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목적은 ‘역사주의’라는 용어가 학계에 정착된 것보다 한 세
기 이상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의 사상가 잠바티스타 비코가 그 이론과
실천을 위한 기반을 닦아놓았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작업
자체로 들어가기에 앞서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 그것은 ‘역사주의’라
는 용어를 파악하는 데 내재하는 난점 때문에 생긴다. 무릇 한 시대를
포괄한다는 지적 경향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개괄적으로나마 정의
를 내리는 일조차 무척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보통 그런 개념들은
배태될 때부터 이념적 성향에 있어 대립되는 사람들이 관여하여 자신
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의미를 전유하려 하고, 이후 해석의 과정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개입하여 처음 생성되었을 때부터 이미 다의적이었
던 함의를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일이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주의’라는 용어의 역사를 살펴봐도 예외가 아니다. 김
현식이 잘 정리해놓았듯 그 사조에 대한 여러 정의는 기원부터 오늘날
의 용례에 이르기까지 상호모순적인 “개념 정의를 둘러싼 불필요한 소
모적 논쟁”1)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정의를 내리는 데 관여한 사람들마
다 상반되는 견해를 내세우는 정도를 넘어, 한 개인조차 자신의 정의
에서 모순된 주장을 펼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법학과 경
제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 각 민족의 특수성을 고려하며 법의
이론이나 경제의 법칙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역사학파가 만들어지고,
그들 역시 역사주의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함께 설명되면서 역사주의
라는 용어는 의미의 가지치기를 거듭하여 거기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포기하는 일마저 생겼다.
이 글에서 그 논쟁에 다시 참여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렇지만 역사
주의의 선구자로서 비코를 조명하려는 글이라면 그렇게도 많이 생겨
난 ‘역사주의들’ 가운데 그의 사상이 특히 어떤 역사주의의 선례를 만
들었는지는 반드시 밝혀두어야 선행 조건이다. 본고에서 말하려는 역
사주의는 19세기 말부터 학문으로서 역사학의 위상을 정립시킨 독일
의 역사가들과 역사철학자들로부터 비롯되는 경향을 지칭한다. 역설적
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굳이 비코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역사
학 내부에서 역사주의가 확립된 것은 다른 학문에서 역사학파가 생기
고 그것과 관련하여 방법론 논쟁이 벌어졌던 것보다 뒤늦다.2) 기록으
1) 김현식, 「역사주의」, 김영한 · 임지현 편, ?서양의 지적 운동?, 지식산업사,
1994, 511쪽. ‘역사주의’ 개념의 정의에 관한 여러 주장들에 대해서는 특히
503~511쪽을 참고할 것.
2) 법학의 역사학파의 대표자인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가 칼 프리드리히 아이히
호른과 ?역사적 법학 연구 잡지?Zeitschrift für geschichtliche Rechtswissenschaft
를 창간하였던 것이 1815년이다. 경제학의 역사학파를 창시한 인물로 꼽히는
빌헬름 로셔가 ?역사적 방법을 통한 국가 경제 강의?Grundriss zu Vorlesungen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25
로서 역사 자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역사학이 학문의 지
위를 부여받은 것은 기껏해야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
하면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집필한 기원전 5세기를 기점으로 무려
2,300년 남짓을 기다려서야 겨우 역사학이 무엇을 왜 어떻게 연구하는
지 그 이론과 방법론을 정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학파로 알려져 있는 일단의 독일 역사철학자들이 그 일을 맡았
다. 이들을 통해 역사학의 존재이유, 대상, 목적, 서술 방식 등에 대한
전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어느 정도 암묵적
으로 역사학계 내부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빌
헬름 딜타이는 역사학이 자연과학과 달리 정신과학의 위치를 가지는
것은 ‘의미’가 담겨있는 사람들의 삶을 다루기 때문이며, ‘이해’를 통
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추체험함으로써 그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주장
했다. 또한 독일 서남학파의 빌헬름 빈델반트와 그의 제자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역사학을 정신과학 또는 문화과학으로 분류하는 이유로서
‘가치’를 통해 무수히 많은 과거의 사실로부터 중요한 것을 선별해내
기 때문이라 논했다.
이들에게 미친 비코의 영향을 논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주장을 다소
나마 상세하게 따라가 봐야 할 필요가 있다.
II
역사학은 본디 수사학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역사 서술은
옛 사람들의 선행을 본받고 악행을 경계할 교훈을 전해주거나, 과거의
실례를 통해 통치에 필요한 기술을 정치 지배자에게 제공하는 글로 간
über die Staatswirtschaft nach geschichtlicher Methode를 통해 그 기본적인 원리
를 천명한 것이 1843년이다.
426 ∥역사와 담론 제61집
주되었던 것이다. 사실의 정확성보다는 교훈의 실용성이 강조되었고,
따라서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엄밀한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타인
을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이었다. 역사가는 감동적인 문체로 글을 쓰기
만 하면 그만이었다. 역사학은 “사례를 통한 철학 교육”이라는 이러한
견해는 고전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
었다가 18세기에 볼링브룩 경에 의해 다시 확인되었다.3) 이렇듯 비판
의 정신이 무르익었던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역사학은 아직
자체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통치술의 변죽을 울리고 있었다.
역사학이 학문으로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단초는 역사학을 자연
과학과 동일시함으로써 인문학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려던 실증주의자
들로부터 왔다. 그들이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구성하고 표
현하는 역사학의 특징적인 방법을 발견”4)하기 시작하면서 역사학은
문학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역사학의 동료는
과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 정
신5)을 물려받아 역사 서술에 자연과학의 방법을 적용시켜야 한다고
논하였던 프랑수아 기조는 ?프랑스 문명사?에서 “붕괴된 건물을 재건
하고 과학적 메스에 의해 파괴된 존재를 부활시키는 것은 상상력과 이
성의 작업”6)이라 주장하면서 역사학의 과학화에 힘을 실었다. 프랑스
에서는 이폴리트 텐이 기조의 뒤를 이어, 형이상학의 서거로 만들어진
공백을 과학이 채워야 하며 과거는 신비를 수용하고 있지 않다고 강변
3) Michael Bentley, Modern Historiography: An Introduction (London:
Routledge, 1999), p. 4.
4) Ibid, p. 1.
5)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은 김점석에 의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실증주의
서설?, 한길사, 2001.
6) François Guizot, Histoire de la civilisation en France, C. Crossley, French
Historians and Romanticism: Thierry, Guizot, the Saint-Simonians, Quuinet,
Michelet (London, 1993), p. 84에서 재인용.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27
했다. 즉, 경험적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들 사이의 정확한 관계
를 세워주기만 한다면 과거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
다.7)
그와 비슷하게 영국의 헨리 토머스 버클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인
정하고 있는 일반화의 필요성이 역사학에서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
어, 특수한 사건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해야 할 고귀한 시도”8)가
있어야 한다고 논했다. 그는 역사학을 “전기 작가, 계보학자, 일화 수
집가, 궁정과 군주와 귀족의 연대기 작가, 헛된 것에 대해 지껄이는 사
람들의 수중에서”9) 빼앗아 “여러 분야의 자연과학 연구에 의해 실행
된 것과 동일한, 혹은 최소한으로 유사한 그 어떤 것을 인간 역사를 위
해 성취”10)하려는 목적으로 ?영국 문명사?를 집필하였다고 밝혔다. 19
세기 중엽에 집필한 이 책이 산업 혁명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던
시대의 과학에 대한 자신감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
한다 할지라도, “가장 저명한 역사가조차 성공적인 물리학도에 비해
열등한 것이 확실하다”11)는 그의 판단은 편벽하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
하다.
독일의 역사주의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갖고 있던 고유한 특성을 지키려는 시도로부터 출발했다. 버클의 편협
성은 물론 역사학을 자연과학과 동일하게 만들려는 경향에 대한 중요
한 비판이 독일에서 나타났다. 자연과학이 명성을 거두며 인간과 세계
7) Ernst Breisach, Historiography: Ancient, Medieval and Moder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pp. 275-78.
8) Henry Thomas Buckle, History of Civilisation in England, in Fritz Stern (ed.),
The Varieties of History: From Voltaire to the Present (London: Macmillan,
1970), pp. 123-24.
9) Michael Bentley, op. cit., p. 48에서 재인용.
10) Fritz Stern, op. cit., pp. 124-25.
11) Ibid, p. 125.
428 ∥역사와 담론 제61집
에 대한 전망에 도전적으로 개입하던 것을 예리하게 의식하던 요한 구
스타프 드로이젠은 버클의 ?영국 문명사?에 대해 비판적 서평을 썼다.
이른바 역사학의 ‘프로이센 학파’를 창시하였던 그는 버클이 가족, 국
가, 민족 등을 자연 현상과 동일시하며 거기에서 도덕적 성격과 목적
을 박탈하였던 것에 반대했다.12) 드로이젠에 따르면 자연에는 반복이
있을 뿐이며 목적을 위한 여지가 없다. 그에게 역사가의 작업이란 역
사가의 만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13) 그것은 문서나 유물은 물론
과거의 관습, 제도, 사고 체계 등등을 이루었던 과거의 삶과의 만남을
말한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 과거는 창의적으로 재구성된다. 확실히 이
것은 일반적 법칙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실증주의적 과학의 방
식과는 다르게 역사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독일의 역사철학자들은 역사학 고유의 특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를
더욱 심원하게 몰고 나갔다. 해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프리드리
히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빌헬름 딜타이는 과학의 성취를 존중
하면서도,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원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계적인 힘의 작용과 동일하게 바라보면서 모든 연구에서 주체와 객
체를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를 배격했다. 그는 자연의 영역에는 없
고 인간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요인들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라고 촉구
했다. 그것은 의도, 목적, 가치, 의미 등의 개념으로서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자연과학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지
만, 인간의 세계는 ‘이해’한다. 인간의 세계는 정신의 세계”14)라고 주
장하며 역사학을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으로 분류했다.15) 딜
12) Ernst Breisach, op. cit., pp. 228-79 참조.
13) Georg G. Iggers, The German Conception of History: The National Tradition
of Historical Thought from Herder to the Present (Middletow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68), p. 111.
14) Wilhelm Dilthey, Die Geistige Welt (Leipzig, 1934), p. 144.
15) Ernst Breisach, op. cit., pp. 281-82.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29
타이에 따르면 간단히 말해서 이해란 “당신 속에 있는 나를 재발견하
는 것”16)이다. 이러한 이해의 방법을 통해 “정신은 더 높은 단계에서
[주체와 객체의] 연결성을 다시 발견한다.”17) 이리하여 “인식 주체는
그 대상과 동일하게 되며, 그것은 객관화의 모든 단계에서 동일하게
이루어진다.”18) 이런 방식을 통해 타인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것이 가
능해지고, 그것은 인식 주체와 그 대상이 분리되는 자연과학과는 구분
되는 정신과학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가다머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 같은 해석학의 선구자들의 성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
다. “역사적 이해란 모든 편견이 제외된 주관성의 행위이며, 이것은
효과적인 역사적 방법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 자신의 지평선을 버릴 수
있는 인식자의 능력에 비례하여 획득된다.”19)
한편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서남독일학파를 창건하였던 빌
헬름 빈델반트도 실증주의에 대한 반격에 가세했다. 1894년의 스트라
스부르 대학 총장 취임 연설은 “실증주의에 대한 선전포고”20)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빈델반트는 특히 역사 연구에 내재하는 특이한 논리에
관심을 두었다. 그에 따르면 역사학이 다른 학문과 다른 것은 연구 대
상 때문이 아니라 방법론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방법이 ‘법칙정의
적’(nomothetisch)이라면 역사학의 방법은 ‘개별기술적’(idiographisch)
이다. 언어, 심리, 생리학, 지리 등등의 경우가 그렇듯, 우리는 같은 연
구 대상에 대해 그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쪽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그
16) Wilhelm Dilthey, Pattern and Meaning in History, tr. & ed. H. P. Rickman,
(Harper & Row, 1961), p. 67.
17) Loc. cit.
18) Ibid, p. 68.
19) Hans-Georg Gadamer, Philosophical Hermeneutic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6, p. xiv.
20) H. Stuart Hughes, Consciousness and Society: The Reorientation of
European Social Thought, 1890-1930 (New York: Vintage Press, 1958), p.
189.
430 ∥역사와 담론 제61집
리고 그 두 방식은 각기 나름대로의 과학적 기준과 고도로 정제된 방
법론을 유지하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 추상적인 관련성을 알고
싶을 때에는 ‘법칙정의적’ 방법을 사용하며, 특정의 사건을 제한된 시
간 속에서 충실하고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싶을 때에는 ‘개별기술적’
방법을 사용한다. 한 마디로 빈델반트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법칙을
찾으며 역사학은 사실을 찾는다.”21)
빈델반트의 제자였던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그의 논지를 계승하여 더
욱 체계화시켰다. ?자연과학적 개념 형성의 한계?Die Grenzen der
naturwissenschaftlichen Begriffsbildung라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의 제목
이 시사하듯, 그도 자연과학이 역사학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그는 서문에서부터 그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버클 및 그와 관련된
사상가들에 대한 믿음은 역사학의 영역에서 완전히 불신되고, 단지 자연
철학에서만 역할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계몽주의의 오래된 탁상공론이 역사학에서 가장 새롭고 중요한
업적으로 취급되고 있다.”22) 리케르트는 빈델반트의 구분이 불충분하다
고 여겼다. 자연과학과 역사학은 방법론뿐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다르
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무수히 많은 과거의 사실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
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따라서 선택의 원리가 있어
야 하며, 그 선택의 기준은 ‘문화적 가치와의 관련성’(Wertbezogenheit)
이 되어야 한다. 모든 문화적 대상에는 가치가 개입되어 있는 반면 자연
적 과정에는 그것이 없다. 이런 기준에 근거하여 리케르트는 ‘문화과
학’(Kulturwissenschaft)과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을 구분하였고,
가장 특징적인 문화과학으로서 역사학을 꼽았다.23)
확실히 이것은 특히 프랑스에서 큰 힘을 발하던 실증주의가 표방하
21) Georg G. Iggers, op. cit., p. 148.
22) Michael Bentley, op. cit., p. 89에서 재인용.
23) Georg G. Iggers, op. cit., pp. 152-59 참조.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31
는 과학 만능주의에 대한 독일 특유의 반발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
해 본다면, 이들 독일 역사주의자들의 시도가 반발 자체에 머무른 것
이 아니었다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들은 역사학이 스스로 존립
해야 할 당위성을 설파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역사학이 자연과학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논리적 엄밀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에 의
해 학문으로서 위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바꿔 말하면
역사 서술에서 요구되는 것은 극적인 구조가 뒷받침된 표현으로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는 전통적인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엄밀하고 정확한 설명이 거기에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가며 독일의 역사가들과 역사철학자들에 의해 역
사학은 그 대상과 방법론을 정제시키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얻게 되
었다.
III
비코가 독일의 역사주의자들에게 던져준 영감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태고의 원시시대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어둠
의 밤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빛나고 있다. 의심할 수 없는 그
진리는, 시민 사회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원리는
우리 인간 정신의 적응 가능성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
리를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신만이 알 수 있는
자연 세계의 연구에 철학자들이 모든 정력을 쏟아 부은 반면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있는 여러 민족의 세계 혹은 시민 세계
의 연구는 소홀히 해왔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다.24)
432 ∥역사와 담론 제61집
사상사의 맥락에서, 이 인용문은 진리의 근거를 명석하고 판명한 것
에 두면서 수학이나 물리학에 최고 학문의 위치를 부여했던 데카르트
에 대한 반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기억력에 근거
하는 학문인 역사학은 학문의 근거가 박약하다. 기억력은 시간이 지나
면서 퇴색하기 마련이며 역사가들은 자신의 과거를 훌륭하게 윤색하
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25) 이에 대해 비코는 인간이 만든 것을 인
간은 알 수 있다는 원리에 근거하여, 인간의 합당한 연구 대상은 인간
의 사회, 인간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을 위한
기틀을 제공하였다. 데카르트가 말하듯 우리는 기하학에서 가장 확실
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란 그가 주장하듯 기하학의 원
리가 언제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명석 판명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기하학에서는 점이나 선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전제부
터가 인간들끼리 합의하여 받아들이기로 한 가정, 즉 공리로부터 출발
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 완벽한 원이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그렇
다면 원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 그것은 ‘같은 평면 위에서 한
점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정의
속에 존재한다. 이처럼 기하학이야말로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
로서,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전제로부터 출발하였기에 그 학문
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비코의
원리가 지니는 논리적 타당성은 어렵지 않게 납득이 갈 것이다.
비코가 ?새로운 학문?을 썼던 목적 중의 하나가 진리에 대한 데카르
트의 관점을 역전시키려 하였던 것임은 확실하고, 특히 위의 인용문이
24) The New Science of Giambattista Vico, trs., Thomas Goddard Bergin & Max
Harold Fisch, Cornell University Press, 1959, 331. 비코 학계에서는 ?새로운
학문?Scienza Nuova에서 인용을 할 경우 단락의 일련번호를 적는 것이 관행
이다. 본고에서도 거기에 따른다. 이후 각주에서 이 책은 NS로 생략하여 표
기한다.
25) 특히 ?방법서설?의 제1부를 참고할 것.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33
그 점을 증명한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후대인들은 선인
들의 성취를 보면서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 한다. 독일의 역
사주의자들이 비코에게서 보려고 했던 것은 데카르트의 부정이라기보
다는 오히려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구분의 선구자라는 면모였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실지로 독일인들이 비코를 읽
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독일인들이 비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요한 게오르크 하만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라고 추정된다. 질풍노도의 시대에 계몽주의의 이성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드높인 특이한 철학자 하만과 비코의 유사성에 대
해서는 이미 크로체가 주목한 바 있다.26) 하만은 1777년에 비코의 ?새
로운 학문?을 한 권 갖고 있었고, 같은 해에 헤르더에게 비코에 대해
언급했다고 알려져 있다.27) 괴테도 1787년 3월 5일자로 되어있는 ?이
탈리아 여행기?에서 비코를 하만과 비교하며 언급하고 있고, 1791년 1
월 31일에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에게 비코의 ?새로운
학문? 한 권을 보냈다.28) 헤르더, 괴테, 야코비는 물론 비코를 독일에
처음으로 전했다는 하만조차 비코를 읽고 그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까 하는 문제는 크로체가 처음으로 제기한 이후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29) 그것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주(註)를 통해 학문적 관행이
26) Benedetto Croce, "Hamann e Vico," in Saggio sullo Hegel, pp. 309-15. 다음
을 참고할 것. René Wellek, "The Supposed Influence of Vico on England
and Scotland in the Eighteenth Century," in Giorgio Tagliacozzo, Hayden
White eds., Giambattista Vico: An International Symposium, The Johns
Hopkins Press, 1969, pp. 215-23. 특히 p. 223을 참고할 것.
27) George A. Wells, "Vico and Herder," in Tagliacozzo & White, op. cit, pp.
93-102. 실지로 헤르더가 비코를 읽고 영향을 받았을 것인가 하는 논점에 대
해서는 특히 pp. 101-102를 참고할 것.
28) Enzo Paci, "Vico and Cassirer," in Tagliacozzo & White, op. cit, p. 470n.
29) 이 논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Timothy Bahti, "Vico, Auerbach and
Literary History," in Giorgio Tagliacozzo ed., Vico: Past and Present
(Humanities Press, 1981), vol. 2, pp. 97-114.
434 ∥역사와 담론 제61집
아직 정착하지 않았던 시기에 저자가 그것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경
우 궁극적으로는 저서를 통해 표현된 사상의 유사성을 통해 지적 유산
의 계보를 추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모호한 추정의 문제를 더욱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나 민족들
사이에서 지적 영향이 오고갔을 때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향을
준 민족이 영향을 받은 민족보다 최소한 영향을 주고받은 문제에 있어
서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비코가 경계하라고 했던 두 가지의
자부심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비코는 있어서 “인류의 원리에
관한 모든 오류의 고갈되지 않는 원천”30)이었던 “민족의 자부
심”(boria delle nazioni)과 “학자의 자부심”(boria dei dotti)에 관한 비
코 자신의 공리가 옳은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각 민족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자신들의 역사가 세계의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1)고 자랑하며, 각 학자들은 “그들의 지식이 세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32)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의 학자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계몽사상가들이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
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하며,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계몽
사상가들이 비코의 영향 아래 집필하였으면서도 애써 그 사실을 밝히
지 않았다고 주장한다.33) 비코와 독일 사상가들의 지적 계보에 있어서
도 그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독일의 학자들은 독일의 민족정신을
확립시켰다는 헤르더가 외국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꺼
린다. 반면 헤르더가 비코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밝혀졌으며,
그 둘의 사상에 긴밀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
30) NS 122.
31) NS 125.
32) NS 127.
33) 이 쟁점에 대해서는 Hanook Cho, "For Michelet's Vico: An Interpretation of
Michelet's Translation of Vico's Scienza Nuova," 1991, Ph.D dissertation,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pp. 33-34, n. 30.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35
다.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헤르더
가 비코에 대해 일찍부터 어느 정도 친숙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비
코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당시로서 비코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탈리아 학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4)
그러한 절충적인 해석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몇 가지 정황을 살펴보
면 독일의 역사주의자들이 활약했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코가 독
일의 학계에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만
은 철학자로서 얻은 명성보다는 외국의 문물을 독일에 소개한 인물로
서 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와 임마누엘 칸트
를 비롯한 학계의 인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었다. 괴테의 명성
과 영향력은 야코비에게 비코의 책을 전달할 무렵 이미 확고하게 정립
되어 있었다. 1811년 야코비는 ?신성한 것과 그 계시에 대하여?Über
den göttlichen Dingen und ihrer Offenbarung라는 저서에서 비코와 칸
트를 비교함으로써 비코를 독일의 관념철학과 동화시키려는 시도를
출발시켰다. 딜타이가 칸트의 비판 작업에 맞춰 ‘역사이성비판’을 시도
하려 했으며 빈델반트와 리케르트가 ‘신칸트학파’라고 불린다는 사실
에 더해 1822년 빌헬름 베버에 의해 ?새로운 학문?의 독일어 번역본
이 출간되었다는 사실까지 인정한다면35) 독일의 역사주의자들이 비코
에 대해 친숙하게 알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확신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앞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그것이 갖는 의미가 독일의 역사
주의자들에게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흔히 verum
ipsum factum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 원리를 풀어 말하자면, 그것은 사
람은 자신이 만든 것, 혹은 원칙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 내재하는 가정이란 문화적 산물은 인간 의
34) Wellek, op. cit., p. 101.
35) Bahti, op. cit., pp. 97-98.
436 ∥역사와 담론 제61집
식의 창조물이며, 과거의 인간 정신은 현재의 인간 정신과 같은 방식
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며, 인간은 자연 현상에 대해서는 불가능한 방식
으로 인간적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
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
나 그 이해는 계몽사상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연의 연구에
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귀납적인 연구에 근거한다.
과거의 인간 의식은 현재의 인간 의식에 의해 이해가 가능하다. 그
러나 그것은 과거의 문제가 현재의 문제와 동일하다거나, 과거의 인간
들이 그 문제에 반응하던 방식이 현재의 인간들이 그 문제에 반응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각 시대는 자
체의 문제를 갖고 있으며, 그 문제에 반응하는 방식은 그 시대의 문화
가 도달한 합리성의 수준에 따라 다르다. 각 시대는 자체의 요구와 가
능성과 선입관을 갖고 있다. 각 시대는 그 요구를 처리하기에 필요한
제도와 가치관을 만든다. 따라서 현대인이 원시인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는 원시인의 세계 속으로 공감적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인
간 의식을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류가 어렸을 적으로,
사람들이 이성을 그다지 많이 지니지 않고 행동했을 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비코의 인식론적 원리와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것을 원칙적으로 이해할 수 있
다. 비코의 이 말은 우리가 인문학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딜타이의 말로 풀이
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 법, 정부, 도시, 군대, 예술, 과학, 종교 등등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소산이며, 그것을 연구하는 우리 역시 인간이
다.36) 인문학에서 지식이 가능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며, 그것
36) H. A. Hodges, "Vico and Dilthey," in Tagliacozzo & White, op. cit, p. 441.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37
에 대해서는 자연과학과는 다른 접근 방법이 요구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딜타이에게서는 그것이 ‘이해’(Verstehen)라는 방법으로 표
출되며, 그것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설명’(Erklärung)과 대비된다.
‘이해’에 내면적인 의미와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면 ‘설명’은 표면적인
현상만을 다룬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다시 비코로 돌아가자.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서는 ‘인간적인 사
물’의 본질을 추구한다.37) 그런데 그 본질이란 단지 “어떤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일 뿐”38)이다. “학문은 그것이 다루고
있는 소재로부터 출발”39)해야 하고, “언어가 형성되었던 당시에 행해
지던 사람들의 고래의 관습에 대한 가장 비중 있는 증거란 대중적 언
어”40)이기 때문에 비코에게 있어서 탐구를 위한 최초의 단계가 문헌학
적이고 어원학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간단히 말
해서 ‘출발점부터 출발하라’는 비코의 금언은 대단히 단순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비코가 수학 또는 과학의 담론에 물들어있던 당시대의
철학자들에게 제공하였던 참신한 통찰력이었던 것으로서, 그들은 “자
기 자신 시대의 계몽되고, 교화되고, 훌륭한 시대를 근거로 하여 인류
의 기원을 판단하였을 것이나 실지로 그 기원은 본질상 미소하고, 조
악하고, 어두웠을 것”41)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코에게 있어서, 그리
고 그가 촉구하는 바, 인문학자들의 출발점이란 “최초의 인간들이 인
37) ‘인간적인 사물’이라는 용어의 원어는 ‘cose umane’ 즉, ‘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을 영역자인 Bergin과 Fisch는 ‘human institution’으로 번역했다. ‘인간
적인 사물’이라는 말은 추상명사를 배제시킬 위험성이 있는 반면, ‘인간적인
것’이라는 번역은 ‘인간적’이라는 형용사만을 강조할 위험이 있다. 영역자들
을 따라 때로는 ‘인간 제도’라는 방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할 경우도 있
다.
38) NS 147.
39) NS 314.
40) NS 151.
41) NS 123.
438 ∥역사와 담론 제61집
간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던 시점이지 철학자들이 인간의 관념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하였던 때가 아닌 것”42)이다.
바로 이곳에서 자연과학의 방법과 인문학의 방법이 갈린다. 자연과
학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통용될 수 있는 법칙을 찾기 위해 계몽
된 철학자의 이성을 척도로 사용한다면, 인문학자란 최초의 인간들이
인간으로서 생각하기 시작했던 시점으로 되돌아가 생각할 수 있는 능
력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문헌학이나 어원학과 같은 학문이 그 연구
에 필수적이다. 물론 문헌학이나 어원학은 경험적이고 사실적이기 성
격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코가 말하는 어원이 진실과는 부합
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고, 그와 동시에 그의 어원학적 탐색은 개별
적인 경우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합리적 철학 체계와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해석 역시 널리 퍼져있다.43) 그러나 비코는 “전체
로서의 인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지 개별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으며,”44) 이런 관점에서 그의 어원학은 인간의 공동주관성
(intersubjectivity)에 근거하고 있는 보편적 언어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그의 어원학적 방법은 앞서 논했던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의
해석학적 방법과 유사하다. 따라서 최초의 인간들과 같은 지평선을 바
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배워야 할 최초의 학문이란 신화 또는 우
화의 해석”이라는 비코의 주장은 오히려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의 역사의 출발점은 우화에 있는 것이며 우화는 제민족의 역사”45)
이기 때문이다.
여러 민족들에 대한 어원학적, 신화학적 연구를 위한 비코의 전제
조건은 공동주관성의 존재이고, 이것이 비코의 용어로는 ‘정신적 어
42) NS 347.
43) Bruce Mazlish, The Riddle of History: The Great Speculators from Vico to
Freud, New York, 1966, p. 26ff.
44) Friedrich Meinecke, Historism, tr. J. E. Anderson, London, 1972, p. 49.
45) NS 51.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39
휘’, ‘정신적 언어’, ‘정신적 사전’과 같은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공
동주관성이 가능한 이유란 “인간은 어디에서건 무지에 빠졌을 경우 자
기 자신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다”46)는 인간 정신 본연의 불확정성 때
문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동일한 관념
은 공동적인 진리의 근거를 지니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 공리는 인류의 공통적인 지식(상식)이 신의 섭리가 모든 민족에
게 가르쳐준 각 민족들의 자연법에 있어서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를 규
정하는 기준이라는 사실을 확립시킨 위대한 원리이다. 그리고 각 민족
은 세부적 사실에 있어서의 변형에도 불구하고 이 법에 관한 한 모든
것에 통용되는 기본적인 동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그 확실성
에 도달한다. 따라서 모든 다양한 개별의 언어들이 기원을 두고 있는
정신적 사전이 생겨나는 것이다.47)
이 공통적인 정신적 언어의 중요성이란 이것이 “모든 언어학자들이
현존하거나 사멸한 모든 다양한 구체적 언어들에 공통적인 정신적 어
휘를 그것에 비추어 구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48) 모델이 될 수 있
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언어가 현존하고 사멸하기도 하였지
만 비코의 어원학에 있어서 요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공통적
인 정신적 언어’를 파악한다는 것이지 구체적인 특정의 언어를 꼬치꼬
치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공통적인 정신적 언어의 존재야말
로 ‘당신 속에 있는 나’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연과학과는
구분되는 역사학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한 독일 역사주의자들의 선례
를 제공해준 것이다. 이렇듯 verum ipsum factum과 그것으로부터 파생
46) NS 120.
47) NS 144-145.
48) NS 162.
440 ∥역사와 담론 제61집
된 이론들 때문에 비코는 “이해(Verstehen)의 전통의 꼭대기에 위
치”49)한다는 평을 받는다.
IV
사실 비코의 ‘진리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명제는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수학적 명증성의 지배가 확고하였던 시대에 그것을 극복하여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논리적 기반을 마련하려던
의도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목적에 있어 비코의 사상은 극적으로
보일 만큼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데카르트 파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데카르트 파가 가장 완벽하다고 믿었던 급소를 찔렀다”50)고 묘사되
거나, 비코 자신이 “반(反) 데카르트 매니페스토”51)라고 불리기도 했
다. 비코의 철학은 “기계론적 물리적 우주의 구조로부터 인간적 사회
적 우주의 구조를 도출해내려는,”52) 당시에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
식의 철학 방식에 대한 비판을 주요 주제로 하고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코에 대한 연구가 데카르트와의 대립이나 그
의 극복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데카르트를 극복한
그의 연구 방법이 인문학의 여러 분야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
를 갖는가를 찾으려는 것보다는, 데카르트를 넘어서는 데 핵심적인 역
49) Hilliard Aronovitch, "Vico and Verstehen," in Tagliacozzo ed., op. cit., p.
217.
50) Isaiah Berlin, Vico and Herder: Two Studies in the History of Ideas, The
Viking Press, New York, 1976, 이종흡, 강성호 옮김, ?비코와 헤르더?, 민음
사, 1997, p. 53.
51) Giorgio de Santillana, "Vico and Descartes," in Reflections on Men and
Ideas, MIT Press, 1966, p. 207.
52) Nancy S. Struever, "Vico, Foucault, and the Structure of Intimate
Investigation," New Vico Studies, vol. 2, 1984, p. 41.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41
할을 담당했던 verum ipsum factum이라는 원리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비코 연구의 강조점이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적으로 비코 연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독일에
서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1924년에 이루어진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부분적인 독일어 번역에 의해 미국 학자들
보다 일찍부터 비코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던 독일의 학자들은 수사학
자로서의 비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53) 즉, 독일 학자들의 관점에
의하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수사학에 대한 관심은 비코에 이르
러 절정에 이르렀고, 비코에 의한 ‘문헌학’과 ‘철학’의 구분은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구
분의 선구적 역할을 하여, 비코는 이들로부터 ‘정신과학’의 진정한 창
시자로 숭앙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학자들은 비코의 철학
에 내재하는 해석학적인 요소, verum ipsum factum의 원리 등에 큰 중
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는 비코 자신을 위한 연구
라기보다는 독일의 관념철학 자체를 위한 연구,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
된 역사주의의 논리적 기초를 다지기 위한 연구라는 인상을 준다는 비
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으로 그것은 비코의 이론이 어떤 토양에
서도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적응력을 갖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로 받아
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논문접수: 2011. 11. 10, 심사시작: 2011. 11. 11, 심사완료: 2011. 12. 8.]
주제어: 실증주의, 역사주의, 비코, 딜타이, 빈델반트, 리케르트, 정신과학, 해석학
53) 앞서 언급했던 빌헬름 베버의 독일어 번역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을 제외하고
는 널리 유포되지 않았다.
442 ∥역사와 담론 제61집
<Abstract>
Historicist before Historicism, Vico
Cho, Han-ook
The aim of the present essay is to prove that the eighteenth-century
Italian philosopher Giambattista Vico was a historicist, avant la lettre.
Although the German historians and philosophers of history of late
nineteenth century established the purpose, object, and methods of
historical discipline, and thus obtained the name of the founders of
historicism, it was Vico who first paved the way for that nomenclature.
His theory of verum ipsum factum, that is, the true and the made are
the same, in particular, played a pivotal role in differentiating humanities
from the natural science, a feat usually attributed to the German
historicists like Wilhelm Dilthey, Wilhelm Windelband and Heinrich
Rickert. Moreover, Vico's use of philological method anticipated that of
the Verstehen, normally associated with Dilthey.
To ascertain these points, this essay first scanned the European
historiography roughly from positivism to historicism, and then went
on to summarize the basic tenets of the main German historicists. It
then clarified Vico's theory of verum ipsum factum, to show that it has
elective affinity to the expositions of the German historicists. As a
conclusion, it stated that although in Germany Vico scholarship went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 비코 ∥ 443
on its own sake to use Vico as a forerunner of German historicism,
it is another example of the fecundity of the thought of Giambattista
Vico.
key words : Positivism, Historicism, Vico, Dilthey, Windelband, Rickert,
hermeneu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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