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2차 세계대전(Ⅶ) 독소 전쟁(2) 일진일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제3차 하르코프 전투

출처: http://winlee96.blog.me/220319507809


AD 1942년초 모스크바 전투 직후의 상황

르제프 전투


AD 1941년 중반부터 펼쳐진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파죽지세로 모스크바까 지 진격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소련의 겨울한파에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하고 오히려 소련군의 반격에 뒤로 밀려나는 처지가 되고 밀았다. 소련측에서는 독일의 중부 집단군을 최대한 밀어내고 독일의 북부 집단군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자 모스크바 북부를 방어하던 이반 코네프의 칼리닌 전선군과 파벨 쿠 로츠킨의 북서 전선군 소속의 9개 야전군이 비텝스크와 스몰렌스크 북방으로 전진하고 게오르그 주코 프가 지휘하는 서부 전선군과 예비 전선군 예하 9개 야전군이 모스크바 남부에서 스몰렌스크와 브랸스 크로 향하는 대반격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12월 26일 나로포민스크를, 28일에는 칼루가를, 이듬해 1 월 2일에 말로야로슬라베츠를 차례로 해방시키며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소련의 이 오시프 스탈린은 여전히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다시 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고 특히 독일군의 돌출 부가 된 르제프가 모스크바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이 곳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고자 르제프 방 면에 대한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르제프 주변 양군 배치 현황


AD 1942년 1월초 르제프 지역의 방어는 아돌프 슈트라우스가 지휘하는 독일의 제9군이 담당하고 있 었다. 그러나 칼리닌 전선군이 북쪽의 비텝스크 근처까지 접근하고 서부 전선군이 동쪽에서 전진해왔 으며 설상가상으로 제3공수군이 낙하하여 브야즈마를 점령하면서 후방마저 차단당했다. 비록 남쪽만 은 제2기갑군과 제4기갑군, 제4군이 필사적은 지켜내어 완전히 고립되는 것만은 면했으나 더이상의 증원군을 기대하기 힘들어 여전히 전황이 절망적이었다. 더구나 이미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의 중 부 집단군 사령관 페드로 폰 보크, 제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 제2기갑군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 안, 제4기갑군 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등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략적인 후퇴를 요청하다가 모두 해임 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휘체계에도 혼란이 생긴 상태였다. 하지만 르제프는 히틀러에게 모스크바를 재 침공하기 위한 포기할 수 없는 교부보였기 때문에 AD 1942년 1월 15일 제9군의 신임사령관으로 발터 모델을 임명하고 르제프를 무조건 사수하라고 명령하였다. 모델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구데리안의 제 2기갑군 예하의 제41기갑군단을 이끌고 최선봉으로 나서 모스크바 서쪽 20km까지 진격하기도 하였고 후퇴시에는 후미를 담당하면서 아군을 엄호하면서 그 지휘력을 입증한 바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틀 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발터 모델의 모습


모델이 제9군 사령부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소련군의 포위가 거의 완성직전이었고 병력숫자도 소련군 의 4분의 1에 불과한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델은 소련군 역시 독일군 못지 않게 강추위에 고전 하고 있고 전선이 길어지면서 보급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파악하고는 히틀러에게 르제프를 사수하 겠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방어진지 구축에 나서는 한편 부족한 병력을 전 방어선에 배치하기보다 는 주요 거점을 정하여 집중 배치하고 후방에 예비대를 따로 편성하는 방식으로 방어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모스크바 공격이 실패하면서 전차도 크게 부족해졌기 때문에 부족한 화력을 보충하고자 대포를 후방에 집중시켜 예비대와 함께 운용하기로 하였다. 이후 모델은 소련군이 방어선 사이를 침투하면 예 비대의 정확한 투입과 대포 화력의 집중 포격을 통해 소련군이 침투한 간격을 모두 닫아버렸을 뿐만 아 니라 오히려 공격으로 전환하면서 소련군의 공세를 모두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방어전술로 모델은 AD 1942년 1월초부터 4월까지 장장 100여 일간 걸쳐 계속된 소련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르제프 일대를 무 사히 사수하면서 '방어의 사자(Abwehrlowen)'로 별명을 얻었다.



제2차 하르코프 전투


독일군은 르제프 전투에서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것에 이어 사단급 독일군이 고립된 홀름 포위전과 군단급 독일군이 고립된 데먄스크 포위전에서 독일 공군의 공중보급에 의지하며 방어에 성공 하면서 독일의 중부 집단군이 괴멸적인 타격에서 일단은 벗어났다. 한편 AD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군항인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역시 일본과의 동맹에 따라 12 월 11일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미국의 참전이 시간문제가 되었다. 특히 AD 1942년 1월 1 일 아카디아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을 비롯한 26개국의 연합국 대표가 참여하여 독일-이탈 리아-일본의 추축국 동맹에 대한 공동 전쟁수행을 결의하는 '연합국 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소련은 미국이 AD 1941년 3월 11일부터 발효시킨 무기대여법(렌드리스)에 대한 혜택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무기와 물자가 소련에 본격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AD 1943년 이후에야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 기 때문에 이에 그 전에 소련과의 전쟁을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작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면서 독일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가능해졌 으나 겨울동안 중부 집단군의 피해가 너 무 컸기 때문에 모스크바를 재공격하는 방안은 기각되었고 대신하여 히틀러가 기존부터 욕심내었던 카 프카스를 남부 집단군이 공격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만일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점령한다면 소련군 의 연료를 고갈시키면서 독일군의 고질적인 연료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아 프리카에서 선전하고 있는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이집트를 돌파하면 중동에서 합류하는 것까 지 염두에 둔 거창한 계획이었다. 이를 위한 작전명은 처음에 "지그프리트 작전"이었으나 나중에 "청색 작전( Fall Blau) "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청색 작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소련군으로부터 먼저 공 세가 시작되어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를 탈환하려는 공격이 5월 22일 개시되면서 전년도에 독일군이 하르코프를 점령한 제1차 하르코프 전투에 이은 제2차 하르코프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2차 하르코프 전투의 상황도


하르코프는 공업도시로서 우크라이나의 도시 중 키예프에 이은 2번째 대도시였다. 스탈린은 남서 전선 군에게 전차를 대대적으로 보급한 후 64만명의 대병력을 편성하여 하르코프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그 지휘를 해임되었던 전 중앙 방면군 사령관 세묜 티모셴코에게 다시 맡겼다. 하르코프에 주둔한 독일의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소련 남서 전선군의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하였지만 소련군을 하 르코프로 최대한 끌어들이면서 근처에 있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에게 후방의 차단하도 록 요청하였다. 이 작전이 멋지게 성공하면서 티모셴코는 하르코프를 점령한 후에 오히려 역으로 포위 당하며 30만명의 인명손실을 입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제2차 하르코프 전투의 피해로 소련의 남부 방 어체계에 큰 공백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독일은 청색 작전을 펼치기에 더욱 유리해졌으나 청색 작전에 합류해야하는 독일의 제11군과 루마니아군의 세바스토폴 포위전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의 개시가 당분간 연기되었다.



세바스토폴 공방전


세바스토폴은 크림반도의 끝부분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특성상 오랫동안 러시아 흑해함대의 군항으로 활용되었다. 그 덕분에 3겹에 걸친 방어선과 대구경 요새포, 해안포가 배치되었고 흑해함대도 함포로 지원포격을 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을 자랑했다. 그러나 AD 1941년 가을 당시에는 소련군이 전 전선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세바스토폴은 고립되어 홀로 저항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러한 세바스토폴의 공격을 독일의 제11군과 오데사 점령 후 합류한 루마니아군이 맡았다. 그 중에서 독일의 제11군 사령관은 북부 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임명되었는데 그동안 기 갑부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만슈타인이 이번에는 공성전에서 그 능력을 보일 차례가 되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 Manstein)의 모습


만슈타인은 AD 1941년 10월 30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세바스토폴의 해안포와 흑해함대의 함포 사격에 고전하였다. 12월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자 만슈타인은 다른 부대의 대포까지 빌려와 총 1,275 문을 배치하고 5일간 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공격방법을 바꿨다. 그러나 그정도로는 세바스토폴은 끄 떡하지 않았고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숨통이 틔인 소련군이 세바스토폴 지원 을 위해 새롭게 편성한 자카프카스 전선군을 AD 1941년 12월 24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크림반도 인근의 케르치 반도에 상륙시키면서 오히려 위기에 처하는 듯 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소련군이 상륙 정과 보급선 부족으로 추가병력 상륙 및 중화기 보급이 늦어지고 있는 것을 보자 그 틈을 타고 반격을 전개하여 AD 1942년 5월 20일까지 소련의 지원군을 몰아내고 케르치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 공하게 된다. 이 때 만슈타인은 3,397명의 사상자만 발생시킨 대신에 소련군에게 20여만명의 사상자 와 포로의 피해를 입히는 놀라운 전과를 기록하게 된다.

세바스토폴 전투 주변의 상황


AD 1942년 6월 2일 만슈타인이 미뤄두었던 세바스토폴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동안 세바스토폴의 방 어선이 더욱 보강되었기 때문에 만슈타인은 다시한번 대규모 포격을 계획하였으나 그 규모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략 1,500여개의 야포와 다연장포, 제8항공군단의 폭격을 동원하여 6월 2일부터 5일간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이러한 화력집중에 세바스토폴의 방어선 곳곳이 무너졌고 이에 독일 군이 진격을 개시하면서 전투는 이제 시가전으로 변했다. 그러나 비록 전차활용 같은 전술적인 면에서 는 소련군이 독일군에 비해 부족한 점이 있었으나 소총을 활용한 근접전에서는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 줬기 때문에 독일군은 시가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시가전이 6월말까지 지속되자 만슈타인은 다시 한번 대규모 포격을 가했고 결국 세바스토폴의 소련군도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6월 30일 스탈린으 로부터 철수를 허락받았다. 남아있던 군함과 잠수함 등을 이용한 해상철수가 시작되었고 7월 9일 철수 를 엄호하기 위해 남아있던 잔존병력이 소탕되면서 세바스토폴이 마침내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 다.



무려 10개월간의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9만 5천여명의 포로와 2만 3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극심 한 피해를 입고 세바스토폴마저 빼앗겼다. 만슈타인은 이 공적으로 육군 원수로 진급하였으나 독일군 의 피해도 커서 도합 3만 5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오랜 전투에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에 당분간 더이상의 작전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세바스토폴 점령 이후 독일의 제11군을 청색 작 전에 합류시키기 위해 작전 개시일마저 늦추고 기다렸던 독일군의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결국 청색 작 전은 독일의 제11군이 빠진 채 전개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독일의 청색 작전과 악몽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청색 작전의 전개


독일의 청색 작전은 AD 1942년 6월 28일 개시되었다. 청색 작전을 수행하는 남부 집단군의 사령관은 지난 AD 1941년 12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해임된 이후 제6군 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라이헤나우가 부임 1달 만인 AD 1942년 1월 17일에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전(前) 중부 집단군 사령관인 페도르 폰 보크가 재기용된 상태였다. 비록 청색 작전에는 세 바스토폴 공략에 지쳐버린 만슈타인의 제11군은 참여하지 못했으나 소련군이 제2차 하르코프 전투에 서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 소련의 남부 방어선에 큰 공백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초기부터 독일군이 손쉽 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청색 작전의 진격로를 두고 히틀러와 보크가 대립했고 결국 히틀러 가 폰 보크를 해임시켰다. 그리고 남부 집단군을 A집단군과 B집단군의 둘로 나눈 후 각각 빌헬름 리스 트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때 청색작전 참여한 독일군 지휘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청색 작전의 당초 계획은 돈 강과 로스토프, 스탈린그라드 등 주요거점을 확보한 후 향후 전개상황을 지켜보며 천천히 카프카스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크가 해임되고 히틀러가 작전에 적극개입하 면서 이제 청색 작전은 A집단군이 카프카스로 단숨에 진격하는 '에델바이스 작전( Unternehmen Edelweiß) '과 B집단군이 볼가 강 연안의 대도시인 스탈린그라드를 함락시켜 A집단군을 측면에서 보호 하는 '왜가리 작전 (Unternehmen Fischreiher )'으로 나뉘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청색 작전은 둘 로 나뉜 남부 집단군이 서로 지원할 수 없는 별개의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도박성 짙은 작전으로 변질 되었고 그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 지휘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적이 없는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스탈 린그라드를 직접 점령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 큰 불안요소가 되었다. 파울루스는 본래 라이헤나우가 제6군 사령관이던 시절에 그의 참모장으로 보좌했던 인연으로 라이헤나우가 남부 집단 군 사령관으로 임명받았을 때 제6군의 후임 사령관이 되었으나 참모 출신이었던 만큼 아직까지는 야전 지휘경험이 일천했다.



전장이 광활한 스텝지역이었던 만큼 독일군의 기동포위전 장기가 십분 발휘되면서 초기 전황은 독일군 에게 매우 우세하게 진행되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한 채 돈 강까지 무질서 하게 패주하였고 수백만명의 소련군이 섬멸당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A집단군은 7월 23일 카프카스 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로스토프 점령 이후에 거침없이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로 진격하였고 B집단군 역시 예정대로 돈 강과 볼가 강 사이의 스탈린그라드로 향했다. 독일군의 진격이 너무 순조롭자 히틀러 는 B집단군의 제4기갑군까지 카프카스로 향하도록 하였으나 도로가 부족하여 정체현상을 빚어지자 다 시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도록 변경했다. 이렇게 독일군의 공세가 파죽지세로 이루어졌으나 A집단군이 너무 멀리 진격하여 B집단군을 지원할 수 없는 거리까지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그 대신 전력이 떨어지 는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 헝가리군의 동맹국 부대가 A집단군과 B집단군의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메우게 되었다.

 

독일의 청색작전 전개모습

 

악몽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작


AD 1942년 8월 23일 독일의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는 러시아 내전 당시 스탈린이 지켜낸 도시로서 소련의 최고권력자가 된 이후 각종 산업시설을 건설하여 급속도로 개발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만큼 스탈린에게 의미가 컸다. 더구나 스탈린그라드는 그 자체로 카스 피 해와 볼가 강을 잇는 주요 교통지이자 카프카스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으로서 이곳을 빼앗기면 독일군의 카프카스 점령을 막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스탈린그라드를 무조건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총을 들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7월 12일 패주하던 남서 전선군을 수습하여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일부 부대는 남부 전선군으로 재편하였다. 새롭게 편성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남서 전선군의 후신인 만큼 티모셴코가 지휘를 맡아야 했으나 독소전쟁 개전 이후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하던 티모셴코의 지휘력에 의문을 느낀 스탈린이 안드레이 예료멘코로 교체하였다. 예료멘코는 스탈린그라드의 절대사수 특명을 받고 부임한 후 휘하 지휘관을 면담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주둔하여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하는 제62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이 패배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즉각 경질하고 대신하여 제64군 사령관인 바실리 추이코프를 임명했다. 공석이 된 제64군 사령관에는 제21군 사령관이었던 미하일 슈밀로프를 전임시켰다. 나중에 이 인선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

 

안드레이 예료멘코의 모습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기 시작한 독일의 B집단군의 작전은 우선 공군 폭격기의 무차별 폭격과 포병의 대규모 포격으로 스탈린그라드를 폐허로 만든 후 기갑부대와 보병부대가 입성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성공을 거둬 제16기갑사단이 선두로 스탈린그라드에 입성하였으나 파괴된 건물 속에서 숨어 있던 소련군이 격렬히 저항하면서 얼마지나지 않아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 았고 결국 독일의 제4기갑군이 스탈린그라드 남쪽에서 소련의 제64군 좌익을 붕괴시키고 진입로를 여 는 데 성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 북쪽 역시 소련의 제62군의 방어선 역시 무너졌다. 이렇게 스탈린그라 드 외곽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손쉽게 독일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 였다. 그러나 스탈린으로부터 무조건 사수명령을 받은 소련군에게는 전투가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었 다. 스탈린은 민간인조차 피난가는 것을 금지하고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였고 이제 막 징병하여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신병들을 스탈린그라드의 배후에 위치한 볼가 강을 통해 스탈린그라드로 끊임없이 밀어넣었으며 상관의 명령없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사람을 즉결 처분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이제 지옥과도 같은 처절한 시가전으로 뒤바뀌었고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물러서지 않는 자존심 대결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주변 양군 배치현황


본래 독일군의 장점은 공군의 근접항공지원과 기계화부대의 양익포위전개를 이용한 기동포위전이었으 나 시가전에서는 이러한 장점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소련군이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과 지하실, 계단 등에 숨어서 독일군을 공격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소총, 대검, 수류탄 등의 소화기를 활용한 원시 적인 전투로 바뀌었고 끝없는 소모전이 이어졌다. 마마이 언덕과 붉은 10월 제철소, 펠릭스 제르진스키 트랙터 공장, 바리카디 대포 공장, 기차역 등에서 연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특히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바실리 자이체프를 비롯한 소련의 저격수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신 병을 징병하는 데로 훈련도 없이 곧바로 스탈린그라드로 투입하는 소련의 무자비한 작전 때문에 비록 사 상자 숫자에서는 소련군이 월등하게 많았고 이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군과의 시가전을 도망다니는 쥐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생쥐 전쟁"라는 우스개소리로 불렀지만 독일군의 피해도 점차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독일군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면서도 착실하게 점령지를 넓히면서 10월에 는 스탈린그라드 90% 이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처절한 사투 끝에 소련의 제62군이 볼가강에 연 한 마지막 거점 만은 지켜냈다.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 모습


소련의 대반격, 천왕성 작전


소련군은 병력을 끊임없이 투입하는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을 겨우 지켜내고는 있었으나 이런 축차적 인 병력투입 만으로는 방어가 한계일 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 스키와 최고사령관 대리 게오르기 주코르를 중심으로 단숨에 전세를 뒤엎기 위한 '천왕성 작전 ( Operation Uranus) '이 입안되었다. 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붙잡아 두고 대신 하여 시 외곽의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루마니아군, 크로아티아군, 헝가리군을 돌파하여 스탈린그라 드를 역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돈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에게 양익 돌파임무를 맡겼다. 돈 전선군의 경우에는 본래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맡던 부대였고 남서 전선군은 예비 전선군의 일부를 별도로 편성한 신규 부대였다.

 

천왕성 작전을 담당하게 된

돈 전선군의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좌)와 남서 전선군의 니콜라이 바투틴(우) 모습


천왕성 작전을 준비하며 스탈린그라드의 북부에 소련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독일 측에도 노 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독일군의 총참모총장인 프란츠 할더가 히틀러에게 소련군 반격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히틀러는 무시했다. 사실 할더는 이미 남부 집단군을 둘로 나눠 A집단군이 카프카스로 진 격하는 것과 스탈린그라드에 B집단군의 제6군 전체가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며 히틀러의 심기를 거스 른 바 있었다. 결국 히틀러는 할더의 정확한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9월 24일 할더를 경질하고 아 예 예편처분하였다. 또한 스탈린그라드의 측면을 방어하던 루마니아군 역시 소련군의 공격을 경고하며 증원과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거부되었다.



소련군은 AD 1942년 11월 19일 천왕성 작전을 개시하였다. 먼저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이 북쪽에서 진 격을 시작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북쪽을 담당하던 루마니아의 제3군을 공격하자 예상대로 루마니아의 제3군은 병력과 장비 모두 열세를 보이며 패주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인 11월 20일에는 로코소프스키 의 돈 전선군이 남쪽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보병만으로 구성된 루마니아의 제4군단을 격파하였고 11월 21일 마침내 소련의 두 전선군이 스털린그라드의 서쪽에서 만나면서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되었다. 이 포위망에 독일의 제6군과 제4기갑군의 1개군단, 그리고 루마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 등 총 33만명의 대병력이 갇혀버렸다. 독일의 제4기갑군의 나머지 1개군단을 제외하면 사실상 독일의 B집단군 대부분 이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것이었다.

소련의 천왕성 작전 전개모습


포위망에 갇힌 독일의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아직 포위망이 느슨할 때 포위망을 돌파하여 스탈린그 라드로부터 철수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히틀러는 현위치를 무조건 사수하라고 명령했고 9월 30일 대중연설에서 독일군은 절대 스탈린그라드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대신하여 공군 참모총장 한스 예쇼네크 및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과 협의하여 항공기를 동원한 공중가교 형태로 고립된 제 6군에 대한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사실 공중보급은 1년전 데먄스크에서 포위된 독일군에 대하 여 성공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 당시 독일군 규모는 군단급에 불과했고 지금은 야전군 이상의 규모였 으므로 보급물량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직접 공중보급을 맡아야 하는 독일의 제4항공군 사령 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조차도 제6군에게 하루에 필요한 물자는 500톤이지만 당시 독일 공군의 하루 수송능력이 최대 300톤이 한계이며 그 마저도 악천후나 소련군의 방해가 있을 경우 더욱 극감하게 된 다며 공중보급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나섰으나 묵살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얼마지나지 않아 사실로 들어났다. 소련의 대공포와 전투기의 방해로 독일의 수송기가 제대로 역할을 하기 힘들어 평균 50톤 정도 밖에 보급할 수 없었고 그 나마도 20톤의 보드카, 여름 군복 심지어는 콘돔과 같이 전혀 불필요한 물품이 전달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났다. 결국 독일의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지쳐갔다.



독일의 겨울폭풍 작전과 소련의 소(小)토성 작전


독일의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고립되어 버리자 이를 구원하기 위한 부대를 급하게 편성했고 그 책 임자로 세바스토폴 공략으로 청색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만슈타인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에 게 충분할 병력을 제공할 여력이 독일에게는 없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외곽을 담당하여 다행히 소련군 의 포위를 피한 제4기갑군의 제57기갑군단과 치르 강 하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카를 아돌프 홀리트 의 분견군( Armeeabteilung; 군단과 야전군의 중간규모의 임시편제) , 그리고 3개의 공군 야전사단과 오 룔에서 파견온 제17기갑사단, 루마니아 제4군의 잔존병력까지 가용한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은 병력 만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이들은 돈 집단군으로 명명되었다. 돈 집단군 중에서도 홀리트 분견군은 3개 의 보병사단과 2개의 기갑군단으로 구성되어 만슈타인에게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였으나 이미 소련군의 공세로부터 치르 강 하류 방어에도 벅찬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스탈린그라드 구출작전에 투입할 수 없었다. 추가적으로 끌어모은 공군 야전사단은 이름만 사단일 뿐 제대로 훈련받지도 못한 비전투원 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제17기갑사단은 그동안의 전투로 가용한 전차가 단 30여대 뿐이었다. 다만 새롭 게 생산된 중전차인 6호전차 티거I을 보유한 503중전차대대가 증원된 것이 한가닥 위안거리였다.



만슈타인은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병력이 이름만 집단군일 뿐 사실상 1개 기갑군단에 불과한 상황이 되자 제6군의 파울루스에게 최대한 스탈린그라드에 근접한 후 '천둥'이라는 암호를 전달하면 이에 호 응하여 소련군을 협공한 후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만슈타인의 제안 은 스탄린그라드에서의 철수를 금지한 히틀러의 지시와는 상반된다는 점에서 과연 파울루스가 따를 지 는 의문이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안한 상태에서 AD 1942년 12월 12일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 출하기 위한 '겨울폭풍작전( Unnternehmen Wintergewitter) '이 시작되어 제57기갑군단의 2개 기갑사단 이 선봉에 서서 북동쪽 방향으로 소련의 제51군의 측면을 강타했다. 당시 소련 측에서는 독일의 역습 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굳힌 채 돈 강 유역의 독일군을 몰아내고 로스토프 를 탈환하여 카프카스로 진격한 독일의 A집단군까지 포위하는 '토성 작전( operation Saturn) '을 준비하 고만 있었기 때문에 만슈타인의 기습공격은 대성공을 거뒀다.



소련의 방어선 곳곳에서 균열이 생기자 그 틈으로 독일의 기갑부대들이 계속해서 밀고 들어갔고 공 격 첫날에만 무려 50km를 진격한 부대도 나올 정도였다. 이튿날 악사이 강의 건너편에 교두보까지 만 드는데 성공했는데 이러한 기갑부대의 진격은 측면이 위험에 노출되는 단점이 있었으나 좌측면은 이미 홀리트 분견군이 지키고 있었고 새롭게 노출된 우측면은 루마니아군이 열악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분전 을 거듭하며 소련군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이렇게 하여 돈 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거침없이 진 격해들어 갔고 아군의 포성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 병사들은 희망에 불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돈 집단군의 진격에 정신없이 밀려나던 소련군도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 고 전투개시 3일만인 12월 15일에 토성 작전을 위해 준비중이던 로디온 말리놉스키의 제2근위군을 서 둘러 돈 집단군 방어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로스토프를 점령하려던 토성 작전을 돈 집단군의 진격을 격 퇴하는 '소(小)토성 작전( Operation Little Saturn )'으로 변경했다. 소련의 제2기갑군의 등장으로 전열을 가다듬는데 성공한 소련군이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하자 독일의 제4기갑군의 진격속도가 둔화되기 시 작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로부터 50km 떨어진 지점까지 일부부대가 도착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더 이 상의 진격은 무리라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사전에 제안한 데로 파울루스에게 '천둥'의 암호를 전달했다.

독일의 겨울폭풍작전과 이에 맞서는 소련의 소(小)토성작전의 모습


파울루스는 만슈타인의 스탈린그라드 탈출제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미 히틀 러는 현지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스탈린그라드를 이듬해 춘계공세를 위한 교두보로 유지해야 한다 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철수를 절대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파울루스는 연료부족을 핑 계로 스탈린그라드을 탈출하여 돈 집단군에게 호응하는 것을 거부하고 스탈린그라드에 그대로 머물기 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파울루스의 판단에 대하여 사실 포위 초기이면 몰라도 이미 식량과 보급품 부족 에 시달리며 전투력이 급감한 당시에는 독일의 제6군 단독의 힘으로 소련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옹호론과 파울루스의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이 빚어낸 대재앙이었다는 비판 론이 공존한다. 어찌되었든 독일의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동안 놀라운 분전으로 우측면을 방어해내던 루마니아군 마저 한계상황에 봉착하자 만슈타인은 12월 23일 철군을 지시했 다. 이렇게 파울루스와 독일의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 었다.



독일 제6군의 항복


AD 1943년 1월이 되자 소련은 더이상 희망이 없어진 독일의 제6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 조건으로 포로의 안전보장, 부상병에 대한 치료, 포로의 개인 소지품 허용, 정규 식량 지급, 종전 후 독일로 소환 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미 파울루스는 독일군이 그동안 소련군 포로에 대하여 가 혹하게 대한 점 때문에 소련군 역시 그렇게 대우할 거라고 지례짐작하고는 항복을 거절했다. 그렇지만 이제 식량 뿐만 아니라 탄약 마저 바닥을 들어내는 상황에서 독일의 제6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련군의 계속된 공세에 포위망은 좁혀져왔고 전투가 없더라도 이미 병사들 태반이 추위와 굶 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1월 30일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갑자기 원수로 승진시켰다. 당시까지 독일 의 포로 중 원수급 장성이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명예로운 자결을 지시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소련군이 임시사령부로 삼았던 백화점 건물까지 접근하자 드디어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항복하겠다 는 의사를 밝혔다.



2월 2일 정식으로 항복한 독일군의 포로는 22명의 장성급을 포함하여 총 9만1천명 뿐이었다. 당초 25 만명이었던 부대의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일부 병사들이 파울루스의 항복을 따르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기도 하였지만 이들도 얼마지나지 않아 모두 토별되었다. 이렇게 하여 스탈린그라 드에서 독일의 제6군이 항복하면서 히틀러가 무모하게 추진한 청색 작전이 결국 실패로 끝났다. 스탈 린그라드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는 동안 소련이 120여만명, 독일과 그 동맹국이 85만명, 도합 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역사상 유래없는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또한 모스크바 전투와 함께 최악 의 동계 전투로 손꼽히기도 한다. 포로가 된 독일의 제6군 9만1천명도 이듬해 봄에 티푸스로 대부분 사망했고 종전 이후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5천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편 파울루스의 항복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앞두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택했다”면서 분노하였다.

독일군 포로의 모습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도 독일군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게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반면에 독일군은 남부 집단군의 주력군 중 하나인 제6군이 사라지면서 그 전력도 크게 약 화되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독소전쟁의 최대의 전환점으로 손꼽게 된다. 다만 독일의 제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고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이 한때 스탈린그라드에 인접한 지 점까지 진출하면서 소련군을 붙들어놓아 카프카스로 진격하였던 독일의 A집단군마저 소련군에게 포위 당하는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다. A집단군이 철수에 성공한 이후 독일은 소련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 해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게 된다.



발터 모델의 숨겨진 활약, 소련의 화성 작전 방어


소련에서는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대반전을 계획하는 한편 독일의 중부 집단군을 공격하는 '화성 작전(Operation Mars)'을 함께 추진하였다. 그 목표는 고기분쇄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수많은 희생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격퇴당한 르제프였다. 그동안 르제프를 방어하 던 독일의 제9군은 1월부터 4월까지 펼쳐진 소련군 대공세를 격퇴한 이후 5월 23일에 사령관인 모 델이 정찰 중 총상을 당해 후방으로 이송된 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전을 거듭하였다. 7월 2일 에는 자이들리츠 작전이라는 공세적 방어를 통해 소련의 제39군과 제11기갑군단을 괴멸시키고 오 히려 소련군의 돌출부를 제거시키기도 하였다. 부상에서 회복한 모델이 8월 7일 복귀한 이후에는 9월말까지 또한번의 소련군 공세를 물리치며 건제를 과시한 상태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천왕성 작전이 멋지게 성공을 거둔 이후인 11월 25일 막심 푸카예프의 칼라닌 전선군과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이 협공을 통해 독일의 제9군을 포위하는 화성 작전이 시작되 었다. 그러나 모델은 독일 정보기관마다 예측이 다른 혼란 속에서도 감청과 탈영병의 진술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개시일을 정확하게 예측한 후 소련군의 돌격하는 진로 앞에 2겹의 참호진지를 구축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은 전투준비 포격 이후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소련군의 포격으로 생긴 웅덩이들이 오히려 소련군의 진로를 방해하였고 독일군이 미리 구축한 참호진지의 공격으로 막대 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소련군은 포기하지 않고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돌파를 강행하였으나 비좁은 진로에 오히려 보병과 뒤엉키면서 정체현상을 빚으면서 오히려 독일군이 배치한 포병대의 집중포 격 대상이 되어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리고 일부 소련군이 돌파에 성공하더라도 후방의 예비 대를 적절한 순간에 투입하여 소련군을 격퇴하고 벌어진 간극을 닫아버린 후 고립된 소련군을 각개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12월초까지 펼친 맹공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격퇴당하자 소련군의 주코 프가 12월 14일 철수를 지시하였으나 소련군은 후퇴과정에서도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최종적으로 화성 작전을 통해 소련군은 1만명의 전사자와 23만5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전체 전 차의 85%에 해당하는 총 1,600대의 손실을 입으며 6개의 전차군단이 와해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 었다. 이에 반해 독일군의 사상자 4만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화성작전의 방어는 제2차 세계대전 사 상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전과였다. 다만 화성 작전은 비슷한 시기에 진 행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소련군이 자신들의 참패를 의도적으로 숨기면서 오 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이 붕괴된 후 비밀자료가 공개된 AD 19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많은 전사학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성 작전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화성 작전이 비록 전술적으로는 소련군의 패배였지만 중부 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지원가는 상 황을 방지했다는 측면에서 반드시 소련군의 참패만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소련군의 반격과 독일군의 역습, 제3차 하르코프 전투

독일 남부 집단군의 위기

 

AD 1942년말에 진행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겨울폭풍 작전이 실패한 이후 전황이 독일군에게 극도로 불리해졌다. 소련군은 겨울폭풍 작전을 물치친 소(小)토성작전을 확대하여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 선군과 안드레이 에레멘코의 남부 전선군은 독일의 돈 집단군을 로스토프로 밀어붙였다. 만일 독일의 돈 집단군이 로스토프를 상실하면 카프카스로 진격했던 독일의 A집단군마저 후방이 차딘되어 고립되 어 버릴 수 있는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이에 A집단군 사령관인 빌헬름 리스트가 후퇴의 승인을 요청하 였으나 후퇴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히틀러에게 해임당했고 제1기갑군 사령관인 클라이스트가 그 후임 이 되었다. 대신하여 제1기갑군 사령관에는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이 임명되었다.



이제 만슈타인은 치르 강 방어를 담당하던 카를 아돌프 홀리트의 분견군과 프레터-피코의 분견군 만으 로 소런군으로부터 로스토프를 지켜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이 방어해야 하는 지역 이 지나치게 넓었다. AD 1942년 12월 24일에 펼쳐진 소련군의 공세 앞에 이듬해 1월 3일 도네츠 강까 지 밀려났다. 다만 신형 중전차인 6호전차 티거 I이 보급된 제503중전차대대의 활약으로 AD 1943년 1 월 7일 지모프니키에서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때 독일의 티거 전차는 단 4대만이 파괴된 반면 에 소련의 T-34 전차는 18대를 파괴하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리한 전황 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만슈타인이 밀리기 시작하자 히틀러도 어쩔 수 없이 A집단군의 후퇴를 승인하면서 제1기갑군이 로스토프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카프카스 공략의 미련을 끝내 버리 지 못했기 때문에 제17군은 쿠반 반도의 교두보에 남아야 했다. 이듬해 봄 공세를 염두에 두고 스탈린 그라드 사수만 외치며 독일의 제6군을 사지에 몰아넣고도 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한 것이었다.



AD 1943년 1월말 혹한과 짧은 해빙이 반복되면서 도로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고 여기에 3일간 강 풍도 몰아치며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때 만슈타인은 카프카스에서 퇴각한 제1기갑군을 로 스토프 북쪽으로 배치하여 홀리트 분견군을 지원하려 했으나 히틀러의 미련으로 제1기갑군의 상당병 력이 제17군이 있는 쿠반 반도 교두보로 차출되면서 1개의 기갑사단과 1개의 보병사단 만이 이동했을 뿐이었다. 소강상태가 끝난 후 소련군은 필립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과 막스 레이테르의 브랸스 크 전선군까지 추가로 투입하여 남서 전선군과 함께 로스토프 북서쪽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에 만 슈타인은 마켄젠의 제1기갑군과 헤르만 호트의 제4기갑군이 보유한 예비 병력을 총동원하여 막아보려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소련의 별 작전


AD 1942년 2월 2일 그동안 지독하게 버티던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낸 소 련군은 우크라이나의 독일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나아가 모스크바를 끊임없이 위협하던 독일의 중부 집 단군마저 몰아내기 위한 거대한 작전을 추진했는데 그 첫 단계로 하르코프와 벨로그드, 쿠르스크의 탈 환을 위한 '별 작전( Operation Star) '을 개시했다. 이를 위해 소련의 남서 전선군의 선봉으로 4개의 전차 군단으로 편성된 마르키안 포포프의 기갑집단이 독일군을 포위하기 위해 도네츠 강을 건너 배후로 돌 아들어가기 시작했고 보로네시 전선군이 벨로그드와 하르코프에 대한 공세를 펼쳤다.



하르코프까지 소련군이 육박하자 B집단군 예하로 후베르트 란츠 산악대장이 이끄는 란츠 분견군이 급 조되었고 파울 하우서가 지휘하는 무장친위대의 SS기갑군단까지 보강되었으나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히틀러에게 하르코프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번에도 히틀러 는 현지사수하라는 명령만 내릴 뿐이었다. 한편 하르코프가 위기에 빠지자 배후가 차단당할 것을 우려 한 제4기갑군과 홀리트 분견군이 2월 8일 로스토프로부터 철수를 시작했고 결국 우려한 데로 쿠반 반 도 교두보에 남았던 독일의 제17군이 독일의 A집단군의 제1기갑군과 분리된 채 고립되고 말았다. 이에 히틀러는 2월 13일에 이제 이름만 남은 B집단군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고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과 합쳤 으며 제1기갑군까지 예속시킨 후 돈 집단군의 이름을 남부 집단군으로 변경시켰다.

소련의 별 작전 전개모습(주황색)


소련군이 2월 9일 벨로그드를 점령하자 란츠 분견군이 하르코프 시내로 철수시키고 SS기갑군단에게 외곽방어를 맡겼다. 2월 13일 소련의 전차군단이 하르코프 북쪽외곽까지 접근하자 SS기갑군단은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하르코프 안으로 밀려났다. 이미 독일의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 사수를 고집하다가 전 멸된 사례를 본 하우저는 2월 15일 하르코프에서 임의로 이탈해 버렸다. 이는 히틀러의 명령에 명백하 게 반하는 행동이었으므로 히틀러는 분노했고 란츠에게 하우저를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해임시키 고 베르너 켐프로 교체했다. 이렇게 하여 란츠 분견군은 켐프 분견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히틀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만슈타인의 사령부가 있는 자포로제까지 날아갔는데 실제로 히틀러는 이때 만슈타인까지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남부 집단군 지휘를 맡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전장에 도착한 히틀러도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만슈타인은 소련군이 연료와 탄약 추가보급을 요청하는 무선을 감청해낸 사실을 바탕으로 소련군 의 공세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기동방어 작전을 구상한 상태였다. 이 작전의 골자는 이미 방어가 불가능한 하르코프를 일부러 소련군에게 내어주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 전략적인 후퇴를 감행한 후 소련군의 공세가 한계에 이르는 공세종말점에 도달할 경우 기갑부대의 우회기동를 통해 소련군 을 역포위를 감행하겠다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만슈타인의 작전 설명을 들은 히틀러는 후퇴라면 무조 건 질색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연히 반대하였으나 2월 18일 소련군의 선봉부대가 자포로제 동쪽 45km 지점까지 진출하면서 히틀러까지 소련군의 포로가 될 지도 모르는 위기까지 처하자 어쩔 수 없 이 만슈타인의 작전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히틀러는 비행장까지 포격에 노출된 위험 속에서 2 월 19일 전용기를 타고 가까스로 베를린으로 되돌아갔다.



만슈타인의 역습, 제3차 하르코프 전투


히틀러의 승인까지 받은 만슈타인은 하르코프에서 독일군을 철수시켰다. 이미 로스토프가 2월 14일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소련의 별 작전이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생각한 스탈린이 독일의 중 부 전선군까지 밀어내기 위한 공세를 계속해서 펼치도록 하였다. 독일의 중부 집단군을 상대하던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이 오룔 근방에서 독일군을 포위하는 동안 새롭게 편성된 콘스탄틴 로코소프 스키의 중부 전선군이 합류하여 브랸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섬멸하고 마지막으로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고 르제프-뱌지마 돌출부의 독일군까지 섬멸하는 내용의 새로운 작전이 수립되었다. 이렇게 소련군이 전선을 확대하는 동안 만슈타인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 재정 비에 들어갔다. 이때 만슈타인이 활용할 수 있는 총 병력은 호트의 제4기갑군, 마켄젠의 제1기갑군, 홀 리트 분견군, 켐프 분견군, 하우저의 SS기갑군단의 육상병력과 히틀러가 새롭게 증원시켜준 볼프람 폰 리히토벤의 제4항공군 정도였다.



만슈타인의 목표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던 마르키안 포포프의 기갑집단이었다. 포포프 기갑 집단은 크라스노아르메이스카야를 넘어 드네프르 강 북안까지 진격하며 자포로제를 위협하고 있었으 나 너무 길어진 병참선으로 인해 진격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되었고 결국 파블로그라드에서 진격이 중 단되었다. 기회가 왔음을 깨달은 만슈타인은 2월 22일부터 독일의 제1기갑군을 전개시켜 북동쪽과 북 서쪽에서 소련의 포포프 기갑집단과 그 뒤를 따르는 제6군의 배후를 차단하게 하였고 뒤이어 독일의 SS기갑군과 제4기갑군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2월 24일 만슈타인의 포위망이 멋지 게 완성되었고 소련의 포포프 기갑집단과 제6군, 제1근위군이 독일 전차들의 포위공격에 순식간에 무 너졌다. 만슈타인은 단 한번의 역습으로 소련의 3개 야전군을 섬멸시키고 소련의 남부방어선에 무려 200km에 달하는 공백을 만들어내는 놀과운 전과를 기록한 것이었다.

제3차 하르코프 전투의 전개모습


승세를 탄 만슈타인은 하르코프 탈환전을 곧바로 전개하였다. 이미 대부분의 소련군들이 독일의 중 부 집단군 공략에 투입된 상태였기 때문에 하르코프에는 일부 수비병력 밖에 없었다. 근처에 있던 소련 의 제3전차군이 서둘러 하르코프로 증파되었으나 독일의 SS기갑군단과 제4기갑군, 켐프 분견군까지 가세하여 길목을 차단하면서 하르코프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도중에 격퇴되고 말았다. 이제 하르코프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나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르코프에 직접 입성하지 않고 주변을 애워싸며 3월 9일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병력을 하르코프에 돌입시켰고 치열한 시간전 끝에 3월 14일 마침내 하르코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하르코프를 상실한 소련군은 측면이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중부 집단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동방어전술


제1차 세계대전이 참호전의 배치상태로 진행되자 방어전술도 몇 겹의 참호선을 바탕으로 점령지역 을 한 치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선형방어에 집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반에 독일의 후티어 전술 이 등장하면서 일부 종심방어 형태가 도입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선형방어를 고수하 였다. 이러한 성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프랑스의 마지노선 과 소련의 폴란드 방어선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선형방어는 정면이 매우 강하지만 만일 어느 한 곳이라도 돌파당하면 전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이 등장할 때까지 대혼란이 발생하는 약점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은 이러한 약점을 노리고 전차 부대 위주로 구성된 돌파부대에게 방어선의 일부를 돌파해 들어간 후 취약한 후방에서 포위섬멸전을 노 리는 방법으로 프랑스의 마지노선과 소련의 폴란드 방어선을 삽시간에 무너뜨렸다.



이렇게 선형방어가 맥없이 붕괴되자 선형방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이 퍼졌고 그 대안으로 전차 를 이용한 기동전을 방어전에도 도입한 기동방어 전술이 등장하였다. 기동방어 전술은 방어선을 선 형이 아니라 종심방어형으로 전환하고 기동부대를 예비대로 보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방어선 중 일부가 돌파당하더라도 나머지 방어선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적의 돌파부대가 방어선 안쪽으 로 들어더라도 예비대로 편성된 기동부대가 빠르게 무너진 방어선을 메우면서 오히려 안쪽으로 들 어온 적의 돌파부대를 고립시켜 역으로 포위섬멸할 수도 있었다. 나아가 적의 돌파부대가 준비중인 것을 발견하면 기습공격을 통해 돌파부대를 무력화시키는 공세적 방어도 가능하였다. AD 1942년 르제프 전투에서 독일의 발터 모델이 보여준 방어전과 에르히 폰 만슈타인의 제3차 하르코르 전투 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록 이렇게 독일군은 전차부대의 기동성을 십분 활용하면서 '전격전'과 같은 공격전술 뿐만 아니 라 '기동방어전'과 같은 방어전술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시하였지만 기동방어전술이 일시적으로 적의 공격에 영토를 내어주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탐탐치 않아 했다. 기 동방어전술의 핵심이 영토 대신에 병력을 보존하면서 적 부대가 공세종말점에 이르면 비로소 역습 을 가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무조건 현지사수만 외치며 야전 지휘 관들과 마찰을 빚었다. 히틀러는 어떠한 경우에도 후퇴를 허락하지 않는 융통성 없는 자세만 고집 하였고 AD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의 패배로 수세에 몰렸을 때 기동방어전을 주장하는 만슈타인을 비 롯한 많은 유능한 지휘관들을 오히려 해임해 버리고 만다.



독일군의 재정비

독일 중부 집단군의 전략적 후퇴, 들소작전


만슈타인이 제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대반격을 펼치기 직전인 AD 1943년 2월 독일의 중부 집단군도 부족한 병력과 물자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이나 르제프 돌출부를 훌륭하게 지켜냈으나 그동안 쉴 새 없 는 격전을 겪으며 이제 한계 상황에 직면한 상태였다. 더구나 우크라이나의 주요 요충지를 소련군이 되 찾으면서 이제는 남쪽을 통한 대규모 포위망이 구축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독일의 중 부 집단군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가 전선을 축소하여 독일의 제9군을 제4군과 합류시키기 위해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어렵게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냈다. 작전명은 '들소 작전 (Operation Buffel) '으로 정해졌다.



독일의 제9군 사령관 발터 모델은 총 25만명의 독일군 병사 뿐만아니라 독일군에게 협조하여 그대로 남겨지면 소련군에게 처형당할 게 분명한 르제프 주민 6만명과도 함께 데리고 3월 1일부터 후퇴를 시 작했다. 당시 날씨는 기온 급강하로 땅이 얼어붙었다가도 갑자기 따뜻해져 진흙밭으로 변하는 변화무 쌍한 날씨였다. 그러나 모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운송수단을 준비하고 철저 하게 예정된 시간표대로 움직일 것을 주문했다. 최전선에는 3분의 1 병력이 남아 소련군의 정찰을 차단 하고 독일군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꾸미는 역할을 맡았다. 후위 부대가 막기 힘든 지역은 지뢰를 매설 하여 소련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속에 모델은 21일 만에 단 한명의 낙오자도, 단 하나의 장비도 남겨두지 않고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전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소련군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모든 게 예정대로 진행된 완벽한 퇴각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르 제프 돌출부를 담당했던 소련 서부 전선군의 지휘관 이반 코네프는 질책을 받고 일시적으로 해임되어 야 했다.



독일군의 방어선 재정비와 히틀러의 오판


만슈타인이 제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던 남부 방어선을 지켜냈다. 더구나 들소 작전으로 르제프 돌출부의 제9군이 스몰렌스크로 철수 하면서 중부 집단군의 전선을 축소하고 어느정도 예비병력을 확보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본래부 터 소련이 독일보다 더 넓은 영토와 더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많은 물자와 장비, 무기도 지원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회복력에서 차이가 나는 소련 군과 독일군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한다. 애당초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이 단기전으로 전쟁을 끝 내고자 하였지만 모스크바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쟁의 장기화가 불가피해졌고 점점 감당하기 힘든 인적ㆍ물적 자원의 소모를 경험해야만 했다. 여기에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의 아프 리카군이 무너지면서 미ㆍ영 연합군이 서유럽에 상륙하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을 패망으로 몰고 간 양면전쟁이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지휘관과 참모들이 히틀러에게 소련으로부터 일부 후퇴하여 방어전면을 축소하고 예비 병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하였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이듬해 또다시 무모한 대규모 공세인 '성채 작전( Unternehmen Zitadelle )'을 펼치며 독일을 파멸로 몰고가게 된다.




[참고] 위키백과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참고] Wikipedia Battles of Rzhev
[참고] Wikipedia Walter Model
[참고] Wikipedia Gunther von Kluge
[참고] Wikipedia Second Battle of Kharkov
[참고] Wikipedia Siege of Sevastopol (1941?42)
[참고] 위키백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
[참고] Wikipedia Operation Fall Blau
[참고] 위키백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고] Wikipedia Third Battle of Kharkov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