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교함으로써 두 사상의 편차와 근접성을 살펴보았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각각 세속적인 지知(지혜)와 이성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세속적인 지(지혜)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노자의 입장은
이성이 도구화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욕欲(욕망)이 결부된 지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경우 무욕無慾을 주장하는 데 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욕망의 부활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편차를 보이고 있다.
노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욕망의 부활보다는
그것을 초월한 무욕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는 결국 진리에 대한 인식문제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노자는 인간이 현실의 세속적인 지로서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도 진리가 가지는 절대성의 측면을 비판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진리란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거부한다.
한편 노자는 절대적 진리인 도道의 존재를 확신한다.
그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절대적 진리인 도마저 부정의 대상이 된다.
도가 절대적 진리로서 존재한다는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볼 때 역시 또 다른 한계를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도는 분별적이고 세속적인 지로서는 인식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분별과 차별성을 극복한 진리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그것은 무위無爲와 직관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단지 가능한 것은 이해의 지평을 통한 인식의 방법이 존재할 뿐이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에 대한 논의는 일차적으로 유사성과 그 편차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비록 그것이 개념에 대한 다양성에서 오는 한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서로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상이한 사고와 세계에 대한 오해와 견고한 틀을
조금씩 해결하고 허물어 가는 작업일 것이다.
226 동양사회사상
1. 시작하면서: 문제 제기
계몽주의의 출현으로 나타난 이성 중심적 사고는 인간들의 삶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神에 의해 소외되었던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현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
다. 현대성은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과 중심적 자연관의 붕괴로 인한 보편적 자연관 그리고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서 특징 지워진다. 현대성의 이러한 특징은 결국 이성의 능
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성이 자연을 지배하고 진보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대성은 현대 사회의 소외, 착취, 물상화 등의 문제점을 출현시
키게 되었다. 이성에 대한 믿음이 인간들의 삶을 오히려 피폐화시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대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하게 된
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성의 근간이 된 이성을 비판, 해체시킴으로써
현대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성의 문제가
현대의 동서양 모두에서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과 서양에서 배태되
었다는 점에서 현대성에 대한 비판은 서양적 시각에서뿐만 아니라 동양적
시각에서도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동양과 서양은 고대에 있어서 두드러진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노자老子와
헤라클레이토스가 거의 같은 시대에, 공자孔子와 피타고라스가 거의 동시
대적으로 존재하였다. 동양에서는 도道가 주요 개념이었는 데 비해 서양에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27
서는 물과 불, 수 등 다양한 개념이 존재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
나 사회적 삶의 차이로 각각의 환경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동양에
서는 절대 왕권에 의해 사상가들이 토론을 통한 사상의 형성보다 구체적
인 역사적 사실(현실의 윤리에 대한 관심)의 제시에 주력했는 데 비해 서양
의 경우 민주적 절차의 성립으로 인해 논리적 방법이 출현하게 되었다(양
재혁, 1987: 166∼168).
이와 같이 정신적, 물질적 환경에서 많은 편차가 존재하게 되면서, 그러
한 환경적 편차는 사회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도출해 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의 사상으로 동양의 노자 사상과 서양의 포
스트모더니즘을 비교해 볼 것이다. 많은 서양의 석학들이 피상적이든 아니
면 깊이가 있는 통찰이든 간에 동양 사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보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과연 동양의 사상과 서양의 사상이 서로 어떻
게 차이가 나며, 어떻게 서로에 대한 대안적 가능성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를 살펴보기로 한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비교는 시간적․공간적 차이를 가지고 있
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의
지혜에 대한 논의, 인간의 능력(이성)에 대한 논의 그리고 진리에 대한 논
의는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해 왔다. 이 글은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
교함으로써 그들간의 편차와 근접성을 연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 먼저 노자의
핵심 사상인 무위無爲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에 대한 비판을 살펴볼 것
이다. 노자의 무위는 인간의 작위作爲 즉 인위人爲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 비판과 연결된다. 이러한 논의를 배경으로 이성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살펴볼 것이다. 노자는 인간의 지혜
가 물질적 추구에 이용될 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있어서도 이성의 도구화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비교가 가능할
228 동양사회사상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지知에 대한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을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지가 상대적 성격을 가짐으로써 사물을 분별하고
구분한다는 점에서 비판한 노자의 입장과 이성에 의한 지식의 절대성을
비판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 비판
1. 이성 비판
먼저 무위無爲에 관한 노자의 논의에서 이성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판하는 이성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노자
는 인간의 한계를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老子, 제13장).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게 된
다. 그리고 자연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
즉 욕망의 실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노자의 무위에 대한 언명은 인위人爲
에 의한 욕망의 추구라는 서구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1)
그리고 이러한 인위는 결국 이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성
은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그 대상을 이용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적인 능력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이른바 문명의 발달
이 인간에게 행복이라는 점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노자는 문명, 문화의
1) 老子는 欲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도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재화의 추구로 보
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인간의 의도성은 欲으로, 물질에 대한 추구는 욕망으로 사용
하기로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론 1절에서 논의할 것이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29
발달이 오히려 인간의 퇴폐와 생명의 쇠약이라는 현상을 낳게 한다는 것
이다(권오현, 1991: 44).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모더니즘은, 첫째 이성에 대한 믿음, 둘째 자연은 일반적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을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이용할 수 있다는 의식 즉 자연에
대한 이용 가능성, 셋째 이성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정리될 수 있다(윤평중, 1992: 13∼20). 즉 모더니즘은 객관적 과학, 보편적
도덕과 법 그리고 자율적인 예술의 발전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자연에 대한 지배뿐만 아니라 세계, 자아, 도덕적 진보, 제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이해까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마단 사
럽, 1992: 149). 이러한 모더니즘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서구에서 이성과 합리성(데카르트의 합리론의 영
향)의 근원이었던 계몽주의와 그에 따른 영향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 진리, 주체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권력, 욕망, 정치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기도 하다(김성기, 1992: 11∼
12).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인간의 이성에 의한 행복 추구와 욕망
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노자에 있어서 무위는 인위의 개념과 대비된다. 먼저 인위는 자연스러
운 행위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게되면서 모든
자연현상을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 대하게 된다. 둘째 인위는 지적
인 관계를 의미한다. 즉 사물을 도구로 보는 것은 지적인 기능이 전제되어
야 한다. 사물을 도구로 본다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박이문, 1989: 91∼92).
노자는 도道란 무위로써 이루어지는데, 욕심이 생기게 되면, 즉 사물의
이치가 극치에 도달하면 폐단이 생기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감산대사, 1993:
230 동양사회사상
130). 구체적으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타난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지만 이는 추함이며, 모두
가 선함을 선함으로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
생기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만들고, 길고 잛음은 서로 형성되고, 높고 낮음
은 서로 기울고, 음과 성은 서로 화합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르게 된다.
天下 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
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老子, 제2장).
노자는 인간의 인식이 완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즉 아름다움과
미움, 좋음과 나쁨 등의 구분은 결국 인간의 인식이 완전할 수 없음을 지적
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인간의 이성에 의한 인식의 한계를 언급하고 있
다. 데리다는 ‘현전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신 앞에 놓여진 대
상이나 실재를 참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면서 인식론적 토대
주의를 비판한다(윤평중, 1992: 56∼58). 즉 인간의 이성으로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가다머의 경우는 인간으로 하여금 해석을 가능
하게 하는 것은 ‘전이해’의 구조 때문이며, 대상에 대해 순수하게 접근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은 결국은 완벽하게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전이해’의 지평을 통해서 실재를 인식하게 된다(윤
평중, 1992: 59). 이는 인간의 인식 능력 즉 이성의 능력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한계를 가진 이성에 의해 나타난 지혜는 역시 한계를 가지게
된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지혜가 나오고 나서 큰 거짓이 생기고,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여 효도와 자애가
생기고, 나라가 혼란해져서야 충신이 나온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31
智慧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老子, 제18장).
노자는 인간의 지혜가 나타남으로 해서 무위가 없어지고 가정과 국가가
혼란에 빠진다고 주장하고 있다.2)
인위적으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인위적으로 잡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된다.
爲者 敗之 執者 失之( 老子, 제29장).
또한 노자는 유심有心의 인위 즉 욕망에 의한다면 곧 천하를 잃게 된다
고 주장한다. 도道는 근본이며 그것의 현실적 작용이 덕德인데 덕은 무심
無心한 무위의 작용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 세상은 결국 무
위로써 이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없는 가르침과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유익함, 천하에는 이에 미칠 만한
것이 없다.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老子, 제43장).
말이 있으면 유위가 있고 교묘한 지혜를 믿게 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
하게 된다. 이러한 유위는 무익하다(감산대사, 1993: 152). 즉 자신의 능력이
란 결국 인간의 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학문을 하면 날마다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줄어드니, 줄이고 또 줄이면
이로써 무위에 이르니, 무위로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無爲 無爲而無不爲( 老子, 제48장).
2) 老子에게 있어서 知는 明知와 智(상대적 知)로 나뉜다. 明知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진리
라면 智는 지혜 즉 세속의 知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론의 2절 부분에
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32 동양사회사상
무위의 덕은 학문을 더는 것이다. 인간이 학문을 하게 되면 경험적 지식
을 중시하게 되고 이는 곧 인식의 주관과 인식의 객관적 대상을 분리하게
된다(감산대사, 1993: 162).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학문 즉 지식은 자연과 인간
의 대립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천하에 금하는 것이 많으면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에게 편리한 기
구가 많으면 나라는 더욱 어려워지고, 사람들의 재주가 많아지면 기이한 물건
이 나오고, 법령이 점점 밝아질수록 도둑이 많이 나온다.
天下 多忌諱 而民彌貧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技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
有( 老子, 제57장).
천하가 불안한 것은 유위로서의 유사有事에 의해 많은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이기와 제도에 대해 비판이다. 인간의 욕망의 실현
을 위해 각종의 문명의 이기와 제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푸코의 경우 이성에 대한 신뢰로 포장되는 계몽 사상은 다른 담론 체계
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억압하는 하나의 특수한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모더니즘의 도입으로 인해 이성과 비이성이 구분되었고 이성
이 정상적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코가 보기에 이
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바로 권력에 의한 지식의 형성을 은폐하는
것이다(윤평중, 1993: 151).
노자는 인간의 자연과 사회, 정치에 대한 욕망으로 인간이 황폐화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의 욕망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성의 논리에 의해 자연은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
다. 이러한 논쟁의 조짐은 니체에게서도 보인다. 객관적 진리, 이성적 삶,
보편적 도덕률, 종교적 가치, 합리적 주체개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포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33
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니체는 아폴로적 차원과 디오니소스
적 차원을 논하며 현대의 철학을 이성과 감성의 이원적 대립으로 보면서,
이성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곧 이성 중심주의라고 설명하고 있
다. 그는 또한 이성과 욕망간의 관계를 설명하여, 인간의 인식적 관계에는
이미 평가적 관계가 개입하고, 지적 기능을 발휘하기에 앞서 욕망적 기능
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성 중심의 현대성이 인간을 왜곡하
고 있다는 것이다(전경갑, 1993: 335∼339).
이상 노자의 무위에 대한 논의와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의 이성
비판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우선 노자의 도덕경 에 나타난 무위의
개념은 인위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 욕망에 의한
인간의 황폐화, 인간(인간의 이성)의 학문․지식에 의한 대상의 분리로 나
타나는데, 이러한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근접성을 갖는다. 포스트모더
니즘의 이성에 대한 비판의 내용 즉 데리다와 가다머의 인간 이성의 인식
론적 한계, 니체의 지식에 대한 욕망의 전제, 푸코의 권력에 의한 지식 산
출과 그에 따른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노자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지知3)와 인간의 욕欲(욕망)
지知의 문제는 우선 합리성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야 될 것이다. 신비
주의를 벗어나 합리화의 방향으로 인간사가 전개된다는 베버의 합리화에
서 주목해야 될 것은 목적 합리성의 문제이다. 베버는 인간의 이성이 합리
화의 과정에서 도구가 되어버리는 목적 합리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목적 합리성은 이성의 도구화를 출현케 한다. 인간의 이성이 인간에게서
소외되어 도구화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욕망의 추구라는 점에서
3) 여기서 知란 세속적인 知를 의미한다. 지혜 역시 분별과 세속적인 知라는 점에서 불완전
한 知로 본다.
234 동양사회사상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히 추구될 때 인간의 이성은
도구로서 봉사하게 된다. 이러한 도구로서의 이성은 현실적 지知 즉 지혜
(智)로서 현현되어 인간을 오히려 속박하게 된다. 합리화 과정에서의 지혜
는 곧 욕망과 연관된다.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이성은 현실적 매개체로
세속적 지혜를 낳고 그러한 지혜는 다시 인간의 욕망을 증대시키게 되는
것이다. 지혜와 욕망과의 관계를 풍우란馮友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욕欲을 적게 하기 위하여 노자는 또한 지식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첫째 지식
그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라는 것, 둘째 지식은 우리에게 욕망의 대상을 많이
알리고 따라서 ‘족함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 셋째 지식은 우리들이 욕망의
대상을 획득하려고 하는 노력을 ‘그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풍
우란, 1975: 297).
노자는 이러한 지혜에 의한 욕망 추구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번 장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합리성이라는 이름 아래 온갖 지혜를 만들
지만 결국은 그러한 지혜가 인간을 황폐화시키게 된다는 노자의 언명들을
살펴보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
고자 한다.
1. 지혜에 대한 노자의 비판
노자에 있어서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가
지고 있는 욕망은 결국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서 그것
은 지혜를 낳게 한다. 그러나 지혜는 인간을 세속에 묶어 둠으로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먼저 노자에 있어서 욕欲과 욕망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노자 에는 욕欲이라는 단어가 13개의 장에서 나타난다. 1장에서의 욕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35
欲(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邀: 王弼의 注, 혹은 常無 欲以觀其妙 上有 欲
以觀其邀: 감산대사)은 ‘탐내다, 욕심’(慾)의 뜻이 아니라 ‘하고자 하다, 바
라다’(欲)의 의미이다. 15장, 20장, 34장, 36장, 61장, 66장, 77장에서도 같
은 의미이다.
현실적 욕망은 욕欲이 재화나 정치적 욕망과 관련될 때 나타난다. 3장의
“위정자가 탐욕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不
見可欲 使民心不亂)에서의 욕欲은 위정자들의 탐욕을 말한다. 37장의 “욕심
을 냄”(欲作)에서는 현실적 욕망을 의미한다. 46장에서는 욕欲이 욕득欲得
으로 ‘얻겠다는 욕심, 탐욕’(王弼의 주)을 의미한다. 57장의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속박해진다”(我無欲而民自樸)는 말이나 64장의
“성인은 욕심내지 않을 것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聖人 欲不欲 不貴難得之貨)는 말에서도 역시 현실적 욕망을 의미한
다.
이와 관련하여 노자는 현실의 재물의 추구 즉 물질적 욕망에 대해서는
욕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지만 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9장의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이것을 지킬 수 없고 부귀로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
을 남긴다”(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는 말에서는 현실에서의
욕망을 비판하고 있으며, 13장(부귀영화), 19장(利), 22장(得), 44장(명예와
재물에 대한 추구), 53장(위정자들의 욕망)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12
장의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오미
는 사람의 입맛을 잃게 하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면 사람의 마음에 광기
가 도지게 하며, 얻기 어려운 귀한 재물은 사람의 행동을 방해한다”(五色
令人目盲 五音 令人耳聲 五味 令人口爽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
妨)는 말에서는 인간의 오관을 통한 욕망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욕欲에 대한 논의에서 노자는 의식의 지향성인 욕欲과 현실적
이익의 추구인 욕망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노자의 지혜에 대
236 동양사회사상
한 비판을 살펴보기로 한다.
항상 백성들이 의식적으로 아는 것 없고 욕심도 없게 해야 하며, 설사 그 가운
데 교활한 지혜를 지닌 자들이 있다 해도 감히 공리를 약탈하려는 허망한 마음
을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常使民 無知無欲 使夫知者 不敢爲也( 老子, 제3장).
여기서 보면 노자는 교활한 지혜를 가진 자들은 결국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 한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논의는 서구의
세속적인 자연 파괴로 나타난다. 노자의 언명은 서양의 욕망에 대한 사고
방식의 비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서양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밖으
로 분출함으로써 그것을 추구해 나간다. 즉 과학이나 물질적 발달을 추구
하는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조화된 자연을 상정하면서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행복으로 알았던 것이다(장기근, 1990: 41).
헤아림으로써 지혜와 사려를 날카롭게 하면 길이 보존하지 못한다.
端而銳之 不可長保( 老子, 제9장).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계속될 수 없으며 결국은 단기적인 인간의 욕망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인의 교묘한 지혜를 끊어 버려야만 백성이 이익을 백 배나 누리고, 인의를
끊어 버려야만 백성들이 효도와 자애로 회복하며, 교묘한 지혜를 끊어 버려야
만 도적이 없으리라.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老子, 제19장).
교묘한 지혜란 본래 천하를 편안하게 하려 함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교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37
묘한 지혜를 표절하여 도적질의 밑천으로 삼고 있다. 세속의 진실한 지혜
가 없는 사람은 교묘한 지혜와 인의의 일을 배우고 나서는 자기의 목적을
실천하려 한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노심초사하면서 공리에 급급하여 교묘
한 지혜의 사이에서 진력한다. 일반 사람들은 교묘한 지혜로 많은 방법을
구사하여 만족함 없이 탐욕을 부린다(감산대사, 1993: 83∼87).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이라야만 총명하다.
知人者 智 自知者 明( 老子, 제33장).
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을 엿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
나가서 더 멀어질수록 그 앎이 작아진다.
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老子, 제47장).
일반 사람들의 경우는 이익의 욕심에 깊이 빠져 마음이 외부로 치달으
면서 이익 때문에 지혜가 어두워지게 한다. 그 때문에 본성과의 간격이
멀리 떨어질수록 망상의 티끌이 날로 두터워지며, 망상의 티끌이 두터울
수록 마음은 더욱 어두워진다. 그 때문에 본성에서 더욱 멀리 떨어질수록
그 앎은 더욱 적어지는 것이다(감산대사, 1993: 160).
무위로서 행하고 무사로서 일하고 무미로서 맛보고 큰 것은 작은 것에서 비롯
하고 많은 것은 적음에서 비롯되고 원망을 덕으로 보은하며 어려움은 쉬움에
서 도모되고 큰일은 작은 것에서 행해진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老子, 제
63장).
일반적으로 유위는 교묘한 지혜를 말하며, 유사有事란 공로 사업을 말하
고 유미有味는 공명과 이익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이 세 가지는 세상 사람
238 동양사회사상
들이 가장 숭상하는 바이다(감산대사, 1993: 199).
노자는 자연의 상태를 가장 최고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은
결함이 존재하며 이러한 결함은 작위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작위의 원인
은 소지小知(필자주: 智와 같은 의미이다)에 있고 그러한 원인은 바로 사욕私
欲에 있다고 본다(오오하마 아끼라, 1993: 268). 이러한 논의는 푸코에게서도
발견된다. 푸코에 있어서 진과 위(필자주: 참과 거짓으로 번역되기도 함)를
구분하는 지식의 배경에는 권력과 욕구가 존재한다(이정우, 1993: 21).
2.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 비판
노자에게 욕망이 중요한 문제이듯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욕망에 관
한 논의들은 현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절에서는 욕망의
문제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서 그들의 논의가 노자와는 어떤 편차를 가지는지를 밝혀볼 것이다.4)
욕망의 문제를 강조하게 된 것은 감성보다 이성을 강조해 온 이론(필자
주: 모더니즘)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욕망
과 결부된 육체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 및 탈마르크
스주의자들의 논의, 그리고 니체의 논의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욕망의 문
제가 부각된 것은 1920년대, 193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도구적 이
성 비판을 통한 욕망과 육체의 중요성 강조와 프랑스의 바타이유에 의한
논의가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면 헤겔, 마르크스, 바타이유, 라이히, 들뢰
즈와 가타리의 욕망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자.
먼저 헤겔의 욕망 또는 욕구5)에 관한 코제브의 논의를 정리해 보기로
4) 욕망에 관한 논의는 강내희, 「‘욕망’이란 문제설정?」, 11∼48쪽을 정리한 것이다.
5) 강내희는 “헤겔이 욕망과 욕구를 구분한다고 본다. 물론 정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
고 전제하면서 욕망과 욕구는 서로 공존하지 않으며 양자는 다르다고 본다. 즉 욕구라는
것은 욕망이 절제, 통제, 소멸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혹은 욕망의 통제 이후에도 배려해
야 되는 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였다.(강내희, 1993; 23의 주)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39
한다. 헤겔은 욕망이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며 인간은 자의식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욕망에 있어서 내가 대상을 욕망 또는 소유
한다는 것은 나와 동등한 다른 욕망의 소유자로부터 인정받을 때 비로소
충족된다는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이러한 욕망은 인간 생성․역사 형
성의 원리이며 욕망에 의해 역사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헤겔의 역사 의식
에서 볼 때 욕망은, 근대 국가와 시민 사회의 형성이 역사의 완결이라는
점에서 볼 때 욕망 대신 욕구가 사회적 원리로 작용하여 욕망은 국가에
의해서 조절되고 통제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의 근저에는 욕망은 나의
욕망이며, 나는 분열되지 않는 통일적 존재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알튀세의 논의는 이와 다르다. 알튀세는 욕망
이라는 개념보다 욕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알튀세는 마르크스가 인간의
본성 일반에서 욕구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효과 즉 욕구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조건으로 보아, 결국 생산 양식의 결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
다. 욕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것으로 보았다.
바타이유의 경우는 동질적 사회(부르조아 사회)에서는 이질적인 것은 허
용되지 않으며 이질적인 모든 것은 억압당한다고 보았다(Bataille, "The
Psychological Structure of Fascism", In Visons of Excess, p140). 바타이유에게 있어
서 욕망은 표출 또는 분출하고자 하는 금지의 선을 넘으려는, 위반하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알튀세가 말하는 정세적 효과(필자주: 사회적
조건)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힘으로 보았다.
한편 라이히는 욕망을 분출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개인
과 사회의 문제는 욕망의 억압으로 인해 생긴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욕망은 하나의 진리로 인식되며 그것을 억압하게 되면 권위주의적 사회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의 논의에
의하면 욕망은 전통적으로 어떤 대상을 상실한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서
240 동양사회사상
욕망은 존재의 결여로 인식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생산을 현실이 아니라 환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 것에 대해 비판
하면서 욕망의 생산성을 실제로 파악한다. 이들은 또한 라캉이 주장한 언
어에 의한 경험으로서의 욕망의 논의를 부정하면서 욕망은 언어 이전의
원초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탈현대주의자 또는 탈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욕망에 관한 논의들은 현대성에서 배제되었던 감성, 그 중에서도 핵심이
라고 할 수 있는 욕망의 중요성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이성이 최고의 가치
이며 그로 인한 이성의 도구화는 이성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욕망의 부활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서 욕망은 주체에 대한 부정에서 나타난
다. 경험론과 합리론이 비록 인식의 원천에 대한 논의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인식의 주체에 대한 믿음은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 라캉의
경우 주체는 존재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과 언어를 통해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과 언어 간의 관계를 밝히면서 인
간의 욕망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욕망의 발생, 언어와 욕망의 관계를 설명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상상적 질서와 상징적 질서 사이에서 타자가
곧 나의 욕망을 일으키고 나의 욕망에 일정한 내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노자에 있어서 욕망의 논의는 무위에 반대되는 작위의 부분으로 보는
데 반해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 있어서는 부활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3. 진리에 대한 입장
1. 진리로서의 도
노자에게 있어서 도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도는 다양한 의미로 표
현되고 있는데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도는 언어로써 표현될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41
수 없는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상주불변하는 도가 아니며, 이름을 말하면 상주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老子, 제1장).
이름할 수 없는 것(道를 말함)이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할 수 있는 것(天地)이
만물의 어머니이다. 고로 항상 무욕으로 그 묘함을 보고 유욕으로 그 주변을
보니 이 양자는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이며 나오면서 이름이 달라지니 현묘하다
하겠다.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 無欲 以觀其妙 常 有欲 而觀其激 比兩者
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老子, 제1장).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니 희希라 하고 손으로
취하여도 얻지 못하니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밝힐 수 없으니 혼용되어
하나이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比三者 不可致詰 故 混而
爲一( 老子, 제14장).
도는 비어 있지만 그 쓰임새는 아무리 오래 써도 가득 차지 않는다.
道沖 而用之有或不盈( 老子, 제4장).
이상에서 보면 도는 인간의 언어,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다.
도라는 의미를 정리해 보면 먼저 우주, 천지, 만물의 실체, 둘째 모든
창조, 변화, 발전의 원동력, 셋째 만물 운행 질서의 원리, 넷째 인간 행위의
근원적 준칙으로 표현된다(장기근, 1990: 33). 결국 도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
으로 지각할 수 없으며, 사물의 색체나 형태에 제약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
242 동양사회사상
만 사물 속에 내재하며, 분별 이전에 존재하며, 이것을 알면 고금을 통괄하
게 되는 것으로서, 모든 대립이 하나로 융합되어 갈등이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김항배, 1982: 33). 따라서 노자에 있어서 도는 상주불변하
면서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는 진리로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도는 인간의 세속적인 지혜6)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즉 세속적인 지혜는 사물을 분별하고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진리(道)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자의 지知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이라야 밝다.
知人者 智 自知者 明( 老子, 제33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知者 不言 言者 不知( 老子, 제56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요 알지 못하면서 아는 것이 병이다.
知不知 上 不知知 病( 老子, 제71장).
학문을 하면 날로 (지식이) 늘어나고 도를 하면 날로 줄어든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老子, 제48장).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知者 不博 博者 不知( 老子, 제81장)
이상의 노자의 언명에서 볼 때 도라는 주관적 지知는 언어, 학문, 현실적
6) 대개의 학자들은 세속적인 知라는 것을 儒家의 지혜라고 말한다. 장기근, 오오하마 아끼
라, 박희준 등의 책에서 언급된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43
인 박식함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33장의 명明은 지知의 궁극인 절대
적 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자는 상대적 지를 절대적 지라고 생각하고
상대적인 지를 극복하지 않는 입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오오하마 아끼
라, 1993: 114∼116).
노자에게 있어서는 다음 절에서 언급될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달리 진
리로서의 도가 존재한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즉 어떻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가이다. 도는 우선 언어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상주불변하는 도가 아니며 이름을 말하면 상주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老子, 제1장).
노자는 여기에서 언어나 개념에 유한성이 필연적임을 지적하고 있다(정
연구, 1991: 131). 따라서 언어로서는 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서 노자는 무위無
爲와 그에 따른 직관을 말하고 있다. 먼저 무위란 수수방관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으로 인해 인지 능력이 흐려진 주관적 편견을 가하
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
에 무위를 실천하면 본래의 무차별․비구별의 상태가 된다. 결국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불위不爲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무위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더라도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다.
존재의 진리는 의식 지향에 의한 존재의 대상적 정립과 사물 현상에
대한 관념적 고정화의 자세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대상 사물을 분별하는
우리의 지적 욕망, 지적 요구를 초월하여 관념 이전의, 언어로 표현되기
244 동양사회사상
이전의 존재를 알고, 관념적 규정이나 언어적 표현 없이 존재와 직접 접촉
할 때 존재 진리를 밝혀서 드러낼 수가 있다(이발상, 1985: 38).
한편 직관이란 우리의 의식이 그 대상과 직접 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직관은 추리적 앎과 대립된다. 직관적 앎은 의식과 그 의식의 인식
대상과의 사이에 아무런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앎
이다. 결국 직관주의 인식론이 언어를 비판하고, 반문화적이며, 반지성주
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언어는 의식과 그것의 대상을
매개하는 거울로 나타나고, 이처럼 언어를 인식의 매개로 한다는 것은 대
상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을 어떤 질서를 마련하는 개념 속에 정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처럼 개념의 틀에 넣는다는 것은 개념 규정에 의해
제외되어 버린 나머지 부분이 도외시된다는 문제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2. 서구에 있어서 진리
서구에 있어서 진리의 문제는 서구의 사상사를 살펴봄으로서 가능할 것
이다. 사상사라는 다소 철학적인 논의들은 인간 세계 즉 사회를 어떻게
보는냐로 규정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물음들은 결국 인간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물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절에서는 서구에서
전개되었던 진리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진리의 문제는 고대인들에게서부터 탐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고대 그
리스인들에게는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되었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추구 역시 자연에 대한 논의들로 전개되었다.7) 이러한 진리에 대한
7) 고전 사상가들은 일원론자와 다원론자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일원론자들은 일원론적
유물론자(탈레스, 아낙스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와 관념론자인 피타고라스로 나뉘는데
이들은 세계가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면서 또한 불변하고 불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생성(Werden)과 불멸(Sein)의 측면 모두를 세계의 원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측면이 대립됨에 따라서 다원론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다원론자들은 엠페도클레스(물,
氣, 불, 땅), 아낙사고라스(씨앗의 운동 원리), 레우킵포소․데모크리토스(원자를 주장)
등으로 생성과 불멸의 대립적 측면을 자연의 다양한 원소들로 결합시키고자 했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45
추구는 소피스트들에 의해 인간 중심으로 전환되어 간다.8) 인간 중심의
진리에 대한 추구는 결국 이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는 것으로 현대성에
기반이 되고 있다. 로마 시대에 들어서면 이전의 공동체 생활(Polis)이 개인
적 생활로 변화해 가는 사회적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 변화
에 따른 사상의 변화도 나타나게 된다. 스토아(Stoa) 학파의 경우는 신이
진리인 것으로 나타나고, 에피쿠로스(Epikuros) 학파의 경우는 감각만이 진
리의 기준이 된다고 보았다.9)
중세에 들어와서는 신에 대한 복종과 지식만이 절대적 진리로 인식되었
다.10) 그런데 스콜라(Scola) 학파와 오캄(Occom), 에크하르트(Eckhart) 등의
논의에서 보듯이 중세에서도 이미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인간의 감각
적 인식의 중요성, 직관에 대한 논의들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진리
에 대한 논의들은 근대에 이르러 한층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8) 즉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 아래 인간 중심의 사상이 전개되었
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無知의 知’라는 언명으로 자신을 아는 것을 최고의 德으로 보았
다. 플라톤에 와서는 이성의 德을 지혜로 보면서 사유 능력을 완전히 사용하는 것이 최
고의 德이라 하는 이성 중심적 사상을 가지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성적
생활에 의한 완전한 실천이 최고의 善인 행복이라고 보았다.
9) Stoa 학파의 경우 인간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이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神的 이성
의 理法에 순종하라고 하여, 감정과 욕망을 제한한 제한된 자유를 주장한다. 한편 Epikuros 학파의 경우는 감각만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고 보면서 神이나 미신, 신화를 거
부한다.
10) 敎父 철학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神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서 모든 진리는 神
의 언명에 의한다고 본다. 한편 Scola 학파에 있어서는 神은 가장 완전한 존재이며 神의
관념은 인간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도 역시 참되다. 그런데 Tomsa
Aquinas에 와서는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면서 이성이 자연 세계의 질서를 파악할 수 있
지만, 초자연적 세계는 신앙에 의해, 즉 이성의 합리적 파악을 넘어선 일들은 신학에 의
해 논증되어야 한다고 보게 되었다. 그는 중세적, 봉건적 사회 질서를 바탕으로 그것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Scola 학파는 Occam의 주장에
의해 붕괴되었다. 그는 개체(개인)만이 참 실재이며 감성적, 경험적 인식을 배경으로 세
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성과 경험으로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
던 것이다. 한편 신비주의자였던 Meister Eckhart는 인간의 목적은 神을 인식하는 데 있
는데, 이는 이성적으로 알 수가 없고 초이성적, 신비적 직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
았다. 그는 만물에 존재하는 神性은 초자연적 존재성을 가진다고 하고 이를 Nichts(無)
라고 이름하였다.
246 동양사회사상
근대 사상은 먼저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인한 인간 중심적11) 특징의 개
인주의12) 논리의 전면적 확대,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에 의한 진리의 추
구로 변화하게 되었다. 근대 사상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마키아
벨리 사상, 귀납적인 경험 지식을 강조하는 베이컨 사상, 이성만이 본유적
직관으로서 진리의 정당한 기준이 될 뿐이라는 대륙의 합리론자 테카르트,
경험을 통해 이성적 추리와 인식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영국의 경험론
자 로크에 이르기까지, 이성에 대한 믿음과 이성이 바탕이 된 경험의 중시
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진리의 속성 즉 진리의 절대성에 대해 비
판한다. 먼저 인간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이 역사적․문화적 상황에
구속되지 않고 이성의 능력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푸코
와 데리다는 불변적 구조에 대한 논의를 주체의 해체라는 의미에서 전개
해 나간다. 두 번째로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역사의 일반적 법칙을 부정하고, 역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진리는 존재하
지 않는다고 본다. 다음으로 언어에 대한 분석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의미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들은 언어가 필연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약속에 의해 무엇을 상징한다는 본다(마단 사럽, 1992: 9∼12).
위에서 보듯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진리에 대한 비판은 이성에 대한
비판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이성의 절대적 믿음에 기인하는 인간들의 지
적 산물들은 결국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다머의
경우 모든 (세계에 대한) 이해는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대상을 중립
적 순수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존재의 역사성을 규정하
는 편견으로부터 이해를 추구한다. 모든 편견을 제거해야 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현대성의 편견을 오히려 그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윤평중,
11) 고대 그리스 사상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였고, 중세 카톨릭 신학은 인간에 대한
神의 절대적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12) 이는 종교 개혁의 영향에서 기인한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47
1993: 86∼87).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기표와 기의의 동일성 즉 기호의 자기
현존성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가진다. 그는 중심, 고정된 주관, 기원, 절대
적 기반,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원인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마단 사럽, 1992:
49).
한편 푸코는 그의 계보학에서 참된 인식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인식을
배척하고 위계 지우는 것에 반대하면서 국지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부적절
한 지식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마단 사럽, 1992: 61). 결국 역사에
있어서 일반적 법칙의 부정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진리라는 것은
임의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지식의 변형에 어떤 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지식이란 어떤 입장에서 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단 사럽, 1992: 97).13) 권력에 대한 저항은 지식, 능력, 자질과 연관되어
있는 권력의 효과들에 대한 저항이다. 즉 지식의 특권에 대한 저항인 것이
다. 그런데 그것은 검증된 진리라고 하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독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이 유통되고 기능하는 방식이며, 권력
에 대한 지식의 관계이다. 즉 지식의 지배 체제가 문제시된다는 것이다(푸
코, 1993: 129∼130).
료타르는 지식이라는 것이 자아와 타자의 구분,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라는 이성 중심주의와 결별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서술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간의 불일치를 주장한다. 서술적 지식은 지식의 실용적 측면으로서
일종의 사회의 규칙이며 언어적 유희의 다양성을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서술적 지식은 언어 유희에서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와 달리 과학적 지식은 참과 거짓이 판단될 수 있는 것만 대상으로
한다. 과학적 지식의 진리는 검증과 논증을 통해야 함으로 보편적 언어의
규칙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항상 과학적 사실
13) 푸코의 이러한 입장은 니체의 영향이 크다. 근원주의와 형이상학에 대한 니체의 유산은
푸코뿐만 아니라 다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도 존재하고 있다(이에 대한 논의는 김욱
동 편,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 현암사, 1993, 134∼140쪽 참조).
248 동양사회사상
을 정당화해야 하는 자기 확인이 필요하다(김욱동, 1993: 134∼140).14)
로티는 신실용주의라는 이름 아래 상대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는 객관적
이고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한다기보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
인 맥락 속에서 상대적인 진리를 옹호하고 있다. 결국 우연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김욱동, 1993: 334).
가다머, 데리다, 푸코, 료타르, 로티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보
편적이고 일반적인 원리에 대한 부정이다. 보편적․일반적 원리 또는 진
리라는 것은 이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진리
에 대한 논의는 이성에 대한 해체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들간
에 편차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이성에 바탕이 된
진리의 절대성과 그것의 주장이다. 가다머의 경우는 편견이라는 인간의
본래적 성격을 제시함으로써 완전한 지식의 즉 진리는 부정된다. 데리다에
게 있어서는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밝힘으로서 존재의 진정한 현존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제일원인에 대한 추구는 부정되는 것이다. 한편 푸코에
게 있어서는 진리라는 것이 권력이라는 지배 구조하에서 파악된다. 그래서
그는 권력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며 그것을 지식이라는 권력의 효과를 분
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이성에 의한 절대성, 일반론적 법칙의 발견
은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의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료타르에게 있어서는
서술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들간의 공통적 요소는
하나의 사회적 규칙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서술적 지식이 과학적 지식보다
다양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지식과 차이가 나며, 결국 현대성에
14) 그래서 료타르는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 서광사, 1993: 8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전
체와 하나에 대한 동경, 개념과 감성의 화해에 대한 동경, 명료하고 의사 소통 가능한
경험에 대한 동경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나친 대가를 치렀다.…… 전체에 대항하여 싸워
보자. 그리하여 서술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고, 충동하는 차이를 활성화하고, 그 이름의
명예를 구원하자.” 료타르는 이성으로서 세계에 대한 파악, 그리고 그것의 절대성에 대
해 비판하고 있다. 이성은 진리를 담보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49
서 주장하는 과학적 진리라는 것은 제한되고 한정된, 즉 과학적 대상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로티 역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상황의 우연성
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3. 마치면서: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편차와 근접성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각각 지혜와 이성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물론 지혜에 대한 비판이 직접적으로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 것
은 아니다. 그러나 지혜란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라고 보는 노자의 입장은 이성이 도구화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성은 도구화되어 욕망을 추구하는 데 이용된
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관련되어 도구화라는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이성이 해체된 자리에 놓고 있다. 그
동안 이성이라는 철창 속에서 갇혀 있던 욕망을 부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이성이라는 사회적 억압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문제
는 노자의 경우 인간의 육체적 인식에서 오는 한계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는 데 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세계를 구분하고 분별 짓는 지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에게서 비판되는 욕망은 지知와 결부되었을 때를
말하게 된다. 따라서 무위와 같은 의미를 지닌 무욕無慾의 상태에서는 이
러한 세속적이고 분별적인 지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욕欲(욕망)이 결부된 지知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경우 무욕無慾을 주장하는 데 비해 포스
트모더니즘은 욕망의 부활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편차를 보이고 있다. 노자
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욕망의 부활보다는 그것을 초월한 무욕을 주장한다
250 동양사회사상
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리에 대한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는 결국 진리에 대한
인식 문제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노자는 육체를 가진 인간을 한계
성을 가진 존재로 보면서 현실의 세속적인 지知로서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진리가 가지는 절대성
의 측면을 비판하고 있다. 삶에 대한 설명은 결국 각각의 지역화를 통해서
만 가능할 뿐 모든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진리의 존재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다.
인간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진리란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모두 거
부한다. 그러나 내용에서는 편차를 보이고 있다. 즉 노자는 절대적 진리인
도道라는 것은 존재한다고 보는 데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절
대적 진리인 도마저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도가 절대적 진리로서
존재한다는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볼 때 역시 또 다른 한계를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도는 분별적이고 세속적인 지로서는 인식되지 않는
다. 그것은 분별과 차별성을 극복한 진리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는 그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그것은 무위와 직관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상에서 이성에 대한 비판, 욕망과 지식의 관계, 그리고 절대적 진리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논의가 서로의
개념과 다양한 함의 때문에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
에 대한 논의에 일대일의 대응이라는 모더니즘적 도식을 적용한다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각각의 논의들 속에서 유사
성과 그 편차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상이한
사고와 세계에 대한 오해와 견고한 틀을 조금씩 해결하고 허물어 나가는
작업일 것이다.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51
참고문헌
老子, 道德經
강내희, 1993, “‘욕망’이란 문제설정?”, 문화과학 3호 93년 봄. 문화과학사.
권오현, 1991, 老子, 일신서적.
김성기, 1992,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사회과학 , 문학과 지성사.
김항배, 1982, “老子의 道와 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박이문, 1989, 노장사상-철학적 해석 , 문학과 지성사.
박희준, 1991, 백서 도덕경-老子를 읽는다 , 까치.
양재혁, 1987, 동양사상과 마르크시즘 , 일월서각.
윤평중, 1992.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 , 서광사.
, 1993,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합리성과 사회비판 , 교보문고.
이정우, 1993, “미셀 푸코의 신체와 권력”, 문화과학 4호. 93년 가을, 문화과학사.
이발상, 1985, ‘老子哲學에 있어서의 自然의 問題’, 충남대석사학위논문.
장기근, 1990, 「老子」, 老子, 莊子, 이석호 편역, 삼성출판사.
전병갑, 1993,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사상 , 한길사.
정연구, 1991, “道가의 ‘명’사상과 언론”, 언론 사회 문화 , 연대 신방과 언론연구논총.
감산대사, 1993, 老子-그 불교적 이해 , 송찬우 역, 세계사.
馮友蘭, 1975, 중국철학사 (上) , 유창훈 역, 세음사.
오오하마 아끼라, 1993, 老子의 哲學. 임헌규 역, 인간사랑.
료타르, 1993,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 서
광사.
마단 사럽 역음, 1992, 데리다와 푸꼬,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 임헌규 역, 인간사랑.
푸코, 1993, “주체와 권력”,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 이진우 역, 서광사.
252 동양사회사상
Comparison between Laotzu and Post-modernism: About Reason and Truth
Lee, Dong-Il
With comparison between thought of Laotzu and that of Post-mordrnism, we
have investigated the differences and of similarities lying on these two thoughts.
Both of these two side take a critical stance on ‘chih(知: knowledge)’ related
with ‘yu(욕: desire)’. They think that this secular chih in the real world,
resulting from reason and desire, has negative effects. However, these two
thoughts show differences on the point of view toward desire; Laotzu insists on
‘wu wei(無爲: the action confirm with taoist’s version of nature)’, while
post-modernist on the resurrection of desire.
On the other hand, these two thoughts have similarity on the argument how
to understand th truth. Both of them refuse to accept the truth, which human
beings are seeking after in the real world.
If we take views on the side of Laotzu, ‘Tao(道: taoist’s version of
providence)’can be revealed as an absolute truth. Post-modernists, however, take
a negative attitude toward even this ‘tao’ of absolute truth. As we may infer,
post-modernist’s have every possible ground that even this 'tao' of absolute truth
may have another limits.
But we must point out that ‘tao’ can not be perceived by ‘chih’, which has
secular and analytic characteristics. 'Tao' is the truth that surpassing the degree
of differentiation and differences. Therefore, what counts more is how to realize
it. This ‘tao’ can be achieved only through ‘wu wei’ and insight. This pont
makes difference from view of post-modernist's. They insist that there lie
possibility on the way of perception through “horizon of comprehension”.
When we make an argument about Asian and Western thoughts, it is highly
recommended to get it out open the similarities and the differences lying on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 253
them, in spite of the limits resulting from conceptual diversity, I am sure these
kinds of studies will bring us the steady breakdown for the wall of
different way of thinking and interpreting the world.
'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태극 이분법(김영주/초당대) (0) | 2017.12.18 |
|---|---|
| 자아(self)와 개인(person)에 대한 정의 고찰__초기불교를 중심으로__(최경아/동국대) (0) | 2017.12.06 |
| 마르크스 ꡔ독일 이데올로기ꡕ 해제-손철성/서울대) (0) | 2017.11.27 |
| 라클라우가 ‘말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재해석(서영표/제주대) (0) | 2017.10.16 |
| 공동체주의의 그림자: 신보수주의의 정당화 논리(선우현/청주대) (0) | 2017.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