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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왕검성은 점령되었다고 볼 수 없다. 조선후 5군은 황하 강변 일부지역에 불과.


왕검성은 점령되었다고 볼 수 없다.

조선후 5군은 황하 강변 일부지역에 불과.



『사기』, 『한서(전한서)』, 『후한서』 등에 따르면, 마치 한(漢) 무제 유철이 서기전 109~108년에 조선을 공격하여 서기전 108년에 조선 왕검성(王儉城)을 함락시키고, 낙랑을 비롯하여 진번·임둔·현도 등 4군을 조선에 설치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또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있어서 역사를 처음 배우는 어린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게 올바른 것인가?

올바른 역사를 인식하고 있어야 미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게 아닌가?

그간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역사를 바르게 정립할 것을 숱하게  요구하였지마는 바뀌는 내용이 없으니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사회에 밝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즉, 『사기』 조선열전에 따르면, '좌장군은 연(燕)과 대(代)의 군사를 인솔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왕검성(王儉城)의 서북쪽을 포위하였으며, 누선장군은 제(濟)의 군사를 이끌고 해(海)를 건너 왕검성(王儉城)의 남쪽에 진을 쳤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 왕검성(王儉城)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安陽)시 인근 주변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연(燕)과 대(代), 제(濟)의 조선 왕검성 공격경로를 [그림 1]의 화살표 방향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 연, 대, 제의 조선 왕검성 공격추정경로


그런데 교과서에는 조선 왕검성이 현재의 이북 평양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종황제께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대일항쟁기를 거치고 1945년에 일제의 압제를 극복해 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만들어논 '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식민사관'이라고 비웃음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림 1]에 표기되어 있는 '조선'의 위치를 보고 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황당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관심을 갖고 역사를 별도로 공부하지 않은 이상, 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만 갖고 판단하려고 하니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식민사관'에 찌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익숙한 왜곡된 역사가 왜곡된 역사인 줄도 모른 채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그런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왜곡된 역사에 함몰되어 '꾸며진 역사관'을 갖고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일제가 거액을 들여 '조선사'를 편집하기 전에 이미 역사는 왜곡되어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즉, 1512년에 『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재간행되었는데, 많은 부분이 뜯어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고려사』에 따르면, '김부식이 『삼국사』를 만들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의 책제목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예『삼국사』로 고쳐져 있다.


[그림 2] 현존하는 『삼국사기』의 모습


조선의 사관(史官)들이 『삼국사기』를 뜯어 고친 이유는 명(明)의 압박을 받기도 했겠지만, 옛 고려 땅을 명(明)에 빼았긴 사실을 백성들에게 감추고자 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현존하는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 평양성이 지금(고려)의 서경이고, 대동강이 패수임에 틀림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서 조선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양성이 '지금(고려)의 서경'이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인식한다면, 고구려 평양성은 현재의 이북 평양에 있었으며, 단군의 조선도 현재의 이북 평양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또 현재의 평양 대동강이 삼국시대 패수이자 단군조선 시대의 패수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계(薊)의 위치가 현재까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북경시로 알려져 있다.


[그림 3] 『대청광여도』 북경(춘추전국시대 연도, 고 유주, 요·금·원·명 도)


만약 춘추전국시대 연도(燕都, 계)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다면, 단군조선은 연(燕)의 동남쪽 또는 최소한 동쪽에 있었어야만 할 것이다.

또 춘추전국시대 제(齊)는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어야 하므로, 단군조선이 현재의 이북 평양에 있었다면, 제(齊)가 경기도나 충청도에 있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상기한 『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은 거의 80%가 이미 명(明) 대 초기(1421~1512년)에 변이된 위치에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후한서』군국지에 따르면, 요동·요서·현도·낙랑 등이 낙양으로부터각각 동북 3,300리·3,600리·4,000리·5,000리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와 『신당서』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가 당(唐) 경사(현 섬서성 서안시)에서 각각 5,000리, 5,10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당서』지리지에 따르면,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요동고성(고구려 요동성)에 두었는데, 당(唐) 경사(현 섬서성 서안시)에서 4,625리, 낙양에서 382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한 거리수치들은 역사적인 지명의 본래 위치를 동북쪽 또는 동쪽으로 변이시키기 위하여 명(明)의 사관들이 임의 삽입한 위사(僞史)들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사서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僞史)들을 솎아내고 원본(原本)에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에 근거하면, 춘추전국시대 연도(燕都, 계)의 본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요사』지리지 남경(南京)에 관한 기록이다.

즉, 중국 23사의 각 지리지들을 비교하면,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 계)부터 진·한(秦·漢) 대 유주, 진(晉) 대 연군성, 수(隋) 대 탁군, 당(唐) 대 유주, 요(遼) 남경, 금(金) 중도 등이 모두 같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지명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옛 시대의 지명을 기록하고 있기 대문이다. 

그런데 요(遼) 남경 주위에 있는 지명들의 방향과 거리에 관한 기록이 두 가지 있는데,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4] 요 남경(연경) 주변의 지명 배치도


상기한 두 그림에서 보면, '양향'이라는 공통된 지명이 있으므로 두 그림은 서로 같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즉, 두 그림은 주변지역 지명들을 서로 보충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기한 두 그림에 표기되어 있는 남경(연경, 유주), 양향, 탁주, 신성, 웅주, 안차, 영청, 창평, 로(어양), 곽음, 향하. 무청(옹로) 고안 등의 상호 거리와 방향을 고려하여 유사하게 형성된 지역을 찾아보면,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 주변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앞서 [그림 1]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림 5] 산서성 둔유현


비록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춘추전국시대 연도(燕都, 계)의 위치가 현재까지 마치 현 북경시였던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뿐만 아니라 금(金) 대의 중도까지 모두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 인근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거: 다음 카페 동북아역사연구소 '역사를 왜곡시키는 결정적인 위사들' 참조)

또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조선·연·제·부여 등의 위치가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6] 연의 주변 상황


즉, 연(燕)의 서쪽에 있던 진(晉)이 서기전 403년에 한·위·조(韓·魏·趙) 등 3개국으로 갈라졌으므로, [그림 6]는 서기전 403년 이후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또  연(燕)이 서기전 221년에 멸망했으므로 [그림 6]은 서기전 221년 이전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부여와 예·맥·조선·진번등은 서기전 221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었는데, 대(代)는 유주에 속하는 군으로서 연(燕)의 서북쪽에 있었으며, 제(齊)는 조선의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燕)·대(代)·제(齊) 등의 위치를 배치시킬 수 있는데,  연(燕)과 대(代)의 조선 공격방향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이루어졌으며,  제(齊)의 조선 공격방향은 남쪽에서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이루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기』 조선열전에 따르면, 좌장군과 누선장군이 왕검성을 여러차례 공격했는데도 불구하고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元封三年(B.C.108)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侯, 陰爲苴侯, 唊爲平州侯, 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陽侯."


즉, 윗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검성미하(王險城未下)'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검성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어서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降)과 로인의 아들 최(最)를 보내 백성들을 타일르고 우거를 죽이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거가 죽었는지, 또는 우거가 죽었기 때문에 왕검성이 함락된 것인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이어서 '이고수정조선위사군(以故遂定朝鮮, 爲四郡.)'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래서 조선을 정(定)하고 4군을 두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定)'이 무슨 뜻인가?

만약 왕검성이 함락되었다면, 정복(征服)했다는 의미로 '칠 정(征)'자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할 정(定)'은 조선의 무엇을 정했다는 것인가?

아쉬운데로 '조선을 나누어 4군이 되도록 정했다.'고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기』보다 약 180년 후(서기후 1세기 말)에 편찬된『한서』에 따르면, 『사기』와  마찬가지로  '정할 정(定)'자를 쓰고 있으나,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등 4군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기』보다 약 500년 뒤(432년)에 편찬된『후한서』에 따르면,  '정할 정(定)'자가 아니라 '멸망할 멸(滅)'를 썼으며,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등 4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사마천이 전쟁이 끝난 직후에 『사기』를 쓰면서 기록하지도 않은 지명들을 180~500년이 지나서 지명이 찾아졌다는 점과 군(郡)인지 부(部)인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명(明) 대의 사관들이 『사기』조선열전에 위사(僞史)를 임의 삽입한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어서 『사기』조선열전에는 항복한 조선인 5인을 획청후, 추저후, 평주후, 기후, 온양후로 임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만약 왕검성을 점령했다면, 조선의 도읍지에 해당하는 왕검성부터 제후를 임명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漢)의 장수 중에 후(侯)에 봉해진 자는 아무도 없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거나 죄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전쟁에 지고 돌아온 책임을 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인 5인을 후(侯)로 임명한 획청, 추저, 평주, 기, 온양 등은 조선의 변두리 지역으로서 [그림 1]에서 보면, 조선과 제(齊) 사이에 있는 황하 중류 북변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과 제(齊) 사이 국경지역에 해당하는 황하 중류 지역에 현재까지 온(溫)이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있다.


[그림 7] 온양, 평주, 기 등 추정지역

 

또 평주(平州)라는 지명은『한서』와 『후한서』지리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진서』 지리지에 처음 나온다. 즉, 평주는 기주(冀州) 지역에 속했는데, 주(周) 대에 유주 경계지역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평주는 한(漢) 대에 우북평군에 속했으며, 후한 말에 공손도가 평주목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漢) 대의 우북평군은 현재의 하남성 초작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근거: 다음카페 동북아역사연구소 논문 「갈석산(碣石山)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참조)

따라서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주의 위치를 현재의 하남성 초작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기(淇)현이 기(幾)현이 아닌지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획청(澅淸)과 추저(苴)의 위치를 추정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평주, 기, 온양 등 주변 인근 지역에 같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동북아역사연구소
글쓴이 : 광화세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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