였다.
괴링은 런던 공습을 위해 9월 4일부터 영국 남동부에 대한 공습을 중단시켰고 재정비를 마친 후 9월 7 일부터 런던 공습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런던 주변에는 아직 효과적인 방공망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 고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제11항공단의 도움없이 제12항공단 단독으로 런던을 지켜야했기 때문에 독 일의 첫 폭격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런던 곳곳이 불바다로 변했고 런던 공습의 이틀째인 9월 8일에 도 공습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공습 3일째부터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공습이 중단된 9월 4일부터 무려 1주일간의 여유를 얻었던 영국의 제11항공단이 어느정도 전력 수습에 성공 한 후 전투에 다시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독일 항공기들은 런던까지 향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제 11항공단의 방어를 뚫고 지나가야 했고 제11항공단이 시간을 버는 동안 영국의 제12항공단이 미리 출 격하여 런던 상공에서 대편대를 이룬 채 독일 항공기들을 상대했다. 그러자 처음부터 항속거리가 짧았 던 독일의 Bf 109는 런던 상공에서 불과 5~10분만 머문 채 연료문제로 곧바로 회항해야 하는 문제점 이 노출되었고 Bf 109의 호위를 받지 못하는 독일 폭격기들은 런던을 폭격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방적 으로 격추되기 시작했다.

 

폭격당한 런던의 모습

독일 폭격기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하자 독일 공군은 9월 11일 주간 폭격을 중지한 채 야간 폭격으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런던 대공습의 실패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바다사자 작전이 9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제공권 장악을 호언장담하였던 괴링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 고 결국 괴링은 9월 15일 다시 독일의 항공기를 총동원하여 다시한번 주간 공습에 나섰다. 가용한 역량을 총동원하며 독일의 항공기가 무려 1,100여대나 투입되었으나 이제 더이상 교란작전을 펼치지 않고 런던으로 곧바로 비행하는 독일 항공기의 이동경로를 영국 공군이 레이더를 통해 손쉽게 파악하였 기 때문에 영국의 전투기들이 효과적으로 요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력을 대부분 회복한 영국의 제 11항공단이 이동 중인 독일 항공기를 공격하여 스핏파이어가 독일의 Bf 109를 상대하는 동안에 허리 케인이 독일의 폭격기들을 추락시키는 전술이 여전히 큰 위력을 발휘하였고 설사 이를 피해 독일 폭격 기들이 겨우 런던 상공에 접어들더라도 미리 대기한 영국의 제12항공단를 상대해야하는 상황만 반복 되면서 독일 항공기들은 큰 피해만 입은 채 성과없이 되돌아 가야만 했다.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괴링은 미련을 벌이지 못한 채 9월 17일 다시한번 대공습을 준비하였으나 당일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작전이 취소되었다. 9월 21일 이전에 영국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 불 가능해지자 히틀러는 매우 실망하였고 결국 바다사자 작전 개시일을 무기한 연기하였다. 비록 히틀러 는 바다사자 작전을 취소하지 않고 공식적으로는 작전 개시일만을 이듬해 봄으로 연기한다고 다시 발 표하였으나 이 마저도 소련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취소되고 만다.

이후에도 독일 폭격기에 의한 영국 야간공습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으나 아무런 전략적인 목표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영국은 별다 른 피해를 입지 않게 된다. 오히려 영국으로서는 독일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굳건하게 버텨내면 서 영국인들의 결속이 강화되었고 그동안 쉴새없이 항공기를 생산하면서 항공기 숫자에서도 독일을 역 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독일의 계속된 공습을 상대하면서 영국의 조종사들의 질적인 면에서도 매우 향상 되었다. 이 때문에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 때문에 대부분의 전력을 동쪽으로 이동시킨 이후에는 영국의 공습에 오히려 독일본토가 영국 항공기의 공습에 노출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전투기 개발현황 (독일과 영국)

독일

메서슈미트 Bf 109
독일은 AD 1933말부터 새로운 단좌 단엽전투기 개발계획에 착수했고 독일의 4개 항공사인 아라도, 하인켈, 포케불 프, 바이에른 항공사로부터 설계제안을 받았다. 독일 공군은 속도, 상승력, 기동성 순으로 우선순위를 제시하였고 빌 리 메서슈미트의 바이에른 항공사는 전투기 제조경험은 없지만 민간용 완전 금속제 항공기 제작경험을 바탕으로 독일 공군의 조건을 만족시킨 단좌 단엽전투기인 Bf 109를 개발하였다. 메서슈미트의 Bf 109는 초기 시험기 3대가 생산된 후 A형부터 D형까지 끊임없이 개량이 이루어져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AD 1939년에 마침내 명품이라 고 불리게 되는 "E"형이 등장하였다.
Bf 109E는 무장도 기본무장인 7.92mm 기관총 이외에 MG FF 20mm 기관포를 양 날개에 설치하여 화력도 증가시켰다. 이렇게 무장이 강화되어 중량이 늘어났으나 엔진을 다이뮬러 벤츠 601A로 교 체하여 동시대 어느 전투기에도 뒤지지 않는 속도를 보유하게 되었고 작은 유선형 모양으로 외관이 바뀌어 공기 저항을 최소화해서 연료의 소모량도 줄일 수 있었다. 이제 Bf 109E는 무장이 강화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와 상승력, 우수한 비행능력까지 보유한 작고 날렵한 전투기로 재탄생하 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Bf 109E는 독일군의 AD 1939년의 폴란드 침공, AD 1940년의 스칸디 나비아 전투와 프랑스 전투에서 상대 전투기를 압도하면서 공중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Bf 109E도 영국의 수퍼마린 스핏파이어라는 숙적을 만나게 되는데 영국본토항공전에서는 종합적인 성능에서 는 비등하였으나 짧은 항속거리와 부족한 선회력으로 고전을 하게 된다.

메서슈미트 Bf 110
메서슈미트의 Bf 109가 큰 성공을 거둔 후 항속거리 긴 폭격기 호위전투기로서 쌍발 전투기인 Bf 110이 개발되었다. Bf 110도 엔진을 다이뮬러 벤츠 601A로 달았고 조종사, 후방사격수의 2명 위치에 추가 방어장갑판을 설치하는 등 긴 항속 거리와 방어력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AD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영 국본토항공전에 들어가자 Bf 110은 영국의 신형 전투기인 스핏파이어는 물론 쌍발전투기인 허리케인에게도 열세를 보 였고 이 때문에 Bf 109의 호위를 받아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쌍발 전투기의 무용론이 퍼지게 되고 이것은 미국이 같은 구조의 쌍발전투기 P-38 라이트닝을 개발할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영국

수퍼마린 스핏파이어
영국 공군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캔버스와 나무 소재가 많이 들어간 구식 복엽기 대신에 새로운 금속제 단엽전투기 의 도입을 결정했고 이에 맞춰 영국의 항공기 제조사인 수퍼마린이 슈나이더 컵 항공대회를 휩쓴 자사의 경주용 항공기 들을 기초로 제작한 신형 전투기, 스핏파이어를 선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스핏파이어는 영국본토항공전에서 독 일의 주력 전투기인 Bf 109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상승력과 강하능력은 Bf 109에 열세를 보였으나 수평이동속도와 선회 력에서 우세를 보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조종사의 능력에 따라 공중전 결과가 결정되는 양상이 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 로 영국본토항공전에서 독일 전투기로부터 끝까지 제공권을 지켜내면서 스핏파이어는 "영국을 구한 전투기"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호커 허리케인
영국의 항공기 제조사인 호커는 기존의 복엽 전투기인 퓨리를 단엽기로 개량한 허리케인을 선보였다. 허리케인은 기체 전반부인 엔진주위와 조종석, 날개 등만 금속으로 제작되고 기체후방부는 복엽기처럼 목제에 방수천을 덧씌운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 때문에 허리케인은 수퍼마린 스핏파이어에 비해 결코 성능 면에서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생산비 용이 적게 들어 대량생산에 유리했고 구조가 단순하여 수리도 손쉬웠다. 또한 동체 후방부를 피격당하더라도 방수천만 관통할 경우 격추되지 않고 그대로 돌아올 수도 있어 조종사의 생존성을 높여줬고 스핏파이어에 비해 조종이 더 쉽다는 장점도 있어 영국본토항공전에서 신참 조종사들을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곧바로 전장에 투입해야하는 영국의 입장에 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허리케인은 대량생산이 어려워 많은 숫자를 확보하지 못한 스핏파이어의 부족한 숫자를 보 충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부여받았으나 독일의 Bf 109를 제외하면 오히려 성능 면에서 앞섰다. 특히 독일의 Bf 110을 성능 면에서 압도했기 때문에 영국 공군은 스핏파이어가 독일의 Bf 109를 상대하 는 동안 허리케인이 독일의 Bf 110을 격추시키는 방법으로 승세를 굳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영국 본토항공전에서 격추숫자에서는 허리케인이 스핏파이어를 월등히 앞서게 되었고 영국 내부에서 도 화려한 스핏파이어보다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허리케인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우 가 많다.

독일과 영국의 바다대결, 대서양 해전

독일 해군의 상황

독일 해군 재건


독일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발트해 연안 경비만 가능한 수준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 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보유했던 모든 어뢰정과 잠수함을 기뢰를 이용해 침몰시켜야 했고 남은 수상함 중에서 전함 10척과 순양전함 5척, 순양함 5척, 기타 31척이 AD 1919년 6월 21일 영국의 스캐퍼플로에서 집단으로 자침을 선택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부 수상함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승전국에게 배상함으로 빼앗기고 단지 구형전함 6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만 겨우 보유할 수 있 게 되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권력을 잡고 AD 1935년 6월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영국 수상함의 35%만큼은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독일 해군을 재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임무 는 독일 해군 총사령관인 에리히 레더에 맡겨졌다. 레더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틀란트 해전 등 주요 해전에 참여하였고 AD 1928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군 총사령관에 오른 상태로 나치를 좋아하지 는 않았지만 히틀러의 해군 재건계획에는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에리히 레더의 모습

 

레더는 발트해 연안이 아닌 대서양에서 활약할 함대를 재건하기 위하여 영국-독일 해군조약 이전에 베 르사유 조약의 맹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장갑함에 전함의 주포를 장비시킨 이른바 '포켓전함' 3척(아드 미랄 그라프 쉬페, 아드미랄 셰어, 뤼초우)를 건조하였고 AD 1935년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체결되자 배수량 3만톤급의 순양전함 2척이 건조되어 각각 AD 1936년 10월 3일과 12월 8일에 진수식을 갖 고 나폴레옹 전쟁 중 프로이센 군을 재건하였던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 제나우의 이름을 따 각각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2척은 1번함의 이름을 따서 샤른호르스트급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배수량 3만5천톤 급이었으나 실제로는 4만톤이 넘는 초대형 전함 2척을 추가로 건조하여 AD 1939년 2월 마침내 진수식을 갖고 독일을 통일 시킨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따 "비스마르크' 전함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4 월에는 동급의 2번함으로 용적을 더 크게 만든 전함이 진수식을 가졌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해 군 제독이었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에서 유래한 "티르피츠" 전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번에도 마찬 가지로 1번함의 이름을 따서 '비스마르크급'으로 부르게 된다.

독일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좌)와 그나이제나우(우)의 모습

이렇게 독일 해군은 포켓전함 3척, 샤른호스트급 순양전함 2척과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아직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레더는 영국 해군에게 필적할 만한 전력 을 갖추기 위한 'Z계획'을 AD 1939년 1월 히틀러로부터 승인받았다. 다만 본래 Z계획으로는 AD 1945 년까지 함선 건조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히틀러가 그보다 빨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충분한 함 선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동시에 군비확충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헤르만 괴링의 공군에 우선순 위에서 밀리면서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이에 따라 레더는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과 기존 의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을 핵심전력으로 삼았고 그 밖에 포켓전함 2 척(아드미랄 셰어, 뤼초우)과 중순양함 5척(아드미랄 히퍼, 블뤼허, 프린츠 오이겐, 자이들리츠, 뤼초) 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수송선단을 노리는 통상파괴작전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참고로 포켓전함 중 나머지 1척인 아드미랄 그라프 쉬페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에 대서양에 서 통상파괴작전을 펼치다 영국 해군을 피해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로 피신하였으나 독일로 되돌아갈 방법이 없자 AD 1939년 12월 자침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독일 수상함대는 차근차근 재건에 나서고 있 었지만 전체적인 전력은 여전히 영국 해군에 비해 열세를 보이고 있었고 제대로 된 대서양 연안의 군항 을 보유하지 못하자 초기에는 잠수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작전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역 할을 독일 잠수함대의 사령관이 카를 되니츠에게 부여하였다.

독일의 포켓전함 아드미랄 그라프 쉬페(좌), 아드미랄 셰어(중), 뤼초우(우)의 모습

독일 잠수함대의 활약, 제1차 해피타임

칼 되니츠의 독일 잠수함대


카를 되니츠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보트 함장으로 참전하며 잠수함전 경험을 쌓았다. 종전 후 잠수 함대가 해체되면서 순양함 함장으로 지내야했으나 히틀러의 AD 1935년 재군비 선언 후 잠수함대 재건 의 임무를 띄고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되니츠는 뒤늦게 수상함을 건조하더라도 독일 해군 이 함대전 만으로 영국 해군을 이기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전히 잠수함인 U-보트를 이 용한 통상파괴작전 만이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독일군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U-보트를 이용한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펼치며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을 침몰시켜 영국으로 향하는 식량과 자원을 차단한 바 있었다. 비록 미국 상선을 공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이 참전하였 고 이 때문에 패전으로 이어졌지만 U-보트의 무제한 잠수함작전에 영국이 고전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의 잠수함을 모두 파괴하고 이후로도 잠수함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였다.

카를 되니츠의 모습

영국-독일 해군조약에서 수상함을 영국의 35%만 보유할 수 있는 것에 반해 잠수함 만은 예외적으로 영국의 45%를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되니츠는 잠수함 전력을 추가확충하기를 희망했고 U-보트 300대만 있으면 영국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영국이 대잠 음향탐 지기인 ASDIC를 개발하면서 잠수함 무용론이 퍼져있었고 이는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 해군 지휘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독일은 한정된 자원과 시간 속에 조속한 군비확충을 위 해 선택과 집중을 해야하는 입장이었고 나치독일의 2인자인 헤르민 괴링의 입김에 따라 독일 공군이 독일 해군보다 예산배정에서 우선순위에 있는 상황에서 독일 해군 총사령관 레더는 전통적인 거함거포 주의에 따라 잠수함 보다는 수상함 건조를 우선시하게 된다. 이 때문에 개전 당시 독일 해군이 보유한 잠수함은 실험용 잠수함이나 항속거리가 짧은 연안용 잠수함을 다 합쳐도 56척에 불과했고 보급과 정 비, 훈련, 정찰 등으로 제외되는 숫자를 감안하면 한꺼번에 실제로 전투에 투입가능한 잠수함은 7척 정 도 밖에 안되었다.

독일의 잠수함 U-52의 모습

독일 잠수함대의 늑대떼 전술

열악한 상황에서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게 된 되니츠는 소수의 잠수함이라도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전술을 창안하게 되었다. 기존 잠수함 전술은 독자적으로 일정한 수역에 매복하였다가 지 나가는 선박에게 어뢰를 발사한 후 급히 이탈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U-보트 역시 이 러한 전술을 사용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영국과 미국이 대규모 호송선단을 조직하는 대잠전술로 대응 하면서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에 되니츠는 잠수함들을 일정 수역에 분산시킨 후 지나가는 적국 선박을 발견하더라도 곧바로 공격하지 말고 후방 지휘소에 멀리 알린 후 주변의 잠수함을 집결하여 동시에 습 격하는 방식을 공격전술을 변경하였다. 되니츠는 자신의 새로운 전술을 'rudeltaktik(집단전술)'이라고 불렀으나 이를 영어로 의역하면서 "tactics of a pack(늑대떼 전술)"라는 말로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되니츠의 늑대떼 전술의 효과는 매우 컸다. 영국은 ASDIC의 성능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에 구축함 등 대잠전력 확충에 소홀히 하였으나 야간에 수면 위로 부상하여 접근하는 잠수함에게 ASDIC는 무용지물 에 가까웠다. 독일의 U-보트는 일일 평균 7대 밖에 활동하지 못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기존 호 송선단으로는 늑대떼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독일 육군이 프랑스를 단기간에 점령하면서 독일 잠수함대가 대서양 연안의 프랑스 항구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해 연안 의 항구만 이용할 수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잠수함의 활동가능 거리와 시간이 월등히 늘어난 상태였다.

결국 독일 잠수함대에 의해 AD 1940년 7월부터 10월까지 아일랜드로 향하던 영국의 선박 282척을 침몰시키고 총 1백5십여만 톤의 물자를 대서양에 가라앉히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시기를 독일 잠수함대의 '제1차 해피타임(First Happy Time)'라고 부른다. 이렇게 영국은 해상보급에 큰 어려 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공중에서도 독일 공군에 의한 영국본토항공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 국은 몇 달만 더 지나면 스스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해 버렸다.

독일의 U-보트 공격에 침몰당하는 영국 상선의 모습

영국 해군의 대응


영국도 독일의 U-보트에게 더이상 피해를 입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잠전력 확충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단기간에 잠수함을 상대할 만한 구축함을 건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카리브 해의 여러 군항을 미국에게 99년간 조차해주는 손실을 감수하고 미국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건조한 구 식 구축함 50척을 인계받았다. 또한 단기간에 확보 가능한 대잠전력으로 포경선을 개조한 플라워급 코 르벳을 선정하여 영국과 캐나다의 조선소에서 서둘러 건조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구축함과 코 르벳을 이용하여 호위선단을 구성하도록 하여 항상 2~3척의 구축함과 6척의 코르벳으로 구성된 호위 함들이 수송선단과 항상 대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국 해군의 대응은 임시방편에 불과하였지만 독일 잠수함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상태는 겨우 벗어나게 되었다. 특히 독일의 잠수함 U-보트는 물속으로 잠항시 속도가 느리고 잠항깊이도 한계가 있으며 내구도도 약화되는 단점이 있었는데 영국의 구축함과 코르벳은 이러한 U-보트의 약점을 노리고 해수면에서 폭뢰를 투하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폭뢰는 근 접 폭발만으로도 U-보트를 침몰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U-보트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더구나 영국 이 독일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해독해내면서 U-보트의 위치가 사전에 노출되는 일도 많아졌다.

영국의 플라워급 코르벳, HMS 밀포일의 모습

한편 독일 잠수함대가 선전을 계속하면서 히틀러도 잠수함대를 다시 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생산량을 늘리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의 수상함은 여전히 영국 해군에게 열세를 보이고 있었고 또한 기대를 모았던 이탈리아 해군 역시 AD 1940년 11월 11일 타란토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영국 해군의 상대가 아니라는 점만 증명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의 잠수함대는 여전히 다른 도움없이 단독으로 영국 해군을 상대해야만 했으나 영국의 대잠전력이 늘어나면서 독일의 잠수함의 피해도 같이 늘어났다. AD 1940년말이 되면 독일의 잠수함대가 격침시킨 연합군 함정은 총 520척, 수장시킨 물자가 총 240만톤 에 달했지만 여전히 작전이 가용한 U-보트는 22척에 불과했다.

독일 수상함대의 고전

중순양함 아드미랄 히퍼의 통상파괴작전


AD 1940년 독일 해군은 독일 육군의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베저위붕 작전을 지원하였고 이어진 독일 육군의 프랑스 침공이 대성공으로 끝나면서 대서양 연안의 많은 항구를 확보하게 되자 이제는 레더도 더이상 잠수함대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수상함대를 이용한 통상파괴작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먼 저 AD 1940년 11월 킬 군항을 출항한 순양함 아드미랄 히퍼가 11월 5일 영국의 호송선단 HX 84를 공 격하여 호위 순양함 저비스 베이와 수송선 5척을 격침시키고 유조선에 손상을 입히는 활약을 보였다. 12월 25일에는 중순양함 1척과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항공모함 2척이 호위하는 영국의 호송선단 WS-5A에 대하여 전함이 없는 것을 보고 대담하게 공격하여 2척을 대파하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프 랑스의 브레스트에서 연료보충과 수리를 마친 아드미랄 히퍼는 AD 1941년 2월 12일에는 다시 영국의 SLS 64 호송선단을 공격하여 다시 7척을 격침시키는 활약을 보인 후 3월 28일 킬 군항으로 되돌아 왔 다.

독일의 중순양함 아드미랄 히퍼의 모습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베를린 작전


AD 1941년 1월 22일에는 독일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귄터 류첸스의 지휘아래 킬 군항으로부터 출항하였다. 이번에도 영국에 대한 통상파괴작전을 펼치기 위함으로 작전명은 '베를 린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아이슬란드 북동쪽 해안에서 남서쪽으로 방 향을 선회하여 대서양으로 나갔고 이를 눈치챈 존 토베이의 영국본토 함대에 소속된 전함 로드네이와 넬슨, 순양 전함 리펄스가 순양함 8척 및 구축함 11척과 함께 아이슬란드 남쪽 바다에서 요격에 나섰다.

독일 함대는 영국 함대와의 직접 교전을 피하면서 수송선단만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미국의 노바스 코샤에서 출발한 영국의 호송선단 HX106를 공격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2월 22일 뉴펀들랜드 섬으로 접근하고 있던 다수의 선박을 발견하고는 5척을 침몰시켰다. 이후 아조레스 제도의 남방에서 보급함으 로부터 급유를 받은 후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향했고 3월 7일 영국의 호송선단 SL 67을 발견하였으나 영국 전함 HMS 말라야가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북상하였다. 3월 15일 영국의 호송선단 HX114을 발견한 후 13척을 침몰시키고 3척의 유조선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 전함 로드네이가 나타났기 때문에 도망친 후 3월 22일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무사히 입항하며 통상파 괴작전을 마무리했다.


비스마르크 전함 추격전

전함 비스마르크의 라인훈련 작전


AD 1941년 5월 18일 레더는 '라인훈련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비스마르크 전함을 프린츠 오이겐 중순 양함과 구축함 6척으로 함께 발트해에서 출항시켜 북해로 나가도록 하였다. 이 중 비스마르크 전함은 독일이 세계 최고의 전함을 목표로 설계한 만큼 만재 배수량이 5만톤이 넘는 초대형 전함이었다. 이는 이전까지 세계 최대 배수량을 지닌 영국 전함 HMS후드를 뛰어넘는 것이었고 배수량 6만 5천톤의 일본 의 야마토 전함이 건조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전함으로 기록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비스마르크 는 선체가 거대해지면서 기존의 11인치 함포 대신 빠른 장전속도와 초구탄속을 가진 14.96인치 함포 를 탑재했고 6.75인치부포 및 4.1인치 대공포의 숫자도 증가하였다. 다만 독일 해군은 이전부터 주요 활동 해역인 발트해가 자주 안개가 끼면서 시야가 나쁘기 때문에 원거리 포격전보다는 근거리 포격전 을 더 염두에 두고 설계하곤 하였는데 비스마르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원거리 포격전에 대한 방어 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대공 사격 관제나 승무원 숙련도 등에 문제가 많은 편이었다.

덴마크 해협 전투

당시 영국본토에는 이제 막 건조를 마친 전함 2척(HMS 킹 조지 5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과 순양 전함 2척(HMS 후드, HMS 리펄스), 항공모함 1척(HMS 빅토리어스)와 10척의 순양함, 12척의 구축함 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순양전함 후드는 건조된 지 30년이 넘은 구형 전함이었다. 영국 정찰기 가 비스마르크 함대의 출항 사실을 알아냈고 영국 함대가 흩어져 이를 추적한 끝에 5월 21일 순양함 HMS 노포크와 HMS 서포크가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사이의 덴마크 해협에서 비스마르크 함대를 발 견하였다. 이 사실이 즉각 영국 함대 사령부로 알려졌고 가장 가까이 있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후드가 덴마크 해협으로 이동하여 5월 24일 새벽에 교전에 들어갔다.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의 이동로(적색)와 영국 해군의 이동로(흑색)

새벽 5시 52분에 영국의 순양전함 후드가 23km 거리에서 독일의 프린츠 오이겐 중순양함을 먼저 발견 하고 포격을 개시하였고 함대 사령관인 군터 루첸스의 이탈명령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 함장인 에른 스트 린데만이 반격포격을 시작했다. 비스마르크의 5번째 포격이 후드의 탄약고에 명중하면서 후드가 두동강이 났고 생존자 3명을 제외한 승무원 1,415명이 사망했다. 이제 독일 함대는 영국의 프린스 오 브 웨일스에게 포격을 집중하였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교를 파괴하면서 함장 존 리치와 조타수 1 명을 제외한 나머지 장교와 부사관 전원이 전사하였다.

사령탑을 잃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전열에서 이탈하였고 비스마르크 역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포격에 연료탱크가 손상을 입으면서 이를 수리하기 위해 회항해야만 했다.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만 그대로 남아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였고 이 미 독일의 구축함들이 항속거리 문제로 회항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혼자서 돌아가야만 했 다. 프린츠 오이겐은 6월 1일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입항하게 된다.

영국의 전함 HMS 후드의 모습

비스마르크 침몰

영국 해군 사령부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순양전함 후드가 격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가용한 모든 영국 군함들에게 비스마르크 추격을 명령하였다.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 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스마르크만큼은 꼭 격침시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영국본토 함대는 물론 지중해 함대 소속인 순양전함 HMS 리나운과 항공모함 HMS 아크로열까지 불러모으게 된다. 한편 독일 의 비스마르크는 연료탱크가 손상되어 연료가 새고 있었기 때문에 순양함 노포크에게 쉽게 추적당했고 5월 24일 영국의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의 뇌격기 소드피쉬 9대가 발진하여 어뢰 1발을 명중시켰으나 비스마르크는 무사히 도망쳤다.

5월 26일 영국 해군의 비행정이 프랑스 서쪽 해상에서 비스마르크를 발견했으나 영국의 주력전함들이 북방 240km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스 마르크가 프랑스의 군항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추격하기 위해서 지중해 함대의 구축함 셔필드에게 비스 마르크를 계속 추적하도록 하는 한편 항공모함 아크로열에게 뇌격기 소드피쉬를 발진시키도록 하였다. 아크 로열에서 발진한 소드피쉬들이 어뢰 공격 중 1발이 비스마르크 우현 후부의 조타장치를 손상시키 면서 치명적인 고장을 일으켰다. 특히 키가 한쪽으로 고정되어 버리는 바람에 프랑스 해안 반대방향인 북북서 방향으로 진로가 바뀌어 버렸다.

 

포격당하는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의 모습


5월 26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영국의 구축함들이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며 어뢰공격을 하였다. 구 축함들의 공격이 직접적으로 비스마르크에게 타격입힌 것은 없었지만 밤새 대기태세에 놓인 비스마르 크 승무원들이 극심한 피로를 느껴야 했다. 이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 5월 27일 8시 47분에 영국의 전 함 HMS 킹 조지 5세와 HMS 로드니, 중순양함 HMS 노포크와 HMS 도셋셔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비스 마르크도 도망치지 못했고 반격에 나서면서 전함 간의 치열한 함포전이 벌어졌다.
비스마르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약 400발의 포탄과 3발의 어뢰 공격을 받아 함교가 파괴되고 함대 사령관인 뤼첸스와 참모진이 사망하고 함장인 린데만이 부상을 입었으며 함선의 대부분이 파손되는 피 해를 입었으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1시간이 넘게 버텨냈고 10시 15분 경 영국 함대는 비스마르크 를 격침시키지 못하고 연료부족 때문에 영국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가 연료부족 때문에 철수해야 하는 상황까지 놓였다.

 하지만 비르마르크도 자력항해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결국 10시 40분경 침몰하 기 시작했는데 독일 측에서는 그때까지 생존한 최선임자인 중앙 기관실장 게르하르트 유나크가 자침시 켰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영국 측에서는 마지막으로 발사한 어뢰 3발 때문에 격침되었다고 말하고 있 다. 현재까지도 비스마르크의 정확한 침몰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스마르크의 침몰은 독일 해군이 더이상 수상함으로 영국 해군을 상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 었다. 더구나 AD 1941년말이 되면 영국본토항공전이 사실상 종료되고 영국해협과 대서양의 제공권을 영국 공군이 장악하게 되기 때문에 독일 수상함의 활동이 더욱더 위축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에 따라 독일 해군의 통상파괴작전은 다시 수상함대에서 잠수함대로 넘어가게 되고 독일의 수상함대의 활동은 발트해 연안으로 축소되고 만다.

미국, 영국, 일본의 해군 재군비 경쟁

AD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AD 1931년에 제1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동안의 무분별한 군함건조경쟁을 중단하고 해군의 휴일을 맞이하면서 이미 실전에 배치된 미국의 USS 메릴랜드와 일본의 나가토만 그대로 보유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대신에 모 든 신형 전함의 건조가 취소되고 건조 중인 전함은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로 결정되었다. 다만 일 본 측에서 나가토급 2번함인 무츠의 건조가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에 무츠를 추가적으로 보유할 것 을 요구하면서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이 동급의 전함을 각각 2척씩 더 건조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 덕분에 미국은 메릴랜드의 동형함인 콜로라도급 2척(USS 콜로라도, USS 웨스트 버지니아)를 건조 하였고 영국은 넬슨급 2척(HMS 넬슨, HMS 로드니)를 건조하였다. 미국의 콜로라도급 3척, 영국의 넬슨급 2척, 일본의 나가토급 2척, 이상 7척은 모두 16인치의 대구경 함포를 탑재하여 '빅세븐(Big 7)'이라고 불리게 된다. 참고로 워싱턴 군축조약에 따라 전함의 기준배수량은 3만5천톤급 이하로 제한받았으나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HMS 후드는 기준배수량이 4만2천톤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로 인정받았다.

 

미국과 영국, 일본의 전함 보유비율은 5:5:3으로 유지되었으나 AD 1939년 일본이 제2차 런던 군축 조약의 비준을 거절하면서 새로운 군함건조 경쟁시대에 들어섰다. 다만 미국과 영국은 일본이 군축 조약에 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당초의 합의대로 전함은 기준배수량 3만5천톤 이하, 주포 14인치 이하로 유지하기로 하면서 미국은 3만5천톤의 배수량을 지닌 노스캐롤라이나급 2척(USS 노스캐롤 라이나, USS 워싱턴)을 건조했다.

그러나 일본이 군축조약에서 이탈하는 것이 명백해지고 노스캐 롤라이나급만으로는 일본 전함을 충분히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더 큰 규모의 전 함을 건조하려 하였지만 미 의회에서 기준배수량을 노스캐롤라이나급으로 유지하도록 요구했기 때 문에 이 조건을 유지하면서 주포 대응장갑을 기존의 14인치에서 16인치로 늘리는 사우스다코다급 전함 4척(USS 사우스다코다, USS 인디애나, USS 메사추세츠, USS 앨러배마)을 AD 1939년에 추 가 건조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기존의 미국과 합의대로 기준배수량 3만5천톤, 주포 14인치를 지 닌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3척(HMS 킹 조지 5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HMS 듀크 오브 요크) 을 AD 1941년에 우선 건조하였고 이듬해 동급 전함 2척(HMS 앤슨, HMS 하우)을 추가로 건조하면 서 해군 재군비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군축조약을 탈퇴한 일본은 배수량 4만톤 이상의 대형 전함 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그 정보를 얻은 미국이 이에 대응할 만한 전력을 갖추고자 기준배수량 4만5 천톤 이하, 주포 16인치 이하의 전함건조를 영국과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아이오와급 6척의 신규 건조를 추진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 실제로는 4척(USS 아이오와, USS 뉴저 지, USS 미주리, USS 위스콘신)만 건조되었고 항공모함 중심으로 해전의 양상이 바뀌자 나머지 2 척의 건조계획은 취소되었다.

영국도 기준배수량 4만5천톤 이하, 주포 16인치 이하의 신형 라이온급 군함 건조를 추진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더이상의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에만 머물고 말았 다. 한편 미국과 영국이 우려한 일본의 신형 전함은 나중에 기준배수량이 무려 6만5천톤이고 주포의 구경도 18인치에 달하는 초대형 전함, 야마토급 2척(야마토, 무사시)로 밝혀진다. 다만 본래 일 본은 야마토급 전함을 8척이나 건조할 계획을 세웠으나 예산상의 문제로 실제로는 1척만 추가되었 고 그것도 항공모함으로 설계가 변경되면서 항공모함 시나노로 건조된다. 더욱이 해전의 양상이 이 제는 항공모함 중심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이러한 초대형 전함은 더이상 건 조되지 않게 된다.


    [참고] Wikipedia Battle of Britain
    [참고] 리그베다 위키 영국 본토 항공전
    [참고] Wikipedia Battle of the Atlantic
    [참고] RigVeda Wiki 대서양 전투
    [참고] 위키백과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참고] 위키백과 독일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
    [참고] 위키백과 독일 순양전함 그나이제나우
    [참고] Wikipedia Operation Berlin (Atlantic)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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