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화두로 삼아 사색하고 연구해 왔다. 필
자는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이라는 논제를 내세워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
의 차이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분법二分法과 음양법陰陽法은 서유럽 지역과
동아시아 지역의 다름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고틀이다. 서양 문화와 동양 문
화의 차이가 거의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양 문화와 동
양 문화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한 ‘총체적 집결점’이요 그 ‘시발점’이라고 본다.
서양의 이분법과 동양의 음양법이 모두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함께
지니고 있다. 서양 이분법에는 ‘엄격한 순결성’이라는 좋은 면과 ‘독선적 맹신’
이라는 나쁜 면이 있다고 보며, 동양 음양법에는 ‘상대적 다양성’이라는 좋은
면과 ‘애매한 무분별’이라는 나쁜 면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서양 이분법과 동
양 음양법이 “서로 이질적인 듯 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고, 서로 보완적인 듯
하면서도 서로 이질적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서양 문화의 좋은 면에 일방적으로 몰입되어 있으며,
서양 학문 특히 서양 학문의 방법론에서는 좋은 면만 이야기하며, 아예 고정 관
념으로 박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한 번쯤 뒤집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아, 서양 이분법의 좋은 면보다는 일부러 ‘나쁜 면’을 주로 드러내어 논의하
려고 한다. 여기에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동양 음양법을 논의함에도 일부러 나
쁜 면을 주로 드러내기로 한다. 이렇게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비판을 문
제 의식으로 삼아, 그 대안으로 필자가 ‘태극 이분법’이라는 새로운 사고틀의
씨앗을 제시해 보겠다(동양의 ‘陰陽의 待對流行’을 담는 ‘태극’ 그리고 서양의 ‘善
惡의 대립’을 담는 ‘이분법’이라는 낱말을,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 보완한다”는
‘상호견제와 상호침투’의 뜻을 담아 ‘태극 이분법’이라고 이름지어 보았다).
Ⅰ. 머리말
서유럽과 동아시아는 산천과 기후가 달라 물산이 다르고 생활 패턴도
다르며, 그에 따라 사람들의 세계관도 다르다. 그 다르다는 것만으로 우
열이나 시비 선악을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세상에는 흥망성쇠가 있
고 그 흐름에 따라 희로애락이 생기면서 우리에게 우열 시비 선악의 관
념이 형성된다.
우리는 지난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서양의 기계 문명에서 오는 엄청난
충격으로 우리 자신의 생활 방식이나 사고 방식에 유난히도 심한 열등감
을 갖고 살아 왔다. 그 열등감을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하였지만, 뭔가 미
심쩍은 억울함도 없지 않았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화두로 삼아 사색하고 연구하곤 하였다. 그 차이가 우열이든 미
개와 문명이든 후진과 선진이든, 아니면 세상사 흘러가는 흥망성쇠의 한
모습이든…….
서양 문화는 엄청난 파도로 지구촌을 휩쓸며 거대한 위력으로 기세 등
등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치르면서 기계 문명의 포악함
으로 자괴감의 수렁에 빠져들었고, 20세기 후반에는 핵무기, 자연 파괴,
도시 문제를 비롯한 어두운 그늘 그리고 새로운 사회 문제와 과학 문명
의 폭발이 가져온 불안한 미래 등으로 서양 문화는 많은 문제 의식을 던
져 주고 있다.
서양 문화에 대한 이러한 문제 의식은 20세기 후반 들어 부쩍 많아졌
다. 학문 분야뿐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 그리고 종교 분야에서도 ‘근대
기계 문명의 그늘’에 대한 비판이나 염려가 다양한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방법이다.
여기에 이미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선학先學들의 연구에 힘입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39
어, 필자는 ‘서양 이분법二分法과 동양 음양법陰陽法’이라는 논제를 내세
워,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차이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분법과 음양법은 서유럽 지역과 동아시아 지역의 다름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고틀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차이가 거의
모두 여기서 비롯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핵
심을 이해하기 위한 ‘총체적 집결점’이요 그 ‘시발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서양과 동양을 비교함에 있어 이분법과 음양법이라는 논제를 내
세운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비교하고 그 차이를 말함에는, 은연중에 ‘우열 선
악 시비’라는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사萬事와 만
물萬物이 모두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보듬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
다. 그리고 그 만사와 만물이 현실을 만나 그 어느 때와 그 어느 장소에
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좋은 면이 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고, 나쁜 면이
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1) 그래서 현실에서 우열 선악 시
비가 나타나게 된다. 이 때 우리는 자기가 추구하는 쪽은 좋은 면만 말하
고 나쁜 면은 눈감아 버리며, 그 상대가 되는 쪽은 나쁜 면만 말하고 좋
은 면은 눈감아 버리는 버릇이 깊다. 이런 잘못된 버릇이 이른바 ‘학문의
세계’에까지 깊이 박혀 있다. 모름지기 학문은 무엇보다 이 잘못된 버릇
에서 나온 ‘자기 중심적 자아 도취’의 편파적 이데올로기에 빠져들지 않
도록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서양의 이분법과 동양의 음양법도 모두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너무 무모해 보일지
1) “주로 드러난다”는 글귀에서 ‘주로’라는 낱말은 일부러 쓴 말이다. 세상 만사와 만물이 현실을
만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드러냄에, 100% 좋게 또는 100% 나쁘게 나타나지 않는다. 좋은 면
과 나쁜 면이 서로 수없이 다양하게 섞여 나타난다고 본다.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優와
劣․善과 惡․是와 非가 오고 가며, 이에 따라 세상 만사와 만물에 흥망성쇠가 오르고 내린
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섞이는 정도의 다양함을 뜻하는 어감을‘ 주로’라는 낱말로 표현해 본
것이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이 논문의 3절에서 다시 하기로 하겠다.
40 동양사회사상
모르겠으나, 논의의 편의를 위해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좋은 면
과 나쁜 면을 간단하게나마 먼저 말해 보자면, 서양 이분법에는 ‘엄격한
순결성’이라는 좋은 면과 ‘독선적 맹신’이라는 나쁜 면이 있으며, 동양
음양법에는 ‘상대적 다양성’이라는 좋은 면과 ‘애매한 무분별’이라는 나
쁜 면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이 “서로 이질적
인 듯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고, 서로 보완적인 듯하면서도 서로 이질
적”이라고 생각한다.2)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서양 문화의 좋은 면에 일방적으로 몰입해 있으
며, 서양 학문 특히 서양 학문의 방법론에서는 거의 좋은 면만 강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예 좋은 면만 이야기하며 고정 관념으로 박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논리를 전개함에는,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드러내야 하겠으나, 이 연구에 할당된 지면이
넉넉하지 못할 뿐더러 서양 문화의 좋은 면만 일방적으로 박혀 있는 고
정 관념을 한번쯤 뒤집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아, 서양 이분법의 좋
은 면보다는 일부러 ‘나쁜 면’을 주로 드러내 논의하는 쪽으로 전개하려
고 한다. 여기에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동양 음양법을 논의함에도 일부
러 나쁜 면을 주로 드러내는 쪽으로 전개하기로 한다. 이렇게 서양 이분
법과 동양 음양법의 비판을 문제 의식으로 삼아, 그 대안으로 필자가 ‘태
극太極 이분법’이라는 새로운 사고틀의 씨앗을 제시해 보겠다. 필자는 동
양의 ‘음양陰陽의 대대유행待對流行’을 담는 ‘태극’ 그리고 서양의 ‘선악
의 대립’을 담는 ‘이분법’이라는 낱말을,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 보완
한다”는 ‘상호 견제와 상호 침투’의 뜻을 담아 ‘태극 이분법’이라고 이름
지어 보았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긴
2) “서로 이질적인 듯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다”라는 말로 그치지 않고, 동어 반복 같은 말인 “서
로 보완적인 듯하면서도 서로 이질적이다”를 덧붙인 것은 의도적이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41
세월을 따라 사상의 흐름에 수많은 부침이 있다. 그 긴 세월 속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모습을,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이라는 용어로 일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있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얼마쯤
의 무모함을 무릅쓸 수 있을 정도로, 서양에서는 이분법적 사고가 동양
에서는 음양법적 사고가 거의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 고대에는 로마 제국의 터전을 닦은 그리스 로마 문화가 있었
고, 중세에는 가톨릭교의 흥성에 발맞추어 스콜라 철학이 있었고, 근대에
는 근대 부르주아 세력의 등장과 함께 대륙과 영국에 시민 사회 사상이
있었으며,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하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사회주의
사상이 있었고, 20세기 중반부터 온 지구촌의 새로운 문제 의식을 담은
현대 사회 이론들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 긴 세월의 문화적 흐름에
거의 일관되게 관통하는 ‘서양 이분법’이 있다고 본 것이다.3)
동양에서도 그렇다. 춘추 전국 시대의 유가儒家나 노장老莊, 법가法家,
묵가墨家를 비롯한 제자백가 말고도, 구체적 현실에서 국가 운영에 유儒
-법法의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일상 생활에서는 유교적 생활 덕
3) 니체와 실존주의의 흐름을 타고 나타난 프랑스 현대 철학이 기존의 서양 사상에 매우 도발적
인 도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도 그 깊은 바닥에 서양 이분법이 깔려 있다고 본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로 대표되는 프랑스 현대 철학은, 근대 부르주아 사상과 마르크스주의를
함께 ‘이성의 횡포’라고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그 이전의 중세 스콜라 철학과 고대 그리
스 로마 문화도 신랄하게 비판하여, 서양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들에
게 해체당하지 않은 서양 사상은 아마 없는 듯하다. 그들은 ‘서양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지금까지의 서양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 보인다. 그러나 그 구체적
인 대안을 보여 주지 못함으로써 우리를 설득함에 한계를 보인다. 그들이 동양 문화를 비롯한
다른 문화권의 문화와 사상에 얼마쯤 호의적 관심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그것을 구체적으로
연결시켜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프랑스 현대 철학과
동양 철학을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이러한 시도는, 후기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세계적 유행의 흐름을 타고 나타난 현상이기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자생적인 깊은 숙성에 의한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세계적 유행의
亞流적 흐름으로 보인다(한국도가철학회, 2001; 함재봉, 1998). 비록 그들이 기존의 서양 사상
에 아무리 근본적이고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필자는 그들도‘ 서양 이분
법’이라는 사고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에 관한 설명은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겠다.
42 동양사회사상
목과 도교적 기복 신앙이 뒤엉켜 있었다. 불교와 도교에 수많은 종파가
있으며, 유가에도 고대 유가가 있고 신新유가 그리고 명明․청淸의 다양
한 학파가 있다. 불교에 이질적인 세계관의 흐름이 없지 않으나, 그마저
도 동양의 음양법과 깊은 교감을 하면서 섞여 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이질적 세계관을 얼마쯤 접어두고 보면, 동양에서 수많은 사상의
부침에도 동양의 음양법이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필자의 주장이 그 긴 세월의 수많은 흐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
는 무모한 억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걸 고려하면 아
무것도 말할 수 없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얼마쯤의 단순화가 필
요하다. 단 이 연구에서의 이러한 단순화가 무지막지한 억측인지 아니면
얼마쯤의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고 하겠다.
Ⅱ. ‘선악의 대립’의 서양 이분법에 대한 비판
서양 이분법에는 헬레니즘에서 보인 고대 철학의 ‘불변의 진리’를 향
한 갈망과 헤브라이즘에서 보인 예수교의 극단적인 ‘선악의 대립’이 함
께 어우러져 있다고 본다.
먼저 ‘불변의 진리’를 향한 갈망을 말해 보자. 서양 문화가 이 땅에 들
어오면서 보여 준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그 중에 두드러진 하나가
아마 ‘진리라는 낱말에 대한 숭앙’일 것이다. ‘진리’라는 낱말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신성 불가침의 절대적 숭앙의 대상이다. 참으로 그러한
것일까?
서양 문화에서 진리는 신성 불가침의 숭앙의 대상인 만큼(미치광이나
악마가 아닌 바에야) 거의 “모든 사람이 옳다고 굳건히 믿을 수 있는 것”이
어야 한다. 설사 진리가 현실에서 미치광이나 악마에게 훼손되기도 하고
잠시 의심받기도 하겠으나, 결국은 훼손되지도 않고 의심받지도 않아야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43
한다. 그러니 진리라는 낱말은 ‘영원토록 불변하는 그 무엇’이라는 ‘절대
성’을 추구한다. 진리라는 낱말 자체가 이미 ‘불변 또는 절대’라는 개념
을 전제로 깔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불변의 진리’ 또는 ‘절대적 진리’
라는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라는 낱말은 분명히 “거의 모든 사람이 태고부터 지금까
지 변함 없이 믿어온 바가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게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낳고 죽는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
로 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돌고 돈다”……. 이 정도가 태고부터 지
금까지의 거의 모든 인간이 변함 없이 믿는 바가 아닐까? 그런데 이것들
은 진리보다는 사실(fact)이라는 말이 좀더 어울린다. 서양 학문에서 ‘진
리’라는 낱말과 ‘사실’이라는 낱말은 분명 다르다.4)
진리는 어떤 사고틀과 접근 방법에 따라 나타나는 일관된 원리이다.
진리는 어떤 사고틀과 특정한 접근 방법을 요구한다. 그러니 진리라는
개념은 ‘어떤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김영주, 1999: 101-105). 사실(Fact)이
라는 것이 세계관과 연결되면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된다. 가령 “사람은 모
두 태어나서 죽는다”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Fact)이지만, 이것이 세계
관과 연결되면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되고, 그 해석이 다시
다양한 문화의 색깔을 갖게 된다. 진리는 사실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그러니 진리란 “태고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옳다고 믿는 세
계관”을 뜻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태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옳다고 믿는” 확고 부동한 세계관은 존재하는가? 역사를 돌이켜
보고 온 세상을 구석구석 뒤져보아도 그런 건 분명 없다. 그렇다면 “태고
부터 지금까지”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이제라도 세상 모든 사람이 옳다
고 믿는” 그런 세계관은 존재하는가? 200∼300년 사이에 근대 부르주아
4) 서양 학문에서는 진리(Truth)와 사실(Fact)을 구별짓는다고 말하기는 하면서도, 막상 논리를 전
개시킬 때는 구별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김영주, 1999: 131-134). 서양 학문에서
는 이 개념적 혼동을 이용해 중요한 주장에서 많은 强辯을 하고 있다. 깊이 조심할 일이다.
44 동양사회사상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처럼 몇몇 사상이 스스로 “이제 자기가 참다운 진
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절대적 진리’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긴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스스로 “자기 것이 최
고!”라고 확신하지 않았던 사상이 있었을까?
절대적 진리는 “그 자체로서 오로지”한 것이므로 ‘딱 하나’이어야 한
다. 그런데 시대마다 그 시대에 승리한 세력은 자기들이 추구하는 사상
이 스스로 절대적 진리라고 미화하고 싶어한다. 그리 되면 길고 긴 세월
을 두고 볼 때 한 시대마다 절대적 진리가 하나씩 있으니, 오직 하나이어
야 할 절대적 진리가 여러 시대에 걸쳐 보면 여러 개가 있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진짜일까? 모두
가짜가 아닐까? 혹시 모두 가짜라면 진짜는 언제 나타날까? 그도 저도 아
니고, 절대적 진리는 인간의 부질없는 희망 사항이지 실제로는 없는 게
아닐까? 실제 현실에 절대적 진리가 없다면 진리 추구는 어떻게 해야 하
는 걸까? 진리 추구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쫓는 환상이었단 말인가?”
아마 지금 현재 주도권을 잡고 있는 세력이 주장하는 사상이 진짜라고
우길 것이다. 앞에 서 있던 진리는 그 뒤에 오는 진리에게 일방적으로 공
격받아 만신창이가 될 것이고, 그 진리는 또 다시 새로운 진리에게 일방
적으로 공격받아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게임에서 ‘최
근의 사상’이 가장 유리하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또 오게 되어 있으니,
새로운 시대의 진리는 지금의 진리를 또 만신창이로 만들 것이다. 결국
절대적 진리라고 하는 것도 한 시대의 유행이고, 긴 세월을 두고 보면
‘일방적인 만신창이의 행진’에 지나지 않는다.5)
“그 어느 것도 영원토록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당시에는 절대적 진
5)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자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공격에 자기 변호의 기회 자체가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옛것에 대해 항상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횡포만 일삼는다. 새로운 것이 무
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새로운 것은 얄밉도록 옛것을 매도한다. 새로운 것
의 옛것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을 보노라면 “원초적으로 비겁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45
리라고 주장할지언정 그 안을 들여다보면 승리자의 이데올로기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승리자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진리’라는 낱말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아직도 신성 불가침의 낱말로 숭앙 받고 있는
걸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도 치열한 사색의 산물인
이른바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이리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단 말
인가! 필자가 어디에선가 큰 잘못을 범하고 있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서양 문화권의 2000년, 3000년을 그리고 유럽말고
도 여러 문화권을 두루 살펴 넓고 긴 안목으로 지금 이제야 돌이켜보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
다. 그것도 서양 문화가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권에 그리고 지구라는 전
체 단위의 생명권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각성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것도 20세기에 들어서고 한참 뒤에나.
20세기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서양의 근대적 기계 문명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시절이라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
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할 때,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고 돌이켜 반성하
는 일은 거의 없다. 설사 돌이켜 본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어두운 구석을
반성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향한 새로운 모색을 하는 게 아니다. 지금 현
재의 기득권 세력이 믿고 있는 세계관이 어떻게 이런 모습을 갖게 되었
는가를 더듬어 보는 ‘흐뭇한 회고담’이다. 그 회고담은 기본적으로 ‘성공
시대의 자기 중심적 확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동안 모든 일이 자기
세력이 득세한 지금의 성공을 예비하는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하게
된다.6) 결국은 가장 최근에 득세한 세력의 입맛에 맞게 이야기하게 되어
6) 성공한 사람들은 그 기쁨과 그 자부심을 말함에, ‘우연’보다는 ‘필연’을 말하게 되어 있다. 필
연을 말한 다음에는, 겸손하듯 ‘감사’를 말하며, 그 위대한 무엇이 ‘자기 편’이었음을 말하게
된다. 그리곤 자기가 그 위대한 무엇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그 위
대한 무엇의 대리인’이라거나 자기 자신이 ‘그 위대한 무엇’임을 강변하고 싶어하기까지 한다.
단지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오랜 세뇌 공작에 얽매어 차마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못
46 동양사회사상
있다. 그때마다 득세한 세력은 말한다. “이번은 진짜다!”
서양에는 적어도 세 번의 커다란 사상적 격동이 있었다. 고대에서 중
세 그리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사상적 전환이 있었고, 20세기 공
산혁명에 의한 냉전 시대가 있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새로운 사상적 운
동이 꿈틀거리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진리를 자처하다가 중
세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흡수하여 진리를 자처하였고, 근대
부르주아 세력이 르네상스의 이름을 걸고 일어나 개신교와 자연 과학과
더불어 진리를 자처하였다.7) 비록 자멸하였지만 한때는 자본가의 착취를
비난하며 지상 천국을 꿈꾸었던 공산혁명도 진리를 자처하였다. 그 시대
마다 자기의 세계관이 ‘영원 불변의 진리’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마다 이번만은 자기들의 주장이 분명 ‘영원 불변의 진리’라고 확신하
였던 것이다.
서양에서는 ‘불변의 진리’를 위해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이슈를 ‘이분
법’으로 고민하고 갈등하였다. 1) 주체와 객체 그리고 주관과 객관, 2) 존
재와 당위, 3) 영혼과 육체․정신과 물질․유물론과 유심론․실재론과 관
념론․이성理性과 감성感性, 4) 필연과 우연, 5) 균형과 불균형, 6) 부분
과 전체, 7) 사적 소유와 공동 소유, 8) 수직적 서열과 수평적 평등.
서양에서는 이렇게 이분법으로 이슈화된 두 가지 극개념을 그대로 두
고 비교하고 고민하며 다양한 사색을 이끌어낸다기보다는 “둘 중 어느
한쪽을 굳이 선택하여” 그 선택된 개념을 체계화시켜 만든 사고 방식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였다.8) 그 선택은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그
대로 유지되는 것도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있다. 그러
하거나, 그렇게 말했다가는 장기적으로 수지타산이 별로 맞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나르시스적인 자기 확신’의 극단적 모습을 살짝 숨기는 것이다.
7) 필자는 시장주의, 그 신화와 환상에서, 근대 부르주아 세력의 진리관이 갖는 허상과 실상에
대해 개신교와 뉴턴 패러다임을 연결시켜 그 뿌리부터 자세하게 논의한 바 있다.
8) 그 선택으로 이루어진 논리적 일관성의 사고틀을, 그 시대를 풍미한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쿤, 1998).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47
나 어느 시대에 어느 쪽을 선택하였건, 그 공통점은 “추상적 개념을 이분
법으로 분리하여 그 두 개념의 ‘치열한 대립’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다. 서양 이분법은 ‘두 추상적 개념의 치열한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치열한 대립적 반목으로 인하여 자연히 둘 중 어느 한쪽을 우
리편으로 선택하게끔 충동질한다. 그리고 그 선택된 개념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절대적 확신을 요구한다. 결국 서양의 대립적 이분법은 그 자
체의 속성 때문에, 태생적으로 ‘절대적 확신’에 귀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세계관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 세계관을 일방적
으로 미화하고 자기들과 다른 세계관을 일방적으로 멸시하는 성향을 띠
게 된다. 자기 쪽을 미화하고 다른 쪽을 멸시하는 성향은, 자기와 상대방
을 대등한 위치에서 상대화하지 않고,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거
나 일방적으로 공격한다. 그리고 자기의 입장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
을 미처 배려하지 못한다.9)
자기 입장이 “참으로 영원토록 옳다면” 별문제가 없겠다. 그러나 자기
입장이 참으로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거나 또는 일시적으로 옳으나
영원토록 옳다고 할 수는 없고,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부분적으로는 옳지
않다거나 또는 아예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복잡하다. 결
국 절대적 확신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를 향한 갈망이 아니라 무
지막지한 독선이나 정신병적 자아 도취를 불러오게 된다. 자기는 무조건
옳고 자기와 다른 것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맹신이
다. 스스로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기의 사고 방식을 상대와 비교
하면서 구석구석 구체적으로 파헤쳐 자상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 쪽
을 추상적으로 ‘그저 좋은 낱말’을 동원하여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경향
9) 그러나 자기들 패러다임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허용된다. 우리가 말하는 논쟁은
대부분이 ‘패러다임 울타리 안에서의 논쟁’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패러다임 울타
리 안에서 안주한다. 주어진 패러다임의 울타리를 넘는 경우는 아예 멸시하고 코웃음친다. 필
자가 거론하는 문제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관한 논쟁이다.
48 동양사회사상
을 가지고 있다. 자기 집단 내부로는 강력하게 단결하고 자기 집단 외부
로는 강력하게 배척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10)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이러한 모습이 마침내 극단적인 ‘선악’을 설
정하게 된다. 여기서 헬레니즘에서 ‘불변의 진리’를 향한 갈망은 헤브라
이즘에서 예수교의 천사와 악마라는 극단적인 ‘선악의 대립’과 만난다.
서양 이분법은 이렇게 ‘불변의 진리’를 향한 갈망과 극단적인 ‘선악의 대
립’을 담고 있는 사고 패턴이다. 진리의 문제에 이미 선악의 문제가 개입
되어 있는 것이다. 추상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진리의 문제에 현실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선악의 문제가 혼재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추상
적 사색의 도구라기보다는 현실적 선택에 의한 추구 이념으로서‘ 이데올
로기’가 된다.
서양 이분법에서 ‘2개의 추상적 극개념’은 서로 대등하게 나란히 ‘대
칭’된 것이 아니라 서로 우열이나 시비 선악을 다투는 ‘대립’된 것이며,
서로 섞여들면서 ‘상호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갈등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때문에 수없이 많은 다양함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으로 대립된 두 세력의 갈등에 의한 투쟁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서양 이
분법에서 2개의 추상적 극개념은, 수없이 많은 다양함을 이해하기 위한
추상적 도구라기보다는, 대립하고 투쟁하여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관철시
키려는 ‘현실적 주체 세력의 행동 신념’인 것이다.
싸우게 되면 저절로 서로가 자기 쪽이 선이고 상대방이 악이라고 여기
게 된다. 싸움이 더 극렬해질수록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처절함 속에서
자기 쪽을 선으로 두고 상대방을 악으로 두는 마음이 더욱 강해지고, 마
침내는 자기(善)가 상대방(惡)을 정복하여 ‘100% 선’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10) 그래서 현실에서 득세한 주도 세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어용적 성향을 갖거나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혁명적 성향을 갖는다. “적극적 어용과 적극적 혁명은 피를 부른다.” 서양의 역사가
다른 지역에 비해 종교와 학문의 이름 아래 많은 피를 흘리게 된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절
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49
꿈꾼다. 다른 한쪽인 악을 극악무도하게 묘사하여 증오하고, 자기에게 그
악이 조금이라도 스며들게 되면 죄의식으로 뉘우침을 거듭해 순도 100%
선을 갈망한다. 이 100% 선에 대한 갈망이 싸움을 더 극성스럽게 만들어,
극단적인 ‘마녀 사냥’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로테르문트, 1999).11) 서양의
이분법에는 순도 100% 선에 대한 갈망이 들어 있기 때문에 더욱 선악의
대립에 의한 투쟁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 이분법은 ‘순
도 100% 선에 대한 갈망’을 더불어 생각해야 그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양 이분법은 이렇게 두 세력의 대립과 투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저절로 서로 선악을 설정하게 된다. 그러면 두 세력 중에서 누가 선이고
악이냐? 어느 누가 악의 세력임을 스스로 자처하겠는가! 서양 이분법적
사고는 두 세력이 서로 자기를 선이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악이라고 생
각하는 ‘나르시시즘적 독선’을 수반하는 태생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 결
과적으로 승리자가 선의 영광을 독차지하고 패배자가 악의 굴욕을 받는
다. 대립과 투쟁에서는 승리자의 영광과 패배자의 굴욕만 있을 따름이다.
학문적 사색과 관찰을 바탕으로 현실적 선택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승
리자의 현실적 선택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 승리자는 선을 차지하고
패배자에게 악을 뒤집어씌우는 논리를 만들어, ‘진리’라는 깃발 아래 모
이게 한 다음, ‘학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빌려 우리를 세뇌한다. 승리
자에게 무조건 영광의 논리를 제공하고 패배자에게 무조건 굴욕의 당위
성을 강변하는 것이 어찌 참다운 학문일까마는, 서양 학문의 대립적 이
분법은 자기의 입장 또는 관점을 제시하여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며 그
합의점을 찾아가는 탐색의 도구라기보다, 대립하고 투쟁하여 승리자가
패배자를 몰아치는 ‘마녀 사냥의 도구’처럼 보인다.
11) 때로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거나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더럽게 여기는 분노를 드러낸다. 이
것이 강렬하게 부풀어오르면 이 세상을 깨끗이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종말론’에 의
한 ‘구세주 재림’을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서양 사상은 그 겉모습이 어떠하든 모두 ‘종말론적
혁명’에 의한 구세주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50 동양사회사상
그러기에 중세 봉건 사회와 절대 왕정 체제를 무너뜨린 근대 부르주아
세력은 선이 되고 봉건 영주와 절대 군주는 악이 되었다. 중세는 암흑 시
대라고 부르게 되었고, 절대 왕정은 전제 군주라는 낱말에 나쁜 어감을
심어 비난하였다. 근대 부르주아의 세계관은 좋은 이미지를 모두 독차지
하고, 봉건 영주와 절대 군주는 나쁜 이미지를 모두 뒤집어쓴다. 그러나
근대 부르주아의 세계관도 언제 어디서나 좋은 낱말로 미화 되지만은 않
았다. 사회주의 사상은 스스로를 선으로 여기고 시장 사회를 악으로 규
정하여 근대 부르주아의 세계관을 나쁜 이미지로 매도하였다. 태어난 장
소가 시장 사회이면 공산주의가 포악스런 악마의 화신으로 알고 살아가
며, 태어난 장소가 공산 사회이면 자본가가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
혈귀의 소굴인 것으로 알고 살아간다. 중세 유럽에는 예수교 성직자나
봉건 영주가 좋은 낱말을 독차지하고 농노나 이교도는 나쁜 낱말을 뒤집
어쓴 것과 다를 바 없다. 중세 유럽의 승리자들을 보라! 절대 왕정의 승
리자들을 보라! 근대 부르주아 세력이라는 승리자들을 보라! 사회주의 혁
명을 외치던 자를 보라! 자기 쪽은 온통 ‘천사표’요, 상대방은 온통 ‘악마
표’다. 실패한 그들이 스스로 악마표라고 말했겠는가? 그리 말했을 리 만
무하다. 모두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12)
그래서 서양 학문은 극단적인 편파성을 갖게 되고, 냉철한 사색의 도
구라기보다는 감정적 좋고 싫음을 드러내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된다.13) 그러니 서양 학문이, 결국에는 그 극단적 편파성에 의한 감
12)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은 “우리편이 반드시 이기고야 말리라!”라는 자기 암시에 의하
여 전투력을 강화시킨다. 자기를 정의라고 확신하고 있어야 상대방을 여지없이 무찌를 수 있
을 것이다. 우리가 바퀴벌레를 짓밟을 때, 아무런 잔인함을 느끼지 않듯이 말이다.
13) 이러한 감정적 好惡를 담은 이데올로기적 편파성이 서양 사상에만 그치는 건 아니다. 인류의
삶이라는 게 감정적 好惡를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기에, 사상이 현실과 만나면서 이데올로기적
편파성을 갖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유럽 문화권 특히 근대 유럽 사
상은 이 이데올로기적 편파성이 가장 강렬해 보인다(근대 유럽사상의 이데올로기적 편파성은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였다. 왓킨스, 1976; 월러슈타인, 1994). 이 강렬함이 근대 유럽
사상 자체에서 나온 필연적 산물인지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우연한 산물인지 단정지어 말하
기는 쉽지 않지만, 필자는 근대 유럽 사상 자체에서 나온 필연적 산물로 본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51
정적 좋고 싫음으로, 어느 한쪽을 맹신하는 ‘종교적 신앙’의 모습으로 보
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학문이 자기의 학설과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
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나르시시즘적 맹신적 열광으로 보이는
것이다.14) 일반 대중은 물론이요, 종교적 맹신이나 이데올로기적 색안경
을 항상 경계해야 할 우리 학자들도, 이런 미망에 절어 있기는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이러한 서양 이분법에 의한 사고는, 상대방이 보기에는 ‘독선적 맹신
과 권위적 답답함’으로 보이지만, 자기 스스로는 ‘고아한 순결성과 엄격
한 일관성’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양 학문이 “송곳으로 바위를 뚫는 듯
한” 철저한 엄격성과 일관성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고아한 순결성으로
고고한 권위를 취하려는 성향이 매우 강렬하다. 그런 성향 때문에 서양
문화는 ‘이상향과 희망’을 지나치게 강요한다. 그리고는 그 필연적 도래
를 세뇌시키면서, 그를 위한 엄격한 채찍을 휘두르며 생활과 사고에 순
결한 일관성을 요구한다. 그것을 서양 종교에서는 ‘고결한 기다림’이라고
하고, 서양 학문에서는 ‘논리적 합리성’이라고 부른다.
이 엄격한 채찍과 순결한 일관성이 때때로 우리를 숨막히게 하고, 이
숨막힘이 ‘자기 중심적 편집증’과 만나 개인과 사회에 사디즘이나 마조
히즘으로 나타난다.15) 그래서 서양 문화는 한쪽으로 이상향을 향한 숭고
한 고결미를 갈구하면서, 다른 한쪽으로 개인과 사회에 사디즘이나 마조
14) 자기가 지지하는 학설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과 자기의 맹신적 열광을 보여 주는 것은 겉으로
는 같아 보이지만 속모습은 다르다. 비유해서 말하면 자기가 지지하는 학설을 분명하게 밝히
는 것은 모시옷과 털옷의 좋고 나쁜 점을 모두 말하고 나서 지금이 여름이니까 모시옷이 옳다
고 선택하는 것임에 반하여, 자기의 맹신적 열광을 보여 주는 것은 모시옷의 좋은 점만 일방
적으로 미화하고 털옷의 나쁜 점만 일방적으로 과장하여 모시옷이 언제 어디서나 옳다고 집
착하는 것이다.
15) 이것이 기존의 서양 철학을 프랑스 현대 철학이 극렬하게 비난하는 점이다. 니체는 ‘아폴론적
인간’을 비난하고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요구하였으며, 푸코는 감시와 처벌 로 국가의 횡포
를 그리고 성의 역사 로 가부장적 가족의 억압을 비난하였고, 들뢰즈는 앙티 외디푸스 에
서 ‘욕망하는 기계’로 ‘욕망’을 이야기하면서 자본주의의 편집증적 극단을 비난한다(푸코,
1990, 1994; 들뢰즈, 1994).
52 동양사회사상
히즘을 수반하는 것 같다.16) 이제 우리는 ‘이상향과 희망’이라는 말을 빌
린 ‘지나친 갈망’에 그만 휘둘려야 한다. ‘이상향과 희망’이란 낱말이 갖
고 있는 겉모습에 홀려 상대 쪽을 악마라고 저주하며, 우리는 너무도 많
은 피를 흘렸다.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 온 발자취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상향과 희망이 우리의 삶에 의미 있음은 인정하되, 거기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개인과 사회에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억압 구조’를 초래한
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서양 이분법은 서양 문화에서 핵심 포인트인 ‘신(God)의 문제’와 밀접
한 관련을 갖는다. 필자는 서양 이분법이 신이라는 문제에 연관되어 있
음을 이야기함에, 그 포인트를 ‘변화’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으로 접근한
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틀에서, 선善의 영광을 차지한 승리자 쪽은 자
기들의 세계관을 ‘진리’라고 절대 확신한다. 절대 확신하는 만큼 그 개념
틀이 변화하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변의 진리’이다. 그럼 진리
는 불변이니, 여기에는 ‘변화’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아니다.
불변의 진리라는 사고틀을 기본적인 틀로서 전제한 다음, 변화라는 개념
을 수용한다. 일단 모든 것이 그 ‘진리의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 그대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주어진 상태에서의 ‘주어진 변화’이다. 서양
문화에서 변화라는 개념은 “진리라는 울타리 안의 주어진 상태에서 주어
진 변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어진 변화’라는 개념에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주어진 변화 자체를 만들어 낸 주체에 관한 문제이다. ‘주어
진 변화’는 ‘이미 주어져 버린 어떤 상태’를 전제로 하는 변화이니, 그 변
화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따로 그 변화의 움직임을 “주
어진 대로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들어 낸 ‘주재자主宰者’가 존재해야 한
16) 이러한 서양 이분법적 사고틀이 지금 우리 나라에서도 생활 속 깊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 나름의 독특한 ‘괴팍함’과 함께 더욱 복잡하게 꼬여 있지만 말이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53
다. 그 주재자를 설정하지 않고는 주어진 상태에서의 주어진 변화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주어진 변화를 나타나게 하는 주재자가 필요하
다. 그 주재자를 ‘God’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 것이다. 주어진 그 변화를
주재자가 일으키는 걸, 종교에서는 ‘신의 말씀(Logos)’이라 하였고, 학문(―
logy)에서는 ‘법칙이나 원리’라고 하였다.
주어진 변화의 주재자를 종교에서 신이라고 부르는 건 그리 낯설지 않
겠으나, 학문에서의 ‘법칙이나 원리’로 연결시켜 말하는 건 낯설어 보일
지 모르겠다. 그러면 이제 ‘주어진 변화’에 대한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을
이야기해 보자. 그 변화가 주어져 있다는 것은 그 변화가 ‘강력한 필연’
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이 주어진 변화가 종교적으로 ‘신이
예정한 역사役事’로 나타나고, 학문적으로 ‘주어진 패러다임에서 요구하
는 강력한 필연적 인과 관계’로 나타난다. 서양 문화에서 변화는 ‘절대적
진리의 울타리 안에서 변화’이니, 신의 말씀이나 계시에서 ‘예정해 준 삶
의 코스’를 그대로 밟아 가는 변화이고, ‘강력한 필연을 예정’하는 정태
적 변화이다.17) 그 자체를 보여 주는 이정표가 ‘말씀’ 그리고 ‘법칙과 원
리’나 ‘황금율’이요, 그 실현체가 ‘에덴 동산’ 그리고 ‘이상향’이나 ‘황금
시대’요, ‘진리․논리․합리․이성․과학’이다. 물론 이상향은 그 시대를
17) 주어진 그대로 밟아 가는 변화가 영어에서C ourse, Process, Feed-back, Circle……이라는 개념이요,
주어진 그대로 또박또박 밟아 가는 그 화살표 방향이 Advancement, Development, Evolution……
이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정태적 변화의 모습을 Mechanism이나 System이라고 말한다. 그 쓰임
새가 조금씩 다르고 뉘앙스에 작은 차이가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절대적 진리의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 정태적 변화’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동양 음양법에서 바라보는 변화와
는 근본적인 개념틀이 다르고, 그래서 그 개념이 뜻하는 바가 다르다. 그러니 이 근본적인 차
이 자체를 이해하지 않고, 동양 문화에서 生과 成․變과 化․進과 退․昇과 降․流行이나 運
行․天地造化 같은 개념을, 서양 문화에서 변화 과정․변환․순환․발전․발달․진보․기
제․체제 등의 번역 낱말을 동원하여 개념적으로 정리하거나 비교하고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
도는, 그 근본적인 차이로 오해나 잘못을 범하기 쉽다). 서양 문화에서 ‘변화’라는 개념이 이러
하므로, 요즈음 자연 과학계에서 벌어지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논쟁’도 이 개념의 범주를 크
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 이분법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논쟁’ 또는 ‘우주의 시작과 끝에 관한 논쟁’도 ‘자기 동네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고 생각한다(시간과 공간에 관한 논의는 편의상 다음 2절에서 간략하게나마 다시 하겠다).
54 동양사회사상
주도하는 패러다임에 따라 겉모습을 달리한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예수
교의 천지 창조와 예정설이 동방 그리스정교와 로마 가톨릭교 그리고 개
신교로 나타나고, 학문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중세 스콜라철학․뉴턴
의 ‘y=f(x)’에 의한 결정론적 인과율과 자연의 법칙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의 ‘세계사 기본 법칙’으로 나타난다.18) 고대, 중세, 근대 그리고 종교와
학문을 막론하고, 여기에 공통된 것은 “신이 예정한 역사와 강력한 필연
에 의한 절대 확신”이다.19)
이렇게 볼 때 서양 문화에서는 학문뿐 아니라 예술, 종교 그 어느 분야
든 밑바닥에 깔린 서양 이분법을 보지 않으면 그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고대 중세 근대를 막론하고 그리고 현대까지도20) 서
양 문화는 ‘서양 이분법에 의한 사고틀’을 파악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
다고 생각한다.
서양 학문이 ‘학문’이라는 이름에 ‘지고한 권위’를 부여하면서 그 권위
를 위해 ‘논리적으로 엄격한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도, 필자는 대립적 이
18) 학문은 겉으로 보아 신을 설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게 겉으론 신이라는 낱말을 거론하지 않을
지언정 그 속을 파고들면 결국 종교적 신의 개념에 해당하는 추상적 개념이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속모습은 ‘개신교적 전지전능한 신’의 개념과 추
상적으로 동질적이다. 그걸 이른바 ‘理神論’이라고 한다(스미스, 1987; 롤, 1985).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고전 물리학의 창시자인 뉴턴도 ‘신’을 설정한다(비케르트, 1998). 이성의 합리성을 추
구하는 근대 철학도 마찬가지요, 뉴턴의 고전 물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자연 과학도 마찬
가지이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로 신을 부정하는 듯하지만,
나는 ‘유물변증법’이 결정론적 필연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결정론적 필연은 서양 이분법에서
비롯한 사고틀로서, 그 밑바탕은 궁극적으로 마찬가지라고 본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필연코
붕괴하고야 만다”는 신념으로, 새로이 도래할 ‘공산 사회’의 기다림은 또 다른 ‘구세주 재림’
이라고 생각한다(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필자의 이런 해석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
은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겠다. 로테르문트, 1999: 121-162 참고).
19) 이것이 니체에 따르면 ‘아폴론적 사고 영역’이요,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말하는 ‘감시와 억압
의 굴레’이며 ‘해체의 대상’이다. 그러니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바로 “예정한 役事와
강력한 필연에 의한 절대 확신에 빠진 아폴론적 사고 영역”에 대한 거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프랑스 현대 철학이 분노하며 해체해 버리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20) 여기에서 현대라는 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물론이요, 20세기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서양 기
계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20세기 후반에 기존의 서양 사상을 매우 격렬하게 비난하
는 ‘프랑스 현대 철학’까지 포함한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55
분법의 ‘강력한 인과적 필연성’을 확신하기 위해 ‘자기 결백증’을 보장받
으려는 ‘자기 최면 작업’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서양 이분법 자체에 이
미 ‘자기 쪽의 엄격한 일관성’으로 ‘고아한 순결성’을 유지함으로써, 이른
바 ‘합리적․논리적․이성적․과학적’이라는 ‘아름다운 낱말’로 스스로
를 위로하고 싶은 욕구가 자기도 모르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의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학문․과학․이성․합리․논리……’라는 ‘이
미 아름답게 미화된 낱말’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자아 도취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에 ‘승리의 영광’이 뒷받침되면 열광과 숭앙만
있을 따름이다. 이에 대한 저항이나 반성은 ‘비과학적․비이성적․비합
리적․비논리적……’이라는 ‘나쁜 낱말’로 ‘서양의 색안경에 찌든 떼거
리’에게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만다(소칼 외, 2000; 강건일, 1998).21)
서양 학문에서 주요 요건인 ‘객관성’이라는 덕목도 극단적인 ‘선악의
대립’에 의해 선택된 이데올로기적 신념의 울타리가 이미 전제된 상태에
서 요구하는 덕목이다. 객관성에는 자료의 객관성, 관찰의 객관성, 연구
방법의 객관성, 논거나 자료의 확실성, 가치 판단 중립성, 논리 전개의 합
리성 등이 있다. 이러한 객관성이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하는 패러다임이
주어진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주어진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밑
바탕에 변함없이 ‘서양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22)
21) 소칼은 프랑스 현대 철학을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이 ‘과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허무맹랑한
거짓 논리와 지적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이 미시적으로는
옳은 점이 있으나, 거시적으로 ‘뉴턴 패러다임의 울타리’에 갇혀서 본 시각이며, 그래서 미시
적으로 옳은 점이 거시적으로까지 과장되거나 오해될 우려가 있다.
22) 그래서 서양 학문이 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과 객관적 합리성’에, 필자는 상당한 의심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논리적 일관성과 객관적 합리성’이라는 덕목 자체에 이미 ‘서양 이분법’이라
는 ‘유럽 문화권의 특수한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는 걸로 본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필자의 주
장이 얼마쯤 일리 있다면, 논리적․객관적․합리적․과학적 등과 같이 서양 학문에서 너무도
당연한 학문적 덕목으로 말하는 수많은 학술 용어들은 그 뿌리부터 이미 특정한 이데올로기
의 편파성이 깔린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학문은 유럽 문화권만의
특수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좀더 보편적인 학술 용어나 학술 개념의 모색이 무엇보다 선행되
어야 하겠다(함재봉, 1998: 193-214).
56 동양사회사상
다른 문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럽 문화권은 ‘자기 중심적 우월주
의’가 훨씬 극성스럽다.23) 그래서 다른 문화권에 대한 멸시가 강하고, 자
기 문화의 전파를 ‘강요나 침략’이 아니라 ‘계몽이나 보호’로 자부한다.
그 멸시와 자부가 너무도 당연하여 흔들림이 없다. 이런 극성은 ‘학문’이
라는 영역에서도 꼭 그렇다. 다른 문화권의 세계관은 미신․미개未開․
야만이요, 자기들의 세계관은 당연히 과학․학문․문명이다(월러슈타인,
1994). 그들의 세계관이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계층의 특수한 가치관’이
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에 모두 적용
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한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이
시대의 지배 세력이니 더욱 그렇다. 이를 의심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몽상가이거나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실핏줄까지
철저히 세뇌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연구도 논문이 아니라 이미 몽상
이요 언어 도단이다.
Ⅲ. ‘음양의 대대유행’의 동양 음양법에 대한 비판
이 연구에서 말하는 동양 음양법이라는 말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또는 한자 문화권의 ‘음양의 대대유행待對流行’에 의한 사고틀을 가
리킨다. 그러니까 음양법이라는 말은 실은 음양의 대대유행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대대유행이라는 말없이 음양이라는 낱말만 사용한다.
그러나 음양이라는 개념에 대대유행이라는 개념이 함께 하지 않으면, 본
래 뜻하고자 하는 바를 잃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음양
이라는 낱말에는 대대유행이라는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즉
음양과 대대유행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음양의 대대유행’이라고 하여 굳이 음양이라는 낱말과 대대유
23) 이슬람 문화권도 ‘자기 중심적 배타성’이 강하기는 하지만 유럽 문화권과는 냄새가 다르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57
행이라는 낱말을 함께 거론하는 경우에, ‘음양’은 음과 양이라는 추상적
인 두 개의 극개념을 강조하고, ‘대대유행’은 ‘상호 교류에 의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변화 과정’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동양 음양
법의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음양의 대대유행이라는 낱말
에서 ‘음양’이라는 낱말이 갖는 개념과 ‘대대유행’이라는 낱말이 갖는 개
념으로 나누어 서술해 보겠다.
1. 음양
음양이라는 낱말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이어서 많은 사
람들이 알고 있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개념에는 애매 모호한 점이
너무 많아 불만스럽다. 동양 문화에서는 음양이라는 낱말을 세상 만물과
만사에 적용시키지 않는 데가 없어, 그 보편적 적용이 놀랍기도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래도 되는 건지 의심스러울 때도 많다. 우선
다음과 같은 점에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 1) 음양과 건곤 또는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관한 연결 문제, 2) 음양오행설에서 음양과 오행의
관계 그리고 그 운행과 논리적 정합성, 3) 음양과 강유剛柔․동정動靜의
관계, 4) 음양과 유무有無․공색空色․생사生死의 관계.
1) 음양과 건곤 또는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관한 연결 문제
음양의 개념을 설명함에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비유하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주역周易에서 건괘와 곤괘의 설명은 우리가 직접 경
험하는 하늘과 땅 또는 그 추상적 상징으로서 하늘과 땅의 개념을 제대
로 연결짓기 힘든 점이 많다. 이는 남자와 여자에 연결하여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듯해 보이는 점도 없지 않지만, 모순되어 보이는 경
우도 있고 엉뚱해 보이는 경우도 있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다른 괘에
서도 이런 난처함은 많다. 주역 에 깊은 지혜가 담겨 있음을 매우 느낀
58 동양사회사상
다(그 누구보다도 建安 邱氏의 小註는 그 깊고 간결함이 가히 일품이다).24) 그
러나 불만도 많다. 그것도 핵심적인 의문이 전혀 풀리지 않는다. 그 괘상
卦象 포착에 대한 설명이 알 듯 모를 듯하다. 미시적으로는 이해할 법한
데, 거시적으로는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주역 , 「說卦傳」). 괘의 배열 순서
도 내 눈에는 아전인수 같은 억지로 보인다( 주역 , 「序卦傳」). 그리고 적
어도 공자의 주석인 십익十翼부터는 ‘엘리트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가 역
력하다.25) 그래서 주역 이 매우 훌륭한 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갖은 의
심을 버리지 못한다. 음양과 8괘와 64괘 자체에는 이데올로기적 편파성
이 보이지 않으나, 적어도 공자의 십익부터는 엘리트와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편파성이 강하게 배어 있다.
음양과 건곤 또는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관한 문제에서, 모
순되거나 혼란스럽고 엉뚱해 보이기도 해서, 필자를 설득하지 못하는 점
이 많다. 미시적 가르침은 배울 점이 많으나, 거시적 안목에서는 실망스
24) 필자는 주역 을 조선 시대의 명나라 판본으로 공부하였다( 周易, 1992). 이 책은 도입부 卷
首가 있고, 64괘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본문이 卷第一부터 卷第二十一까지 있고, 卷第二十二부
터 卷第二十四까지 공자의 十翼 일부로 마무리짓고 있다(十翼 가운데 「象傳」․「文言傳」은 본
문 64괘 안에 나누어 들어가 있고, 나머지 「繫辭傳」부터는 맨 뒤에 편집되어 있다). 64괘 하나
하나마다 큰 글씨로 씌어진 문왕의 괘사․주공의 효사․정자의 傳․주자의 本義가 있고, 깨
알같이 작은 글씨로 씌어진 小註가 있다. 小註는 송나라와 명나라에 이르는 주자의 제자들이
주역 의 내용에 관한 논쟁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글을 골라 실은 것이다. 제자들마다
괘사․효사․전․본의를 이해함이 조금씩 다르다. 그 세심한 논쟁과 주장을 살펴보노라면, 괘
사․효사․전․본의에서 애매한 점을 세밀하게 더듬어 공부할 수 있어 마치 흐린 영화를 보
다가 선명한 영화를 보는 듯하다. 논쟁과 주장이 얽히고 설켜 좀 지루하거나 어지러운 경우도
없지 않지만, 괘사․효사․전․본의가 말하려는 뜻이 훨씬 선명해지는 장점이 있다. 주역 을
공부함에, 小註를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기본 글투가 古文체가 아니라 송나라
의 생활 언어체로 되어 있어 그 체를 따로 공부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 小註에서 雲峰 胡氏와 雙湖 胡氏, 建安 邱氏의 글이 매우 좋았다. 특히 建安 邱氏
의 글은 괘의 전체를 꿰뚫는 예리한 통찰력과 그 통찰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는 간결함
이 감탄스럽다(그의 통찰력과 간결함이 어찌나 감동적인지, 이 자체만 가지고 말하면 필자에
게는 주자보다 建安 邱氏가 더 높아 보일 정도이다).
25) 공자의 十翼은 복희 64괘, 문왕 괘사, 주공 효사에 대한 공자의 해석서이다(十翼에서 일부는
공자의 저술이 아닌 僞作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眞僞에 관한 논쟁을 여기서 말할 틈은 없지
만, 필자는 「說卦傳」․「序卦傳」․「雜卦傳」의 내용을 매우 불신하기 때문에 공자의 저술이 아
니라고 생각한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59
럽다. 문왕文王과 주공周公 그리고 공자와 주자, 정자 및 그 제자들은 왜
우리를 이리 곤혹스럽게 하는가! 그들의 현학적 권위를 역겨워해야 하는
지, 필자의 성급함과 어리석음을 탓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2) 음양오행설에서 음양과 오행의 관계 그리고 그 운행과 논리적 정합성
과문한 탓이겠으나, 음양과 오행에 대한 설득력 있고 짜임새 있는 설
명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26)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 자체의 추상적 이미
지가 뜻하는 추상적 개념이 매우 애매하다. 그 애매함을 접어두고, 그 개
념을 대충 설명 그대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세상의 수많은 만사
와 만물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5개의 추상적 이미지 안에 집어넣을 수 있
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 추상적 개념이 아리송하니까 그 의심이 더욱 심
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넘어가서, 화火와 목木을 양陽으로, 수
水와 금金을 음陰으로 연결하는 것 같기도 한데, 화와 목을 양에서 어떻
게 구분하고 수와 금을 음에서 어떻게 구분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
는다.27) 게다가 수화목금水火木金이 토土와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가 애
매하기도 하고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토의 개념이 그리 분명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 운행하는 위치가 억지스러워 보인다. 오행 운행의 상생
相生과 상극相剋도 억지로 이해하자면 못할 바도 없지만, 수화목금토의
기본 개념과 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상생과 상극의
과정이 가히 의심스럽다(김충열, 1988: 260-261). 이해하기를 억지로 강요하
26) 한의학 책이나 철학 책에 음양오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으나, 필자는 그 이야기들을 아직
그리 미더워하지 못한다. 그저 거기에 쓰인 대로 보아둘 따름이다. 음양오행설 연구 (김홍경,
1993)라는 책이 음양오행설에 관한 다양한 접근을 소개하고 있다. 그 책에 실린 논문들에서도
필자는 설득력 있는 학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27) 水火木金을 ‘태양․태음․소양․소음’이라는 四象에 짝지어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본 바
탕 개념에 비슷한 사고틀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걸로 보인다.
비유를 들건대, 사람을 성별로 말하면 남자․여자이고 몸무게로 말하면 갈비씨와 뚱보가 있는
데, 남자를 갈비씨로, 여자를 뚱보로 짝지어 말하는 건 잘못이다. 水火木金을 四象에 짝지어
이해하는 것은 이런 잘못이 있어 보인다.
60 동양사회사상
는 것 같기도 해서 신뢰하기 힘들다. 참 난감하다. 답답하고 난감한 상태
에서 설명은 주저 없이 그 다음으로 일사천리를 달려간다. 그 얼렁뚱땅
내달려 가는 모습이 미신이라고 욕먹어 싸다. 기초 개념과 기본 원리에
서 도무지 논리적 정합성을 찾기가 힘들다. 나중에 얼마나 족집게 같은
신통력이나 효험을 보여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밀한 학문적 천착을 하
고 싶은 사람에게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필자가 서양 문화의 색안경을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우주와 생명의 신묘함을 어리석은 인간이 감
당하지 못해서일까?
3) 음양과 강유․동정의 관계
음양과 강유剛柔․동정動靜은 비슷비슷한 이미지로 사용된다. 이 개념
들의 관계를 뚜렷하게 설명해 주는 글을 만나지 못하다가, 겨우 중국 송
宋나라의 소강절邵康節이 “동정動靜에 기대어 음양은 동動의 현상으로 강
유는 정靜의 현상”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주역 , 「易本義圖」; 강
학위 외, 1996: 405-417). 필자도 음양과 강유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만, “음양이 섞여 있기에 만물이 존재하며,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음
양이 섞여 있어야 한다. 강유가 작동하기에 만물이 변화하며, 만물이 변
화하기 위해서는 강유가 작동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음양은 정靜의
현상이고 강유는 동動의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아직 동양 사상
에서 동정動靜의 개념이 불분명하니, 소강절과 필자 어느 쪽이 옳은지 가
늠하기 어렵다. 소강절의 설명도 너무 짧고 자상하지 않아 분명하지가
않다. 왜 이렇게 불분명한지 알 수 없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제대로
알고 있어서 이 개념들을 당연하게 여겨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었던 걸
까? 그게 아니라 동양 학문이 기초 개념의 불분명함에 익숙해진 탓이라
고 생각한다. 서로 대충 어설프게 알고, 그 상태에서 이리저리 끌어다 붙
인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이게 너무 답답하다. 서양 학문에 익숙한 탓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61
일까? 아니다. 동양의 학자들도 학문의 천착을 세심하고 깊게 파고 들어
가기도 하지만, 추상적 개념 설정에 이런 맹점이 있다고 본다.
4) 음양과 유무․공색․생사의 관계
음양과 유무有無․음양과 공색空色․음양과 생사生死가 서로 얼마쯤
연결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지 않
다. 이 사람 저 사람 말만 무성하고 속시원한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본 적
이 없다. 필자는 이게 모두 음양이라는 개념의 복합성으로 인한 애매 모
호함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음양이라는 개념의 복합성이 유무․공색․
생사와 제대로 연결지어 설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28)
음양이라는 개념이 이런 난감함을 갖고 있음에도 널리 애용되는 것은,
‘대대유행待對流行’의 원리를 설명하는 추상적 개념으로서 쓸모가 각별하
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대유행의 원리를 설명하려면, 우선 반대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상호 교류 작용을 하는 개념이 필요하다. 여기에 음
양이라는 낱말은 참 적절하다.
2. 대대유행
대대待對는 반대되는 성격으로 마주 ‘대對’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배척
하지 않고 기다리고 맞이하며 ‘대待’하는 모습을 뜻한다. 그러므로 ‘대대’
는 반대되는 무엇이 서로 스며들어 혼입되어 섞여드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니까 서양 이분법에서 갈등하고 투쟁하는 ‘적대적 대립’과는 다르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맞서는 대립이 아니라, 서로 기다리며 맞이하는 대대
28) 도올 김용옥 씨가 2000년 겨울 교육방송에서 ‘노자와 21세기’를 강의하면서, 有와 無 그리고
有爲와 無爲를 설명하는 모습이 여간 답답하지 않았다. 굳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과잉
된 해석이 있을 뿐 아니라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하였다. 개념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증
거이다. 필자는 이 개념을 ‘개별성과 공공성’으로 접근한다. 이런 접근이 과연 옳은지, 많은 사
람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스스로는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62 동양사회사상
가 이루어져야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고, 상호 교류가 이루어져야 서로
섞이고 흐르는 이른바 ‘유행流行’이 이루어진다.
유행은 대대하는 그 자체에 이미 포함되어 있어 대대함에 저절로 나타
나는 당연한 것이겠다. 그렇다면 ‘대대유행’에서 ‘유행’이라는 말은 없어
도 되는 셈이다. 그런데 굳이 유행이라는 낱말을 둔 것은, 대대하면 저절
로 이루어지는 상호 교류를 말함에 끊임없이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
고자 함이다.29) 유행은 음양이 대대하여 상호 교류로 혼입해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그 다양한 교류 양태(=음양의 혼합 스펙트럼)의 흐름을 파노라
마처럼 펼쳐내는 모습을 뜻한다.30) 그러니 ‘유행’이라는 낱말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펙트럼의 변화 과정’의 드러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아 대대라는 낱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대’라는 낱말과 함께
‘유행’이라는 낱말이 어우러짐으로써 ‘대대유행’은 ‘상호 교류에 의한 다
양한 스펙트럼의 변화 과정’을 뜻하게 된다.
대대유행은 ‘변화’를 말하고 있다. 변화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대대유행이라는 개념에서 공간과 시간은 서
양에서 말하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과는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대대는
공간적 개념으로, 유행은 시간적 개념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필자는 대대
유행을 말하면서, 대대와 유행으로 나누었다. 그건 설명의 편의로 그리한
것이고, 사실 대대와 유행은 따로 떼어 개념을 포착하면 안 된다. 대대와
유행은 완전히 한 덩어리로 뭉쳐 한 가지 개념으로 포착해야 한다. 그것
은 대대유행이라는 개념이 서양 이분법이 아닌 동양 음양법이라는 사고
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의 편의로 공간과 시간을 나누어 사색하
29) “끊임없이 그치지 않는다”는 개념은 그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동양적 사고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미지를 보여 주는 개념이다. 그런데 유행이라는 개념을 대대라는 개념에 더부살이하
듯이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래선 안 된다. 대대와 유행이라는 개념은 함께 있
음으로써 서로 보완하여 이루어지는 하나의 개념이다. 곧 이어서 서양의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을 빌려 다시 설명하겠다.
30) 두 극개념이 혼입하여 섞이는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파노라마는 ‘무지개’를 상상해 보면 된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63
는 장점을 취할지언정 굳이 대대를 공간적 개념으로, 유행을 시간적 개
념으로 나누어 짝지어 고정시켜 설명하는 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까 동양에서는 논의나 이해의 편의로 공간적 개념과 시간적 개념을 나누
어 말하기는 하지만,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을 이슈화하여 굳이 나누어
논의하지도 않았으며, 실제 현상을 이해함에 공간과 시간을 나누어 개념
을 포착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이 나누어진 상태로 사
색해 오다가31) 마침내 뉴턴에 이르러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개
념으로 등장하였다.32)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자연
과학에서는 물론,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 또는 근대 사상가들도
그대로 고수하였다.33) 그러다 아인슈타인이 시공의 4차원을 주장하여 공
31) 그 대표적인 예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에 관한 궤변으로 유명한‘ 제논의 역설’이
다.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이 있다(울프, 1992: 21-39). 그러나 어느 쪽도 필자에겐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필자는 이 문제로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제논의 역설 자체만 보
노라면 그 나름대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경험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리
스토텔레스의 반론도 그리 설득력이 없다는 게 더욱 고민스러웠다. 이 난처한 문제를 그대로
바라만 보다가, 최근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제논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이든 공간과 시간
을 나누어 그 개념을 정태적 변화의 테두리 안에서 논쟁한다.” 그래서 이 문제 역시 서양 이분
법에서 비롯한 서양적 사고틀의 ‘원초적 한계’라고 생각한다. 동양의 대대유행이라는 사고틀
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나누어 보지 않기 때문에, 제논의 역설 같은 게 나올 수도 없거니와 아
리스토텔레스의 반론 같은 것도 필요 없게 된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사색의 편의로 추상적
으로는 나누어 보더라도, 실제 구체적 현실에서는 나누어 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추상
적 사색의 편의와 구체적 현실의 적용에 관한 문제는 이처럼 간단한 몇 줄의 글로 그칠 수 없
다. 이 논문의 뒷부분에서 ‘태극 이분법’을 설명할 때 좀더 논의하게 될 것이다).
32) 뉴턴의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개념을, 여기서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분리하여 보았
다는 측면만 거론하기로 한다.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절대’라는 수식어가 무
슨 뜻을 갖고 있으며,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구체적으로 어떤 개념인지 설명하는 건 접어
두기로 하겠다.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개념이 갖는 사회 과학적 의미는 필자의 시장
주의, 그 신화와 환상 제 2장과 3장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33) 이 문제만을 초점으로 하여 논의한다고 하더라도 몇 권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관한 문제는 철학적 또는 사상적 접근에 앞서 자연 과학적 접근이 우선 필요하다고 본
다. 필자가 만난 가장 쉬운 자연 과학 책은 모리스의 시간의 화살 (소학사, 1990)이다. 공간과
시간에 관한 문제는 근대 자연 과학의 밑바탕에 깔린 본질 문제이기 때문에 한두 권의 책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자연 과학적 접근으로는 메이슨의 과학의 역사 (까치, 1987)와
피터 코브니의 시간의 화살 (범양사출판부, 1994)이 매우 좋았고, 사회 과학적 접근으로는 本
多修郞의 科學思想史槪說(朝倉書店, 1976)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64 동양사회사상
간과 시간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등장하였다.34)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시공 4차원 개념이 비록 공간과 시간 개념을 따
로 나누지 않고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을지라도, 필자는 동
양의 대대유행이라는 사고틀에서 공간과 시간을 함께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필자는 아인슈타인 이론이 뉴턴 이론과 전혀 다른게 아
니라 ‘확실성의 세계’라는 뉴턴의 뿌리를 그대로 두고 줄기에 ‘상대성 이
론’에 의한 새로운 개념을 접목시킨 것으로 본다.35) 뉴턴 이론과 아인슈
타인 이론의 전제가 되는 ‘확실성의 세계’는 서양 이분법의 사고틀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36) 그러니 아인슈타인이 비록 공간과 시간 개념을 함께
합쳐 시공 4차원을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분리하
는 뉴턴의 뿌리를 벗어난 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공간
과 시간을 일단 분리한 상태로 개념을 포착한 다음, 그것을 다시 함께 아
우르는 4차원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37) 아인슈타인의 시공 4차원
34) 아인슈타인의 시공 4차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 현대 자연 과학에서 공간과 시간 개념이
어떻게 진행되었지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한다(코브니 외, 1994; 가쿠, 1997).
35) A이론과 B이론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논의한다는 것은, 그걸 비교하려는 초점을 어
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있다. 자연 과학을 거시적 틀에서 뉴턴 이론․아인슈타인
이론․양자역학 이론․복잡성 이론 등을 비교해 보면, 뉴턴 이론과 아인슈타인 이론은 ‘확실
성’을 강조하는 이론이고, 양자역학 이론과 복잡성 이론은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이론이라고
본다(‘神의 주사위 놀이’로 비유하여 벌이는 유명한 논쟁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
인 이론이 뉴턴 이론보다 한 걸음 나아간 이론이기는 하지만, 같은 뿌리를 가진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을 소개하는 책은 수도 없이 많다. 필자는 프레드 A. 울프의 과학은 지금 물
질에서 정신으로 가고 있다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36) 이 문제를 논의하려면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전제로 하고 있는 ‘확실성의 세계’가 무얼 뜻하는
지 설명해야 하고, 양자역학과 복잡성 과학이 탐구하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설명해야 한다.
이에 관한 논의는 21세기에 도래할 새로운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한 문제이다. 이건 여
기서 논의할 수 없는 엄청난 거대 담론이다(뉴턴 패러다임의 확실성의 세계에 관한 설명은 필
자의 시장주의, 그 신화와 환상에서 자세히 하고 있다).
37) 4차원이란 공간의 입체적 3차원에다 시간이라는 또 하나의 추상적 개념축을 설정한 것이다(피
터 코브니 외, 1991: 23-45). 공간의 입체적 3차원도 이미 1차 공간․2차 공간․3차 공간이라는
‘개념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필자는 1차 공간 개념과 2차 공간 개념은 개념의 분리적 접
근을 위해 이해와 논의의 편의로 추상적으로만 상정할 뿐 실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개념의 분리적 접근은 서양 이분법의 ‘숙명적 사고틀’이다. 그러므로 서양 이분법적
사고틀에서 출발하는 모든 사색은 분리적 접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양자역학에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65
이 비록 공간과 시간을 함께 합친 개념이라 할지라도 서양 이분법의 사
고틀이 그 바탕에 깔려 있으므로 동양 음양법의 대대음양이 공간과 시간
을 함께 더불어 보듬고 있는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서양 이분
법을 터전으로 하는 변화의 개념과 동양 음양법을 터전으로 하는 변화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38)
서양 이분법에서 변화는 ‘강력한 필연에 의한 인과 관계’에 따른 변화
인 반면, 동양 음양법에서 변화는 음과 양이 서로 맞이하는 상호 교류 관
계에 의한 그 스펙트럼의 변화이다. 그 스펙트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흥망성쇠해 가는 파노라마적 변화이다. 그 파노라마는 마치 하루가 그
밝음과 어둠의 스펙트럼으로 파노라마를 펼치듯이, 1년은 차고 따뜻함과
습하고 건조함이 다양하게 섞여든 스펙트럼으로 파노라마를 펼치듯이
나타난다. 그래서 원인에 결과가 1:1의 강력한 필연으로 대응하는 인과
관계가 아니라 ‘그물망 구조의 상호 교류’요, 그에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
는 ‘스펙트럼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이다. 변화의 개념이 ‘주어진 변화’가
아니오, 주어진 변화가 아니니 “그 주어진 변화를 만들어낸 주체”라는 개
념이 필요 없게 된다. 음과 양이 어떤 그물망 구조적 짜임새를 갖고 그
자체에서 자발적으로 상호 교류하는 리일理一로, 기氣가 취산聚散하면서
만수萬殊하여 세상 만물과 만사가 세월 따라 흥망성쇠하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간다. 그 자체가 자발적으로 저절로 그렇게 돌고 돈다. 이것이 음
양이 대대유행하여 리일만수理一氣殊하는 것이다.39)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은 이렇게 너무나 다르다. 서양 이분법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공간에서 3차원 이상의 공간 그리고 시간에서 1차원 이상의 시간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의 차원은 밀집화(compactified)하여 소용돌
이치듯 복잡하게 말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한다(미치오 가쿠, 1997).
38) 이 논문의 각주 17)을 참조하기 바란다.
39) 그러므로 동양 음양법으로 세상을 보면 서양에서처럼 神이라는 개념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神이라는 개념 없이도 세상 만사와 만물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神
이 예정한 役事’, 학문적으로 ‘강력한 필연적 인과 관계’라는 개념을 요구하지 않는다.
66 동양사회사상
동양 음양법 그 자체가 서로 다를지언정 궁극적으로는 우열 선악 시비를
말할 수 없다. ‘서로 다른 하나의 사고틀’일 따름이다. 선악의 대립에 의
한 서양 이분법이 한쪽으로 ‘독선적 맹신’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쪽으로
‘엄격한 순결성’을 지니고 있듯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변화에 의한 동양
음양법은 한쪽으로 ‘상대적 다양성’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쪽으로 ‘애매
한 무분별’을 지니고 있다. 서양 이분법을 논의함에 나쁜 측면을 강조하
여 설명하였으니, 동양 음양법에서도 나쁜 측면을 강조하여 설명해 보자.
동양 음양법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론의 기초 개념에서 이미 애매하
게 출발하고 있으며, 현실에서 우열 시비 선악을 가름함에도 경우에 따
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 가
듯 하여 투철하지 못하다. 이론의 기초 개념이 애매하면 나머지도 모두
애매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우열 시비 선악이 경우에 따라 다른 경우
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어느 곳에서나 경우에 따라 다름을 내세우
다가는 아무것도 우열 시비 선악을 가름할 수 없다. 대충은 어떻게 이해
되지만 파고들자면 여간 답답하지가 않다.
음양이라는 개념도 애매 모호한 데다, 그 사고틀인 대대유행도 애매한
무분별을 가질 위험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음양의 대대유행’이라는 개
념에 뿌리를 둔 동양학문은 그럴 듯하다가도 뜬구름 잡듯이 애매 모호해
지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양학문은 도대체 가닥을 잡을 수 없
는 경우가 많다. 같은 낱말이 같은 책에서, 이렇게도 사용되고 저렇게도
사용된다. 대학大學말고는 일목요연한 짜임새로 정리되는 게 없다.
맹자 는 치열한 논변으로 팽팽한 긴장이 있지만, 전체를 일관성 있게
꿰뚫어내는 엄격한 짜임새는 잡아내기 어렵다. 누군가 공자 사상은 이렇
다 노자 사상은 저렇다고 해도 그 일부분만 말한 것 같고, 분명하고 짜임
새 있게 정리된 책을 만나지 못했다. 삶에 지혜가 스며 있는 것 같으면서
도 딱 부러지게 정리하기 어려워 페이지 하나하나 순서대로 해석하면서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67
그때 그 구절만 정신들여 음미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필자는 이게
모두 동양 음양법의 애매 모호함에서 비롯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동양학문은 서양 학문에 비해 논리적으로 엄격한 일관성을 찾
아 정리하기 어렵다. 학문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논점의 차이가 어
떻게 다른 건지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 내는 게 훨씬 어렵다. 그래서 과거
등용 시험에서는 유가 경전을 공부하고, 관리 시절에는 법가나 경세적
통치 기술을 사용하며, 향리로 낙향하여 은둔할 때는 노장적 분위기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상류 계층의 유가풍과 서민 계층의 도교풍이 큰 갈
등 없이 공존하고, 왕권 다툼이나 당쟁 다툼은 있어도 종교적 갈등으로
피 흘리는 전쟁은 없다. 그래서 논어 글귀, 도덕경 글귀, 장자 글
귀, 불경 글귀, 손자병법 글귀, 삼국지 의 계략, 사주 팔자, 풍수 택지,
기문둔갑의 주술 등이 생활 속에 서로 섞여 널려 있는지도 모르겠다.40)
이러한 동양학문의 애매 모호함은 오늘날처럼 동양학이 쇠퇴한 상황
에서는 ‘사이비 학자’나 ‘신비주의적 돌팔이’가 기승을 부리게 하는 터전
을 마련해 준다. 동양학문의 격조나 품격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더라도,
혹세무민하는 신비주의가 학문이라는 이름을 내걸더라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어 누가 사이비이고 혹세무민인지 스스로도 모르거니와 남
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서로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누구나 대충 한문
글귀 좀 외우면서 한복 입고 수염 기르고 머리 길거나 깎고 고무신 하나
동대문 시장에서 사 신고, 눈감고 폼잡으면 곧바로 대가처럼 흉내를 낼
수 있다. 포인트는 ‘한문 몇 구절과 알다가도 모를 소리 몇 마디’이다. 오
늘날 동양학문은 전반적으로 품격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품격
을 몇 줄의 글귀 해석이나 얼마쯤의 박식함으로 가늠할 수 없다. 동양학
40) 주자학은 자기 중심적 가치관에 대한 집념이 강한 편이어서 다른 동양학문에 비해是 非曲直을
엄하게 따졌다. 조선 시대에는 주자학을 국학으로 삼았기 때문에斯 文亂賊에 대한 시비나 불
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였다. 그러나 서양처럼 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동양학문에서 주
자학은 유별난 엄격주의를 갖고 있다. 그러니 주자학이 보이는 학문적 분위기로 동양 문화의
분위기를 말하는 건 조금 문제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자학이 매우 중요하지만 말이다.
68 동양사회사상
문 자체가 갖는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다, 천형天刑처럼 벗어나기 힘든 서
양 학문의 색안경, 게다가 오늘날 동양학문의 품질 저하가, 한꺼번에 수
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학문의 이러한 애매 모호함은 동양 음양법의 ‘상대적 다양성’이라
는 좋은 측면에 대응하는 나쁜 측면이다. 상대적 다양성은 ‘수평적 평등
성’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수많은 스펙트럼의 어느 하나하나가 수직
적 서열로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수평적으로 평등하여 나란히 동등하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 사회가 동양 음양법을 뿌리로 하고 있는 만큼
상대적 다양성으로 서양 사회보다는 서열적 수직성에 의한 억압과 차별
이 두드러지게 적어야 한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생활을 그리 긴 세월에
걸쳐 비교해 본다는 게 이미 불가능한 일이기에, 무어라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동양 사회가 매우 남성 중심적이어서 남녀 차별
이 극심하였고 벼슬아치 관료 중심으로 사농공상의 서열이 매우 엄격했
다는 건 분명하다.41)
41) “상류층은 하류층을 慈愛와 德으로 베풀고 행실에 모범을 보이며, 하류층은 상류층의 자애와
덕을 흠모하고 공경하여 스스로 따른다”를 전제로 할 때, 수직적 서열에 의한 다스림을 억압
과 차별의 구렁텅이라고 할 수는 없다. 禮記의 가르침이 그렇다. 儒敎가 禮를 사회 제도의
기본 틀로 삼았으니, 유교 사회의 수직적 서열은 억압과 차별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자애와
덕 그리고 공경과 흠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의미의 평등’이라고 할 수도 있다(우리
가 흔히 말하는 수평적 평등이 ‘量적 평등’이라면, 이러한 평등은 ‘質적 평등’이라고 할 수 있
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 규정이나 용어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른
기회에 하겠다). 유교 사회의 禮道 이념을 근대 서양의 法治 이념이라는 색안경으로 보아, 유
교 사회가 수직적 서열에 의한 억압과 차별의 구렁텅이였다고 무턱대고 매도한다고 말할 수
도 있다. 예도 이념이라는 ‘동양의 색안경’으로, 서양의 법치 사회에 대해 “一法一弊하여 쉴새
없이 소란스럽고 인정 없이 냉혹하다”고 하는 주장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 예도 이념도 법치
이념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예도 이념의 나쁜 면과 법치 이념
의 좋은 면이 편파적이고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동양의 예도 이념과 서양의 법치 이념에
관한 ‘관점의 밸런스’가 불공평하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 필요한 것은 관점의 밸런스를 공평
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다음 구체적인 어느 시대 어느 일에, 禮治와 法治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나타났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에
서 오는 시각은 매우 상대적이어서, 굳이 어느 쪽을 옳다고 가늠하기가 너무 어렵다. 결국은
어떤 관점에서 무엇을 강조해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관점을 선택하는 게 옳
은 지에 관한 문제는 접어두도록 한다. 지금 이 논문에서는 일부러 동양 禮治의 나쁜 면만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禮記, 1997).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69
이는 동양 음양법이라는 수평적 사색틀이 실제 현실에서 보여 주는 이
율 배반이다. 그 동안의 동양학문이 생생한 현실과 만나면서 깊은 위선
이나 배반이 있다는 것이다. 서경書經의 글귀가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
미 요순堯舜 시절부터 그런 배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산천초목의 자
연 현상을 관찰하고 사색함에는 동양 음양법을 사용하고, 현실에서 인간
사회의 제도를 세우고 꾸려감에는 서열과 차별이 극심한 것은 이율 배반
이라는 것이다.42)
학문적인 사색에서 ‘상대적 다양성’을 살피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현
실에 적용함에는 현실의 주어진 상황에 따라 우열․시비․선악의 차이
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우열․시비․선악의 파
노라마에 일방적으로 남성과 벼슬아치의 우월과 권위만을 전제로 한 고
정 관념을 세뇌하는 것은 잘못이다. 필자가 보기에 노장 사상을 제외하
고는 한문으로 된 모든 책이 남성과 벼슬아치의 우월과 권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고정 관념의 세뇌는 현실 적용에서만 이루지는 게 아니
라 추상적 사색에도 영향을 미쳐 잘못된 사색을 이끌어낸다. 동양 음양
법의 뿌리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주역 에서, 적어도 공자의 십익부터
는 남성과 벼슬아치의 우월과 권위를 매우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은 이러한 고정 관념이 가장 강렬하다. 주자학의 강렬함은
다른 동양 사상에 비해 훨씬 심하다. 거기서 고고한 선비의 기개와 조광
조의 도학 정치가 나왔으며, 우리의 어린 시절을 점잖은 애늙은이로 만
들었고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모진 설움을 낳았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동양 문화에 관심이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것은, 이러한 동양 문화의 재생이 동아시아 문화권
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60년대 월
42) 때때로 미륵 사상이나 반란 세력이 내세우는 깃발에 萬民平等 사상이 있었다고 하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남녀 평등이나 신분 평등을 말하는 것까지는 아니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짜임
새가 없어 혹세무민이나 선동을 위한 일시적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70 동양사회사상
남전 반대 운동과 민권 운동에서 비롯한 히피 문화와 뉴에이지 운동의
물결에 닿아 있다. 그 밑바닥에는 제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핵무기와
환경 파괴 등에서 비롯한, 서양 기계 문명의 나쁜 그림자에 대한 서양 스
스로의 반성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진보적 인류학에서
비롯한 다른 문화권에의 애정 어린 관심,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화에 대
한 극심한 불신이 마침내 기존 서양 문화의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자는
‘후기 구조주의’로 이어지는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00년, 200년
전에 서양 문화에 뒤통수를 맞아 기절한 동아시아 문화권이, 각고의 노
력 끝에 스스로 회생하는 기적을 보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생
적 재생은 시류의 편승에 지나지 않기에, 자기 반성이 철저하지 못하고
자력 갱생의 저력을 갖지 못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Ⅳ. 새로운 사회 과학을 위한 ‘태극 이분법’
서양 이분법의 ‘독선적 맹신’보다는 ‘엄격한 순결성’에 의한 ‘확실한
명쾌함’을 살리면서, 동양 음양법의 ‘애매한 무분별’보다는 ‘상대적 다양
성’에 의한 ‘넉넉한 포용력’도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난 문제 의식으로, ‘태
극 이분법’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태극 이분법은 이른바 ‘새로운
사회 과학을 위하여’라는 작업의 가장 기초되는 부분이다. 그 뼈대만 골
라 ‘양극법兩極法과 양면법兩面法’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보았다.
1. 양극법
양극법兩極法은 추상적인 두 개의 극개념을 두드러지게 내세운다는 점
에서는 서양 이분법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속은 다르다. 양극법이 현
실의 수천 수만 가지 현상을 두 개의 극개념으로 추상화하기는 하지만,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71
그 극개념은 서양 이분법에서처럼 적대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적대적
대립이 아니니, 팽팽하게 긴장하며 서로 노려보는 상태가 아니다. 양극법
에서 설정한 추상적 두 극개념은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에 존재하는 것은 두 극개념 사이에서 (두 극개념이 서로 다양한 비율로
혼입하여 섞여 쭉 펼쳐진) 스펙트럼의 파노라마이다.
비유를 들어 말해 보겠다. 우리는 하루를 낮과 밤으로 말한다. ‘낮과
밤’이라는 두 낱말은 우리가 편의상 만들어 낸 개념적 이해이다. 하루를
둘이나 셋 그리고 수십, 수백, 수천, 수만으로 쪼갤 수 있지만, 이는 편의
상 그렇게 서로 약속한 개념일 따름이다. 실은 쪼갤 수 없다. 밝고 어두
움이 섞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펙트럼의 파노라마이다.43) 단지 편의상
둘로 낮과 밤, 넷으로 아침․낮․저녁․밤, 12로 자․축․인․묘……, 24
로 1시․2시․3시…… 등으로 나누어 말할 따름이다. 실제로 우리가 경
험하는 하루에 100% 낮이나 100% 밤인 경우는 없다. 아무리 밝은 대낮
에도 어둠의 씨앗이 눈곱만큼 숨어 있으며, 아무리 어두운 한밤에도 밝
음의 씨앗이 눈곱만큼 숨어 있다. 그 씨앗이 점점 자라 낮이 밤으로 저물
어 가고 밤이 낮으로 밝아 온다. 오고 가는 변화에 100% 치우침은 없다.
그러니 100% 치우침을 뜻하는 극개념은 현실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추상적으로 상정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추상적 상정은 의미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
이 이어지는 스펙트럼의 파노라마를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다
담아내 사색할 수 없기 때문에다.44) 단지 몇 가지로 추려 정리할 따름이
43)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뚝 끊어져 따로 떨어져
있는 건 없다. 물이나 바람의 흐름도 그렇고 무지개도 그렇고 세월의 흐름도 그렇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겉으로는 끊어져 보여도, 깊이 따져 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그렇
다. 무언가 우리에게 마치 뚝 끊어져 따로 떨어져 보이는 건 우리의 착각 또는 관점의 차이이
거나 편의상 굳어진 고정 관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펙트럼의 파노라
마이다. 어떤 부분을 굳이 강조해서 보니, 그 氣의 聚散 정도가 달리 보일 따름이다.
44) 우리 인간이 이미 그렇게 생겨 먹었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
다. 세상의 어느 것도 氣의 聚散으로 펼쳐지는 스펙트럼의 파노라마를 빠짐없이 포착하지는
72 동양사회사상
다. 그 개수가 많으면 현실에 가깝지만 사색이 어지러워지고, 그 개수가
적으면 사색이 간편하지만 현실에서 멀어진다.45) 그러나 추상화 작업에
서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단연 ‘두 개의 극개념’이다.46)
못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어느 작은 한 부분이므로 온 세상의 극소한 한 부분에서氣 가
聚散하는 흐름을 반영하며 그 자신을 유지한다. 극소한 한 부분에서 부분적인 기의 취산을 반
영하면서 저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주변 환경을 부분적으로 선택하여 교류하고 관계하며 살
아간다(예를 들어 텔레비전에 빨려들어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뜨거운 것
을 만지다 깜짝 놀라면, 뜨거운 그 자체말고는 아무것도 포착하지 못한다. 인간만 그런 게 아
니라 세상 만물이 모두 그렇다). 만약 이렇게 부분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미 부분적 개체
가 아니다. 세상 모든 스펙트럼의 파노라마를 빠짐없이 보듬는다는 것은 우주 자체이다. 세상
의 모든 생명체가 부분적 개체인 한,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주변 환경을 부분적으로 선택하여
교류하고 관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우주의 원리를 꿰뚫고 싶은 욕심으로 이런
저런 추상적 틀거리를 만들어 보기는 하지만, 만물의 극미한 개별 존재로서 인간의 몸뚱이는
‘우주 전체의 호흡’을 실천해 낼 수 없다.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필자의 견해로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열반’을 ‘우주 전체를 호흡하는 경지’라고 보기 때문에, 필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열반이 인간이든 다른 생명체든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잘못되고 허황
된 욕심’으로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氣로 존재할 따름이요, 그 존재는 氣가 극미한 부분
으로 구석구석 萬殊하여 聚散하면서 존재하고, 그 개별 존재가 취산하며 흐르는 흐름을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理는 그러한 기의 흐름을 총괄적으로 통찰하여 포착된 원리이다. 그러니
理는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따름이지,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게다가 그 理라
는 게 추상적 틀거리를 제대로 잡은 건지 또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가히 의심스
럽다. 그 理라는 게 어렴풋한 이미지로 구체적 내용 없이 비유적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오묘함 때문이든 아니든 어렴풋한 이미지로
구체적인 내용 없이 비유적으로 이야기해 우리를 헷갈리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우리
는 단지 그 궁극적 이치를 좀더 가깝게 이해해서 그 기의 흐름을 가능한 한 잘 파악해 사리
분별을 원만히 해보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인간의 이런 능력으로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우
월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는 또 다른 논의가 있어야겠다.
45) 일에 따라, 목적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그 개수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그 조절이 잘
못되면 괜히 번잡하거나 답답해진다.
46) 이 추상적인 두 개의 극개념 작업이 거창한 사상이나 철학에만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미 생활 속에서 그런 작업은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높다 낮다, 뜨겁다 차다, 무겁다 가볍다,
단단하다 물렁하다, 두텁다 얇다, 척척하다 메마르다, 날카롭다 뭉뚝하다, 빠르다 느리다, 착하
다 악하다, 밝다 어둡다, 예쁘다 밉다, 건강하다 병들다, 배부르다 배고프다, 편안하다 불편하
다…… 수백, 수천, 수만 가지로 많다. 우리는 이미 생활 속에서 추상적인 극개념을 설정하고
그 극개념에 기대어 주어진 상황을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고 있다. 이런 걸 다시 또 큰 단위로
묶어 다시 갈래를 짓는다. 이렇게 계속해서 단계 단계 위로 ‘두 개의 극개념’에 의한 추상화
작업을 한다. ‘두 개의 극개념’에 의한 추상화 작업은 이렇게 우리 삶에 기본적이고 필수적이
다(동양에서는 이를 ‘陰과 陽’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서양에서는 이런
최종적 마무리 개념이 없다. 필자는 ‘음양’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내용에 의아스럽고 의심스
러운 점이 많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매우 의미 있고 필요한 개념이라고 보기에
그 유용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73
그런데 이 ‘두 개의 극개념’이 서양 이분법에서는 너무 극렬하여 현실
의 선악의 대립에 말려들어 편파적 독선으로 기울어져 버렸고, 동양 음
양법에서는 애매 모호하여 엄격한 기준을 잃고 어영부영 흐물대며 분명
한 명쾌함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필자는 양극법을 만들어 두 극개념의
추상적 필요성을 극명하게 강조하면서도 서양 이분법처럼 현실의 선악
의 대립에 말려들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파노라마를 쉽게 접근하기
위한 ‘사색의 편의적 도구’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두 극개념은 편
의상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닌 것
이다(서양 이분법은 손가락에 매달려 달을 보지 못하고, 동양 음양법은 달에 팔
려 손가락의 역할을 소홀히 한 것이다).
그리고 양극법은 두 극개념을 두드러지게 드러냄에 그치지 않는다. 두
극개념이 서로 혼입하여 나타나는 그 다양한 스펙트럼의 파노라마를 항
상 함께 배려한다. 그래야 두 극개념의 설정으로 서양 이분법의 ‘엄격한
순결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려로 동양 음양법의 ‘상대적
다양성’을 함께 보듬을 수 있다.
이 두 극개념을 일단 ‘X와 Y’라고 하고, 그 X와 Y가 서로 섞여드는 농
담濃淡을 나타내는 ‘매우 진함과 덜 진함’, ‘매우 연함과 덜 연함’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접목시켜 짝을 지우면 다음과 같은 4가지 추상적 개념이
나온다. 1) 매우 진한 X+매우 연한 Y, 2) 덜 진한 X+덜 연한 Y, 3) 매우
진한 Y+매우 연한 X, 4) 덜 진한 Y+덜 연한 X.47) 이것이 조금 번거로우
므로 ‘매우 진한’을 ‘다농多濃’으로, ‘덜 진한’을 ‘소농少濃’으로 하고 중심
개념만 드러내, 다농X․소농X․다농Y․소농Y로 줄여서 말하기로 하겠
다. 다농X․소농X․다농Y․소농Y라는 4개의 추상적 개념이 만들어진
다.48) 두 극개념이 혼입하여 섞이는 정도인 농담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
47) X와 Y가 섞여 100을 만든다고 하여 ‘X:Y’의 섞이는 농담으로 예를 들어 말하면, 1) 90:10,
2) 70:30, 3) 10:90, 4) 30:70이라는 것이다.
48) 만약 두 극개념을 음과 양이라 하고 그 각각에 濃淡을 주면, 이것이 ‘태양․소양․태음․소음’
74 동양사회사상
이는 파노라마는 굳이 개수를 나누어 말하자면 수십일 수도, 수백, 수천,
수만일 수도 있다. 그 수많음을 ‘다농X․소농X․다농Y․소농Y’로 극히
단순화시켰다. 현실적으로 수백, 수천, 수만으로 쭉 펼쳐 보일 수 없는 노
릇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생한 현실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 2배수를
몇 번쯤 겹쳐 그 농담濃淡의 개수를 늘릴 수는 있다. 그러니까 X와 Y에
농담을 주어 2×2=4가 되었고, 이 4가지 안에서 또 다시 농담을 살피면
2×2×2=8이 되고, 다시 이런 방식을 계속 반복하면 16, 32, 64…… 라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만들 수 있다.49) 개수가 적으면 사고가
간결해서 편리하지만 현실적 설득력이 떨어지고, 개수가 많으면 현실적
설득력이 높아지지만 사고가 복잡해 어지러워진다. 아무튼 그렇게 단계
마다 그 농담을 계속 살피면, 상대적 다양성을 계속해서 두 곱으로 넓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파노라마를 한 걸음 한 걸음 이해해 들어가
기 위해 두 극개념이 먼저 필요하다. 두 극개념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한 스펙트럼의 파노라마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사색의
편의상 도구’일 따름이다. 그러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상
정할 따름이다.
강조하기 위해 한 번 더 말하겠다. 양극법은 사색의 편의상 X와 Y라는
이라는 四象이다. 어느 쪽 낱말을 쓰든 용어를 만든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태양․소양․태
음․소음이라고 쓰면 우리에게 익숙한 낱말이어서 편한 점이 있겠지만, 동양 고래의 개념과
혼동할 염려가 있다. ‘태양․소양․태음․소음’은 서양 이분법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전래의
동양 음양법에서 사용한 개념이기에, 이 연구가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을 함께 보듬는 새
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이 낱말들을 피하기로 하겠다.
49) 여기 양극법에서 ‘2의 곱’으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 周易에서 兩儀․四
象․八卦․64卦를 만들어 가는 모습과 같아 보일 수 있다. 겉모습이 그렇더라도 방법과 내용
은 다르다. 주역 에서 卦는 음효와 양효에 ‘天地人’이라는 개념적 범주를 주어 3爻를 만들고,
다시 그 3효를 겹쳐 6효를 만들어 서열과 관계를 주어 64괘를 만든다. 필자는 그 방법이 많은
추상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양극법에서 ‘2의 곱’은 주역에서 괘를 형성
하는 방법보다 추상적 의미가 덜하다. 개념적 범주나 서열과 관계의 이미지를 주지 않는 개념
으로 훨씬 단순하다. 그래서 주역 처럼 2, 4, 8, 64로 가는 게 아니라 2, 4, 8, 16, 32, 64로 가는
것이다.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75
추상적인 두 개의 극개념을 사용하지만, 그 사이에 X와 Y가 혼입하는 다
양한 스펙트럼이 쭉 펼쳐져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비록 두 개의 극개
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항상 그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한 배려
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X와 Y로 서양 이분법의 엄격
한 순결성을 얼마쯤 살리고, 그 사이에 펼쳐진 농담의 정도로 동양 음양
법의 상대적 다양성을 얼마쯤 살린다고 본다. 그래서 서양 이분법과 동
양 음양법이 갖고 있는 사고틀이 함께 보듬어진다고 생각된다.
2. 양면법
태극 이분법은 양극법에서 그치지 않는다. 양면법兩面法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서양 문화에서 양면법적 사고를 만난 기억이 뚜렷이
없다. 동양 문화에서는 양면법적 사고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근
히 또는 간접적으로 숨어 있는 것 같다. 특히 ‘而’라는 글자를 역접 접속
사로 받으면서 만들어진 한자숙어漢字熟語에서 많이 보인다.50)
양극법에서 두 극개념은 우리의 편의적 사색을 위한 중요한 두 기둥일
따름이어서, 현실에서 뒤로 멀찍이 물러나 있는 추상적 개념으로만 존재
한다. 그러나 양면법은 현실에 한 발짝 바짝 다가가 있다. 그렇다고 양면
법이 현실 자체를 보여 주는 건 아니다. 양면법은 양극법으로 추상된 두
극개념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스펙트럼 개념들이 현실과 만나게 될 때
나타날 가능성의 ‘그 적절함과 부적절함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 양
극법의 두 극개념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그야말로 추상적 개념이고,
양면법이 추상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드러날 ‘우열․선악․시
50) 가령 ‘溫故而知新’에서 옛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보이는 그 ‘좋고 나쁜 두 측면’을 함께 담
고, 옛것의 나쁜 측면과 새로운 것의 나쁜 측면을 누르고, 옛것의 좋은 측면과 새로운 것의 좋
은 측면을 살려내자는 취지가 서려 있다. 겉으로는 “옛것의 좋은 측면과 새로운 것의 좋은 측
면을 살려내자”는 뜻을 말하고 있겠지만, 속으로는 그 나쁜 측면도 간접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한자 숙어는 무수히 많다.
76 동양사회사상
비’의 일보 직전에 있는 추상적 개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선악․시비․우열에 관한 문제가 나타난다. 세상 만
사와 만물은 실제 현실에서 어떤 상황에 처한 바에 따라 그 적절함과 그
부적절함이 있다. 경우에 따라 적절할 수도 있고 부적절할 수도 있다. 그
런데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적절함과 부적절함에도 완
전한 적절함이나 완전한 부적절함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적절함과 부적절함은 ‘불완전한 적절
함과 부적절함’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00% 적절함만으로 되어 있거나 100% 부적절함만으로 되어 있는 경우
는 없고,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는 적절함과 부적절함이 예를 들
어 93:7, 22:78, 64:36, 11:89……으로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경험하는 현실 세상에는 100% 선이나 100% 악, 100% 옳음이나
100% 그름, 100% 우등이나 100% 열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밝음과 어둠이 서로 섞여 낮과 밤이 오고 가며, 온냉습건溫冷濕乾이 서
로 섞여 사시사철이 오고 가듯이, 선과 악이 서로 섞이고 옳음과 그름,
우등과 열등이 서로 섞여 있어야 선과 악이 오고 가며 옳고 그름이 들고
나며 우등과 열등이 오르고 내린다.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
이다. 만약 선과 악, 옳고 그름, 우등과 열등의 어느 한쪽에 100%가 존재
한다면 그 100%는 영원토록 그러하여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선과 악
이 오고 가며 옳고 그름이 들고 나며 우등과 열등이 오르고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굳이 이 100% 극개념으로 변화를 이야기하려면, 앞에서 말
했던 미시적으로 정태적 변화 그리고 거시적으로 ‘눈 깜짝할 사이의 급
작스런 혁명’이 있다. 여기에서는 자세한 논의를 접어둔다.51)
51) 서양 이분법은 100% 선과 100% 악의 극단적 대립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혁명’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서양 역사학에서 ‘고대․중세․근대’라는 시대 구분 3분법 또는 ‘원시․고대․중
세․근대․현대’라는 시대 구분 5분법 그리고 ‘직선적 발전단계설’은 이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극악스런 惡과 영웅적인 善을 설정하여 영웅적인 선의 은총이나 재림을 꿈꾼다.
이는 성경이나 영화 소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 종교, 예술 그 모든 것에 박혀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의 극복 77
그런데 양극법이 속으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듬으면서도 겉으로는
추상적 두 개의 극개념을 내세우듯이, 이 양면법에서도 속으로는 적절함
과 부적절함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듬으면서도 겉으로는 적절함과 부
적절함이라는 추상적 극개념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 추상적
극개념도 적절함과 부적절함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해하기 위한‘ 사색
의 편의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색의 편의를 위해 100% 적절함과
100% 부적절함을 양면법의 극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강조하기 위해 한 번 더 말하겠다. 양면법은 사색의 편의상 ‘적절함과
부적절함’이라는 추상적인 두 개의 극개념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현실에는 적절함과 부적절함이 혼입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쭉 펼쳐져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비록 두 개의 극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항상 그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한 배려를 함께 해야 한다
는 것이다.
세상만사와 만물은 현실에 구체적으로 처하여 나타남에 적절함과 부
적절함이 있다. 그것이 현실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동
시에’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을 ‘양면법兩面法’이라고 이름지은 것도 여기
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 드러나는 순간 어느 한쪽으로 결
정된다. 이 결정적인 드러남도 시간과 장소의 변화에 따라 그 적절함과
부적절함의 스펙트럼 위치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나타남은 물론이다.
양면법은 세상 만사와 만물이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직전까지’
를 사색의 대상으로 한다. 현실에 드러나는 순간부터 시간과 장소의 변
화에 따라 펼쳐지는 그 적절함과 부적절함의 변화 스펙트럼에 관한 문제
는, 또 한 걸음 나아간 ‘구체적 현실의 인식’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문 사회 과학적․자연 과학적 해석 문제와 관련
있다. 필자는 서양의 자연 과학도 그렇다고 본다. 뉴턴과 아인슈타인 물리학에서도 그러하며,
분자 생물학을 포함한 생물학도 그러하다. 인문 사회 과학은 더 말할 나위 없다. 특히 보수적
인문 사회 과학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른 기회에 차근차근 이야기하겠다.
78 동양사회사상
있으며, ‘복잡성 과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 논문에서는 이에 대
한 언급을 접어두기로 하겠다.
Ⅴ. 맺음말
이 연구는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이라는 서양과 동양의 기본적 사
고틀이 갖는 잘못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비록 기초적인 출발선만 보여
줌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양 이분법과 동양 음양법이 갖는 부족함을 서
로 메우고 필요한 부분을 취하여 태극 이분법을 만들었다. 100걸음 양보
해서, 설사 이 연구에서 말하는 태극 이분법이 그럴 듯하다손 치더라도,
참으로 어려운 것은 이걸 실제로 현실과 이론에 적용하여 적절하게 다듬
어내는 것이다. “얼마나 보편적인 적용이 가능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
을 것이며, 그 기능을 얼마나 적절하게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할 것인
가?”라는 참으로 지대한 문제가 앞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태극 이분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 과학’을 가꾸어 감
에 자연 과학에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양자역학, 일리야 프리고진의
Dissipative Structure theory, 카오스 이론을 비롯한 복잡성 과학, 분자 생물
학을 비판하는 새로운 생물학들, 사회 과학에서 푸코․데리다․들뢰즈의
프랑스 현대 철학, 임마뉴엘 월러슈타인, 인문․예술 분야에서 포스트모
더니즘과 그 표현 양식, 그리고 동양학에서 주자학․ 주역 ․노장 사
상․체질 한의학을 중요한 동반자로 삼으려 한다. 이것들이 필자의 ‘태극
이분법’과 궁합이 딱 들어맞는 건 아니다.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으며, 잘못되어 보이는 점도 있다. 그러나 미처 보지 못하거나 정리하
지 못한 시사점을 얻기도 하고, 많은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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