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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2차 세계대전(Ⅵ) 독소 전쟁(1) 독소 전쟁의 시작,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출처: http://winlee96.blog.me/220310799441


전쟁의 배경

독일의 상황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양면전쟁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이전에 AD 1939년 8월 미리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한 후 분할하였다. 이는 많은 나라들에게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는데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이전부터 공공연히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으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비협조를 내세우면서 공산주의가 독일을 망치고 있으므로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히틀러는 AD 1923년 뮌헨폭동 이후 감옥에 수감 중이던 시절에 작성한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를 통해서 우랄산맥 서쪽의 러시아인을 시베리아로 몰아내거나 노예로 삼고 대신하여 독일인을 정착시키기 위해 동유럽의 새로운 생활권을 의미하는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건설할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점점 장기화되자 소련의 영토가 되어있던 우크라이나의 거대한 곡창지대와 카프카스 일대의 유전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 소련의 우호관계는 일시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결정적으로 소련이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고전하자 소련의 군사력을 얕보기 시작한 히틀러가 연설을 통해 소련을 썪은 집으로 비유하며 독일군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면 곧바로 무너질 것이고 스탈린의 압제에 시달리는 소련인들이 독일군을 환영할 거라고 주장하면서 AD 1940년 12월 19일에는 총통명령(Weisung) 21호를 발령하고 소련 침공을 본격화하게 된다. 
 
 독일의 주요 작전은 독일 공군이 소련 비행장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통해 우선 제공권을 장악한 후 프랑스 전투에서 그 성과가 입증된 전격전의 교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즉 전차부대가 좌우에서 신속하게 이동하여 후방을 차단한 후 뒤이어 전진하는 보병부대와 함께 포위섬멸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독일군은 크게 3개의 집단군으로 나뉘어 첫번째로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가 지휘하는 중부 집단군은 실질적인 독일군의 주력군으로 벨라루스의 민스크,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방향을 거쳐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향하는 것을  진격로를 잡았다. 두번째로 빌헬름 폰 레프(Wilhelm Ritter von Leeb)가 맡은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을 침공하고 마지막으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의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를 점령하기 위해 키예프로 향하기로 하였다. 그 밖에 동맹국인 핀란드에게도 소련에게 상실한 카렐리야를 회복시켜준다는 명분으로 16개 사단을 동원하도록 유도하고 핀란드를 지원하기 위해 노르웨이 점령지에서도 5개 사단을 차출하면서 독일이 동원한 총병력이 무려 157개 사단, 300여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되었다.
 
이때 동원한 독일군의 지휘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소련을 침공하는 작전명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에서 유래한 "바르바로사(Barbarossa; 붉은 수염)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으로 동방원정을 감행하다가 도중에 익사하였는데 독일인 사이에는 죽지않고 황제의 성인 키프호이저에 잠들어 있으며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퍼진 전설상의 인물이었다. 독일의 목표는 소련의 유럽영토로 소련의 인구와 공업기반의 70%가 위치한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아스트라한(Astrakhan) 선(일명 A-A선)'을 겨울이 오기 전에 점령하는 것으로 그럴 경우 스탈린도 어쩔 수 없이 항복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작전개시일을 발칸 반도 침공 때문에 당초 AD 1941년 5월 15일에서 6월 22일로 연기해야 했는데 이 예상치못한 5주라는 지연기간이 겨울 전에 A-A선 점령을 마무리하려던 독일군에게 큰 차질을 빚도록 만들게 될 줄은 당시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진격로(좌)와 대상 목표인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우)의 모습

소련의 상황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와 인구를 지니고 있던 만큼 500만명의 병력, 1만8천여대의 전차, 1만2천여대의 항공기라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군수산업이 발달하여 이미 AD 1930년대 말부터 미국에 이은 2번째 공업생산국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전 세계로 계속 확대시키기 위해 영토확대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사이였던 독일과 과감하게 불가침조약을 맺고 위성국인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동부지역, 핀란드의 카렐리야 지방을 차례로 병합하게 되었다.  

추축국(회색)과 소련(적색)의 세력현황 
(녹색은 연합국, 흰색은 중립국) 


이렇게 소련은 양적으로는 풍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만 질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다. 스탈린은 AD 1930년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거나 장래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는데 그 희생자 숫자가 공식적으로는 68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2백만까지도 가능하다고 추산된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를 낳았고 이 대숙청 대상에 군부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적백내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던 경험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당시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도 고전하였다. 
한편 스탈린 역시 언젠가는 독일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경 근처에 요새선을 구축하였는데 폴란드 분할점령 이후에는 요새선을 서쪽으로 이동시켰고 소련군을 폴란드의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배치하였고 본래의 군관구 체제를 전선군 체제로 군사행정단위를 변경하였다. 독일의 침공 당시 독일과의 국경에 배치된 소련 전선군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아래의 소련군 이외에 최고사령부(STAVKA) 직할로 예비 전선군(제16군, 제19군, 제20군, 제22군, 제24군)이 추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새로 이동한 요새선이 아직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으면서도 AD 1941년초까지도 여전히 독일에 대하여 유화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독일군을 자극할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소련은 프랑스 전투에서 독일군이 '전격전'이라고 불리는 전차부대를 이용한 놀라운 기동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선을 따라 군대를 분산배치하여 국경선에서 영토를 무조건 사수하는 구식 전쟁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여러 첩보들을 통해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이것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로 치부하며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개전초기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1단계: 국경지대 전투


독일 중부 집단군의 모스크바 진격,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승리


독일군의 주공으로서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을 시작한 보크의 독일의 중부 집단군에는 프랑스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과 헤르만 호트의 제3기갑집단이 배속되었다. 이들 2개의 기갑집단은 프랑스 전투와 마찬가지로 양익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완성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에 호트의 제3기갑집단이 네만 강을 도하하여 폴란드 북동부의 교통의 요충지인 비아위스토크를 돌파하는 사이에 구데리안의 제2집단군이 부크 강을 건너 브레스트-리토프스크를 통과하고 이후 남북에서 약 350km를 병행 진격한 후 벨로루시의 수도인 민스크 동쪽에서 합류하여 최종적으로 포위망을 완성하는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독일군을 상대해야 하는 소련군은 디미트리 파블로프의 서부 전선군으로 총 3개의 야전군(제3군, 제4군, 제10군)이 국경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고 제13군이 예비대로 편성된 상태였다. 다만 방어선을 폴란드 국경에서 독일령 폴란드의 국경으로 이동시킨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방어진지가
제대로 구축되지 못했고 비록 보유한 탱크가 무려 4,522대로서 단순 숫자 면에서 독일군의 1,936대를 2배 이상 압도하였으나 아직 전차부대의 독립운용교리가 정립되지 않아 보병부대에 분산배치된 상태였다. 특이한 점은 서부전선군의 역할이 단순히 방어가 아니라 독일령 폴란드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었으나 막상 독일군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소련의 참모총장인 게오르기 주코프가 AD 1941년 5월 15일 선제공격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스탈린이 승인을 거절하고 오히려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며 주코프를 질책하였다는 점이었다. 스탈린의 이러한 모순적인 지시는 소련군이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고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AD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소련에 대한 전격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러시아 원정을 단행한 날이기도 하였다. 먼저 네만 강을 건넌 호트의 제3기갑집단이 비아위스토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비아위스토크는 바르샤바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의 교차점으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이 때문에 소련군도 비아위스토크에 소련군의 전방 지휘 시설과 통신망이 집중시켰으나 소련군이 지니고 있던 숫적 우위는 단순히 서류상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전차의 시동은 걸리지 않았고 대포도 발사되지 않으면서 비아위스토크의 방어를 맡은 소련의 제11군이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삽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 사이 남쪽의 부크 강을 도하한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이 소련의 제4군을 돌파하여 하루 만에 무려 60km를 질주한 후 후방의 나바흐루다크까지 도달하였다.
이렇게 독일군의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 직전에 이르렀지만 당시까지도 소련군은 전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전통적인 전쟁방식에 따라 독일과의 국경선에 배치된 전 부대에게 앞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결국 소련군은 제 발로 독일군의 포위망 속으로 걸어들어가게 되었으나 어쩌구니없게도 이러한 사실도 3일뒤에 이루어진 독일군 선전방송을 통해서 겨우 알게 되었다. 소련의 파블로프는 독일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6월 24일 가용한 기계화부대인 제11기계화군단, 제6기계화군단, 제6기병군단을 모아 흐로드나에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6월 25일이 되면 흐로드나 근처의 슬로님과 비아위스토크 사이까지 독일군이 차단하였기 때문에 파블로프는 모든 중장비를 버리고 사차하라 강을 따라 도보로 후퇴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소련군이 모두 민스크 근처로 물러났으나 이미 독일군의 사전 작전에 따라 민스크로 진격하고 있던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과 호트의 제3기갑집단이 6월 27일 민스크 동쪽에서 합류하여 또다시 포위당하게 되었다. 
6월 28일 이제 소련의 서부전선군은 둘로 나뉘어 제10군이 비아리스토크 일대의 작은 포위망에 남겨져 있었고 제3군과 제13군은 나바흐루다크와 민스크 사이의 거대한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소련군 중 포위망에서 벗어난 것은 제4군 예하의 일부 부대 밖에 없었다. 6월 30일 소련의 제20기계화군단과 제4공수군단이 다시한 포위망 돌파에 나섰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이제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게 된 소련군은 어쩔 수 없이 7월 3일 공식항복하였다.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진행현황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12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9만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25만명만이 간신히 독일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장비의 피해도 막심하여 2,500대의 탱크와 1,500대의 대포를 상실했고 소비에트 연방 서부 항공대 소속 전투기 중 1,700여기가 파괴되었다. 이때 입은 소련군의 피해는 서부 전선군의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독일군 내부는 승리감에 도취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군은 프랑스군과 끈질김에서 차원이 다른 상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단지 이제 전쟁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을 '대조국전쟁'으로 선포하였고 패전의 책임을 물러 총사령관인 파블로프와 그의 참모들을 총살형에 처했다.


독일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진격

라세이니 전투 승리


제16군, 제18군, 제4기갑집단으로 구성된 독일의 북부 집단군도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공세를 시작하여 AD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북부 집단군이 리투아니아와의 국경에 위치한 네만 강을 도하했다. 이를 상대해야 하는 소련의 발틱 군관구는 북서부 전선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표요도르 이소도르비치 쿠즈네트소프의 지휘 아래 3개의 야전군으로 구성되어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를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독일의 북부 집단군도 에리히 회프너의 제4기갑집단을 선두로 내세웠는데 리투아니아의 라세이니에서 서로 갈라졌다. 제4기갑집단은 다시 제41기갑군단과 제56기갑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 제56기갑군단장은 프랑스 전투에서 낫질 작전을 처음으로 입안한 에르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독일군의 기갑군단들이 소련의 차량화 군단들을 몰아붙이고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 공군기들이 소련의 차량과 탱크를 파괴하면서 전황은 처음부터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소련의 중전차인 KV-1과 KV-22에게는 고전하였는데 KV전차의 장갑이 두터워 독일의 전차포나 대전차포로는 정면에서 파괴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6월 23일에는 KV-2 전차 한대가 두비사 강의 교량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제6기갑사단 전체의 진격이 하루동안 멈추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KV전차는 두꺼운 장갑 덕분에 무거워 기동력이 떨어 질 수 밖에 없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만슈타인은 기동력이 우세한 독일의 3호전차와 4호전차에게 포위사격을 명령하는 한편 Flak18 88mm 대공포를 활용하여 소련의 KV전차 29대를 격파해내었다. 전황이 소련군에게 불리해지자 6월 25일 소련의 제8군과 제11군이 각각 라트비아의 리가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로 후퇴하였다. 6월 26일 만슈타인의 제56기갑군단이 퇴각하는 소련군을 쫓아서 다우가바 강을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 근처까지 다다르면서 소련군의 배후를 계속해서 위협당하게 되었다. 이때 만슈타인의 제56기갑군단이 4일동안 주파한 거리가 무려 320km에 달했다. 
6월 28일 다우가프필스에 대한 소련군의 반격이 시도되었으나 격퇴되었고 6월 29일 리가를 독일군이 점령하였다. 이제 소련군은 다우가바 강에서 후퇴하여 벨리카야 강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7월 1일에는 에스토니아 전역을 점령당했고 7월 8일 벨리카야 강의 도로와 교량을 모두 점령당했으며 7월 9일에는 러시아의 국경도시인 프스코프까지 상실하였다. 이제 독일군이 루가와 벨리키노브고로드 지역까지 접근하면서 소련의 제11군은 드노까지, 제8군은 핀란드 만까지 후퇴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발트 3국을 담당하던 소련의 북서 전선군이 방서선이 모두 붕괴되었고 이제 독일의 북부 집단군은 당초 목표로 삼았던 레닌그라드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선을 정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북부 집단군의 더이상의 진격을 중지시켰고 이 때문에 소련군은 레닌그라드의 방어선을 정비하고 병력을 충원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북부 집단군의  진격모습


핀란드의 참전,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계속전쟁)


겨울전쟁(AD 1939. 11. 30 ~ AD 1940. 3. 13)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선전하였으나 영토를 빼앗겼던 핀란드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하여 독일과 동맹을 맺고 AD 1941년 6월 25일 소련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었던 겨울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계속전쟁(Continuation War)"이라고 불리게 된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방을 모두 회복하고 소련과의 옛 국경에 다다르면서 이제는 레닌그라드로부터 불과 35km 밖에 안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핀란드군은 진격을 중단하게 되는데 히틀러가 핀란드군이 레닌그라드 공격을 지원하는 대가로 네바 강 북부지역을 모두 핀란드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핀란드는 옛 영토 수복 이후 더 이상의 전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요청을 거절하게 된다. 


독일이 핀란드에게 요구한 두 번째 군사행동은 소련 북부의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북극권에 위치한 바레츠해 연안의 항구인 무르만스크는 대서양으로 연결될 수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으로서 소련이 미국 등 외부로부터 물자를 수송받을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에 주둔 중이던 독일의 산악사단 2개부대가 핀란드로 들어와 함께 무르만스크 공격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전력의 열세와 극한의 겨울 도래, 그리고 미국의 외교적 압력에 의하여 핀란드군이 자파드나야 리트사 강(Zapadnaya Litsa River)에서 진격을 멈추면서 최종적으로 무르만스크 점령에 실패하게 된다.


핀란드군의 진격모습


독일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진격

브로디 전투의 승리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우크라이나 공격을 맡은 독일의 남부 집단군은 루마니아, 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에서 차출한 병력을 포함해 가장 많은 병력인 57개 사단이 편성되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천연 장애물인 프리피야트 습지대 때문에 중부 집단군이나 북부 집단군이 남부 집단군을 지원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아 사실상 단독으로 작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상대하는 소련 측도 독일군의 주요 공세대상을 우크라이나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방비하는 남서 전선군과 그 쪽에 위치하여 조력이 가능한 남부 전선군의 규모가 가장 컸다.  


독일의 남부 집단군에 배속된 제1기갑집단은 프랑스 전투에서 최초의 기갑집단 사령관이었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고 있었으나 총 전차숫자는 728대에 불과하고 구형 모델인 1호탱크와 2호탱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형 모델인 3호탱크와 4호탱크는 355대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소련군 전차는 무려 3,429대에 달했고 그중에서 신형 모델인 KV-1, KV-2 중(重)전차와 T-34 중(中)전차 역시 그 때까지 소련이 생산한 전체 숫자 1,600대 중 절반에 육박하는 717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다만 보병 수송용 차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이름만 "기계화 군단"이었고 제대로 된 전차 운용교리도 없는 상태에서 통신망마저 열악하여 전투가 벌어질 경우에는 각 전차들이 개별적으로 싸워야하는 약점이 있었다.

브로디 전투의 진행모습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차운용 기량차이는 우크라이나의 두브나, 로브노, 브로디 삼각지대에서 AD 1941년 6월 23일부터 벌어진 브로디 전투에서부터 여실히 들어났다. 브로디 전투에서 소련군은 매우 많은 전차를 상실하게 되는데 제19기계화군단은 6월 29일 전체 전차의 7%만 남았고 제15기계화군단은 7월 7일경 전체 전차의 9%만 남았으며 제22기계화군단은 7월 15일 오직 4%의 전차만 남았다. T-34 전차 313대와 KV 전차 101대를 포함한 903대의 전차를 보유하여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소련의 기계화군단 중 가장 강력했던 제4기계화 군단은 집결장소에 뒤늦게 합류하였지만 이미 전황을 뒤집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후퇴하는 제15기계화군단과 함께 물러나야했다. 당시 소련군은 열악한 보급사정과 전차정비로 인하여 많은 전차들이 비전투 손실을 입었는데 제4기계화군단 역시 7월 12일이 되면 KV 전차 6%, T-34 12%, 경전차 4%의 병력만 남게 되었다.
이렇듯이 소련의 기계화군단들이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패퇴하고 있을 때 제8기계화군단 만이 독일군에 대한 공격에 성공하여 독일군을 긴장시켰다. 제8기계화군단 예하 니코라이 포펠 그룹은 100대 이하의 T-34 전차와 KV 전차를 포함하여 총 300대의 전차를 동원하여 6월 27일 독일의 제11기갑사단을 기습하고 두브노로 향하는 중요한 도로 교차점을 점령하여 독일군의 집결을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열악한 통신망 사정으로 제때 병력이 충원되지 못하고 별도의 명령도 전달받지 못한 채 더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방어전으로 일관하다가 전략적 우위를 상실하였다. 결국 이튿날인 6월 28일부터 독일군이 급하게 동원한 제16차량화사단, 제75보병사단외 2개 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의 맹공격을 받고 7월 1일까지 저항하다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소련의 제8기계화군단 역시 큰 피해를 입고 7월 7일에는 불과 5%의 전차만이 남게 되었다. 


7월 중순 브로디 전투가 독일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브로디 전투는 AD 1943년 7월 독일의 전차부대가 소련의 전차부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쿠르스크 전투 이전까지 가장 많은 전차가 동원된 전투로 알려지게 되는데, 소련군이 매우 많은 전차를 상실하였으나 이를 상대한 독일의 제1기갑집단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북부의 발트해 연안과 중앙의 벨라루스 방면의 독일 집단군들이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방어선을 후퇴시키기 시작하였고 이에 독일의 남부 집단군 역시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7월 9일 우크라이나의 지토미르를 점령하면서 키예프를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참전


AD 1941년 7월 2일부터 루마니아의 2개 야전군(제3군, 제4군)이 제6군으로 편성되어 독일의 제11군과 함께 AD 1940년 6월 소련에게 빼앗긴 베사라비아 지역을 되찾고자 진격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이미 벨라루스의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우크라이나의 가용한 병력 상당수를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이동시킨 상태였고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브로디 전투마저 큰 타격을 입으면서 루마니아 국경을 방어하던 소련군도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7월 5일부터 이틀간 전투를 벌이며 독일의 제11군이 프루트 강의 동부 100km까지 전진하였고 7월 16일 루마니아군이 몰도바의 키시너우를 점령했다. 이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독일의 남부 집단군 예하 제1기갑집단이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우를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7월 26일이 되면 루마니아 국경을 담당하던 모든 소련군이 드네프르 강을 건너 후퇴하게 된다. 

루마니아군의 베사라비아 지역 진군모습


이렇게 하여 루마니아군은 당초 목표로 했던 베사라비아 지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더이상 적극적인 전투를 펼치지 않았고 루마니아를 보조했던 독일의 제11군은 독일의 남부 집단군이 펼치는 우만 포위전을 지원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7월 27일 독일의 히틀러가 루마니아의 독재자인 이온 안토네스쿠에게 추가적인 군사행동을 요구하면서 루마니아군도 드네프르 강을 건너 우크라이나의 남오데사를 공격하기 위해 나서야 했다. AD 1941년 8월 8일부터 벌어진 루마니아군이 공격에 대하여 소련 측이 육군은 물론 흑해함대를 동원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73일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도합 9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에서 41,000명이 소련군이었다. 결국 10월 14일 밤에 소련의 흑해함대가 총 35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을 실고 세바스토폴로 후퇴하면서 루마니아군이 오데사를 겨우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2단계, 스몰렌스크 전투와 우만 전투

독일 중부 집단군의 스몰렌스크 전투 승리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일의 중부 집단군이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스몰렌스크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요충지로서 소련은 스몰렌스크의 앞에 위치한 다우가바 강에서 드네프르 강에 이르는 지역을 서부전선군의 제13군과 예비 전선군의 제20군, 제21군, 제22군이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고 북카프카스 군관구의 제19군을 비쳅스크로 이동시켰으며 제16군이 스몰렌스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서분전선군의 총지휘는 총살된 파블로프를 대신하여 국방장관인 세묜 티모셴코에게 맡겼다.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제16군의 제5기계화군단과 제20군의 제7기계화군단의 전차 700대를 동원하여 AD 1941년 7월 6일 선제공격에 나섰으나 독일 공군의 항공지원을 받은 독일의 제7기갑사단의 대전차방어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스몰렌스크 전투 진행현황


독일의 중부 집단군은 이번에도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과 호트의 제3기갑집단을 남과 북에서 각각 병진시켜 소련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를 위해 7월 10일부터 구데리안의 독일 제2기갑집단이 진격을 시작하여 소련의 제13군의 저지를 뚫고 7월 13일 벨로루시의 모길료프를 돌파하면서 스몰렌스크로부터 불과 18km 떨어진 곳까지 다다랐다. 이때 구데리안은 스몰렌스크를 무시하고 모스크바로 계속 전진하고 싶어했으나 독일 최고사령부는 스몰렌스크 먼저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호트의 제3기갑집단도 비슷한 시기에 공세를 시작하여 비록 늪지형과 악천우 때문에 전진이 느려졌지만 소련의 제19군과 제20군의 저지를 뚫고 비쳅스크를 점령한 뒤 7월 14일 스몰렌스크의 동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7월 18일이 되면 독일의 2개 기갑집단 사이의 거리가 불과 16km 밖에 안남게 되었기 때문에 포위당할 위기에 처한 소련의 제16군, 제19군, 제20군이 서둘러 후퇴를 시작하였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새롭게 동원한 4개의 야전군(제24군, 제28군, 제29군, 제30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에 투입하여 7월 21일부터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 덕분에 소련의 제20군의 대부분과 제19군의 일부를 포함하여 약 20만명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남겨진 30만명은 7월 30일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독일의 중부 집단군은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연이어 2개의 기갑집단이 양날개로 펼치는 포위섬멸전을 대성공시키면서 소련군에게 막대한 병력손실을 안겼다. 그러나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손실된 병력보다 더 많은 예비병력을 동원하면서 독일군의 측면을 위협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직도 많은 병력이 소련에 남아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당초 기습공격으로 국경지대의 소련군을 포위섬멸한 후 신속하게 모스크바를 점령하려던 독일 지휘부를 당황시켰다. 더구나 히틀러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소련 남쪽의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 지역을 우선 점령하고자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키예프에서 고전하던 남부 집단군 쪽으로 지원보내면서 모스크바 진격을 뒤로 미루게 된다. 이 때문에 소련군은 모스크바를 지켜낼 병력과 장비, 물자를 모을 수 시간을 벌게 되었다.

독일 남부 집단군의 우만 전투 승리


독일과의 전쟁 개전 이후 패배를 거듭하던 소련 측에서는 통일된 지휘권을 위해 기존 전선군의 상위개념인 방면군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북서방면군은 북서 전선군과 북부 전선군이 합해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게 맡겨졌고 서부 전선군은 중앙 방면군으로 개편되어 세묜 티모셴코가 그대로 총사령관으로 유임되었으며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은 하나로 합쳐져 국방장관인 세묜 부됸니가 총지휘를 맡은 남부방면군이 되었다. 
 
브로디 전투에서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한 소련군에게 이제 1개의 기계화군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부됸니는 우만 북부의 베르디치우에서 독일의 제1기갑집단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좌절되었고 7월 15일 베르디치우를 점령당했다. 독일의 남부 집단군이 1차 목표로 삼았던 키예프를 목전에 두게 되었으나 이때 히틀러가 군사작전에 개입했다. 히틀러는 그대로 키예프로 진격할 경우 시가전에 휘말며 큰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우려하여 키예프 남쪽으로 제1기갑집단을 우회시켜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를 보조하여 독일의 제17군이 우만 남쪽으로 진군하였고 루마니아군을 도와 베사라비아를 점령한 독일의 제11군도 진군시켰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키예프와 체르카시 사이에 위치한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여 돈바스 방향으로 진군할 것으로 예측하고 이곳을 집중 방어하기로 하였다. 결국 7월 28일 소련군이 독일군의 드네프르 강 도하를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그대로 동부로 후퇴하면서 독일군의 포위망을 막아낼 절호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결국 8월 2일 독일의 제11군과 제17군, 제1기갑집단에 의해 포위망이 완성되었고 독일의 제16기갑사단과 헝가리 기계화군단까지 합류하면서 포위망으로 두겹으로 공고히 되었다. 이렇게 하여 소련의 제6군, 제12군의 예하 20개 사단이 고스란히 독일군의 포위망에 갇혀버렸고 결국 약 10만명이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우만 전투의 진행모습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3단계, 키예프 전투와 레닌그라드 전투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전투


독일군은 독소전쟁 개전이래 승승장구하여 AD 1941년 8월초 3개의 집단군 모두 당초로 목표로 했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집단군이 담당한 우크라이나에서는 계속된 독일군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소련군이 남아있어 거대한 돌출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로 곧바로 진격해야 한다는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 Oberkommando des Heeres)의 의견을 무시하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먼저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중부 집단군은 모스크바 공격을 중지하고 대신에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남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해야만 했다.
독일의 남부 집단군은 9월 12일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9월 16일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남쪽으로 진군시켜 키예프를 둘러싼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부됸니의 계속된 무능한 지휘에 분노한 스탈린이 9월 13일 부됸니를 남부 방면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모스크바로 소환하였으나 그 후임을 지목하지 않아 소련의 남부 방면군은 개별 부대 지휘관들이 각자 지휘해야만 했다. 소련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애썼으나 지휘권도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는 절망적인 상황만 맞이했다. 결국 10일 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9월 26일 키예프가 마침내 함락되었고 소련군은 약 60만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키예프 전투의 진행모습


키예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자 이제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곡창지대는 물론 카프카스의 유전지대까지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이 전투를 "역사상 최대의 전과"라고 극찬을 하였다. 그러나 키예프를 공략하는데 1달여의 시간을 허비하면서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개시가 9월이 아닌 10월에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로인해 독일군은 모스크바의 끔찍한 겨울혹한을 만나게 된다. 이 때문에 구데리안은 키예프 전투를 "전술적으로는 탁월한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무의미했다"라며 비판하게 된다.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전투


AD 1941년 8월 21일 전선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중지되었던 독일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공격이 재개되었다. 레닌그라드는 본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의 도시로서 AD 18세기 초반부터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이자 발트 함대의 거점이었고 한때는 모스크바를 대신하여 러시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중심이 되면서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로 명칭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상징성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소련 측에서는 독일군이 진격을 중지하는 동안 레닌그라드 주변에 방어진지를 겹겹히 구축하고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추가로 의용군을 뽑아 전쟁에 대비하였다.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진격 모습


이렇듯이 레닌그라드의 방어선이 견고해지자 독일측에서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여 보급을 끊고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항복을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다만 북부에서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도울 것으로 기대되었던 핀란드군이 카렐리야 지방을 회복한 뒤부터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 독일군 단독으로 포위망을 구축해야만 했고 9월 8일 레닌그라드 북동부의 라도가 호수에 독일군이 도착하면서 레닌그라드에 대한 육지 포위가 완성되었다. 점점 포위망을 좁히던 독일군이 9월 19일에는 레닌그라드로부터 10km 떨어진 곳에서 진격을 멈췄고 이후부터는 무차별 포격과 공중 폭격을 실시하여 레닌그라드의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들이 불타올랐다. 이렇게 하여 레닌그라드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특히 9월 12일 레닌그라드의 가장 큰 식품저장소인 바다예브스키 상점이 포격으로 파괴된 이후부터는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레닌그라드의 방어를 담당하던 소련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친구라는 이유로 중책을 맡았으나 무능한 지휘로 일관하자 9월 10일 결국 해임되었고 대신하여 총참모총장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가 임명되었다. 주코프는 독소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의 예봉을 피해 병력과 장비를 보존하기 위해 후퇴를 권고하였으나 스탈린에게 무시당했고 이후로도 번번히 자신의 작전계획을 스탈린이 수용하지 않자 총참모총장 직을 사임하고 전선을 직접 지휘하기를 희망하면서 레닌그라드의 북서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가 이미 독일군에게 포위당했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에 들어가는 것도 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수송기를 타고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주코프는 전의를 상실한 장교들을 해임하는 특단의 조치를 통해 무너진 소련군의 군기를 다잡고 놀라운 군사적 수완과 비정하기까지 한 결의를 보이며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모습


독일의 고사작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병사들은 물론 레닌그라드 시민들도 굴복하지 않고 버티기 시작했는데 식량부족으로 최소량의 배급만 이루어지자 침몰한 수송선에서 끄집어 올린 부패한 곡물, 톱밥, 목화씨까지 식용으로 이용하고 시내의 빈 공터에 양배추 등을 야채를 재배하고 맹물에 끊여 먹었으며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이나 신발까지 끊여서 먹기도 했다. 난방용 석탄과 석유가 바닥나고 가스 공급이 끊어지자 유서깊은 목조 가구나 건물들을 부수기도 했고 전력도 부족하여 군사령부와 지역위원회, 방공 거점등을 제외하고는 전력 사용이 전부 금지되었다. 레닌그라드가 굶주림과 추위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었으나 끝까지 항복을 거절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무너진 소련군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주코프는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략이 임박해진 10월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세묜 티모셴코를 대신한 중앙 방면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주코프는 떠났으나 사기를 회복한 소련군이 반격작전을 시작하여 11월 10일 레닌그라드 북동부의 티흐빈을 탈환하면서 포위망이 약간 풀렸다. 특히 레닌그라드의 피폐함은 겨울이 되면서 더욱 심해졌으나 역설적으로 동북부의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으면서 트럭이 지나다니게 되어 어느정도 숨통이 틔이게 된다. 이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지칭되었는데 독일의 포격으로 얼음이 깨져 사망하는 경우도 많은 위험한 길이었으나 레닌그라드로 식량과 군수물자, 보급품은 물론 병력까지 충원되면서 레닌그라드는 힘겨운 저항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후 레닌그라드는 AD 1944년 1월 27일까지 무려 872일 동안 독일의 공격을 버텨내어 끝내 승리하게 된다.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세력분포현황


바르바로사 작전의 제4단계, 모스크바 전투

전투준비 상황


AD 1941년 10월이 되자 미뤄두었던 모스크바 공격을 시작하였다. 모스크바를 방어해야 하는 소련군의 전력은 암담했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처참한 패배를 거듭하여 700여만명(80만명 전사, 300만명 포로, 300만명 부상)의 엄청난 병력손실과 각각 2만대의 전차와 전투기 손실을 입으면서 병력숫자가 125만명으로 감소했고 전차와 대포가 각각 1천대와 7,600문 밖에 안 남아 독일군에게 양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포기하지 않고 추가로 병력을 동원하여 칼리닌 전선군에게 모스크바 북부방어를, 브랸스크 전선군에게 모스크바 남부방어를 맡겼다. 또한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소련 서부에 밀집되었던 공장시설을 모두 분해한 후 후방의 안전한 우랄산맥 근처로 모조리 이동시킨 후 무조건 무기를 많이 생산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첩자인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은 소련 침공에 관심없고 미국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알려옴에 따라 일본군을 대비하여 극동 아시아와 시베리아에 배치하였던 부대도 모두 모스크바로 불러모았다. 이 중에서 시베리아군은 부대 특성상 동계작전 준비가 철저하여 훗날 겨울이 오면 큰 활약을 벌이게 된다. 한편 당시 소련군 참모총장인 샤포슈니코프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우면서 참모차장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사실상 소련군 참모총장 역할을 맡게 된다.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의 모습


이에 반해 독일군은 독소전쟁 개전이래 승승장구하며 파죽지세로 진격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특히 히틀러는 과거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였던 원인이 당시 러시아군이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 전략적으로 후퇴한 것을 간과하고 무리하게 진격했던 것이었으나 자신들은 소련군 상당수를 괴멸시켰기 때문에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함락을 자신하였고 수도인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스탈린도 자신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믿었다. '태풍 작전'으로 명명된 독일의 모스크바 공격작전에 투입된 독일군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의 제2군과 회프너의 제4기갑군이 보강되어 3개의 기갑군(제2, 제3, 제4기갑군)과 3개의 야전군(제2, 제4, 제9군), 제2항공군으로 총병력 190만명, 전차 1,700대, 각종 대포 14,000문, 그리고 전투기 549대의 대병력이었다. 이때 임시편제였던 기갑집단을 기갑군으로 정식 편제로 변경되었다. 
태풍작전의 주요내용은 여전히 기갑군을 이용한 양익 포위전술로서 첫번째로 호트의 제3기갑군과 회프너의 제4기갑군이 뱌자마 근방에서 양쪽에서 두갈래로 돌파하여 소련의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 칼리닌 전선군을 감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두번째로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이 단일 돌파로 브랸스크 전선군에 대한 작은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소련군을 완전히 붕괴되면 마지막으로 남쪽과 북쪽에서 협공하여 모스크바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때 독일의 기갑군은 파괴된 전차가 보충되지 않고 비축연료가 부족해지는 보급상의 문제를 보이고 있는 점이 있었다.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 바르바로사 작전의 진행모습


초기 전황


전투가 벌어지자 처음에는 독일의 예상대로 독일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진행되었다. 독일의 양익포위전술에 바쟈마에 배치된 소련의 4개 야전군(제19, 제20, 제24, 제32군)이 독일의 제3, 제4기갑군에게 삽시간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가지만 독일의 예상과 어긋났는데 수도 함락의 위기에 놓인 소련군이 이전과 달리 포위당한 상태에서 쉽게 항복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독일로서는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예비병력까지 동원해야 했고 일부 소련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모스크바로 후퇴하기도 했다. 브랸스크에서도 독일의 제2기갑군에 의해 포위된 소련군이 몇몇 집단으로 나뉘어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련은 총병력의 대략 40% 정도인 50-60만명 정도의 병력손실을 입었으나 결사적인 항전 덕분에 독일군의 진격속도를 어느정도 늦추는 데는 성공했다. 이때 스탈린이 10월 10일 레닌그라드에서 주코프를 소환하여 예비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제 얼마남지 않은 서부전선군도 세묜 티모셴코 대신에 주코프에게 지휘를 맡기면서 주코프는 사실상 소련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주코프는 스탈린이 모스크바를 사수할 수 있는지 솔직하게 얘기해달라는 말에 예비병력만 충분하다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주코프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후방의 병력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버텨내면 승산이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제 모스크바 전투는 독일군이 아닌 시간과의 다툼이 되었다.

소련의 가을장마와 모자이크스 방어선


10월 둘째주부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비포장도로가 모두 진흙밭으로 변해버렸다. 이 시기는 소련 특유의 가을 장마로써 러시아어로 '진흙의 계절'이라는 뜻의 '라스푸티차(распу тица)'라고 부를 정도로 도로사정이 열악해졌고 진흙밭에 빠져버린 차량은 크레인을 동원해야 겨우 빠져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차량과 전차의 이동이 현저히 느려졌다. 그러나 겨우 10월 13일 모스크바 서쪽 120 km 근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주코프가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새롭게 구축한 모자이크스 방어선을 만나야 했다.
모자이크스 방어선은 칼리닌-볼로콜람스크-칼루가로 연결되어 모스크바 서쪽을 방위하도록 급조된 이중 방어선으로 장비가 부족하자 민간인 25만명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인력으로만 참호와 대전차진지를 구축한 소련군의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방어병력이 9만명에 불과하여 독일군을 모두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스탈린이 소련공산당, 참모본부를 비롯한 여러 정부기관에게 모스크바를 떠나 볼가 강 하류의 쿠이비셰프(오늘날의 사마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때문에 10월 16일부터 이틀 간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피난을 떠나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결국 스탈린이 공개적으로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에 남겠다고 선언하고 첩보기관인 내무인민위원회(NKVD)가 즉결 처형 등의 초강경자세로 치안을 맡으면서 겨우 혼란이 수습되었다.


소련인들의 모자이스크 방어선 구축모습


독일의 기갑군들이 북쪽에서는 바쟈마를, 남쪽에서는 브랸스크를 돌파하자 당초 계획한데로 모스크바를 남북으로 포위하기 위한 모자이스크 방어선 돌파를 시작하였다. 북쪽에서는 모자이스크 방어선 중에서 비교적 약한 칼리닌, 칼루가의 방어선을 노려 10월 14일 돌파하였고 10월 18일에는 나로프로민스크를, 10월 27일에는 볼로콜람스크를 각각 함락시켰다. 그러나 주코프가 구축한 방어선은 3중 요새선이었고 부족한 병력을 4개의 주요지점인 볼론콜람스크, 모자이스크, 말로야로슬라베츠, 칼루가를 집중적으로 강화하였기 때문에 모자이크스 방어선은 쉽사리 돌파되지 않았다. 
 
이렇게 소련군이 결사적으로 독일군을 막아내고는 있었고 후방에서 속속 증원병력이 조착하고 있었으나 소련에게 불리한 전황은 좀처럼 타개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10월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이 도래하자 스탈린은 모스크바 시민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붉은 광장에서 군사 행진을 강행했다.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독일 공군의 공습이 있는 경우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결정이었으나 다행히 당일에 눈보라가 날리는 등 악천후로 독일 공군의 공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연설을 통해 조국 수호를 위한 애국심을 호소했고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등 다양한 군가를 작곡하여 사기 진작을 위해 노력했다.

모스크바 전투의 진행모습


겨울 한파와 독일군 진격 정지


11월 15일 가을장마가 끝나고 겨울 한파가 몰아치면서 땅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처음에 독일 측에서는 그동안 괴롭히던 진흙탕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소련의 다중방어선은 좀처럼 돌파되지 않았다. 11월 28일 일부 독일군이 크레믈린 궁으로부터 불과 3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도착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쌍원경으로 크레믈린 궁이 보일만큼 소련에게는 절대적인 위기였으나 결국 소련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남쪽에서도 브랸스크를 돌파한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의 진군이 시작되었고 당초에는 이 지역에 모자이스크 방어선이 구축되지도 않았고 방어병력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손쉽게 지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연료부족과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에 10월 26일이 되어서야 겨우 당초 목표로 삼았던 툴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제50군과 의용병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10월 29일까지 펼친 공세가 실패로 끝났고 11월 18일부터 다시한번 공격하였지만 결사항전에 나선 소련군과 의용병에게 다시한번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독일의 태풍작전은 마지막 단계인 모스크바 포위를 좀처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12월초가 되자 기온이 영하 15-20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련 측에게는 평범한 일이었으나 겨울 이전에 모스크바 점령을 마무리지을 것으로 자신하고 아무런 동계작전 준비를 하지 않은 독일군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독일군 병사는 방한복도 없이 여름 군복으로 혹한을 견디게 되면서 동상환자가 속출했고 강추위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차량과 전차도 부동액이 부족하여 가동 전 1시간 동안 예열을 시켜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포탄 역시 얼어버린 윤활유를 제거해야 했고 전차의 조준경과 포신도 얼어붙었으며 소총과 권총 역시 방아쇠가 당기기도 어려워졌다. 결국 독일군은 더이상의 공세를 펼치지 못한 채 모든 부대를 정지시켜야만 했다.


여름 군복을 입은 독일군 포로의 모습


소련군의 반격과 독일군의 후퇴


독일군은 비록 공세를 중지했지만 소련에게 더이상의 예비병력이 없기 때문에 겨울만 지나면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히틀러는 모든 전선에서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사실은 극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증원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후방에서 새롭게 동원한 병력이 편성을 완료하면서 소련군의 병력은 어느덧 110만명이 되어 독일군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다. 이제 12월 5일부터 소련군이 반격에 나서서 독일군 전선의 곳곳을 돌파하기 시작했고 12월 15일에는 클린을, 12월 16일에는 칼리닌을 수복하였으며 같은날 남쪽의 툴라의 포위망도 풀어냈다.

소련군의 반격모습


이제 독일군으로서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나 후방에서 현지의 사정을 알리없는 히틀러는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만 되풀이했다. 결국 독일의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가 히틀러의 재가도 얻지 않은 채 12월 14일 임의로 제한된 철수를 허락했고 각 지휘관들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후퇴를 시작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분노했고 12월 19일 독일육군 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해임시켰고 이후에도 일선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크리스마스에 제2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 제4기갑군 사령관 회프너, 제9군 사령관 슈트라우스를 연달아 해임시켰다. 한편 12월 19일 히틀러가 스스로 공석이 된 독일육군 총사령관 직에 올랐는데 이미 12월 1일 진격중지를 요청한 남부 집단군 총사령관인 룬트슈테트를 해임하였고 중부 집단군 총사령관인 보크도 히틀러의 압력에 못 이겨 질병을 핑계로 자진사임했으며 1942년 1월 16일 북부 집단군 총사령관인 레프 역시 레닌그라드 점령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여했던 독일육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조리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히틀러는 군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지만 경험많은 지휘관과 참모들을 대거 축출하고 미숙한 참모에 둘러쌓인 채 이후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영향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독일군은 개전 초기에 대승을 거듭하면서 약 80만명의 손실을 입은 대신에 소련군에게는 약 7백만명의 피해를 입히는 엄청난 병력교환비율을 기록하면서 소련군을 붕괴직전까지 몰고가는 데는 성공했다. 특히 무조건 영토 사수만을 외치는 스탈린의 시대착오적인 명령 때문에 경직되어버린 소련군을 상대로 기계화부대를 이용한 거대한 포위기동전을 펼치면서 전술 면에서 압도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은 예상치 못한 발칸 반도 침공 때문에 작전개시가 4주나 늦어졌고 히틀러가 지나치게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펼친 키예프 공략에 또다시 4주의 시간을 허비하면서 독일군은 11월의 가을장마와 12월의 겨울 한파를 겪으며 엄청난 비전투 손실을 입고 말았다. 소련의 유럽 영토를 장악하겠다는 당초의 목표는 대부분 달성했으나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후퇴하면서 단기결전으로 끝내겠다는 최종 목표만은 끝내 달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전쟁은 독일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장기전으로 비화되었고 초반 대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회복력을 보여주는 소련의 저력에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반면에 소련은 모스크바의 서부를 지키는 모든 부대가 거의 붕괴직전에 이르렀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비전투손실로만 보유한 전차의 상당수를 잃어버리는 등 개전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는 대숙청의 영향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사라졌고 이를 대신할만한 장교단이 아직 미숙하여 프랑스 전투에서 보여준 독일 기계화부대의 선전에 대하여 아무런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거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병력을 충원하였고 계속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결사항전을 계속하면서 어찌되었든 모스크바에서 독일군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무적의 맹위를 떨치던 독일 육군이 처음으로 겪은 대규모 후퇴였다. 모스크바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독일군도 무적이 아니며 자신들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방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주코프가 소련의 군사영웅으로 떠오르며 독일과 소련 측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소련의 AD 1942년 군사우편(좌)과 2011년 모스크바의 전투 60주년 기념우표(우)의 모습


 




[참고]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
 [참고] 위키백과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참고] 위키백과 바르바로사 작전 
 [참고] 위키백과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참고] 위키백과 라세이니 전투
 [참고] Wikipedia Continuation War
 [참고] 위키백과 브로디 전투
 [참고] 위키백과 뮌헨 작전
 [참고] 위키백과 스몰렌스크 전투 (1941년) 
 [참고] 위키백과 우만 전투
 [참고] 위키백과 키예프 전투 (1941년)
 [참고] 위키백과 레닌그라드 포위전
 [참고] 위키백과 모스크바 공방전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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