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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신지녹도문자, 금문 해독 천부경 2 [한자는 우리 글자가 아니다]

신지녹도문자, 금문 해독 천부경 2  [한자는 우리 글자가 아니다] 
 

본론을 전개하기 전에, 한자도 우리 글자이고 음양오행설도 우리 사상이니 천부경은 최치원 81자를 한자와 음양오행설로 풀어야 한다는 이론이 너무 많아, 우선 이 문제부터 분명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지금도 최치원의 81자가 천부경이라 믿으면서 '一始無始一 析三極...' 하고 외우시는 분들에게 다음 사진을 제시한다.
 이 사진은 <한글학회지>에 실렸던 서울의 문화거리다. 한글을 잘 찾아보시라!

 

 

 이 거리가 과연 한국 거리인가? 미국 거리인가?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는가?
 
 우리가 지금 텔레비전 라디오를 시청하다 보면 소위 정치인, 교수 등 학자, 그리고 언론인들이 시국 토론을 하는 프로가 나온다. 그들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 등을 비판하면서.
 " 글로벌스탠다드 시기에 멀티미디어의 뉴 프론 티어가 돼야 하는데... "
 이게 도대체 한국 국민이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미국인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우리말은 토씨 밖에 없다. 이게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소위 지식인들이 하는 말이니 국민들은 자연 이들을 따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위 간판도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 지식인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 한국어를 쓰면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반드시 일본말을 써야 했었다.
조금 더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일제 강점기 나라를 찾겠다는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한 번 보자.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
 이것이 소위 전 백성이 일어나 외쳐야 할 독립선언서 내용이다. 여기서도 우리말이라곤 토씨 밖에 없다, 과연 이것을 당시 시골 백성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은  "나라말싸미 듕귁과 달라 어린 백성이 알 수 없으므로 옛 조상이 쓰던 우리 글자를 본떠(字倣古篆)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채 50 일도 되지 않아 최만리 등 당시 최고의 지식층인 선비들은, 우리한테는 엄연히 우리 상국인 중국의 한자가 있는데도 왜 전 부터 상것들이나 쓰던 언문을 고쳐서 우리 글자를 만들었느냐고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그 후에도 우리 선비들은 세종의 훈민정음은 버리고 무려 500년간 한자만 매달려 오다가 겨우 6.25 때서부터나 한글을 쓰는가 했더니, 이것도 불과 50년이 안 되어 이번엔 다시 우리 상국이 미국으로 바뀌니 위 거리 사진과 같이 미국의 영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애초 우리의 뿌리인 우리 하느님 때는 말도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글자도 한자는 그만 두고 아무런 글자가 없었다는 것은 우리의 어근을 찾아보면 안다 했다. 그러나 환웅이 우리말과 글자의 뿌리가 되는 [천부인]과, 우리 숫자의 뿌리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길인 [천부경]을 받아가지고 첫조선 개국지로 내려오면서 그 [하느님 교훈 천부경]을 혹시 잊거나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천부인] 과 당시 쓰던 그림 금문을 근간으로 글자를 만든 것이 바로 [신지녹도전자] 이며, 이는 신을 위하여 천제를 지낼 때나 썼으므로 다시 신지는 [유기(留記)]에 나오는 신획(神劃)을 만든 것이 바로 가림토의 어머니 ㄱ, ㄴ, ㄷ... 등이고, 이것은 후에 가림토가 되지만 막상 우리 선비들은 이 우리 글자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한 채 버리고 중국의 한자만 써 오다가 거의 5천 년이 흐른 후 세종에 의해 복원되며, 이것이 나중에 한글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최치원 당시는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을 수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만든 절름발이 글 이두로 " 一始無始一..." 을, 그것도 번역문이 아니라 그 천부경의 예찬문으로나 쓴 것인데, 소위 지금 우리의 뿌리를 찾겠다는 분들은 그 一始無始一... 의 한자를 그대로 외우며 우리 뿌리를 찾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코미디 중에 상 코미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혹 독자님들 중에는 말과 글자란 그 시대의 상황을 따라야 하니 한자가 쓰여질 때는 한자말이 우리말이고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반론을 펴시는 분이 너무 많은데, 그렇다면 일정 때는 일본 말과 일본 글자가 우리말, 우리 글자이고 이제는 위 거리 간판에서 보듯 영어와 영문이 우리말, 우리 글자라는 말이 되는 꼴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우리에게는 뿌리가 없다는 것이 되며, 또 하느님조차 우리말이 아닌 중국 한자말로 천부경을 전해 주었다는 결론도 된다. 따라서 글쓴이는 "한자는 우리 것이 아님"을 철저히 밝히려 한다.
 
지금 한글 전용이냐 국한문 혼용이냐를 TV 에서 토론하는 것을 보면,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분들의 이론은 한자는 애초 우리가 만들었고, 또 역사를 통하여 오랫동안 써 왔으니 우리글자라고 한다.
 이는 사실로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려면 사실 한자를 빼놓고는 그 말이나 글이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 순수한 말들을 죽이고, 원시한글을 발전시키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한자 만을 써 왔던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말을 죽이고 우리말을 하려면 한자음이 빠질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 틀린 말이다. 글쓴이 카페 게시판에는 [순 우리말 노자 도덕경 풀이]가 있다, 즉, 어느 것보다도 어렵다는 노자 도덕경도 순 우 말로 표현할 수가 있고, 심지어 우리 애국가도 순 우리말로 바꿔놓은 것이 책에 추가할 글에 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한자어에 노예가 된 것은 우리말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말을 쓰면 무식하다는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원시 한글이란 세종도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 서문]에서 누차 밝히고 있듯이 "옛 글자를 모방하여(字放古篆) "란 말이 수없이 나오고, 또 최만리 상소문을 보더라도 이 원시한글 문제가 무려 6차례나 거론되므로, 세종전 원시한글이 있었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글쓴이는 원시한글이란 신지신획을 이어받은 가림토(加臨土)가 된다는 증거를 이미 글쓴이 카페에 수없이 올렸다.
 
 "한자를 처음에는 우리가 만들었으니 우리 글자다?"
 이 한자, 즉 원시 한자인 금문을 우리가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말에 맞추어 발전된 글자가 되었으니 우리 글자가 아니다. 여기서 "원시한자를 우리가 만들었으니 한자도 우리 글자다" 하는 이론은 다음과 같이 비유  수 있다.
 지금 미국 자동차박람회에 가서, "달구지는 우리가 처음 만들었으니 자동차의 원조가 우리다." 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금문을 우리가 처음에는 만들었으나 연구, 발전시키어 그들의 언어에 맞춘 것은 중국인인데, 이제 와서 우리 글자라고 우기는 것은 위 달구지 이야기 같다고...
 그러나 그래도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우기시는 분들이 많아, 할 수 없이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서문까지 인용한 것이다. 즉, 세종은 '한자가 우리 글자이고 따라서 우리말과 맞아 떨어진다면 뭣 하러 다시 훈민정음을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훈민정음 서문의 글자 중에 '中國'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즉, 세종 당시에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을 수 없으니 '國中'을 '中國'이라고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고, 즉,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가 아니고, '나라 안에 말들이 달라서... '라는 것이다.
 세종이 쓰신 [훈민정음 서문]을 보며 中國이 말이 되는지 國中 이 말이 되는지 좀 해석해보자.
 
 원문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이를 中國으로 본 해석
 國之語音異乎 中國                           
 나라의 말과 소리가 中國과 달라
 
 與文字不相流通故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 자가 많으므로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내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이렇게 '中國'으로 해석하면 문장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를 만약 '國中'이라 한다면
  國之語音異乎 國中
  나라의 말과 소리가 나라 가운데에서도 달라
 
 이 해석 대로라면, 지금도 그렇지만 세종 당시에는 더욱 더 방언이 심해서 지방마다 말소리가 다르다는 말이고, 또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즉, 예를 들면 祖父母를 지방에 따라 '할배, 할매' 라고 하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라고도 하며, 女를 '가시내' 라고 하는가 하면 '계집'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귀와 말이 연결이 되질 않는다.
與文字不相流通故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여기서 '문자'란 물론 '기존 한자'다. 즉, '祖父'라는 한자는 '할배'나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통한다. 그런데 이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인가? 

 이것을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적었을 때는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지방에선 '할배'가 뭔지 모르며, '할배'라고 말하는 지방에선 '할아버지'가 원지 모르게 된다.
 즉, 우리말과 문자가 서로 맞지 않아 새로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이, 오히려 지방마다 서로 달라서 말과 문자가 맞지를 않게 된다. 그러니까 만약 '國中'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말이 되고, 따라서 아래 글들과도 완전 딴 소리가 아니라 그 반대 소리가 된다.
 
 지금 중국에서도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심해서 말로 해서 통하지 않으면 글자로 쓰고, 그러면 통한다.
 이상으로 볼 때 훈민정음 서문 '中國'을 '國中'으로 해석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종 당시에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없었으니 그것은 완전한 '國中'의 오기라고 우긴다.
 또 최만리 상소문에 '中國'이라는 단어는 모두 6번이나 나온다. 왕 앞에서 사서를 기록하는 사관이 단 한 자의 오기가 있어서도 되지 않는데, '中國'이라는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오기했다는 말인가? 따라서 최만리 상소문을 기록하던 사관들이 '國中'을 '中國'으로 오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종실록>도 보지 않은 경솔한 자 들의 경솔한 말 이다.
 
 그렇다면 세종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中國'이라는 소리가 왜 나왔을까?
 중국은 원래 화하(華夏)족이다. 그래서 현재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다. 즉, 현재 중화민국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지기네들은 '중화족'이라 했다, 다시 말하면 자기네 중화족은 세계의 중심에 있는 화하족으로 생각하고, 자기네 변방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무시해 불렀던 것이다.

東夷 : 물론 우리 한민족이다. 지금 우리 민족학을 논하는 학자들은 이 夷자가 弓에 大가 가해진 글자로 큰활을 가진 사람들의 뜻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고 중국인이 붙여준 이름에 감지덕지하고 있다. 더구나 아래 西戎이나 南蠻, 北狄에 비해 버러지나 오랑캐가 아닌 좋은 이름이라고 자위하지만, 어쨌건 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우리조차 東夷族이라고 뽐낸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西戎 : 서쪽에 사는 뙤놈
 南蠻 : 남쪽에 하는 벌레 같은 오랑캐 
 北狄 : 북쪽에 사는 도적 같은 오랑캐
 
 이상 우리 민족이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리기 오래 전부터 화하(華夏)족은 자신들만이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다 했으니, 그래서 중국(中國)이라는 말은 세종보다 더 올라가서 단군 때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 증거로 다음 글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닌 증거 중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기록으로 본 증거) 
 [단기고사]의 기록
 천제께서 유위자에게 물어가로대,
 " 우리 후손들의 성쇠의 기간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
 대답하여 가로되,
 " ...중략 ... 그때를 당하여 기하(基下)의 후손은 혹은 북방의 터를 보전하고 혹은 동방으로 천도를 하며 혹은 남방에 건국하리니, 큰 나라는 수 천 리요 작은 나라는 수 백 리인데, 후속들은 서로 침략이나 하다 보니 문화가 차츰 쇠퇴하여 조국의 문자는 돌아보지 않고 모화(慕華) 사상이 날로 높아져서, 그 천 년 뒤에는 모화 하는 미친 선비들이 나라에 가득하여 우리의 문자를 폐지하고 한문만을 전용하여 나라 이름이나 왕의 칭호나 벼슬 이름이나 지방의 이름, 그리고 사람의 이름이나 물건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화 식으로 하여 마침내 자손은 그 조상을 잃을 것이오니,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통한스러우니 서럽나이다. 엎드려 비오니 기하께서는 깊고 멀리 생각하시어 후일을 예비하소서. "
 천제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 선생은 참으로 천고의 신인(神人)이십니다. 능히 반 만 년 뒤의 일을 추측하시다니요. "
 그러시고 하명을 하셔서 사방 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
(帝問於有爲子曰吾之雲孫盛衰之期果如何曰.....中略.... 當其時基下之後孫或保基北方或遷都東方或建國南方大邦數千里小邦數百里後屬疏遠相尋以干戈文化漸退不顧祖國文字慕華思想日漸高廣後其千年則慕華狂儒遍滿國中全廢吾國文字專用漢文至於國名王號官名地名人名物名相同於中華終至於子孫失其祖先想見將來眞所痛恨也伏乞基下深思遠慮豫備後事帝曰先生眞千古神人能推測半萬年後事乃下詔立石碑於四方國境刻帝王名號刻以本國文字曰永遠保全國文 <檀奇古事>) 
 
 [단군세기] 기록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무자2년(BC 1833) 여름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의 좌측에 이르시어서 관경을 순수하신 비를 돌에 새겨서 세우게 했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겨서 전하게 했다. 그런데 이것이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다.
(十二世檀君阿漢 在位五十二年 丁亥元年 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 - 檀君世記)
 
 이 기록은 12세 단군 아한 때 기록으로, BC 1883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위 글 [단기고사] 에서 全廢吾國文字專用漢文, 즉 "우리의 문자를 폐지하고 한문만을 전용한다." 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도 원시한글 이야기가 나온다. 또 중국의 표현은 中華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이름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우리는 지금 그냥 '중국'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위 세종대왕 서문에서 '中國'을 그때는 중국이 없었으니 '國中'이라 해야 한다는 이론이 과연 타당한 이론이라 할 것인가?
 
 교착어인 우리말과 한문은 그 토씨나 어순에도 맞지 않는다.
 글자란 그 민족의 말과 맞아야 그 나라 글자가 된다.
 즉, 그 나라 말과 맞지 않는 글자는 그 나라 글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수입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착어인 우리말과 한문과는 그 토씨나 어순 등이 전연 맞지를 않는다. 교착어란, 우리말로 보면, 주어나 목적어 동사 다음에 '은, 는, 이, 가'등이 붙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 교착어는 현재 우리말은 물론 수메르어나 일본어 등 '우랄 알타이 언어'의 공통된 현상인데, 중국어나 인도어, 영어는 교착어가 아니다.
 
 한문으로 예를 든다.
우리말로 "나는 학교에 간다."
이것을 우리말 순서대로 한자로 쓰자면 "我 學校 去" 가 된다. 그러나 이런 문장은 한문에 없다.
이를 한문으로 옳게 쓰자면 "我去學敎"가 된다.
 我 : 나
 去 : 간다
 學敎 : 학교
 이것을 한문 어순대로 하면, "나. 간다. 학교"이다.
 
 더 예를 들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 중에 析三極
 析 : 쪼개다
 三 : 셋
 極 : 극
 이것을 한문 어순으로 하면 "쪼개다. 삼극" 인데, 우리말로 하면 "三極으로 쪼개다" 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
 중국인이 숫자를 쓰려면 "一二三四..." 라고 쓰고, 이것을 읽으려면 그대로 "니, 얼, 샨, 스..." 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一二三四..."라 쓰고 읽으려면 처음에는,
 一 : 한 일
 二 : 두 이
 三 : 석 삼
 四 : 넉 사
 .
 .
 .
 결국 一二三四...를 우리말 "하나, 둘, 셋, 넷..."으로 번역한 다음에야 이해를 한다.
 이와 같이 한자로 만든 한문은 우리말과 그 어순도 맞지 않지만, 그 토씨인 '은, 는, 이, 가' 등도 없다. 그러므로 한문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일단 번역해야 한다. 이 '번역해야만 알 수 있는 문자'가 과연 우리 문자인가?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한문 표기가 자기네 말과 어순이 일치하고 있으므로 새겨서 듣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인도어나 영어도 교착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번역하고 새겨들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번역은 할 필요가 없음은 물론 자기네 어순과도 맞는다. 이렇게 어순과 토씨와 번역을 해서 이해해야 하는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야기이고,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그렇다면 왜 한자가 우리글자라는 말이 생겼는가?
 
 글쓴이는 애초 '인류의 최초의 문자는 신지녹도 문자'라고 했다.
 그 이유는 원래 우리 조상들은 그 의사를 후세에 남기려면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을 단축 시킨것이 바로 금문(金文)이다. 따라서 금문이란 그림이나 글자라는 말 조차 없던 시대의 그림글자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신지는 신지녹도문을 만드니 이것이 최초의 문자가 되나 이는 천제를 지낼때나 쓰는 신의 문자였음으로 신지는 다시 인간의 글자를 만든것이 바로 유기에서 말하는 가람토의 어머니 신지신획이라 했고 이 신지신획은 3세 단군때 삼시랑 을보륵이 말하는 참글(眞書)가 된다.

따라서 을보륵이 만든 가림토는 일본에 건너가 '신대문자'가 되었는가 하면, 슈메르 등  인도 지방으로 퍼져나가 인도의 '부라미 문자'가 되었고, 한편 금문은 은허 갑골문을 지나 소전, 대전을 거처 현재의 한자로 발전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종 전까지는 우리 글자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한자에 매달려 오다가 그토록 한자가 우리 글자처럼 친숙해졌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는 우선 말과 글자가 몇 개 되지 않던 옛날에는, 그림 글자이며 뜻글인 금문이나 은허갑골문 등은 이해 하기가 좋으나 한편 모음이 오직 아래아점인 가림토는 완전한
뜻글도 못 되고 완전한 소리글도 못 되어 이해 하기사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림토도 일종의 상형문자이고 그 어군에나 통하던 소리글은 되었다. 이를 책에서 쓴 이론을 인용하면, 'ㅅ'은 그 모양대로 '서거나 솟거나 그 끝이 뾰족'하므로 서는 동물인 '사람', 그 모양 비슷한 '서까래', '사타구니', 또 그 잎의 모양과 같은 '삼(인삼 포함)', 그리고 그 끝이 뾰족한 '솔(松)' 등에 써졌지, 그 어군이 다른 하늘이나 땅에는 쓸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애초 원시한글인 가림토는 물론 지금 한글도 그 뿌리는 '천부인인 ㅇ ㅁ △ (ㅅ)' 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글은 완전한 상형문자나 소리글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한자 만을 신봉하던 학자들은 이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즉 ,'ㅅ'으로 발음되는 '事物, 事件' 등에는 쓸 수가 없는 글자였다. 즉, 상형문자도 아니고 소리글도 아니어서 혼동되는 글자였다. 따라서 당시 한문학자들은 말과 글자가 몇 마디 되지 않던 그 시절에는 차라리 완전한 상형문자, 즉 뜻글인 한자를 쓰는 게 더 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이유는 고조선이 망하고 중화족이 강한 나라가 되자 모화사상에 너무 빠졌던 미친 선비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미친 선비들의 '문자를 통한 정보의 독점욕' 때문, 즉 현재 우리 정치 언론계나 학자들처럼 영어를 쓰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유식한 체하는 사람들과 같은 자들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한자를 너무 오랫동안 대하다 보니 한자가 우리 글자처럼 친숙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한자의 시초는 우리가 만들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연구 발전시킨 글자가 아니기에 우리말과 맞지를 않으니 우리 글자가 아니다.
 
 또 한자는 글자 하나를 두 가지 음으로 읽는 글자가 많다
 즉, 한자의 인사말 '爾好'를 우리는 '이호' 라고 읽지만, 중국인들은 '니 하오'라 하고, 다시 보자는 '再見'을 우리는 '재견'이라고 읽지만, 그들은 '짜이지엔'이다.
 여기서 중국말인 '하오', 즉 好를 우리가 '하오', 再를 '짜이', 見을 '지엔'으로 발음하는 것은 세종 때까지만 해도 우리도 그랬다.
 이 세종 때 발음은 위진(魏秦) 시대, 즉 조조와 유현덕이 나오던 [삼국지] 시대의 발음이 그때까지 그대로 쓰는것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그들의 발음도 많이 변해서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듕귁' 이었으나, 지금은 '듕궈'이다.
 그런데 세종은 이 한자음의 두 마디를 한 마디로 축소시켜 '하오'를 '호', '짜이'를 '째', '찌엔'을 '짼' 로 축소하여 표시하다 보니, 훈민정음 발표 후 바로 써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에는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괴상한 글자들이 많다.
 이것을 현재 우리가 읽기 편하게 째(再)를 '재'로, 찌엔(見)을 '견'으로 완전하게 고친 이는 1824년 (순조 24 )년에 류희이다. 즉, 그가 저술한 그의 문집 <文通> 제19권 '한글 한자음'에 대한 연구서에서, 그는 四聲점, 즉 월인천강지곡 등 훈민정음 음에 점을 찍었던 것은 중국인들의 한자음에서는 필요하나 우리말에서는 불필요하며, 된소리도 우리에게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류희는 신숙주, 최세진, 박성원, 이광사, 이영익, 정동유 등의 학설을 수용, 비판하여 자신의 학설을 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함으로써 처음으로 우리말 위주의 연구를 시도하여, 조선시대 국어학 연구에 가장 돌출하다는 칭송도 받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음은 애초 중국인들의 음이 우리 입맛에 맞게 여러 사람을 통해 고쳐진 것뿐이니, 그러므로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참으로 뚱딴지 캐먹는 이론이 아닐 수 없다.
 
 또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 두 가지 
 1. '好'의 발음은 우리 식으로 '호'가 맞는데 중국인들이 이 발음이 안 되니까 풀어서 '하오'라고 하고, 再도 원래는 우리 음과 같은 '재'였는데 중국인들이 '재'발음이 되지 않아 '짜이'로, 見도 견 발음이 되질 않아 '찌엔'으로, 즉 우리의 원 발음을 중국인들이 비슷하게 흉내냈는가? 아니면, 그 말들이 함경도, 경상도 사투리와 같은 사투리에 불과한가?
 
2. 그 반대 경우이다. '짜이'가 우리에게는 그대로 발음이 잘 되지 않으니 '재'로, '지엔' 이 '견'으로 된 것일까?
 여기서 1번 중국인들은 다른 말에서 '호'나 '재'나 '견' 발음이 나오므로 그들이 그 발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2번 우리말에는 '하오' 정도는 몰라도 '짜이' 나 '찌엔' 같은 발음은 함경도에건 경상도에건 없다.
 
 그런데 이런 건 문제가 아니다
 우리말에 "달이 밝다"라고 하지만, "月이 밝다"는 말은 없다. 즉 달이 밝다는 말을 한문으로 하려면 '明月'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明月의 중국 발음은 '밍 위엘'이다. 여기서 우선 月의 발음만 보자. 한자는 소리글이 아닌 뜻글이다 위에서 말했듯 중국인들은 달을 보고 '위엘'이라 했다. 그리고 글자는 月 자를 쓴다. 이 月 자를 우리가 들여다 쓰자니 '위엘'이라는 말은 우리말에 없어 발음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월'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다음 우리말에 "사람이 많다"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多" 라 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한문으로 하자면 '人多'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도 多의 발음을 보자. 중국인들은 이것을 '뚜어'와 '뚜아' 의 중간음, 즉 '어' 와 '아'의 중간 음으로 발음한다. 이런 말도 우리말에는 없기 때문에 '똬'로 하려 했지만, 이 발음도 되지 않아 '다'로 하는 것이다.
 
이것도 반대로 생각해보자, 중국인들이 우리 한자를 가져갔다고 치자. 즉, 한자와 그 발음이 우리 것이어서 우리는 달을 '달' 과 '월'이라고 두 가지 말을 썼으며, 그 중 중국인들은 '달'은 가져가지 않고 이 '월'만 가져다가 그들 혀로 '월' 발음이 되지 않으니 '위엘'이라고 했을 것이며, 우리말 '많다'와 '다(多)' 둘 중에서 '많다'는 버리고 '다' 만 들여다가 '다' 발음이 되질 않으니 '뚜어'라고 했을 것 같은가?
 
 또 우리에게도 얼마 전 유행했던 중국 영화의 주제곡 '티엔미미(甛蜜密)'에서 好像花兒開在春風里의 발음은 우리 한자 발음으로는 "호상화아개재춘풍리" 인데, 중국 발음은 "하우쇙화러 가이짜이 텬풍리"(이것도 대강 우리 글자로 쓴 것이지, 원음은 한글로 표시 못함)이며, 우리의 '아리랑'과 같이 중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 月亮代表我的心" 도 우리의 발음은 "월량대표아적심"이지만, 그들의 발음은 "위엘량따오비에워더씬"이다. 이도 우리 한글로 중국어를 표현하기에는 부정확하므로 대강 적은 것이다. 이게 과연 우리 음인가?
 
 따라서 과연 우리가 고대에서 중국인들과 뒤엉켜 살았을 때 우리 혀도 그들과 같이 그렇게 돌아갔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분명 아닐진데, 그 증거로는 '우리 뿌리 말에는 이따위 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라 치고 우리의 한자음 "호상화아개춘풍리"를그들이 가져다가 "하우쇙화러 가이짜이 텬충리" 로 고쳤단 말인가?
 다음 "호상화아개춘풍리" 가 우리 한자, 우리 발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글세대나 옛 평민은 그만 두고, 한학자들까지도 말로 해서는 모르고 한자로 써놓고도 번역을 해야 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 식 대로 발음하면 번역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문맹자라도 다 알아 듣는다. 이것이 과연 우리말이고 글자인가?
 
 또 여기서도 위에 말한 어순 문제가 발생한다. 즉, 한자는 글자 하나하나를 말하고, 한문은 그 글자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甛蜜密는 우리말로 해석하면 "꿀같이 달콤해" 이다. 그러나 한자 글자 순 대로 한다면, "달콤해 꿀" 이다. "月亮代表我的心"은 이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달빛이 내 마음을 대표한다." 인데 한자 순서대로 하면, " 달빛이 대표한다. 내 마음" 이다. 즉, 위에 쓰인 문장들은 한문이고, 한문은 한자의 연결이며, 그 한문은 우리 맘대로 고칠 수도 없는 고정화된 하나의 문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자를 우리글이라고 가정하고, 우리 글자인 한자를 가지고 우리말을 만들 때 왜 우리 자신은 몰라도 중국인이나 알 수 있는 어법 등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왜 우리는 한문을 중국인들처럼 그대로 읽지 못하고 영어 번역하듯 번역해야만 우리가 알 수 있게 된단 말인가? 참으로 이런 문제를 전연 생각하지 않은 자들이 한문이 우리 글자라고 우기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한자는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말과 어순에 맞게 발전시킨 글자이고, 우리는 그 한자들을 들여다가 우리 발음에 맞게 고치고 번역하여 쓰는 것이니 이것이 왜 우리 글자인가? 이렇게 우리가 중국 발음을 고쳐 제멋대로 고쳐 발음하자 이곳저곳에서 한자의 발음이 다 달라지게 되어 각자가 만든 한자 발음으로 하면 서로 헷갈리어 서로 상통하기가 힘이 들게 되었다.
 도대체 우리말의 구성요소와 중국어의 구성요소를 전연 공부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자가 우리 글자라 하면서 [천부경] 해석을 한자와 음양오행서만 풀려 하고 이 방 이론을 공격하기에, 이 한자가 우리 글자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 글자는 원시그림글자 금문을 토대로한 신지녹도문자라 했다.
그리고 신지녹도문은 신의 글자이므로 [유기]에 나오는 신획(神劃)과 그것을 모체로 가림토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금문은 오히려 우리 가림토 등 글자보다 뜻을 이해하는데는 더 쉬웠으므로 중국인들에 의해 은허갑골문, 그리고 소전, 대전을 통하여 그들의 말과 함께 발전해왔다. 그러나 가림토는 더 이상 발전을 못하고 한자에 눌리어 길 가의 잡초처럼 버려지고 말았다. 이 버려진 가림토를 세종이 복원하여 훈민정음을 만든 동기 좀 보자.
 
 충령대군이었던 세종은 위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있으므로 자신이 왕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고, 따라서 왕이 되어 국가를 통치하는 王道보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이 한자 발음들을 중국음 (당시 연경, 현 북경) 그대로 통일시키고 싶어 중국 발음사전인 [홍무정음(洪武正韻)]을 참고한다. 그러나 한자로 설명  된 이 사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세종은 녹음기 같이 정확한 발음 사전을 만들 생각을 한다.
 왕세자가 아니니 마음대로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었던 충령은, 상것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쓰는 언문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언문을 자신이 用音合字, 즉 잘 조립한다면 글을 몰라 고생하는 우매한 백성들이 모두 글을 읽을 줄 알게 될 것 같아, 일생동안 자녀 몇 명과 누구 도음도 없이 혼자 만들다시피 한다. 이는 위에서 말한 [훈민정음 서문]이나 최만리 상소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충령은 그 후 왕이 되고서도 이 한글제작에 몰두한다. (단, 아들 몇 명을 조수로 하여)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하고, 바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우리 혀로는 돌아가지 않아 폐기된 발음들로 책을 만들고, 여기에 더하여 그간 자기가 그렇게 만들고 싶어 했던 정확한 중국발음사전까지 만들기 위해 신숙주, 성삼문 등을 요동에 수도 없이 보내어 신숙주, 성상문의 엉덩이는 말을 타느라고 생긴 굳은살까지 박였다. 왜 요동에 보냈는가 하면, 거에는 중국에서 귀양 온 황찬이란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발음의 천재였기 때문이었다. 신숙주 등은 그의 한자 발음을 새로 만든 한글로 적어 왔고, 드디어 훈민정음 반포 후 4년 만에 세종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던 한자 발음기호 책을 다시 만드니, 그 이름은 [동국정운(東國正韻)]이다. 그리하여 이 통일된 중국 북경음, 괴상한 음을 다시 우리 조상이 쓰던대로 바꾼것이 것이 현재 우리가 쓰는 한자음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이고, 그 한자 발음이 우리 발음 그대로라면 세종이 뭣 때문에 그 한자의 정확한 발음기호 책을 만들려고 그 고생을 했겠는가? 만약 한자가 우리 글자였다면 오히려 중국인들이 우리 발음을 배우려고 애썼어야 할 것 아닌가? 따라서 한자를 우리가 만들었으니 우리 글자라고 주장하면서, 비슷한 한자음과 우리말을 연구하고 있는 모 언어 연구소의 이론들은, 마치 미국 자동차박람회에 가서, '달구지는 우리가 먼저 만들었으니 자동차의 원조도 우리다.'라고 하는 말과 같다.
 
 따라서 최치원이 우리말을 우리 글자가 없어서 고육지책으로 이두문으로 쓴 한울소리, 천부경을 가지고, 한자로 써 있다 하여 한자 뜻으로 풀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코미디인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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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글쓴이 : 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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