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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inlee96.blog.me/220300457789 이탈리아의 참전과 연이은 졸전 이탈리아의 초기 반응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즉각 참전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연합군 측에 가담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이탈리아를 계속해서 설득하고 있었고 실제로 무솔리니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AD 1940년 독일이 프랑스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 분명해 보이자 마침내 이탈리아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다만 이탈리아는 전쟁준비가 미흡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전투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은 없었고 이탈리아가 참전을 선언한 지 11일 뒤 전투가 종료되었지만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에게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해 주고 프랑스 남동부의 일부 영토를 할양해 주었다. 무솔리니는 집권 초부터 로마 제국의 재림을 외치며 유럽과 세계를 호령하는 위대한 이탈리아를 추구한 만큼 프랑스 남동부만 얻는 데 만족할 리 없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의 히틀러가 프랑스의 남부지역에 비시 프랑스를 세우고 프랑스의 식민지들이 모두 비시 프랑스의 합법성을 인정하면서 무솔리니가 프랑스의 식민지를 공격할 명분이 사라졌다. 이에 무솔리니는 아프리카에 주둔한 영국군을 무력화시켜 독일의 영국본토 침공을 측면에서 보조하겠다는 논리를 앞세워 영국령 아프리카 식민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현황
지중해 전역
몰타 섬 공격실패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를 노리면서 몰타 섬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떠올랐다. 몰타 섬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바로 아래에 위치하여 지중해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지브롤터 및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영국 해군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자 지브롤터와 알렉산드리아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 전략적인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과의 영국본토항공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몰타 섬에 지원할 여유가 없어 6기의 구식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복엽기만 배치한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이탈리에서는 몰타 섬에 대한 공격을 자신만만하게 임할 수 있었다. 몰타 섬(Malta Is.)의 위치 이탈리아의 첫공격은 AD 1940년 6월 11일 공군기를 동원한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몰타 섬에 대하여 이탈리아 공군의 일방적인 폭격이 계속되었으나 공군력 만으로는 몰타 섬을 점령할 수는 없어 병력 상륙이 절실했으나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을 두려워해 출항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더욱이 이탈리아 전투기들은 본래부터 영국 최신예 전투기에 비해 성능이 뒤떨어지는 구식 기체였기 때문에 영국 본국에서 가까스로 지원된 단 몇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에도 상대하기 어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아프리카 전역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몰타 섬 점령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11월에 벌어진 타란토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이탈리아도 몰타 섬 점령을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타란토 해전 패배 본래 영국은 전통적으로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독일의 해군력은 주로 발트해와 북해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재빠르게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정박중인 프랑스 함대를 침몰시켰기 때문에 이제 영국의 지중해 제해권을 위협할 세력은 이탈리아 해군 뿐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해군은 모항인 타란토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달리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영국 해군 일각에서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이용한 원거리 공습을 제안하였고 다른 대안이 없었던 상황에서 단순한 견제의 목적으로 이를 허용했다. AD 1940년 11월 11일 타란토를 공격하기 위해 18대의 페어리 소드피쉬를 탑재한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가 출항하였다. 소드피쉬는 어뢰를 이용하여 함대를 공격하는 뇌격기로서 최대속도가 224km/h에 불과한 구식 복엽기였기 때문에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이탈리아 공군의 정찰을 피하기 위하여 야간공습을 실시하였다. 영국 해군으로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의외의 기습공격에 이탈리아 해군이 당황하면서 영국의 소드피쉬는 단 2대가 격추된 반면에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3척과 순양함 2척을 침몰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해군력은 더욱 약화될 수 밖에 없어 지중해의 제해권을 영국에게 완전히 내주고 말았고 이탈리아 해군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히틀러는 큰 실망 만을 안게 되었다. 타란토 해전에서 활약한 영국 항공모함 HMS 일러스트리어스와 함재기 소드피쉬의 모습 한편 타란토 해전는 대구경 함포를 이용한 결전사상이 팽배했던 당시 해전에서 함재기를 이용한 항공모함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정작 이를 성공시킨 영국 해군은 여전히 거함거포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오히려 동아시아의 일본에서 그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항공모함 중심의 새로운 해전 양상을 이끌어내게 된다.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 실패 영국령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이탈리아의 공격은 AD 1940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군의 준비상태는 매우 미흡했지만 영국이 독일의 본토침공을 앞두고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한 것이었다. 우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의 군대를 동원하여 8월 영국령 소말릴란드, 케냐, 수단을 차례로 식민지로 강제로 편입한 후 9월 리비아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군에게 영국의 보호령인 이집트를 공격하게 하였다. 당시 영국은 독일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병력을 증원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집트에 주둔 중인 3만5천명의 수비병만으로 이탈리아군을 상대해야 했으나 이탈리아군은 무려 50만명의 대군이었다. 더구나 독일과의 영국본토항공전을 치르기 위해서 공군기들도 대부분 본국으로 차출되어 제공권도 빼앗긴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만일 이탈리아가 이집트를 차지할 경우 수에즈 운하의 막대한 이권을 차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동의 유전까지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큰 위기였다. 그러나 영국에게도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비록 이탈리아군은 숫자는 많았지만 기계화되지 않은 구식보병이었고 보급도 문제가 많은 상태였다. 이에 반해 영국군은 비록 소수지만 기계화부대로 편성되어 화력과 기동력에서 이탈리아를 앞서는 상황이었고 장비와 물자의 보급도 풍족한 편이었다. 북아프리카 세력분포 현황 무솔리니의 명령에 따라 루돌포 그라치아니가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사막을 횡단하여 이집트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무솔리니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전을 개시하였으나 당초부터 보급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시디 바라니를 점령한 후에는 진군을 멈췄다. 그리고 시디 바라니에서 진지구축과 물자정비로 시간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본국에 전차부대 증원을 요청하는 동안 3개월이 흘러갔다. 처음에 불같이 화를 내던 무솔리니도 현지의 열악한 사정을 보고받고 전차 1천대의 증원을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나 10월 28일 즉흥적으로 발칸반도의 침공을 결정하면서 무산되었다. 더구나 무솔리니는 독일의 영국본토항공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10월 25일에는 이탈리아 공군기들마저 2달 동안 벨기에 방면으로 파견하여 기껏 획득한 제공권도 무위로 돌렸다. 그동안 영국군은 전 세계 각지의 영연방 국가들에 병력을 동원하면서 병력숫자가 6만명으로 늘어났고 영국의 신형전차 MK.2 마틸다II도 1개대대가 추가로 보급되었다. 또한 독일과의 영국본토항공전을 무사히 방어해낸 공군기들이 재합류하면서 잃어버렸던 제공권도 되찾았고 영국 해군이 타란토 해전을 통해 이탈리아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지중해의 제해권도 차지하게 된다. 이탈리아군의 붕괴와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등장 AD 1940년 12월이 되자 이제는 영국군이 오히려 수세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컴파스 작전이라고 불리는 역공을 개시하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3개월간 시디 바라니에 머물면서 방어진지를 10~20km 간격을 두고 넓게 배치하여 방어력이 부족하 였고 병사들의 기강도 느슨해진 상태였다. AD 1940년 12월 9일 영국의 중동사령부 총사령관인 아치볼드 웨이블이 신형전 차 MK.2 마틸다II를 앞세워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자 이탈리아군이 지지멸렬한 상태가 되었다. 특히 선봉에 선 MK.2 마틸다II 가 두꺼운 장갑으로 이탈리아군의 전차포를 모조리 튕겨내면서 이탈리아군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불과 개전 2일만에 방어진지가 모조리 무너지고 시디 바라니가 영국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탈리아군은 반격을 가하기는 커녕 무질서한 후퇴만 반복하면서 리비아 국경의 바르디아 항구까지 물러나야 했으나 이미 지상전에서 밀리는 것은 물론 제공권까지 빼앗긴 상태에서 막강한 영국 함대까지 해상에서 공격지원을 오자 AD 1941년 1월 4일 바르디아 항구마저 무너졌고 2월 5일에는 리비아의 토브룩까지 빼앗겼다. 이에 이탈리아군이 다시 후퇴하였으나 영국 기계화부대의 매복에 걸려서 엄청난 물자와 장비를 남겨둔 채 일부 병력 만이 겨우 도망쳐 엘 아게일라에서 겨우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군은 약 10주간 진행된 컴파스 작전을 통해 무려 800 km나 진격하고 13만명에 달하는 포로를 붙잡았으며 이탈리아군이 버리고 간 각종 전차나 대포, 군수물자들을 노획하는 대성과를 올렸다. 그동안 영국군의 사상자는 불과 1,928명일 정도로 영국군 대승을 거둔 반면에 이탈리아는 이집트를 점령하기는 커녕 본래 가지고 있던 리비아마저 영국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영국군의 컴파스 작전 전개 현황 이제 이탈리아군 단독으로 더 이상 아프리카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자 무솔리니는 독일의 히틀러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히틀러로서는 영국본토에 대한 공격이 여의치않은 상황에서 소련과의 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요청을 탐탐치 않게 생각했으나 무솔리니가 궁지에 몰려 실각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다만 소련과의 전쟁을 앞두고 전선을 더이상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독일 지휘부는 프랑스 전역에서 맹활약한 에르빈 롬멜을 사령관으로 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Das Afrika Korps; DAK)'을 새롭게 편성하여 트리폴리로 파견하되 롬멜에게는 패전한 이탈리아군을 수습하고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비록 롬멜은 프랑스 전역에서 전차부대를 이끌며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명장이기는 하였지만 이미 프랑스 전투에서 지휘부의 진격중지 명령을 임의로 어기고 무단으로 진격을 계속한 전례도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임무에는 적합하지는 않았다. 결국 롬멜은 수세적인 방어보다는 공격적인 공세를 통해 영국군을 물리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발칸 전역 그리스 침공 실패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군이 시디 바라니에서 별다른 군사행동을 보이지 않은 채 추가적인 보급을 요청하고 있던 10월 28일 무솔리니는 발칸반도를 침공하면서 전선을 무모하게 확대하였다. 무솔리니는 집권 초부터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며 발칸반도에 욕심을 내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AD 1939년에 알바니아를 침공하였고 본래는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리스를 침공하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는 AD 922년 터키독립전쟁에서 터키 독립군에게 패전한 이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어 국왕 요르요스 2세가 명목상 군주이기는 하였으나 AD 1936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킨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권력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비록 메탁사스는 독재권력을 휘둘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고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그리스 북부 지역에 메탁사스 선이라고 불리는 요새 시설을 구축한 상태였다. 무솔리니로서는 승리를 자신하였으나 이탈리아 주력군의 대부분이 북아프리카에 파견된 상태였기 때문에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발칸 반도에서도 보급 상의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던 반면에 그리스는 사전에 비축한 물자가 많았고 영국 함대의 지원까지 받는 상태였다. 그리스군이 메탁사스 선에서 방어전에 돌입하자 AD 1941년 11월 13일까지 벌어진 핀두수 산 전투에서 이탈리아의 제3산악사단이 3천명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11월 중순이 되면 오히려 그리스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모라바 강 전투에서 이탈리아의 제26군단을 물리치고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모두 몰아냈으며 오히려 그리스군이 알바니아 국경을 넘어가 사란다와 코르치아를 비롯한 알바니아의 4분의 1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리스 군의 반격모습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추축국 동맹 가담 불가리아의 추축국 동맹 가담 불가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가 패전국이 되자 페르디난드 1세가 퇴위하고 그의 아들인 보리스 3세가 즉위하였다. 이 때문에 보리스 3세는 권력기반이 약했지만 AD 1923년 친위 쿠데타를 통해 농민당의 알렉산다르 스탐볼리스키를 암살하였고 군주독재정치를 펼치며 독일과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와 벨기에 자본이 불가리아에서 철수하였으나 이를 독일 자본으로 메우면서 불가리아 경제는 독일에게 의존적이 되어갔다. 독일의 히틀러는 AD 1940년 9월 7일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넣어 크리이오바 조약을 통해 루마니아의 남부 도르부자 지역을 불가리아에게 양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AD 1941년 3월 2일 불가리아가 공식적으로 추축국 동맹에 가입하면서 독일군은 불가리아를 발칸반도 침공의 전진기지로 삼게 되었다. 다만 독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불가 리아는 독일의 소련 침공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추축국 가담 루마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고립되어 AD 1940년 6월 28일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하질라 지방을 소련에게 빼았겼고 8월 30일에는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게, 9월 1일 남부 도브루자는 불가리아에게 각각 넘겨주어야 했다. 루마니아 왕인 카롤 2세가 위기에 몰리자 여론 전환을 위해 9월 6일 친독일계인 이온 안토네스쿠를 신임 총리로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안토네스쿠는 이틀 뒤 쿠데타를 일으켜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어린 아들 미하이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 후 독재자가 되었다. 이후 안토네스쿠는 11월 23일 독일의 추축국 동맹에 가입하였고 AD 1941년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소련 침공에 대하여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였다. 특히 루마니아에게 플로에슈티 유전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 헝가리의 추축국 가담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붕괴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제독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가 AD 1920년 섭정이 되어 최고통치자가 되면서 왕국이지만 왕이 없이 독특한 형태가 되었다. 한편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상실한 영토를 되찾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히틀러는 헝가리를 회유하기 위해 AD 1938년 11월 2일에 제1차 빈 중재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남부 슬로바키아와 남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양도하도록 했고 AD 1940년 9월 7일에 제2차 빈 중재를 통해 루마리아의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넘겨줬다. 이에 따라 헝가리의 호르티는 AD 1941년 4월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독일군이 헝가리를 지나가도록 승인하였고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자 헝가리도 6월 27일 소련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고 11월 25일 독일과의 추축국 동맹에 공식적으로 가담하였다. 독일군의 지중해 진출 발칸반도 전역 유고슬라비아 점령 독일의 히틀러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멋대로 벌인 발칸반도 침공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나 그리스 정부의 요 청에 따라 영국군이 그리스에 배치되자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 위해 AD 1941년 3월 2일 불가리아를 추축국 동맹에 가입시킨 후 독일군을 불가리아에 주둔시켰고 3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왕국까지 추축국 동맹에 끌어들였 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획득한 이후 친밀한 관계에 있던 몬테네그로까지 합병하여 AD 1918년 12월 1일 탄생한 왕국으로 본래 이름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었으나 AD 1929년 7월 6일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꿨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서는 프랑스를 삽시간에 점령한 독일의 강성함을 보고 독일과의 동맹을 선택한 것이었으나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이 비난하고 나섰고 마침내 3월 27일 밀란 네디치 총리가 이끄는 친영파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자 독일군이 AD 1941 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때 헝가리는 아직 추축국 동맹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독일군이 자국의 영토를 지나가도록 승인하게 된다. 막강한 독일 공군이 먼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폭격하였고 이어서 독일의 제12군이 헝가리를 지나 유고슬라비아로 진격하였으며 이탈리아군도 알바니아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비록 유고슬라비아의 병력은 무려 100만명에 달했으나 무장이 형편없고 기동성이 결핍된 구식 군대였기 때문에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개전 1주일 만에 대도시 2개가 점령당했고 여기에 유고슬라비아에 병합되었던 크로아티아까지 독립을 선언하고 독일군을 지원하면서 유 고슬라비아는 삽시간에 무너져 4월 17일 항복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유고슬라비아가 독일과 이탈 리아의 점령지로 분할되었고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세르비아 군구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비록 유고슬라비아 전 역이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공산주의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게릴라 부대인 파 르타잔을 이끌기 시작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제2군의 참모장이었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산악지대로 들어가 민족주의 게릴라 부대인 체트니크를 구성하여 독일의 지배에 저항하는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스 점령 유고슬라비아까지 차지한 4월 6일 독일군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그리스 국경을 넘었다. 당시 그리스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 62,500명이 지원 온 상태였으나 전년도에 이탈리아의 침공을 막아내었던 독재자 메타사스가 1월에 사망하면서 이전과 같은 결집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구나 지난 이탈리아의 공격과 달리 이번 공격은 알바니아 국경 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국경으로도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그리스의 방어계획은 전통적인 적대국인 불가리아의 공격과 알바니아를 통한 이탈리아군의 공격만 염두에 두고 유고슬라비아가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에 대한 대비가 매우 허술한 상태였다. AD 1941년 4월 6일 독일군의 그리스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독일군의 공격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양쪽에서 이루어졌고 알바니아에서는 이탈리아군이 협공에 나섰다. 불가리아로부터 진격해 들어간 독일의 제18군단과 제30군단이 메타사스 선을 견제하는 사이에 유고슬라비아를 통과한 독일의 제2기갑사단이 메타사스 선을 우회하여 그리스 북서부의 테살로키나를 함락시키고 그리스군을 포위해버렸다. 결국 메타사스 선을 지키던 그리스군 6만여명이 항복하고 말았고 알바니아 방면을 지키던 그리스-영국 연합군도 퇴로가 차단당할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의 국경이 완전히 무너졌고 이제 영국군은 최대한 병력을 보존한 채 그리스를 탈출하기 위해 올림푸스 산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홀로 남겨진 그리스군은 더이상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4월 21일에 그리스의 주력군인 제1군이 항복하면서 사실상 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리스 정부의 공식 항복은 그로부터 2일 뒤인 4월 23일 이루어졌고 4월 27일 독일군이 아테네에 입성하였다. 이후 그리스는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에게 분할점령당했는데 처음부터 그리스를 욕심내었던 이탈리아가 가장 많은 영토를 할양받았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아테네, 마케도니아 중부, 테살로니키, 에게 해의 대부분 섬들은 모두 독일이 차지했다. 비록 그리스 공격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하면서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던 불가리아는 그 대가로 트라카아를 얻었다. 한편 올림푸스 산으로 후퇴했던 영국군 5만명은 그리스가 항복한 4월 23일부터 본격적인 철수작전을 개시하여 4월 27일까지 5일간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를 통하여 그리스를 무사히 떠났다. 이렇게 퇴각한 영국군 중 4만명은 이집트로 향하여 북아프리카 전역을 지원하게 되었지만 나머지 1만명은 크레타 섬의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크레타 섬으로 향했고 그 뒤를 독일이 뒤쫓으면서 크레타 섬 전투가 이어지게 된다.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 모습 크레타 섬 전투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군의 다음 목표는 그리스 남쪽의 크레타 섬이 되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석유의 공급을 의존하던 루마니아 유전이 크레타 섬에서 출격하는 영국 공군의 사정거리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크레타 섬을 지키는 영국군 병력은 기존 수비병 1만명과 추가 증원된 1만명, 그리고 그리스 민병대 1만명으로 구성되어 총 3만명에 달했다. 당시 독일은 해군력에서는 여전히 영국에게 상대가 안되었지만 롬멜의 활약으로 크레타 섬 주변의 영국 공군기 대부분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공권은 장악한 상태였다. 이에 독일은 대규모 공수부대를 하늘로부터 투입하여 크레타 섬을 점령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AD 1941년 5월 20일 독일군 공수부대인 팔쉬름예거 3개 전투단이 각각 크레타 섬의 동쪽 이라클리온, 중부의 레팀논, 서부의 말레메 비행장를 점령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비록 독일군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공수부대를 운용하였지만 크레타 섬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대규모 낙하작전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공격 첫날부터 막대한 희생이 이어졌다. 지상에 내려오기도 전에 상당수가 영국군의 사격에 사망하였고 어렵게 지상에 도착한 이후에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당시 낙하산이 열악하여 공수부대원들의 무장은 권총 정도만 가능했었고 중화기와 탄약은 별도로 상자로 낙하시켜야 했기 때문으로 지상에 내려온 공수부대원들은 빈약한 무장으로 무기와 탄약을 찾아 헤메다가 공격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공수부대원들의 막대한 사상자만 유발시키며 독일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으나 서부의 말레메 비행장 근처의 107고지만은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부터 독일측은 말레메 비행장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하면서 독일군은 크레타 섬에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비록 바다에서 펼쳐진 상륙작전은 영국 함대에 의해 대부분 저지되었으나 말레메 비행장을 통해 공중을 통해서 계속해서 병력을 수송하였기 때문에 독일군이 크레타 섬을 서서히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군도 크레타 섬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였고 해군의 지원 속에 5월 28일부터 5월 31일까지 철수가 이어져 약 9천명이 크레타 섬을 빠져나가게 된다. 다만 영국군은 철수 도중에 독일 폭격기의 공격을 받아 순양함 3척과 구축함 6척을 잃는 손실을 입었고 미처 크레타 섬을 탈출하지 못한 1만 7천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독일군은 6월 1일 공식적으로 크레타 정부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렇게 하여 독일군이 크레타 섬을 점령하였으나 그 피해는 엄청났다. 공수부대 1만6천명 중 4천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 되었고 2천6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영국군의 대공사격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비행하였던 수송기도 절반이 파괴당했다. 크레타 섬 전투의 많은 희생 때문에 히틀러는 앞으로는 대규모 낙하작전을 꺼리게 된다. 또한 독일은 조 종사 훈련교관까지 전장에 투입하였다가 희생되면서 이후 조종사 육성에차질을 빚게 된다. 이에 반해 연합군 측은 크레 타 섬 전투에서 보여준 낙하작전에 자극받아 대규모 공수부대를 육성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훗날 시칠리아 섬 침공,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에서 많은 활약을 하게 된다. 크레타섬의 전투현황 독일군의 몰타 섬 공격 실패 한편 독일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전하면서 이탈리아군이 함락에 실패한 몰타 섬이 중요한 거점으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러던 중 AD 1940년 11월 타란토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에게 치욕을 안겼던 영국의 항공모함인 HMS 일러스트리어스가 독일공군기들에게 공격을 받고 수리를 위해 몰타 섬에 입항하면서 자연스럽게 몰타 섬이 독일 공군의 표적이 되었다. 독일 공군기들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거점으로 AD 1941년 1월 10일부터 몰타 섬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에 나섰다. 비 록 HMS 일러스트리어스는 1월 23일 야음을 틈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나 몰타 섬의 중요도를 잘 아는 독일 측에서는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다. 독일 공군기들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2월 한달 동안 몰타 섬의 영국 공군기 대부 분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독일 공군기들의 폭격을 우려하여 영국의 수송선단도 몰타 섬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면서 몰타 섬의 영국군의 고립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다만 역설적으로 연일 계속되는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떼죽음 당한 물고 기들이 몰타 섬의 영국군의 식량으로 활용되면서 영국군이 근근히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몰타 섬의 제공권을 독일이 가져가면서 이후로도 독일 공군의 일방적인 폭격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타 섬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는데, 해군력에서는 열세를 보이는 독일이 몰타 섬 점령에 필요한 지상군을 상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3월말부터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자 독일 공군기들도 몰타 섬 공격 보다는 북아프리카 전역을 지원하는 데 투입되었기 때문에 몰타 섬에 대한 공격도 느슨해졌다. 그 사이 영국 공군기들이 계속해서 몰타 섬으로 지원보내졌고 6월이 되면 이제 영국의 전투기들이 숫자에서 오히려 독일군을 압도하기에 이른다. 결국 독일도 몰타 섬 점령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여 지브롤터-몰타 섬-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영국 해군의 지중해 제해권이 유지되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의 독일군은 롬멜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보급난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된다. AD 1941년 유럽의 세력분포 현황 북아프리카 전역의 시작 롬멜의 1차공세 AD 1941년 2월 15일 아프리카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롬멜은 이미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지고 무기와 장비마저 열악한 이탈리아군을 데리고 익숙치 않은 사막 기후 속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는 것도 녹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접 정찰기를 타고 정찰한 결과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의 추격에만 열중하여 부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롬멜은 전선을 유지하라는 독일군 지휘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하였다. 비록 아직까지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독일군은 5경기갑사단의 수색대대 뿐이었고 본대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였으나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로 위장하고 진군하는 속임수를 썼다. 롬멜이 이들 가짜 전차들을 이끌고 엄청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진군하자 영국군은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하기 시작했고 롬멜은 아무런 전투없이 3 월 24일 사막의 요새인 엘 아게일라를 점령했다. 이때부터 영국군은 롬멜을 '사막의 여우'로 부르며 질시와 감탄을 동시에 하게된다. 북아프리카 사막에서의 에르빈 롬멜 모습 롬멜의 공세에 대하여 독일군 지휘부는 재차 방어전에만 치중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롬멜은 AD 1941년 3월 31일 다시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키레나이카로 진격했다. 롬멜은 독일군 지휘부와 달리 히틀러가 자신의 진격을 옹호하리라 예상했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롬멜은 기습 공격으로 솔룸까지 2주 만에 진격하며 영국군을 초토화시켰고 사막전의 대가 영국의 리처드 오코너 장군을 포로로 잡으며 불과 1주일 만에 영국군을 800km 밖으로 다시 몰아내는 데 성공하자 히틀러도 롬멜의 공세를 승인하였다. 롬멜의 다음목표는 리비아 북동부의 항구도시인 토브룩이 되었으나 4월 10일부터 감행한 토브룩 공격에서는 큰 피해만 입고 말았다. 영국 함대의 도움을 받는 항구도시인 토브룩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도움이 절실하였으나 독일에게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해군이 없었고 이탈리아의 해군은 이미 타란토 해전에서 모두 무너진 상태였다. 이 때문에 롬멜은 공격에서 해군 지원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해상 보급로가 영국 해군에게 큰 위협을 당하며 만성적인 물자 보급부족 문제를 겪기 시작했다. 하지만 롬멜은 포기하지 않았고 주력부대를 토브룩 공격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게 하는 한편 별동대를 차출하여 카푸 초와 바르디아를 탈환하고 할파야 고개를 탈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롬멜의 1차공세 진격 현황 롬멜의 공세가 토브룩에서 멈춘 사이에 이집트의 영국의 중동사령부 총사령관 웨이블이 병력을 수습한 후 본국으로부터 전차와 물자를 추가로 보급받고 5월 15일 리바이로 재진격하였다. 초기 3일간 영국군은 할파야 고개와 카푸초 요새 인근까지 진군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롬멜이 88mm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활용하는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서 영국의 전차들이 무력화 되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5월 27일 이집트로 물러났다. 6월 14일 영국군이 전차부대를 대대적으로 증원한 뒤 배틀엑스 작전을 펼치며 다시한번 리비아로 처들어갔으나 롬멜은 불과 80대의 전차와 88mm 대공포로 무장한 1개 대전차포병대대 만으로 300대의 영국 전차부대에게 다시한번 대승을 거뒀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지고 웨이블이 해임당하고 클로드 오킨레크가 신임 중동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롬멜의 1차공세영국군의 반격, 크루세이더 작전 이렇게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분전을 거듭하자 독일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이탈리아군의 예속부대에 불과했던 롬멜의 아프 리카군단을 AD 1941년 8월 15일 '아프리카 기갑집단(Panzer Group Africa)'으로 승격시키고 롬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롬멜은 부족한 병력과 병참 지원 때문에 점차 한계를 들어내며 요충지인 토브룩 만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본국에 더 많은 전차와 무기, 보급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히틀러가 AD 1941년 6월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독일 본국도 더이상의 병력과 장비 지원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와 반면에 영국군은 독일의 그리스 침공을 방어하러 발칸반도에 상륙했던 병력들이 독일의 그리스 점령과 함께 이집트로 되돌아왔고 영국 본국과 식민지인 인도 제국, 영연방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뉴질랜드에서도 지속적으로 병력과 장비, 물자가 충원되고 있었다. 이에 오 킨레크는 앨런 커닝햄을 영국의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토브룩을 포위하고 있는 롬멜을 몰아내기 위해 크루세이더 작전을 11월 17일 전개하였다. 악천후 속에서 리비아 국경을 넘은 영국군이 11월 18일 토브룩 외곽 40km까지 도착하였다. 이에 롬멜이 토브룩 포위를 풀고 반격에 요격에 나서면서 11월 20일 토브룩 남동쪽의 시디 레제흐에서 대대적인 전차전이 벌어졌고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롬멜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롬멜은 오히려 공세로 전환하여 이집트 국경까지 진격하였고 이에 11월 23일 영국의 커닝 햄이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오킨레크는 11월 25일 커닝햄을 해임하고 참모차장인 닐 리치를 새로운 영국의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공격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영국군은 숫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섰고 뉴질랜드 제2사단이 시디 레제흐를 다 시 공격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포위망이 느슨해 진 틈을 타고 토브룩의 수비병력까지 협공에 나서자 롬멜은 위기에 빠졌다. 결국 롬멜은 12월 7일 토브룩에 대한 포위를 풀고 후퇴해야했고 12월 31일까지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내어준 채 전선을 엘 아게일라까지 다시 물러나야 했다. 영국군의 크루세이더 작전 전개 현황 롬멜의 2차공세 롬멜은 AD 1941년 1차공세를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으나 결국에는 토브룩을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자 많이 아쉬워 했다. 이에 독일 본국으로부터 전차 90대 보급을 완료하자마자 AD 1942년 1월 21일 2차공세를 시작했다. 롬멜이 이렇게 곧 바로 반격을 개시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영국군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롬멜은 1월 23일 아게다비아를 되찾았다. 롬멜은 이 공으로 1월 24일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월 30일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집단은 '아프리카 기갑군(Panzer Army Africa)'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공세를 이어가 1월 29일 벵가지를 점령하고 2월 4일 가잘라에 이르렀다. 롬멜의 기습공격에 후퇴를 거듭하던 영국군도 가잘라 부터는 전력을 수습하여 내륙의 비르 하케임까지 총연장 80km에 달하는 방어선을 구축했 다. 이때 영국군이 보유한 전차는 모두 840대로 롬멜의 아프리카군단이 보유한 560대의 1.5배에 달했고 더욱이 미국으로부터 구입한 랜드리스전차(M3 그랜트 중전차 167대, M3 스튜어트 경전차 140여 대)와 영국 본국으로부터 온 신형전차 (MK.3 발렌타인 보병전차 160여 대, A15 크루세이더 순항전차 250여 대, MK.2 마틸다II 보병전차 110대)가 대량으로 도착한 상태였다. 롬멜에게는 독일의 신형전차 3호전차 J형 19대와 4호전차 F2형 4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영국군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모두 독일군이 열세인 형편이었으나 롬멜은 그 사실도 모른채 5월 26일 선제 공격을 시작하며 가잘라 전투를 시작했다. 롬멜은 특유의 기동전을 펼치며 공세에 나섰으나 숫적인 열세 때문에 얼마지나지 않아 가잘라, 비르 하케임, 엘 아뎀 사이에서 고립되어 버렸다. 이에 롬멜은 이탈리아군을 비르 하케임에 집중투입하여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탈리아군이 오히려 비르 하케임을 담당한 자유프랑스 여단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말았다. 이에 롬멜은 독일군까지 추가 투입하여 겨우 이탈리아군의 붕괴를 막고 오히려 자유프랑스 여단을 역으로 포위하였으나 영국군은 롬멜의 피해정도를 과소평가하고 롬멜이 토브룩 방면으로 진격해오는 것만 우려하여 병력과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고 결국 자유 프랑스 여단이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6월 5일부터. 그러나 이마저도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롬멜에게 패퇴하였고 분전을 거듭하던 자유프랑스 여단도 이제 홀로 남게 되면서 단독으로는 독일군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6월 10일 포위망을 돌파하여 후퇴를 선택하게 되었다. 비르 하케임을 함락하여 영국군의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후방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롬멜은 6월 11일부터 엘 아뎀 방향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때 역시 롬멜은 6월 13일까지 놀라운 전차 기동전을 펼치며 영국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영국의 전차 중 전투가 가능한 것은 70여대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제 영국의 제6군은 롬멜의 공격을 피해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고 6월 17일이 되면 이집트로 전면적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토브룩이 다시 롬멜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비록 롬멜의 1차공세에서 약 9개월 간이나 포위공격을 방어해낸 토브룩이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영국의 오킨레크 역시 토브룩을 사수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철수를 명령하면서 6월 21일 토브룩이 마침내 롬멜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롬멜은 가잘라 전투의 승리와 토브룩 함락의 공으로 6월 22일 원수로 진급하였다. 롬멜의 2차공세 진격 현황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실패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등장 롬멜은 가잘라 전투에서 영국의 제6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포로 3만명을 잡으며 토브룩까지 점령하는 눈부신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면서 롬멜에게 남은 독일전차는 단 90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이탈리아의 구식 전차 130대 가량과 노획한 영국군의 전차 뿐이었다. 더욱이 롬멜이 이집트 공격에 나서면서 보급선이 토부룩에서도 450km 나 연장되어 추가보급에 많은시간이 걸렸고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빼앗기면서 수송함이 격침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결정적으 로 소련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면서 독일 본국에서 더이상 북아프리카를 신경쓸 여유가 없게 되어 버린다. 영국의 오킨레크는 가잘라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리치를 해임하고 스스로 영국의 제8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고 알렉 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106km 떨어진 엘 알라메인에서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만일 영국이 엘 알라메인까지 돌파당하면 영국에게 남은 유일한 북아프리카의 군항인 알렉산드리아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큰 위기였다. 그러나 비록 영국군의 상태는 처참하였지만 미국의 랜드리스법(무기대여법)에 의해 중전차와 항공기가 계속해서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은 가능했다. 이 때문에 롬멜은 열악한 보급사정에도 불구하고 다시한번 모험적인 공세를 펼치기로 마음먹었으나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AD 1942년 7월 1일 ~ 27일)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롬멜의 이집트 점령은 좌절되고 만다. 한편 비록 오킨레크가 롬멜의 이집트 점령 만은 막아냈으나 영국 수상인 처칠은 북아프리카에서 숫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롬멜에게 패배를 거듭하고 이집트에서 방어전으로 일관하는 오킨레크의 지휘에 불만을 가졌다. 이에 오킨레크는 해임되었고 대신하여 중동사령부 총사령관에 해롤드 알렉산더가 임명되었고 실질적으로 롬멜을 상대해야 하는 영국의 제8군 사령관에는 버나드 로 몽고메리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몽고메리 역시 처칠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방어전으로만 일관했고 충분한 병력과 장비가 확보되었다고 판단이 든 후에야 본격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롬멜을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모습 중동 지역으로의 전쟁 확대 영국의 이라크 침공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재편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이라크는 영국 관할이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에게 위임되었다. 그 중에서 이라크는 메카의 태수 샤리프 후세인의 3남 파이살 1세를 AD 1921년 국민투표를 통해 국왕으로 추대하였고 AD 1930년 6월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2년뒤인 AD 1932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영국의 신탁통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파이살 1세가 AD 1933년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아들인 가지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거듭된 쿠데타로 혼란이 계속되었는데 AD 1936년부터 AD 1941년 사이에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가 7번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혼란은 가지 왕이 AD 1939년 4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파이살 2세가 즉위한 이후로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넘겨주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영국의 처사에 이라크가 불만을 가지면서 이라크와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친이탈리아 성향의 라시드 알리가 AD 1941년 4월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여 집권하면서 영국은 이라크가 추축국 동맹에 가담하여 유럽으로의 석유수송을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라시드 알리가 AD 1930년 영국-이라크 조약에서 보장된 영국의 권리를 제한하려 시도하자 조약 위반을 빌미로 같은 해 5월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비록 이라크가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많은 전투기를 사들였으나 열악한 이라크군으로서는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바그다드와 모술 전투에서 패배한 뒤 라시드 알리는 이집트로 도망쳤다. 이렇게 하여 이라크는 다시 영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오게 된다. 영국의 레바논-시리아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에 의해 프랑스가 점령된 후 비시 프랑스가 성립되자 시리아와 레바논도 비시 프랑스의 관할이 되었다. 당시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시리아와 레바논 역시 비시 프랑스를 공식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리아와 레바논도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다. 더욱이 영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일 때 비시 프랑스는 독일에게 협조하여 시리아를 통해 이라크로 전투기 등의 전쟁물자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에 영국에서는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앞세워 AD 1941년 6월 8일 팔레스타인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시리아와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본국인 비시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던 시리아와 레바논은 영국군과 자유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여 6월 21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었고 그로부터 2주 뒤인 7월 6일에는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가 항복하였다. 시리아와 레바논의 실질적인 독립은 AD 1944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영국과 소련의 이란 침공 AD 20세기 초반 페르시아는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다툼의 장으로 전락하였고 AD 1917년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지자 그 틈을 탄 영국에 의해 AD 1919년 보호협정을 체결하고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AD 1921년 레자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AD 1925년 샤로 즉위하여 새로운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 그리고 AD 1935년에는 내부적으로 사용하던 '이란'을 공식적인 국호로 천명하였다. 이후 레자 샤는 영국과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영국과 소련을 서로 견제시키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레자 샤의 이러한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AD 1941년 6월 기본적으로 이란은 중립을 표방하였으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영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게 되었고 영국이 소련에게 보낼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이란 철도의 무제한 이용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이 남북에서 동시에 이란을 침공하여 이란 전역을 장악하고 레자 샤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후 레자 샤의 장남인 모하마드 레자 샤에게 즉위하였으나 사실상 영국과 소련에게 분할 점령당한 채 소련에 대한 물자수송로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참고]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 [참고] 위키백과 지중해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참고] Wikipedia Siege of Malta (World War II) [참고] Wikipedia Battle of Taranto [참고] Wikipedia Balkan Campaign (World War II) [참고] 위키백과 에르빈 롬멜 [참고] 위키백과 북아프리카 전역 [참고] Wikipedia Operation Compass [참고] Wikipedia Operation Crusader [참고] [월드오브탱크][밀리터리리포트] 가잘라 전투 1부 - 가잘라 전투의 서막 [참고] [월드오브탱크][밀리터리리포트] 가잘라 전투 2부 - 가잘라 전투의 진행 [참고] [월드오브탱크][밀리터리리포트] 가잘라 전투 3부 - 가잘라 전투의 끝 [참고] 위키백과 지중해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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