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세상(龍華世上) 은 "물의나라" 를 말합니다.
우리 07.12.16. 16:55
우리 조상님은 물에서 깨달으며 살아야한다고,여러가지로 메세지를 주고 계시다.
바이칼호수 바위 암각화는,천천리와 반구대 암각화보다 세련된것으로 보여 시대가 늦은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선조는 암각화로 그 의사를 남겼다.
천전리 암각화(이하 모두 퍼온 사진들)
국보 제147호
울산광역시 울주구 두동면 천전리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암각화
시베리아를 제외한 극동지방에서는 한국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
탁본을 많이 해서 거무스름하다.
세계 최초 생식도인 반구대 암각화
이 암각화 그림을 영국 BBC 방송에서는 '한국이 고래잡이 세계 최초임을 증명하는 암각화'라 했고, 이 기사가 여러 신문에도 났지만 필자는 아래 필자 나름대로 중앙박물관에 가서 직접 찍고 해독해본 사진과 글에서 말해주듯 이것은 단순한 고래사냥 그림이 아니고 생식도이다. 먼저 타 카페에 있는 그림이 선명하니 그 사진부터 본다. ................................................................................................................................................
(반구대 암각화 - 경남 울산시 울주군 대곡리에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돌을 파서 만든 그림))
한국에서는 8천 년 전에 이미 목축과 고래잡이가 있었다
영국 BBC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사냥 기원' |
[경향신문 200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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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벌써 기원전 6,000년부터 고래 사냥을 시작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BBC 인터넷판이 21일 보도했다.
BBC는 반구대의 암각화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선사 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과 부구,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이상목씨와 공동으로 연구에 참여한 대니얼 로비노 박사는,
“암각화에는 돌고래 및 고래의 그림과 함께 배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면서 “이것은 고래잡이 광경”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인류학 잡지인 랑트로폴로지(L‘Anthropologie)에 실릴 예정이다.
〈이상연기자〉
반구대
위 그림 좌측 상단에 보면 물고기 잡는 그물과 목축하는 울타리가 있다.
이는 당시 이미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울타리를 만들어서 가축을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사진들
컴퓨터로 만든 그림
2004 울산 현대 유니폼의 반구대 암각화
필자가 중앙 박물관에 가서 직접 찍고 해독해 본 사진과 글
아래는 박물관에는 없는 사진이다.
박물관에는 이런 탁본한 석각본만 있다고 했다. 이 사진 역시 캠코더 캡쳐한 사진이니 사진이 犬판이지만 그런대로 올린다.
여기서 선악과 전 아담의 거시기는 이것이다.
그럼 엎드려 있는 이브는?
우선 박물관 측의 설명서를 보자
그렇다면 선조들은 ?트겐 기법인지 뭔지랄 기법인지 추상적으로 그려 고래 뱃속에 아기 고래가 있는 것까지 그린 추상화이다. 그렇다면 아담 뒤에 엎드려 있는 거북들은 바로 이브를 그렇게 그렸다고 볼 수도 있다.
뭐라? 犬 눈에는 거시기만 보인다고 할배 눈에는 꼭 그것이 엎드린 이브냐고? 아래 그림을 보라. 여기서 말 발굽 같은 것은 울타리 안이고 거기서 아담과 이브가 노골적으로 거시기 하는 그림이다.
아래 그림은 이브가 노골적으로 가랭이를 벌이고 앉아 있는 그림인디 거시기 위치가 좀 위로 뚫렸네 히히
또 아래 그림은 고래를 의인화시켜 거시기 하는 그림이고
그외 여기 석각본 그림은 모두 동물들의 노골적 거시기 행위뿐이고, 또 특이한 것 하나는 사람이 죽므면 풍장을 지내는데 그것은 그옆 동물들의 행위로 봐서 환생을 비는 것이었다.
이 암각화는 박물관 측의 설명대로 고기잡이와 사냥의 풍요를 비는 그림이라는 것은 犬뿔도 모르는 소리고, 순 생식행위만을 그렸으니 생식만을 최우선으로 알던 선조들의 생식기원도라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말과 글자의 생성 과정과 요인
원시인은 애초 아기들 표현이나 짐승들 처럼 본능적 표현으로 살아 왔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런것도 다 말이라면 금방 태어난 아기도 말을 하고 짐승도 말을 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잘 먹고 거시기 잘 해서 새끼를 낳고 삽니다. . 이것을 구지 말 이라 한다면 선악과 전 말이며 바벨탑을 쌓기전 말입니다. 이 본능적 표현은 통역이 필요 없습니다 즉 미국 숫개를 한국 암개에게 데려다가 놓으면 그들은 통역이 없이도 먹을것 다 먹고 거시기할것 다 해서 새끼를 낳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불어나고 지능이 발달하니 동물적 표현가지고는 다양한 의사를 표현 할수가 없어 본능적 표현 이외에 더 정확한 표현을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여기서 그 지능이란것은 선악과이고 그 선악과의 결과로 말을 만든것이 바로 바벨탑 입니다. 그러나 창조신을 넘보려고 쌓던 바벨탑은 결국 무너지고 그 탑을 쌓던 인간들은 각지로 헤터져 각자 말을 만들어 갑니다.
그걸 할배가 어떻게 아느냐구요? 할배가 그때 보았으니까요. ㅎㅎ
논리란 진리이고 진리는 시공을 초월 하니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 하느님도 그 말 이라는것을 만들지 않을수가 없어 말을 만듭니다.
여기서 하니님은 환숫 아버님 환인 한분이 아닙니다.그 위대서 부터 북방계 몽골리안을 지도하던 지도자는 다 하느님 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들은 다른 종족과는 달리 이 말을 이 세상이 다해도 변할수도 없으며 또 이 세상 만사를 총괄살 수 있는 철학을 가지고 말을 만듭니다.
그것은 바로 天地人을 상징하는 ㅇ ㅁ △ 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는 발음 할 수 없으니 이것을 근거로 벌어지는 대로 모음을 붙인것이 바로 아래아점 아마사 입니다. 그러니까 아래아점 아마사는 어머서 도 되고 오모소, 으므스의 중간음이 됩니다. 이 중간음을 세종은 아래아점으로 표시한것 입니다.
그러나 세종보다 더 잘난 학자들이 이 글자를 없애고 ㅏ ㅓ ㅓ ㅜㅡ 를 분류해 놓자 이 아래아점 발음은 누가 말 해도 들리지도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지금 발음도 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일본인이 택시 발음이 되지 않아 다꾸시라 하고 김치 발음이 되지 않아 기무치라 하는것은 일본인의 혀가 반도막이라 그런것이 아니라 글자가 그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글자는 어제서 부터 만들어 졌는가?
글자란 바로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다른것이 있다면 말은 금방 날라가는데 글자는 그 말을 보관하는 녹음기 같은 역활을 할 뿐입니다.
그럼 글자가 생기기 전 원시 조상은 어떻게 그 뜻을 보관하고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몇만년 전 부터 전해지는 벽화 입니다.
애초 하느님 시절에은 그 의사를 남기려면 그림을 그렸지 글자는 없었음으로 하는님께서 환숫께 천부경을 전해준 천부경도 글자가 아니라 말 이었습니다, 즉 口傳之書 였습니다.
환숫은 그 귀중한 천부경 하나 둘 셋...열을 잊지 않르려고 그 무리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외우다 보니 천년 후에 우리 숫자가 되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말 이란 언젠가 변질이나 윤색되기 때문에 그 말을 보관하는 법을 신하 신지에게 명했고 그는 사냥을 갔다가 사슴발자국을 보고 만든것이 바로 16자의 신지문자인데 이는 천제를 지낼때 쓰는 신의 문자였음으로 하나 둘 셋 ...열과 같은 16 자이어야 하지 한자라도 더되거나 덜 되도 않되는줄 알았습니다. 즉 평양 법수교 아리 기천문이나 신께 감사드리는 성 예찬문이 모두 16자 입니다.
즉 그렇게 순박한 사람들이 만든것이 글자입니다.
이 신의 문자는 일반은 못쓰기 때문에 신지는 다시 일반이 쓰는 문자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원시 가림토 신지신획(神誌神劃)입니다.
그런데 신지가 글자를 만들때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말의 보관도 이와같이 하면 된다는 아이디어는 얻었지만 신지녹도문자(神誌鹿圖文字)는 사슴과는 아무 상관없는 새 발자국 같은 문자라 중국인들은 창힐의 똑같은 신지녹도문자를 조적서(鳥跡書)라 합니다.
따라서 신지가 글자를 만들때 참고한것은 사슴이 아니라 바로 옛 부터 전해지던 벽화등 그림 이었고 이 그림을 축약한것이 바로 금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지는 금문을 참고하여 글자를 만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림이 글자가 되는 과정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서 좋은 질문이라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독자들도 궁금해 할 것이니 좋은 질문이라는 것보다 질문 형식이 일단 할배 글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할배 주장이 틀렸더라도 일단 묻은 형식이기 때문에 할배를 무시하지 않아 좋은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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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님의 질문
선생님께서 말과 글자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하시는 것에 대하여 공감하고 있으나, 대문의 글 中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어 혼란스럽습니다.
* 대문글 中에
"우리 조상은 글자가 만들어지기 전 그림을 그려 의사 전달을 했고, 이 그림이 간편하게 그려진 것이 바로 금문인데...."
"이는 하느님이 환숫께 천부경을 내려주실 때는 아직 글자가 없었으므로 말로 전해주셨다."
"환숫은 그의 신하 신지를 시켜 그 말을 보관하는 방법을 명했고....중략....드디어 인류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
그 하느님의 천부경을 적었고 그 글자가 바로 16자로 된 <신지녹도 전자 천부경>이라는 말이 <환단고기>나 <규원사화>등에 적혀 있다."
위 글에서 처럼 의문을 갖게 하는 귀절들이 있어서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졌으나 서로 의사 전달할만큼 통일된 글자는 없었다는 것인지,글자가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만의 글자는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인지가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아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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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답글
개 소리 들어보셨어요? ㅎㅎ.
님의 질문이 개 소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 개 소리가 말입니까? 또 아기 울음 소리가 말입니까? 그러나 어떤 동물이나 말이 없어도 본능적 표현으로 그들의 의사를 표시하여 잘 먹고 거시기 잘 하며 생식을 잘 하고 있으니 말이란 거짓말을 하기 위하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 했습니다.
글자 또한 이와 같습니다.글자가 생기기 전 원시 조상들은 사물의 그림을 그려 의사 전달을 했어도 거시기 잘 하고 잘 살았습니다.ㅎㅎ
말도 없고 글자도 없던 원시 조상들이 의사를 나타내던 흔적. 여기서 글자는 없었을망정 말도 없었다는 증거는 아래 우리 말은 글자와 함께 만들어진 증거를 보시면 압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이 그림을 고고학자들은 단순한 고래잡이라 하지만 고래 뱃속에 아기 고래가 추상적으로그려져 있으며 그 고래가 새끼를 밴것은 맨위 남근을 내 놓은 사내가 그 옆 계집을 형상화한 엎드린 계집에게 수정을 해서 새끼가 배 진다는 것이고 이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말굽형 울타리 안의 남녀가 성행위를 하고 있음으로 이 그림은 단순한 고래잡이 그림이 아니라 생식도 이다.
이상 그림을 글자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조상들은 일일이 그림을 그려 의사 전달을 하기가 복잡하니 그 그림을 압축한 것이 바로 금문입이다.
다음 그림은 아주 쉬운 것인데, 앞으로 신지녹도 문자를 해독하는 입문서와 같다.
우선 이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 상상해보자.
위 그림은 示 자 같은 물건 앞에서 입을 벌린 어느 놈이 무릎을 꿇고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열쇠는 示가 어떤 물건이냐 하는 것이다. 그림을 열 개만 그리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물건이 그려진다.
이상은 일단 금문 (金文)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으나 엿장사가 文 자를 붙였다고 해서 아직 글자는 아니다. 단순한 벽화 같은 그림을 압축한 것이다. 즉, 말 배우는 아기가 '배 고프다, 젖 달라, 똥 마렵다. 밖에 나가 놀고 싶다'라는 표현을 모두다 "엄마" 한 마디로 했다고 해서 그것을 말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것 같이 이 금문도 아직 글자는 아니다.
아래 금문들도 이와 같다.
신지녹도 전자 '一'로 본 증거
[圖釋古漢字 能國榮著 濟魯書社刊] 인용
여기서 우측에서 좌로 4번째 그림이 壹자의 금문이며, 나중 숫자가 생겼을 때 一과 같은데 이 그림은 사람이 네 활개를 펴고 있는 아래 조개(여음)이 그려져 있고, 두 다리까지 있으니 현재 壹 자의 뜻은 '하나'와는 달리 '여음이야말로 만물을 낳게 하는 첫째'라는 뜻인데, 이 역시 그림이지 글자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쓰는 '하나'는 숫자가 아니고 바로 하늘의 주인 '해'였고, 중국인들은 그 하늘 가운데 해 그림으로 日 자를 만들었다.
이외 아래 금문들도 아직 그림이지 글자는 아니다.
[能國榮著 濟魯書社刊] 인용
위 그림에서 착하다는 善 자는 양의 머리를 그려놓았다.
즉, 양이란 동물은 호랑이 등 다른 동물과 달리 착하기만 하니 아마 착한 동물을 대표적으로 그려놓은 모양이다.
또 다음 진짜 양을 보자.
[圖釋古漢字 能國榮著 濟魯書社刊] 인용
金文 一, 二, 三... 十의 뜻으로 본 증거우리 선조들이 이 신지녹도전자, 또는 초기 가림토와 혼용해서 쓰던 금문, 갑골문의 貳 자 제자 원리를 보자. 우리가 지금 쉽게 생각하는 작대기 두 개인 二 자는 원래 중국인들이 숫자를 쉽게 쓰기 위해 수천 년 후에 만든 글자이고, 원래 '두른다'는 뜻이 있는 둘은 貳 자였다. 우선 무엇인가 얻는다는 '얻을 득(得)' 자의 제자 원리부터 보자.
[圖釋古漢字 能國榮著 濟魯書社刊] 인용
여기서 金文 1, 2, 3 ,4, 5 번은 모두 조개를 잡고있는 그림이다.
그럼 '조개'란 무엇인가? 조개가 격음이 되면 '쪼개'이고, '쪽'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낭자, 성인 여음'이며, 처녀가 시집을 가면 그 표시로 쪽을 진다. 따라서 위 무엇을 '얻는다'는 得 자는 바로 '여음을 얻는다'는 말이다.
위 조개 그림을 금문에서는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너무도 많으니 위 大 자인 사람 다리 사이 아래 붙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여음이다.
따라서 우리 화폐의 역사에서 인류 최초의 화폐는 조개였다는 말은 크게 잘못된 말이니, 최초의 돈은 여음이었다고 화폐의 역사도 바꿔야 할 것이다.
위 조개 그림을 금문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너무도 많으니 위 大 자인 사람 다리 사이 아래 붙은 조개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여음이다.
다음은 우리 이름을 한자의 획에 맞추어 음양오행설로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코메디 인가를 증거하기위해 올렸던 글에서 인용한다.
圖釋古漢字 能國榮著 濟魯書社刊 인용
甲金篆隸大字典 四川辭書出版社 인용
지금 洙, 滋 둥 이름을 지을 때 삼수변을 3획으로 셀 것인가? 현재 작명가들은 삼수변은 원래 水 자에서 나왔으니 4획으로 세지만 원래의 글자로 수를 센다면 5~6 획이 된다.
圖釋古漢字 能國榮著 濟魯書社刊 인용
東 자 역시 현재 작명가는 8획으로 세지만 원래 금문 그림에는 그림마다 다르고, 현재 한자의 종주국 중국의 간자는 5획이다. 여기서 작명가는 어느 것을 기준 할 것인가?
따라서 작명가가 글자 획수를 세어 음양오행설로 이름을 짓는것이 얼마나 코미디 인지를 증거 한다.
그러나 인류최초의 글자라는 신지녹도 전하는 금문을 참고는 하였지만 완전 그림 형태는 아니고 글자꼴이 박혀 있다. 즉, 금문 그림은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림이지만 일단 신지녹도전자는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글자가 된 것이고, 이런 연유로 지나인들은 금문을 가져다가 한자를 만든 것이다.
초기 가림다 역시 글자이지 그림은 아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말도 만들어진다.
대(山東省 桓臺) 시에서 발굴된 가림토 해독
길림시 송호상 교수의 증언: '동이민족 논설 중 일부'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 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 6m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 문자는 C14 측정 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다.'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근거
사람 천부인은 △으로 만든 ㅅ의 뜻
△ 과 ㅅ은 그 모양이 서 있고, 또 솟는 모양이며, 그 끝이 뾰족하다.
여기서 ㅅ, ㅈ, ㅊ이 나왔다고 했다.
? 서거나 솟는 모양으로 된 말
* 서다, 세우다 (立)
* 사람
* 사내(丁) - 사내의 원 의미는 '장정의 남근'을 말하므로 서 있는 것이다.
* 솟다
* 숫 - 남근(男根)
* 솟대(山象雄常) - 생명의 핵심인 남근 상을 상징하는 서낭나무의 원조로 솟터 (蘇塗의 신단수(神壇樹)
* 소도(蘇塗) - 솟대가 모셔진 성소 솟터
* 서울 - 섯벌(徐羅伐) > 서벌 > 서블 > 서울
* 새벌(新羅) - 새로 선 벌 (섯벌 > 서라벌)
* 스승, 스님 - 학문 등이 서 있는 사람(이하 생략)
한편 자음은 상형문자의 일종이었으므로 그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 사람 - 두 다리 특징
* 삿, 사타구니
* 손 - 손가락 사이
*서까래 - ㅅ처럼 대들보에 걸친 것
* 쑥 - 그 잎 모양
* 삼(麻, 蔘) - 그 잎 모양
(이하 생략)
한편 △ 과 ㅅ은 그 끝이 뾰족하고 뾰족한 것은 가늘고 좁다.
* 솔 - 소나무
* 솔 - 부추
* 솔기 ? 옷솔기 등 가늘다.
* (오)솔길 - 좁고 가는 길
(이하 생략)
위 ㅅ으로 된 말은 세종이 만든 말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쓰려면 반드시 ㅅ을 써야 한다. 이 역시 위와 같이 세종 전에 이미 ㅅ을 써야만 말할 수 있는 ㅅ의 어군이 있었다는 증거이고, 이는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는 ㄱ, ㄴ, ㄷ... ㅎ 모두 그렇다. 그렇다면 옛 글자는 '자연과 같은 모양'이고, 소리도 '자연과 같은 소리'이며, 그래서 훈민정음도 가림토와 같이 소리글이 된다. 또 이는 필자가 '우리 한글의 ㄱ, ㄴ, ㄷ...ㅎ 속에는 뜻이 들어 있는 뜻글인 동시 그 어군에만 통하던 소리글'이라 주장했던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위에도 말했듯이, 이 가림토는 금문, 그리고 지금 한자도 그렇지만 당시의 글자는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마다 신지녹도문이나 금문을 혼용하는 등 쓰는 사람마다 달랐으니 그냥 그림글자인 한문, 즉 금문보다 더 이해하기가 헛갈렸을 것이고, 이는 가림토가 없어진 이유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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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 한글이 모태는 ㅇㅁ△으로 자음이 만들어졌고 그 음은 ㅏ,ㅓ, ㅗ, ㅜ, ㅡ, ㅣ 중간음인 아래 아 점이니 이는 지방 따라,발음습관 따라 아무 것을 써도 대다수 같은 말이 되지만, 만약 천부인으로 만든 자음을 바꿨다가는 하늘이 땅이 되는 것만큼이나 뜻이 달라진다.
이상 님의 질문에 답이 되겠습니까?
울산 반구대 암각화
이 그림을 고고학자들은 단순한 고래잡이라 하지만 고래 뱃속에 아기 고래가 추상적으로그려져 있으며 그 고래가 새끼를 밴것은 맨위 남근을 내 놓은 사내가 그 옆 계집을 형상화한 엎드린 계집에게 수정을 해서 새끼가 배 진다는 것이고 이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말굽형 울타리 안의 남녀가 성행위를 하고 있음으로 이 그림은 단순한 고래잡이 그림이 아니라 생식도 이다.<== 네, 맞는 말씀이십니다.예전에 반구대앞에 가서도 직접 그림을 감상할수 없고,반구대앞에 안내판 사진만 한장 찍고,투덜대고 돌아온 기억이 있는데,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접하게되어 눈을 확 뜨게 되니 우선 감사드립니다.
천천리,반구대 암각화는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천천리쪽이 이해할수 없는 난해한 그림이라 먼저 새겨진것 같고,좀 발전되어 이해하기 편하게 새겨진 것이 반구대 암각화로 보여집니다.아주 오랜 선사시대 우리 선조님중에 현명하신분이 계셨는데,글자도 없던 시절,자신이 아는 지식은 후세에 전달해야 겠는데,그당시 무식한 동포들이 한심하니,후세에 전달하고 말해 줘야 하는데 그 방법이 마땅찮으니,물가 절벽 바위에다 그림으로 형상을 그리고 새겨,오랜 세월 그뜻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울산 반구대
(반구대 암각화 - 경남 울산시 울주군 대곡리에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돌을 파서 만든 그림))
한국에서는 8천 년 전에 이미 목축과 고래잡이가 있었다.영국 BBC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사냥 기원' |
[경향신문 200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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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벌써 기원전 6,000년부터 고래 사냥을 시작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BBC 인터넷판이 21일 보도했다.
BBC는 반구대의 암각화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선사 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과 부구,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이상목씨와 공동으로 연구에 참여한 대니얼 로비노 박사는,
“암각화에는 돌고래 및 고래의 그림과 함께 배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면서 “이것은 고래잡이 광경”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인류학 잡지인 랑트로폴로지(L‘Anthropologie)에 실릴 예정이다.<== 외국인이 말한것을 따라 “이것을 고래잡이 광경”으로 이해하고 있으나,한민족인 핏줄로 이어져 내려오는 정신의 진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니 바로 잡아야 한다.
선사시대 절벽에 많은 그림을 새길려며는 엄청 고생이 많았을터인데 ,생고생하면서 새긴것이 한낮 목축과 고래잡이 한 사실을 그려,그림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암각화를 새겼을까요?
암각화는 선지식(善知識)인이 어떤 내용을 사실적인 표현으로,무엇인가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가 있어,생고생하면서 새기고 남긴것입니다.
암각화의 표현을 관찰하면,고래 뱃속에 아기 고래가 추상적으로그려져 있으며,그 고래가 새끼를 밴것은 맨위 남근을 내 놓은 사내가 그 옆 계집을 형상화한 엎드린 계집에게 수정을 해서 새끼가배 진다는 것이고,여러 동물의 새끼와 내장의 표현이 있고,말굽형 울타리 안의 남녀가 성행위를 하고 있다,그외 여기 석각본 그림은 모두 동물들의 노골적 거시기 행위뿐이고, 또 특이한 것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풍장을 지내는데 그것은 그옆 동물들의 행위로 봐서 환생을 비는 것이었다.
물가 바위에 이러한것을 새긴것은 사람과 동물은,물고기 처럼 모두 물에서 태어나고 죽는다는것을 말하고 있는것으로,
물속에 죽고,사는문제가 있다는것을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사시대 기원전 8000여년 전(前)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이 계셨다는것은 대단히 놀랄일입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인류 최초에 문화 발상지 입니다!"
우리의 선조님은 물과 관련하여,전하려는 메세지는 홍산과도 통한다.
[스크랩][코리안루트를 찾아서](12)훙산 곰의 정체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211701321&code=210000 단군신화까지 훔쳐가려는 중국
지난 7월30일 랴오닝성 박물관. 이른바 ‘랴오허(遼河) 문명’ 특별전을 지켜보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기자를 붙든다. 뉴허량(牛河梁) 16지점 3호 무덤에서 확인된
짐승머리형 옥기를 가리킨 것이다.
짐승머리 형태로 3개의 구멍이 뚫린 희한한 모양이다.
![]() 뉴허량 16지점에서 확인된 곰형 옥기. 곰 두마리가 양쪽 끝에 원조(圓雕) 기법으로 조각됐다. 훙산문화 옥기예술의 정수라는 평이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이기자가 보기엔 무슨 동물 같아요?”
“쌍웅수삼공기(雙熊首三孔器)라고 했으니 응당 두마리의 곰과 3개의 구멍이 뚫린 옥기라는 뜻이겠죠.”
유물 설명에 나온 대로 대답할 수밖에. 그런데 최근들어 해석이 바뀐거지. 돼지에서 곰으로….”
곰의 정체는? ![]() 뉴허량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곰 발 조소상. “이뿐이 아니라, 발해문명의 영역에서 곰 관련 옥기와 곰뼈가 잇달아 쏟아졌어요. 그러니 중국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원래 곰은 중국학계의 관심 밖이었다. ‘용의 자손’이라는 믿음 때문에 용(하늘과 물을 상징)이 추앙되었고, 또한 농경생활과 관계가 깊은 돼지가 의미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된 옥룡들의 원형은 돼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그럴듯한 학설이었다. 사실 옥으로 만든 용 조각품을 본다면 그 형태를 대략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C자형과 결형(한쪽이 트인 고리모양의 패옥)이다.
C자형 가운데는 네이멍구 싼싱타라(三星他拉)에서 출토된 크기 26㎝ 짜리 옥룡이
가장 유명하다.
이 C자형 옥룡이 정말 용이 맞는지 그조차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오고,
머리와 등 뒤의 장식이 돼지가 아니라 사슴뿔이라는 설도 난무하는 등 복잡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 C자형 옥룡의 원형은 돼지 혹은 사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결형 옥’은 그 원형이 곰(熊)이라는 설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 여러분이라면 간파할 수 있으리라. 즉 이 결형 옥이 훙산문화의
전신인 차하이(사해·査海)-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전)에서 확인된 옥결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최근 한반도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도 차하이-싱룽와와 같은 시대(BC 6000년전)
의 옥결이 출토되었음을….
여하튼 중국학계는 뉴허량에서 나온 결형 옥의 원형을 예전에는 돼지로 보았지만, 요즘엔 곰으로 보고 있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잇달아 출토된 곰뼈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즉, 뉴허량 2지점 4호총 적석총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곰아래턱 뼈가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뉴허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으로 만든 동물 가운데는
두 개체의 짐승류가 확인됐다. 발굴단은 처음엔 이 동물이 으레 돼지이겠거니 했다.
출토 사실을 보도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주둥이는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이 있고~ 상하 턱 사이에는 입술 밖으로 긴 이가 노출돼있고, 앞니 역시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봤다면 돼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마리의 동물은 비교적 긴 아래턱과 길면서 구부러진 이빨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곰의 특성에 가까웠다.”(궈다순의 회고)
특히나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은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네 발톱이 이렇게 노출된 동물은 곰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결국 뉴허량 여신묘에서 확인된 두 마리 짐승은 모두 곰이었던 것이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확인된 쌍웅수삼공기와 곰뼈, 그리고 바로 곁 여신묘에서
확인된 진흙으로 만든 곰 형상….
곰을 숭배한 훙산인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고 하니 훙산인들이 곰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네이멍구 우한치(敖漢旗) 바이스랑 잉쯔(白斯郞 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
(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애초엔 ‘개머리 장식’이라고 보고되었지만, 넓은 이마와 뾰족한 주둥이, 짧은 두 귀, 그리고 머리에 비해 굉장히 넓은 목 부분은 전형적인 곰의 머리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일컬어진다.
“이렇듯 옥으로 조각한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 (巴林右旗)와 바린쭤치(巴林左旗), 허베이성(河北省)의 웨이창(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이 옥으로 만든 웅룡은 후대에까지 폭넓게 퍼졌는데, 허베이성 양위안(陽原)현 장자량
이 나온다. 또한 량저우(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훙산인의 후예가 분명한 상나라에도 훙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인쉬(殷墟)에서도 훙산문화와 유사한 결형 옥이 확인된다는
게 중국학계의 해석이다. 이처럼 뉴허량 등지에서 확인되는 심상치 않은 곰의 흔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궈다순의 해석을 보자.
“훙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훙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그는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보고, “훙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학계는 리스의 주장에 주목하여 훙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켰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발해연안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는 어쩔 수 없었어요. 견강부회할 수밖에….”(이교수)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AD 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관련 기록은 사기 오제본기에 나왔다.
“황제가 염제와의 싸움에 곰(熊), 큰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 ·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염제와 싸웠다.”
중국학자들은 황제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고 있는 족속들을 이끌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북방민족과 수렵민족의 색채가 짙다”
(궈다순)고까지 표현한다.
더 나아가 저명한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황제시대의 활동중심은 훙산문화의
시공과 상응한다”고까지 했다. 이 말은 ‘황제가 훙산인의 왕이었다’는 소리다.
단군신화의 원형
하지만 억지춘향도 유분수지. 곰 숭배는 중국보다는 동북아시아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다.
그 중의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중국 역사서에서 황제와 곰의 기록은 빈약하기 이를 때 없지만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를 보라.
![]() 동이의 본향 차하이에서 확인된 옥결.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모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범과 곰이 한마리씩 같이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는 이걸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라 했다.
곰과 범은 삼칠일간(21일간) 조심했으나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지만,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다.
~(사람이 된) 웅녀(熊女)가~ 단수(壇樹) 밑에서 임신을 빌었더니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혼인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 왕검이다.”
![]() 차하이와 싱룽와, 그리고 한반도 고성 문암리에서 확인된 옥결이 훙산시대엔 이렇게 곰형 옥으로 발전했다.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의 말처럼 “몇 자 안되는 단편의 기록(중국측)과,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제국의 흥망성쇠가 담겨있는 단군신화”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황제=곰 숭배=훙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중국학계의 몸부림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기자의 상상력은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면 인근 적석총에서 곰뼈와 옥웅·옥룡이 나왔고, 진흙으로 만든 곰형상이 확인된 뉴허량의 여신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여신묘에서 확인된 여신상은 과연 누구일까.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熊女)의 원형은 아닐까.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3)훙산인의 어머니 입력 : 2007-12-28 17:25:02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281725021&code=210000 “이제 우리 여신(女神)님 보러 가야지.”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농을 건다. 여신묘(뉴허량 제1지점)를 ‘친견’할 시간이다. 유적 바로 곁을 지나는 베이징~차오양 간 공도(公道)를 무단횡단해서 북쪽 산길로 향했다. 여신묘로 향하는 길은 몸단장이 한창이다. 길가엔 도로용 석재들이 쌓여 있고, 인부들이 그 석재를 깔아 길을 만들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 위해
“중국 정부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사전작업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중국 정부가 발해문명의 꽃을 피운 훙산문화의 본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 20분 정도 산길을 걸으니 저편 숲 속에 허름한 건물 두 채가 보인다.
건물 한 채 한쪽에는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열심히 숫돌을 갈면서 이방인의 방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신묘를 보호하는 다른 가건물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다른 방문객 같으면 콧방귀도 안뀔 관리인이지만 ‘얼굴이 명함’인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뭐라 한 마디하자 군말 없이 문을 따준다.
철커덕!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자마자 기자는 어두컴컴한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훌쩍 뛰어넘은 듯했다. 5000여년 전 여신의 세계로….
#동방의 비너스
“왜, 중국에는 선사시대 인물조각상이 없을까.”
![]() 동방의 여신상이 출토된 뉴허량 제1지점 여신묘. 여신상과 함께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와 곰(熊)뼈 등이 출토되어 우리 민족과 강한 친연성을 감지할 수 있다. 뉴허량/김문석기자 3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학계가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의문점이었다. 서양에서는 찬란한 인물 조각 예술이 꽃을 피웠는데, 왜 중국에서는 비너스와 같은 조각품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국의 인체 조각 예술은 모두 외래 요소만을 담은 것일까.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랴오닝성 카줘(喀左)현 둥산쭈이(동산취∇山嘴)에서 드디어 인체조각상 조각편을 발견한 것이다. 유적의 남쪽은 원형, 북쪽은 방형이었으며 양날개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함께 확인된 유물들은 지(之)자형 빗살무늬토기 채도통형관(밑이 없는 토기) 과 삼족소배(三足小杯·세발 달린 작은 잔) 등이었다. 이 유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용기가 아니었다. 두 점의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은 머리부분과 왼쪽 어깨가 이미 없어진 채 발견됐지만, 다리는 남아있었고, 몸의 형태는 확실했다. 하나는 잔존 높이가 7.9㎝였고 몸은 긴 편이었으며, 나머지 한 점은 잔존 높이가 5.8㎝였고 좀 뚱뚱했다.
등의 남아 있는 높이는 18㎝, 두께는 22㎝였다. 남은 조각들을 끼워맞추니 실제 사람의 3분의 1 정도 되었다. 잉부상은 나체였으며, 비록 목 부분은 없어졌지만 당대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웅변해주었다. 소조 수법이라든지 손과 발 등 세부의 처리가 간단하지만 형체의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고 인체 비례가 완벽하다.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추상화했는데, 둥산쭈이 출토 잉부(孕婦)상은 사실성이 강한 작품입니다.” (이형구 교수) 학자들은 “중국의 비너스(維納斯)”라고 치켜세웠다.
중국학계는 “훙산시대는 문화교류가 빈번했고, 사회가 격렬한 변혁기였다”면서 “잉부상은 모계사회 출현의 단적인 예이며, 5000년 전 원시문명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둥산쭈이 유적연대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지금부터 5485±110년이었다. 1년3개월 뒤인 1984년 10월31일 오전. 둥산쭈이에서 멀지 않은 뉴허량 제1지점에서 5500~5000년 전 여신의 자태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당시 발굴단의 일원이었던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보듯 당시의 벅찬 감격을 풀어헤친다. 모두 발굴이 이어질수록 ‘뭔가 큰 것이 걸리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에 휩싸여 입을 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한덩어리의 진흙덩어리가 떨어졌는데, 거기서 사람 머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흙을 살살 지워보니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이마와 눈이 노출되었다.”
일순 사람들이 쏟아져오고, 촬영기사가 미친 듯 그 발굴 현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5000년 이상 긴 잠에 빠져 있던 여신이 마침내 부끄러운 듯 기지개를 켠 것이다. 머리상의 잔존 크기는 높이 22.5㎝, 폭(귀에서 귀) 23.5㎝, 미간의 넓이 3㎝, 코 길이 4.5㎝, 귀의 길이 7.5㎝, 입 4.5㎝ 였다. 조각기법 또한 빼어났다. 가장 어렵다는 원조(圓雕)기법을 사용했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장인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둘째, 재료는 깨끗하고 치밀하며 점성이 크고 붉은 진흙을 사용했으며, 셋째 조형단계는 처음엔 거친 흙을 골조 위에 붙인 뒤 광택을 냈다. 그림을 그리고 상감하는 작업은 돌출 부위를 강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눈을 청록색 보석으로 박아놓았다는 게 특이했다. 문제는 여신의 인종을 확정하는 것. 학계는 여러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몽골 인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콧잔등은 낮고 짧고, 콧날과 콧날개는 원두형(圓頭型)이고…. 전형적인 몽골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이형구 교수) 고대 몽골 인종이라 함은 지금의 몽골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넓은 의미의 ‘동양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인종학상으로 몽골 인종(Mongoloid)란 말은 마르코폴로가 1271~1295년 사이 원나라에서 체류하고 돌아간 뒤 구술한 ‘동방견문록’에서 처음 나왔다. 마르코폴로는 그때 황인종, 즉 동양의 모든 인종을 몽골 인종이라 했다. 지금의 몽골인을 콕 찍어 지칭한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여신의 머리상이 발견되기 전까지도 67점의 진흙조각편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은 당시 대략 3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먼저 주실의 중앙에서 확인된 코의 잔해와 큰 귀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여신의 크기는 사람의 3배에 달했다. 또한 서측실의 손목과 다리를 분석한 결과 사람의 2배 크기였으며, 주실에서 발견된 어깨, 유방, 왼쪽 손등을 검토하니 등신대의 형태였다. 조립된 것이다. 결국 이 여신묘에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라는 최소한 세 사람의 여신을 모셨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최소한’ 3명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다. 흩어진 잔해로 봐서는 더 많은 여신들을 모셨을 수 있다. 이것은 여신도 최소한 3개 등급, 아니 그 이상으로도 나눌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머지)은 그 주신을 모시는 군신(群神)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유적의 총 규모는 총 4만㎡에 이른다. 특히 여신묘 주변에 있는 저장용 구덩이에서는 지(之)자문 빗살무늬토기 통형관(밑 없는 토기)과 소구관(小口罐·입이 작은 토기), 주발 등 다양한 토기와 사슴·양뼈 등 많은 동물뼈가 나왔다. 또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100점 이상의 통형관이 쏟아졌다. 이뿐이 아니다.
여신묘의 벽체 파편에는 회(回)자 무늬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대형 향로뚜껑을 비롯한 각종 제사용기들도 심상치 않은 여신묘의 위상을 전해준다. 과연 5000년 이상 잠자던 여신의 부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근에 집중된 적석총과 제단, 그리고 이곳 여신묘가 주는 함축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4)훙산인의 성지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41721411&code=210000 우리의 孝와 닮은 꼴…훙산인의 여신 숭배 훙산인의 신전이자 성지’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는 아예 훙산인을 중국인의 ‘공동’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훙산인은 동이족 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중국 학계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니 뉴허량은 ‘동이족의 신전이자 성지’ 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도 비상한 곳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도 여신이…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여신상 같은 소조상은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함북 청진시 농포동과 웅기군 서포항 유적에서도 소조인물상이 나왔다.
“특히 1956년 출토된 농포동 인물상은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는 다시 퍼지게 만드는 등 ‘여신’의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둥산쭈이(東山嘴)의 임산부상을 연상시킵니다.
츠펑 시수이취안(西水泉)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과 일맥상통한다.
옌볜 자치주 샤오잉쯔춘(小營子村)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인물상도 치켜올라간 눈매와 광대뼈
등 뉴허량 여신상과 비교할 수 있겠다.
과연 5500~5000년 전 여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숭배의 대상은? 콕 집어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뉴허량의 여신 조각상을 보자.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것은 인간을 신화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격화한 신(神)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계는 이 사실적인 인물 조상이 조상 숭배의 우상이라고 해석했다. 또 하나 뉴허량 여신묘에서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 등 ‘최소한’ 세 명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됐다. 여신의 지위가 최소한 3등급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주신(主神)이며, 이 주신을 다른 여신들이 호위하고 있는 형태라고 봐요. 이것은 조상 숭배의 대상도 굉장히 고차원적 인 단계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하지만 조상 숭배만이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뉴허량 유적군은 이른바 제단·신전·무덤 등 이른바 단(壇)·묘(廟)·총(塚) 등이 3위 일체로 구성됐다. 제단과 무덤이 한꺼번에 조성된 적석총(제2지점)에서뿐 아니라 그곳에서 900m 떨어진 여신묘에서도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요즘의 시제 같은 큰 제사를 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여신묘에서는 여러 씨족의 공동 조상 한 분을 모셨을 수 있죠.”(이교수) 이것은 효(孝)사상의 원형이며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모신에 대한 신앙이다. 제사유적인 둥산쭈이에서 나온 잉부(孕婦)상과 뉴허량 여신 모두 여성임을 잊지 말자. 다산(농사를 지을 노동력을 상징)을 기원했어요. 이것은 농경 및 정착생활로 접어든 신석기인들로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존재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웅녀는 바로 훙산인들이 모셨던 지모신의 원형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다. 장광즈(張光直)의 말을 들어보자. 교통하면서 복점을 쳐서 조상의 하명을 받았다.” 쑤빙치(蘇秉琦)도 “뉴허량 유적군의 단·묘·총의 결합으로 볼 때 고대의 제왕들이 거행했던 교(郊:야외에서 지내는 제사)·료(燎·하늘신에게 제사), 그리고 체(조상신에게 제사)가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궈다순(郭大順)은 “여신묘의 총 면적이 10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고 말한다. 이 포함돼 있다. 좁은 면적에 비해 너무도 풍부하고 방대한 유물의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특권층이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단 한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의 왕(王)일 수도 있지요.”(이교수) (絶地天通)’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누구나 하늘과의 통로로 왕래했는데, 황제 때 치우가 통로를 통해 황제에게 도전했다는 것. 그러자 황제의 후계자 전욱이 신과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 게 구분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바로 이런 고사(故事)가 뉴허량 여신묘와 훙산문화 영역 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옥기와 부합되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끊어진 하늘과 땅의 통로는 누가 잇는가. 그것은 바로 천지를 농단한 전욱과 같은 왕의 고유권한이라는 뜻이다.
건축구조로 돼 있다. 이것은 당대(신석기시대) 취락구조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았던 주거지와 사당(신묘)의 구조가 같다는 것은 인간이 살았던 곳이, 바로 ‘신이 살았던 곳(神居之所)’이라는 뜻이다. 안된다. 주실이 있고 측실이 있고 전후실이 있는 등 나름대로는 주부(主副) 관계가 뚜렷하고, 좌우 대칭, 전후 호응의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후대의 전당(殿堂)과 종묘 배치의 물꼬를 튼 것으로 본거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해놓았는데, 바로 뉴허량의 여신묘 구조와 부합된다. 종묘(宗廟)는 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계 씨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시작되었으리라.
벗길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이형구 교수가 한가지 수수께끼를 냈다. 살았던 주거지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갖춰졌는데 뉴허량 유적군을 기준으로 100만㎡ 이내에서 어떤 주거지 유적도 확인하지 못했거든.”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사의 중심지였다는 것. 이는 한 씨족과 부락 단위를 넘어선 단계라는 것. 즉 이 뉴허량은 훙산문화 공동체가 더불어 사용했으며, 그들이 함께 숭배한 선조들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아주 상식적인 답이죠.” 구별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게 쑤빙치의 견해이고 보면, 뉴허량은 곧 훙산인들의 성도(聖都)였던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상상해서 창조한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훙산인의 여자 조상이며,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다.”(중국문물보·1989년 5월12일자) 기자가 만난 쉬쯔펑(徐子峰) 츠펑대 교수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바로 양대 문명의 충돌이자 습합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형구 교수의 한 마디. 이 훙산문화는 사방으로 퍼져 발해문명을 꽃피웠고, 남으로는 중원의 황허문명과 만나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것이 훗날 상나라가 되는 거고….”
홍산문명이 문자를 가졌다는 유물적 증거 | ||||||||||||||||
5,500년전(배달국)에 (녹도)문자가 있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이 입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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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호 문자가 하남성 평정산시에서 발굴된 약 3,100년전 응국의 청동기 명문의 글자와 일치하며 갑골문자에도 포함되어 있다는것이다. 오른쪽의 맨위 글자는 白자로 밝음을 뜻하고 (학자확인) 다음 글자는 이을承 아래 글자는 마치 甘자와 유사하다. 소전이나 대전체는 현재의 한자의 뜻과 차이가 크다. 왼쪽의 글자는 무었일까? 마치 本자와 비슷해 보인다. 새의 날개에 새겨진 양각은 어떤 뜻일까? 중국대륙의 대부분의 지명이 한민족 언어적 원형에 의해 붙여진 것이라고 한문학자 그리고 한글학자들은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소위 학교에서 역사를 하는 이들에게는 이게 무슨 소리냐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산동 기수가 흐르는 옆에 배미산이 있는데 한자로 培尾山이라고 쓰였다 중국인들 발음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뜻 모를 산이름 페이웨이샨 이지만 한국인은 뱀산으로 금방 이해가 되는 산이름이다. 이런지명이 부지기수이다.그렇다면 그 고유지명을 누가 지었을까?
같은시기의 홍산출토 옥도에 양각으로 새겨진 부호문자 冬(=終)으로 학자들은 해석하고, 실제 이글자는 천부경에 갑골문에도 나온다.
이 글자는 무었일까? 사람 인자와 관련있는 글자로 보지만 원형은 하늘로 해석한다하니 신을 의미할 수도있다.
옥기에 새겨진 글자가 그당시에서 2000여년후의 商王朝의 갑골문에도 동일한 글자가 등장한다.
요녕성 삼좌점 4000여년전 고조선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에 새겨진 부호문자는 제기의 받침의 基라는 뜻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한다. 누가 홍산문명에는 글자가 없던 시절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기사입력: 2011/09/30 [17:06]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국보급자료]민화로 내려오는 마고상, 삼신할미는 과연 누구인가?
[제1편] 어머니에 어머니인 마고(麻姑)
마고상. 우리나라는 현재 마고상에 대한 민화가 없다. 일제가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불태우고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필자의 지인이 중국의 고문서를 뒤져 찾아 낸 것이다. 송나라와 명나라, 청나라에서 민화로 전해 내려오는 마고님의 초상화다.
할미라는 말은 '한 어머니'라는 말이고 이는 곧 큰 어머니 즉 어머니의 어머니가 된다.
마고님이 임금님이었던 시대는 서기전70379년부터 서기전7197년경까지 63,182년간의 마고성 시대에 해당하며, 이를 전한국(前桓國)시대라 한다. 기록에 의하면 파미르고원을 다스린 임금님이며, 마고성에 살던 자손들로부터 임금님이자 신으로 모셔졌다. 그래서 삼신할미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가르켜 '임'과 '님'을 붙인다. 사랑하는 분은 낭군임, 서방임, 임자 등미며, 존경하는 분은 조상님, 스승님, 부모님, 임금님, 나라의 지도자에 붙인다. 그런데 임과 님이 동시에 들어가는 용어가 있다. 바로 임금님이다. 임금님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것이 해당되는 흠모하고 떠 받드는 분으로써 하늘을 대신해 전하는 분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일제가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아무나 높여서 부르라며, 우리 민족을 아부꾼으로 만들어 버려 지금 남한은 최대 사기, 아부꾼들이 모여 사는 집단으로 변질시켜 놓고 있다.
이북(북한)만 보더라도 아무에게나 '님'자를 붙이지 않는다. 나라의 지도자와 스승, 부모에게만 님을 붙이는 경우이다. 특 이북은 우리 민족의 고유의 성씨를 쓰는 반면 이남인 대한민국은 고유성씨를 쓰지 않고 두음법칙을 적용해 성씨를 바꾸어 버렸다. 리씨가 이씨로, 라씨가 나씨로, 류씨가 유씨로, 림씨가 임씨로... 나아가 서양성씨를 쓰게 만들었다. 김씨를 킴(KIM)씨로, 박씨를 팍(PARK)씨로... 너무나 많다.
다음으로 이어 집니다. 참고문헌: 부도지. 삼성기. 한단고기 <송-명-청나라에서 전해오는 민화 그림은 매회 2점씩 게재합니다.> 임진년 새해 하늘길별자리 카페지기 笑山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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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姑思想硏究(마고사상연구)
河 泓 鎭(서예가)
역사가 오래된 민족일수록 많은 신화나 설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역사가 너무나 오래 되었기 때문에 문자로 역사를 기록할 단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내용들이 태고적부터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나 설화는 비록 實證的科學(실증적과학)은 아니지마는 그 민족의 의식활동의 始源的原型(시원적원형)이 되고 理性的認識(이성적인식)의 대전제가 되므로 實證的歷史(실증적역사)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리 민족의 최초의 說話(설화)라 할 수 있는 麻姑思想(마고사상)에 대하여 한 번 고찰해 봄으로써 인류의 始源(시원)과 우리 민족의 뿌리 사상을 이해하고 아울러 단군 이전의 역사도 자동 밝혀지리라 본다.
신라 朴堤上(박제상)이 지었다는 「符都誌(부도지)」에 의하면 "麻姑(마고)는 선천과 후천의 중간인 朕世(짐세)에 八呂(팔여)의 「音(음)」에서 나온 神人(신인)으로 지상에서 가장 높은 麻姑城(마고성; 이 城도 音에서 나왔다고 함) 에서 살면서 天符(천부)를 받들고 지키며 선천을 남자로 하고, 후천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두 딸 穹姬(궁희). 巢姬(소희)을 낳았고,' 이 두 딸 역시 선후천의 정을 받아 결혼하지 않고 네 천인(黃穹 . 白巢 . 靑穹 . 黑巢)과 네 천녀가 있게 되었는데 , 이 들은 城(성)중에서 나오는 地乳(지유)를 먹고 살면서 네 천인은 '律(률)'을, 네 천녀는 '呂(려)'를 맡아보았다" 한다.
후천의 문이 열리면서 이 율려(律呂)가 다시 부활하면서 '音象(음상)'을 이루니 聲(성)과 音(음)이 섞인 것이라고 하며 마고가 마고성과 나란히 있는 實達大城(실달대성)을 끌어당겨 天水(천수)의 지역에 떨어뜨리니 물 가운데 땅이 생기고 육지와 바다가 병렬하며 산천이 길게 뻗어지게 되었다 하며, 이것이 여러 차례 변하며 水域(수역)과 地界(지계)가 다 함께 상하가 바뀌며 돌므로 비로소 曆數(역수)가 생겨나게 되었고 상하가 회전함에 따라 氣(기) . 火(화 ). 水(수) . 土(토)가 서로 섞여 빛이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을 구분하고, 초목과 짐승들은 살찌게 길러내니 모든 땅에 일이 많아졌다 한다.
이로부터 氣(기)와 火(화)가 서로 밀어 하늘에는 찬 기운이 없고, 水(수)와 土(토)가 감응하여 땅에는 어긋남이 없었는데 이는 音象(음상)이 위에 있어 언제나 비춰주고 響象(향상)이 아래에 있어 듣기를 고르게 해 주는 까닭이었다 한다.
이상 본바와 같이 麻姑(마고)는 지상에서 가장 높는 마고성에서 살았으므로 천지를 창조한 조물주는 아니다. 그러나 '音(음)'에서 나와 자기의 딸이 낳은 천인 천녀로 하여금 '율(律)'과 '呂(려)'를 관리케 하면서 지각변동은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音(음)'에서 마고가 나 왔다는 말을 정신현상으로 보면 五官(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단순한 성(聲)과는 달리 意識(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법칙 즉 律呂(율려)가 들어 있는 '音(음)'에 나왔다는 의미로 의식 없이는 만물이 존재하여도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는 상태서 사물을 인식하게 하는 의식이 생겨나게 하는 원초적인 근원인 '音象(음상)'에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름다움과 긍극적 善(선)을 지닌 '律呂(율려)'의 '八呂(팔려)'에서 태어났으니 이 자리가 선(善)과 德(덕)의 本源(본원)이요 美(미)와 快(쾌)의 根 (근저)인 것이다.
자연도 合目的性(합목적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本源(본원)에 합치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音(음)'에서 나와 두 딸에게는 五音七調(오음칠조)를 맡아보게 하고 두 딸이 낳은 천인 천녀에게는 '八音 (팔음)'을 맡아보게 할 수 있었던 「麻姑(마고)」가 '실단산성'을 떨어뜨려 지각변동을 가져오게 하고 이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氣 . 火. 水. 土가 서로 섞이게 되어 밤낮과 사계절이 생겨 曆數(역수)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며, 氣와 火가 서로 밀어 하늘에는 찬 기운이 없고, 水와 土가 감응하여 땅에서 어긋남이 없으니, 音象(음상)은 하늘에 별들의 짜임새처럼 明暗(명암)으로 소리의 淸濁(청탁). 高低(고저)를 나타내고, 소리의 長短(장단)은 별들의 거리와 같아 한 갓된 '象상)'을 이루어 비추어 주니 그 질서는 音象(음상)과 같고 그 音(음)의 질서를 아래에서 共鳴(공명)하여 象(상)을 이루니(響象) 조화의 소리가 인간 심상에 합목적적으로 떠올라 善(선)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는 것과 같다..
이는 伏羲(복희)가 八卦(팔괘)를 그을 때 '우르러 보아 하늘에서는 象(상)을 관찰하고, 굽어서는 땅에서 법칙을 관찰하였다'는 이치와 같으며 또 中庸(중용)에 나타나 '節度(절도)에 맞는 것을 和(화)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律呂(율려)의 질서에서 數(수)가 나옴을 알 수 있고 이 수의 법칙으로 우주를 가늠하므로써 星座(성좌)의 질서를 알아 曆數(역수)와 節候(절후)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동양의 음과 절후와의 관계도 여기에서 나왔고, 희랍 피다고라스학파의 수의 원리와 별들의 소리와의 관계도 이 「마고 사상」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에는 야훼의 명령대로 만물이 생겨난 것으로 되어 있어 창조주 야훼는 만물을 의식하고 있었으나 진흙을 비져서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의식이 부여되지 않았으므로 인간의 의식과 창조의식은 오로지 야훼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는데 비하여 「마고 사상」은 우주의 律呂(율려)인 音象(음상)을 地上(지상)의 響象(향상)이 共鳴(공명)하여 인간정신에 투영되는 역할을 하므로써 인간의 인식이 성립하는 원리로 되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의식도 허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신(神) 중심 사상이 아니라 인간중심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形體(형체)없는 象(상)으로 象(상)을 삼고, 강제 없는 법으로 법을 삼아 스스로 다스려지는 초경험적 세계이므로 純善(순선)인 사회 즉 神仙(신선)세계와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생겨날 여지를 당초부터 하지 않고 오르지 신의 명령에 의해서만 사유하고 움직이는 기독교사상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따라서 선악에 대한 책임도 마고 사상에서는 창조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기독교 사상처럼 인간이 비록 원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타(뱀)의 使嗾(사주)로 인하여 짓게 된 것이므로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의 의지를 좌우하는 창조주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再臨(재림)한다는 구세주는 오지 않고 늘어나는 사회악을 방치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인류의 근본과 악의 근원을 밝히고 있는 마고 사상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本音(본음) 즉 율려를 관리하는 자가 비록 여덟 사람이었으나 울려나는 공명의 소리를 알아듣고 관장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만물의 생존기간이 짧아 조절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마고는 네 천인과 천녀에게 명하여 겨드랑이를 열어 출산하게 하니 이들은 결혼하여 각각 3남 3녀를 낳았다. 이들이 地界(지계)에 처음으로 나타난 인류의 조상이었다 한다. 그 후 몇 대를 지나서 인구가 불어나 그 후예가 각각 3,000명이나 되었는데 이로부터 네 천인과 네 천녀가 낳은 3남 3녀 12사람은 각각 성문을 지키고 나머지 자손들은 響象(향상)을 나누어 관리하고 修證(수증)하니 비로소 曆數(역수)가 조절되었다 한다. 城中(성중)의 모든 사람들은 품성이 순정하여 능히 조화를 알고 地乳(지유)
를 마시므로 혈기가 맑았다 하며 영혼의 의식에 따라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 하며 魄體(백체) 가 때에 따라 움직여 형상을 감추고도 능히 행동하여 땅기운 중에 퍼져 살면서 그 수명이 한이 없었다 한다.
이처럼 신선세계 같이 되었다가 白巢氏族(백소씨족)의 支巢氏(지소씨)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젖을 마시러 乳泉(유천)에 갔다가 샘은 작고 사람들은 많으므로 다섯 번이나 양보하다가 끝내 자기는 마시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巢(소)에 오르니 배가 고파 쓰러졌는데 五味(오미)를 다 먹어보다가 넝쿨에 달린 포도를 발견하고 따먹게 되자 힘이 펄쩍 생겨났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니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실제로 먹어보니 지소씨의 말과 같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따먹게 되었다.
백소씨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열매를 먹는 습관과 자율성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니 마고는 그만 성문을 닫고 水雲(수운)의 위에 덮혀 있는 실달대성의 기운을 거두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의 혈육이 탁하게 되고, 심기가 혹독해져서 마침내 천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胎精(태정)이 불순하여 짐승처럼 생긴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또 조숙하여 命(명)이 짧아짐과 어울러 그 죽음이 遷化(천화)하지 못하고 썩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고 사상은 인간의 타락이 타의에 의하여 저질러지거나 신의 창조물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에 의하여 저질러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것도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이르러 마고가 그처럼 고귀하게 생각했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부득이 식물(포도)의 생명을 해치는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선악은 기독교 사상처럼 本源(본원; 즉 신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삶의 부득이한 방편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회악에 대한 책임도 인간 스스로가 지고 고쳐야 하지 신이 고쳐야 할 사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의 선으로 다시 돌아가게 수양하고 닦아서 실천에 옮겨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마고가 천인 천녀를 결혼시켜 자손을 불어나게 하니 土俗信仰(토속신앙)에서 '마고 할머니'가 자식을 점지해 준다고 믿었고 또 마고가 생사고락을 관리하니 産婦(산부)의 고통과 아기의 병고를 없게 하여 준다고 믿어 아기 생후 삼칠(21일)을 마고 할머니에게 비는 풍속이 생긴 것이다. 또 동식물울 가릴 것 없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淸淨(청정)한 세계를 이상으로 여기니 불교사상이 여기에서 나왔으며, 형체 없는 세계 無(무)에서 형상 있는 現象界(현상계) 즉 有(유)가 나온 것으로 되어 있으니 도교가 여기에 연원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純善(순선)인 純粹理性(순수이성)에서 理性 理念(이성이념)의 실천적 윤리인 仁. 義. 禮. 智가 나왔으니 유교 또한 純善(순선)의 세계인 마고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잇다. 그러므로 신라의 최치원 鸞郞碑序文(난랑비서문)에서 '나라에 玄妙(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하여 자세한 것은 仙史(선사)에 적혀 있는 데 실로 삼교(儒. 佛. 道)을 포함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포도를 따먹은 사람들의 성품이 악해지고 형태가 짐승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최초 포도를 따먹은 支巢氏(지소씨)를 원망하게 되자 지소씨는 미안하게 생각하여 권속을 거느리고 城(성)을 나가 멀리 숨어 버리자 포도를 따먹은 사람들도 城(성)을 나가게 되니 천인중의 맏이 黃穹氏(황궁씨)가 스스로 修證(수증)하여 복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때에 氣(기)와 土(토)가 서로 마주치어 시절을 만드는 광선이 한 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었으며, 水(수)와 火(화)가 조화를 잃으므로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니 이는 빛을 거둬들여서 비추어 주지 아니하고 성문이 닫혀 있어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몰려와 직접 복본하고자 하지만 복본할 때가 아니어서 복본하지 못하고 地乳(지유)를 얻고자 성곽 밑을 파헤치니 그만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내려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풀과 과일을 투어 취하게 되니 혼탁이 극도에 달하여 淸淨(청정)을 보전하기 어렵게 하며, 이에 黃穹氏(황궁씨)가 마고에 사죄하고 책임을 스스로 지며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이 때에 천인들이 일단 성밖에 나가 나누어 살면서 대성을 완전하게 보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는 天符(천부)를 信標(신표)로 나누어주고 칡으로 식량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며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에 우리 민족은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는데 앞에 나간 사람들이 성질이 사나워져서 뒤에 나온 이들을 해치고자 하므로 바다와 산을 넘어 떨어져 살게되어 서로 내왕이 거의 없게 되었다 한다.
이 때에 마고는 두 딸과 더불어 대성을 보수하고 천수로 청소를 하고는 대성을 虛達城(허달성)의 위로 옮겨 버렸는데 이 때에 청소한 물이 동과 서에 크게 넘쳐 운해주의 땅을 크게 부수고 월식주의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었다 하며. 이로부터 지계의 중심이 변하여 曆數(역수)가 차이가 생기니 처음으로 朔(삭)과 販(판)의 형상이 있었다한다. 이와 같이 마고 사상은 인간세계의 변동과 역수와의 관계 속에서 항상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바 이는 인간 思惟(사유)의 형식적 합목적성을 자연의 합목적성과 결부시켜 천지창조의 宇宙心(우주심)에 합치시키고자함에 있는 것이다.
제일 맏이 황궁씨는 천산주에 도착하여 복본하기를 진력하다가 천산에 들어가 돌이 되어 길게 調音(조음)을 율려 인세의 혹량을 남김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기어이 대성 회복의 서약을 성취하였다 한다. 우리는 여기서 巨石文化(거석문화)와 고인돌 문화가 祖先(조선)숭배사상과 관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황궁씨의 장자 有因氏(유인씨; 한인의 아버지)가 天符三印(천부삼인)을 이어받으니 이것이 곧 天地本音(천지본음)의 象(상)으로 그것은 진실로 근본이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나고 나서 아들 桓因(한인)씨에게 天符(천부)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계불)을 專修 (전수)하며 나오지 아니하였다 하는바 오늘날 전해지는 산신제는 자연에 대한 감사제일 뿐만 아니라 조상에 대한 숭배사상도 깃 들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천부삼인을 이어받은 한인씨는 인세를 증리하는 일을 크게 밝히니 이에 햇빛이 고르게 비추이고 기후가 순조로와 생물들이 거의 안도함을 얻게 되었다 하여 사람들의 괴상한 모습도 점점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한다. 한인씨의 아들 桓雄氏(한웅씨)는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修 除 (수계제불)하고 天雄(천웅)의 도를 수립하여 弘益人世(홍익인세)하다가 아들 壬儉(임검; 단군왕검을 말함)에게 천부삼인을 전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단군 설화에 나오는 熊女(웅녀)는 짐승이 아니라 앞서 말한바와 같이 풀과 열매를 먹고 타락한 인간이란 점이다. 그래서 환웅에게 사람다운 사람으로 復本(복본)하기를 빌었더니 그 방법을 알려 주시어 사람다운 사람으로 다시 뒤돌아 오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웅이전 인류의 역사와 맞아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임금씨(단군왕검)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백성들의 생업을 육성함과 아울러 사해를 돌아다니며 천부를 照證(조증)하여 修信(수신)하고 의혹을 풀고 복본할 것을 맹서하며 마고성과 같은 符都(부도)를 찾게 건설할 것을 약속하고 곧 돌아와 동북의 磁方(자방)에 符都(부도)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아울러 태백산(중국 섬서성에 있는 태백산임)에 天符壇(천부단)을 짓고 사방에 堡壇(보단)도 지었는데
그 규모는 도랑길 사이만 해도 천리나 되었다 하며 四津(사진), 四浦(사포)의 사이도 천리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사이에는 6部(부)를 설치하여 여러 부족이 살았다 한다.
이에 환궁씨의 후예 6만을 이주시키고 뗏목 8만을 만들어 사해의 諸族(제족)을 초청하여 박달나무 숲에 神市 (신시)를 크게 열고 수계정심하여 천상을 살핀 후 마고의 계보를 닦아 그 족속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문을 정리하였다 하며, 禮(예)와 陽(양)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朝市(조시)를 설치하고 八澤(팔택)에 海市(해시)를 열어 매년10월에 朝祭(조제)를 행하니 사해의 諸族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치며 교역하니 이름하여 「朝鮮祭(조선제)」라 하였다 한다. 우리는 여기서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국가를 왜「朝鮮」이라 이름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때에 陶堯(도요; 요임금을 말함)가 천산 남쪽에서 일어났는데 일차 出城(출성)한 사람들의 후예라 하며 符都(부도) 서쪽 堡(보)의 干(간)에게 도를 배웠으나 數(수)에 밝지 못하면서 오행의 법을 만들어 帝王(제왕)의 도를 주장하다가 巢夫(소부)의 許由(허유)에게 꾸지람을 듣고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황궁씨의 후예인 苗裔(묘예)를 쫓아내었다. 이 사건이 書傳(서전)에 나오는 三苗(삼묘)의 난으로 요임금 쪽의 역사에서는 삼묘가 일으킨 난으로 되어있으나 그 근본 원인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묘족이 쫏겨난 그 땅은 원래 한웅씨의 아버지 有因氏(유인씨)의 고향이었는데 王儉氏(왕검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간 틈을 타고 일어났기 때문에 왕검씨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묘족들은 저항을 하다 어찌할 수 없어 동. 서. 북으로 뿔뿔이 헤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주도권이 요임금쪽으로 기울어짐을 할 수 있다. 묘예를 쫓아낸 堯(요)는 곧 九州(구주)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數(수)의 중심인 5가운데 제왕이라 칭하며 唐都(당도)를 세워 符都(부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負文(부문)과 蓂莢(명협; 보름까지는 날마다 잎이 하나씩 나고 보름이후부터는 잎이 하나씩 떨어지는데 작은 달에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말라버린다고 하는 풀)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曆(역)을 만들어 독자로 선을 걷게 되므로써 천부의 이치와 부도의 역을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壬儉(임금)은 우선 유화정책을 쓰기로 하여 유인씨(한인아버지)의 손자 有戶氏(舜의 아버지)와 그의 아들 有舜(유순)으로 하여금 환부 권사 등 100여명을 인솔하고 가서 堯(요)를 회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舜(순)은 堯(요)의 공손함과 후한 대접에 호감을 갖게 되었고, 堯(요) 또한 舜(순)의 사람됨을 보고 사위를 삼아 왕권을 인계하려고 두 딸을 주어 결혼하게 하였다. 舜(순)의 아버지는 반대하여 몇 번이나 舜(순)을 경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舜(순)은 堯(요)의 후계자가 되어 檀君(단군)의 符都(부도)를 떠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書傳(서전)에서는 舜(순)의 아버지 高 (고수; 여기서는 有戶氏)가 후처의 아들 象(상)을 사랑하여 舜(순)을 죽이려 까지 하였다 하고 있으나 세상을 보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미워하였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판단이라 하겠다. 또 사마천의 「사기」「오제본기」에 黃帝(황제)로부터 舜(순)임금 禹(우)임금에 이르기까지 다 같은 姓(성)으로 나라 이름만 달리하였다 하였고, 孟子(맹자) 「離婁章.下(이루장.하)」에서는 舜(순)은 東夷人(동이인)이라 하였는데도 그 근거가 어디에 연원하고 있는지를 몰라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제상의 「부도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의문이 풀려짐과 아울러 요. 순이 모두 우리 민족 계통임이 명확해진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마고」는 토속신앙의 '마고할머니' '삼신할머니' '産神(산신)'으로 추앙되어 자식을 점지해주고 산부를 도우며 인간의 생명과 생사고락을 주재하는 온정 어린 할머니로 믿어왔던 것이다. 뿐 만아니라 인류의 창시자요 우리 민족 역사의 근원자인 동시에 자연과 인간의 상관관계를 매개해 주는 신적 존재로 신봉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日帝(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자 미신으로 낙인 받게 되었고, 해방 후에는 서구사상이 들어오자 우상숭배 또는 미신으로 오인 받게 됨은 물론 al믿음이 두터웠던 부녀자들 자신마저도 자연분만자가 줄어들자 「産神(산신)」으로 믿는 자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내용 중에 인간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없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이한 자연의 현상은 우주의 율려에 근원하여 생겨난 인간에게 어떤 한계를 깨닫게 하므로써 생명을 준 자연에 대하여 숭고함을 자아내게 하고 또 그 숭고함은 인간 세상의 도덕율을 창조하는데 기여토록 계시하는 것으로 인식하여야만 자연과 인간이 상호관계 속에서 최고의 善(선)을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고 사상에서 나오는 기이한 현상은 인간이 時空(시공)속에 사는 이상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하기 때문에 자연을 통하여 인간이 오만하지 않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지 미신으로 신봉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은 말로써 인간을 깨우친다면 인간의 인식을 초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초월한다 하더라도 일종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통하여 인간 경험의 초월성을 보여주는 것은 空想(공상)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현상 자체가 實相(실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사상이 미신으로만 호도 되어 난무하므로써 자연은 여지없이 망가지고, 살상(殺傷)은 끊길 날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진리는 아직도 살아있고 고매한 한국사상은 우리의 뇌리에 유전인자로 전해지고 있으니 전통사상을 발굴하여 남북이 통일되고 인류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찾아내는 일이 우리의 소명이 아닌가한다.
우리 민족의 백두산과 천지는 원래 어디일까? | ||||
한인/한웅께서 내려오신 백산과 흑수가 있는 곳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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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 자주역사신보에서는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부터 대조영의 대진국(발해)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강역이 어디까지였는지 기획연재 시리즈로 자세히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그 첫 번째 연재로 우리 민족의 시원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민족의 대성서인 <한단고기 삼성기전 상>에는 우리 민족의 시원지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삼성기전 상(三聖記全 上>이란 신라의 승려 안함로가 지은 역사서이고, <삼성기전 하>는 원동중이 지은 역사서이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群)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르켜 천제한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는 안파견(安巴堅 아버지의 뜻)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신시(神市)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삼성기전 상>의 기록에서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언급된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과연 어디일까? 거의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조상 대대로 우리 민족의 강역이 만주였으므로 흑수는 지금의 만주 동북쪽을 흐르는 흑룡강(黑龍江)이고, 백산은 바로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믿으려 한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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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삼성기전 하>에는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 한임(桓因)께서 천산(天山)에 올라 도를 얻으시사....”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한인이 오른 천산을 지금의 천산산맥이 있는 천산(天山)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한웅이 내려온 태백산(太白山)을 지금의 백두산으로 보고 있으며, 심지어는 강원도 태백산을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한웅이 내려온 태백산으로 보는 억지 주장가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우선 똑같은 인물이 위 두 기록처럼 각각 다른 지역에 내려 왔을 리는 없을 테니, 한인께서 내려오신 백산(白山)=천산(天山)으로 보아야 하며, 한웅께서 내려오신 백산(白山)=태백산(太白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백산=천산=태백산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산 근처에는 흑수(黑水)라는 강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백산(白山)이 현재 중국 땅에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지명대사전>으로 검색을 하니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현 백두산이 백산이라는 설명이고 다른 지역의 백산은 동명이산(同名異山)으로 보아야 한다.
白山 : 1) ?吉林?白山,《金史世?》“女?地有混同江、?白山。”混同江亦曰黑?江,所?白山黑水是也,(현 백두산)
2) 在江?江???三十里,南朝宋升明中,?述??北秉同???道成,事?走白山,????去官,有田十余?在江乘之白山,皆?此,《建康志》南??山,北??山,西有水下注平?,??石,悉出此山。(강소성 강령현 동 삼십리)
3) 在浙江于沅?南五十八里,上有浮古?白,故名,《水?注》白山峻?,北?紫溪。(절강성 우원현 남 오십팔리)
4) 在浙江?海??北二百五十里,?望如雪,其上有湖。(절강성 임해현 동북 250리)
이번엔 태백산(太白山)을 <중국지명대사전>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太白山 : 1) ?吉林之?白山,《魏?勿吉??》:“?南有徙太山,魏言太皇。”北史作?太山,?言太皇。(지금의 백두산)
2) 在河南淅川??南八十里,峰?高峻,下?丹水,?境群山回?,?接??,??中之南山秦??差映?,此山亦以似?中之太白而名。(하남 석천현)
3) 在浙江??西七十里,??治西障,?跨三邑,在?曰西白,在??曰?白,在??曰北白,《高似?剡?》峻?崔巍,吐云?景,??信升仙?也,一名太平山,又名岑山,上有瀑布,?水?注之白石山也。(절강성 승현 서 70리)
4) 在?西眉?南,接洋?界,亦曰太一、太壹。《水?注》太白山,去?安三百里,不知其高?何,俗云武功太白,去天三百,山下?行不得鼓角,鼓角?疾?雨至,?夏?雪,望之皓然,洞天?以此?第十一洞天,山有大太白、二太白、三太白三池,每天旱,秦人多?雨于此,太白者西方神名也,?看太一山?。(섬서성 미현 남)
5) 在甘????北一百五十里,黑水河?源于此。(감숙성 경양현)
현재 <중국지명대사전>으로 본 백산=태백산=백두산으로 명기가 되어있다. 여하튼 이 중에서 우리 상고사와 관련이 있을만한 ‘2) 하남성 석천현’과 ‘4)섬서성 미현’을 후보지로 골라 놓기로 하겠다.
이번에는 <중국지명대사전>으로 백산 근처에 흑수(黑水)가 있는지 검색해 보기로 하겠다.
黑水: 1) ?今黑?江,?黑?江?。(지금의 흑룡강)
2) 源出山西???之黑水村,合?水至?南五十里,入洞?水 (산서성 수양현)
3) 在山西?城?北,源出??山,西流入?水,至?南五十里,入洞?水。(산서성 익성현)
4) 亦名?利川,今名麻洞川,又名云岩河,源出?西甘泉??,?南流?宜川?入河,《水?注》黑水出定??西山,二源奇?,固?北,《水?注》水出北山,南流入?,庾仲雍曰,黑水去高?三十里,?葛亮?云,朝?素?,宿黑水,指是水也。(섬서성 감천현 동 ~ 의천현)
5) 有大小二黑水,?出甘?海原?南,?流合??都河、硝河、海子河,至固原?北入于?水河,《水?注》高平川?太?城合一水,水有五源,??一川,?此也。(감숙성 해원현 ~ 고원현 북)
6) 在甘?文?西北?外、四川松潘?境,宋元嘉二年,西秦乞伏??遣?吉昆南,?黑水羌酋丘?,大破之,《水?注》黑水出羌中,西南?黑水城西,又西南入白水,《元和志》黑水在?安?,源出素?。(감숙성 문현 서북)
7) ?今南?水,??名符黑水,《??地理志》“符黑水至?道入江,”符黑水者,符?之黑水也 四川重?市西北有黑水,入江,《元一?志》源出常?山,?石皆黑。(사천성 중경시)
8) 源出?蒙古境鄂?多斯右翼前旗西南,蒙古名?葛?黑河,一曰哈柳?河,亦曰吃那河,?入??,至?西?山?北,?流?无定河,《晋???》“赫?勃勃于黑水之南?都城,”?在此水之南。在?蒙古???,?黑河,亦名金河,?金河?。(내몽고성 귀수현)
위의 여러 자료를 검토해 우리 상고사와 관련될 수 있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를 골라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이 6군데로 좁힐 수 있다. 이 6군데 중에서 과연 어디일까? 백산과 흑수가 가까이 있어야 하므로 강력한 후보지를 3군데 꼽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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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 1) 현재의 흑룡강과 백두산
흑수 2) 산서성 수양현과 백산 (중국지명대사전에 없는 백산)
흑수 4) 섬서성 미현과 태백산
이 중에서 필자는 ‘흑수 2)의 산서성 수양현과 백산’을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꼽고 싶다. 그 이유는 한웅의 배달국 때 중국의 삼황인 태호복희,염제신농,황제헌원이 모두 동이족이므로 그들의 활동구역과 너무 멀면 우선 자격조건이 안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삼황)
* 태호복희(太?伏犧)는 5대 태우의한웅의 막내 12번째 아들
* 염제신농(炎帝神農)은 웅씨가 갈라져 나간 少典의 아들. 소전은 소호(少?)와 함께 고시(高矢)씨의 방계로 안부련의 말기에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했다. 이때 따라간 소전의 아들 신농(神農)이 주변의 온갖 약초를 맛보고 동양의학의 시조가 된다. 태호의 여동생 여와(女?)의 뒤를 이어 신농이 제후가 됨.
* 황제헌원(黃帝軒轅) : 소전의 별고(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13대 사와라한웅 초기의 일이다.
그래서 현재의 만주에 있는 ‘1)의 흑룡강과 백두산’은 중국의 삼황과 우리 치우천왕의 활동구역과 너무 멀기 때문에 분명 한인/한웅이 내려온 백산과 흑수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4)의 섬서성 미현과 태백산’은 중국 삼황의 활동구역의 중심이기 때문에 역시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삼황의 활동구역은 주로 섬서성과 때로는 황하 북쪽 하남성 일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헌원의 무덤이 섬서성에 있으며, 염제신농이 살았다는 강수(姜水)가 섬서성 서안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강수에는 우리 치우천왕이 헌원을 밀어내고 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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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에 나타난 고구려의 기록
高?,本扶???也。地?跨海距新?,南亦跨海距百?,西北度?水??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安城,??浪郡也,去京?五千里 而??山屈???, 南涯浿水,王筑?其左。又有??城、?城,??都。水有大?、少?:大?出靺鞨西南山,南?安市城;少?出?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之合。
고려는 본 부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땅 동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가 있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면 백제가 있다. 서북에서 요수를 건너면 영주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이 있다. 그 나라 임금은 평양성 또는 장안성이라 일컫는 곳에 기거하며 한나라 낙랑군 땅이었다. 경사(장안)로 부터 오천리(? 과장)를 가면 산을 따라 굴곡지게 휘감으며 성곽을 이루고 남쪽 끝에는 패수가 있다.
왕은 북쪽(좌)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또한 국내성,한성이 있는데 또 다른 도읍이라고도 한다.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有??水出靺鞨之白山,色若??,???水,???城西,???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南,以巨??人,因恃以??。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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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곳은 옛날에는 압록수라 불렸던 분하의 출발지이며, 그리고 그 백산 꼭대기에는 천지(天池)라는 신성한 호수가 있다, 따라서 현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 북쪽이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보이며, 이곳에 배달국/북부여의 도읍과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졸본성(卒本城)이 있지 않았나 싶다. 단군조선의 도읍은 산서성 임분(고구려 평양성)으로 보고 싶다.
특히 산서성 태원을 고구려의 최초 도성인 졸본성으로 보는 이유는 압록수(현 분하) 변에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과 평양성이 있다는 위 <신당서 열전>의 기록과, 대청광여도에 추모대제 고주몽이 묻혔다는 용산(龍山)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현 산서성 태원이 고구려 졸본성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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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5/15 [14:28]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단군왕검의 도읍에 있는 불함산은 어디일까? (21-2부) | ||||
불함산의 박달나무 터는 단군왕검의 도읍인 아사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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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 16년(B.C1935) 동문 밖 십리의 땅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불함산(不咸山)에서는 누워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났다. 천하(天河)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渤海)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석이었다.
기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두었다.
* 병오년 기사에서 발해 연안에서 나왔다는 금덩이 10석이면 엄청난 수량으로, 도량형을 통일한 진시황 때 정한 1석은 중량 단위로 약 60㎏이었다고 하니 780kg정도의 금덩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 기축년 기사의 감성이란 지금의 천문대를 말하는 것으로, 별과 해와 달의 움직임을 살펴 농사 및 군사에 이용하고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쳤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183년 후인 B.C 1733년에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천문현상을 관찰하게 되는데, 이 기록은 조선의 과학적 위대함을 밝히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 오성취루 현상에 대해서는 13세 흘달단군 조에서 상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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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의 아사달과 관련 있는 불함산은 어디일까?
병오년 기사에 나오는 불함산(不咸山)은 단군왕검의 도읍인 아사달과 관련이 많은 산이다. <삼성기전 상>에 "신인 왕검(神人王儉)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 터에 내려오셨다.”는 기록이 있고, 그 외 <환단고기> 곳곳에 여러 차례 단군왕검과 관련된 산으로 나타난다. 또한 3세 가륵단군 기사에 "병오 8년 (B.C2175)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는 연기 일어남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하시어 조세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분명 조선의 도읍지인 아사달이거나 그곳과 가까운 산명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불함산은 과연 어디일까?
<산해경 대황북경>에 “대황의 가운데 불함산이라는 산이 있으며 숙신의 나라가 있다.(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愼之國)”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만주에 있는 완달산(完達山)으로 보는 재야사학자들이 많다. 이는 조선의 위치를 만주로 보기 때문인데, 분명한 것은 <산해경>에서는 만주에 있는 산과 바다를 설명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함산은 과연 어디일까? 그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숙신에 있다.
읍루국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번역) 읍루국 : 한나라 이전의 숙신이다. <진서동이전>에 “숙신씨 일명 읍루는 불함산 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대해변에 있고, 서쪽으로 구만한국에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고 그 땅은 넓고 길이는 수 천리에 이른다.
(원문) ??? : ?以前之??也,《晋??夷?》“??氏一名??,在不咸山北,??大海,西接寇漫汗?,北彬弱水,其土界???千里,”
또한 약수(弱水)에 대한 중국사서의 설명 중, 읍루에 대해 언급한 문구가 있다.
(번역) “<후한서 동이전>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 <진서 사이전> 읍루국 동쪽 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이다. <호위우공추지> 약수는 산묘위 서남 궁석산에서 나와 동북으로 거연택으로 들어간다. 그 하류는 돌아오는 곳을 모른다. 약수는 연택에서 동북류해 부여를 지나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원문) 《后???夷?》夫余?北有弱水,《晋?四夷?》?????大海,北?弱水,《胡渭禹??指》弱水出山??西南?石山,?北入居延?,其下流不知所?,似弱水自居延??北流,?夫余,??之北境而?于?海,
(필자 주 : 여기서의 동해는 감숙성을 흐르는 황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 내용을 종합해보면 내몽골 서남단에서 발원해 감숙성을 흐르는 약수 남쪽인 청해성이나 감숙성 동부에 부여가 있었고, 그 동쪽에 숙신(=읍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읍루의 동쪽에 대해가 있어야 하니, 읍루는 현재의 감숙성 동부나 섬서성 북부의 황하변으로 추정된다.
중국 사서기록의 상투적인 수법대로 부여국과 읍루국(숙신)을 마치 단군조선과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기술해 놓았으나, 이는 각 지역을 다스리던 제후(욕살)로 모두 조선대연방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여러 기록으로 보았을 때, 단군조선의 중심지가 기존 재야사학의 이론처럼 만주나 한반도가 아니라 훨씬 더 서쪽인 황하 중상류 부근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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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天河)와 발해(渤海)는 어디일까?
병오년 기사에서 거북이가 나타난 천하(天河)가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재야사학에서 말하는 바이칼호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이칼호수는 물이 차서 거북이가 살 수 없는 환경이며, 우리 역사의 기록과 별로 상관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해(天海)로 표현하지 않고 천하(天河)로 표현한 것을 보아서는 호수가 아니라 큰 강으로 보이며, 하늘(天)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 큰 강의 상류 발원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여 추측컨대 황하(黃河) 또는 산서성을 흐르는 분하(汾河)의 발원지로 보인다.
특히 분하가 시작되는 곳에는 분원천지(汾源天池)가 있고, 거기서 발원된 분하가 고대 압록수로 불렸으므로 그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분원천지가 우리 민족의 진짜 천지(天池)였으며, 그곳에 바로 백두산의 다른 이름인 백산(白山)이 있었다. <삼성기전 상>에 “환웅천왕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백산이 바로 <신당서 열전 동이전>에 언급된 기록한 말갈(=고구려)의 백산으로 분원천지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중국에는 천산(天山)천지, 분원천지, 백두천지의 3개의 천지가 있는데, 이중 하나가 우리 역사의 천지일 것이다.
상세한 것은 아래 “우리 민족의 백두산과 천지는 원래 어디일까?”를 참조 바란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60§ion=sc6§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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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현 중국의 요녕성, 하북성, 산동성에 걸쳐있는 내해(內海)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가로 100리 X 세로 300리나 되는 큰 내륙호수인 대야택(大野澤)을 말하는 것이다. 상세한 설명은 아래 글을 참조 바란다.
(제목)‘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왜곡한 중국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50§ion=sc7§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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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놀이문화의 원형인 윷놀이와 그 철학
윷놀이는 인류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놀이의 기원이면서, 여러 민속놀이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교훈적이며 가장 철학적인 놀이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1858∼1929)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조선의 윷놀이에 대해 전 세계 모든 놀이의 원형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 놀이방법과 의미를 연구해 세계에 공표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학 고고학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1895년에 저술한 ?한국의 놀이?(열화당)라는 책에서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며 “고대 점술에 기원을 둔 윷놀이는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철학도 담고 있다”고 극찬했다.
윷놀이는 우리 고유의 놀이로 한자로 척사(擲柶), 사희(四戱), 사목희(四木戱)라고도 불렀다. 윷말은 한문으로 사마(柶馬)라고 하고, 윷판[馬田]은 말밭, 말판, 윷밭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사도(柶圖)라 쓴다. 윷판에 대해서는 말판을 천문도로 보는 견해, 천부경의 원리를 윷판으로 나타냈다는 설, 주역의 이치를 표현하여 역학의 수리철학을 담고 있다는 설 등이 있다.
윷놀이에 대해서는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가 주장한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에서 나왔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도, 개, 걸, 윷, 모가 부여의 중앙과 사방을 다스렸다는 관직명인 저가(猪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등에서 왔다는 것이다. 또한 사출도(四出道)는 전시체제에서 군사조직의 출진도(出陣圖) 모형이라고 한다. 놀이의 행마법이 오가의 가축이름이 이용되면서 몸의 크기와 걸음의 속도가 윷놀이에 반영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개가 빠르게 달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윷놀이는 단순한 승부를 겨루는 유희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농경사회에서 윷점이 성행해 농사나 신수를 점치는 예언적 의미로 변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에도 저포(樗蒲), 격양희(擊壤戱)가 있고 만주와 몽골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으나 그 방식도 다르고 널리 유행하지도 않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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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조는 신화, 중국 시조는 역사상 인물?
중국과 한국이 다르게 하고있는 시조 관리
성훈 컬럼리스트
ㅣ 기사입력
2011/05/1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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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三皇五帝)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5제부터 오제본기로 적어 역사로 인정했고, 삼황은 선사시대의 신화의 인물로 기술하였다.
삼황(三皇)이란 태호복희, 여와, 염제신농을 이르는 말이며, 오제(五帝)는 황제헌원,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을 말한다. (3황에 여와 대신에 황제헌원을 넣고, 5제에 신라 김유신의 조상인 소호금천을 넣은 기록도 있다.)
최근에는 삼조상(三祖上) 또는 삼성상(三星像)이라 하여 염제신농, 황제헌원, 그리고 우리에게 친근한 치우천황를 자기네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족보를 따져 본다면, 삼황의 태호복희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환웅의 아들이며, 여와는 복희와 남매/부부이며, 염제신농은 8대 안부련 환웅이 파견한 지방행정관 소전의 아들이다.
5제의 황제헌원은 소전의 또다른 후손이며, 소호금천은 황제헌원의 아들이며, 전욱고양은 소호금천의 아들이며, 제곡고신은 소호금천의 손자이며, 요임금은 제곡고신의 아들이며,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신하 유호의 아들이다. 이는 <환단고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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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중국의 3황 5제가 전부가 배달동이족이다. 실제로 1958년 대약진운동 때 황제헌원과 소호금천의 묘가 동이족이라는 이유로 파헤쳐지기도 한 예가 이를 증명해 준다. (당시 같은 지역에 있었던 한족인 공자의 묘는 멀쩡했다)
중국 정부는 이들을 신화 속의 인물에서 역사상의 실존 인물로 만들어 고위관료들이 몰려가 제사를 올리며 중화민족주의(中華民族主義)를 부르짖고 있다.
우리 사학계가 치우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넣지 않자 중국은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켜, 우리는 가장 확실한 우리 조상인 치우천왕을 중국에게 거의 빼앗겼다고 봐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삼황오제라는 모든 우리 조상을 다 중국에 빼앗긴 것이 사실이다.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주의를 앞세워 국민들에게 중화의 깃발아래로의 대단합을 호소하고,‘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자부심을 국민들이 갖도록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번의 이‘시조공정’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국조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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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서에도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 “천자의 호칭은 동이족에서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고, 불패의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져 한고조 유방이 사당을 세워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항상 치우사당에 제사를 올렸다.
아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하여 정부가 만든 기구인 동북아역사재단의 홈피에 있는 글로서, 우리 국조인 단군 신화에 관한 내용이다.
(인용)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로서 (중략) 단군조선을 신석기시대, 예맥조선(기자조선)을 청동기시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중략) 환웅이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부르고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중략)
이 때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이것을 먹되 햇볕을 100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니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먹으면서 스무 하루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된 웅녀가 이번엔 신단수 아래에서 결혼할 상대를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깐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고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즉위하였는데, 백악산 아사달 등에 도읍하였다가,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향년 1,908세에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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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다시피 우리 강단사학계는 국조 단군을 신화로 보고 있으며, 고조선의 건국 시대를 신석기세대로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생물학적으로 미련한 곰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인간이 1,908세까지 살았다는 의학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군신화 다음에는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이민족에 의한 식민지배의 역사가 교과서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이는 전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일제가 저지른 역사 위조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신화창조와 식민지배의 의문은 민족의 성서인 <환단고기>가 발견됨으로서 다 풀리게 되었다. 단군조선은 b.c2333년 건국되어 47분의 단군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그 이전에 18분의 환웅이 다스린 1,565년의 역사를 가진 배달국과 환국이 더 있었다. 그리고 전기 단군조선이 중국 동부평야지대를 지배했으므로 한족과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같이 공유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나이가 1,908세라고 말한 근거도 다 밝혀졌다.
천손민족이었던 한민족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 스스로 우매한 민족임을 느끼게 하기 위해 일본은 역사부터 조작하게 된다. 우선 조선과 중국에 있던 사서를 전부 수거해 20만권이 넘는 사서를 불태웠으며, 중요한 사료는 일본으로 다 가져가 버린다. 그리고 고대 사료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을 남겨 놓았고, 유일한 유물인 광개토태왕 비문을 훼손해 놓고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고 우리 역사를 전부 위조한다.
삼국유사를 남겨놓은 이유는 위의 단군신화의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삼국유사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한 단군신화를 교묘히 이용해, 우리 민족을 미련한 곰의 자손으로 만들고 찬란했던 고조선의 대역사를 이민족에 의한 식민지배의 역사로 위조한다.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세뇌교육용으로 <조선사 35권>이라는 위조 역사서를 편찬해 조선인들에게 가르친다.
이렇게 조작된 단군신화와 왜곡된 역사를 우리는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로 알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교과서를 만들어 교육시키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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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족의 역사는 원래 없었다. 한족이 처음으로 통일제국을 세운 것이 漢나라이고, 宋나라와 明나라가 한족의 나라일 뿐이었다. 한나라도 전한과 후한으로 나누어지며, 송나라도 남송 북송으로 나누어져 300년 이상 국가를 유지한 나라가 하나도 없다. (진시황, 수나라, 당나라도 다 동이족의 후예이다)
그런 보잘것없는 중국이 고조선의 역사부터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더니, 이제는 우리 조상들까지 빼앗아가 자기네 조상으로 만들고, 또 고구려/발해의 역사까지 빼앗으려고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중국 정부는 삼황이라는 신화의 인물을 역사상 인물로 만들어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중화민족주의의 깃발아래 15억 인구의 대단합을 호소하고 있는 중이다. 아울러 중화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그리고 매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국기하기식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 경례를 하고 국가를 따라 부른다. 심지어는 오성홍기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중국인들이 많다.
중국은 이러하거늘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우리 스스로 국조를 신화화하고, 찬란했던 대제국 단군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역사를 외침이 계속된 침탈의 슬픈 역사로 알고 있으며, 광활했던 대륙의 역사를 좁은 한반도 가두리 양식장에 가두는 반도사관으로 작성된 현행 국사는 민족의 자부심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심지어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국조 단군상의 목이 잘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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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국사는 일제가 조작해 만들어 준 <조선사 35권>을 바이블로 하여 철저한 반도사관에 의해 만들어져 있다. 교과서의 내용이 조금씩 개정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조선사 35권>의 테두리를 못 벗어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역사는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광복을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앞으로 강단사학계가 민족사학과 힘을 합쳐 사관을 바꾸어 지금까지 잘못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밝힌다면 우리의 민족혼은 당연히 회복될 수 있을 것이고, 동북공정이 허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충분히 밝힐 수 있다고 본다.
대명천지 인터넷 세상에 옛날과 같은 역사왜곡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100% 완전범죄가 없듯이 역사왜곡은 반드시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 흔적을 찾아 역사를 복원하는 길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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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여! 이러다간 중국과 일본에게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기사입력: 2011/05/12 [12:11]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한민족인들여 정신좀 차리고 살자.
맨날 집안에서 싸움질만하다 광활한 영토 다 말아먹고,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남과 북 갈라져 힘자랑 해봐야 붙어있는 명줄마저 끊어지면 모든것이 끝이다.
오랜 역사동안 멍청하게 살았으니 이제 정신 좀 차려야지 곰탱이 후손들아.
상부상조하여 화합 단결하여 세계에 한민족인의 웅비를 펼쳐라!
용(龍)오름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바닷물을 하늘로 말아올리는 `용오름' 현상이 지난 25일 오후 6시25분께 울릉도에서 약간 떨어진 죽도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이날 용오름 현상으로 생긴 물기둥은 지름 20m, 높이 500m를 웃돌았으며 30여분 동안 계속되다 물기둥이 옅어지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용오름 현상은 처음에는 가는 밧줄 모양이던 것이 수면에 물보라가 일며 거대한 물기둥으로 변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물기둥이 굵어지면서 구름층으로 빨려들어가 장관을 이뤘다. 울릉에서 용오름 현상이 나타난 것은 13년 만의 일이다.(2003.10.27퍼옴)
님들은 용오름 현상을 자연현상으로만 보시겠지요?
자연현상은 우리에게 크나큰 메세지를 주고 있는것입니다.
땅과 하늘이 닿을수 있는 것은 위와같이 용오름 뿐입니다.곧 물뿐이지요.땅과 하늘의 다리가 물이라는 것입니다.
환웅, 웅녀의 실제 유골상과 물의 수호신 용이 있는 유적
여신들의 묘라는 안내판인데 여신이란 누구인가?
위 안내판 내용은 여신들 묘가 여러기 인 모양이고 그렇다면 글쓴이 추정은 이 여신들 묘가 고조선 유적지에 있다면 이는 지신족(地神族) 이었던 웅녀족 이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이 지신족들도 오래전 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부도지 등에 써 있듯이 우리 하느님이 환인 하느님 하나뿐이 아니고 그 전서부터 북방계 몽골리안 중에 환족의 지도자가 다음 지도자를 골라 위를 넘기듯 이 웅녀족도 오래전서 부터 그 여신들이 다음 여신을 골라 전수 했을 것이니 그 여신들은 한명이 아니고 여러 명 이었을 수도 있다.
여신들이 묻혀 있는 유골. 여신뿐 아니라 동물의 뼈도 있는것 같다.
글쓴이가 추정해 보면 이 여신묘에서는 곰의 유골도 같이 출토 되므로 이는 곰을 토템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므로 웅녀족 이라는 확실한 근거 된다.
이상 글들과 다음글도 모두 글쓴이의 추리 이다.
여신들은 그 유골뿐 아니라 그 상도 흙으로 만들어 구어 묻었던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 여신은 누구 인가?
아무래도 아래 얼굴상은 웅녀 할머니가 확실 하다고 본다.
이 상은 1984년 10월 31 일에 출토되었는데 세계적으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한다.
이 상이 웅녀라는 더 확실한 근거는 눈에는 옥을 밖았는 것인데 玉의 우리말은 구슬이고 구술은 굿을 할때 신께 바치는 귀중한 보물이다. 또 우리 말에 관직에 있는 사람을 구슬아치 라 하고 법정 등에서 변명 하는것을 구실을 댄다 하니 그 굿을 하는 무당은 행정 사법까지 도맞았던 사람들이다.
이 여신상은 곧 세계 언론과 학계에 보고 되었다.
또하나 실제 웅녀 여신의 유골로 추정되는 이유는 주위에 많은 옥기가 있다는 점이다.
옥기 중에는 나중에 신라 금관 곡옥(曲玉)이 되는 곰 머리에 용 모습을 한 웅룡(熊龍)도 있다.
또 웅녀의 유골이라는 증거는 여기에 같이 묻힌옥으로 만든 머릿빗만 보아도 여신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옥이란 후에 또 설명이 되지만 당시는 매우 귀중한 보물 이었다.
다음 사진 가운데 큰 옥은 당시 생식만이 최 우선으로 생각하던 사회에서 남의녀 결합 을 상징적으로 조각한 옥 같은데 좌측은 사내의 남근이고 우측은 여음으로 성기를 과대하게 표현한것 같으며 그 아래 좌우에 있는 거북이 상은 아무래도 엎드린 암컷 거북 상이다.
위 거북이 후방위 교접을 하려는 엎드리 여자라는 말의 증거로 울산시 울주군 대곡리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 를 제시 한다.
다음 사진은 립박물관에서 캠코더로 촬영한 동영상을 캡춰 한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생식만이 삶의 최 우선이라고 생각했었다는 증거이다.
맨 위에 남근을 뻣친 사내가 있고 그 주위에 업드린 거북들은 엎드린 여인들을 상징이니 이는 당시의 성생활이 동물과 같은 후방위 교접 이었다는 것과 그 교합으로 새끼를 뱄다는것을 고래를 통하여 렌트겐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 옥 거북은 당시 후방위 교접을 하던 여음을 나타낸 그림이고 그것들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그 옥 거북은 여음을 상징하는 구멍 옆에 있다. 여시서 우리말의 뿌리를 보면 검둥이, 감둥이가 같드시 말이 부족하던 시절 아래아점 발음을 ?던 당시 사람들은 감,검,곰,굼이 같은 말 이었으며 그중 굼은 중세어로 여음이라는 구무가 되는데 이 구무가 지금 구멍이 된 것 이다. 따라서 아래 옥 거북 옆에 있는 구멍은 바로 여음을 뜻한다.
다음 유골은 역시 부근에서 출토된 것인데 그 부장품으로 보아 여신상이 아니고 남성 유골같으며 거기에 같이 묻혀있는 옥 유물은 터진데가 없는것으로 보아 곡옥도 아니고 웅룡도 아닌 하늘 천부인 ㅇ 을 뜻하는 ㅇ 들의 옥지환이 있는것으로 보아 환웅족 이었을 것으로 본다.
다음은 환웅을 상징하는 하늘 해를 향한 제단. 붉은 원통은 부근 깨진 질그릇을 보고 KBS가 추정 삽입한 그림으로 사내의 대표인 환웅의 빛이 구멍(여음)을 통하여 알(아기)이 많이 열리게 해 달라는 기원이 담긴것으로 본다.
이 원형 제단에 위 아기를 기원하는 질그릇 원통들이 수 없이 많은데 이 역시 고고 유물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KBS가 추정해 삽입한 그림이다.
그리고 아래 그림과 같이 하늘에 빌었을 것이다. 역시 KBS가 추정해 삽입한 그림
역시 KBS가 흙으로 구은 여신상을 참고로 추정해 삽입한 웅녀 상. 따라서 이 그림을 웅녀 할머니로 봐도 좋다.
그리고 이 웅녀 할머니는 하늘에 구름과 같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역시 KBS가 추정해 삽입한 여신 그림
따라서 이 여신상이 있는 제단 부근은 그들에게 엄청난 성소 이었을 것이다.
항공대 교양학부 우실하 교수 의 말
이 시대는 대략 4.5 00 년을 전후로 하는 초기 문명시대를 말한다.
이 곰족 웅녀 여신묘에서는 새 모양으로 구어 만든 흙도 출토 되는데 이는 새는 사+이로 바로 서고 솟는 ㅅ의 뜻을 가지며 이는 환숫과 사내의 남근을 의미 하기도 한다.
그곳 석관묘는 ㅁ 형도 있었는데
그 속의 유골 다리뼈가 x 자로 교차 고정 시켜 놓은곳이 꼭 한개 있다는데 이는 분명 환웅의 유골이 분명하다.
햇빛의 정기를 받는 나뭇가지. '하'.
그 빛을 누리(땅)인 곰네게게 전해주는 '나'
왜냐하면 신지녹도문 진본천부경 하나 둘 셋 ...열에서 하나의 '나' 는 환웅의 빛이 곰네 누리에 내리는 뜻 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리의 뼈를 이렇게 x 로 고정시켜 놓은것은 아무 한테나 할 수 없는것이고 그래서 이런 유골은 이것 단 하나 이기 때문인데 여기에 웅룡이 있는것은 웅녀를 사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웅녀족과 결합 했음을 의미 할까?
환웅의 유골로 추정
이것을 근거로 글 쓴이는 흔히들 그리던 원방각 형을 다음과 같이 다시 그려 본다.
위 바깟 둥근원은 위 원형제단이고 그 속 口 는 口 형 석관이며 그안 X 는 바로 환웅의 누리에 내리는 빛을 상징하는 다리뼈로 보기 때문이며 이렇게 하면 口속에 ㅿ가 4 개가 생기는데 이 네개 라는 네는 바로 웅여를 뜻하는 너+ 이 이기 때문이다.
아래 옥지환은 글 쓴이가 야후에서 퍼온 자료로 환웅의 빛이나 사상은 삼태극 이라는 점.
그렇다면 이 여신묘 등에 써진 옥이나 후에 제시 되는 웅룡(熊龍)의 옥들은 어느곳 산인가?
다음은 북경대 고고학 교수이고 옥 전문가인 조조홍 교수의 말을 들어 본다.
그러니까 고조선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옥 들은 압노강 부근 수암산의 옥이며 이 옥은 강원도 고성에서도 출토 되었다는 말이다.
玉은 바로 구슬 이고 구슬이란 굿을 할때 올리는 제물이다.
이 옥은 현대 기술로 가공해도 일주일 이상이 걸리는데
kbs 기자가 이 홍산에서 유물로 출토되는 옥을 홍산문화시대 가공법으로 가공하면 얼마나 걸릴것 같으냐고 옥가공 점문가에게 물으니
이 옥들은 아래 손바닥에의 옥만 해도 한화로 무려 일억이 상이 나간단다.
홍산인들은 당연히 옥 만드는 장인들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역시 KBS가 추정한 그림
북경대 고고학의 조조홍 교수는 그 옥을 소유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대해 말한다
위치 권력 재산이 있었다면 이 옥을 소유하고 부장품에 까지 묻었던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비교적 복잡한 사회란 바로 나라가 성립되는 시기를 말하는데 이 시기도 대략 4.500 년 전후이니 단기와 잘 맞아 떨어진다.
3) 사해유적
그렇다면 왜 이곳에 용의 유적이 있는가? 용은 우리말로 미르 이고 미르는 바로 무르> 물 이다.
따라서 물은 사람 사는데 필수 요건이기도 하겠지만 그 부근은 한반도와 달리 평지가 많고 만약 물 난리라도 나면 수십리 또는 수 백리를 뛰어야 살아 남는데 지금도 그곳은 물난리가 자주 나므로 물의 수호신 용을 섬기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용 머리는 말 같다. 그러나 웅녀족의 용 머리는 곰이다. 따라서 웅룡(熊龍) 이라 한다.
웅룡은 옥 뿐 아니라 동으로도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둘레가 터진 웅룡은 나중에 신라 금관의 곡옥(곡옥) 이 되기도 한다.
아래는 글 쓴이가 야후에서 퍼다 모았던 자료.
이런 왕관의 出 자는 당연히 신지녹도문자 셋에 나오는 환웅상이고 거기에 매단 곡옥은 웅녀의 웅룡(熊龍)이 시대에 따라 변한것으로 본다.
이 융룡이 나오는 곳의 거주지다.
따라서 웅녀족은 신석기 이전 부터 이 부근에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렇게 이른 시기 부터 여기서 곰과 용을 수호신으로 모시며 산 모양이다.
그들이 쓰던 씨를 갈아 벗기던 매돌 같은 석기로 보아 그들은 신석기 시대 부터 살았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 그들이 쓰던 석기
위와 같이 웅족만이 살던 땅에 환웅족이 들어왔는지 차츰 문화가 발달하고 성곽도 싸아진 모양이다.
국제 뇌교육 종합대학원 대학교 국학과 복기대 교수의 말
그 성곽을 쌓고 살던 사람은 중국이나 한국 사서에서 고조선 밖에 없다는 것이다.
드디어 본격적 고조선 유물 출토다.
당시 청동 철모를 ?던 모양이고
청동 창도 썼으며
특히 사람 천부인인 세모뿔 청동창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비파형 동검의 원조로 본다.
야후에서 퍼온것. 이는 창이나 칼의 용도로는 부적당 했을 것으로 아마 제례 의식용으로 ?을 것이다.
이 의식용 제기는 차츰 칼의 형태를 가춘다.
또 적봉시 삼좌점 산성에서는
출처:환웅, 웅녀의 실제 유골상과 물의 수호신 용이 있는 유적새로 쓰는 우리 역사
사찰(寺刹)에가면 龍과 연꽃을 표현한것이 많은데,우리에게 아래와 같은것을 깨달으라고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龍) ==용(龍)을 상상의 동물이라고 알고 있으나,용(龍)은 물을 상징하며,연꽃 또한 물에서 수생하는 식물로서,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용화세상이라함은 물의세상을 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왕을 다른말로 수신(水神)이라고 말하는것은,용은 물을 나타낸다는 표현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용화세상(龍華世上)은 ==>"물의나라" 를 말하며,사찰(寺刹)과 법당(法堂)은,물의나라 용궁(龍宮)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륵전 [彌勒殿] : 요약 ; 불교 사찰에서 미륵불을 모시는 당우(堂宇).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법당이다.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고, 자씨전(慈氏殿)·대자보전(大慈寶殿)이라도 한다.
미륵(彌勒)부처님(하느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에서 제도 받지 못한 제자들까지 모두 제도되어 지상낙원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개벽하는 부처님이시다!
미륵보살(하느님)을 뵙고 가르침을 들으면 오랜업장을 소멸하고 위없는 깨달음의 길에서 물러나지 않게 된다!
불교 대웅전은 원래 환웅을 모시던 곳 (22부) | ||||||||||||||||
대시전--> 환웅전--> 대웅전으로 명칭변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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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11세 도해단군 재위 57년 경인 원년(B.C1891) 단제께서는 오가(五加)에 명을 내려 12개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國仙蘇塗)를 설치케 하셨다. 그 주변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불렀다. 겨울 10월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하고 크게 장려하였다.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서는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큰 태양의 둥근 빛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박달나무 밑 환화(桓花) 위에 앉아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 가운데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이하생략) 정묘 38년(B.C1846) 백성들 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명을 하나라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B.C1846) 송화강변에 관청을 세워 배와 노, 기물을 세상에 널리 쓰이게 하였다. 3월 산 남쪽에서 삼신에게 제사지낼 때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 밤에 특별히 술을 하사하여 백성들과 함께 돌려 마셨다. 모든 유희가 끝난 후 누각에 올라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설명하고 오가(五加)를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이제부터 살생을 금하며, 잡은 것을 놓아주며, 옥문을 열고, 거지에게 밥을 주고, 사형을 없애노라"하시니 나라 안팎에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해설) * 경인년 기사의 환화(桓花)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바랍니다. 인류 최초로 공화제를 실시한 조선 (17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99§ion=sc6§ion2= * 정묘년 기사의 하나라의 도읍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바랍니다. 몽골은 단군의 후손으로 우리와 형제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82§ion=sc6§ion2= * 을해년 기사의 오가는 저가(猪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우가(牛加), 마가(馬加)라는 관직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신하들에게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국선(國仙)과 소도(蘇塗) 국선과 소도에 대한 <인터넷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중국의 사서에서 우리의 고유한 소도에 대해 폄하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천제를 지내던 신성한 지역인 일컫는 소도를 설명하면서 귀신, 도망자 등의 표현을 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도는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신성한 구역이므로, 설사 죄인이라도 그곳으로 피신하면 잡으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백과사전>에서는 국선은 예전에 화랑의 우두머리(?)를 이르던 말이고, 소도는 삼한시대 때 각 고을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백과사전>에서는 “소도란 마한국 안에 신도 색채의 특수구역을 설치한 장소이다.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제30> 한조(韓條)에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단군)이라 한다. 또 이들 모든 나라에 각기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라 한다. 긴 장대에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귀신을 섬긴다. 모든 도망자가 이곳에 이르면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 일쑤였다. 소도를 세우는 뜻은 부도(浮屠)와 같은 점이 있으나 그 하는 일에 선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원문) ?? : 古代???中所?置的含有神道色彩的特殊?域。?逃亡者至其中?可得到庇?。《三?志·魏志·?丸?卑?夷? 第三十》:“信鬼神,?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各有?邑,名之???。立大木??鼓,事鬼神。?亡逃至其中,皆不?之,好作?。其立??之?,有似浮屠,而所行善?有?。” 이밖에 <후한서〉와〈진서〉 등에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즉 소도는 제사가 행해지는 신성한 지역으로 성역이 된다. 한편 소도는 입목(立木)과 간목(竿木)을 나타내는 '솟대' 또는 '솔대'에서 온 말로 읍락의 원시 경계 표시로, 신체 혹은 제단으로 건립되는 큰 나무의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나아가 고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일어나는 신.구 양 문화의 갈등을 완화, 조절하는 제도적 장치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소도는 처음에는 나무 숭배사상에서 큰 나무를 의미하던 것이 후에 천신이 내려오는 계단 및 사는 곳 또는 신성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점차 개념이 확대 변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도는 제천행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원구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낸다. 천제를 지냄에 있어 반드시 임금이 몸소 제를 지내니 그 예법이 매우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모든 사람들이 생산한 것을 바치고 북치고 나팔 불며 온갖 놀이를 벌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니 진귀한 물건이 언덕에 산처럼 쌓였다. 대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곧 영토를 넓히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도의 제천은 곧 구리(九黎)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로부터 화를 당하여 함께 힘쓰고 이웃을 위하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한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엔 반드시 경당(?堂)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고 하여 단군조선과 신라의 화랑(花郞), 고구려의 조의(?衣) 등과 같이 국가의 간성을 길러내는 수련장이기도 했다. 국선(國仙)이란 바로 이들 선인(仙人)들의 최고 사부(師父)를 말하는 것이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에 “소도가 세워지는 곳마다 신의 형상의 웅상(雄常)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마한의 소도는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과 같은 제천행사이다. 소도를 처음 세운 분은 11세 도해단군이 아니라, 3세 부루단군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으로 보인다. 또한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의 기록에,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등이 있어 소도를 무척 신성시하고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위 <중국백과사전>의 간략한 설명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웅상(雄常) 웅상이란 천제를 지내는 장소인 소도 주변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제사지낸 상을 불렀던 이름이다. 웅상에 대한 중국사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데, 아래의 백민을 백의민족의 약자로 해석해 "숙신국에는 백의민족이 있다”로 해석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백민이 지명이라는 것은 <단군세기> 43대 구물단군의 기록 중 우하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이 어명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대목으로 입증된다. (번역) <산해경 해외서경> “백민국의 북쪽에 있는 숙신국에 이름이 웅상인 나무가 있다. 옛날 팔대제(=삼황오제)가 여기에서 이를 취하였다.” 곽박의 주에 웅을 락으로 만들었다. <진서 사이전 숙신씨> “숙신에 락상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중국의 성제 때 세워졌다. 그 나무의 껍질로 옷을 만들 수 있다.” (원문)《山海?·海外西?》:“??之?在白民北 有?名曰雄常。先入伐帝,于此取之。” 袁珂 校注引 郭璞 注:“雄或作?。”。《晋?·四夷?·??氏》:“??氏有?名?常,若中?有?帝代立,?其木生皮可衣。”。 (주 : 先入伐帝는 先八代帝의 오기로 보인다. 先入伐帝로는 해석이 이상해진다.) 또한 숙신국을 설명한 중국의 자료 중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어 소개한다. (번역) 숙신국 : <해외서경>에 숙신의 나라는 <대황동경>의 숙신씨의 나라이다. 중국과 외국학자들은 “진나라 이전 옛 책에 기록된 숙신은 바로 지금 만족의 최고 오래된 조상이다. 숙신족의 기원은 오도등에서 나온다. 한나라 이후 왕조의 사서에 나오는 읍루(후한,삼국), 물길(북조), 말갈(수,당), 여진(요,금,송,원,명)은 숙신의 후예로 역시 만주족의 조상이다. (원문) ??? :《海外西?》所?"??之?"?于《大荒??》"??氏之?"; 目前,中外?者公?的看法是,先秦古籍中的??人,就是今天?族的最早先民。??族起源于???。?代以后,不同朝代的史?上出?的邑?(后?,三?)、勿吉(北朝)、靺鞨(隋,唐), 女?(?,金,宋,元,明), 是??的后裔,也是?族的先民。 즉 부여와 고구려의 주축을 이루는 읍루, 물길, 말갈, 여진족이 숙신(=조선)의 후예이며 현 만주족(=청나라)의 조상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500년간 명나라의 속국인 소중화(小中華)가 되어 오히려 이들을 오랑캐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시작된 조선왕조가 우리민족사에 끼친 해악이 참으로 크다 하겠다.
대시전 --> 환웅전 --> 대웅전으로 이름이 바뀐다. 경인 원년에 세운 대시전(大始殿)은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모신 곳으로 일명 환웅전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이 환웅전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본전 자리를 내주고 뒷전인 삼성각(三聖閣)으로 옮겨가게 된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인의 성인을 모시는 삼성각도 있다. 중국에서는 사찰의 중심건물인 본전(本殿)을 대부분 대웅보전(大雄?殿)이라 부르고 있다. “대웅은 부처의 덕호이다. 대는 만 가지를 포함하여 있는 의미이며, 웅은 섭복마귀떼라는 의미이다. 불제자의 존칭을 대웅이라 했다(大雄是佛的德?。大者,是包含万有的意思;雄者,是?伏群魔的意思。因此佛弟子尊?他?大雄。)”라는 설명으로 대웅의 참 뜻을 숨기고 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고려팔관잡기>를 인용해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 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보아 알 수 있다.”라는 문구가 있어 현 사찰의 대웅전은 불교가 본당을 차지하면서 환웅전에서 이름이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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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좌상 마고여신상
용왕(龍王)
나가(那伽)라는 말은 용(龍)을 뜻하는데,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자유자재하심이,
마치 용(龍)이 허공이나 바다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니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여 나가정(那伽定)이라고 한 것이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대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 이시대 신라 왕궁을 용궁(龍宮)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수있다,
[스크랩] 가섭불연좌석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문인들의 전기(傳記)에서 모두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에 가섭불(迦葉佛, 부처의 이름. 과거 7불 가운데 여섯 번째 부처다)의 연좌석(宴坐石, 연좌는 좌선(坐禪). 좌선을 할 때 앉는 돌)이 있으니, 전불(前佛) 때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터가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다.”
<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동쪽에 신궁(新宮)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황룡(皇龍, 황룡(黃龍))이 나타났다. 그래서 왕이 이것을 의의하게 여겨, 신궁을 고쳐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연좌석은 불전(佛殿) 뒷쪽에 있었다.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돌 높이는 5·6척이나 되었지만 둘레는 고작 3발밖에 되지 않았다. 우뚝하게 서 있는데, 위는 평평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창건한 이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사찰의 스님이 여기에 쇠를 붙여 돌을 보호하였다.
찬(讚)한다.
불교가 침체한 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만 그대로 남아 있구나.
상전(桑田)이 몇 번이나 창해(滄海)가 되었는지 안타깝게도 우뚝하게 아직 옮기지도 않았네.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이 있고난 뒤로 불전(佛殿)과 탑이 모두 타버렸다. 그래서 이 돌도 흙 속에 파묻혀 겨우 지면처럼 평평해진 것이다.
<아함경(阿含經, 석가모니의 언행록. 소승불교의 경전이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가섭불은 현겁(賢劫, 세 주겁(住劫)의 하나)의 세 번째 부처다. 사람의 나이로 따져 2만 세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에 맞춰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해보면 언제나 성겁(成劫,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긴 시간의 하나. 세상이 생겨나 인류와 축생이 만들어지는 시기다. 4겁의 처음이다)의 초기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 한량 없는 수명)를 누렸다. 이것이 점점 줄어들어 8만 세에 이르면 바로 주겁(住劫)의 시작이 된다. 이때부터 또 100년마다 1세씩 감하여 10세가 되면 1감(減)이 되고, 다시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세가 되면 1증(增)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번 감하였다가 20번 더해지면 1주겁이 되는 것이다.
이 1주겁 동안 1천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 부처다. 네 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9감(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이 100세의 수를 누린 때부터 가섭불이 2만 세를 누릴 때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가 된다. 만일 현겁(現劫) 초기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拘留孫佛, 부처의 이름. 과거 7불의 하나) 때까지 또 몇 만 세(歲)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겁초(劫初)의 무량세를 누리던 때까지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석가세존으로부터 내려와 지금의 지원(至元, 원(元)나라 시대에 쓰였던 연호. 연대는 1264-1294) 18년 신사(辛巳, 1281)까지 벌써 2,230년인 것을 보면, 구류손불부터 가섭불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또 몇 만 세가 될 것이다.
우리 고려의 명사(名士) 오세문(吳世文, 고려 명종 때 학자. 벼슬이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렀다)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대금(大金) 정우(貞祐)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헤아려 4만 9,600여 세에 이르면 반고씨(盤古氏, 중국에서 천지개벽 때 처음 세상에 나왔다고 하는 제왕)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하였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 따르면 천지개벽한 상원갑자(上元甲子, 상수학(象數學)에서는 1백 80년을 1주(周)로 하고 그것을 3분한 상원갑자(上元甲子), 중원갑자(中元甲子), 하원갑자(下元甲子)로 했는데, 그 가운데 제1갑자 60년을 이름. 임금의 즉위를 종묘에 고하는 등 왕실이나 국가의 중대한 일을 행함에 있어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끌어다 쓴다) 때부터 원풍(元豊) 7년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641세라 하였다. 또 <찬고도(纂古圖)>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획린(獲麟, 기원전 477)까지가 276만 세라 하였다. 여러 경들을 살펴보면 가섭불 때부터 현재까지가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했으니, 겁초(劫初)에 천지가 개벽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린애 나이에 지나지 않는다. 삼가(三家)의 말이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이르지 못하니, 그들도 천지개벽의 설에 대해서는 꽤나 소홀했던 듯하다.
玉龍集及慈藏傳 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 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七伽藍之一也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 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皇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石之高可五六尺 來圍僅三? 幢立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裂處 寺僧貼鐵爲護 乃有讚曰 惠日沈輝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滄海 可惜巍然尙未遷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燼 而此石亦夷沒 而僅與地平矣 按阿含經 迦葉佛是賢劫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劫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時 爲住劫之初 自此又百年減一歲 至壽十歲時 爲一減 又增至人壽八萬歲時 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 爲一住劫 此一住劫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是第四尊也 四尊皆現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萬餘歲 若至賢劫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自拘留孫佛時 上至劫初無量歲壽時又幾何也 自釋尊下至于今至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自拘留孫佛 歷迦葉佛時 至于今 則直幾萬世也 有本朝名士吳世文 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又延禧宮錄事金希寧所撰大一歷法 自開闢上元甲子 至元豊甲子 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歲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歲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劫初開闢時爲兒子矣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전불시대 일곱 곳의 인연있는 절터
불교가 번성할 때의 신라 사람들은, 서라벌이야말로 전(前) 세상 부처님 시대로부터, 법수(法水)인 불교의 맥이 흐르는 곳이라고 믿었다. 전불(前佛) 시대부터 서라벌에는 일곱 곳의 인연있는 절 터 즉 ?7처 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가 있는데,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이 절 터를 일일이 적고, 상세하게 하나 하나 설명을 곁들인 협주(夾註)까지 달아 두었다.
열거한 순서는 창건 연대순과 같으니, 이는 후에 오면서 지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쇠다리 동쪽 하늘 거울 숲[金橋東天鏡林] 흥륜사(興輪寺)?이고, 둘째는 ?세 줄기의 내가 갈라지는 곳, 또는 모이는 곳[三川岐] 영흥사(永興寺)?이고, 셋째는 ?용궁 남쪽[龍宮南] 황룡사(黃龍寺 또는 皇龍寺)?이고, 넷째는 ?용궁 북쪽[龍宮北] 분황사(芬皇寺)?이고, 다섯째는 ?모래내 끄트머리[沙川尾]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이고, 여섯째는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숲[神遊林] 천왕사(天王寺 또는 四天王寺)?이고, 일곱째는 ?사위 맞아들인 밭[胥請田] 담엄사(曇嚴寺 또는 曇巖寺)?이다.
나정과 포석정
나 정 |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라는 나라가 되기 전 경주 일대는 진한< 辰韓 >의 땅으로 6부촌장<六部村長>이 있어 6개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기원전 69년 어느날, 6개 부락의 촌장이 알천언덕에 모여 화백회의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나정(蘿井)에 번쩍였다. 그곳을 살펴보니 백마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촌장들이 다가가니 백마가 울부짖으며 하늘로 올라가고 촌장들중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이 이곳 우물가에서 붉은 빛이 나는 큰 알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형의(形儀)가 아름다워 사람들은 그일을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다. 이 알 속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며 동천(東川)에 몸을 씻겼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줄지어 따르며 춤추었고,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日月)이 청명했으니, 촌장들은 하늘이 보낸 것으로 알고 아이를 잘 길렀다. 이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기원전 57년에 6부촌장이 모인 자리에서 추대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 이가 곧 신라<新羅> 제1대 임금이며, 나라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했고, 왕이 박과 같은 곳에서 나왔다는 점과 밝다는 뜻에서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고 아울러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세워져 있는 비석는 조선 순조<純祖> 2년(1802)에 세운 것으로 박혁거세왕을 기리기 위해 그 내력을 새긴 유허비<遺墟碑>이다.
포석정은 신라왕실에서 경주 서쪽 이궁원(離宮苑)에서 열리는 연회를 위해 만든 것으로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鮑魚)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溝)에 흐르게 하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이와같이 한낮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곳으로 알거나,또한 이곳은 927년 경애왕이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궁과 포석사는 어떤 곳이었을까?
포석정이 아니라 사당 사자를 써서 포석사 또는 줄여서 포사라 하고 있다. 포석사에서는 길례를 행하였다고 한다. 문노와 윤궁이 결혼을 할 때 진평대왕과 세종이 친히 포석사에 갔던 적이 있다. 만호 태후는 친히 신궁에 가서 만룡의 공주례를 행하고, 포(석)사에 나아가 길례를 행하였다. 또 춘추와 문희도 포(석)사에서 길례를 하여 결혼을 알렸었다. 그러니까 신라의 지배 세력들은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던 것이다.
그러면 포석사는 길례를 행하는 장소로만 쓰였을까? 무엇인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포석사에는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문노는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의 종주로 받들어진 인물이었다. 그의 화상이 포석사에 모셔진 까닭은, 포석가사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경애왕은 927년 11월, 이웃한 고울부(영천)지역에 견훤이 쳐들어온 상왕에서 포석사에 가서 연오를 한 것은, 말 그대로 잔치를 베풀어 놀았던 것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 달라고 빌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는 일찍부터 시조묘가 세워졌다. <삼국사기>네는 남해왕 3년(6)에 시조묘를 세웠다고 나온다. 과연 기원후 6년에 시조묘를 세웠을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혁거세가 죽은 후인 신라 초기에 신라 건국 세력을 모신 사당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크다. 당시 시조묘는 경주의 남산 서북록에 세워?으리라 생각된다. 혁거세가 사로 6촌에 나타난 장소가 현재 나정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의 무덤이 오릉에 있는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는 혁거세 세력이 자리잡았던 곳이 남산 서복록이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시조묘 또한 혁거세 세력이 정착하엿던 나정이나 금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포석사는 시조묘와 어떤 관련이 있는 장소였으리라 짐작된다.
1999년 4~5월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포석정 동남쪽 70M지점 일대에 대한 발굴을 하였고, 그 과정에 포석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 몇 점과 지와무지를 확인했다. 이는 포석정이 단순히 유상곡주를 하는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와 같은 사당이었을은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루어진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포석사는 일정한 규모의 건물로 이우러진 사당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안에 문노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인물들의 화상이 있었고 길례를 행하거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199년 발견된 포석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왓장

포석정 [鮑石亭]
통일신라 유적
브리태니커
사적 제1호.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용가>
東京明期月良, : 동경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入良沙寢矣見昆, :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隱吾下於叱古, : 아아, 둘은 내 아내것이나
二?隱誰支下焉古. : 둘은 누구의 것이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 본디 내 것이다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처용가는 신라 헌강왕때 처용이 지은 향가를 발전시킨 노래입니다. 처용이 밤늦도록 놀다 집에오니,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신이 부인과 함께 누워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용은 화를 내거나 달아나지 않고 마당에서 춤을 추며 처용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처용가의 배경설화
제49대 헌강대왕 대에 서울로부터 바다 안쪽(변두리)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고 담이 이어져 있으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이, 풍악과 노래 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고, 비와 바람이 철마다 순조로웠다.
?이때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왕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낮에 모래톱 가에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끼어 혼미해서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좌우의 신하에게 물으니, 일관이 답하였다. “이것은 동해용의 변괴입니다. 좋은 일[勝事]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이에 유사에게 명해 용을 위해 근처에다 절을 짓게 했다. 명령을 내리니,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졌는데, 이로 인해 「개운포」라 이름 했다.
동해용은 기뻐하여 곧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임금의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미하고 춤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은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가 왕정을 보좌하니, 처용이라 불렀다. 왕이 미녀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해 주어 그의 마음을 잡아두고자 했으며, 또한 급간 직을 하사했다.
그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역신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고는 밤에 그 집에 들어가 몰래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처용이 밖으로부터 집에 도착해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가사 생략…?이때에 귀신이 모습을 드러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이 노여움을 보이지 않으시니 감동하고 찬미합니다. 맹세컨대 지금 이후로 공의 형용을 그린 것을 보면 그 문에는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문에다 처용의 모습을 그려 붙여서 벽사(?邪)진경(進慶)하였다. 왕은 이 이윽고 돌아와 영취산 동쪽 기슭 좋은 곳을 점쳐 절을 세우고 ‘망해사’라 하고, 또한 ‘신방사’라 부르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포석정 [鮑石亭]의 메세지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헌강왕이 남산신(南山神)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춤을추었고,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 御舞祥審〉(혹은 御舞山神)이라 한다.)
우리가 포석정[鮑石亭]이라 알고있는 것은,용(龍)을 형상화한것으로, 용왕(龍王) 또는 수신(水神)에게,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포석사(鮑石祠) 사당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며, 물에서 깨달으라는 선지식인에 이정표 인것입니다.
첨성대
어학사전
[瞻星臺]신라 때, 천문을 관측하던 대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1]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다.
선덕여왕 말기(645~647)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건립한 이유는 "첨성대를 통해 제석신이 이 땅에 강림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했기 때문에 혹은 선덕여왕이 죽은 후에 "도리천으로 환생하기 위한 통로"로 세웠을 것이라고 했다.첨성대는 현실세계와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우주 우물"이다.
첨성대(瞻星臺)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나정(蘿井)의 우물을 지상에 올려 우물을 상징하는 것으로,포석정에서 의식을 행했던것으로 보아서,이곳에서도 어떤 의식을 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선지식인이 물에서 깨달으라고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 황룡사지는 용궁지 입니다.
우편번호 2006-09-24 11:30 출처: 황룡사지
제목 :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조사됨. 제보자 ; 청청 고운맘 스님(61세. 대한불교조계종 종로3가 대각사 전 총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밝히히게된 동기 : 1989년 3월부터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조사되엇다고 문화재관리국과 KBS. MBC. 한겨래신문. 불교신문. 민주일보. 경주신문 등등 각언론과 학계를 통하여 이를 알려왔으나 10년이 넘도록 아직것 이를 시정되지않고 근거도없이 왜곡된 억지 논리로 용궁지가 황룡사지로 둔갑하여 민족고대문화역사가 잘못 교육되고 대중들로하여금 인식이 계속되는것이 안타까워 다시 문화재청장님과 각 언론에 이를 밝히오니 보도참고자료를 자세히 검토하시어 이를 여론화하여 민족고대문화역사가 바로 잡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에하나 이와같음이 참고되어 문헌에의한 월성 동쪽에 위치한 황룡사지가 발굴조사된다면 민족고대문화역사는 세계속에 기리 빛을 발하는 위대한 문화민족의 후손이 될것이 확실 합니다. 황룡사 밭이랑에 뭍혔다는 황룡사 대종만 ?게된다면 세계가 놀라는 민족고대문화유산이 빛을 발휘하게된다고 확신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현 황룡사지가 용궁이라는것이 역사적으로 고증 입증이 될시는 신라 천년의 서라벌 궁궐의 웅장함은 세계속에 가장 으뜸가는 내불당을 겸한 궁궐문화역사가 될것입니다. 언론인 형제 여러분! 하시는 엄무가 아무리 바쁘시드래도 잠시 시간을 내어서 경주 옛 서라벌 용궁지에 가셔서 자세히 취재하고 세밀히 분석하여 현 황룡사지는 문헌에의한 용궁지라는 사실을 반듯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발굴조사여 황룡사지로 단정을 내린 결과 옛 서라벌 문화유산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삼국통일의 정신적 중심 사찰 고대민족문화유산인 황룡사지와 사천왕사지를 철길과 자동차 대로길이 다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월성 동쪽 황룡사지 유물은 관계당국의 무관심속에 알게모르게 많은 훼손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민 여론화하여 월성 동쪽 옛 황룡사지를 빠른 시일내로 발굴조사를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언론인 형제 여러분! 민족고대문화역사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여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6년 9월 11일 활룡사지제조사운동 대표 청청 고운맘 스님 합장 황룡사지 발굴이 잘못되었음을 고증하는 옛 문헌자료
1.문헌에 의한 황룡사지 위치는 월성 동쪽입니다. 현 황룡사지는 월성 북동쪽 분황사지와 겁쳐있습니다. 1) 삼국사기 진흥왕조 : 14년(553) 봄 2월에 왕이 해당 관청을 시켜 월성 동쪽에 새 대궐을 짓게 했는데, 누런 용이 그 터에 나타났다. 왕이 이상히 여겨 대궐을 고쳐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 2)삼국사기 진흥왕조 : 35년(574) q2ha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丈六像) 주조가 끝났는데, 구리쇠의 무게가 3만5천7근이요, 도금(鍍金)한 중량이 1만1백98푼 이었다. 3)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宴坐石)조 :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傳기)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잇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대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국사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 계유(553) 2월, 월성 동쪽에 신궁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黃, 黃)용이 나타났다. 이에 왕은 의아스럽게 여겨 신궁을 고쳐서 황룡사로 삼았다. 했다. 연좌석은 불전 뒷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6척이나 되엇으며 그 둘레는 겨우 세 발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뚝 서 있는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스님들께서 쇠를 붙여 보호했다. 2. 옛 문헌에 의한 황룡사지 위치는 용궁 남쪽 이었습니다. 분황사와 황룡사지 가운데 있었던 용궁지가 없어지는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 조사한 오류를 범하는 현 황룔사지 발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1)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宴坐石)조 :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傳記)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때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2)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조 :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 2월에 용궁 남쪽에 장차 대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황룡이 나타나므로 고쳐 절을 지었다.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기축(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 하였다. 3) 조선왕조 경주인 정극후(1577-1658) 지음 동경잡기간오 : 불국사기(佛國寺記) 에는 분황사는 용궁(龍宮)의 북족에 잇고 황룡사는 용궁의 남쪽에 있다. 라고 하였는데 신라 사람들이 왕궁을 용궁이라고 한 것은 대개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고 한 말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 분황사는 바로 안압지의 북족에 있으나 황룡사는 지금의 어느 곳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 동경잡기에는 월성의 동쪽에 있다 라고 하였으니, 대개 알 수 있다. 만약 지금 세속에 전하여지는 옛 황룡사라면 곧 월성의 북쪽이지 동쪽은 아닐 것이다. 지금 왕궁을 모두 용궁이라고 한 것을 보면 혹시 이 궁궐의 속칭이 용궁인 것은 양궁(梁宮) 대궁(大宮)과 같은 유(類)인 지도 모르겠다. 3.현 황룡사지 발굴 조사에서는 연좌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宴坐石)조 :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傳기)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잇다. ‘신라 월성 동족,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곳은 바로 전불(前佛) 대의 절터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 절중 하나다. 국사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 계유(553) 2월, 월성 동쪽에 신궁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黃, 黃)용이 나타났다. 이에 왕은 의아스럽게 여겨 신궁을 고쳐서 황룡사로 삼았다. 했다. 연좌석은 불전 뒷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6척이나 되엇으며 그 둘레는 겨우 세 발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뚝 서 있는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스님들께서 쇠를 붙여 보호했다. 4. 황룡사 금당은 9층 목탑 좌우에 금당이 있었다. 현 황룡사지는 목탑 후면 금당이다. 1)경주선생문안 동도역제자기 : 현덕 원년 갑인년(서기945) 황룡사의 9층탑과 좌우 금당의 1장 6척의 불상이 천화로 없어졌다. 이 해는 후주의 세종이 즉위한 해이다. 5. 현 황룡사지 발굴 조사에서 황룡사 대종을 ?아내지 못하였다. 1) 동경잡기. 금오승람 : 경덕왕 13년에 종을 부어 만들었는데 길이는 1장 3촌, 두깨는 9촌, 무게는 49만 7천5백81근. 속전에 지금 황룡사 밭이랑 사이에 뭍었다고 한다. 6. 현 황룡사지 목탑지는 높이 80m의 9층 목탑지를 세울 수 있는 면적이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는 현 황룡사지 금당지와 목탑지 사이 거리는 25m 밖에 되지를 않는다. 금당지 정 남향 앞에 무리하게 80m 높이의 목탑을 세울 리가 없다. 7. 옛 황룡사지 목탑은 8각 9층 목탑 고구려식 목탑이었다. 1)경주선생문안 동도역제자기 : 현덕 원년 갑인년(서기945) 황룡사의 9층탑과 좌우 금당의 1장 6척의 불상이 천화로 없어졌다. 이 해는 후주의 세종이 즉위한 해이다. 8. 옛 황룡사지 9층 목탑지 심초구 사리는 탑이 불탄 후 그 열에 의하여 진신사리 4과외는 모두가 모래알처럼 부서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사리가 모래알 처럼 부서질 정도의 높은 열이었다면 사리를 보안한 청동사리함 또한 강한 불의 열에 녹아흘러 내려 사리함의 본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1)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 또 속설에 이르기를,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돌솥 동쪽면에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가 바로 요(遼)의 응력 3년 계축(936년)이요, 본조 광종 5(4)년 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의 무의자(無衣子) 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듣것대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쪽에도 틈이없는네.‘ 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원 갑자(1264년) 이래로 원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 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햇으며,사바의 운수(雲水) 들도 몰려들어 참례했으며, 혹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그렇지않기도 했다. 진신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서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기서는 이상한 향기가 강하게 풍기어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황룡사 9층목탑 찰주본기가 새겨진 사리함은 9층 목탑이 벼락으로 1차 첫 번재 훼손 될을시 보수 증축하는 과정에서 이를 거내어 현 황룡사지 용궁 내불당 목탑지에 모셔둔것이 확실 합니다. 9.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작은 석탑 쪼각 한점도 발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황룡사 9층 목탑 안에는 작은 석탑 99기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작은 석탑 쪼각 한점도 발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0. 현 황룡사지 발굴 목탑지 중심부에는 철기둥을 세웠던 밭침대 유구가 없습니다. 1)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조 : 찰주기엔 이렇게 적혔다. ‘철반(鐵般)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백 83척이다. 11. 황룡사 남쪽에는 미탄사지가 있었습니다. 1)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의 남쪽 미탄사의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후(崔侯:치원)의 옛집이 분명하다.(현 경주국립박물관 과 박물관 앞 주차장 남쪽 일대 주변 논.밭이다.) 이상의 옛 문헌에 의한 고증으로 현재 발굴 조사된 현 황룡사지는 문헌에 기록된 용궁지 신라 궁궐에 속한 유지 이며. 목탑지와 후면 금당지는 용궁 내불당지 임이 확실 합니다. 문헌에 의한 황룡사지는 월성 동쪽에 위치한 9황동 마을 일대가 분명 합니다. 이곳 지역 일대에 아직도 남아있는 주춧돌 및 많은 건축 유지가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문화재관리청과 황룡사지 발굴 관계자 모두가 발굴전에 황룡사지에 대한 문헌 검토를 철저히 하였다고 발굴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으나, 황룡사지제조사운동 대표 청청 고운맘 스님 본인이 확인한 결과 발구 조사전 가장 기초적인 상식인 방향 실측조사 한번 없이 무작적 거창한 용궁지 유구에 현옥되어 착시현상에 도취되어 옛 황룡사지가 아닌 용궁지를 황룡사지로 잘못 발굴 조사하게 된것이 확실 합니다. 발굴보고서 참고자료에는 동도역세제자기. 동경잡기. 금오승람 문헌에 기록된 9층 목탑 좌우 금당과 황룡사 대종이 황룡사 밭 이랑에 뭍혀있다는 기록이 빠져 있습니다. 발굴조사전 황룡사에 관한 문헌자료 수집 확인 검토에 소흘한것이 확실 합니다. 이 렇게 모든 면에서 잘못 발굴조사를 하다보니 이에 잘못 착각하여 국립박물관. 경주박물관 부여박물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황룡사지 모형도 또한 잘못 조작되어 옛 황룡사지 모양도 인것처럼 많은 관람객을 현옥시키며, 외곡 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즉5시 철수 시켜야 되며, 하루 빨리 문헌에 의한 월성 동쪽 옛 황룡사지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된다고 봅니다. 2006년 9월 14일 황룡사지제조사운동본부 대표 청청 고운맘 스님 합장
[스크랩] 문무왕과 만파식적 설화
문무왕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은 신라 제30대 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의 맏아들로서 휘는 법민(法敏)이다.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과 병부령직을 겸임, 곧 태자로 봉해졌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버지를 도와 국사의 중대한 책무를 다하였다. 무열왕 7년(660년) 나ㆍ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당시의 나이는 36세였다.
대왕암의 전설 681년 7월 1일에 56세로 서거하였다. 유조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 동쪽 바다 대왕암 위에 장사하였다. [삼국유사]에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이 화장을 하여 동해에 뿌렸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는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만파식적 신라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 681년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다. 점을 친 일관은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했다.
이 설화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게 되는 신비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만파식적은 환웅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은 성격의 신성징표이다.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왕권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립하고 지배계층의 동질성을 재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아버지 문무왕과 김유신을 등장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물(神物)설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조, 백률사조(栢栗寺條),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신증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 등에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우리나라 특히 신라(新羅)의 수도 경주는 물에 관련된 신화나 전설,야화가 많은데,선지식인이 물에서 깨달으라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新羅)는 용궁(龍宮)과 용왕(龍王)으로 "물의나라" 인것입니다.
불상은 타임 캡슐이었다!
석굴암 불상입니다.
석굴암 불상의 모습을 보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부처가 악마를 항복시키는 인상, 왼손은 펴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펴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라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읍니다.
사람들은 불상(佛像)앞에서 복(福)을 빌고,절하고,염불하고,목탁을 두들기고,기도하고, 참선을 하는등 여러가지 의식을 행하고 하나, 이 사람은 불상을 보면 왜 이런 모습일까?
불상 이마에는 왜 보석 같은게 박혀있을까?
오른손은 검지를 왜 아래로 향하고 있을까?
불상은 왜 연꽃위에 앉아 있는 모습일까?
불상(佛像)은 선지식인(善知識人)이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이었던 것입니다.
오른손 검지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은 부처가 앉아 있는 연꽃을 가리키는 것이며, 연꽃이란 물에서 수생하는 식물로서,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는, 우리에게 물을 깔고 앉으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이마에 빛나는 보석은 그렇게 실행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계사에 있는 불상입니다.
불상은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있는 타임캡슐인 것입니다.
이사람이 보는 불상에 대하여 말씀 드립니다.
연꽃이란 물에서 수생하는 식물로서,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는, 우리에게 물을 깔고 앉으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오른손 손가락 세개를 펼쳐 보인것은,삼십년에 세월을 실행하라는 것이고,이마에 빛나는 보석은 그렇게 실행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의 몸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시면서 맹귀우목 (盲龜遇木)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백 년을 물 속에서 살다가 숨 한번 쉬기 위해 물 위로 떠오르는 순간 나무토막 하나를 만나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렇게 어렵게 받아(人身難得) 태어난 소중한 것입니다.
요한 2,23-3,21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뿐만 아니라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은 들어 보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 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 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지팡이는 불의(不義)를 치고 앞길을 인도하며 강한 의지하는 뜻의 표징물(表徵物)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것이다(본장 제2절 Ⅱ. 2. ㄴ). 따라서 야곱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짚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창세기 32장 10절), 장차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받들어 불의를 치고 또 그의 인도를 받으며 그를 의지함으로써, 죄악세계(罪惡世界)를 넘어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예수님도 자신을 표징하는 철장(鐵杖)을 가지고, 이 고해(苦海)의 세계를 건너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로 전 인류를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요한계시록 12장 5절, 요한계시록 2장 27절).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15:28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요일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요한 2,23-3,21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생노병사 그물에서 벗어날수 없고,생노병사 그물에서 벗어 나려면, 젊을때부터 건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며,20세이상 나이 들어가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아픈곳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수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물에 앉는것을 실행하시면, 인체에 쌓인 노폐물 제거는 물론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며, 당신의 건강을 지킬수 있읍니다.하루에 오전, 오후 30분이상 실행하며, 매일 습관을 들이 는 것이 중요합니다.(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 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는 방법)
묵묵히 실행하다 보면 모든것을 알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죽느냐,사느냐는 문제가 물속에 있습니다.
단,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얻을수 없습니다.
우리 선조님은 이와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여러가지 흔적을 남기며 메세지를 주고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신화가 아닌 사실의 역사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스크랩] 한민족의 문명

e-mail: mbbbk@daum.net
홈피: http://hompy.sayclub.com/mbbbk
※ 역사와 선지식인들의 정신을 바로 알리기 위하여,인터넷상에서 펌해온 자료도 있으니,"저작권침해"소지가 있다면 연락주시면 해당부분은 삭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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