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그의 지적 동료인 샹탈 무프가 제창한 포스트마르크스주
의는 지난 30년 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
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개념인 계급과 생산을 폐기한 지적 배신으로 공격했다. 다
른 한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약점인 경제결정론과 계급 환원론을 극복하고 다양
한 사회운동을 반자본주의 운동과 결합시킬 수 있는 이론적 돌파구로 환영받았다.
이 논문의 목적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가 설명할 수 없는 구체적 정세에서의 이데
올로기적 투쟁과 다양한 저항적 주체 형성과정에 주목하기 위해 라클라우와 무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되 그들의 입장이 안고 있는 담론 환원론적 경향으로
부터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담론 환원론적인 경향이 낳은 라클라우의 상대주의적
편향은 그의 지적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을 재도입하여 그의 주장
을 재평가하고 그것을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교정가능
하다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 주장이다. 기존 상징적 질서의 교란을 나타내는 라클라
우의 탈구개념을 ‘충족되지 않은 필요’라는 실재의 체험과 결합시킨다면 포스트마
르크스주의의 기여를 국지적 헤게모니적 실천을 넘어 대항헤게모니기획에까지 확
대해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주요 용어: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루이 알튀세르, 비판
적 실재론, 로이 바스카, 탈구.
1. 머리말
20세기 중반부터 사회이론과 정치이론 모두 문화를 대단히 중요한 요인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어이론은 문화 분석의 중심 수단이었다. 문화가 사
회·정치 이론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을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
라고 한다면 문화가 언어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언어학적 전환
(linguistic turn)이라고 불린다. 마르크스주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람시, 루카
치,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연결되는 서구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은 모두 문화를 가
장 중요한 요소로 끌어 들였다(Anderson, 1976). 한편으로 에드워드 톰슨(Edward
Palmer Thompson)을 비롯한 영국의 역사가들과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로 대표되는 문화 이론가들은 사회변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민중적’
문화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경향의 초점은 민중 문화의 역동성에 있
었다(서영표, 2008). 다른 한편, 대륙의 마르크스주의는 문화를 이데올로기에 대
한 구조적 분석에 동원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대중의 의식을 지배
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현대의
신화?로부터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론에 이르는 구조주의
적 전통은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1)
이 글의 주제인 라클라우(와 무프)는 앞에서 언급한 문화주의적 전통(윌리엄
스-톰슨)과 구조주의적 경향에 대한 급진적 대응을 형성하는 일련의 이론적 경
향, 즉 포스트구조주의적 경향과 많은 것을 공유한다. 포스트구조주의적 경향
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유동적 구성을 옹호하면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일방적 지배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문화가 가지는 역동성을 강조한다. 이
러한 문화의 역동성은 다양성(diversity) 또는 다원성(plurality), 그리고 특이성
(singular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진되었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이
러한 생각들을 수용하고 그것을 마르크스주의(그람시적 마르크스주의)와 결합
1) 구조주의적 전통에 대해서는 Craib(1992: 131-176)을 보라. 좀 더 자세한 논의는
Sturrock(1986)을 참고하라.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구조주의가 가지는 위치에
대해서는 Joseph(2006: 69-82)를 보라.
132 2016년 제13권 제1호
시키려 시도한다.
포스트구조주의 및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포스트마르크스주는 마르크스
주의 운동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던 권위주의, 남성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를 무
너뜨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수준에서 현실을 짓누르고
있는 억압적 구조를 비판하는 데까지는 효과적이었지만 비판 이후 여전히 실
재하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투쟁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에서는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Sayer, 2000). 라클라우와 무프, 특히 라클
라우는 이러한 좌표 상실을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는 헤게모니적 실천(또는 투
쟁)이라는 개념으로 넘어서려 한다.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해 기존의 경직된 마
르크주의를 현실에 개방하는 것, 이것이 라클라우가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
가 포괄할 수 있었던 현실은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실재 그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 불러오는 독단론과 결정론을 피하기 위해 라클라우는 담론이라는 우회로
를 선택했지만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투쟁에서 그의 우회로는 충분하
지 않았다. 이것이 라클라우가 ‘말할 수 없는 것’이다.2)
이 논문의 목적은 ‘말할 수 없는 것’ 또는 ‘말하지 못한 것’을 보완할 수 있
는 이론적 자원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그가 ‘말한 것’이 가지는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다. 한국에서 라클라우와 무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마
르크스를 버리고 자유주의로 후퇴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라클라우
가 ‘말한 것’의 의미가 묻혀버리고 잊혀졌다(김정한, 2012). 라클라우와 무프가
다시 진지하게 검토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분리된 매우 현
학적인 지식인들 사이의 지적 유희에 동원되고 말았다.3) 즉, 라클라우를 현실
2) 라클라우가 ‘말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라클라우에게서 듣고 싶은 말’ 또는 자본
주의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투쟁을 위해 라클라우가 ‘해야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 글을 통해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좀 더 분명히 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과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3) 라클라우와 무프를 논의한 모든 작업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민주주의와 헤게모니 개념을 한국정치 분석에 적용하려 했던 이승원(2008)과 4월
혁명 과정에서 잊혀진 하위주체들을 복원시키려 했던 이승원(2009)을 예로 들 수
있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그람시주의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정태석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33
을 설명하고 변혁하는 이론적 자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할 순전히 이론적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라클라우가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말한 것’과 무관하게 보완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그가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의 비판에 대응하면서 적극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탈구(dislocation) 개념에 주목할 것이다. 라클라우 자신이 만족
스럽게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탈구 개념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실재하는
억압과 착취의 체험 또는 경험과 조우하는 계기로 사고될 수 있다. 로이 바스카
(Roy Bhaskar)가 주창한 비판적 실재론은 라클라우의 탈구 개념을 좀 더 유물론
적으로 해석하도록 하면서, 라클라우가 ‘말해야 하는 것’의 방향과 내용을 채
워줄 수 있을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의 사상은 이 두 사상가를 연결할 수 있는
다리로 제시될 것이다.4)
2.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담론이론
라클라우와 무프의 사상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담론 개념을 설명해야
한다. 담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확해져야, 담론적 실천으로서의 헤게모니
적 실천이라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정치 전략이 온전히 이해될 수 있기 때
문이다.
1) 담론적 실천과 정체성 구성
라클라우와 무프에게 담론이란 “그 안에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을 포
(2007)의 시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4) ‘유물론(materialism)’ 또는 ‘유물론적(materialistic)’이라는 말은 매우 논쟁적이다. 이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논의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글이 제시하는 유물론은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을 배제하지 않는 ‘비환원론적’ 실재론(non-reductionistic
realism)을 의미한다는 점을 밝혀 둔다. 이에 대해서는 서영표(2009a; 2009b; 2013)를
참고하라.
134 2016년 제13권 제1호
함하는 총체(totality)”를 의미한다(Laclau and Mouffe, 1990: 100). 담론이론은 모든
“사회적 배열(social configuration)”이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사회적 관계 안에
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같은 물질적 대상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대상은 “다른 대상들과 관
계 맺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정도에 따라서만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대상이 갖는 참조적 물질성(referential materiality)”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이러한 “관계의 체계적인 집합”을 담론으로 간주한다(Laclau and Mouffe, 1990:
100-101; 또는 2001: 108[국역: 196, 이후 [ ] 안은 국역본 쪽수]). 달리 표현하자면
모든 사물은 “담론의 대상”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대상이 “담론적 조건(discursive
condition)” 외부에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Laclau and Mouffe, 2001:
107[194-195]). 더 중요한 것은 “비담론적인 복합적 제도, 기술 생산 조직”과 같
은 대상의 의미는 오직 “담론적 접합(discursive articulations)”으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107; 109[195-200]). 따라서 의미를 생산하는 담론적 구조는 인지적
(cognitive)이거나 사색적인(contemplative)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통해 생
산되고 재생산되는 “접합적 실천(articulatory practice)”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96; 또는 105[176 또는 191]).
라클라우와 무프가 접합적 실천을 통한 사회관계의 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모든 담론적 구조가 물질적 특징(material character)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그들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ontology of the social)”의 지위를 부여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는 오직 담론적 실천을 통해 생산되는 정치적으로 차이를 가지는 정체성
들 간의 관계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Lacalu and Mouffe, 2001: xiv[18]).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특성”을 강조하는데(67, 109[134, 199-
200]), 이는 곧 모든 담론적 구조의 물질적 특성을 의미한다(108[196-197]).
이러한 입장을 ‘약화된 유물론’이라고 명명해보자. 라클라우와 무프는 실재
와 인식을 대조할 수 있다는, 그래서 지식의 근거가 실재라는 ‘강한’ 유물론을
거부한다. 실재가 있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근거한 지식주장은
쉽게 독단으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 이들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우리 인식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35
의 결과로서의 재현(representation)의 체계 안에서 세상을 알게 될 뿐이다. 따라
서 모든 ‘의미 있는 것’은 해석의 장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
은 이러한 해석이 언제나 관계적이라는 점이다. 모든 사물과 대상은 이미 언제
나 해석된 의미이며 이것은 다른 사물과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회 안에 안정된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 관계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에게 이것이 우리가 인
식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5)
라클라우와 무프의 담론이론은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먼 제라스(Norman Geras)는 그들의 담론이론을 관념론의 전형적
인 형태라고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대단히 익숙한 주장을 담고 있다. “전-담론
적 실재(pre-discursive reality)와 이론을 넘어선 객관성”은 합리적 판단을 가능하
게 하는 변하지 않는 기초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의사소
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담론적 실재라는 참조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
약 이러한 인식의 근본적 토대를 부정한다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상대주의와
관념론뿐이라는 것이 제라스 비판의 핵심을 이룬다(Geras, 1987: 67).
만약 제라스의 전-담론적 실재가 대상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제라스의 주장은 소박한(naive) 실재론을 넘
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 안의 대상은 언제나 문화적으로 다루어지기
(handled) 때문이다(Thompson, 1967). 이런 맥락에서 만약 라클라우와 무프의 의
5) 이러한 주장이 라클라우를 흄이나 버클리의 주관적 경험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
니다. 많은 경우 라클라우의 비판자들은 그가 사물 사이의 관계를 인식주체의 관
념에 따라 담론적으로 상이하게 해석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들의 한계가 ‘인식주체의 관념’을 담론적 관계/실천에 투영해서 담론적 관계/실천
자체를 관념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라클라우는 유물론자들과 같이 독
립된 실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약화된 형태이지만. 문제는 우리
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있다. 라클라우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데카르
트/칸트처럼 실체를 인식하는 표준화되고 보편적인 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라클라우에게 물질세계는 상호작용하는 대상이자 담론적 실천/관계의 제한/한계
일 수도 있다. 이러한 유물론과의 공통지반 위에 라클라우가 마저 말하지 못하는
것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136 2016년 제13권 제1호
도가 모든 의미를 고정된 실재로 환원하는 환원주의적 인식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것이라면, 약화된 유물론으로서의 담론이론은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의미가 사회 안에서 유동하면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한계 또는 경계가 필요하다. 라클라우와 무프가 비환원론인
입장으로부터 의미를 감싸고 경계 짓는 한계를 완전히 부정한다면, 제라스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참조점은 고정될 수 없지만
사회적 관계 또는 권력관계로 드러나면서 의미구성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6)
물론 라클라우와 무프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관계들은 완전히 고정될
수 없다.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한계 지어진 경계를 가질 수밖에 없
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공통의 문화, 이데올로기 또는 역사적으로 한정된 인식
의 지평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라클라우와 무프의 주장처럼
적대를 포함하며 적대는 상대적으로 고정된 사회적 관계 또는 권력관계 안에
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이러한 한계 또는 경계를
담론구성체로 보고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는, 불가능한 대상을 성취하려는 헤게
모니투쟁들의 우연성이 창출하는 불안정하고 부분적인 고정으로 제시한다.
2) 헤게모니적 실천과 우연성
라클라우와 무프가 주장하는 담론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연성
(contingency)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야 한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우리가 담론적 총체성은 단순하게 주어진 그리고 한계가 정해진 실정성
6) 정태석(2007: 141-142)이 “사회적 비고정성, 담론적 접합의 우연성을 인정하더라
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구성의 기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37
positivity의 형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관계적 논리는
우연성이 관통하는 불완전한 것일 것이다. ‘요소’들로부터 ‘계기’들로의 이행은
결코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Laclau and Mouffe, 2001: 110[202]).7)
언뜻 보기에 이 인용문은 라클라우와 무프가 그 어떤 경계도 인정하지 않는
다는 의심을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의심을 넘어서는 그들의 방
법은 매우 세련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필연성은 우연성의
영역에 대한 부분적인 제한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111[203]). 한편에서 이러
한 주장은 필연성은 그것을 필연적이라고 믿게 하는 담론성 안에서만 필연적
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필연성은 사람들이 담론의 영역 안에서 무언가
를 지속적이고 기초적이라고 믿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담론의 장이 흔들릴 때 그것은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 되게 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라클라우에게 사회과학에서의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뒤에서 다루게 될 유물론적 재해석을 어렵게 하는 장
애물일 수 있다.우연은 필연성이 드러나는 현상 형태이며, 비록 인간의 지식이
그것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필연은 법칙에 따른다는 입장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입장은 우연적 필연(contingent necessity)이라는 개념을 옹호
한다. 즉, 필연성을 우연성의 제한으로 보는 것은 모든 우연성을 필연성의 발현
으로 보되 필연성을 언제나 우연적 과정의 연속이 가져오는 효과로 파악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우연적이다. 태양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구가
생물체가 살 수 있는 구역에 위치하고 달의 형성에 따라 축이 안정된 것은 우
연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력법칙이라는 필연이 드러난 것에 다름 아니다.
필연성의 방향은 우연적 과정과 사건들에 열려 있는 것이다.8)
사회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우연적이다. 하지만 우발적 사건들은 특정한 시기 동안 존재하는 사회적 구조
의 효과(필연성)가 드러나는 양상이다.9) 그리고 사건들은 사회의 인과적 힘을
7) 인용문은 이승원의 국역본을 따랐다.
8) 우연적 필연성에 대해서는 Jessop(2008: 225-233)을 참고하라.
138 2016년 제13권 제1호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우리는 제한된 담론 영역에서의 헤게모니적 기획을 넘어
서는 예측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과학적 실천에 의한 필연성의 파악
이다. 하지만 그 필연성은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변수, 다양한 사
건들에 의해 교란될 수밖에 없다.10)
라클라우와 무프에게 지속적이고 기초적인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그들은 ‘어떤 경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한계 설정을 문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
한 개방적 태도가, 비록 한시적이고 제한된 것이지만, 필연성을 찾으려는 노력
을 기각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우연성에 대한 주장을 정체성 구성으로 확장시킨다. ‘정
체성의 장(field of identities)’은 완전히 고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과잉결정의 장’
이라는 것이다. 즉, 정체성의 구성은 ‘담론성의 장(field of discursivity)’에서만 가
능한 것이다(111[203]).11) 의미와 정체성에 관한 이와 같은 주장을 이해하기 위
해서는 필연의 의미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봐야 한다. 다시 한 번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의미를 궁극적으로 고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의미를] 부분적으로 고
정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 그렇지 않다면, 차이들의 흐름은
9) 여러 가지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필연성’은 언제나 위험한 개념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구조적 조건에 의해 영향 받으며, 그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구조의 효과를 필연성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불변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설명, 그리고 개입의 대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
연성은 언제나 ‘경향’으로만 인식된다. 더 깊은 논의가 요구되는 주제다.
10)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완벽한 예측, 즉 법칙의 발견을 통한 예측은 불가능하
다. 하지만 경험주의자들이 신봉하고 있는 법칙적 설명에 대한 비판이 곧 예측의
‘시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측의 시도들은 지속적으로 지식을
확장해가는 실천의 형식일 뿐이다.
11) 이승원은 ‘field’를 ‘영역’으로 번역했으나 힘이 작동하는 ‘장(場)’이 더 적합해 보
인다.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39
불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의미들 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전복하기 위해서라도,
하나의 의미가 존재해야 한다. 만일 사회적인 것이 그 자신을 명료하고 제도화된
사회 형태들 속에 고정시킬 수 없다면, 사회적인 것은 그런 불가능한 대상을 구
축하려는 노력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모든 담론은 담론성의 영역[장, 인용자]
을 지배하기 위한 시도, 즉 차이들의 흐름을 억제하고, 중심을 구축하기 위한 시
도로서 구성된다. 우리는 이렇게 의미를 부분적으로 고정하는 특권적인 담론 지
점들을 결절점[nodal point, 인용자]이라고 부를 것이다(112[국역: 205]).
불가능한 대상(impossible object)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클라우와 무프
에게는 그 누구도 구조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정체성은 담론적인 것(the discursive) 안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구성된
다. 이러한 기제에서 특정한 대상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의미
를 획득하는데, 정체성이란 의미의 해석자(interpreter)로서의 주체 위치(subject
position)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의미는 의미에 의해 매개되는 담론적 실천과 관
계되어 정체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정체성이 영속적으로 고정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정체성은 의미들 사이의 불안정한 접합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것이다. 역
설적으로, 의미의 불안정성은 완전히 고정된 정체성을 의미하는 안정된 주체
위치가 부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정체
성을 가지며 모든 사물은 의미를 가진다. 비록 각각의 의미와 정체성은 비고정
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클라우와
무프의 관점에서는 정체성과 의미는 긍정적인(positive)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
며, 오히려 언제나 ‘불가능한 대상’을 구성하려는 시도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
한 시도가 바로 담론적 실천인 것이다. 따라서 필연성은 오직 부분적으로 고정
된 정체성과 의미를 구성하려는 시도들이 생겨나는 담론적 장의 한계(limitation)
를 의미한다.12)
12) 라클라우와 무프에게 정체성과 의미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대상’을 ‘가능한 주체위치/정체성’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로 본다면 정체성은 언제나 긍정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140 2016년 제13권 제1호
라클라우와 무프의 정체성 구성 문제를 ‘집합적 정체성’으로까지 확장시켜
보자. 여기서 관건이 되는 개념이 ‘접합(articulation)’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접합의 실천은 의미를 부분적으로 고정하는 결절점의 구축으로 구성된
다. 이런 고정화의 부분적 성격은 사회적인 것의 개방성에서 비롯되며, 이는 결
국 담론성 영역[장]의 무한성에 의해 모든 담론이 끊임없이 범람한 결과이다
(113[207]).
모든 구성과정이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합적 정체
성을 구성하려는 실천들은 여러 요소들을 임의적이고 우연적으로 선택해서 결
합시키는 접합적 실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접합적 실천은 완전한 구성을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고정된 경계 내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라클라우와 무프에게 이 부분적으로 고정된 경계를 구성하는 중심이 바로 ‘결
절점’이다. 이 결절점은 접합적 실천의 중심이자 한계이다. 그러나 접합적 실천
을 통해 결절점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이 부분적 고정성은 그 경계선 밖의 타자
들로 인해 불안정하게 된다. 물론 모든 구성과정이 필연적이고 따라서 무엇인
가를 임의로 선택해야 하는 접합적 실천이라는 정치적 작업이 필요 없다면 경
계선도, 타자도, 결절점도, 어떤 불안정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라
클라우와 무프는 구성과정의 우연성을 강조하면서 접합적 실천, 즉 정치의 자
율성이 가능한 영역을 제시하게 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경계들은 불
안정하며, 유지 또는 해체를 위한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라클라우와 무프가 ‘헤게모니적 실천’이라고 부른 일종의 언어게임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또는
집합적 정체성을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구성할 수밖에 없는가? 왜 우리는 결절
점을 성취하려 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적대(antagonism)의 개념이 중요하
도 할 수 있다. 이 글의 맥락에서는 긍정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41
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주된 관심은 모순(contradiction)을 적대와 구분하는 것에
있다. 그들에게 모순의 개념은 ‘실재하는 대립(real opposition)’을 전제하기 때문
에 부적절한 개념이다. 실재하는 대립은 이미 고정된 ‘완전한 정체성(full
identities)’인 것이다. 모순의 경우 “A는 완전한 A이며 이것과 B의 관계는 객관
적으로 결정 가능한(determinable) 효과를 가진다(Laclau and Mouffe, 2001: 122-124
[222-227]; Laclau, 1990: 6-8). 이와 달리 적대의 경우는:
…… ‘대문자 타자’의 현존이 내가 총체적으로 내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
관계는 완전한 총체성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들의 구성 불가능성에
서 발생한다. 대문자 타자의 현존은 논리적 불가능성이 아니다. 즉, 그것은 존재하
며, 따라서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Laclau and Mouffe, 2001: 125[국역: 227]).13)
적대의 개념을 통해 라클라우와 무프는 특정한 구조 안의 객관적 위치로부
터 곧바로 도출되는 주체성 개념을 기각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에서 착
취에 반대하여 노동자를 저항하게 하는 갈등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직
접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와 그것 바깥의 노동자 정체성” 사
이의 상호관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Laclau, 1990: 9). 정체성은 구조적 위치로
부터 곧바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연적인 권력관계들”에 의해서
생산되는 “항상적인 외부”에서 구성되는 것이다(Laclau, 1990: 10).
적대 개념에 기초해서 라클라우와 무프는 헤게모니적 실천을 접합적 실천으
로 이론화한다. “‘요소(elements)’로부터 ‘계기(moment)’로의 이행”은 완전히 성
취될 수 없으며 언제나 모든 체계는 의미의 잉여를 보유한 부분적 한계로 구성
된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바로 이런 의미의 잉여와 부분적 한계의 끊임없는 유
동성 혹은 의미의 잉여에 의한 부분적 한계의 지속적인 전복을 강조한다(Laclau
13) 라클라우와 무프의 적대개념은 지젝의 비판(Zizek, 1990) 이후 라클라우에 의해서
수정된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 이러한 수정을 라클라우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의
근거로 다시 논의할 것이다. 라클라우의 자기비판과 수정에 대해서는 김정한
(2011)을 참고하라.
142 2016년 제13권 제1호
and Mouffe, 2001: 110-111[202]).
요약하자면 라클라우와 무프의 담론이론은 의미와 정체성, 특히 정치적 정
체성의 구성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이 제공하는 이론적 자원은 특정한 정세 속
에서 지배적인 헤게모니가 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할 수 있게 하면서 이에 대한
대항헤게모니에 대해서도 사고할 수 있도록 한다. 그들이 의도한 바대로 포스
트마르크스주의적 담론분석은 다양한 사회운동들 사이의 연대가 구성되는 원
리를 제시한 것이다. 특정한 개인은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진다. 즉, 스스로를
다양한 주체로 인식한다. 대학원 학생, 녹색당 당원, 레스토랑의 파트타임 노동
자, 블루칼라 노동자의 아들, 남편, 아버지 등등. 이 모든 위치는 관계적이며
불안정하다. 각각의 위치는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다른 위치에 영
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각각의 위치는 항상 타자들의 정체성
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때때로 나의 남성우월주의적인 남편
으로서의 정체성은 남녀평등을 요청하는 녹색당의 정체성과 충돌한다. 그 과정
에서 나의 정체성은 나의 파트너와 당내의 페미니스트들과의 상호작용의 효과
아래서 움직인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표현을 빌자면 나의 남성으로서의 정체성
은 파트너/페미니스트의 관계에 의해 ‘위협’받는다.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타자들 모두 관계적인 방식으로 다중적인 위치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질 것이다. 무수히 많은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언제나 부분적으로 고정된 정체성을 가
진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이러한 생각을 정교한 정치이론으로 발전시킨다. 제라스
처럼 ‘정통’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라클라우와 무프가
발전시킨 담론적 정치이론을 무시한다면 좌파의 정치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항상적인 객관적 위치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경험하지 않
는다. 따라서 그러한 전제에 기초한 정치 전략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라클라우
와 무프가 주장하는 담론이론 또한 약점을 가진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비판적으로 평가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루이 알튀세르는 그러한 평가
작업을 위한 준거점을 제시해줄 수 있다.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43
3.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알튀세르의 사회이론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놓은 동시에 라클라
우와 무프의 이론이 극단적인 사회구성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고 그들 이
론의 합리적 핵심을 수용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즉, 알튀세르는 구조적 분석
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결정론(determinism)과 본질주의(essentialism)를 넘어설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 이후의 비판사회이론은 언제
나 구조적 분석과 비결정론적 접근 사이의 긴장 속에 있었다. 알튀세르는 이
두 가지 길을 화해시킬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갖고 있었다. 이와 비교한다면
라클라우와 무프는, 정치적 주체구성 과정을 정교하게 이론화한 기여에도 불구
하고, 이러한 문제와 대결하는 대신 “담론적인 것의 물질성”이라는 주장을 통
해 회피했다고 할 수 있다(Lacalu and Mouffe, 2001: 108[197]).
1) 과잉결정과 상대적 자율성
알튀세르의 사회구조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과잉결정된 모순을 통한
접합된 사회구성체이다. “복잡한 전체는 지배 안에서 접합된 구조의 통합이
다”(Althusser, 1977: 202). 그에게 모순은 본질 또는 기원을 포함하지 않으며 언
제나 서로 다른 하위구조들 사이의 접합을 통한 구조적 효과일 뿐이다. 심지어
자본-노동 사이의 모순조차 단순하지 않으며 언제나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형
식과 그것이 발휘되는 상황”에 의해 특정화된다(Althusser, 1977: 106). 이런 점에
서 알튀세르의 모순 개념은 라클라우와 무프의 적대개념과 유사하다.
과잉결정 개념은 상대적 자율성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알튀세르
의 과잉결정 된 사회구조는 다양한 하위구조들을 포함하며 이러한 하위구조들
은 비록 구조적 효과에 의해 영향을 받을 지라도(인과성) 각각의 논리와 역사를
가지기 때문이다. 전체적 구조 안의 각각의 하위구조(심급 또는 수준)는 접합되
어 나타나며 이러한 접합은 그 전체 구조를 복잡한 전체(complex whole)로 생산
하고 재생산한다. 결론적으로 각각의 심급 또는 수준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적 전체(whol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44 2016년 제13권 제1호
서로 구별되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복잡한 구조적 통합 안에서 공존하
는, 특정한(specific) 결정들에 따라 서로 서로 접합되는, 마지막 심급에서 경제의
수준 또는 심급에 의해 고정되는(fixed) 수준 또는 심급으로 불릴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는 구조화된 전체의 통합(Althusser and Balibar, 1979: 97).
상대적 자율성 개념은 마르크스주의로 하여금 생산 또는 경제의 우위성이라
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지식의 독립된 대상으로서의 다양한 장(fields)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경제적 심급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심급과 정치적
심급 또한 각각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각 심급은
실재하는 구조 안에서 (재)생산되며, 과학은 각각의 심급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탐색한다. 단 실재하는 대상에 접근하는 과학적 실천은 지식의 대상에 의해 매개
된다. 그리고 각 심급은 구조적 효과성에 의해 다른 심급들에 의해 영향 받는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주장에서 담론 구성체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분석의 대
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알튀세르가 주장하고 있는 구조적 인과성, 복
합적 전체 내부에서의 다양한 심급들 간의 상호결정을 기각할 때 관념론과 상
대주의로 경도될 위험에 처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간의
결정적인 경계는 ‘구조적 인과성’과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에 대한 수
용여부로 드러난다.
과잉결정된 모순을 전제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경제적 심급이 언제나
지배적 모순을 내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경제적 변증법
은 결코 순수한 상태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Althusser, 1977: 113). 따라서
경제적 심급은 오직 효과(effects)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
에서의 결정은 경제, 정치, 이론 등의 배열(permutations) 안에서만 발휘된다”고
지적하고 있다(Althusser, 1977: 213). 알튀세르는 이 점을 잘 알려진 대로 “‘최종
심급’의 고독한 시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고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Althusser, 1977: 111).
라클라우와 무프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 그
자체를 상징적 질서(symbolic order) 안에서 구성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관계는 “내재적 법칙의 필연적인 계기로 환원하는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45
궁극적인 문자성(literality)”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알튀세르의 분
석은 “새로운 접합의 개념을 정교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인데, 이것
은 “사회적 관계의 과잉결정된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
정적인 측면은 알튀세르 사상의 또 다른 측면과 공존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
이 그들의 판단이다.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Laclau
and Mouffe, 2001: 98[179-180]). 라클라우와 무프에게 후자의 측면은 본질주의의
징표인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경제는 ‘추상적인 보편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약 경제가 모든 유형의 사회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할 수 있는 객체라면, 이
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어도 최종 심급과 관련해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단순
결정이지 과잉 결정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사회가 자신의 운동 법칙을 결정하
는 최종심급을 갖는다면, 과잉 결정된 심급들과 최종 심급 사이의 관계는 최종
심급에 의한 단순하고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99[181]).
마지막 심급은 사회적 관계를 비본질주의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과잉결정
개념을 폐쇄된 구조(closed structure)에 가두어버렸다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프의
생각이다. 이러한 라클라우와 무프의 알튀세르 비판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첫째로, 구조적 효과와 최종심급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알튀세르의 과잉결
정 된 사회구성체 개념을 본질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과잉된 해석이다. 라클라
우와 무프가 자신들의 주장이 “완전하게 구성된 사회적인 것의 영역들 사이의
상호작용 또는 결정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그들 스
스로를 분리된 대상으로 구성하지 않으면서 미늘달림(imbrication)의 불완전한
관계로 맺게 되는, 관계적으로 출현하는 부분적 정체성의 장”에 관한 것이라고
언급할 때(Laclau, 1990: 24), 그들의 설명은 알튀세르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
지 않는다. 경제의 수준은 다른 심급들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과잉결정의 원리인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의
이론적 입장은 “모든 정체성의 불안정하고 관계적인 성격”과 “합리적으로 통
합된 총체로서의 사회의 불가능성”(Laclau and Mouffe, 2001: 99[182])과 충분히
146 2016년 제13권 제1호
공존 가능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무조건적으로 분리된 정체성”(Laclau, 1990:
24)을 미리 전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메타포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라클라우와 무
프는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이론적 딜레마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 어떤 준
거점도 가지지 않는 담론적 실천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적인 것
의 한계(the limit of the social)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Laclau, 1990: 24).
그들에게 사회적인 것은 ‘불가능한 대상’을 성취하려는 시도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은 완전하게 고정된 위치를 가지지 않는 담론적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
다. 그러나 라클라우와 무프는 의미와 정체성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지평에
의해 어느 정도 한계지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것이 ‘사회적인 것의 한계’이다. 그들은 의미와 정체성은 완전히 고
정될 수 없다고, 따라서 언제나 ‘구성적 외부’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함으
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방어는 비판에 직
면할 수밖에 없다. ‘구성적 외부’조차도 ‘사회적인 것의 한계’에 의해 제한되어
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라클라우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는 생산관
계와 그것에 외재하는 정체성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언급할 때(Laclau, 1990:
25), ‘사이(between)’는 한계(limits)를 내포해야만 한다. 담론성만으로 생산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클라우와 무프에게 정체성의 한계와 정체성에 외재하는 어떤 것은 잔여적
범주처럼 보인다. ‘성찰적 근대화’에 대해 언급할 때(Laclau and Mouffe, 2001:
xv[19]), 그리고 신보수주의에 의해 시작된 ‘종속의 새로운 형식’에 저항하는
‘새로운 투쟁’에 대해 논의할 때(Laclau and Mouffe, 2001: 159-171[274-294]), 그들
은 “순수히 담론적으로 구성된 정체성”과 자본주의적 동학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필연적으로 “집합적 이매지너리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는 “급진적 불안정성과 사회적 정체성의 위협”은 “자본주의의 팽창”
이라고 말하고 있다(Laclau and Mouffe, 1990: 127). 그들은 한편으로 ‘최종심급’을
상정한다는 이유로 알튀세르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최종심급을 뒷문으
로 다시 들여오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경제적 심급이 항상 복잡한 전체의 효과성(effectivity) 아래에 있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47
는 데 반해, 라클라우와 무프는 그들의 이론적 프레임 안에서 경제적 동학을
논의할 여지를 갖지 못하게 되면서 암시적으로만, 하지만 매우 직접적인 형태
로 다시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담론외적인 물질적 조건의 효과를
한계 짓는 필연성”을 거부하며(Howarth, 2000: 118), 그에 따라 심각한 이론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무젤리스는 이러한 딜레마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라클라우와 무프는 ‘제도적 분석’을 담론적인 것으로 대체
하고 있는 것이다(Mouselis, 1988: 113). 이 딜레마는 다중 정체성의 설명과 관련
하여 더욱 확장된다.
2) 다중 정체성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과잉결정개념에 기초해서 정체성 구성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생각을 이끌
어 낼 수 있다. 하나는 다중정체성(multi-identity)이며 다른 하나는 실재적인 것
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이론화이다. 첫째로 다중정체성 개념은 알튀세르의 사
회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Althusser and Balibar, 1979:
252), “우리는 각각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실천이 그것에 고유한 역사적 개인성
(individuality)의 형식을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 각각의 실천과 그러한 실천의 변형에서 그것들은 결합된 구조들의 토대
위에서 정의될 수 있는 개인성의 서로 다른 형식이다. …… 사회구조 안에는 서
로 다른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개인성의 형식들, 동일한 개인들에 의해
지탱될 수 없는 형식들, 그리고 각각이 그 스스로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역사를
가지는 형식들이 존재한다(Althusser and Balibar, 1979: 252).
알튀세르주의는 주체성 또는 정체성을 고정된 사회 구조 안의 항상적인 위
치로 환원하지 않는다. 여기서 알튀세르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서로 만난다.
양자는 정체성에 대한 비환원론적 설명에서 조우하게 된다. 하지만 포스트마르
크스주의가 너무 많이 상대주의로 치우친 지점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재도입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허위적 관념이 아니라 실재
148 2016년 제13권 제1호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그것의 물질적 토대를 가지며 구체적 장치
(apparatuses) 안에서 재생산된다(Althusser, 1971: 166). 또한 주체의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가지는 한 이데올로기
에 의해 구성된다(Althusser, 1971: 171). “이데올로기는 주어진 사회 안에서 역사
적인 실존과 역할을 가진 표상(이미지, 신화, 관념 또는 개념)의 (스스로의 논리와
엄격성을 가진) 체계(system)인 것이다(Althusser, 1977: 231).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행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에서 그리고 역사에서의 위치를 알게 되는데 사람들이 그들과
세계 사이의 체험된(lived) 관계를 변형하고, ‘의식’이라 불리는 특정한 무의식의
새로운 형식을 획득하는데 성공하는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적 무의식을 통해서이
다(Althusser, 1977: 233).
알튀세르에게 인간의 주체성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되며,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토대 즉 실재를 가진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주체성은 모두 근본적으
로 역사성에 의해 한계 지어진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정체성 또는 주체성에 관
한 주장은 알튀세르의 그것과 그리 먼 위치에 있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대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적이지 않고 오히려 생산관계와 그것에 외재
하는 어떤 것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
면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고, 그(녀)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으
며, 재충전을 위한 수단에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적대의 유형과 강도는 대부분
사회적 행위자 생산관계 바깥에서 구성되는 방법에 달려 있다(Laclau, 1990: 126;
also Laclau and Mouffe, 2001: 121[221]).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는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 착취로부터 생겨나
지만 이러한 적대를 노동력의 판매자라는 경제적 범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산관계 외부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경험되는 다양한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49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다. 알튀세르에게도 자본주의적 모순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로부터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 과정을 통
해 매개된다.
그러나 이 두 입장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구조적 위치’를 수용하느
냐 않는냐의 차이가 그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다중정체성을 설명하는 방법과
관련된다. 알튀세르는 구조적 위치와 주체 위치 사이의 변증법을 제시하는 반
면, 라클라우와 무프는 오직 다중적인 주체 위치만을 강조한다.
이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발리바르의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인용된 바대로 발리바르는 개인성은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각각의 과정은 나름대
로의 역사와 논리를 가진다. 그러나 각각은 복잡한 사회 구조에 의해 한계지어
진다. 이러한 한계는 각각의 논리와 역사가 오직 ‘상대적으로’만 자율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발리바르의 주장은 특정한 사회는 다양한 심급을 포함하고 모
든 심급들은 서로 다른 구조적 위치를 함축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제
적 심급의 계급위치, 정치적 심급의 다양한 정치적 위치, 이데올로기적 심급의
문화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위치(예를 들어 젠더 위치), 그리고 생물학적 수준에
서의 성적 차이 등등. 분명한 것은 이러한 위치들은 서로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위치는 언제나 과잉결정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심급에서의 위치는 구조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양한 구
조적 위치들은 동시에 개인에게 효과를 가진다. 이 효과들의 결과가 바로 ‘주체
위치’일 수 있다. 개인에게 주체 위치는 그것을 통해 구조적 위치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프레임이 될 수 있다. 스미스가 ‘주체 위치’를 개인이 사회구성체 안
의 구조적 위치를 해석하고 그에 대해 반응하게 하는 ‘믿음의 앙상블(ensemble
of beliefs)’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Smith, 1998: 58).
이런 접근으로부터 집합적 정체성이 도출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화된
주체 위치”는 “집합적으로 공유된 틀”로서 역할하게 되는데, 이러한 틀을 통해
“주어진 일련의 구조적 위치들”이 인식된다. 여기서 “주체 위치의 구성”은 결
코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의미와 정체성의 “지배적인 배열
(prevailing configuration)”이 있기 때문이다(Smith, 1998: 71, 73). 즉, 집합적인 정체
150 2016년 제13권 제1호
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한계가 반드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
미스의 설명처럼 개인들은 언제나 “담론적 장들 안에서 구조적으로 위치지어
진다.” 담론적 장들은 효과들을 제한하는 “구조들”에 의해 한계지어진다. 모든
개인적인 주체성은 이러한 한계 짓는 효과들에 의해 구성된다(Smith, 1998: 157).
발리바르 또한 유사한 설명을 제시한다.
…… 혁명적인 양극화는 계급의 현존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전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다 복잡한 과정(알튀세르가 과잉결정되었다고 말한 과정)으로부터 생
겨난다는 결론이 도출되어야만 한다. 복잡한 과정의 원료는 대중운동, 실천, 이데
올로기로 구성된다(Balibar, 1994: 145).
발리바르와 스미스는 구조적 분석(구조적 위치)을 좀 더 유연한 정체성 구성
과 연관 지으려 한다. 이것은 라클라우와 무프의 길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이
구조적 위치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단 구조적 위치가 양보되고
나면 우연성과 접합의 논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
조적 위치는 ‘규칙성(regularity)’을 전제하고, 규칙성은 관계 바깥에 존재하기 때
문에 사회적인 것을 설명하는 데서 우연성과 접합의 논리를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라클라우와 무프가 정체성은 언제나 관계적이라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Laclau and Mouffe, 2001: 106[192-193]). 여기서 라클라우와
무프의 주장은 결정론과 환원론에 대한 ‘과잉된’ 반응이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과잉된’ 반응은 집합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서 애를
먹게 한다. 물론 그들은 집합적 정체성을 정치의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한다
(Laclau, 1990: 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합적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는
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정체성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서 마지막 장에서 신보수주의에 의한 새로운 헤게모니적 접합을 반
복적으로 강조한다. 대처주의적 포퓰리즘이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전통을 불러
내어 결합하는 양상을 언급한다. 이것은 접합적 실천의 사례로 다루어지고 있
다(Laclau and Mouffe, 2001: 170[291-292]). 하지만 신보수주의의 헤게모니적 기획
은 자본주의적 동학과 분리되어 분석될 수 없다. 즉, 신보수주의는 정치적 정체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51
성의 운동 범위를 설정하는 구조적 한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조적 한계가 부정된다면 라클라우와 무프가 주장하는 신좌파에 의한
대항헤게모니 또한 생각하기 어렵다. 어디로부터 대항헤게모니의 출발점을 찾
을 것인가? 어디로부터 대항헤게모니의 근거를 찾을 것인가? 라클라우와 무프
의 이론적 입장에는 대항헤게모니를 향한 운동의 동기와 토대를 분석하기 어
렵다. 우연성과 접합은 어느 정도 구조적으로 제한된 한계가 필요한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때때로 이러한 어려움을 인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
나 그들은 이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암시적으로만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이 민주주의 혁명의 확장과 심화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
자체는 무엇에 의존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해 질
문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영속적인 변형과 전통적 사
회관계의 탈구와 진보적인 해체를 통해서만 확장할 수 있다고 정확하게 관찰했
다. 그러한 탈구 효과는 한편으로 상품화를 통해 드러나고 다른 한편으로 불균등
하고 결합된 발전과 연결된 일련의 현상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본
주의적 팽창이 불러오는 급진적 불안정성과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은 필연
적으로 집합적 이매지너리(imaginary)의 새로운 형식을 이끌어 낸다. 새로운 집합
적 이매지너리의 형식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위협받은 정체성을 재구성
한다(Laclau and Mouffe, 1990: 127-128).
여기서 라클라우와 무프는 경제적 결정론을 비판하고 있지만 암묵적으로 동
시대의 자본주의가 미치는 영향을 중요한 변수로 받아들이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프가 다루고 있는 신보수주의의 헤게모니적 실천의 성공은 ‘위협받는 정체
성’을 좀 더 자본주의적인 정체성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시장
경쟁에서 그(녀)의 생존을 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
니즘적 경향이 강조하는 유동하는 정체성은 곧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조
건과 그 속에서 구성된 새로운 주체성을 담론적인 것으로만 파악함으로써 이
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Harvey,
152 2016년 제13권 제1호
1991; Callinicos, 1991).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새로운 사회적 조건과 그 안에서 구
성된 새로운 주체의 형식을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과 이것을 민주
주의의 급진화로 과장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이론적 진동은 그들이 구조적 한계를 기각한 것에서부터
연원한다. 결국에는 과잉결정과 상대적 자율성을 가능하게 했던 복합적 사회구
조에 대한 분석능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은 ‘구조적인 과잉결정이
결여된 최종심급에서의 정치적인 것의 결정’인 것이다. 다양한 심급들 간의 복
잡한 상호작용에 대한 탐색은 담론적 수단을 통한 정치적 분석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심급들 간의 구조적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구조에 대
한 정적 설명으로 경도될 위험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은 회피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이론적 실천을
통해 대결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4. 라클라우 사상의 유물론적 재해석
: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 실재론14)
라클라우와 무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마르
크스주의를 비판하고 특정한 정세에 개입하는 담론적 전략을 정교하게 다듬었
다. 정세분석에 유용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원칙만을 반복하
면서 대중에게 고립되어 온 좌파운동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라클라우와 무프
14) 라클라우와 무프 이론의 ‘유물론적 해석’은 정태석이 시도한 ‘그람시 시민사회론
의 비판적 재구성’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정태석(2007)은 적대의 “사회적 적대
들의 물질적, 현실적 근거” 부족을 지적하고(141, 155, 159) 알튀세르의 재생산의
관점과 과잉결정(중첩결정) 개념을 “다양한 사회적 영역 간의 결정과 상호연관의
문제를 사고하기 위한 규제적 개념”으로 제시한다(158). 하지만 그는 적대의 다원
성을 강조할 뿐 적대의 다원성의 유물론적 근거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최근의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의 공유”가 어떻게 구
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유물론적 논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정태석, 2015: 56).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53
의 주장은 새겨들어야만 한다. 대중의 정서를 지도하고 계몽해야할 대상으로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그것으로부터 저항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클라우가 이론적 경력의 초기부터 말년까지 포퓰리즘에 천착했던 이
유도 여기에 있다. 대중의 정서를 반동적 포퓰리즘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서영표, 2014b).
하지만 라클라우와 무프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헤게모니적 실천
이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헤게모니적 실
천의 유물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대는 적대를 발생시키는
물질적 조건 위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구조적 결정과 계급
환원주의에 대해 과잉 대응함으로써 이 물질적 조건을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들이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포스트구
조주의적인 방향으로 치우쳐진 그들의 이론적 틀 속에 담을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라클라우와 무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물질적
토대가 없는 ‘가상적’ 정체성들 사이의 언어게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인가?15)
1) 탈출구로서의 탈구개념
하지만 라클라우에게서 이러한 이론적 궁지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통로가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은 아니다. 탈구(dislocation) 개념을 통해 라클라우의 사상을
유물론적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라클라우의 적대개념을 통해
우연성을 수용하면서도 현실의 물질적 모순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이것은 또한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계급 환원론으로 기울지 않고
접합적, 헤게모니적 실천과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젝은 라클라우가 적대를 ‘외재적으로 나의 존재를 방해하는 적대하는 존
15) 라클라우와 무프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유물론적 근거’로 반박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자명하지 않는 물질적 조건을 전제하는 관념론이라고 다시
비판받을 수 있다. 이 글의 주장은 비록 자명한 것으로 전제할 수는 없지만, 실재
에 대한 개입과 탐색의 ‘끈’을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나
려는 이론적 시도를 유물론적 입장으로 제시한다.
154 2016년 제13권 제1호
재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 것을 비판한다. 지젝은 주체는 언제나 주체화
(subjectivation)가 실패하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외재하는 적대적 존재가 주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의 결론은 언제나 적대적 존재를 소멸시키는
최종적 해방(final emancipation)일 수밖에 없다. 지젝은 우리는 우리들을 완전하
게 표상할 수 없는 외재하며 소외되어 있는 기표들의 체계와 동일시함으로써
만 주체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상징적 질서 안에서 동일시하는 기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고 주장한다. 상징적 질서 안에 완전히 들어올 수 없는 실재하는 어
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Zizek, 1990; Howarth, 2004). 여기서 이러한 주장의
근원이 되는 라캉에게까지 들어갈 여유는 없다. 다만 지젝의 비판에 대답으로
라클라우가 제시한 탈구 개념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담론적 구성체 안의 주체 위치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주체 위치는 실재의
침입에 의해 위협 받는 ‘결정될 수 없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협이
탈구이며 그래서 탈구는 주체위치를 정치적 주체로 전화시킨다. 정치적 주체는
능동적으로 구조를 다시 만들 수 있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탈구를 현재 존재하
고 있는 담론적 질서 속에는 표상될 수 없는 사건 또는 위기로 정의한다. 사건
과 위기는 기존의 상징적 질서를 교란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
게 된다(Laclau, 1990: 72-78). 결과적으로 적대는 외재하는 적대하는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기존 상징질서 안의 주체 위치가 탈구
를 경험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라클라우의 탈구개념을 유물론적으로 다시 구성해보자. 우리는 자본주의사
회 속에 살고 있다. 여기에는 보편적 이데올로기들이 작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법 앞에 평등하고 인권을 보장받고 있으며 자신의 선호를 민주주의적 기제를
통해 표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보편적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평등한 시민으로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편적 이데올로기와 구체적 삶 사이
의 간극을 경험한다. 자본의 논리는 착취의 논리이며 억압의 논리이다. 직장에
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지역 사회에서 불평등과 착취, 억압을 체험한다. 이것
이 일상적인 탈구의 계기들인 것이다. 탈구의 계기가 집단적일 수도 있다. 외환
위기와 같은 경제적 위기나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정치적 위기처럼 집단적으로
체험되는 탈구도 있다.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55
하지만 탈구가 곧바로 정치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탈구는 반동적
정치의 계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라클라우가 말하지 않은 것을
다시 질문해야 한다. 이렇듯 강력한 물질적 힘과 여기에 동반되는 이데올로기
적 효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라클라우가 제시할 수 있는 길
은 비어 있는 기표를 통한 국지적, 일시적 헤게모니구성(저항적 연대)일 뿐이다.
이것을 결절점(nodal point)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연대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탈구를 경험하는
무수히 많은 개인과 집단 사이의 소통은 단지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상징화하는 전략적 게임의 결과로 얻어지는 일시적인 정치적 동맹일 뿐인가?
이것으로 충분한가? 라클라우는 이러한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주지 못한다.
2) 비판적 실재론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종합
라클라우에게 탈구는 위기의 순간이자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출현할 가능성
이 열리는 계기이다. 그래서 탈구는 주체위치가 정치적 주체로 전화하는 순간
인 것이다. 하지만 라클라우는 상징질서의 위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한다. 상징질서의 위기는 구조적 모순이 담론적 질서 안으로 침입하
기 때문에 발생하고 그러한 침입은 곧 착취, 억압, 불평등, 부정의가 물질적으
로 경험되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라클라우는 그러한 ‘물질적인’ 실재를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으로 명성을 얻은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주
장을 통해 탈구의 유물론적 해석을 조금 더 밀고 나가보자.16) 바스카는 마르크
스주의를 버리지 않지만 그것을 구조적 법칙의 체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르
크스주의의 이론적 대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사회이며 모든 사회는 실험이
가능하도록 통제할 수(closed) 없다는 의미에서 개방되어 있으며(open), 따라서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다중 기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
스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론적 체계는 법칙이 아닌 경향들만을 밝혀낼 수 있을
16) 라클라우와 바스카의 친화성과 차이에 대해서는 Curry(2002)를 참고하라.
156 2016년 제13권 제1호
뿐이다(Bhaskar et al., 1991: 10-11).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마르크스주의의 구체적인 분석대상인 자본주의는
모순에 의해 붕괴하도록 운명 지어지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실천들과 정치적
개입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향을 억제하고 중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적대에 의해 서로 대립하는 계급의식
과 계급조직을 자동적으로 창출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적 체제 내에서의 투쟁은
헤게모니 투쟁(정치적 투쟁)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공산
주의 사회의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은 자
기규제적인(self-regulating) 사회에 경제(시장)를 종속시키는 ‘정치적 기획’일 수
밖에 없다(Devine, 2008). 바스카는 라클라우와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적이고 과
학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데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스카가 제기하는 또 하나의 쟁점은 가치(value)의 문제이다. 라클라우와 무
프가 강조하듯이 모든 이론적, 정치적 입장은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론적 입장이든 정치적 입장이든 가치중립적인 진공상태에 있을 수 없기 때
문이다. 나아가 모든 입장은 항상 현실에 대한 개입이기에 현실운동에 의해 간
섭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장은 실증주의-경험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마
르크스주의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던 과학주의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Bhaskar, et
al., 1991: 11). 바스카는 이 점에 대해서도 라클라우의 편에 선다.
하지만 라클라우와 바스카의 동맹은 공통의 비판대상을 공격할 때까지만 유
지된다. 바스카는 라클라우와 무프의 상대주의적 존재론까지 공유할 수는 없었
기 때문이다. 바스카가 제시하는 자동적 차원(intransitive dimension)과 타동적 차
원(transitive dimension)의 구별을 통해 이 두 입장 사이의 차이를 검토할 수 있다.
바스카는 우리의 지식과 독립적인 현실 대상이 존재하지만 인지적 개념화
없이는 현실 대상이 인식될 수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타동적/자동적 차원의 개
념을 활용한다(Bhaskar, 1997[1975]; 1998[1979]). 자동적 대상은 우리의 지식/담
론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의 차원을 지칭하며 타동적 대상은 그것에
대한 지식의 차원을 말한다.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자동적 차원은 현
실의 사건들을 생산하는 다중기제들(mutli-mechanisms)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험
적으로 드러나는 사건들, 즉 현실의 사건들 사이의 관계는 과학적 법칙으로 간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57
주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들은 다중기제들이라는 심층구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경험론 또는 실증주의의 오류는 다중 기제들의 심층구조를 과학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간의 관계를 과학적 법칙으로 정립
하려는데 있다.
비판적 실재론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과학은 다중기제들로부터 심
층적인 과학적 법칙을 밝혀내려고 시도하지만 이런 심층적 구조/기제는 인간
의 인지적 실천, 말하자면 사회적 실천으로서 과학적 실천에 의해 생산되고 변
용된 매개적 개념화 ― 과학의 타동적 차원 ― 없이는 밝혀질 수 없다. 역으로
타동적 차원 내에서 과학적 실천은 그것이 분석대상으로 하는 자동적 대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즉, 과학적 실천은 이론적 일관성, 사용된 모델의 개연성이
라는 과학적 기준을 통해 현실 대상에 관한 지식을 끊임없이 심화시키는 것으
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실천의 목적은 다중기제들의 경향
들(tendencies)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스카의 입장에 서게 되면 라클라우가 말한 헤게모니적 실천은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라는 실재에 대한 다양한 저항적 위치들로부터의 해석과 실
천, 그리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사회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바스카가 라클라
우와 갈라서는 지점은 이러한 헤게모니적 실천들이 각기 분리된 전략적 언어
게임에 멈추지 않고 서로 간의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현실(실재)에 대한 과학
적 분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과학은 단일한 기준에 의
해 한번 성립되면 불변하는 법칙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해석은 언제나 담론적이
고(타동적 차원을 가지고), 그래서 언제나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워드
가 라클라우의 이론을 “특수한 역사적 정세에 대한 주의 깊은 경험적 조사”와
타협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Howarth, 2004: 262).17)
구조(여기서는 자본주의사회)는 경향적으로 드러나는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법칙과 잉여가치 착취의 법칙, 그리고 이윤
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은 역사적 동학에 의해 드러나는 경향일 뿐이라는 것이
17) Joseph(2002)은 본 논문의 분석과 유사한 결과를 비판적 실재론에 근거한 헤게모
니론 해석으로부터 도출하고 있다.
158 2016년 제13권 제1호
다. 그리고 그것이 경향일 수밖에 없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인식과 (언
제나 움직이며 고정될 수 없는) 실재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
이다.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제한적이고 그래서 상대적이다. 그 이상을 추구하
는 것은 “일반성에 대한 갈망” 또는 “‘실제’에 대한 특권적 통찰”에 집착하는
것이다(Pleasants, 2002). 하지만 이렇게 제한적인 인식은 언제나 자본주의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적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구조의 효과 안에 갇혀
있다. 그래서 문제는 모순적인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효과가 이데
올로기를 매개로 사람들에 의해 체험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 드러나는 적대가 구조적인 모순에 닿을 수 있는 통로를 찾는 것이
다. 이미 언제나 상대주의적이지만 이미 언제나 모순 속에 구성되는 사람들의
세계인식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을 찾아내는 것 말
이다.18)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과학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
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허위의식으로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반자본주의적 투
쟁을 곧바로 도출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 곧바로
대중적인 집합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은 과학적
법칙의 설명이나 미리 주어진 혁명적 주체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라클라우의 출발점이 바로 이러한 과학주의와 역사주의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였다는 것은 이미 논의된 바대로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도
역시 라클라우와 함께하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과학주의로 ‘정화된’ 마르크스
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에는 함께 동참할 수 있으나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만나는 ‘불순한(impure)’ 실재를 이데올로기로 ‘정화’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
기 때문이다.
18) 자본주의의 구조적 조건에 대해서만 주목했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비동시대적인
요소들’이 과잉 결정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본주의적인 것’은 처
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필요개념을 적극 제시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역사적인 발전과 문화적인 다양성의 토대 위에,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지
만 유물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다양한 불만과 적대, 실천을 논의할 수 있는 이
론적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영표(2012)를 참고하라.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59
필자는 이미 몇 개의 논문에서 이러한 불순함(impurity)이 유물론적으로 해석
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로 필요(needs) 개념을 제시했다(서영표, 2009b; 2012;
2014a).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은 추상적인 법칙으로 파악될 수 없고 ‘충족되
지 않는 필요들’을 매개로 다양한 사회집단들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9) 독점적 시장과 억압적 국가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필요’는 노동자,
여성, 이주자, 장애인 등의 관점(standpoint)에서 인지된다. 따라서 ‘충족되지 않
는 필요’의 인지는, 비록 잠재적이지만, 집합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구축하고 있는 상징적 질서, 즉 착취, 억압, 불평
등을 인권, 민주주의, 정의로 중립화하는 헤게모니가 의심받는 계기들이다. ‘충
족되지 않은 필요’의 체험과 경험은 상징적 질서가 교란되는 탈구의 계기인
것이다. 이제 탈구 개념은 ‘충족되지 않는 필요’라는 실재에 대한 유물론적 경
험이 상징적 질서와 엇나가는 순간으로 사고될 수 있다. 결정론으로부터 거리
를 두면서 동시에 담론적 상대주의로 경도되지 않을 수 있는 라클라우에 대한
유물론적 재해석의 근거가 확보된 것이다.20)
지배적인 상징적 질서와 ‘충족되지 않은 필요’에 대한 유물론적 경험 사이의
간극은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헤게모니적 실천을 넘어 독점적 시장과 억압적
국가라는 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나가게 한다. 그리고 그 도전은 다양한 입장에
서 경험되는 탈구들이 고립된 잠깐 동안의 엇나감에 머물지 않고 저항적 연대
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국가와 시장에 대한 저항적 연대는
라클라우가 ‘말해야 했지만’ 자신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체계 안에서는 ‘말
할 수 없었던’,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실재하는 모순에 기초한 대항헤게모니
19) ‘추상적 법칙’은 구체적 실재에 대한 설명의 시도로 언제나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잠정적인 성격의 법칙이 ‘불변하는’ 진리로 뒤바뀌는 것은 법칙을 찾아내려는 이
론적 실천이 구체적 현실을 체험하고 인지하는 사람들의 의식세계와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충족되지 않는 필요’는 이 두 차원을 매개할 수 있다.
20) ‘충족되지 않는 필요’는 담론적 상대주의로 경도되는 것을 교정할 수는 있지만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일 수 없다. 그런 최종적인 답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담론
적 실천이 상대주의로 흐르지 않고 잠정적이나마 서로 다른 인식들이 소통을 통
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뿐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서영
표(2009a: 11장)와 서영표(201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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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 것이다.21)
5. 맺음말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보편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계급들의 이익을 보편
적인 것으로 의미화(signifying)한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이라는 보편적 이데올
로기는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와 경쟁적 자본주의 논리를 정당
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징적
질서를 구축한다. 그러나 상징적 질서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틈새와 균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표상하는 민주주
의, 자유, 평등은 실재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와 실재 사이
의 항상적인 균열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균열과 간극이 자각되
는 계기들이 탈구의 순간들이다.
탈구의 체험은 개인적 수준을 뛰어넘어 문화적으로 주어진 당연함을 극복하
거나 다시 그 당연함으로 되돌아가는 갈림길에 직면한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탈구를 발생시키는 원인은 자본주의적 구조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
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구조분석과 연결되고 이 구조분석은 자본주의적 경
제 질서와 그것의 관리양식인 정치제도,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적 구성체를 분석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가지는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의 거리는 이론적 독단의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은 사
회조건에 관한 일상적인 인식들과 무관하게 생산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과학적
지식은 그것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지식(문화적, 실존적 지식의 수준)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구체적 경험에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다(Benton, 1977:
189). 라클라우의 용어를 변형하여 사용하자면 상징적 질서 안의 주체 위치가
가지는 불안전성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주체위치는 문화적으로 전
21) 필요개념과 정치전략의 문제는 서영표(2009a)의 11장을 참고하라.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61
승되어 온, 하지만 모순적인 실천적 지식 또는 감정 상태를 담고 있다. 비록
보편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눌려 있지만 말이다. 즉, 이러한 실천적 지식 또는
감정 상태가 없는 상태에서 탈구적 사건 또는 위기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발전하기 어렵다. 우리는 여기에 라클라우가 제시한 비어 있는 기표를 매개로
한 헤게모니적 실천, 즉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는 실천을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헤게모니적 실천은 단순한 언어게임이어서는 안 된다. 실천적 지식과 감정 상
태가 탈구적 사건과 만나서 형성된 저항적 주체들 사이에 소통의 다리를 놓고
그것을 정치적 연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불가능한 것
으로 표상하는 사회주의적 전망이 지금-여기에 (비록 잠재적이지만) 물질적 힘으
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라클라우의 말처럼 보편적인 것의 구성으로서의 과학적 지식은 닫힌 지식체
계가 아니다. 언제나 실천에 의해 개정 가능한 것이다. 과학적 문제설정들이
다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과학적 문제설정의 설명력이 명백한 진
리로서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적 문제설정은 실천적/이론적 이데올로기를
경유하여 현실과 연결된다. 이러한 상호연관을 통해 과학적 문제설정 그 자체
도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과학 그 자체가 사회구조에 속해 있으며 사회
의 모순 및 실천적/이론적 문제설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과학적 지식은 언제
나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품고 있는, 그래서 다양한 운동을 발생시키는
구조에 대한 분석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의 갈등과 모순은 문화적 지평 안의
실존적 계기를 통해서만 인식된다. 즉, 실존적-문화적 지식을 경유하지 않는
과학적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비판에서는
라클라우와 무프의 편에 서지만 새로운 비판이론의 구성에서는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5년 12월 9일 투고, 2016년 1월 12일 심사, 1월 23일 게재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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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65
❒ Abstract
What Laclau Said and What Laclau Was Unable to Say
: A Materialistic Reinterpretation of Post-Marxism
YOUNG PYO SEO
A lot of Marxists have attacked Ernesto Laclau and his colleague Chantal
Mouffe for their Post-Marxist position rejecting production and class as key
concepts for Marxism. on the other hand, their argument has been welcomed as
a theoretical breakthrough through which anti-capitalist movements could be
combined with diverse social movements by overcoming economic
determinism and class reductionism. The goal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possibility of a new theoretical paradigm that, while employing Lacalu and
Mouffe’s post-Marxism for examining ideological struggles and the
constitution of diverse political subjects, could distance itself from the
weakness of discourse reductionism. The key argument of this paper is that the
latter’s bias of relativism might be modified using Louis Althusser’s idea of
over-determination, and then synthesizing it with Roy Bhaskar’s critical
realism. Laclau’s notion of dislocation, the moment of crisis of the existing
symbolic order, could be thought of as a moment when the realist
lived-experiences of ‘unmet needs’ take place. Through this reinterpretation,
post-Marxism’s ideas could be mobilized to demonstrate a counter-hegemonic
project beyond partial hegemonic practices.
Keywords: post-Marxism, Ernesto Laclau, Louis Althusser, critical realism,
Roy Bhaskar, dislo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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