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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inlee96.blog.me/220344847530 산호해 해전 산호해 해전의 배경 미국의 태평양전쟁 작전구역 분할 일본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태평양으로 확대되자 영국은 독일과의 유럽 전쟁에만 집중하기 위해 AD 1942년 3월 24일부로 영연방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군지휘권을 미국에게 넘겼다. 이에 따라 태평양 전쟁을 전담하게 된 미국은 3월 30일 태평양 작전지역을 셋으로 나눈 후 각각 태평양해역군(Pacific Ocean Areas), 남서태평양해역군(South West Pacific Area), 남동태평양해역군(Southeast Pacific Area)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중에서 미국 연안과 파나마 운하의 방어를 맡은 남동 태평양해역군은 당분간 일본군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 해군참모총장인 어네스트 킹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나머지 작전지역은 필리핀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뉴기니섬 등 주요 도서지역은 남서태평양해역군이 담당하도록 하고 나머지 태평양 바다를 태평양해역군이 맡도록 구분한 뒤 각각 지리적인 특성을 고려하여 각 각 미 극동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와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평 양전쟁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휘권을 단일화시킨 유럽 전쟁과 달리 미 육군의 맥아더와 미 해군 의 니미츠가 지휘권을 양분하는 형태로 진행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미군 지휘구조 일본군의 MO작전계획 AD 1942년초 승승장구한 일본군은 동남아시아와 남서태평양 일대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AD 1942년 5월초가 되 자 이제 일본 해군을 위협할 만한 연합군의 거점은 이제 오스트레일리아만이 유일하게 남은 상태였다. 여세를 몰아 일본 해군 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추진하였으나 중일전쟁의 여파로 더이상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칠 여력이 없었던 일 본 육군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남태평양을 담당하던 제4함대의 사령관 이노우에 시게요시가 오스트레일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중재안으로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 섬과 뉴기니 섬 남쪽의 포트 모레스비를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다. 만일 툴라기 섬과 포트 모레 스비를 장악하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지역까지 폭격이 가능하고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연락선과 보급선도 끊을 수 있 으며 향후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를 공격하는 'FS작전'의 전초기지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툴라기와 포트 모 레스비의 점령 정도면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일본 육군이 이노우에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작전명은 'MO작전'이 시작되었다. MO 작전의 총 지휘는 작전을 입안한 이노우에가 맡았고 상륙작전을 지원하는 제5항공전대의 지휘관은 타케오 다카기가 임명되었다. 제5항공전대는 정규 항공모함 2척(쇼카쿠, 즈이카쿠)과 경항공모함 1척(쇼호)이 함재기 139대를 싣고 있었고 순양함 9척 및 구축함 15척의 호위를 받았다. 상륙작전을 펼칠 일본의 상륙부대는 포트 모레스비 침공대와 툴라기 침공대로 나뉘었다. 일본 의 포트 모레스비 침공대는 코소 아베가 지휘하는 남태평양군 소속 5천명과 일본해군 육전대 5백명으로 구성되었고 그 호송을 사다미치 카치오카의 함대(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가 맡았다. 일본의 툴라기 침공대는 키요히데 시마가 지휘하는 일본해군 육전대 4백명과 기뢰부설함 2척, 구축함 2척, 기뢰제거함 6척으로 구성되었다. 상륙작전의 지원임무는 아리토모 고토의 함대 (경항공모함 쇼호, 중순양함 4척, 구축함 1척)가 맡았고 나중에 쿠니노리 마루모의 함대(경순양함 2척, 수상기모함 1척, 기관 총보트 3척)도 합류하기로 했다. 이들은 먼저 툴라기 상륙을 지원하고 툴라기 상륙이 끝난 이후에 포트 모레스비 상륙작전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일본의 남태평양 진격 모습 1939년 일본 영향권 (붉은색) 이렇게 일본의 MO 작전이 야심차게 시작되었으나 미군에게 사전에 노출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군은 전혀 몰랐지만 AD 1942년 3월부터 미군이 일본군의 JN-25B 암호를 15% 정도 해독해 냈고 4월이 되면 해독률이 85%까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4월 5일 MO작전에 대한 통신내용을 감청하는 데 성공하고 4월 13일에는 그 목표가 포트 모레스비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자 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기도한 체스터 니미츠는 4월 29일 진주만 기습에서 피해받지 않은 항공모함을 모두 포트 모레스비 방면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정규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와 USS 호넷이 포함된 윌리엄 홀 시의 제16기동함대(Task Force 16)는 일본 본토에 대한 둘리틀 폭격임무를 지원하고 보급을 위해 진주만으로 회항하고 있었 기 때문에 제 시간에 투입되기 힘들었다. 또한 진주만 공습 당일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수리를 받느라 공습을 피했던 정 규 항공모함 USS 새러토가는 AD 1942년 1월 다시 일본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고 재수리를 받기 위해 다시 회항한 상태였다. 결국 포트 모레스비에 투입이 가능한 건 USS 요크타운과 USS 렉싱턴의 정규 항공모함 단 2척 뿐이었다. 이에 니미츠는 프랭크 J. 플레쳐를 제17기동함대(Task Force 17)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요크타운과 이를 호위하는 순양함 3척 및 구축함 4척을 맡겼고 오버리 피치를 제11기동함대(Task Force 11)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렉싱턴과 이를 호위하는 순양함 2척 및 구축함 5 척을 배정하였다. 총 지휘는 제17기동함대 사령관인 플레쳐가 맡기로 하였는데 다만 이 지역은 본래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해역군 관할이었 지만 미 태평양함대의 소속인 플레쳐는 맥아더가 아닌 자신의 직속 상관인 니미츠의 지시를 받게 된다. 산호해 해전의 전개 5월 3일 아침 키요히데 시마의 지휘를 받는 일본해군 육전대 4백명의 병력이 툴라기에 상륙하였다. 툴라기에는 소수의 수비병 밖에 없었기 때문에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미 제17기동함대가 툴라기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과달카날 방면으로 투입되었고 요크타운의 총 60대의 함재기를 3번에 걸쳐 투입하여 일본의 구축함 기쿠주키와 3척의 기뢰제거함 을 침몰시키고 남은 4척에게도 타격을 가하는 성과를 거둔 후 일본 해군의 반격을 우려하여 신속히 이탈했다. 5월 7일 아침에는 포트 모레스비로 향하던 고토의 함대가 연합군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미 함대는 정찰기의 잘못된 보고로 고토의 함대를 일본의 주력함대인 다카기의 함대로 오인하고 총공격에 나섰고 2척의 미 정규 항공모함 렉싱턴과 요크타운의 함재기로부터 폭탄과 어뢰 공격을 받은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가 결국 침몰하였다. 그 때 다카기의 일본 제5항공전대도 정찰 실수로 미 급유함을 항공모함으로 오인하고 추격하여 급유함과 그 호위를 하던 구축함 1척을 침몰시켰으나 이제는 쇼호의 침몰 소식과 함께 근처에 사실 미 항공모함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미 항공모함을 뒤쫓기 시작했다. 5월 8일 아침에 양 측의 정찰기가 모두 서로를 발견하면서 사상 최초의 항공모함 간의 해전인 산호해 해전이 시작되었다. 기존 해전이 가시거리 이내에서 전함의 함포 포격을 서로 주고 받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면 산호해 해전은 항공모함 간에 교전인 만 큼 서로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출격한 함재기끼리 공중전을 벌이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양측 모두 항공모함 간의 교전은 처음 이었던 만큼 큰 피해를 입었으나 미국 측의 피해가 조금 더 컸다. 미국의 호위 전투기 조종사들은 일본의 공격기가 낮은 고도로 비행할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이것이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미 항공모함 렉싱턴이 일본의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에게 어뢰와 폭탄 폭격을 받아 항행불가가 된 끝에 아군 어뢰로 자침되었고 요크타운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요크타운은 동력 등 주요설비가 무사하였기 때문에 자력항해로 하와이의 진 주만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일본의 항공모함은 쇼카쿠가 갑판에 폭탄 4발을 맞아서 수리가 불가피했으나 자력항해는 가능한 상태였고 자매함인 즈이카쿠의 경우에는 함체 자체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함재기 대부분이 격추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 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공격당하는 일본의 정규 항공모함 쇼카쿠(위)와 미국의 정규 항공모함 USS 렉싱턴(아래)의 모습 산호해 해전의 결과 이렇게 하여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간 해전이었던 산호해 해전이 끝났다. 미국의 제17기동함대 사령관인 플레쳐는 자신의 항 공모함 렉싱턴이 침몰하고 요크타운이 대파된 반면에 일본의 항공모함 2척이 모두 자력항해가 가능한 것을 보고는 후퇴를 명 령하였다. 일본 제5항공전대의 다카기 역시 쇼카쿠의 피해가 너무 커서 수리를 위해 일본 본국으로 복귀가 불가피한 상황이었 고 즈이카쿠도 함재기를 너무 많이 잃어버려 더이상의 임무수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미국의 정규 항공모함 2척을 파괴한 것에 만족하고 물러나기로 하였다. 일본은 격침된 쇼호를 포함하더라도 경항공모함 1척 침몰과 정규 항공모함 1척 대파의 피해를 입으면서 미국의 정규 항공모함 1척을 침몰시키고 1척을 대파하였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산호해 해전이 일본군의 근소한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산업능력으로는 대파된 쇼카쿠의 수리와 즈이카쿠의 함재기 보충이 늦어져 얼마 뒤에 벌어지는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 시킬 수 없었던 반면에 미국은 어쨌든 포트 모레스비를 지켜내었고 대파된 요크타운도 하와이의 진주만에서 응급수리후 곧바 로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미국의 항공모함 숫자를 오판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된 다. 이 때문에 산호해 해전은 전술적으로는 일본군의 승리지만 전략적으로는 미군이 승리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미드웨이 해전 일본의 미드웨이 공략결심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승리를 거듭하면서 한껏 고무되었다. 일본 육군이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습, 말레이 해전, 자바 해전, 인도양 공습, 산호해 해전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동남아시아와 남서태평양 의 제해권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진주만 기습에서 미 항공모함까 지 격침시키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추가적으로 미 항공모함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미드웨이 섬 과 알류샨 열도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남방작전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고 미드웨 이 섬과 알류산 열도의 공격이 너무 거대한 작전이라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그러던 중 둘리틀 공습을 통해 미약하기는 했지만 미 항공모함이 운반한 폭격기에게 일본 본토가 폭격을 허용한 것에 대해 비 난이 빗발치고 특히 천황이 있는 황궁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일본 여론은 서둘러 미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야마모토의 주장대로 미드웨이 섬과 알류샨 열도를 공격하는 방안이 다시 힘을 얻었고 일본 본 토에 대한 공습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태평양의 제해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 했다. 야마모토의 일본 세력 확장계획(점선) AD 1942년 5월 20일 야마모토의 통신문이 미 태평양 함대에게 감청당하면서 미국도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공격목표를 지칭하는 암호문인 'AF'가 어디를 지칭하는 지까지는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미 태평양함대 사령 관 니미츠는 여러 정황상 미드웨이라고 추론하였으나 확신이 없었고 일부에서는 하와이나 알래스카, 심지어는 미국 서해안 의 센프란시스코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에 5월 11일 첩보대의 야스퍼 홈스의 제안에 따라 미드웨이의 수비군에게 "해수 담수화 장치가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란 내용의 거짓무전을 '평문'을 보내게 하였고 이를 감청한 일본군이 이틀 뒤 "AF에 식수가 부족하다"라는 암호 무전을 보내는 것을 확인하면서 'AF'가 미드웨이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미드웨이는 하와이와 함께 미 태평양함대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만일 미드웨이가 무너지면 하와이가 위태로워지고 급기 야는 미국 본토의 서해안까지 곧바로 공격당할 위험에 노출될 것이었므로 미 태평함대로서는 미드웨이를 반드시 사수해야만 했다. 이에 니미츠는 미드웨이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5월 28일 수비병력 5천명을 증파하였으며 가용한 모든 공격기를 보내어 총 124대를 배치했다. 또한 대공포도 추가로 설치했고 일본군의 상륙작전을 대비하여 지뢰까지 매설하였다. 마지막으 로 산호해 해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정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구성된 윌리엄 Jr. 홀시의 미 제16기동함대를 일부 러 툴라기 방면에 노출시켜 미드웨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처럼 속인 후 신속하게 귀환시켰다. 양 측의 함대 현황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부대 일본군은 미드웨이 섬과 알류샨열도 공략을 위한 사상 최대규모의 대함대를 편성하기 위해 정규 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2 척, 수상기모함 2척, 전함 11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22척, 함재기 248대, 수상기와 비행정 16 대를 동원하였다. 특히 막 건조를 마친 당대 최대 배수량의 초대형 전함인 야마토가 함께 하였으나 산호해 해전에서 크게 손상 된 정규 항공모함 쇼카쿠와 함재기 보충이 이루지지 못한 즈이카쿠는 참여하지 못했다. 일본 함대는 다시 크게 미드웨이 공격 부대와 알류샨열도 공격부대로 나뉘었으나 주력부대는 어디까지나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기동부대)였다. 구체적인 일본 함대 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함대(야마모토 이소로쿠)(기함 야마토) : 전함 3척, 경항공모함 1척, 수상기모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제1항공함대(나구모 주이치)(기함 아카기) : 정규 항공모함 4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2척
제2함대(콘도 노부타케)(기함 아타고) : 전함 2척, 경항공모함 1척, 준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8척
미 태평양함대
이에 맞서 미 태평양함대는 총 정규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6척, 잠수함 16척, 함재기 233대, 육 군 소속의 육상기 127대를 동원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침몰한 정규 항공모함 렉싱턴은 참여할 수 없었지만 대파된 요크타운은 응급수리를 통해 투입이 가능했다. 그리고 AD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은 피했으나 AD 1942년 1월 일본 잠수함의 어뢰공격 을 받았던 새러토가의 수리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새러토가의 함재기를 모두 요크타운으로 옮겼다. 이렇게 미국은 가 용한 모든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으나 제16기동함대 사령관인 홀시가 피부병을 얻는 바람에 레이몬드 스프루언스로 교체되었 고 총지휘는 제17기동함대 사령관인 프랭크 플레쳐가 맡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 태평양함대의 구체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6기동함대 (프랭크 J. 플레쳐)(기함 USS 요크타운) : 정규 항공모함 USS 요크타운,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미드웨이 해전의 전개 일본 함대의 출항
AD 1942년 5월 27일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가 히로시마 남쪽 하시라지마에서 출발했고 이틀 뒤 본대인 야마모토의 제1함대와 미드웨이 상륙을 맡은 콘도의 제2함대가 뒤이어 출발했다. 공격예정일은 6월 4일로서 그 때까지는 함대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무선침묵을 유지하기로 하였으나 미국은 이미 암호감청으로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일 본 해군은 진주만 기습 이후, 말레이 해전, 자바 해전, 인도양 공습, 산호해 해전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 었고 이번 미드웨이 공격의 성공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병사들 중에는 다음 편지는 미드웨이로 보내라고 하는 사람조 차 있을 정도로 보완유지도 전혀 되지 않았다. 일본 함대가 출항하자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는 5월 29일 스프루언스 의 제16기동함대를 먼저 진주만에서 출항시켰고 마찬가지로 이틀 뒤 플레쳐의 제17기동함대도 미드웨이로 보냈다. 한편 미드웨이 공략을 숨기고 일본 북방 해안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드웨이 공략과 동시에 진행된 알류샨열도 점령을 위 해 AD 1942년 6월 3일 북방함대가 더치하버를 공습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미국에서는 순양함 5척, 구축함 14척으로 구성된 로버트 A. 테오볼드의 미 제8기동함대를 이 방면에 투입하였으나 테오볼드 는 일본 함대가 알래스카에 상륙하는 것에만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류샨 열도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일 본 북방부대의 알류샨 열도 공격소식을 들은 니미츠는 오히려 자신들이 감청한 미드웨이 공격 정보가 정확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미드웨이를 차지하지 못하면 알류샨 열도는 전략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에 미드웨이 방어에 모든 역량을 집 중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야마모토의 본대가 출항한 지 하루 뒤인 5월 30일 도쿄의 해군본부에서 진주만에서 미드웨이로 미 항공모함이 이동하고 있다 는 교신을 감청하고 즉각 야마모토에게 무전으로 알렸다. 그러나 야마모토 측에서는 무선침묵 중이었으므로 나구모도 같은 내용의 무전을 수신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별도로 전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구모는 됴쿄의 이 무선을 듣지 못했고 이 때문에 미드웨이 주변에 있을 지도 모르는 미 항공모함에 대해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에서 나구모도 이 무전을 들었지만 하와이와 미드웨이 사이에서 활동 중인 잠수함들이 미 항공모함의 접근을 미리 발견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 른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예정대로 미드웨이로 항해하던 나구모의 함대가 6월 3일 미드웨 이에서 보낸 정찰기에게 발견되었고 이에 미드웨이에서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와 어뢰를 탑재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동원되었으나 수송선과 유조선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미드웨이 섬의 모습 미드웨이 공습 시작 일본의 본래 작전은 나구모의 함대가 6월 4일부터 3일간 미드웨이의 방어시설을 대부분 파괴한 후 6월 7일 곤도의 제2함대가 상륙군을 미드웨이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나구모는 공격개시일인 6월 4일이 되자 새벽 4시 30분 99식 함상폭격기(급강하 폭격기) 36대, 97식 함상공격기(수평 폭격기) 36대, 영식 함상전투기(제로 전투기) 36대로 총합계 108대로 편성된 미드 웨이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그러나 진주만 공격대와 인도양 공습시 함재기 지휘를 맡았던 후치다 미쓰오가 맹장염으로 비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하여 도모나가 조이치가 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미 항공모함의 접근을 우려하여 보낸 정찰기가 불과 6대 뿐이었고 중순양함 도네에서도 정찰기를 발진시켜야 했으나 발진장치의 고장으로 예정보다 30분 늦게 발진되었다. 더구나 일 본의 정찰기는 모두 8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넒은 태평양에서 미 항공모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상태였다. 미드웨이에서도 나구모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정찰기를 보냈고 5시 15분 미 해군의 PBY 카타리나 비 행정은 중순양함 도네에서 발진한 수상 정찰기를 발견하였고 일본 제로 전투기의 공격을 피해 구름 속으로 피신한 후 5시 45 분 자신이 정찰내용을 보고했다. 이보다 앞선 5시 40분에 또 다른 미 해군의 PBY 카타리나 비행정이 일본의 함재기들을 발견 했고 5시 55분에는 미드웨이 레이더에도 나구모 함대가 포착되었다. 이에 미드웨이에서는 6시에 전투기 26대(F2A 버팔로 20 대, F4F 와일드 캣 6대)와 뇌격기(TBF 어벤져) 6대, 폭격기(B-26 머로더) 4대, 급강하 폭격기(SB2U 빈디케이터) 6대, 도합 42대를 출격시켰다. 미 태평양함대의 플레쳐도 미드웨이에 일본의 함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프루언스의 제16기 동함대를 먼저 이동시킨 후 자신도 요크타운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6시 16분 도모나가의 공격대가 미드웨이에 도착하자 이를 발견한 미 해군의 PBY 카타리나 비행정이 조명탄을 투하하자 미드 웨이 상공에서 대기하던 미 공격기들이 선제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에 배치된 미 조종사들은 경험이 미숙한 신참 들로 편성되었고 미 전투기 F2A 버팔로와 F4F 와일드 캣 모두 성능 면에서 일본의 제로 전투기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전투기 간의 공중전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일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자 곧바로 일본의 폭격기들이 미드웨이 곳곳을 폭격하 기 시작하여 7시까지 이어진 일본의 폭격에 미드웨이 대공포대 일부가 파괴되고 비행장도 손상을 입었지만 미드웨이에 주둔했 던 미국 수비대 전원이 사전에 방공호로 대피하였고 니미츠가 미리 대공포를 최대한 많이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일본 폭격기의 피해 역시 컸다. 제1차 공습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도모나가는 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나구모에게 보냈다. 이 에 나구모는 미드웨이에 대한 제1차 공습 이후 되돌아오는 함재기를 회수를 준비시키는 한편 출격하지 않고 미 함대의 출현을 대비하여 어뢰를 탑재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던 함재기들의 지휘관인 무라다 시게하루에게 제2차 공습을 위해 육상 공격용 폭탄으로 무장전환을 지시하였다. 미 태평양함대의 반격 미 항공모함의 출현 AD 1942년 6월 4일 7시 5분 중순양함 도네가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미 공격기 10대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TBF 어벤저 6대와 B-26 머로더 4대로 모두 일본 항공모함에 직접 어뢰를 타격하기 위해 발진한 것이었으나 호위를 맡은 일본의 제로 전투기에게 TBF 어벤저 3대와 B-26 머로더 2대가 각각 격추되었고 격추 직전 B-26 머로더 2대가 일본의 항공모함 아카기를 향해 어뢰를 투하했으나 일본 항공모함은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7시 30분 준순양함 도네의 정찰기가 다시 미 함대를 발견했다 고 긴급타전하였다. 그러나 나침반의 자차 수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미 함대의 위치를 실제보다 160km 남쪽으로 전해왔고 함 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 모든 것이 불확실하였다. 7시 55분에 미드웨이에서 2번째로 날아온 미 해병대 소속 SBD 돈트레스 16대의 급강하 폭격대가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번에 목표는 일본의 항공모함 소류와 히류였으나 단 한 발도 폭격에 성공하지 못한 채 절반이 격추당하는 피해만 입고 되돌아갔다. 8시 30분경 또다시 구형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 폭격기가 나타났고 그 사이 B-17 플라잉포트리스 폭격기 17 대가 일본의 항공모함을 계속해서 노렸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렇게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나구모는 미 항공모함이 언제 나타날 지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미 함대를 발견했던 수상 정찰기는 무전기 고장으로 더 이상 의 보고가 없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정찰내용이 보고될 때까지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항공모함은 제 1차 공격대 회수와 제2차 공격대 무장전환, 계속해서 이어지는 미드웨이 공격대의 공격에 대응하느라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어 갔다. 미국의 프랭크 J. 플레쳐(좌)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우)의 모습 8시 30분 드디어 미 항공모함을 발견했다는 정찰보고가 올라왔다. 바로 USS 호넷이었다. 이 정찰보고에 나구모를 비롯한 일 본의 지휘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미드웨이 제1차 공격대가 아직 다 회수되지 않았고 남아있던 함재기들도 제2차 공습을 위해 육상공격용 무장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도중에 미 항공모함을 상대하기 위해 다시 대함용으로 무장전환을 해야하는 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귀환한 제1차 공격대의 연료가 거의 바닥나고 있어 그냥 두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 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제1차 공격대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발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 구모가 제1차 공격대 회수를 포기하고 제2차 공격대를 그대로 발진을 명령했더라도 일본의 함재기 운용능력 상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도착하기 이전에 제2차 공격대를 발진 준비를 마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1차 공격대의 항공모함 수용은 9시 30분이 되어서야 모두 완료되었다. 미드웨이로부터 일본 항공모함의 위치를 정확하고 알고 있던 미 태평양함대는 이미 7시에 함재기를 발진시킨 상태였다. 다만 처음에 스프루언스가 상공에서 편대를 이룬 후 출발하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연되었으나 얼마 뒤 자신의 실책을 깨닫 고 함재기들에게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데로 곧장 미드웨이 방면으로 이동하도록 명령을 변경하였다. 요크타운에서도 뒤이어 함재기를 출격시키면서 3척의 항공모함에서 모두 발진한 함재기가 총 152대가 되었다. 9시 25분 호넷에서 발진한 공격대가 먼 저 공격을 시작하였고 15분 뒤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공격대도 합류하였다. 미국 공격대도 처음에는 실수를 저질러 우선 호넷의 TBD 데버스테이터 뇌격기들이 구름 때문에 호위 전투기와 떨어진 채 단독으로 어뢰 공격을 감행하다가 모두 격추되었 다. 엔터프라이즈의 함개기들도 호위 전투기들이 호넷의 뇌격기를 일본 공격기로 오인하고 이를 뒤쫓아가면서 TBD 데버스테이터 뇌격기가 단독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일본의 제로 전투기에게 모두 격추되었다. 요크타운의 TBD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역 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모두 격추되었다.
5분 간의 결정적 전투
이렇게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미국의 뇌격기들이 어뢰 한발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하고 모조리 격추되는 참극이 연출되었으 나 도리어 이것이 미군 측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일본의 항공모함을 호위해야 하는 제로 전투기들은 계속된 뇌격기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연료와 탄약을 소모했지만 이를 보충할 여유도 없이 모두 뇌격기를 격추하기 위해 저공으로 내려가 남동쪽 방향에 몰려갔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틈새에 우연히도 클라렌스 웨이드 맥클러스키가 지휘하는 엔터프라이즈의 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대 32대가 때마침 도착한 것이었다. 본래 맥클러스키의 폭격기 편대는 본래 나구모의 함대가 처음 발견된 위치로 날아갔 으나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맥클러스키는 북풍이 불고 있으므로 나구모의 함대가 남쪽으로 향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수색을 계속하던 중 일본의 구축함 아라시가 남기고 간 항적을 우연히 발견하고 이를 뒤쫓았 고 마침내 나구모의 함대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맥클러스키의 폭격대가 도착했을 때가 때마침 일본의 제로 전투기들이 요크 타운의 뇌격기를 뒤쫓아 자리를 비운 사이였고 그 전까지 미국의 뇌격기들이 공격해오던 방향과 고도 모두 정확히 정반대에 서 맥클러스키의 폭격기 편대가 등장했기 때문에 일본의 항공모함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그대로 폭격을 허용하게 되었다. 클라렌스 웨이드 맥클러스키의 모습 10시 22분 나구모 함대를 발견한 맥클러스키 폭격대가 둘로 갈라져 급강하 폭격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통신 오류로 두 편대 모두가 일본의 항공모함 카가를 공격하였으나 후미에 있던 리처드 홀지 베스트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일본의 항공 모함 아카기로 방향을 돌렸다. 일본의 항공모함 위에는 회항한 제1차 공격대의 재급유 및 재무장을 위해 항공기, 정비 요원, 연 료와 어뢰, 공격기에서 떼어낸 폭탄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가장 먼저 폭격을 허용한 카가가 연료창고에 폭격을 허용하면 서 그 여파로 일본의 함재기와 폭탄이 유폭을 일으켜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함교마저 직격탄을 허용하여 지휘부가 즉사했 다. 기함인 아카기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아 비행갑판에 떨어진 폭탄이 갑판 밑 격납고에서 폭발하여 무장을 마진 뇌격기들의 대폭발을 유발했다. 이에 아카기에 탑승했던 나구모는 탈출하여 경순양함 나가라로 기함을 옮겨야 했다. 맥클러스키 폭격대의 공격이 대성공을 거두는 시점에 때마침 도착한 맥스 레슬리가 지휘하는 요크타운의 급강하 폭격기 편대도 일본의 세 번째 항공 모함 소류를 공격하여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이렇게 하여 나구모의 함대는 미군의 공격을 허용한 지 불과 5분 만에 전체 항 공모함 4척 중 3척이 격침당하고 말았다.
폭격당하는 일본의 항공모함 카가의 모습 일본 항공모함 히류의 반격과 미 항공모함 요크타운 대파 10시 24분 유일하게 살아남은 일본 제2항공전대의 항공모함 히류의 정찰기가 귀환하는 미 공격기를 뒤쫓다가 미 항공모함 요 크타운을 발견하였다. 이에 10시 40분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치는 즉각 고바야시 미치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제로 전투기 6대와 99식 함상폭격기 18대를 출격시켰다. 일본의 함재기들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레이더를 통해서 확인한 요크타운의 플레쳐는 연료와 탄약이 떨어져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라고 생각하고는 공격을 마치고 귀환한 함재기 수용작업 을 즉각 중지시키고 대신 엔터프라이즈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폭을 방지하기 위해 착함한 함재기에 대한 급유를 중단 시키고 폭탄의 신관도 모두 제거하였으며 전투가능한 함재기를 모두 출격시키며 대공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비록 히류의 공격 대가 12대의 99식 함상폭격기와 4대의 제로 전투기가 격추되고 지휘관인 고바야시까지 사망하는 피해에도 입었음에도 불구하 고 3발의 폭탄을 명중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별다른 유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항공모함처럼 곧바로 침몰하는 사태는 일 어나지 않았다. 일본의 야마구치 다몬의 모습 11시 20분 제1항공함대보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총사령관 야마모토는 급작스럽게 전황이 악화되자 망연자실해졌으나 곧바로 공격을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먼저 미드웨이 상륙병력의 수송선단을 북서쪽으로 철수시킨 후 알류샨 공략부대에 속 한 제2기동부대의 경항공모함 호쇼와 류조를 남하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5일 뒤인 6월 9일이 되 어야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때 아카기에서 탈출한 나구모 역시 전함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 태평 양함대에는 더 이상의 전함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함재기가 활동하기 어려운 야간전투에서 전통적인 전함의 함포 공격을 이용 하여 미 함대를 격멸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12시 45분 유일하게 남은 항공모함 히류의 야마구치는 파괴된 아군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수용하도록 하였고 이어서 보급을 마 친 함재기 총 16대(97식 함상공격기 10대, 제로 전투기 6대)를 제2차 공격대로 편성하여 출격시켰다. 제2차 공격대의 지휘는 미드웨이 공격대를 지휘했던 도모나카가 맡았다. 그 사이 요크타운은 폭격 피해에도 불구하고 침몰하기는 커녕 진주만에서 출 항시 산호해 해전의 피해를 수리하기 위해 동승한 수리반의 헌신적인 응급조치로 기관실을 복구하여 자력항해까지 가능할 정 도로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요크타운이 더 이상 정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플레쳐는 자신의 지휘권 을 스프루언스에게 넘겼다. 이때 일본의 제2차 공격대가 요크타운을 발견하였으나 일본의 제1차 공격대로부터 요크타운이 대파되었다고 전해들었기 때문 에 자신들이 발견한 요크타운을 또 다른 미 항공모함으로 착각하고 재차 공격하였다. 요크타운의 대공포 공격에 지휘관인 도모 나카는 격추되었지만 어뢰 2발이 명중시켰고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서 그동안 굳건하게 버티던 요크타운도 더이상 견디지 못하 고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요크타운의 선체가 왼쪽으로 25도 정도 기울게 되자 플레쳐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요크타운의 승무원에 대한 퇴선 명령을 내렸다. 좌측으로 기울어진 USS 요크타운의 모습 마지막 일본 항공모함 히류의 침몰 야마구치는 요크타운을 2개의 서로 다른 항공모함으로 착각한 공격대 보고를 통해 이제 더 이상 미 항공모함이 주변에 없을 것 으로 생각했다. 사전 정보로는 미 항공모함 중 요크타운은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되었고 새러토가 역시 수리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 태평양함대에게 움직일 수 있는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둘 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약 간에 경계병과 필수인원만 남기고 히류의 승무원에게 미뤄왔던 식사와 휴식을 허용했다. 하지만 오후 5시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20대와 호넷에서 발진한 16대, 총 36대의 미군 항공기 편대가 도착하였다. 그중에서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20 대 중 10대는 원래 요크타운의 함재기였다. 야마구치 역시 함재기 출격으로 대응하였으나 가용한 함재기는 제로 전투기 6 대, 97식 함상공격기 4대, 99식 함상폭격기 5대, 총 15대에 불과했다. 히류 함재기의 초계망을 뚫는 데 성공한 미 공격대의 폭탄 4발이 갑판에 강타하면서 일본의 마지막 항공 모함이었던 히류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야마구치는 승무원에게 퇴선을 명령했지만 그 자신은 그대로 남았고 계속된 불운으 로 일본의 패배로 전황이 기울자 "하늘은 결국 우리 일본을 버리려 하는가"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침몰하는 일본의 항공모함 히류 플레쳐로부터 지휘권을 이양받았던 스프루언스는 일본의 항공모함 히류까지 격침시키는 데 성공한 이후 동쪽으로 후퇴를 명령 하였다.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더 이상의 전과확대를 노리지 않은 것에 대한 내부불만이 제기되었지만 스프루언스의 판단은 정 확했다. 일본의 나구모는 마지막까지 역전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야간전투에서 함포전으로 자신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미 태평 양함대를 찾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스프루언스의 판단에 따라 미 태평양함대는 야간전투를 피하는 데 성공했고 다 시 날이 밝으면 이제는 일본 함대가 위험해질 것이기 때문에 야마모토도 새벽이 되기 전에 모든 작전을 중지시키고 일본으로 후퇴를 명령했다. 후퇴하기 전에 야마모토는 미국 측에게 노획될 것을 우려하여 대파된 4척의 항공모함 모두 자침시키도록 명 령했는데 이때 마지막까지 분전했던 야마구치는 히류 및 소류의 함장들과 함께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6월 5일 날이 밝자 이번에는 스프루언스가 계속 정찰기를 출격시키며 일본 함대를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 6월 6일이 되어서 야 미드웨이를 포격하다가 낙오된 4척 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이 미국 잠수함에게 발견되었고 그 중 준순양함 미쿠마가 격침되 었다. 이후에도 스플리언스는 웨이크 섬까지 추격하였으나 더이상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철수하였다. 한편 선체가 기울 었던 요크타운은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침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와이로 예인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으나 6월 6일 오후에 일본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로 인해 근처의 구축함 해먼과 함께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회생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미국 측도 더 이상의 예인을 포기하면서 그때까지 기적적으로 버티던 요크타운이 결국 6월 7일 새벽에 완전히 침몰하였 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 이렇게 하여 일본 해군이 야심차게 추진하였던 미드웨이 해전이 처참한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방심 과 잇달은 미국의 행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애초부터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공격작전을 수립하면서 미드웨이 점령과 미 태평양함대 격멸, 여기에 알류샨열도 점령을 모두 추진하여 병력을 분산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또한 산호해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시키지 못했고 초대형 전함 야마토가 포진된 제 1함대를 후방에만 대기시키는 안일함도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사전에 무선감청을 통해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계획을 알아내고는 미드웨이의 방비태세를 강화시켰고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된 요크타운을 응급수리하여 전투에 투입할 정도로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더욱이 미 태평양함대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교전 중에 여러가지 행운을 만났다. 먼저 일본 제1항공함대의 제1차 공격대가 공습을 끝내고 제2차 공격대 출격을 준비하던 순간에 맥클러스키 폭격대가 때마침 나타나 공습을 시작한 시간적 행운이 있었 다. 여기에 거듭 격추되면서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은 뇌격기의 희생 덕분에 일본 항공모함의 호위를 맡은 제로 전투기의 관심 이 한 쪽으로 쏠린 사이에 맥클러스키 폭격대가 그와 정반대 방향과 고도에서 나타난 공간적 행운이 겹쳐졌다. 결정적으로 일 본 항공모함에 떨어진 몇 개의 폭탄들이 모두 치명적인 곳에서 폭발하는 마지막 행운까지 합쳐지면서 단 5분 만에 일본의 항공 모함 3척을 대파하는 놀라운 전과를 기록하였다. 여기에 미 항공모함의 숫자는 물론 대파된 숫자까지 오인한 일본의 정보력 부 재 때문에 남아있던 항공모함 히류마저도 침몰시키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과 순양함 1척(미쿠마)이 격침되고 함재기 322대가 파 괴되었으며 3,500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반해 미군의 피해는 항공모함 1척(요크타운), 구축함 1척(해 먼), 항공기 147대가 파괴되고 307명이 전사하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이로서 일본 해군은 태평양 제 해권을 장악하기는 커녕 오히려 진주만 기습 이래로 일본 해군의 최정예 부대였던 제1항공함대가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생 산능력에서 미국에게 비할 바가 못되는 일본으로서는 진주만 기습을 통해 초기에 가져갔던 해군력의 우위를 이제 상실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던 반면에 미국은 당장 가용한 군함이 부족했던 가장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면서 본격 적인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받게 된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일본 해군 지휘부는 일본 쇼와 천황에게 패전의 사실을 보고하기는 했으나 철저히 은폐작업을 벌였다. 대 신하여 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과 키스카 섬 점령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승리한 것처럼 왜곡했다. 이를 위해 부상병들은 격리되었고 생존자들은 가족과의 면회마저 금지당하고 남서태평양의 각 부대로 분산배치되어 입막음을 위해 총알 받이로 내몰렸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은폐작업이 워낙 철저하 게 이루어져 일본 육군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그 덕분에 패전을 초래한 일본 해군 지휘부에 대한 문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 다. 문제는 또 하나 있었다. 알류샨열도 공격 당시 일본의 제로 전투기 1대가 더치하버 동쪽의 아쿠탄 섬에 불시착하고 조종사 가 사망하면서 미국은 비교적 온전한 제로 전투기를 입수할 수 있었고 이를 분석하여 전쟁 후반 일본군 전투기들을 압도하는 성능을 가진 전투기들을 만들어내지만 일본은 끝까지 그 사실을 모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항공모함 개발현황(일본 편) 초기형 최초의 설계 항공모함, 호쇼 호쇼는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된 최초의 함정이다. 비록 영국의 HMS 허미즈가 기공이 더 빨랐지만 실제 취역이 지연되어 호쇼가 세계최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AD 1921년 11월에 진수되어 이듬해 12월에 취역하게 된 호쇼는 기준 배수 량 7,590톤으로서 15대의 함재기 탑재가 가능했다. 그러나 초기 모델인 만큼 높은 파도를 상대해야 하는 외양항해가 불가 능했기 때문에 주로 훈련용으로 사용되었고 중일전쟁에서는 정규 항공모함인 카가와 류조를 지원하는 예비함으로 사용되 었으며 태평양 전쟁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함의 호위를 담당하며 주로 후방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호쇼는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제1세대 개장 정규 항공모함,아카기와 카가 일본은 AD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협약을 통해 일본은 주력함(전함, 순양전함)과 항공모함을 미국과 영국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총배수량만 보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주력함의 총배수량은 315,000톤으로, 항공모함의 총배수량은 81,000톤으 로 각각 제한되고 이를 초과하여 건조 중이던 모든 주력함을 폐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거의 건조가 완료된 아 마기급 순양전함인 아마기와 아카기를 폐기하기는 아까웠기 때문에 항공모함으로 개장하고 대신 한참 건조 중이던 전함 카 가만 폐기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으로 아마기의 용골이 손상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자 아마기를 폐기하고 대신하여 아카기와 함께 카가 역시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아카기는 기준 배수량 36,500톤으로 함재기 66대를 탑재가 가능했고 카가는 기준 배수량 38,200톤으로 함재기 90대를 탑 재할 수 있었다. 당시는 순수 항공모함 위주의 해전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이었으므로 본래의 순양전함 설계대로 8인치 주 포를 달면서 갑판이 3단이 되었으나 이 때문에 함재기 운용이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단일갑판으로 변경되었다. 아카기와 카 가는 일본 해군의 주력함으로서 나중에 건조되는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와 함께 기동부대를 이루며 진주만 기습에 참여했고 이후 각종 태평양 전쟁의 해전에서 활약하였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소류, 히류와 함께 나란히 침몰하고 만다.
항공모함 류조
소류급 정규 항공모함 소류와 히류 제2세대 쇼카쿠급 정규 항공모함 쇼키쿠와 즈이카쿠
개장 경항공모함 류호, 쇼호. 즈이호
히요급 개장 경항공모함,히요와 준요 미드웨이 해전 이후 치토세급 개장 경항공모함,치토세와 치요다
새로운 정규 항공모함 다이호
운류급 정규 항공모함,운류,아마기,카츠라기
사상 최대의 정규 항공모함,시나노 [참고] 위키백과 태평양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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