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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inlee96.blog.me/220310799441 전쟁의 배경 독일의 상황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양면전쟁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이전에 AD 1939년 8월 미리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한 후 분할하였다. 이는 많은 나라들에게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는데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이전부터 공공연히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으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비협조를 내세우면서 공산주의가 독일을 망치고 있으므로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히틀러는 AD 1923년 뮌헨폭동 이후 감옥에 수감 중이던 시절에 작성한 자서전 "나의 투쟁(Mein 소련을 침공하는 작전명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에서 유래한 "바르바로사(Barbarossa; 붉은 수염)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으로 동방원정을 감행하다가 도중에 익사하였는데 독일인 사이에는 죽지않고 황제의 성인 키프호이저에 잠들어 있으며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퍼진 전설상의 인물이었다. 독일의 목표는 소련의 유럽영토로 소련의 인구와 공업기반의 70%가 위치한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아스트라한(Astrakhan) 선(일명 A-A선)'을 겨울이 오기 전에 점령하는 것으로 그럴 경우 스탈린도 어쩔 수 없이 항복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작전개시일을 발칸 반도 침공 때문에 당초 AD 1941년 5월 15일에서 6월 22일로 연기해야 했는데 이 예상치못한 5주라는 지연기간이 겨울 전에 A-A선 점령을 마무리하려던 독일군에게 큰 차질을 빚도록 만들게 될 줄은 당시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진격로(좌)와 대상 목표인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우)의 모습 소련의 상황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와 인구를 지니고 있던 만큼 500만명의 병력, 1만8천여대의 전차, 1만2천여대의 항공기라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군수산업이 발달하여 이미 AD 1930년대 말부터 미국에 이은 2번째 공업생산국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전 세계로 계속 확대시키기 위해 영토확대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사이였던 독일과 과감하게 불가침조약을 맺고 위성국인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동부지역, 핀란드의 카렐리야 지방을 차례로 병합하게 되었다. 추축국(회색)과 소련(적색)의 세력현황 이렇게 소련은 양적으로는 풍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만 질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다. 스탈린은 AD 1930년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거나 장래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는데 그 희생자 숫자가 공식적으로는 68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2백만까지도 가능하다고 추산된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를 낳았고 이 대숙청 대상에 군부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적백내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던 경험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당시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도 고전하였다. 스탈린은 새로 이동한 요새선이 아직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으면서도 AD 1941년초까지도 여전히 독일에 대하여 유화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독일군을 자극할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소련은 프랑스 전투에서 독일군이 '전격전'이라고 불리는 전차부대를 이용한 놀라운 기동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선을 따라 군대를 분산배치하여 국경선에서 영토를 무조건 사수하는 구식 전쟁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여러 첩보들을 통해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이것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로 치부하며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개전초기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1단계: 국경지대 전투 독일 중부 집단군의 모스크바 진격,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승리 독일군의 주공으로서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을 시작한 보크의 독일의 중부 집단군에는 프랑스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과 헤르만 호트의 제3기갑집단이 배속되었다. 이들 2개의 기갑집단은 프랑스 전투와 마찬가지로 양익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완성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에 호트의 제3기갑집단이 네만 강을 도하하여 폴란드 북동부의 교통의 요충지인 비아위스토크를 돌파하는 사이에 구데리안의 제2집단군이 부크 강을 건너 브레스트-리토프스크를 통과하고 이후 남북에서 약 350km를 병행 진격한 후 벨로루시의 수도인 민스크 동쪽에서 합류하여 최종적으로 포위망을 완성하는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진행현황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12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9만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25만명만이 간신히 독일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장비의 피해도 막심하여 2,500대의 탱크와 1,500대의 대포를 상실했고 소비에트 연방 서부 항공대 소속 전투기 중 1,700여기가 파괴되었다. 이때 입은 소련군의 피해는 서부 전선군의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독일군 내부는 승리감에 도취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군은 프랑스군과 끈질김에서 차원이 다른 상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단지 이제 전쟁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을 '대조국전쟁'으로 선포하였고 패전의 책임을 물러 총사령관인 파블로프와 그의 참모들을 총살형에 처했다. 독일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진격 라세이니 전투 승리 제16군, 제18군, 제4기갑집단으로 구성된 독일의 북부 집단군도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공세를 시작하여 AD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북부 집단군이 리투아니아와의 국경에 위치한 네만 강을 도하했다. 이를 상대해야 하는 소련의 발틱 군관구는 북서부 전선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표요도르 이소도르비치 쿠즈네트소프의 지휘 아래 3개의 야전군으로 구성되어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를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독일의 북부 집단군도 에리히 회프너의 제4기갑집단을 선두로 내세웠는데 리투아니아의 라세이니에서 서로 갈라졌다. 제4기갑집단은 다시 제41기갑군단과 제56기갑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 제56기갑군단장은 프랑스 전투에서 낫질 작전을 처음으로 입안한 에르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북부 집단군의 진격모습 핀란드의 참전,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계속전쟁) 겨울전쟁(AD 1939. 11. 30 ~ AD 1940. 3. 13)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선전하였으나 영토를 빼앗겼던 핀란드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하여 독일과 동맹을 맺고 AD 1941년 6월 25일 소련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었던 겨울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계속전쟁(Continuation War)"이라고 불리게 된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방을 모두 회복하고 소련과의 옛 국경에 다다르면서 이제는 레닌그라드로부터 불과 35km 밖에 안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핀란드군은 진격을 중단하게 되는데 히틀러가 핀란드군이 레닌그라드 공격을 지원하는 대가로 네바 강 북부지역을 모두 핀란드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핀란드는 옛 영토 수복 이후 더 이상의 전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요청을 거절하게 된다.
핀란드군의 진격모습 독일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진격 브로디 전투의 승리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우크라이나 공격을 맡은 독일의 남부 집단군은 루마니아, 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에서 차출한 병력을 포함해 가장 많은 병력인 57개 사단이 편성되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천연 장애물인 프리피야트 습지대 때문에 중부 집단군이나 북부 집단군이 남부 집단군을 지원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아 사실상 단독으로 작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상대하는 소련 측도 독일군의 주요 공세대상을 우크라이나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방비하는 남서 전선군과 그 쪽에 위치하여 조력이 가능한 남부 전선군의 규모가 가장 컸다.
브로디 전투의 진행모습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차운용 기량차이는 우크라이나의 두브나, 로브노, 브로디 삼각지대에서 AD 1941년 6월 23일부터 벌어진 브로디 전투에서부터 여실히 들어났다. 브로디 전투에서 소련군은 매우 많은 전차를 상실하게 되는데 제19기계화군단은 6월 29일 전체 전차의 7%만 남았고 제15기계화군단은 7월 7일경 전체 전차의 9%만 남았으며 제22기계화군단은 7월 15일 오직 4%의 전차만 남았다. T-34 전차 313대와 KV 전차 101대를 포함한 903대의 전차를 보유하여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소련의 기계화군단 중 가장 강력했던 제4기계화 군단은 집결장소에 뒤늦게 합류하였지만 이미 전황을 뒤집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후퇴하는 제15기계화군단과 함께 물러나야했다. 당시 소련군은 열악한 보급사정과 전차정비로 인하여 많은 전차들이 비전투 손실을 입었는데 제4기계화군단 역시 7월 12일이 되면 KV 전차 6%, T-34 12%, 경전차 4%의 병력만 남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참전 AD 1941년 7월 2일부터 루마니아의 2개 야전군(제3군, 제4군)이 제6군으로 편성되어 독일의 제11군과 함께 AD 1940년 6월 소련에게 빼앗긴 베사라비아 지역을 되찾고자 진격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이미 벨라루스의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우크라이나의 가용한 병력 상당수를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이동시킨 상태였고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브로디 전투마저 큰 타격을 입으면서 루마니아 국경을 방어하던 소련군도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7월 5일부터 이틀간 전투를 벌이며 독일의 제11군이 프루트 강의 동부 100km까지 전진하였고 7월 16일 루마니아군이 몰도바의 키시너우를 점령했다. 이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독일의 남부 집단군 예하 제1기갑집단이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우를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7월 26일이 되면 루마니아 국경을 담당하던 모든 소련군이 드네프르 강을 건너 후퇴하게 된다. 루마니아군의 베사라비아 지역 진군모습 이렇게 하여 루마니아군은 당초 목표로 했던 베사라비아 지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더이상 적극적인 전투를 펼치지 않았고 루마니아를 보조했던 독일의 제11군은 독일의 남부 집단군이 펼치는 우만 포위전을 지원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7월 27일 독일의 히틀러가 루마니아의 독재자인 이온 안토네스쿠에게 추가적인 군사행동을 요구하면서 루마니아군도 드네프르 강을 건너 우크라이나의 남오데사를 공격하기 위해 나서야 했다. AD 1941년 8월 8일부터 벌어진 루마니아군이 공격에 대하여 소련 측이 육군은 물론 흑해함대를 동원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73일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도합 9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에서 41,000명이 소련군이었다. 결국 10월 14일 밤에 소련의 흑해함대가 총 35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을 실고 세바스토폴로 후퇴하면서 루마니아군이 오데사를 겨우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2단계, 스몰렌스크 전투와 우만 전투 독일 중부 집단군의 스몰렌스크 전투 승리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일의 중부 집단군이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스몰렌스크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요충지로서 소련은 스몰렌스크의 앞에 위치한 다우가바 강에서 드네프르 강에 이르는 지역을 서부전선군의 제13군과 예비 전선군의 제20군, 제21군, 제22군이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고 북카프카스 군관구의 제19군을 비쳅스크로 이동시켰으며 제16군이 스몰렌스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서분전선군의 총지휘는 총살된 파블로프를 대신하여 국방장관인 세묜 티모셴코에게 맡겼다.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제16군의 제5기계화군단과 제20군의 제7기계화군단의 전차 700대를 동원하여 AD 1941년 7월 6일 선제공격에 나섰으나 독일 공군의 항공지원을 받은 독일의 제7기갑사단의 대전차방어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스몰렌스크 전투 진행현황 독일의 중부 집단군은 이번에도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과 호트의 제3기갑집단을 남과 북에서 각각 병진시켜 소련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를 위해 7월 10일부터 구데리안의 독일 제2기갑집단이 진격을 시작하여 소련의 제13군의 저지를 뚫고 7월 13일 벨로루시의 모길료프를 돌파하면서 스몰렌스크로부터 불과 18km 떨어진 곳까지 다다랐다. 이때 구데리안은 스몰렌스크를 무시하고 모스크바로 계속 전진하고 싶어했으나 독일 최고사령부는 스몰렌스크 먼저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호트의 제3기갑집단도 비슷한 시기에 공세를 시작하여 비록 늪지형과 악천우 때문에 전진이 느려졌지만 소련의 제19군과 제20군의 저지를 뚫고 비쳅스크를 점령한 뒤 7월 14일 스몰렌스크의 동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7월 18일이 되면 독일의 2개 기갑집단 사이의 거리가 불과 16km 밖에 안남게 되었기 때문에 포위당할 위기에 처한 소련의 제16군, 제19군, 제20군이 서둘러 후퇴를 시작하였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새롭게 동원한 4개의 야전군(제24군, 제28군, 제29군, 제30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에 투입하여 7월 21일부터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 덕분에 소련의 제20군의 대부분과 제19군의 일부를 포함하여 약 20만명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남겨진 30만명은 7월 30일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독일 남부 집단군의 우만 전투 승리 독일과의 전쟁 개전 이후 패배를 거듭하던 소련 측에서는 통일된 지휘권을 위해 기존 전선군의 상위개념인 방면군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북서방면군은 북서 전선군과 북부 전선군이 합해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게 맡겨졌고 서부 전선군은 중앙 방면군으로 개편되어 세묜 티모셴코가 그대로 총사령관으로 유임되었으며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은 하나로 합쳐져 국방장관인 세묜 부됸니가 총지휘를 맡은 남부방면군이 되었다. 우만 전투의 진행모습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3단계, 키예프 전투와 레닌그라드 전투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전투 독일군은 독소전쟁 개전이래 승승장구하여 AD 1941년 8월초 3개의 집단군 모두 당초로 목표로 했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집단군이 담당한 우크라이나에서는 계속된 독일군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소련군이 남아있어 거대한 돌출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로 곧바로 진격해야 한다는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 Oberkommando des Heeres)의 의견을 무시하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먼저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중부 집단군은 모스크바 공격을 중지하고 대신에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남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해야만 했다. 키예프 전투의 진행모습 키예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자 이제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곡창지대는 물론 카프카스의 유전지대까지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이 전투를 "역사상 최대의 전과"라고 극찬을 하였다. 그러나 키예프를 공략하는데 1달여의 시간을 허비하면서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개시가 9월이 아닌 10월에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로인해 독일군은 모스크바의 끔찍한 겨울혹한을 만나게 된다. 이 때문에 구데리안은 키예프 전투를 "전술적으로는 탁월한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무의미했다"라며 비판하게 된다.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전투 AD 1941년 8월 21일 전선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중지되었던 독일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공격이 재개되었다. 레닌그라드는 본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의 도시로서 AD 18세기 초반부터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이자 발트 함대의 거점이었고 한때는 모스크바를 대신하여 러시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중심이 되면서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로 명칭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상징성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소련 측에서는 독일군이 진격을 중지하는 동안 레닌그라드 주변에 방어진지를 겹겹히 구축하고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추가로 의용군을 뽑아 전쟁에 대비하였다.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진격 모습 이렇듯이 레닌그라드의 방어선이 견고해지자 독일측에서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여 보급을 끊고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항복을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다만 북부에서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도울 것으로 기대되었던 핀란드군이 카렐리야 지방을 회복한 뒤부터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 독일군 단독으로 포위망을 구축해야만 했고 9월 8일 레닌그라드 북동부의 라도가 호수에 독일군이 도착하면서 레닌그라드에 대한 육지 포위가 완성되었다. 점점 포위망을 좁히던 독일군이 9월 19일에는 레닌그라드로부터 10km 떨어진 곳에서 진격을 멈췄고 이후부터는 무차별 포격과 공중 폭격을 실시하여 레닌그라드의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들이 불타올랐다. 이렇게 하여 레닌그라드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특히 9월 12일 레닌그라드의 가장 큰 식품저장소인 바다예브스키 상점이 포격으로 파괴된 이후부터는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모습 독일의 고사작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병사들은 물론 레닌그라드 시민들도 굴복하지 않고 버티기 시작했는데 식량부족으로 최소량의 배급만 이루어지자 침몰한 수송선에서 끄집어 올린 부패한 곡물, 톱밥, 목화씨까지 식용으로 이용하고 시내의 빈 공터에 양배추 등을 야채를 재배하고 맹물에 끊여 먹었으며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이나 신발까지 끊여서 먹기도 했다. 난방용 석탄과 석유가 바닥나고 가스 공급이 끊어지자 유서깊은 목조 가구나 건물들을 부수기도 했고 전력도 부족하여 군사령부와 지역위원회, 방공 거점등을 제외하고는 전력 사용이 전부 금지되었다. 레닌그라드가 굶주림과 추위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었으나 끝까지 항복을 거절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세력분포현황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4단계, 모스크바 전투 전투준비 상황 AD 1941년 10월이 되자 미뤄두었던 모스크바 공격을 시작하였다. 모스크바를 방어해야 하는 소련군의 전력은 암담했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처참한 패배를 거듭하여 700여만명(80만명 전사, 300만명 포로, 300만명 부상)의 엄청난 병력손실과 각각 2만대의 전차와 전투기 손실을 입으면서 병력숫자가 125만명으로 감소했고 전차와 대포가 각각 1천대와 7,600문 밖에 안 남아 독일군에게 양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포기하지 않고 추가로 병력을 동원하여 칼리닌 전선군에게 모스크바 북부방어를, 브랸스크 전선군에게 모스크바 남부방어를 맡겼다. 또한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소련 서부에 밀집되었던 공장시설을 모두 분해한 후 후방의 안전한 우랄산맥 근처로 모조리 이동시킨 후 무조건 무기를 많이 생산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첩자인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은 소련 침공에 관심없고 미국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알려옴에 따라 일본군을 대비하여 극동 아시아와 시베리아에 배치하였던 부대도 모두 모스크바로 불러모았다. 이 중에서 시베리아군은 부대 특성상 동계작전 준비가 철저하여 훗날 겨울이 오면 큰 활약을 벌이게 된다. 한편 당시 소련군 참모총장인 샤포슈니코프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우면서 참모차장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사실상 소련군 참모총장 역할을 맡게 된다.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의 모습 이에 반해 독일군은 독소전쟁 개전이래 승승장구하며 파죽지세로 진격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특히 히틀러는 과거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였던 원인이 당시 러시아군이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 전략적으로 후퇴한 것을 간과하고 무리하게 진격했던 것이었으나 자신들은 소련군 상당수를 괴멸시켰기 때문에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함락을 자신하였고 수도인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스탈린도 자신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믿었다. '태풍 작전'으로 명명된 독일의 모스크바 공격작전에 투입된 독일군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의 제2군과 회프너의 제4기갑군이 보강되어 3개의 기갑군(제2, 제3, 제4기갑군)과 3개의 야전군(제2, 제4, 제9군), 제2항공군으로 총병력 190만명, 전차 1,700대, 각종 대포 14,000문, 그리고 전투기 549대의 대병력이었다. 이때 임시편제였던 기갑집단을 기갑군으로 정식 편제로 변경되었다.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 바르바로사 작전의 진행모습 초기 전황 전투가 벌어지자 처음에는 독일의 예상대로 독일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진행되었다. 독일의 양익포위전술에 바쟈마에 배치된 소련의 4개 야전군(제19, 제20, 제24, 제32군)이 독일의 제3, 제4기갑군에게 삽시간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가지만 독일의 예상과 어긋났는데 수도 함락의 위기에 놓인 소련군이 이전과 달리 포위당한 상태에서 쉽게 항복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독일로서는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예비병력까지 동원해야 했고 일부 소련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모스크바로 후퇴하기도 했다. 브랸스크에서도 독일의 제2기갑군에 의해 포위된 소련군이 몇몇 집단으로 나뉘어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였다. 소련의 가을장마와 모자이크스 방어선 10월 둘째주부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비포장도로가 모두 진흙밭으로 변해버렸다. 이 시기는 소련 특유의 가을 장마로써 러시아어로 '진흙의 계절'이라는 뜻의 '라스푸티차(распу тица)'라고 부를 정도로 도로사정이 열악해졌고 진흙밭에 빠져버린 차량은 크레인을 동원해야 겨우 빠져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차량과 전차의 이동이 현저히 느려졌다. 그러나 겨우 10월 13일 모스크바 서쪽 120 km 근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주코프가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새롭게 구축한 모자이크스 방어선을 만나야 했다. 소련인들의 모자이스크 방어선 구축모습 독일의 기갑군들이 북쪽에서는 바쟈마를, 남쪽에서는 브랸스크를 돌파하자 당초 계획한데로 모스크바를 남북으로 포위하기 위한 모자이스크 방어선 돌파를 시작하였다. 북쪽에서는 모자이스크 방어선 중에서 비교적 약한 칼리닌, 칼루가의 방어선을 노려 10월 14일 돌파하였고 10월 18일에는 나로프로민스크를, 10월 27일에는 볼로콜람스크를 각각 함락시켰다. 그러나 주코프가 구축한 방어선은 3중 요새선이었고 부족한 병력을 4개의 주요지점인 볼론콜람스크, 모자이스크, 말로야로슬라베츠, 칼루가를 집중적으로 강화하였기 때문에 모자이크스 방어선은 쉽사리 돌파되지 않았다. 모스크바 전투의 진행모습 겨울 한파와 독일군 진격 정지 11월 15일 가을장마가 끝나고 겨울 한파가 몰아치면서 땅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처음에 독일 측에서는 그동안 괴롭히던 진흙탕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소련의 다중방어선은 좀처럼 돌파되지 않았다. 11월 28일 일부 독일군이 크레믈린 궁으로부터 불과 3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도착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쌍원경으로 크레믈린 궁이 보일만큼 소련에게는 절대적인 위기였으나 결국 소련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남쪽에서도 브랸스크를 돌파한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의 진군이 시작되었고 당초에는 이 지역에 모자이스크 방어선이 구축되지도 않았고 방어병력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손쉽게 지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연료부족과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에 10월 26일이 되어서야 겨우 당초 목표로 삼았던 툴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제50군과 의용병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10월 29일까지 펼친 공세가 실패로 끝났고 11월 18일부터 다시한번 공격하였지만 결사항전에 나선 소련군과 의용병에게 다시한번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독일의 태풍작전은 마지막 단계인 모스크바 포위를 좀처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 군복을 입은 독일군 포로의 모습 소련군의 반격과 독일군의 후퇴 독일군은 비록 공세를 중지했지만 소련에게 더이상의 예비병력이 없기 때문에 겨울만 지나면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히틀러는 모든 전선에서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사실은 극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증원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후방에서 새롭게 동원한 병력이 편성을 완료하면서 소련군의 병력은 어느덧 110만명이 되어 독일군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다. 이제 12월 5일부터 소련군이 반격에 나서서 독일군 전선의 곳곳을 돌파하기 시작했고 12월 15일에는 클린을, 12월 16일에는 칼리닌을 수복하였으며 같은날 남쪽의 툴라의 포위망도 풀어냈다. 소련군의 반격모습 이제 독일군으로서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나 후방에서 현지의 사정을 알리없는 히틀러는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만 되풀이했다. 결국 독일의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가 히틀러의 재가도 얻지 않은 채 12월 14일 임의로 제한된 철수를 허락했고 각 지휘관들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후퇴를 시작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분노했고 12월 19일 독일육군 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해임시켰고 이후에도 일선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크리스마스에 제2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 제4기갑군 사령관 회프너, 제9군 사령관 슈트라우스를 연달아 해임시켰다. 한편 12월 19일 히틀러가 스스로 공석이 된 독일육군 총사령관 직에 올랐는데 이미 12월 1일 진격중지를 요청한 남부 집단군 총사령관인 룬트슈테트를 해임하였고 중부 집단군 총사령관인 보크도 히틀러의 압력에 못 이겨 질병을 핑계로 자진사임했으며 1942년 1월 16일 북부 집단군 총사령관인 레프 역시 레닌그라드 점령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여했던 독일육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조리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히틀러는 군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지만 경험많은 지휘관과 참모들을 대거 축출하고 미숙한 참모에 둘러쌓인 채 이후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소련의 AD 1942년 군사우편(좌)과 2011년 모스크바의 전투 60주년 기념우표(우)의 모습
[참고]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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