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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리(理)와 천주의 개념을 중심으로-(양명수/이화여대)



【주제분류】윤리학, 형이상학
【주요어】천주, 리, 아퀴나스, 성리학, 능동인(T’ien-chu, Li, Aquinas,
Neo-Confucianism, the efficient cause)
【요약문】마테오 리치는 아퀴나스 사상을 빌어 성리학의 리를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하였다. 성리학은 만물의 자연 생성에 바탕을 둔 우주
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마테오 리치는 천주의 창조를 중심으로 우주발
생을 생각한다. 그 점에서 특별히 천주는 만물을 직접 통치하는 능동인이
되지만, 성리학의 리는 능동인이 될 수 없다. 이 문제는 도덕적 선의 주체
를 결정하는 문제다. 도덕론이 존재론에 흡수되어 있는 아퀴나스 신학에서
선은 존재 자체인 하느님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능동인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반면에 사물 밖의 어떤 능동인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에서 도덕의
주체는 인간 밖에 아무도 없다. 신학과 인문학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리가
능동인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마테오 리치는 리가 속성이라고 하지만,
리는 기에 선재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속성일 수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 실
체일 수도 없다. 만물 안에서 천명으로 통치하는 리는 도덕적 표준이요 이
념으로서 만물의 근원이다. 리는 능동인이 아닌 형상인 또는 능동인이 아
닌 목적인이라고 할 수 있다.
162 논문

 


Ⅰ. 들어가는 말
마테오 리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독교 신학으로 유학을 보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유학과 천주교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동시에 유학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부족한
점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학의 공통점을 바탕으
로 대화를 시작하고, 유학의 부족한 점과 기독교의 우월한 점을 들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겠다는 것이 마테오 리치의 전략이었
던 것 같다. 그는 중세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본 신학으로 되어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가지고 그 일을 했다. 유학에 기독교
와 통하는 점이 있다고 본 것은 원시 유학의 천 공경과 도덕을 강조
하는 인간론이었다. 그런데 유학은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 또는 인
간 구원을 위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 마테오 리치의 주장이다. 그는
의지를 지닌 기독교의 신을 믿어야 유학에서 바라던 도덕의 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에 마테오 리치의 견해에 동감을 표했던
중국의 유학자들은 그 점을 중시했던 것 같다. 유교적 이상의 실현에
기독교의 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정약용이
천주를 이해한 것도 그런 각도에서였다. 한편, 마테오 리치가 적극적
으로 비판한 것은 성리학이었다.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가치관과 세
계관은 성리학이었는데, 리치는 성리학을 비판하되 유학자체를 비판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중국 문화를 비판하되
그 근본을 흔들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 같다.
우리는 이 글에서 마테오 리치가 성리학을 비판한 논리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 보려고 한다. 리치의 성리학 비판은 성리학에서 만물
의 생성과 변화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리’(理)에 대한 비판이 핵심이
다. 그는 리와 천주를 비교하며 리가 결코 만물의 근원일 수 없음을
주장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리치가 리를 비판하고 기독교 신을 옹호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63

 

한 신학적 전제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전
제에 들어 있는 서구적인 세계관과 인간관을 살펴봄으로써, 성리학과
기독교는 서로 다른 세계관일 뿐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한다.
성리학에서는 태극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태극에서 만물이
생겼다고 말한다. 성리학에는 이처럼 만물의 근원을 찾아 세상을 설
명하는 형이상학이 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의 공격의 대상이 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리치의 기독교는 성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물
의 근원을 말하기 때문이다. 원시유학은 천(天)을 말하고 주나라 시
대부터 있어온 하늘에 대한 제사를 말했지만, 만물의 근원을 명시하
는 형이상학이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신을 공경하는 신앙심에서 벗
어나 자신의 선한 마음을 보존하고 찾는 인문주의 쪽으로 전환되고
있었던 시점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스에서 신화시대를 거쳐 소피
스트들과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에게로 중심이 옮겨갔듯이, 공자와 맹
자의 시대에는 귀신과 자연신으로부터 인간의 도덕심으로 중심이 옮
겨간 시대다. 그러나 물론 인문주의 초창기이므로 전 시대의 자연 숭
배 사상의 흔적이 있었다. 리치는 그러한 흔적을 가지고 대화의 근거
로 삼으려고 했지만 사실 원시 유학의 특징은 세상을 주재하는 인간
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
라고 했는데, 이는 전 시대의 흔적을 따라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을 인정하되 그것을 사변과 실천의 중심으로 삼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맹자는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아는 것이
라고 하여 인문주의를 확고하게 했다. 그러다가 오히려 주희의 성리
학에 와서 본체론을 끌어들인 형이상학이 생겨서 어떤 종교적 성격
을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성리학을 비판한 것도
바로 그 형이상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리학의 형
이상학이 서구의 형이상학적 사유와 충돌했던 것이다. 아무런 형이상
학이 없던 원시 유학은 기독교 형이상학과 충돌할 여지가 없었고, 우
주와 천지 만물의 조화의 근원을 찾은 성리학이, 제일 원인으로서의
164 논문

 

데우스(Deus)를 만물의 근원으로 내세운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
학과 충돌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주로 리의 내재의 모습을 들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천주를 설명할 때는 주로 그 초월자의 모습을 들어
성리학의 리와 다름을 설명한다. 천주의 초월적 측면 그리고 그 초월
에도 불구하고 만물 안에 있다고 할 때의 내재적 측면, 그 모두를 리
치는 아퀴나스 신학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그래도 리치가 보
유론(補儒論)을 내세우며 기독교의 하느님을 유학의 세계에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퀴나스 신학 때문이다. 아퀴나스에 비해 아우구스
티누스나 개신교 신학은 존재의 유비에 바탕을 둔 신학이 아니므로
보유론적인 설명이 힘들다. 결국 리치의 견해를 추적하는 우리의 연
구는 아퀴나스의 신학을 드러내고 그 특징을 성리학과 비교하는 작
업이 될 것이다. 비슷한 점이 있지만 결국 매우 다르기 때문에 성리
학이 리치의 공격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르다는 것이 우열
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리학은 천주교와 다른 세계관에서
나온 형이상학이다. 우주의 근원을 찾는 형이상학이라는 점에서 둘은
같지만, 근원으로 얘기되는 리와 기독교의 하느님은 매우 다르다. 아
퀴나스 신학에서 만물의 구성을 형상과 질료의 합성으로 보는 것과
성리학에서 만물의 구성을 리(理)와 기(氣)의 합으로 보는 것이 비슷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성의 힘이 사물 밖에 있다는 점에서 둘은 매우
다르다. 그래서 기(氣)는 아퀴나스 신학의 질료가 아니고, 리(理)는
아퀴나스의 형상인(形相因)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1) 꼭 일치하지 않는
다. 그렇다고 리가 생성 변화의 능동인(能動因)인 것은 더욱 아니다.

 

1) 송영배, 동서 철학의 교섭과 동서양 사유방식의 차이 , 서울, 논형,
2004, p.57.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65

 


Ⅱ. 아퀴나스의 하느님, 제일 능동인
리치는 기독교의 하느님을 천주(天主)라고 부르는 데, 유학의 천
개념을 염두에 두고 하늘의 주인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2) 그리고
성리학의 소이연(所以然) 개념을 가지고 천주를 설명한다. 천주는 ‘소
이연 중에 원초적 소이연’(所以然之初所以然)3) 이라고 한다. 그런데
리치가 천주를 원초적 소이연으로 본 것은 아퀴나스 신학의 ‘제일
원인’(prima causa)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 낱말이다.
천주가 소이연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우
리는 먼저 생성과 창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원인은 생성 또는 낳음(generatio)에 적용되는
개념이고, 제일 원인은 창조(creatio) 또는 피조물의 유출(emanatio)과
관련된 것이다. 생성은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어떤 것으로 향해 가는
변화(mutatio)를 의미하는 것이며4), 창조 또는 유출은 보편적 원인인
하느님으로부터 자연적 실체 전체가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변화가
아니다.5) 말하자면 생성이란 사람이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것 또는
집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존재자(有)에서 존재자(有)가
생겨나는 것이다.6) 그것은 어떤 “형상을 향한 운동(motus)”이라고 정

 

2)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역, 천주실의 ,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상권 2-16, p.108.
3)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 상권 1-6, p.61.
4) 토마스 아퀴나스, 김율 옮김, 자연의 원리들 , 서울: 철학과 현실
사, 2005, p.39.
5) Robert O’Donnell, 이재형 옮김, 쉽게 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 ,
서울: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2000, p.94도 같은 방식으로 생성과
창조를 구분하고 있다.
6) 사람이 사람에게서 생겨나는 것은 단적인 생성이라고 하고, 사람
이 지어 생긴 집은 상대적 생성(generatio secundum quid)이라고
한다. 상대적 생성은 인위적이어서 우유적인 형상이 현실화되는
166 논문

 

의되기도 한다.7) 형상은 형태(figura)와 성질(dispositio)을 가리킨다.
형상은 어떤 사물을 그것이게 하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사람의 형상
을 향한 운동의 결과 사람의 정자에서 사람이 생기고,8) 집이라는 형
상을 향한 운동의 결과 목수에 의해 나무는 집을 이룬다. 그러므로
생성은 무(無)가 아닌 유(有)에서 다른 성질과 형태를 가진 유(有)가
생겨나는 것이다. 유 또는 존재자(ens)9)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물이다.
그러므로 생성이란 엄밀히 말해서 합성물들에게 해당되는 개념이
다.10) 어떤 합성물이 다른 형태와 성질의 합성물이 되는 것이다. 잠
재태로서의 합성물이 현실태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 될 수 있던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생성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다시 말해
사람의 형상을 가질 수 있었던 정자가 영혼이라는 형상을 받아 사람
이 되는 것이다. 불의 생성은 불이 될 수 있었던 나무가 불의 형상을
취해 불이 되는 것이다.
성리학이 불교의 용어를 빌어 말하는 만물의 ‘화생’(化生)이라는
것을 아퀴나스의 ‘생성’(generatio)으로 볼 수 있다. 화생이란 말은 변
화와 생성을 말하는 것인데, 생성은 곧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 유학
의 역(易)이나 아퀴나스가 보는 생성이나 같다. 다만 뒤에서 보는 대
로 변화의 원인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아퀴나스 신학에서는 생성은
창조와 이어진다.
창조는 어떤 것에서 어떤 다른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존재가
아닌 무(無)에서 사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볼 때, 자연
것이다. 생성의 논의에서는, 자연적 실체들의 변화 곧 사람에게서
사람이 생겨나고, 소에서 소가 생겨나는 경우가 중요하다.

 

7)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p.21.
8) 아퀴나스는 사람이란 질료인 신체와 형상인 영혼의 합으로 이루
어진다고 본다. 신체의 씨는 정자라고 보고, 정자라는 질료에 영
혼이 부여됨으로 사람이 생성된다고 본다.
9) 유와 존재자라고 하는 번역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정의채 옮김,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 , 용어해설, 서울: 바오로
딸, 2005, p.137 이하 참조.
10)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p.39.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67

 

은 끊임없이 생성하지만, 그 생성은 창조를 빼놓고 생각될 수 없다.
생성은 창조의 연장이요, 계속되는 창조다. 무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잠재태에서 현실태가 생기는 식이 아니다. 어떤 잠재태도 없는 상태
에서 현실태의 피조물이 생겨난다. 하느님의 첫 창조가 그렇다. 그러
므로 순수 잠재태로서의 제일 질료를 창조하는 것부터가 하느님의
창조 작업이다. 제일 질료는 순수 잠재태로서 어떤 형상도 없으므로
우리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 인식과
정의(定義)는 형상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11) 순수 잠재태로서
의 제일 질료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 에서 말한 것
으로,12)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첫 피조물을 위해 질료가 준비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피조물 역시 질료와 형상의 합성물인
데, 형상은 하느님의 지성에 있으며 하느님은 질료가 없는 존재이므
로, 질료가 먼저 창조되어 있어야 첫 피조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순수 잠재태가 생겨나는 것은 생성이 아니다. 그 이후 질료와 형상의
합성물인 첫 피조물이 생긴 이후에, 그것들이 질료가 되어 만물이 생
성되는 것이다. 그 때 제일 질료가 다양한 형상을 입어 요소라고 하
는 첫 실체들이 생겨나는 것 역시 생성이 아니다. 생성이란 유(有)에
서 유(有)가 생기는 것인데, 제일 질료는 순수 잠재태이므로 유가 아
니기 때문이다. 무도 아니지만 유도 아닌 것이 아퀴나스 신학에서 제
일 질료의 위치다. 생성이 있는 존재자들은 소멸이 있는데, 생성이
없는 제일질료는 소멸도 없다.
성리학에서도 만물의 생성 변화를 말하고 아퀴나스도 생성을 말하
지만 그 생성의 동인(動因)을 보는 눈이 크게 다르다. 아퀴나스에게
서 사물의 생성이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능동
인 또는 운동인과 관련된 문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11)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p.37.
12)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 선한용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12권 3장 이하.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일 질료를 ‘무형의 질료’라고
하고, ‘거의 무’라고 했다.
168 논문

 

네 가지를 사물의 생성 변화의 원인으로 본다. 그 원인이란 질료인
(質料因), 형상인(形相因), 능동인(能動因), 목적인(目的因)이다. 생성
의 원인이라고 하면 흔히 생성되는 ‘까닭’이 먼저 생각난다. ‘까닭’은
말하자면 존재의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이 제일 먼
저 만물의 생성 변화의 원인이 된다. 무엇이 생성 변화의 목적이라
면, 그 무엇이 바로 목적인이다. 이처럼 원인이라는 말에서 목적인이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은 아퀴나스 신학이 도덕적 물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데, 그 점은 나중에 볼 것이다. 질료라고 하는 것은
재료를 의미하는 데, 그것이 어떻게 생성변화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
는가? 원인이라는 말에는 생성변화의 출발점이라는 뜻도 있으며 질
료는 그 점에서 원인이 된다. 아퀴나스 신학에서 질료는 단순히 재료
가 아니라 어떤 형상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며, 그 점에서 잠재태이기
때문이다. 잠재태란 말은 장차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잠재태는 현실태를 향하고 있음을 암시
하는 말이다. 잠재태에서 현실태가 되는 것이 생성변화이므로, 현실
태를 향하고 있는 질료는 생성 변화의 원인으로서 질료인이 된다. 형
상은 어떤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하는 것으로서, 잠재태가 현실태를 향
할 때 바로 그 현실태다. 능동인은 잠재태가 현실태로 가도록 이끄는
힘이다. 생성변화는 운동이요, 그 운동에는 힘이 필요한데, 그러한 운
동을 이끌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운동인 또는 능
동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네 가지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 원인이라
는 것이 각각 변화생성의 까닭, 변화의 출발점, 변화의 지향점, 변화
의 힘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능동인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변화생
성을 놓고 아퀴나스의 능동인 개념이야말로 동양과 다른 가장 큰 특
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비롯한 중국 한국의 생성관은 자연
(自然)이라는 말로 수렴되는 데, 그것은 만물의 생성 변화가 스스로
이루어진다 말이다. 반면에 아퀴나스 신학은 생성에 외부적 힘의 개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69

 

입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서의 자연을
부인한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아퀴나스에게서 생성이란 질료가 새로운 형상을 입는 것이요, 잠재
태가 현실태가 되는 것인데, “잠재태로 있는 것은 그 스스로 현실태
로 옮겨갈 수 없다”.13) 이것이 아퀴나스 자연학의 가장 큰 전제 가운
데 하나다. 그것은 신학 대전 에서 신 존재 증명과 관련해서 움직
임 곧 운동의 문제로 연결된다. 생성은 운동이요 움직임인데, “움직인
다는 것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시켜 가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14) 그런데 그 움직임은 움직여지는 것이다. 사물들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움직여진다. 그래서 모든 사물의 생성에는 어떤 사물
의 형상을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가는 작용자(operans)가 필요하
다. 아퀴나스는 구리를 가지고 동상을 만드는 장인을 예로 든다. 장인
은 능동자(effeciens)라고 불리기도 하고, 운동자(movens)나 작용자
(agens)라고 불리기도 한다. 어떤 사물이 생성되게 되는 원인에서 이
능동인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질료인과 형상인은 생성된 사물에
내재하고 있지만, 능동인은 사물 밖에 있기 때문이다.15) 그렇다면 사
람에게서 사람이 나오고, 소가 소를 낳는 것 같은 자연 사물의 생성
변화의 능동인은 무엇인가? 아퀴나스가 만물의 근원으로 말하고자 하
는 하느님은 초월자다. 초월자 하느님은 사물의 생성 변화 밖에서 그
변화의 능동인이 된다. 자연의 생성 변화를 놓고 하느님의 초월성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 네 가지 원인 중에서 능동인이다.16)

 

13)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p.47.
14) 토마스 아퀴나스, 정의채 역, 신학대전 1 , 1부, 제2 문제, 3절(앞으
로 1, 2, 3으로 표기한다), 서울: 성 바오로 출판사, 1989, p.56. 신학
대전 의 책 이름에 신학대전 1 , 신학대전 2 식으로 숫자가 붙
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정의채 교수가 번역한 책의 권수를 가리킨다.
15) 질료와 형상이 사물의 부분을 이룬다고 해서 내적 원인이라고 하
고, 능동인은 생성된 사물 밖에 있다고 해서 외적 원인이라고 한다.
16) 아우구스티누스도 생성변화의 원인을 작용인 또는 능동인의 문제로
본다(성염 역, 신국론 , 왜관: 분도출판사, 2004, 5, 9, 4, p.553 참조).
170 논문

 

아퀴나스는 자연학에서 출발해서 신학을 이끌어 내는 데, 그 요점
은 자연적 실체의 생성 원인이 자연 밖에 있다는 데 있다. 거기서 핵
심적인 것이 능동인이다. 물론 제일 질료도 피조물이므로 이미 자연
밖의 창조주의 개입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고, 형상도 하느님 안에
있는 초월적 형상이 모든 형상의 근원이 되므로 역시 초월자를 전제
로 하는 개념이지만, 질료와 형상은 생성된 사물의 부분을 이룬다.17)
그러나 능동인은 생성된 사물 밖에 있는 것으로 하느님의 초월성을
잘 표현해 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신학대전 첫 권에서 신의 존재
를 증명하면서 첫째와 둘째 번의 증명으로 사물의 운동인과 능동인
의 문제를 가지고 다룬다.18) 하느님은 제일 동자(primum movens)요,
제일능동인(prima causa effeciens)이다. 이 개념은 다른 것에 의해 움
직여지는 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움직이는 것을 추적하고, 결과물로부
터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서 내린 결론이다.
하느님은 제일 동자(第一 動者)요 제일 능동인으로서 현재 사물의
생성에도 운동인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퀴나스의 견해라
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탄생을 보자. 아퀴나스를 따
라 사람의 정자를 질료로 보고 혼을 형상으로 본다면, 사람의 생성이
란 부모에게서 받은 정자에 혼이 부여되면서 생기는 것이다. 사람의
혼이야말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하느님의 지혜안
에 있는 질료 없는 초월적 형상(사람 이데아)을 근원적 형상으로 삼
는 것이지만, 불완전하게나마 부모에게도 있던 것이다. 형상은 사물
에 내재한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적 사유

 

17) 예를 들어 사람의 이념 곧 참사람의 이데아는 하느님의 지성 안
에 있지만, 현실적인 어떤 특정한 사람 안에도 사람의 성질과 형
태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다만 참사람
이 되는 것은 영원한 목표로 남아 있다.
18) 신 존재 증명의 첫 번째는 운동인의 문제요, 두 번째는 능동인의
문제로 되어 있지만 자연의 원리들 , p.47에서 보듯이 능동인과
운동인은 같이 말할 수 있다(R. O’donell, 쉽게 풀어 쓴 아퀴나
스 철학 , p.49 또한 참고).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71

 

로 볼 때, 한 인간에게 혼이 부여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의 연
장이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아이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의
이데아를 향한 운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생각 안에 있는
사람의 이데아를 완벽히 구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이데아를 재
현(representatio)하는 운동의 결과 한 인간이 자기 부모에게서 생성되
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동은 질료인 정자에 하느님이 혼을 불어넣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불어넣는 그 행위가 작용이요 운동이다. 그
런 식으로 하느님은 모든 자연생성물의 원인이다. 마테오 리치는 성
리학에서 근원이라고 일컫는 리(理)가 지금 작동해서 수레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지적하는데,19) 성리학의 리와 달리 천주는 운동인이요
능동인으로서 지금도 일하시며 만물을 생성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다시 말해 마테오 리치는 아퀴나스를 따라, 현재의 생
성 변화가 천주의 직접 개입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초월자의 개입을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낳고 소가 소를 낳는 자연 실체의 생성은 그 부모를
원인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문제는 첫 종자가 어떻
게 생겼느냐의 문제로 환원된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 따르면,
첫 종자를 찾아 따져 올라가면 순수 현실태인 제일 동자(動者)에 도
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한히 소급해 올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한히 소급한다는 것은 원인이 없다는 것이요, 원인이 없으면 지금
의 결과가 있을 수 없다. 신 존재 증명을 더 분석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다만 순수 현실태로서 제일 동자인 하느님이 어떤 것
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고 오로지 움직여 줄 뿐인데, 제이 동자는
그렇게 힘을 받아 그 다음 존재자를 탄생케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다양한 자연 사물이 번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제일 동자인
하느님이 제이 동자를 생겨나게 하는 것, 그것이 창조다. 아퀴나스에
게서 하느님의 창조는 모든 작용과 운동(actio, motus) 중에서 가장
첫 번째 것으로서,20) 만물의 보편적 작용인이 된다. 이런 식으로 생

 


19) “則今有車理 豈不動而生一乘車乎?”( 천주실의 , 상권 2-10, p.91)
172 논문

 

각하면 하느님의 운동력은 최초 운동 곧 창조 이후 수많은 매개물을
통해 현재의 생성에 그 운동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어떤 사물을 낳는 사물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며,21) 결국은 하느님에 의해서 생성 변화
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생성에 개입하고 생성을
주관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설명하든 모두 하느님의 직접 섭리와 통치를 얘기한다. 아퀴
나스는 “모든 것이 보편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것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섭리에 종속된다”22)고 한다. 그가 말하는 하느님의 섭리는
모든 사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데 있는데,23) 그
처럼 목적을 향하도록 질서 지어주는 힘이 작용인이요, 능동인이요,
운동인인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물에 목적을 부여하는 분으로서 첫
행동자(primum agens)가 되고, “첫 행동자인 하느님의 모든 원인성은
모든 유(有 omnia entia)에 이르는 것이니 그것은 종(種)의 근원적 구
성요소들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또한 개체적인 근원적 구성요
소들에 관해서도 그렇다.”24) 하느님은 사물의 형상(이데아)을 통해서
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물들의 생성변화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결과들에 어떤 원인들을 지정하든 하느님은
그것들에 그런 결과들을 산출하기 위한 능력을 준다.”25) 이념으로 통
치할 뿐 아니라 개별 현상에 직접 개입하고 통치한다는 얘기다. 자연

 

20) 토마스 아퀴나스, 정의채 역, 신학대전 6 , 1, 45, 1, 서울: 바오
로딸, 1999), p.85.
21) 사물은 “그 자체로서 움직여지며 움직여 주는 것”(movens, quod
per se movetur)이다.(정의채 역, 신학대전 10 , 1, 75, 1, p.61)
부모가 자식 탄생의 능동인 곧 움직여 주는 것이 되는 것 같지
만, 그 자체로서는 움직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능동인이 될
수 없는 것이 그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22) 정의채 역, 신학대전 3 , 1, 22, 2, p.133.
23) 같은 곳.
24) 같은 곳.
25) 정의채 역, 신학대전 3 , 1, 22, 3, p.145.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73

 

사물은 물론이고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이 일으키는 생성변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유의지의 행위 자체는 원인으로서의 하느님께 환원되
는 것”26)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은 먼저 만물에 목적을 부
여하여 만물이 있을 까닭이 되는 분으로 목적인이요, 그 다음에 힘을
부여하여 만물의 생성변화를 그런 목적으로 이끄는 능동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27) 여하튼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직접 섭리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만물의 생성 변화에 목적을 부여하고 목적 달성의 능
력을 부여하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현재의 생성 변화를 일으키는 가
까운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런 원인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위한 매
개물로서, 그 매개물들은 하느님의 직접 섭리를 부정할 수 있는 존재
가 아니고, 오히려 “원인성의 품위를 피조물들에게 나누어주기 위
한”28)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의 결과다.
우리가 아퀴나스 신학의 능동인에 주목하는 까닭은, 성리학의 리도
목적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형이상학인 성리학에서
리는 인간이 도달할 이념으로서 인간을 통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념에 도달하는 능력까지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주재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테오 리치
가 가져온 아퀴나스 신학이 성리학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점은 능동
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하느님의 현재 사물의 능동인이 되는 방식을 두 가
지로 설명했다. 그런데 제일 원인인 하느님의 첫 작용이 매개물들을
통해 지금의 생성 변화에 도달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에도 하느
님이 다른 원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

 

26) 정의채 역, 신학대전 3 , 1, 22, 2, p.139.
27) 이 문제를 자연의 원리들 에서는, 능동자는 생성의 방식에서
앞서고 목적은 실체와 완성의 방식에서 앞선다고 한다. 목적이
없는 운동은 없다. 형상과 질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어서, 형상
은 질료보다 완성에서 앞서고, 질료는 형상보다 생성과 시간에서
앞선다고 말한다( 자연의 원리들 , p.75).
28) 정의채 역, 신학대전 3 , 1, 22, 3, p.145.
174 논문

 

용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느님인 제일 원인의 위치는, 수평선상에
배열된 매개 원인들의 끝인 첫 자리이기 보다는 수직적인 것으로 보
아야 한다. 수평적으로 이해하면 하느님의 원인됨은 과거가 되고 수
직적으로 이해하면 현재 사건이 된다. 결과에서 원인으로 추적해 올
라가는 구도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 것이다. 그것은 현
실 세계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현
실 세계의 존재에 묶어두는 측면이 있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
레스에게 실체라면 우선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실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아퀴나스 신학에서 초월자 하느님과 현실 세계를 좀 더 밀착
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이 세상과 하느님의 세계가 어느 정도 연
속성이 있게 되고 그 결과 나타난 표현이 ‘유출’이라는 것이다. 아퀴
나스는 세상 만물의 생겨남을 하느님으로부터의 유출(emanatio)이라
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물론 피조물 세상과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두
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연속성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이
것은 하느님이 인간 세상의 ‘원형적 모형’이라고 보는 데서도 드러난
다. 여하튼 아퀴나스 신학에서는 하느님이나 이데아의 세계만 현실이
아니라 세상은 세상대로 현실이고, 세상 질서와 제도는 단순히 악이
아니고, 또는 단순히 악을 막는 소극적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며, 공
동선이라는 적극적 선을 이루는 사명을 담당하게 된다. 이것은 아퀴
나스가 중세 신학자로서 국가와 교회를 종합해야 하는 필요성을 반
영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연결 고리를 따라 제일 원인 또는 만물
의 근원을 찾는 방식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가 그렇듯이 아퀴나스에게도 플라톤적인 구도가 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이상적 인간이란 이 세상에서 찾
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는 초월적 형상 곧 원형적
모형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제일 원인과 제이 원인 사이 다시 말해서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거리 때문에 결국은 수직적 구도가
된다.
모든 사물이 어떤 다른 원인으로부터 원인되어진 것(causatum)이라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75

 

는 명제의 근거를 아퀴나스는 사물의 존재가 참여(participatio)로 말
미암아서만 존재일 수 있다는 데서 찾는다.29)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원인의 개념이 결국은 플라톤적인 참여의 개념 안에서만 그 의
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별 사물이 이데아 또는 형상에 참여
하는 플라톤의 학설에서 유래한 참여 개념을 가지고 피조물의 조물
주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은, 제일 원인과 결과물들의 관계를 수직
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아나 형상은 모든 생성변
화의 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플라톤에게서 형상이 개별 사물에 나타
나는 파루지아(parousia)는 능동인의 개념으로 발전하지 않는데, 아퀴
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능동인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하느님
의 직접 통치를 말하고자 한 것 같다. 피조물은 하느님에 참여하지
만, 그런 수직적 구도 안에서 하느님은 보편적 능동인으로서 직접 섭
리를 통해 피조물 하나하나를 섭리하고 통치하는 것이다.30)
아퀴나스에게서 모든 사물은 스스로 생성되지 않는다. 자연의 생성
변화에 자연 밖의 존재자가 능동인으로 목적인으로 그리고 형상인으
로 작용한다. 그런 면에서 아퀴나스의 하느님이나 마테오 리치의 천
주는 자연의 만물 밖에 있는 초월자다.

 

29) 정의채 역, 신학대전 6 , 1, 44, 1, p.55.
30) 직접 통치에 대한 설명으로는 장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서울: 동과서, 2003, p.89 참조. 물론 여기서는 하느님의 목적에
맞지 않는 사물의 생성 변화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된다. 주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일으키는 문제이지만, 사
자가 양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자연현상도 논란거리가 된다. 그
런 폭력은 하느님의 선성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악의 문제와 관련된 신정론의 문제다. 여기서는 상
세하게 논하지 않고, 다만 아퀴나스는 개별적인 악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고 믿는다는 점만 지적해 두기로 하자. 다시 말해 그 악도 전체
적으로 보면 선에 이바지한다고 하는 식으로 하느님의 직접 개
입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래서 결함을 허락한다는 것이다(정의채
역, 신학대전 3 , 1, 22, 2, p.137).
176 논문

 

Ⅲ. 마테오 리치의 천주와 성리학의 리:
원인과 소이연(所以然)

 

마테오 리치가 천주를 소이연의 소이연으로 보는 것은, 리와 달리
천주가 초월자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성리학의 리가
인간의 마음과 사물 안에 있으므로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는 데,31)
이것은 역으로 기독교의 천주가 사물이나 사람의 마음 바깥의 존재
임을 말하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로서는 만물 바깥의 존재라야 주재
할 수 있다. 이는 주재라고 하는 개념을 아퀴나스적인 제일 운동인
또는 제일 능동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동인이야말로
천주의 창조주됨과 통치를 잘 표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천주는 만
물 바깥의 능동인이며 제일 능동인으로서 창조주이고, 그 창조 행위
는 지금도 계속되는 것으로서 만물의 생성변화를 주재한다. 말하자면
주재란 계속된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창조주와 주재자
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32) 그렇다면
창조 없이는 주재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주재라는 말은 창
조라는 말에 종속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주의 능동인 또는 운동
인 됨은 만물의 첫 시조를 창조한 창조주로서 직접 섭리와 통치를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생성 변화에 운동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천주를 사물 밖의 초월자로 볼 때, 그것은 천주를 특히 만물의 운

 

31) “중국의 문인들이나 학자들이 ‘리’를 따져서 말할 때에는…”’리’는
마음 속에 있음”. 혹은 “’리’는 사물 속에 있음”을 말합니다.”((中
國文人學士講論理者… 惑 “在人心”, 惑 “在事物”),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 상권 2-8, p.87).
32) “대체적으로 이 세상의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만물을 주재하는
것과 만들어 내는 것은 도리가 두 가지인 것처럼 보입니다.”(마
테오 리치, 천주실의 , 상권 1-4, p.49). 두 가지 도리가 아니라
는 말이다.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77

 

동인과 목적인으로 보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분명하게 말한다.”운
동인과 목적인, 이 둘은 그 사물 밖에, 그 사물에서 초월하여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33)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아퀴나스 신학의 가장
커다란 전제는 모든 사물은 스스로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그
래서 리치는 말한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이룰 수 없고(不能自成)
밖에서 하는 자(外爲者)가 있어 이루어진다.”34) 동양적인 자연을 부
인하고, 근대적인 인간 주체도 부인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조차도 그 자유의지의 행위는 원인으로서의 하느님께 환원되는
것이다. 리치는 그것을 “높은 분이 세상 사람의 마음을 주재”35)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어떻든 리치는 아퀴나스를 따라 사물과 현상을 그
러하게 하는 원인을 찾는 데, 원인 중에서 능동인 또는 작용인을 가
장 중요하게 말한다. 그것 역시 아퀴나스를 따른 것이다. 아퀴나스는
말했다. “하느님이 제일 근원이라는 것은…능동인의 영역에서다.”36)
이것은 목적인과의 관계에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는 대목이다. 사실
근원이 된다는 것은 뒤에서 보듯이 동서양의 형이상학에서 만물의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측면이 있을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퀴나스 형이상학에서는 선(bonitas)보다 존재
(ens)가 ‘개념적으로’ 앞선다.37) 존재가 선보다 개념적으로 앞선다는
것은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 존재의 목적보다 존재의 생성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성이 먼저 인식하는 것에서 출
발한다는 얘기도 되고,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개별
실체 곧 제일 실체로부터 출발해서 보편 원인을 찾는다는 얘기도 된
다. 그것은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 능동인의 문제에서 시작한다는 말
과 같다. 생성에서는 능동인이 목적인보다 앞서기 때문이다.38) 그 결

 

33) “作者爲者, 此二在物之外, 超於物之先者也”( 천주실의 상권 1-6, p.60).
34) “凡物不能自成, 必須外爲者, 以成之”( 천주실의 상권 1-4, p.50),
외위자를 번역자는 ‘외재적인 운동인’이라고 번역한다.
35) “此達尊主宰世間人心”( 천주실의 상권 1-3, p.46).
36) 정의채 역, 신학대전 1 1, 4, 1, p.85.
37) 정의채 역, 신학대전 1 1, 5, 2, p.98.
178 논문

 

과 성리학과 달리 아퀴나스의 도덕론은 존재론에 흡수되어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고 할 때의 스스로는 무엇보다도 ‘저절로’ 또는
‘자기 힘으로’의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부인하면
운동인 또는 능동인을 밖에서 찾게 되고, ‘그러함’에 초점을 맞추어
‘스스로 그러함’을 부인하면 형상인을 밖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39)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하는 측면도 있으므로 리치는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을 따라 작용인 또는 운동인 문제를 제일 먼저 거론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능동인이야 말로 사물 밖에, 다시 말해 자연 밖의
것으로 천주의 초월성을 말하는 데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
치가 수레 제작의 예를 들어 네 가지 원인을 말할 때,40) 작용인이나
운동인은 수레 제작자에 해당하니, 운동인이야말로 생성 변화를 주관
하는 창조자인 하느님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마
테오 리치는 사물이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38) 주 28 참조.
39) 그러므로 마테오 리치가 천주의 소이연됨을 형상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말한 것( 천주실의 , 상권1-6, p.60)은 잘못으로 보인다.
리치는 형상인이 사물에 내재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퀴나
스도 말하고 있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p.53). 다시 말해
사물의 형태와 성질이 바로 형상인의 현실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사물의 완전한 성질로서의 형상인은 하느님 속에 원형으로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형상인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모형적 혹은 원형적 형상들이다.”( 신학대전 6 , 1, 44,
3, 정의채 역, p.71). 피조물은 그 본성을 따라 “하느님의 지성 안
에 있는 이념을 표현하는 데 근거하여 하느님과의 유사성에 도
달한다”(같은 곳).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 있는 원형적 형상에 참
여함으로 표현하지만, 그래서 형상인이 사물에 내재한다는 표현
을 쓸 수 있지만, 하느님이 형상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하
느님이 사물 바깥이라는 점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능동
인 또는 운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에게서 능동인과 목
적인은 분명히 사물 밖이기 때문이다.
40) 천주실의 , 상권1-6, p.59.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79

 


위해, “만약 어떤 사물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의당히 하나의 자기가 먼저 존재하고 있어야만, 자기를 만들어낸다고
하겠습니다.”41)라고 한다. “하나의 자기가 먼저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必宜先有一己)란, 현실태가 잠재태에 앞서야 함을 말한다. 사람
이 있어야 거기서 사람이 생겨나고, 불이 있어야 어디에 불을 붙여
불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최초 사람 그리고 최초의 불은 어
디서 생겼는가? 그것은 창조된 것이요, 창조자는 모든 것들의 운동
원인이 되는 현실태로서 순수 현실태다.
그 문제를 놓고 중국 선비가 묻는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에게서
태어나고, 가축은 가축에게서 생겨나고, 모든 것들이 모두 이렇지 않
은 것이 없음을 관찰해 보면, 만물이 스스로 만물이 되는 것이지, 천
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42) 만물이 자기 부모에
게서 생겨나면, 만물이 부모에게서 난다고 해야지 왜 스스로 생겨난
다고 했을까? 중국 선비의 질문은, 사람이 사람에게서 생겨나고 소는
소에서 생겨나는 것이어서 생명 탄생의 동력을 만물이 스스로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 만물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는 말로 이해되
어져야 한다. 이 문제는 부모의 부모를 거슬러 올라가 제일 처음 사
람 또는 제일 처음의 소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시조의 문제다. 다시 말하면 맨 처음에 세상과 만물이 어떻
게 생겼을까 하는 문제다. 리치는 “천주께서 만물을 만들어 내어, 이
에 모든 종류의 시조들을 처음으로 변화 생성시키신 것입니다. 일단
시조들이 있고 나면, 이 시조에서 스스로 생명이 생겨나옵니다”43)라
고 한다. 시조들 이후 만물은 모두 자기 부모에게서 생겨나니 그렇다
면 가까운 원인이 있고, 그러한 가까운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주

 


41) “如有一物能自作己, 必宜先有一己, 以爲之作”, 천주실의 상권
1-4, p.51.
42) “然今觀人從人生, 畜從畜生, 凡物莫不皆然, 則似物自爲物, 於天主
無關者”, 천주실의 , 상권, 1-6, p.57.
43) 천주실의 , 상권, 1-6, p.57.
180 논문

 


에 닿는다는 것이다. 가깝고 개별적인 소이연이 있고, 지극히 보편적
이고 지극히 큰(至公至大) 소이연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천주다.44)
그 지극히 큰 소이연인 천주는 천지를 장악하고 있으며, 만물의 생육
은 그런 천주의 장악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45)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아퀴나스처럼 마테오 리치도 시조의 창조자인 제일 원인으로서
의 천주가 수직적으로 만물의 생성을 직접 섭리하고 통치하고 있음
을 말하는 것이다. “위에 있는 것이 없는 지극히 위대한 소이연”(無
上至大之所以然)46)이라는 말도 천주의 수직적 통치를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천주가 만물의 생성 변화에 직접 개입하고 통치한다는 것
은, 만물의 시조를 따져 올라가더라도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주희나 퇴계의 견해는 다르다. 주희는 음양의 기가
‘저절로’ 응결하여 암수의 종자가 생기고 그 이후에는 그 종자에서 만
물이 생겨나간다고 한다.47) 또는 현재의 많은 사람은 처음 사람에게서
생겨난 것인데, 처음에 사람의 종자가 생긴 것은 기의 “자연변화”(自
然變化)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48) 퇴계는 우주 자연의 생성 변화는
“태극 스스로의 동정이며, 천명 스스로의 유행이다. 어찌 다른 무엇의
시킴이 있겠는가”49)고 한다. 다시 말해 자연은 자력으로 자기 원인적
으로 저절로 그러하다. 중국 선비의 질문은 그런 성리학의 자연관을
반영한 질문이다. 기독교의 성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인간과 천지 만
물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과 달리, 성리학에서는 기의 자연변화에 의
한 만물의 자연발생을 본다. 그것은 현실태가 잠재태를 현실태로 이끌

 


44) 천주실의 , 상권, 1-6, p.60.
45) “만약 천주가 이 천지를 주관(장악)하지 않고 있다면 천지가 어
떻게 만물을 낳고 기를 수가 있겠습니까?”( 천주실의 상권 1-6,
p.61).
46) 천주실의 , 상권, 1-6, p.61.
47) 한형조,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 서울: 세계사, 2002, p.64의 인용
문 참조.
48) 같은 곳, 인용문 참조.
49) 이광호, 「상제관을 중심으로 본 유학과 기독교의 만남」, 유학사
상연구 , 제 19집, 서울: 한국유교학회, 2003, p.554.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81

 

어 만물이 변화 생성한다는 마테오 리치의 생성론과 다르다.
마테오 리치 식으로 생각하면 태초란 아무 것도 없던 무에서 만물
이 생겨난 시간이다. 하느님은 먼저 제일 질료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
순수 잠재태로서의 제일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고 운동의 힘을 주어
만물의 종자가 생기게 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하느님 안에 있는
형상을 따라 제일 질료로부터 원소(elementum)들이 형성되고, 첫 합
성물(compositio formae)인 그 원소들이 질료로서 하느님 안에 있는
종(種)의 형상들을 따라 사물의 합성물(compositio rei)을 구성하여
만물의 시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그 운동력은 하느님에게서 나
온다. 그것이 창세기의 정신을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꾸민 아퀴나스의 천지 창조 이론이다. 거기에는 순수 현실
태인 하느님의 동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발생설과는 거리가 멀다.
아퀴나스에게서 첫 시조의 탄생은 “특수한 유출”로서, 첫 사람은 사
람에게서 나지 않고 첫 소는 소에게서 나지 않는다. 첫 시조라는 현
실태는 그 보다 앞선 현실태에서 생기고,50) 그 현실태는 사람이 아
니라 하느님이고 하느님 안의 이데아 또는 마테오 리치가 모자(模者)
라고 부르는 형상인이다. 사람은 참사람의 본성을 품고 있는 천주에
게서 생기고, 천주가 자기 생각 속의 사람의 본성을 질료에 부여하여
생긴다. 그것이 자연 생성이 아닌 창조의 원리다. 생성하는 자연의
기원은 자연이 아닌 하느님의 창조다.
무로부터의 창조도 그렇다. 말하자면 하느님만 있고 아무 것도 없

 

50)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아퀴나스의 가장 큰 전제 가운데
하나다. “우리에게 있어서 불완전한 것으로 발견되는 질료적 근
원은 단적으로 첫째 것이 아니며 그것에 다른 어떤 완전한 것이
선행하는 것이다. 즉 胚種은 배종에서 출생하는 동물의 근원일지
라도 배종은 자기가 그것에서 나오는 동물이나 식물을 자기보다
앞서 갖고 있다. 사실 가능태 안에 있는 것 전에 현실적으로 있
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가능태에 있는 有는 현실
태에 있는 어떤 유에 의해서가 아니면 현실태로 이끌어지지 않
기 때문이다.”( 신학대전 1 , 1, 4, 1, 정의채 역, p.86)
182 논문

 

던 상태에서 첫 사람과 첫 사물이 생겨난 것이다. 아퀴나스는 말한
다. “제 1근원으로부터 유(有) 전체의 보편적인 유출이 고찰될 때 이
런 유출에 어떤 유(有)가 먼저 전제될 수는 없다.”51) 그러므로 “전존
재의 유출인 창조는 무라는 유 아닌 것에서(ex non ente quod est
nihil) 있게 된다.”52) 물론 여기서 무(nihil)라는 것은 하느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피조물도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주희가 말하는
기(氣)도 없는 상태다. 그것은 유(有)를 마루로 삼는 유학과 달라 보
인다. 물론 리치는 유학자들처럼 불교나 도교의 무를 부인하는 데,
그 까닭은 세상의 존재 원인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이다.53) 창조주를 생각하지 않는 불교나 도교가 무를 근원으로
본다면 무에서 유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가 볼 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지, 무에서 유가 ‘생성’될 수 없다. 창조
란 순수 현실태에서 현실태가 생기는 것이며, 만물의 참된 성질(형상
인)과 덕성(목적인)으로부터 그런 것을 표현하는(representatio) 성질을
가진 존재가 생기는 것이다. 하느님은 생각 속에 그런 성질들을 그
참의 상태에서 오롯이 가지고 있으므로, 거기로부터 다양한 성질과
형태를 가진 만물이 유출될 수 있다. 그래서 리치는 말한다. “어느
것은 아랫것의 덕성을 빼어나게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천주께
서 만물의 본성을 자기 속에 가지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54)
주희도 세상의 소이연을 생각하기 위해 첫 시조를 생각했지만 그
런 시조가 없던 무의 세계를 생각한 것은 아니다. 무에서 처음 생긴

 

51) 신학대전 6 , 1, 45, 1, 정의채 역, p.87.
52) 같은 곳.
53) 천주실의 상권 2-1, p.73.
54) “惑粹然包下之德, 如天主含萬物之性是也” 2-12, p.96. 만물의 참
성질이란 결국 만물의 선한 덕을 말한다. 참 덕으로서의 참 성질
은 하느님 안에 있다. 그래서 형상인과 목적인이 같아진다. 사람
이 참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함을 닮는 것이다(아퀴나
스, 신학대전 1 , 1, 4, 2. p.88 참조). “하느님은 사물을 산출하
는 제일 원인이므로 하느님 안에는 만물의 모든 완전성이 우월
한 양태로 있어야 한다.”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83

 

첫 시조란 생각할 수 없다. 시간 안에서 생각한 것이지, 시간 밖의
초시간적인 존재를 존재자체로 여기는 상상력이 주희에게는 없다. 말
하자면 성리학에는 창조란 없고 오직 생성변화만 있기 때문에 동인
(動因)이 밖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시조를 거슬러 올
라가는 직선적 사유 방식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의 인과적 사유 방식
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도 아퀴나스나 리치의 ‘원인’과 성리학의 ‘소
이연’은 다르다. 성리학에는 무라는 개념이 없으며, 그러므로 무에서
유가 생기는 첫 시작이라는 개념도 없다. 세상은 시작도 끝도 없다.
주희는 말한다. “음양은 시작이 없고 동정은 끄트머리가 없다.”55) 생
성변화의 동인을 만물 안에서 찾는 주희로서는 무에서 유가 생기는
맨 처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자 마테오 리치가 볼 때 시
작도 끝도 없는 것은 오로지 천주에게 해당되는 말이다.56) 아우구스
티누스 이후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 존재로서, 시작도 있
고 끝도 있는 세상의 피조물과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그런 식으
로 피조물의 한계를 시간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인간의 한계는 그런 시간과 존재의 문제가 아
니다. 오히려 마음에서 한계를 보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
음은 덕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외물(外物)에 끌려 천명을 따르지 못하
는 한계의 원천이다. 한계는 도덕적인 것이지 시간과 존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처럼 시간과 존재의 소멸에서 한계를 보지 않은 것은 성
리학이 실체론적 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의
관념이 성리학에 없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무는 실체들의
없음을 말하는 데, 서양적인 실체 관념이 없는 성리학에서는 그런 실
체가 없는 무의 관념도 없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개
별화된 제일 실체를 중시했다. 무를 표시하는 논 엔스(non ens, 비존
재자)의 엔스(ens, 존재자)는 개별화된 실체다. 무란 어떤 개별화된

 

55) “陰陽無始 動靜無端 “, 한형조, 위의 책, p.56.
56) 천주를 가리켜 무시자(無始者), 또는 무시지물(無始之物)이라고 표
현한다. 천주실의 , 상권 2-4, p.78.
184 논문

 

실체도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그런 실체의 유무를 중심으
로 생각했다면, 성리학은 만물이 연결 고리 속에서 순환되는 것을 보
았다. 아퀴나스나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개체는 성리학에서 볼 때 기
(氣)가 뭉친 것이며, 소멸은 다시 원래의 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체
는 기가 뭉쳤다가 흩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일 뿐이다. “운동이 실
체의 한 양상이 아니라 실체가 운동의 한 양상이다.”57)고 할 수 있
다. 그러므로 개별화나 개체성의 아이덴티티가 그리 강하지 않다. 성
리학에서는 개체의 관념이 약했기 때문에 무의 관념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성리학의 소이연과 아퀴나스 철학의 원인은 비
슷하지만 전혀 다른 사유 방식에서 생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기
본적으로 소이연은 내재적이지만 원인은 바깥이다. 어떤 생성된 존재
자의 원인은 생성된 존재자와는 별개의 존재다. 원인이란 “그것의 존
재로부터 ‘다른 것’이 따라 나오는”58)(ex cujus esse sequitur aliud)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원인의 결과물(causatum)은 서
로 다른 존재자다. 하느님은 모든 것들의 제일 원인이요 보편적 원인
으로서 모든 것을 내는 데, 하느님과 거기서 나온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른 존재자(ens)다. 서로 다른 존재자라는 것은, 개별화된 존재자끼리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자들의 공통된 원인으로
서 존재 자체(esse ipsum)이지만, 동시에 존재자(ens)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만큼 개별화된 실체다. 물론 사물의 개별화의 원리는 질료이
지만, 하느님은 그 존재에 관해 질료에 종속되지 않는 것으로서 일반
사물보다 더 완전한 하나다.59) 그렇게 해서 하느님은 피조물과 다른
존재자다. 그러므로 성리학의 리는 제일 원인으로서의 천주와는 범주
가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리와 기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57) 한형조, 위의 책, p.66.
58)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 p.56.
59) 신학대전 1 , 1, 11, 3, p.184.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85

 

다. 태극에서 음양이 생기고 음양에서 오행이 생겨 만물이 생겨나는
우주 생성론에서, 태극은 거기서 나오는 세상 만물과 다른 존재자라
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개별화될 수 없으며, 아퀴나스 신학에서 말하
는 실체(존재자)가 아니다. 물론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것과 달리 리
는 사물의 속성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없는가? 그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만물의 근원에 대한 사고 방식
의 차이일 뿐이며, 마테오 리치가 아퀴나스의 신학에 따라 말하는 대
로 꼭 제일 원인이라야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주의인
성리학 전통 안에서 리는 만물의 이념으로서 또는 표준으로서 만물의
근원이다. 아퀴나스의 네 가지 원인에 맞추어 말하자면, 리는 만물의
목적인과 형상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0) 그것은 성리학이 철저
하게 인간 주재를 지키면서 만물의 근원을 찾는 철학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근원을 말하는 형이상학은 도덕형이상학이다.
이제, 리를 속성으로 보는 마테오 리치의 견해를 비판해보자.

 

Ⅳ. 리는 실체도 아니고 속성도 아니다.

 


마테오 리치는 리가 만물의 근원일 수 없는 까닭을, 그것이 허상무
실(虛象無實)하다는 데서 찾는다. 그러나 퇴계가 태극 곧 리를 가리
켜 “지극히 허하면서도 지극히 실하고, 지극히 무하면서도 지극히 유
하며…”유이고 무이지만 실하다(虛而有, 無而實)61)고 할 때 그 ‘실’
(實)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다시 말해 마테오 리치는 태극이나 리
의 실(實)함을 부인했지만, 주희나 퇴계는 리가 허(虛)하나 실(實)하
다고 했다. 그리고 천주실의 에서 중국선비도 유학은 태극의 유와

 


60) 풍우란, 중국철학사 하 , 서울: 까치, 1999, p.541, 주 26. 그는 질
료인과 능동인을 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61) “至虛而至實 至無而至有…”, 국역 퇴계전서 5 , 서울: 퇴계학연
구원, 2003, p.187.
186 논문

 

실(實)을 마루로 삼는다면서 무와 허를 말하는 불교나 도교와 다름을
주장하고 있다.62) 주희는 성리학을 가리켜 실학(實學)이라고 했다. 이
렇게 보면 성리학에서는 태극이나 리를 실하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
유학을 공이나 무를 근원으로 보는 노자나 불교와 다르다고 생각했
다. 그렇다면 리치가 리를 가리켜 허상무실하다고 한 것과는 어떤 차
이가 있는가? 리치가 천주실의 에서 사용한 ‘실’의 개념과 성리학
에서 말한 ‘실’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만물의 근원을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치는 만물의 근원은 만물을 창조하고 생
성변화를 주재하는 자라고 본다. 그러나 성리학에서의 근원인 태극은
창조주가 아니며, 따라서 근원의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테오 리치의 리 비판은 리가 자립자(自立者)가 아니라는 데 초점
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성리학에서 만물의 근원으로 말하는 리는
자립자(自立者)가 아니며, 자립자에 붙어 있는 의뢰자(依賴者)라고 했
다. 마테오 리치가 ‘자립자’와 ‘의뢰자’라고 하는 한문 표현으로 가리
킨 것은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사용한 실체(substantia)
와 속성(accidens)의 범주와 같다. 실체와 속성은 두 가지 존재 방식
을 가리키는 것으로, 리치의 예를 따라 흰 말을 두고 말하면, 말은
실체이고 흰 빛깔은 속성이다. 그것을 아퀴나스는 각각 실체적 존재
(esse substantiale)와 우유적 존재(esse accidentale)라고 하고, 실체적
존재를 단적인 있음(esse simpliciter)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시 대명
사로 가리킬 수 있는 단수적인 개별자를 가리킨다. 이것, 저것, 이 사
람, 저 사람이라고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실체다. 실체란 실제로 존재
하는 것으로서, 아퀴나스에게서 실체라면 우선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개별적 실체들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리키는 제일 실
체가 그것이며, 자연학의 연구 대상이었다. 그런데 사물의 본성 다시
말해서 그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면
형상에 관한 연구가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물에 대한 정의와 인

 

62) 천주실의 2-1, p.73.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87

 

식을 이루는 것은 그 사물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리스토텔
레스의 형이상학이 되는 것인데, 거기서는 형상이 자립적 실체로 등
장하고, 그것이 이른바 지성으로서만 또는 플라톤이 말하는 누우스
(nous)로서만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 또는 형상이라는 실체다. 그것
을 제이 실체라고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에게서는
완전도와 존재의 정도가 일치하는 것이어서, 완전한 형상 곧 하느님
안의 초월적 형상들 역시 존재라고 파악되었다. 어떤 완전한 존재가
먼저 현실로 있어, 현상 사물의 존재가 가능해진다고 본다. 형상을
그처럼 존재로 보는 것은, 사물의 본성(natura) 또는 본질(essentia)이
그 사물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제이 실체가 제일 실체의 존재를 결정하는 플라톤적인 도
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에게서는 제일 실체의 형상은 초월적인 것으로 하느님의
지성 안에 있고, 그것은 하느님과 일치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형상을 품고 있는 분으로서 그 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존재 자체요, 개
별화된다. 물론 하느님에게 실체란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체란 일차적으로 이 세상의 구체적 사물들을 가리키는 것이요, 어
떤 새로운 성질 또는 속성을 가질 수 있는 기체(subjectum)의 의미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실체란 개별화되고 자립적이며, 자기 동일성
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63) 그러나 세상의 사물은 어느 정도만 개별
화되고 어느 정도만 자립적이고 어느 정도만 자기동일성이 있다. 질
료와 형상의 합성물인 사물은, 그 질료로 말미암아 개별화되지만, 그
질료 때문에 언제나 어떤 형상의 결여가 있어 잠재태로 존재한다. 그
래서 생성변화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존재를 가져온
동인을 스스로 갖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립자일 수 없다. 그러나
아퀴나스에게서 하느님은 질료가 없는 순수 현실태요, 제일 운동인이
요, “질료로 말미암아 개별화되지 않고 형상 자체들이 개체화되는”64)

 

63)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의 원리들 역자 해제, p.114.
64) 신학대전 1 , 1, 3, 4, p.68.
188 논문

 

존재요, 스스로 자립하는 존재 자체(ipsum esse per se subsistens)로
서 자기 실체(sua substantia)요,65) 그 자립성(subsistantia) 때문에 구
체명사를 사용한다.66)
만일 리치가 말하는 대로 태극이나 리가 사물의 속성에 불과하다
면 만물의 근원이 될 수없는 것은 당연하다. 속성과 실체의 범주에서
속성이 그 많은 실체들을 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치가
리를 사물의 속성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성리학에서 리가 “마음속
에 있음”(在人心) 혹은 “사물 속에 있음”(在事物)이라고 하기 때문이
다.67) 성리학에서는 그처럼 리의 내재성을 말하면서도, 세상이 있기
전에 리가 있다고 함으로써 리의 선재성을 말하기도 하고, 리가 만물
의 근원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리의 보편적 섭리와 주재를 말하
기도 한다. 그것은 적어도 태극이나 리가 리치가 말하는 실체와 속성
의 범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리는 분명히
속성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퀴나스 식의 실체인 것도 아니다.
먼저, 속성이 아니라는 점을 보자. 나중에 리치의 견해를 따라 성
리학의 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약용은 리의 어원을 따져서 리가 원
래 옥석의 결(脈理)을 뜻하는 것이며, 그 결을 알아 다스리는 것에서
문리나 지리나 윤리 또는 치리, 옥리 같은 말이 나왔다고 본다.68) 그
래서 그는 기는 실체(自由之物)이지만 리는 속성(依附之品)이라고 리
치의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69) 사실 정약용의 초점은 인간론에 있
었으며, 인간의 본성이 객관적인 우주의 리로 설명되는 것을 반대하
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리학에서 인간의 도덕 행위의 근거를 우
주의 생성변화를 섭리하는 리에서 찾고, 리라고 하는 체(體)가 인간

 


65) 신학대전 1 , 1, 8, 3, p.143.
66) 하느님은 그 단순성 때문에 추상명사(생명, 사랑 등)를 사용하고,
그 자립성 때문에 구체 명사를 사용한다. 신학대전 1 , 1.3.4, p.69.
67) 천주실의 , 상권 2-8, p.87.
68) 정약용, 역주 다산 맹자요의 이호형 역주(서울: 현대실학사, 1994),
p.337.
69) 송영배, 동서 철학의 교섭과 동서양 사유방식의 차이 , p.157.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89

 

의 마음 씀씀이 곧 용(用)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려고 한 것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알고 보면 중세적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인간
을 가치 창조의 주체로 내세우는 의미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약용의 사상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학과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
으며, 그것은 정약용이 말하는 상제와 마테오 리치의 천주의 역할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
에 관한 논의에서 유교적 이상 곧 도덕적 자기완성을 실현하는데 도
움이 되는 최소한의 부분만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
에서 중세 성리학의 리를 해체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리치의 중세 신
학이 정약용에게 전달되었다기보다는, 기독교 신학에 들어있던 인간
중심의 사고70)가 전달되어 성리학의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리를 맥락이나 조리(條理)로 이해하면 리는 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
다. 맥락이나 조리는 사물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며 사물의 흐름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테오 리치는 리를 보편 원리로
보고, 보편 원리의 실재성을 부인한 것일 수도 있다. 보편적인 것은
구체적 사물로부터 추상해 낸 원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점
에서 보면, 사물이 없으면 원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로 간다. 마
테오 리치는 리가 마음의 리(心之理) 또는 사물에 있는 리(在物之理)
임을 언급하며, 리가 의뢰자(依賴者)라고 한다. 이는 사물이 있어야

 

70) 인간 중심이라면 신학과 안 어울리게 보일 수 있으나, 기독교에서
는 하느님의 주재를 말하면서도 선악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매
우 강조한다. 마테오 리치 역시 천주실의 에서 덕이 미리 주어
져 있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
고 있다. “무릇 세상의 사물이 일단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의지를 따를 수도 그만둘 수도 있어야 그 다음에 덕도
부덕도, 선도 악도 있게 됩니다.”(하권 6-3, p.282) 이하에서 자유
의지에 대한 논증이 이어진다. 송영배는 정약용이 천주실의 의
영향을 받아 “’명상적 관념적인 성리학’의 패러다임을 ‘실천적 윤
리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송
영배, 위의 책, p.169).
190 논문

 

리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와 같은 종속성 때문에 리는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한다.71) 그 종속성은 시간적으로 표현되면 사
물이 먼저이고 리는 나중인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래서 리치
는 말한다. “두 경우 모두 사물이 있은 뒤에 [나중에 ‘이’가] 있음을
말한 것인데 어떻게 나중 것이 먼저 것의 근원이 되겠습니까?”72) 리
치가 생각하는 만물의 근원은 만물을 초월하여 만물에 앞선 존재여
야 한다. 천주는 만물이 없음에도 있는 존재요, 무에서 유를 내는 존
재다. 그런데 리는 스스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무
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말한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원초에, ‘리’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있
겠습니까?”73) 한편 종속성은 목적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표현되기도
한다. 리치는 말하기를 “’리’가 사물을 위한 것이지, 사물이 ‘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74)고 한다.
마테오 리치는 사물이 있어야 리가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리가 사
물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
해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와 기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리치가 말하
는 실체 곧 형체와 성질이 있는 현실적 존재자는 성리학에서는 리와
기의 합이기 때문이다. 리와 기의 관계를 두고 성리학에서는 리와 기
의 불상리 불상잡(不相離 不相雜)을 말한다. 그래서 주희는 말한다.
“세상에는 리 없는 기도 없고 기 없는 리도 없다. 기로 형체가 이루어
지면 리도 거기에 부여된다.”75) 그러므로 기가 없으면 리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주희는 또 말한다.”가령 음양과 오행이 어지럽게 뒤섞이면서
도 조리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리이다. 만약 기가 모여서 응결되지

 


71) “이 두 경우에 의거한다면 ‘이’는 진실로 속성(의뢰자)입니다. 어
떻게 사물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천주실의 , 상권 2-8, p.87.
72) 천주실의 , 상권 2-8, p.88.
73) 천주실의 , 상권 2-8, p.88.
74) 천주실의 , 상권 2-12, p.97.
75) “天下未有無理之氣, 亦未有無氣之理.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주
자어류 이주행 외 역, 서울: 소나무, 2001, 1-6, p.44.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91

 

않을 때는 리 또한 붙어 있을 곳이 없다.”76) 이렇게 보면 형체가 있는
사물이 없으면 리가 없다는 마테오 리치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기 없는 리가 없듯이, 리 없는 기도 없다. 리가 속성이려면
앞의 명제만 있어야 하는데, 뒷 명제가 앞 명제에 반드시 따라 온다
면, 리는 리치가 말하는 속성이 아니다. 성리학에서는 리 없는 기는
없다는 명제를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리와 기 중에서 리가
먼저라고 강조하기까지 한다. 리가 먼저냐 기가 먼저냐는 물음에 대
해 주희는 말한다. “리는 기와 떨어진 적이 없다. 그러나 리는 형이상
의 것이고 기는 형이하의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로 말한다면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77) 또 말한다.”리와 기는 본래 선후를 나누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리가 먼저이고 기는 나중인
것 같다.”78) 그러므로 리가 없이 세상 만물이 있을 수 없으며, 나아가
리는 만물에 앞서 있다. 주희는 주돈이의 태극도설 을 가져와 이렇
게까지 말한다.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틀림없이 리가 먼저 있었다.
움직여서 양의 기를 낳는 것도 리일 뿐이며, 고요하여 음의 기를 낳
는 것도 리일 뿐이다.”79)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는 틀림없이 리만 있
었다. 리가 있으면 천지가 있게 된다. 만약 리가 없었다면 역시 천지
도 없었을 것이고 사람도 사물도 없었을 것이니, 실을 것이 전혀 없
었을 것이다. 리가 있으면 곧 기가 유행하여 만물을 길러준다.”80) 이
것은 만물이 생기기에 앞서 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는 만
물을 낳는 근원이요, 현재 만물의 생성변화를 주장하는 주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실의 에서 중국 선비가 질문하는 것도 그
런 뜻이다. “그것의 ‘리’가 없으면 그런 사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자(주돈이)는 ‘이’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믿었습니다.”81)

 

76) “如陰陽五行錯綜不失條緖, 便是理. 若氣不結聚時, 理亦無所附著” 주
자어류 , 1-12, p.47.
77) 주자어류 , 1-10, p.46.
78) 주자어류 , 1-12, p.47.
79) 주자어류 , 1-1, p.42.
80) 주자어류 , 1-2, p.43.
192 논문

 

그렇게 보면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가 결코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의존자이거나 실체의 속성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리가 없으면 천
지만물이 없고, 사물이 생기기 전에 리가 있었으며, 리가 기보다 앞
선다면, 리는 사물의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천지만물을 낳는 근원으
로 얘기된다. 만일 “천지가 생기기 전에 리가 있었다”는 주희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리는 무에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말
하면 태초에 리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태극은 리인데, 주돈이 이래
로 성리학자들이 받아들인 태극도에 따르면 태극에서 음양이 생기고,
음양에서 오행이 생기며 오행에서 천지만물이 생긴 것으로 말하니,
리는 화생의 근원인 셈이다.
마테오 리치가 리가 사물 뒤에 온다고 하며 리를 실체의 속성이라
고 본 것은 잘못이다. 리가 사물이나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한 것은
성리학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그렇다고 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속성
이 범주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리를 실체로 볼 수 있을
까? 아퀴나스 신학에서는 존재의 두 양식이 실체 아니면 속성이므로,
리가 속성임을 부인하면 리가 실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태극 또는 리를 실(實)로 얘기했으니 더욱 그런 생
각을 할만하다. 만일 리를 실체로 본다면, 리는 천주와 같은 ‘자기
실체’가 되어야 한다. 세상 사물과 같은 실체는 이미 리와는 맞지 않
는다. 왜냐하면 세상 사물로서의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물인데,
그것은 성리학 용어로 말하면 만물이 기와 리의 합으로 이루어졌다
고 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리는 기와 구분해서 쓰는 것이므
로, 리가 실체라 해도, 리기(理氣)의 합으로 이루어진 세상 사물을 가
리키는 것은 개념 모순이다.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무극(無極)이라는
개념을 통해 태극이 일물(一物)이 아님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아퀴나스의 하느님이 물체(corpus)가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위치와
장소는 하느님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82) 성리학이 무극을 통해서

 

81) “無其理則無其物, 是故我周子信理爲物之原也”, 천주실의 , 2-9, p.89.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93

 

표현하려는 것도 결국, 리라는 것이 실(實)하다고 해서 세상사물과
같은 실체일 수는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리가 기보
다 먼저 있었다는 성리학의 표현을 염두에 둔다면, 리를 실체로 본다
는 것은 근원적 실체로 본다는 말이다. 리를 아퀴나스의 하느님 또는
리치가 말하는 천주처럼 근원적 실체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리를 리치가 말하는 자립자 또는 실체라고 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리와 기가 불상잡(不相雜)이지만, 또한 불상리(不相離)이기 때
문이다. 리는 사물로부터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다
시 한 번 주자어류 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것은 본래 선후를 나누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근원을 따지
고자 한다면, 반드시 리가 먼저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리 또한
별개의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기 가운데 존재한다. 기가 없다면 리
가 붙어 있을 곳이 없다. 기는 금과 목과 수와 화가 되고, 리는 인,
의, 예, 지혜가 된다.”83)
여기서 보듯이 리의 선재성을 말하더라도, 본래 선후를 말할 수 없
다는 전제가 항상 따라 다닌다. 이것은 성리학이 리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어떤 초월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초월성이 만물 밖의 어떤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래서 리가 먼저 있다고 한
후에도, “리 또한 별개의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기 가운데 존재한
다”고 한다. 이것은 또 태극을 가리켜서 한 말과 같다. “태극은 다만
천지 만물의 리일 뿐이다. 천지로 말하면 천지 가운데 태극이 있고,
만물로 말하면 만물 가운데 각기 태극이 있다.”84) 그러므로 리는 사
물 가운데 있는 것이며, 사물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일 수 없다. 리가
근원적 실체라면 만물과 별개의 존재여야 하며, 그것은 천주처럼 개
별화되고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리가 사물

 


82) 신학대전 1 , 1, 3, 1, pp.61-63.
83) 주자어류 , 1-11, p.46.
84) 주자어류 , 1-1, p.42.
194 논문

 


가운데 있다는 것 때문에 리치는 리를 속성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물
론 앞에서 보았듯이 리는 만물보다 앞서 있고, 천지가 있기 전에 있
는 것이라면 속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물 가운데 있다고
해서 리가 아퀴나스의 ‘우유적 존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일반적인 실체들을 초월한 무엇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
물들과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 아퀴나스의 제일 원인
으로서의 하느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리학이 태극을 실(實)이라
고 할 때, 그 실(實)은 마테오 리치가 말한 實體(substantia)가 아니요,
스스로 자립하는 존재(ens per se subsistens)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
현실태로서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리를 아퀴나스의 실체로 볼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개별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아퀴나스에게서는 모든 실체는 하나로
표현될 수 있다. 실체란 다른 실체와 구분되는 하나의 존재자로서 실
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체와 실체를 구분하는 것은 종(種)이 달라
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종 안에서도 질료의 차이 때문
이다. 말하자면 같은 사람이라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르다. 똑같이 인간성이라고 하는 형상을 입고 있지만 그 생김새와
개별적 성질이 다르다. 인간을 소와 구분케 하는 성질 곧 종차에 있
어서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같지만, 같은 사람이면서도 그들의
질료의 차이85) 때문에 이 사람과 저 사람은 구분되는 것이다. 그처
럼 개별적 모양과 성질의 차이 때문에 이 사람과 저 사람은 각각 개
별화된다. 각각 한 사람이다. 실체는 그처럼 하나로 개별화된다. 형상
과 질료를 가지고 말하면 질료가 개별화한다. 여하튼 아퀴나스는 개
별적인 제일 실체를 중시했음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실체는 개별
화된 하나로서의 실체다. “어떠한 사물도 그것이 하나인 것은 실체에
의한 것이다.”86) 그런데 하나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85) 각 개인에게 지정된 질료는 서로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
자와 본질에 대하여 , p.51. 오늘날의 말로 하면 유전형질의 차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95

 

데, 그것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체는 다양한 부분의 합성
물이지만, 나누어지지 않고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임을 지키
고 있는 한에서 실체다. 아퀴나스는 말한다. “어떤 사물의 존재도 불
분할에(不分割 in divisione) 성립되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 자기 존재를 지키는 것과 같이 자기 일체성을 지키는 것이
다.”87) 그러므로 개별화란 것은 다른 존재와 달라서 성립되는 것이면
서,88) 또한 그것이 분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in divisione) 성립된다.
분할되면 다른 실체가 되는 것이다.
아퀴나스에게서 하느님은 피조물과 다른 존재자다. 그는 존재요 스
스로 자립하는 존재자로서, 제일 능동인인 순수 현실태로서, 다른 존
재자들과 구분되는 하나의 존재자다. 하느님의 존재는 곧 본질이다.
그것은 “하느님은 하느님인 것에 의해 하느님인 것이다”89)라는 말이
다. 존재와 본질이 일치하는 존재자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하나는
개별화하는 질료로 말미암은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수학에서 양을 가
지고 말하는 하나의 하나가 아니다. 수학적인 하나는 일반적인 실체
곧 질료 안의 존재(esse in materia)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하느님에게
는 적용되지 않는다. “수학적인 것(mathematica)은 질료 안에 존재를
가지며 그것은 질료에서 개념적으로 추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有)와 전환되는 하나’는 어떤 형이상적인 것(metaphysicum)이며 그
것은 존재에 관해 질료에 종속되지 않는 것이다.”90) 하느님의 존재는
질료에 종속되지 않는 것으로서, 질료와 형상의 합성물이 아니고, 현

 

86) 신학대전 1 , 1, 11, 1, p,177.
87) 신학대전 1 , 1, 11, 1, p.176.
88) “개별적인 어떤 것(aliquid singulare)이 이 어떤 것(hoc aliquid)
인 것은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이 다수자에 공통되지 않기 때문
이다.” 신학대전 1 , 1, 11, 3, p.182.
89) 신학대전 1 , 1, 11, 3, p.182.
90) 신학대전 1 , 1, 11, 3, p.184. “유와 전환되는 하나”란 하느님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존재는 곧 하나라는 말이다. 사람과 사물은
하나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든 분할되어 다른 실체가 될 수 있
는데, 하느님은 어떤 분열도 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196 논문

 

실태와 잠재태의 합성물이 아니고, 속성과 실체의 합성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할되지 않는 하나다. 최대의 존재자(maxime ens)이면서 최고
로 분할되지 않는 것(maxime individium) 곧 최고의 개별자다.91)
성리학자들은 태극 곧 리가 일물(一物)이 아님을 강조한다. 일물
(一物)의 일(一)은 아퀴나스의 표현대로라면, 수학적인 하나 곧 질료
에서 개념적으로 추상된 하나다. 하나 둘 셋, 이렇게 셀 수 있는 수
로서의 하나를 말한다. 그러면 태극이나 리는 아퀴나스가 말하는 형
이상학적인 하나 곧 ‘유와 전환되는 하나’인가? 리는 최고로 분할되
지 않는 하나 곧 최고 개별자인가(maxime individium)?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태극은 하나이지만 여럿이기 때문이다. 리일분수(理一分殊)
라는 것은 리가 하나이지만, 각 사물에 하나씩의 리가 또 들어 있음
을 의미한다. 리치의 천주에게는 ‘하나이지만 여럿’이라는 말이 성립
되지 않는다. 하나는 하나고, 여럿은 여럿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
나가 여럿에 개입하는 방식의 차이 곧 초월자가 사물에 내재하는 방
식의 차이다. 내재의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 또 보기로 하겠다. 만일
유출이라는 낱말을 성리학의 우주생성론에 사용한다면, 태극이나 리
는 어떤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물의 유출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 유출은, 질료를 가진 사물들로 유출되면서 하나
의 완전성이 옅어지는 그런 신플라톤주의적인 유출이 아니다. 하나의
리가 수많은 사물 속에 훼손됨 없이 내재해 있는 것이 성리학의 유
출이다. 만물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식물이나 똑같은 리를 부여받았
다. 그러나 그들을 구성하는 기의 차이로 말미암아 리가 방통(旁通)
하든지, 혹통(惑通)하든지, 불통(不通)하든지 차이가 난다. 성리학자들
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를 들어 말하는 것도 그것이다. 하늘의

 


91)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물 안에 들어 있는 삼위일체의 흔적으
로서 하나임 곧 개체성을 들고 있다. 모든 사물은 “그것이 하나
라는 것과, 고유한 형상에 의해서 타자들로부터 구분된다는 것과,
우주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 삼위일체를 모형으
로 하고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역주, 참된 종교 , 8, 14, 분
도출판사, 1989, p.51).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97

 


달이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로 떠 있다. 그 비유에서 강위의 달은
하늘의 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달과 똑같은
달로 이해된다. 그래서 태극이나 리는 보편적 소이연이지만, 수많은
구체적 사물 안에 들어 있다. 보편과 구체가 모순 없이 일치되어 있
다. 보편적 원인이란 자칫 추상물이 되기 쉬운데, 성리학은 그런 추
상적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각 사물에 내재해 있는 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주 사물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 원리에 관
심을 갖고 그것을 태극이나 리의 이름으로 하나라고 했지만, 그러나
사물 밖의 리가 아니라 사물 안의 리에 관심을 두었으므로, 하나의
리는 여럿의 리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는 하나면서 여럿이
다. 사실 주희는 리일분수(理一分殊)에서 리일(理一)보다는 분수를 강
조한 면이 있다.
“성인이 일찍이 리일을 말한 적이 없지만 분수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하였다. 분수 가운데의 구체적 사물에서 일마다에 있는 그 당연의
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리의 근본이 하나로 관통함을 알게
될 것이다. 만 가지 다른 것들에 각기 하나의 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리일만을 말한다면 리일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할 것
이다.”92)
리일분수(理一分殊)에서 분수를 알지 못하면 리일(理一)이 무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 가지 사태를 겪으면서 그 만 가지
사태에 하나의 도리가 관통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다.93)
여기서 성리학의 관심은 사물(事物)의 물(物)보다는 사(事) 즉 인간사

 


92) “聖人未嘗言理一, 多只言分殊. 蓋能於分殊中事事物物, 頭頭項項,
理會得其當然, 然後方知理本一貫. 不知萬殊各有一理, 而徒言理一,
不知理一在何處”, 朱子語類, (黎靖德 編, 王星賢 點校, 中華書
局, 北京), 1994, pp.27-41.
93) 송영배 교수는 서구 형이상학과 달리 성리학에서 리가 기에 내재
한다고 하며, 개체 생명의 의미를 현장에서 따지는 것이라고 한다.
송영배, 동서철학의 교섭과 동서양 사유방식의 차이 , p.41.
198 논문

 


(人間事)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퀴나스와 달리 도덕론
이 존재론에 흡수되지 않고, 성리학이 도덕형이상학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아퀴나스와 달리 자연학을 통해 형이
상학으로 가지 않는다. 인간사의 도리에 대한 관심에서 우주를 움직
이는 도와 리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이 성리학이다. 여하튼 사태든
물체이든 분수(分殊)에서 리일(理一)을 생각한다는 것은, 리의 초월보
다는 내재를 더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론을 마련한 성
리학에서 리나 태극이라는 개념을 통해 어떤 보편적 원리의 초월성
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 초월은 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
다. 그 내재는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
엘의 내재와 다르다. 리치의 천주는 만물과 함께 하지만, 성리학의
리는 만물 안에 들어 있다. 기독교는 좀처럼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있
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의 하느님의 초월과 내재가
기본적으로 초월이면서 내재이지만, 성리학의 리의 초월은 기본적으
로 내재이면서 초월임을 말해 준다.
그래서 성리학의 우주발생론 곧 천지개벽설에는 기독교에서처럼
창조론이 있을 수 없다. 플라톤 이후 아퀴나스 신학까지도, 만물은 최
고 존재인 하느님에 참여하는 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참여(participatio)
라는 개념을 통해 피조물과 별개의 초월자인 하느님을 이어 놓으려
고 했다. 하느님은 원인으로서 결과에 들어 있기 보다는, 원인으로서
결과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원인과 결과는 섞이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에서 볼 때, 원인과 결과의 연속성은 자칫 하느님의 초월성을 없
앨 수 있다. 그러므로 아퀴나스에게서 제일 원인과 그것의 결과인 제
이 원인은 제일 원인의 자유로운 창조행위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제일 원인은 결과에 들어 있지 않다. 제이 원인은 그 결과에 들어 있
다고 할 수 있으나 제일 원인과 제이 원인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그
러므로 만물을 창조한 하느님은 만물과 섞이지 않는다. 섞이지 않는
다는 것은 성리학에서의 리가 기와 섞이지 않는 것과도 다르다. 월인
천강의 비유에서 하나의 달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리가 기와 섞이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199

 

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섞이지 않으면서도 들어 있다.
섞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리의 초월은 들어 있음으로 말미
암아 철저하게 내재한다. 그 점에서 아퀴나스의 신학과 다르다.
우주발생과 관련해서 기독교에는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distinctio
inseparabilis)는 말이 있다. 성리학에도 앞에서 본 대로”섞이지 않으나 분
리되지도 않는다”는 말을 쓴다. 두 말은 모두 우주발생과 관련해서 중요
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그런데 그 쓰이는 위치가 다르다. 성리학에서
는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에서 오행이 생겨 만물이 생겼다고 한다. 음
양은 기(氣)고 오행은 질(質)이고 만물의 구성 요소다. 목화수금토의 오행
이 뭉쳐서 만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행에는 기가 유행하고 있으며,
오행 밖에 따로 음양이 있는 것이 아니다.94) 태극과 음양의 관계도 그렇
다. 태극에서 음양이 생겼지만, 음양의 기밖에 태극이 따로 있어 음양
을 낳은 것이 아니다.95) 그러므로 태극과 음양과 오행은 이어져있다.
따라서 리와 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주발생에도 적용된다.
태극이라는 만물의 근원과 세상만물은 이어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리는 기에 선재한다는 명제가 있다. 그
래서 리와 기는 섞이지 않고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물
의 현상을 초월하는 어떤 보편 원리를 생각하려고 한 것이다. 주역
(周易)에 있고 주돈이가 풀이한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도 그 문제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서 태극이 움직여 음과 양을 낳았다고 하면,
태극의 무위성과 모순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태극과 음양의 기가
동일물이 된다. 왜냐하면 ‘낳다’는 것은 낳아진 것과 낳은 것이 같은
종(種)이요 같은 본질의 것임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
이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소가 소를 낳듯이 말이다. 리와 기가 구분
된다는 것을 지킴으로 리의 초월성을 유지하려면, ‘태극생양의’의 ‘생’
을 자동사로 보아 태극에서 음양이 생겼다고 해야 한다. 태극은 만물

 

94) 주자어류 , 1-48, p.60.
95) 주희, 여조겸, 근사록 집해 , 이광호 역주, 서울: 아카넷, 2004, p.65.
200 논문

 

의 생성 변화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96) 퇴계의 경우에는 리의 능동
성을 말하기 위해 ‘생’을 타동사로 보면서, 동시에 리와 기가 동일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해 리에 체(體)와 용(用)을 인정했다.97) 그리하여
음양의 기를 낳는 것은 태극의 용이고, 태극의 체는 그로부터 초월해
있다. 그렇게 보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무극은 태극의 체의
역할을 함으로 허(虛)한 초월성을 가리키고, 태극은 모든 사물의 리를
다 포함한 것으로서 만물을 낳아 만물과 이어지며 만물 속에 있는 측
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무극과 태극은 만물의 근원으
로 여겨지는 태극이 초월적이면서도 만물과 분리되지 않고 이어져 있
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물의 근원인 태극 곧 리는 기
로 이루어진 이 세상만물을 초월하면서도 이어져 있다. 태극 또는 리
의 초월과 내재는 그런 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위일
체 논쟁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같은 용어
가 성리학에서는 세상의 근원과 세상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쓰이지
만, 기독교에서는 세상의 근원 안에서 그 위격(位格)들 사이의 관계
를 표현하는 데 쓰인다. 성부 하느님은 성자 하느님을 낳았다. ‘낳았
다’는 표현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에 쓰인다. ‘낳았다’는 표현을
통해 동질성(homo ousios)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는 서로 구분되지만 같은 존재라고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동
질성의 의미를 함축할 위험이 있는 ‘낳다’는 용어를 세상 발생에 사
용하지 않는다.98) 하느님은 세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세상과 세상의

 

96) 참조 윤사순, 「퇴계의 태극생양의관」, 아세아 연구 , 12권 3호,
서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 연구소, 1969, pp.14-15.
97) 같은 곳.
98)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
늘과 땅은 당신의 본체로부터 유출하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만
일 그랬다면 하늘과 땅은 당신이 독생자와 동등한 존재가 되고
따라서 당신과 동등한 존재가 됩니다.”( 고백록 , 12, 7, 7,
p.426) 플로티누스의 유출이란 말을 성자 하느님에게만 적용하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201

 


근원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세상의 근원인 태극과 세상
이 분리될 수 없어서 ‘불상리’(不相離)라고 표현하지만, 기독교 신학
에서는 창조를 말함으로써 근원인 하느님과 세상을 분리시킨다.
그런데, 성리학의 무극과 태극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성부와
성자가 구분되는 것 역시,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를 말해준다.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과 세상의 접촉점인 하느님이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
자와 성령을 통해 성자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했다.99) ‘통
해’ 또는 ‘말미암아’를 표현하기 위해 아퀴나스는 ‘per’라는 전치사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중간원인을 가리킨다.100)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의 관계에 질서가 있다. 성자는 성부 안의 지성 혹은 지혜와 동일시
된다. 그 지혜로 세상을 만들었다. 흔히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로 표
현되는 말씀으로서의 성자는 그처럼 하느님의 지성으로 이해된다. 물
론 하느님의 지성은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닌 것으로 설명되지
만,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의 위격의 차이가 엿보인다. 이것은
세상의 창조에 개입된 하느님으로서 그만큼 세상과 접촉점이 있는
하느님을 성자 하느님으로 보고, 성부와 위격의 차이를 두려는 것이
다. 성령은 세상 만물의 통치와 생명부여의 역할이 부여된 하느님으
로서, 성부가 낳은 것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발출된 것으로 함으로써
성자의 위격보다도 한 수 낮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것은 성령이 성
자보다도 더 세상과 깊이 접촉하고 있는 하느님을 표현하는 개념이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퇴계의 무극과 태극의 관계처럼 성부
는 성자보다 더욱 초월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성자와 성령
은 세상과 접촉하는 측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
로 성자나 성령 역시 세상 사물로부터 초월하면서 내재하는 존재요,
고, 세상에는 적용하지 않음으로 하느님의 창조설을 통해 하느
님을 세상과 별개의 초월자로 두려는 것이다.

 


99) 아퀴나스는 성자를 하느님의 지성 안의 말씀으로 성령을 사랑
으로 본다. 신학대전 6 , 1, 45, 6, p.129.
100) 신학대전 6 , 1, 45, 6, p.131.
202 논문

 


그래서 기독교의 하느님은 세상과 함께 하지만 세상 안에 들어 있지
는 않다. 성리학에서는 리가 기 안에 들어 있다는 표현을 쓰지만, 기
독교의 하느님은 만물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
는다”는 것은 하느님 내부의 위격들 사이에 적용되는 개념이며, 하느
님과 세상 사이에 적용되지 않는다.101)
처음에 물었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태극이나 리가 아퀴나스적인
실체가 아니므로 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實)하다는 것은 무
엇인가? 성리학에서 불교의 무를 부인하고 태극이나 리를 실하다고
할 때, 그 실은 덕의 실재성이다. 정약용은 성리학을 가리켜 덕이 알
맹이처럼102) 있다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덕의 실재성 문제는 인간의
본성론에서 나온 문제라고 봐야 한다. 사람이 도덕적인 선을 행할 가
능성을 가졌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러한 선이 이미 사람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데서 리의 실재성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문제는 성선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본래 인간
은 덕을 행하기를 좋아하며 악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볼 것인가? 양명학은 맹자의 양지(良知) 양능(良能)을 바탕
으로 그렇게 주장했다. 정약용은 그것을 성 기호설(嗜好說)로 그 문
제에 대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주장했다. 사람은 선을 좋아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에서 성선설일 뿐, 덕의 덩어리가 인간 안에 이미 주
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주희에 따르면 인의예지(仁
義禮智)의 덕이 이미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은 그 본연지성이 발하
도록 자기 마음을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인의예지의 덕은 우주의 생
101) 이광호 교수는 성리학의 우주관을 마테오 리치의 우주관과 비
교하여 “형이상적 일자의 자기 전개”, 또는 “태극인 절대 진리
가 화생하는 세계”라고 한다. 이러한 표현은 태극과 세상이 붙
어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태극의 초월이 내재적 초월임을 말
해준다. 이광호, 「상제관을 중심으로 본 유학과 기독교의 만남」,

 

p.554 참조.
102) 정약용, 역주 다산 맹자요의 , p.91.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203

 

성변화의 근원적 원리로서 이미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 마음 안에
본연지성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덕은 인간이 실현하는 것이기
보다, 덕 자신의 자기 발현이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도덕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103) 무엇보다도 인간
의 악함을 심각하게 인식했을 때, 선의 실현을 우주의 근원적인 힘의
현실에서 찾으려고 할 때 덕의 실재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
현실이 매우 악하다고 인식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며 살
라고 설득할 수 있는 근거를,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선하다고 하는
데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정약용 같은 경우는 현실적으로
선을 이루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근원을 끌어올 정도
로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다는 자유의지론에 섰다. 그리고 선이란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 선을 행할 때 발생하는 것이지, 미리 선이
우주적 힘으로 인간 안에 주어져 있다고 보지 않았다. 다산에게 성리
학적 관점은 인간의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는 악은 쉽고 선은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인간은 본래 선을 행하
기를 좋아한다는 주장으로서 선의 실현을 독려하려고 했다. 그에게서
성선설은 인간이 이미 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선
을 행하기를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가 볼 때 덕의 실재성
이란 전혀 무의미한 것이요, 인간의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덕의 실재성은 마테오 리치의 기독교 신학에도 있다. 플라톤에서도
선의 이데아를 존재로 이해한다. 아퀴나스에게서는 선이 순수 현실태
다. 세상도 현실이지만 진짜 현실은 최고선이신 하느님의 현실이요,
그것을 그리스 철학을 따라 존재 개념으로 표시한다. 하느님이 존재
자체요 순수 현실태라고 하는 것은 선이 진짜 현실이라는 말이다. 그
것은 선 또는 덕이 서양에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철학화된
다. 성리학에서는 가치론이 그처럼 존재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는

 

103) 참조. 양명수, 「퇴계의 칠정론과 악의 문제」, 퇴계학보 122집,
서울: 퇴계학연구원, 2007, p.21.
204 논문

 

다. 플라톤처럼 세상을 그림자로 보지도 않고, 아우구스티누스나 아
퀴나스처럼 세상보다 ‘더 존재하는’ 하느님을 말하지 않는다. 아퀴나
스의 하느님은 최고선으로서 가장 존재하며, 자기 실체로서 최고로
개체다. 앞에서 보았듯이 실체(實體)는 흔히 질료로 개별화되고, 체
(體)라면 형질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형질이나 질
료가 없는 유일한 존재로 개별화된다. ‘그 분’이라고 지시 대명사로
가리킬 수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분이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의 실재는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선한 마음을 먹고 선하게 마음을
쓰는 근원되는 덕이 이미 주어져있다는 의미에서의 실(實)이다. 성리
학에서 리를 체(體)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체라는 것은 용
(用)과 관련해서 마음씀씀이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며 실체와 속성
의 관계에서의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주희 역시 리를
체라는 것은 억지로 붙인 이름이라고 인정한다.104) 체라고 하면 자칫
존재론적 실체를 가리킬 수 있는데 주희는 그것을 부인한 것이다. 선
한 마음 씀씀이의 근원이 되는 선한 무엇이 있다. 그러나 ‘선한 무
엇’이라고 할 때, 그 ‘무엇’은 ‘그 무엇’ 또는 ‘그 분’이라고 지시 대
명사로 지칭할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천주와 달리 자립하는 존재
가 아니므로 구체적 명사로 쓰일 수도 없다. 그것은 순전히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실’이지,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실’이 아니다. 신후담이
“태극이란 그 리(理)는 실하고 그 위(位)는 허하다”105)고 한 것도 그
뜻이다. 태극은 덕의 실재라는 점에서 자기 수양의 보루요 근거가 될
뿐이지, 예배나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마테오 리치의 천
주나 아퀴나스의 하느님이 선이면서 존재 자체인 반면에, 성리학의
태극이나 리는 인의예지의 선일 뿐 존재 자체 또는 스스로 자립하는
존재가 아닌데서 생긴 결과다.
물론 성리학이 덕의 실재를 믿는 까닭에 덕을 이루는 데 있어서

 

104) 주자어류 , 1-2, p.43.
105) 안영상, 「천주교의 수용과정에 나타난 사상적 변용에 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 제28집, 서울: 동양철학연구회, 2002, p.87.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205

 

리가 주재하는 측면이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주재에 모순되는 것으
로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맹자 이래 전통적인 유학의 인문주의
에 어긋나 보인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나 태극은 어디까지
나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인간 외에 다른 주재자를 말하는 것
이 아님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덕의 실재라는 것이 차지하는 위치가
그렇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도덕적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불교나 노장의 무나 공의 세계로 가면, 악이 판을 치는 세상
을 바로 잡아 올바른 현실을 만들 힘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성리학
자들은 생각한 것이다. 세상 만물의 근원은 도덕적이라는 점에서 성
리학은 근원을 실하게 본다. 마음을 비워서 허하게 만들되, 그 허는
악한 마음을 비워 우주의 근원적인 선의 힘이 가득 차게 하는 것이
다. 허이실(虛而實)이란 그것이다. 그 선함은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풀린다고 보았으니, 결국 실(實)이란 인의예지가 세상사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점에서, 세상 만물보다
더 존재하는 최고로 개별화된 실체 곧 인디비디움(individium)인 마
테오 리치의 천주와 다르다. 물론 천주도 우주의 근원적인 선의 힘이
라는 점에서 도덕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천주는 인간과 구
분되는 순수 현실태로서, 도덕적 관심을 넘어 예배의 대상이 된다.
아퀴나스 신학에서에서는 도덕론이 존재론에 흡수되어 있다. 태극이
나 리의 실(實)은 서양의 존재론으로 연결되지 않는 순수 도덕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아퀴나스나 마테오 리치의 실체와 다르다. 도덕적
인 어떤 존재의 실재를 말한 것이 아니다.106) 마테오 리치는 말하기
를, “천주는 도가 아니라 도의 근원이라고 했다.”107) 이것은 천주가
도덕론과 존재론의 결합체임을 말한다. 그래서 자칫 선은 천주의 속

 

106) 존재론과 결합되지 않는 덕의 실재성이라는 것이 서양 신학 쪽
에서 보면 매우 애매하지만, 그것이 성리학의 특성이다. 이승환
교수는 ‘윤리적 실재론’(ethical realism)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승환,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
부, 1998, p.267.
107) “非所謂 ‘道’ ‘德’也, 而爲 ‘道’ ‘德’之源也”, 천주실의 1-9, p.68.
206 논문

 


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아퀴나스 신학에서 하느님의 선
하심은 곧 하느님 자신과 일치된다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실체성이
무얼 결여한 기체로 이해되지 않도록 하고 있지만 말이다.

 


Ⅴ. 나가는 말
마테오 리치는 아퀴나스 신학의 원인이라는 개념을 성리학의 소이
연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제일 원인인 천주가 ‘소이연의 소이연’이라
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의 리는 천주가 아님을 주장하고 리를
속성이라고 보았다. 소이연이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성리학과 연결 고
리를 찾았으나, 태극이나 리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성리학으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룰 수 없음을 보이려고 했
다. 그 불가능성은 영생의 문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유학이 이루려고
하는 자기완성의 목표가 성리학의 사유로는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인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며, 덕이 인간 안에 들어 있다고 보았지만, 기독교 신학은 인간
의 타락을 강조했다. 그 결과 선의 실현의 주재자가 달라진다. 천주
나 리는 모두 형상인 또는 목적인이 된다는 점에서 같을 수 있지만,
능동인에서는 달라진다. 천주가 목적인이면서 능동인이라는 것은 기
독교의 하느님은 인생의 목적이지만 동시에 그 목적을 수행할 능력
을 우리 안에서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의 실현은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의 은총임을 기독교는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 초월자 하느님의 주권을 확립하고 하느님은 리와 달리 경배
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성리학의 리가 능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성리학이 자기
수양을 강조하는 인문주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의
리의 주재는 표준으로서의 주재이며 철저하게 도덕형이상학에 머물러
있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존재론에 도덕론이 흡수되어 있지만, 성리학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207

 


에서는 존재론이 도덕론에 흡수되어 있다. 기독교의 신은 실체요 존
재 자체로서 직접 통치하지만, 성리학의 리는 이념으로 천명으로 통
치한다. 그것은 기독교와 다른 방식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렇
다고 리가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대로 사물의 속성으로 전락하는 것
은 아니다. 리는 속성이 아니며 아퀴나스의 존재론적 실체일 수도 없
다. 리는 도덕적 이념으로 통치하는 면에서 근원이요, 주재를 말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예배를 받을 인간 밖의 존재자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기보다 먼저일 수는 있지만 언제나 기와 함께 하는 것이요, 사물 안
에 있는 것으로서, 사물 밖의 존재자로서 무에서도 존재하는 천주와
다르다. 성리학이 인문주의로 머물 수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양명수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투고일: 2008. 04. 12.
심사완료일: 2008. 05. 03.

 


20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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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논문
ABSTRACT
Aquinas’ Theology in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T’ien-chu shih-i) and
Critique of Matteo Ricci’s Understanding of
Neo-Confucianism
–A Comparison of the Christian God and Neo-Confucian Li–
Yang, Myung-Soo
Matteo Ricci took the Neo-Confucian concept of li(理, principle)
as something unable to be a prime cause in the light of Thomas
Aquinas’ thought. Ricci’s cosmology was based on creation theory,
while Neo-Confucianism was associated with a cosmology favoring
the natural generation of myriad things.The crucial point of Ricci’s
apology for Catholic thought is that the Christian God appears as
causa effeciens, a creator who governs the world directly.This
continuing creation implied by causa effeciens suggests a kind of
authorship concerning moral behavior.In Aquinas’ theology, where
morality is absorbed in ontology, moral virtue is initiated by the
engagement of God as Being itself.In Neo-Confucianism, which
does not recognize any efficient cause outside of natural things,
human beings alone ultimately produce moral goodness on their
own.This is the point at which theology and humanism
diverge.Ricci argues that li is accidens, that which is added
천주실의 에 나타난 아퀴나스 신학과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비판 211
accidentally to substantial things. But according to Chu Tsi, there
would be nothing without li. Additionally, li precedes ki(氣,
material force). Hence, li cannot be accidental, nor is it ontological
substance. It is the universal standard and ultimate ideal that
governs all. To use Aquinas’ terms, li is possibly the formal cause
or the final cause that is not the efficient cause.
Keywords: T’ien-chu, Li, Aquinas, Neo-Confucianism, the efficient
ca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