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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파르메니온(Parmenion), 필로타스(Philota/윤 진.충북대

서론
젊은 나이에 즉위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 북부 까지 진군하
였으며, 디오니소스(Dionysos)를 능가하여 신이 되고자 했던 자, 마케
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몽골의 징기스 칸과 함께 대표적인 정복 군
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하여 전투에서의 과감한 행동과 용맹, 적이었

으나 항복한 자들과 부녀자들에게 보여준 관대함과 자비로움, 유례없
을 정도로 빠른 진군과 정복 과정, 정복한 방대한 영역은 이미 고대와
중세에 그에 대한 여러 전설1)을 만들어 놓았다. 고대의 수사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도 그는 이미 영웅으로서, 본받을 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정복에 대한
많은 연구서와 연구결과물들이 있다.2)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평
가도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3)
사실 알렉산드로스와 그가 이룩한 업적에 대한 평가는 헬레니즘 문
화 혹은 헬레니즘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 그리스와 아시아 민
족 간의 융합정책을 취하여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으며, 이 헬레니즘
시대에 동서 문화가 융합되었다고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의 비(妃)로 페르시아 왕녀와 페르시아 귀족의 딸을 맞아들였
다든가, 휘하 장군들 및 많은 병사들에게 아시아 여성들과의 결혼을
하게했다는 점, 페르시아 식 의례를 도입한 점 등이 동서 문화를 융합


1) 이 전설들을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로망스(romance)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로
스 로망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 W. Kroll(ed.) (Psudo-
Callisthenes), Historia Alexandri Magni, 1926; G. Cary, The Medieval
Alexander, 1956; R. Stoneman(trans.), The Greek Alexander Romance, 1991,
Penguin Classics; J. Carlsen et al.(eds.), Alexander the Great. Reality and Myth,
1993.
2)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많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몇 가지 대
표적인 저작들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A. B. Bosworth, Conquest and
Empire : The Reign of Alexander the Great, 1988; P. Green, Alexander of
Macedon, 365?323 BC. A Historical Biography, 1974, rev. edn. 1991; J. R.
Hamilton, Alexander the Great, 1973; N. G. L. Hammond, Alexander the
Great. King, Commander and Statesman, 1988; R. Lane Fox, Alexander the
Great, 1973; I. Worthington, Alexander the Great. Man and God, 2003; P.
Cartledge, Alexander the Great. The Hunt for a New Past, 2004.
3) 특히 1950~60년대까지의 연구 결과들에서는 알렉산드로스를 동서 문화 융합
의 선구자로 그리고 있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73


하려는 그의 의도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제까지 여러 면에서 논의가 되어 왔다.4) 또한 헬레니즘 시대에 대한
평가와 아울러 지배자 숭배 문제도 제기된다. 그의 사후에 본격화되었
던 지배자 숭배 경향은 바로 알렉산드로스 본인의 행적에서 시작되었
다고 평가하는 것이다.5) 그리고 이런 지배자 숭배의 경향은 헬레니즘
시대를 지나 로마 시대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에서 지
배자 숭배나, 알렉산드로스의 ‘신성’ 주장, ‘부복’의 문제 등에 대해서
가 아니라 다른 측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사실 필자는 알렉산드로스가 ‘절대적 권력에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모든 정책과 원정, 군무(軍務)를 추진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주장
을 뒷받침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그의 휘하 장군들에 대한 태도 및
여러 사건들―혹은 ‘숙청’ 작업―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들인 파르메니온 살해 지시, 필로타스에 대한 처형, 클레이토
스 살해 사건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일련의 작업, 즉 알렉산
드로스의 장군들과 그들의 성향,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태도 및 알렉산드
로스의 장군들에 대한 태도와 대응을 정리해 보고자 하는 작업의 시작이
기도 하다. 이를 위해 먼저 이 글에서 그 세 사건들에 대한 고대의 주요
사료6)의 검토로 그 실마리를 풀어가 보려고 한다.


4) 알렉산드로스가 스스로를 신성화하고, 부복의 의식을 도입한 의도가 새로이 만
들어낸 거대한 영역의 원활한 지배를 위해서였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
었다. 예를 들어 E. Meyer, "Alexander der Grosse und die absolute
Monarchie", Kleine Schriften 1(1924), pp.265-314; W.W.Tarn, Alexander the
Great, Cambridge, 1948; J.P.V.D.Balsdon, "The 'Divinity' of Alexander",
Historia 1(1950), pp.363-388 그러나 이들은 주로 ‘부복’(proskynesis)과 ‘신
성’(神性) 주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5) 알렉산드로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 숭배에 대한 국내의 연구로는 조현미,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 숭배 - 발전과정과 의미를 중심으로」, ?서양고대사연
구? 24집, pp.235-258가 있다. 조현미는 이 논문의 제1장에서 ‘알렉산드로스
숭배’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신성’과 ‘부복’ 문제에 대해 언
급하고 있다.
374 ∥역사와 담론 제61집


Ⅰ. 파르메니온 가문 사람들의 원정 기여도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들 중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숙장(宿將)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내내 부사령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명실 공히 원정군의 2인자 격인 인물이었다. 그
리고 필리포스는 이미 죽기 직전에 파르메니온과 아탈로스(Attalos)에
게 병력을 주어 동방 원정의 선발대로 파견해 놓기도 했다.7) 이 때, 파
르메니온의 동료로 함께 파견된 인물은 아탈로스(Attalos)이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부왕인 필리포스(Philippos) 2세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
막 왕비인 클레오파트라(Kleopatra)의 숙부8)였다. 그리고 그는 필리포
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 피로연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을 적자를 낳기를 기원하다는 건배사를 하는 바람에 알렉산


6)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직간접적 관련을 가진 동시대인 혹은 그보다 약간 후의
역사가들(기원전 4~3세기)의 기록은 상당한 양이었을 것이지만, 현재는 단편으
로만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단편들은 J. Jacoby, Die Fragmente der
griechischen Historiker, Berlin, 1927의 no. 117?153으로 주로 수집되어 있다.
한편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주요 기록들은 모두
다섯 가지로서 모두 알렉산드로스 사후 300?500년 사이에 쓰인 것이다. 디오도
로스 시쿨루스(Diodoros Siculus), ?역사 도서관?(Bibliotheke Historike)의 16,
17권; 폼페이우스 트로구스(Pompeius Trogus), ?필리포스 대왕사?(Historiae
Philippicae),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대비열전?(Bioi Paralleloi) 중 「알렉산
드로스 전」, 아리아노스(Lucius Flavius Arrianos),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기?
(Alexandrou Anabasis),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Quintus Curtius Rufus), ?마
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사?(Historiae Alexandri Magni Macedonis). 이
중 트로구스의 작품은 서문과 요약만이 유스티누스(Justinus)에 의해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의 ?대비열전?은 국내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으며, 퀸투스 쿠르
티우스 루푸스의 작품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윤
진 역, 충북대학교 출판부, 2010).
7) Diodoros Siculus, 17.2.4; Justinus 9.5.9; Quintus Curtius Rufus 7.1.3
8) Diodoros Siculus 16.93.9절에서는 아탈로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조카라고 서술
하고, 17.2,3에서는 다시 남자형제라고 서술한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대부
분 그를 클레오파트라의 숙부로 보는 편이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75


드로스를 서자(庶子) 혹은 비정통적인 아들로 취급하는 망발을 저질렀
던 인물이다.9) 알렉산드로스는 헤카타이오스(Hekataios)라고 하는 자
를 파르메니온에게 보내 아탈로스를 체포 혹은 척살하라고 명하였다.
죄명은 아탈로스가 마케도니아를 강하게 비난하던 아테나이(Athena
i)10)의 정치가이자 연설가인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와 몰래 접선
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반란을 촉구했다는 것11)이다. 헤카타이오
스는 파르메니온의 묵인 하에 아탈로스를 살해하였다.12)
파르메니온의 역할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가는 과정에서도 드러
난다. 즉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는 과정에서 파르메니온은 기병대와
대부분의 보병을 거느리고 아비도스(Abydos)로 건너가게 하는 책임을
맡았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일부 병력만을 데리고 트로이아
(Troia) 지역으로 향했다.13)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건너와서 벌였던 첫 번째 전투
는 그라니코스(Granikos)강 전투였다. 이 전투로 알렉산드로스는 크게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와 뒤이은 군사 행동에서
도 파르메니온 및 그의 아들들은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먼저 그라
니코스 전투를 시작하기 앞서, 페르시아 군이 반대편 제방 위에서 전
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전
투를 시작하려 한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파르메니온은 오랜 경험에
서 나온 전술적 충고를 알렉산드로스에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알렉산드


9) Plutarchos, Alexandros, 9.7 및 Justinus 9.7.3 알렉산드로스가 격분한 것은 당
연했으며, 결국 이 피로연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부왕과 다투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모후 올림피아스(Olympias)의 모국인 에피로스(Epiros)에 가 있었고,
후에야 다시 부왕과 화해하게 되었다.
10) 일반적으로는 아테네라고 번역되나, 이 책에서는 원래의 발음에 가까운 아테
나이로 번역하였다.
11) Diodoros Siculus, 17.3.2
12) Quintus Curtius Rufus 7.1.3; Diodoros Siculus, 17.5.2
13) Arrianos, 1.11.6; Diodoros Siculus, 17.17.1
376 ∥역사와 담론 제61집


로스는 이 충고를 무시하고 바로 전투에 돌입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전군에 전투대형을 취하도록 명령했을 때, 파르메
니온(Parmenion)이 앞으로 나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전하, 제 견
해로는 아군은 현재 있는 이쪽 제방에 진을 치고 있어야 합니다. 아군
보다 훨씬 보병의 수가 적은 적이 감히 아군과 가까운 곳에서 야영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 봅니다. 따라서 새벽에 도강을 실시하는 것은 쉬
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군은 적이 진형을 짜기 전에 도강하게
될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강의 여러 곳은 깊고, 제방은 매우 높으며 어
떤 곳은 절벽 같아서 아군이 넓게 퍼져 도강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행동을 개시한다면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아군은 무질서하게 가장 취약한 진형인 종대로 늘어서서 도강해야 하
는데, 적의 기병대가 단단한 진형으로 돌격해 올 것입니다. 초반의 실
패는 현재에도 위해를 미치게 될 것이고, 가장 큰 손해는 전반적인 전
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파르메니온, 나
도 이 모든 것을 아네만, 헬레스폰토스 해협도 쉽게 건넌 뒤에 이 조그
만 개울 ― 그는 이렇게 칭해서 그라니코스 강을 얕잡아 보았다 ―이 아
군의 도강에 장애가 된다면 나는 수치심을 느낄 걸세. 이는 마케도니
아인의 위신에도, 위험에 대처하는 나의 민첩함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
이네. 확신하건대, 이로 인해 페르시아군은 용기를 얻을 것이고, 그들
에게 경계심을 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마케도
니아 군과 동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걸세.”14)
그러나 디오도로스는 여기에 대해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 즉, 그는
파르메니온과 알렉산드로스의 대화 혹은 파르메니온의 전술적 건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채, 적의 의표를 찔러 다음 날, 새
벽에 과감하게 도강하여 적이 미처 강을 건널 때 공격하기도 전에 병
14) Arrianos, 1,13,2-7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77
력을 전개시켰다고 전한다.15) 하지만 바로 그라니코스 전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또 다른 주요한 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리아노스와 대동소이하게 서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강의 수심이 깊고, 건너편 제방은 경
사가 있고 거칠어서 기어올라가며 싸워야 한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
그리고 파르메니온이 날이 너무 늦었으니 위험한 도강을 하지 말자는
의견을 제시하자,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넌 뒤에 그라
니코스 강을 건너기를 두려워한다면, 해협이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질
것이라고 말하며 13기의 기병과 함께 물로 뛰어들었다.16)
이 전투에서 파르메니온은 전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좌익을 맡아 싸
웠다. 알렉산드로스가 우익을 지휘하였으며, 우익의 선봉은 파르메니
온의 아들 필로타스가 섰으며, 또 다른 아들인 니카노르(Nikanor)도 그
뒤에서 근위부대를 지휘했다.17) 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혹은 무모하게
적진에 뛰어들었던 알렉산드로스는 클레이토스에게 목숨 빚을 지게
된다.18)
전투가 끝나고 나서 알렉산드로스는 군을 나누어 파르메니온으로
하여금 다스킬리온(Daskylion)으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
을 이끌고 사르데이스(Sardeis)로 향했다.19) 그리고 사르데이스를 점령
한 후에는 또 마그네시아(Magnesia)와 트랄레스(Tralles)라는 도시가
항복 의사를 전하자, 파르메니온에게 일단의 병력을 주어 그곳을 접수
하게 했다.20) 이 일이 있은 직후의 밀레토스 공략전에서도 파르메니온
15) Diodoros Siculus, 17.19.2
16) Plutarchos, Alexandros, 16.2-3
17) Arrianos, 1,14.1-2
18)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클레이토스에 대해 논하면서 보다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19) Arrianos, 1,17.2
20) Arrianos, 1.18.1
378 ∥역사와 담론 제61집
과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에 대한 충돌이 나타난다.
적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해전
을 벌이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리스군이 페르시
아 함대를 상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예상했는데, 특히 한 가지 징조
를 들어 알렉산드로스를 설득하였다. 해변에 둥지를 튼 독수리가 그리
스 함대의 고물에 앉았다는 것이다. 또 그는 만약 이 해전을 승리로 이
끈다면 원정 전반에 커다란 이득이 되지만, 진다해도 그리 심각한 문
제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어차피 페르시아가 제해권을 전
부터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직접 승선하여
위험을 무릅쓰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이
잘못 판단하고 있고, 징조도 틀리게 해석했다고 답했다. 먼저 수적으
로 큰 열세에 놓인 함대가 대규모 함대에 맞서 싸운다는 것과, 다음으
로는 훈련이 잘 된 키프로스(Kypros)와 페니키아 출신 수병들을 상대
로 훈련받지 못한 그리스 선원들이 대적한다는 것이 매우 비이성적이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리도 불확실한 요소들이 있는 상황에서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경험과 용기를 희생시킬지 모르는 모험을 벌이
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즉, 만약 이 해전에서 진다면, 전쟁 초반의 기
세에 있어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고 또 이 전투의 패배가 그리스에 알
려지면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이성적으로 논증하면서, 지금은 해전을 벌일 때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그 징조를 달리 해석하였다. 독수리는 확실히 그
리스 편에 있었지만, 그전에 육지에 앉아 있는 것이 목격되었기 때문
에 페르시아 함대를 육지에서 쳐부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다.21)
밀레토스를 점령하고 뒤이은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 공방전
마저 성공적으로 마친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을 나누어 자신이 이끄는
21) Arrianos, 1.18.6-9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79
병력은 해안을 따라 진군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파르메니온에게 맡겨
사르데이스를 거쳐 프리기아 지역으로 가도록 했다.22) 그리고 알렉산
드로스와 파르메니온이 각각 일군을 이끌고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동
안,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를 노리는 반역 음모 사건을 적발하였
다. 즉, 알렉산드로스와 동명이인인 아에로포스(Aeropos)의 아들 알렉
산드로스라는 테살리아 기병대 지휘관이 다레이오스와 내통하여 암살
을 기도했는데, 다레이오스의 밀사인 시시네스(Sisines)라는 페르시아
인을 파르메니온이 체포하여 그 음모를 알렸다. 또 파르메니온은 알렉
산드로스의 명을 받아 음모를 꾸민 그 알렉산드로스를 체포하기 까지
했던 것이다.23) 이와 함께 파르메니온이 또 한 번 암살음모에 대한 주
의를 준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정반대 양상이 벌어졌다.
알렉산드로스가 키드노스(Kydnos) 강에서 헤엄치다가 병이 들었고, 시
의(侍醫)인 필리포스가 약을 지어왔을 때, 카파도키아(Kappadokia) 지
역에 머물고 있던 파르메니온이 “필리포스를 조심하십시오. 제가 듣기
로는 다레이오스가 그를 매수해서 전하께 독을 쓰려고 한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알렉산드로스는 약을 먹으면서 그 편지를 필리
포스에게 보여주었으며, 그 약으로 병이 나았다.24)
이 이야기의 골자는 알렉산드로스의 가까운 이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는 수사학적인 묘사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
에는 이와 함께 후에 벌어질 파르메니온과의 갈등 상황을 미리 보여주
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또 다른 복선이기도 하다.
22) Arrianos, 1.24.3
23) Arrianos, 1.25
24) Arrianos, 2.4.7-11; Quintus Curtius Rufus 3.6.4에서의 편지 내용에서는 다레이
오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죽이면 1,000탈란톤의 돈과 자신의 여동생을 주어 결혼
시키겠다고 그를 매수하였다는 말을 전한다. Justinus, 11.8.3 ff에서는 아리아노
스와 마찬가지로 그저 돈으로 매수했다고 하며, Plutarchos, Alexandros, 19.3
에서는 다레이오스가 큰 선물과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약속했다고 전한다.
380 ∥역사와 담론 제61집
바로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두 번이나 파르메니
온의 의견―오랜 전투 경험에서 나온 고려로 보인다―을 거부하고
있다.
이 일이 있고나서 다시 한 번, 알렉산드로스는 군을 나누어 파르메
니온과 자신이 각각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진군하였다.25) 그리고 다시
파르메니온과 합류한 알렉산드로스는 다레이오스와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인 이소스(Issos)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 전투에서도 파르메니
온은 좌익 전체의 지휘권을 받는다. 또 그의 아들 니카노르도 알렉산
드로스가 지휘하는 우익에서 주요 지휘관 중 하나로 활약하고 있다.26)
그리고 그 이후 티로스 공략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또 한 번 마케도니아 군에서 바로 자신 다음의 위치에 있는 역전의 용
장 파르메니온의 의견을 측근들의 회의석상에서 정면으로 반박하고
무안을 준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직도 티로스를 공략하고 있을 때, 다레이오스가
보낸 사절들이 찾아 왔다. 그들은 다레이오스가 모후와 왕비, 자식들
의 몸값으로 1만 탈란톤을 내고,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에서 에게 해
까지 땅을 할양하며, 알렉산드로스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친구이자 동
맹자가 되고자 한다고 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측근들이 모인 회의에
서 이 조건들을 말하자, 파르메니온이 말했다. “제가 알렉산드로스라
면 더 이상 모험하지 않고, 그 조건을 기쁘게 받아들여 전쟁을 멈추겠
습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답했다. “내가 파
르메니온이라면 그리 하겠소만, 나는 알렉산드로스라서 다르게 답하
려오.”27)
25) Arrianos, 2.5.1
26) Arrianos, 2.8.3, Quintus Curtius Rufus 3.9.12
27) Arrianos, 2.25.1-2; Diodoros Siculus, 17.39.1-2에서는 다레이오스가 보낸 편
지를 알렉산드로스가 감추고 자신이 다른 편지를 위조하여 회의 때 공개했다
고 하며, 파르메니온과의 대담은 수록하지 않고 있다. Quintus Curtius Rufus,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81
이후 이집트에 다녀온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 지역에서 여러 장
군과 주요 인물들에게 새로이 보직 편성을 하면서 리디아(Lydia) 지역
태수로 재직하고 있던 아산드로스(Asandros) 대신에 메난드로스
(Menandros)를 파견한다.28) 아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의 동생으로서
할리카르나소스 공방전에서 요새를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던 바 있
다.29) 그리고 이 경질에 대해서는 아무런 다른 이야기가 없다. 아마도
파르메니온 일가에 대한 견제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파르메니온과 그의 아들들은 다시 페르시아를 석권하게 된
결정적인 전투인 가우가멜라(Gaugamela) 전투의 장에서 등장하고 있
다.
알렉산드로스는 적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밀집방진 부대
를 정지시키고, 종사단, 장군들, 단위 부대 지휘관들과 동맹군 및 외국
용병 부대 지휘관들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이 원하는 대로 밀집
방진 부대를 이 자리에서 즉각 진격시켜야 할지, 아니면 파르메니온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그곳에 진영을 세우고 한동안 머물
면서 지형 전체를 조사 ―특히 의심이 가는 지역이나 통과할 수 없는
지역, 또 도랑이 있는지, 적이 땅속에 박아 숨겨 놓은 말뚝30)이 있는
지 ―하고, 적의 배열을 철저히 정찰하여야 할지를 중론에 맡겼다. 파
르메니온의 의견이 더 많은 지지를 얻었으므로 그들은 전투 진형을 유
지한 채 그곳에 머물렀다.31)
4.5.1-8에서도 마찬가지로 파르메니온에 대한 언급이 없이 두 왕 사이의 편지
내용만을 전한다. Plutarchos, Alexandros, 29.4에서는 아리아노스와 비슷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시기는 다르다.
28) Arrianos, 3.6.7
29) Arrianos, 2.5.7
30) Quintus Curtius Rufus, 4.13.36-37에서는 이 숨겨진 덫에 대해서 좀 더 자세
한 내용을 적어 놓았다.
31) Arrianos, 3.9.3-4
382 ∥역사와 담론 제61집
오랜 경험을 가진 노장의 조심성이 잘 강조된 부분이기도 하고, 파
르메니온에 대한 여러 장군들의 신뢰를 보여주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
리고 이어지는 전투에서도 역시 예전의 대규모 전투와 마찬가지로 마
케도니아 군은 대부분 좌우익으로 나누어졌고, 우익은 알렉산드로스가
좌익은 파르메니온이 지휘하였다. 우익의 최정예부대라 할 수 있는 종
사단 기병대를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가 지휘했고, 역시 또 다른
정예부대인 경호대는 니카노르가 지휘했다.32)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에도 알렉산드로스가 군을 나누어 두 방면으
로 진군해야 하게 되면, 파르메니온이 그 중 하나의 방면을 계속 맡게
되었다.33) 그리고 파르메니온의 아들 중 하나인 경호대장 니카노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진군하다가 병이 들어 죽었다.34) 그러나 또 다른
아들인 필로타스는 여전히 알렉산드로스의 곁에 머물러 있었고, 상당
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 일가의 군에
대한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꼈던 것
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자신에 대해 암살 기도가 일어났을 때, 기회를
보아 필로타스를 엮어 넣고, 다시 파르메니온까지 제거하게 된다.
32) Diodoros Siculus, 17.57.1-4; Arrianos, 3.11.8-10; Quintus Curtius Rufus,
4.13.26 ff.
33) Arrianos, 3.18.1; 3.19.7
34) Arrianos, 3.25.4; Quintus Curtius Rufus, 6.6.18 : “그리고 박트리아 지방으로
진군해 가고 있을 때, 파르메니온의 아들 니카노르가 급사했다. 전군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특히 다른 누구보다 알렉산드로스가 애통해 하여 전군을
정지시키고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보급이 부족하여 서둘러 출발해야만 하게
되자, 그는 니카노르의 형제인 필로타스에게 2,600명의 병사를 붙여주고, 남
아서 장례를 마저 치르도록 하는 한편, 자신은 서둘러 베쏘스에게 진군했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83
Ⅱ. 알렉산드로스 암살 기도 사건에 연루된 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온 살해
알렉산드로스가 자랑가이아(Zaragaia)에 있을 때,35) 필로타스가 연
루된 알렉산드로스 암살 기도 사건이 일어난다.36)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필로타스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파르메니온까지 죽음을 당하
게 된다. 이 사건을 가장 자세하게 수사학적으로 다루고 있는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묘사에 따라 간략하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
다.
알렉산드로스와 교분을 나누고 지내는 딤노스(Dymnos)37)라는 인물
은 니코마코스(Nicomachos)라는 미소년과 연인 관계였다.38) 딤노스는
니코마코스를 만나서 지금 왕에 대한 시해 음모가 진행 중이며 이틀
안에 거행될 예정이고,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몇몇 용감하
고 저명한 사람들이 가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니코마코스가 누가 가담
자인지를 묻자, 딤노스는 경호대원인 데메트리오스(Demetrios)39), 페
우콜라우스(Peucolaus), 니카노르가 가담자들이라고 말했다. 딤노스는
35) Arrianos, 3.25.8-26.1
36) 이 사건에 대해서는 Plutarchos, Alexandros, 48-49; Diodoros Siculus,
17.79.1-80.2 및 Quintus Curtius Rufus, 6.7-7.2에서 보다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책들에서는 필로타스에게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가했다고 서술
하지만, Arrianos, 3.26.3에서는 단지 필로타스가 병사들의 투창 공격을 당해
죽었다고만 소개한다.
37) Plutarchos, Alexandros, 49.3 ff.에서는 그를 림노스(Limnos)라고 칭하고 있다.
38) 그리스의 소년애(paiderastia)―동성애가 아니다 ―는 대개 소년(수염이 나기
전의 사춘기에 해당)과 성인 남자 사이에서 진행된다. 이 때 소년을 ‘사랑받
는 자’(eromenos)라고 하고, 성인 남자를 ‘사랑하는 자’(erastes)라 한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반드시 성적 관계가 매개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성적 관계
도 그 정도가 다양하다. 대개 이들의 성적 관계는 소년이 사춘기가 지나면서,
혹은 수염이 나면서 끊기고, 그 다음으로는 그저 가까운 사이로 전환된다.
39) 경호부대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7인 중 하나이다.
384 ∥역사와 담론 제61집
그들 이외에도 아포베토스(Aphobetos), 이올라오스(Iolaos), 디옥세노
스(Dioxenos), 아르케폴리스(Archepolis), 아민타스(Amyntas)가 공범이
라고 덧붙였다. 니코마코스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형인 케발리노스
(Kebalinos)에게 옮겼다. 케발리노스는 왕의 군막 앞에서 누군가에게
이 음모를 전하기 위해 기다렸다. 이때,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를
만난 그는 시해 음모를 왕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필로타스는 바
로 알렉산드로스에게 갔지만 다른 문제들에 대해 의논하느라고 케발
리노스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케발리노스
는 필로타스에게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필
로타스는 그 일을 왕에게 전하지 못했다.
케발리노스는 그를 의심하여 메트론(Metron)40)이라는 젊은 귀족에
게 가서 정보를 전해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로스는 늦게
알린 것에 대해 케발리노스를 추궁하였고, 케발리노스는 필로타스에게
이미 대신 전해달라고 말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딤노스를 소환하였다. 소환 이유를 잘 알고 있던 딤노스는 자결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필로타스를 불러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 추
궁했지만, 필로타스는 그저 젊은 녀석들의 사랑싸움으로 알아서 대단
치 않게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기도 그렇게 생
각했을 것이라며 필로타스를 용서하는 척하였다.
그리고 필로타스를 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전모를 알
렸다. 이 자리에서 필로타스와 왕의 총애를 놓고 경쟁하던 크라테로스
(Krateros)가 필로타스에 대해 중상을 늘어 놓게 된다. 그리고 필로타
스를 체포하게 한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을 모아 놓고 자신에 대한 암
살 음모의 주범은 파르메니온이며 필로타스가 공범이라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필로타스를 고문하게 하였다. 그리고 필로타스가 고문에 못 이
40) 알렉산드로스의 시중을 들던 귀족층 자제들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85
겨 음모 사실을 인정하자, 그와 공범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파르메
니온의 친구인 폴리다마스(Polydamas)를 보내, 클레안드로스와 함께
파르메니온을 살해하게 하였다.
이상이 개략적인 사건의 전모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무리한 설정들
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글을 쓰는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
스 역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서술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딤노스의 자결시도 직후에 있었던 알렉산드로스의 반응
이다. “딤노스, 내가 너에게 어떤 잘못을 했기에 나보다 필로타스가 더
왕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판단했더란 말이냐?”41) 사실 이 반응은 그 때
까지의 서술적 맥락과 전혀 연관이 없었다. 당시 까지 드러난 필로타
스의 잘못은 왕에게 그 사실을 미처 알리지 않은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필로타스가 불고지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주범으로 변
해 버리게 만든 것이 알렉산드로스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
스의 의도를 가장 잘 알아차리고 사건을 전개시켜 간 크라테로스의 말
에서도 이렇게 사건이 변질되어 간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심지어 그(필로타스)가 참회하고, 전하의 관대하심에 감화되어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아버지 파르메니온이 아들의
생명 때문에 전하께 빚을 진 것에 대해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
자신은 확신합니다. 파르메니온은 강력한 군을 거느리고 있고, 오랫동
안 전하의 부하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에 전하 못지않은 권
위를 가진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때로 친절한 행동에 원망의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처형될 만한 죄를 지었다고 인정
하는 것도 부끄러워합니다. 따라서 필로타스는 자신이 목숨을 건졌다
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모욕당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
서는 전하의 생명을 위해 의심스러운 자들과 싸우셔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앞으로 우리가 추적해야만 할 적은 충분히 많이 남아
41) Quintus Curtius Rufus, 6.7.30
386 ∥역사와 담론 제61집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적에 대해서도 몸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
런 자들을 제거해 버리신다면, 저는 이민족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
다.42)
크라테로스의 말을 살펴보면, 그가 필로타스를 주범으로 즉, 필로타
스가 왕이 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난다.
즉 필로타스가 주범이었다고 그가 확신했다면, 알렉산드로스의 용서에
참회하고 감화될 것이라는 말을 아예 꺼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라테로스는 분명히 필로타스가 불고지죄를 범했던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알아볼 수 있다. 오히려 이야기의 핵심은
“파르메니온은 강력한 군을 거느리고 있고, 오랫동안 전하의 부하들에
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에 전하 못지않은 권위를 가진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라는 부분에 있다. 이는 오히려 크라테로스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의 심중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긴 원정 도중에 있는 알
렉산드로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적보다 오히려 자신에 못지않은 군
장악력이 있는 자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병사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도 그런 부분은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침묵을 지킨 데는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음에 분명하다. 왕권
을 향한 욕망어린 기대로 인해 이 비열한 범죄자들이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아버지는 메디아를 통치하고 있고,
필로타스 자신은 많은 지휘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결과 대망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후손을 두지 못했기에 그는 내가 자식이 없는 것도 얕잡아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파르메니온이 자식들인 니카노르와 필로타스에게 보냈
42) Quintus Curtius Rufus, 6.8.7-9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87
으나 중간에 가로챈 편지를 꺼내 낭독하였다. 하지만 이 편지에는 실
제로 위험한 계획의 증거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 “무엇보다 너희 자신들, 그리고 네 사람들을 잘 챙기도록 하라. 그게
우리의 목적을 완수하는 방법이다.” 왕은 만약 이 편지가 그의 자식들
손에 들어가면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음모를
모르는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써
놓은 편지라고 덧붙였다.43)
그의 말은 딤노스가 자결을 시도했을 때, 했던 말과 완전히 다른 맥
락에서 나온 것이다. 즉, 딤노스에게는 필로타스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몰아붙였지만, 이제는 필로타스가 그 일을 알고도 말
하지 않은 것은 왕권에 대한 욕망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필로타스가 처음부터 이 음모의 중심이었는지에 대한
문제에서 서로 배척되는 증언이다. 또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에 대한
직접적 증거가 없다는 것 역시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필요 없는 변명을 덧붙여 놓은 것이다. 실제로 만약 음모가 있었다면
굳이 써 보낼 필요도 없는 말이었고, 오히려 보다 구체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써 놓았을 것이다. 사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파르메니온은 “메디아를 통치하고 있고, 필로타스 자신은 많은
지휘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라는 부분이다. 또 그는 거
듭해서 “나는 필로타스를 우리 군의 최고 정예이자, 젊은 귀족들 중에
서 최고만 모아 놓은 기병대의 유일한 책임자로 만들었다. 나는 그의
충성과 경호에 내 생명, 내 희망, 내 승리를 맡겼다. 나는 그대들이 나
를 올려놓은 자리와 비등한 자리에 그의 아버지를 앉혔다. 나는 그에
게 모든 지역 중에서 가장 부유한 메디아의 통수권과 통치권을 주었고,
그에 더해 수많은 시민과 동맹군을 딸려주었다.”44)라고 말하며 파르메
43) Quintus Curtius Rufus, 6.9.11-15
44) Quintus Curtius Rufus, 6.9.21-22
388 ∥역사와 담론 제61집
니온 일가의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은 필자 뿐 아니라,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글을 읽는 사람들
이라면 고대와 현대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어느 정도는 하게 되는 생
각일 것이다. 필자는 쿠르티우스 루푸스가 여기서 의도적으로 그런 느
낌이 들도록 수사학적 과장을 여기저기 심어 놓았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쿠르티우스 루푸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고대의 작가들
중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비교적 비판적인 편이다. 즉, 그는 알렉산드
로스가 이소스 전투 이후, 예전과 다른 인물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
다. 그리하여 원래의 좋았던 천품이 거만함과 잔인함, 포악함 등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는 운명의 여신의 가호를 넘치게 받아 성공을 거
듭하면서 점차 인간의 분수를 넘는 오만(hybris)에 무너져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45)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친구들이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끌고 나갈 만
도 했던 것이, 파르메니온은 병사들과 지휘관들에게 대단히 큰 신망을
받고 있던 장군이며 원정군에서 어쩌면 알렉산드로스 보다 더 큰 영향
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또 파르메니온의 불행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
다. 위대한 장군이며 유명한 시민인 그가 최근 헥토르와 니카노르라는
두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부재중에, 그의 남아있는 유일한
아들이 비참한 운명이 예정된 채로 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따라서 군
중 심리가 동정심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자, 장군들 중의 한 명인 아민
타스가 필로타스를 공격하는 연설을 해서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렸다
.”46)
45) 윤진, 「알렉산드로스를 보는 세 가지의 시선 - 플루타르코스, 퀸투스 쿠르티우
스 루푸스, 아리아노스의 저작에 나타난 알렉산드로스 대왕」, ?서양고대사 연
구? 28집(2011. 6), p.138.
46) Arrianos, 6.9.27-28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89
이렇게 계속 병사들을 선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파르메니온의
군에 대한 영향력은 컸고, 바로 그 점이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무리
하게 필로타스를 고발하고, 파르메니온을 재판이나 그가 직접 참여하
는 공개적 비판도 없이 암살하도록 만든 것이다. 수사학적 연설로 사
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쿠르티우스 루푸스와 달리 아리아노스
는 비교적 무미건조하게 이 사건을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파르메니온의 죽음은 정당한 것이 아니며, 알렉산드로스가 군에 대한
그의 영향력 때문에 결국 암살을 지시했다고 기록한다. 가능하면 알렉
산드로스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그를 감싸고, 좋은 쪽으로 해석
하여 서술하는 것이 아리아노스의 특징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파르메니온이 필로타스의 음모에 관련이 없
다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처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설혹 파르
메니온이 결백했다고 해도 그의 아들이 처형되었는데 파르메니온이
살아있다면 커다란 위협이 남아있는 것이 된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본
인만큼이나 군대 내에서 큰 신망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케도니아 병사들뿐만 아니라, 용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는 종종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으로 혹은 알렉산드로스 대신에 군을 지
휘했고,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47)
파르메니온의 숙청 이유에 대해 알렉산드로스의 주요 작가들은 약
간씩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먼저 플루타르코스는 간단하게 파르메니
온의 죽음을 언급하고 나서, 파르메니온처럼 많은 공을 세운 인물도
죽이는 것을 본 가까운 친구들마저 왕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만 언급
한다.48) 플루타르코스의 이런 언급은 다른 곳에서의 서술 경향과도 일
47) Arrianos, 3.26.4. 그는 특히 테살리아 기병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테살
리아 부대는 알렉산드로스의 근위대에 종종 비견되었다.
48) Plutarchos, Alexandros, 49.8
390 ∥역사와 담론 제61집
치하고 있다. 즉, 그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해서 대체로 호의적인 평가를
하지만,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반감
을 교묘하게 감추며 약간씩 내 보일 뿐이다. 이에 반해 쿠르티우스 루
푸스는 보다 직접적으로 파르메니온을 칭찬하며, 알렉산드로스를 비난
한다.49) 즉, 그가 보기에 “알렉산드로스는 그(파르메니온) 없이 위업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그는 알렉산드로스 없이도 많은 성공을 일구어낸
인물이었다.”50)
Ⅲ. ‘검둥이’ 클레이토스 살해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장군들 중에서 비교적 중요한 위치에 있으
며, 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을 죽인 것은 파르메니온과 필로
타스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며, 또 그 자신의 유모의 동생이기도 한 ‘검둥이’(ho mela s)
라는 별명의 또 다른 노장 클레이토스를 술자리에서의 다툼 끝에 살해
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기원전 328년 가을, 마라칸다(Marakanda)
에서 일어났다.51) 클레이토스가 알렉산드로스를 구했던 그라니코스
전투는 아시아로 원정한 알렉산드로스의 첫 번째 전투로서 이후의 작
전의 전개를 위해서도 꽤나 중요한 전투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는
후에도 종종 나타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성급한 전투 참여가 불러온 위
험성이 드러나고 있다.
49) 윤진, 앞의 논문, p.137
50) Quintus Curtius Rufus, 7.2.33
51) 이 사건에 대한 서술로는 Plutarchos, Alexandros, 50-52; Quintus Curtius
Rufus, 8.1.20-2.12; Arrianos, 4.8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91
난투 중에 알렉산드로스의 창이 부러져 버렸다. 그는 왕의 수행원
중의 한 명인 아레테스(Aretes)를 불러 다른 창을 달라고 했으나, 그
역시 창이 부러졌고 비록 반만 남은 창을 가지고 분전하기는 했으나
고전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알리고,
다른 수행원을 부르시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왕의 종사단(從士團)의
한 명인 코린토스의 데마라토스(Demaratos)가 자신의 창을 주었다.
이 창을 움켜쥔 알렉산드로스는 다레이오스 왕의 사위인 미트리다테
스(Mithridates)가 쐐기꼴로 진형을 짠 기병대를 이끌고 전선의 맨 앞
에서 말을 달려오는 것을 보고 부하들을 뒤에 둔 채, 홀로 돌격하여 그
의 얼굴에 창을 찔러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를 노리고
말을 달려 온 로이사케스(Roisakes)가 휘어진 칼로 그의 머리를 내리
쳤다. 비록 일부는 잘려나갔지만, 그는 투구 덕분에 그 일격을 받아 넘
길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역시도 땅에 쓰러뜨리고 창으로 흉
갑을 찔러 가슴까지 꿰뚫어 버렸다. 스피트리다테스(Spithridates)가
뒤에서 알렉산드로스를 베어 넘기려고 칼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드로
피도스(Dropidos)의 아들 클레이토스(Kleitos)가 처음에는 칼이 미끄
러졌지만, 다시 스피트리다테스의 어깨를 베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성
공적으로 강을 건넌 기병대가 다가와 알렉산드로스 주변에 있는 한 무
리의 병사들과 합류했다.52)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클레이토스는 위기에 처한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했으며, 이후에도 군의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즉, 그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근위대를 지휘하고 전면에 나섰으
며,53) 필로타스 처형 직후에는 종사단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 그 중의
52) Arrianos, 1.15.6-8. 이 부분에 해당하는 Diodoros Siculus, 17.20과는 이름이
나 자잘한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즉, 17.20.1에서는 스피트리다테
스가 아니라, 이오니아 태수이며 페르시아 인이고 다레이오스의 사위인 스피
트로바테스(Spithrobates)라고 말하며, 20.7에서는 “로사케스가 제 2격을 준비
하고 있을 때, 검둥이라는 별명을 가진 클레이토스가 말을 타고 달려들어 로
사케스의 팔을 잘랐다.”라고 묘사한다.
392 ∥역사와 담론 제61집
하나를 맡겼다. “비록 가장 가까운 친구일지라도 그리도 강력한 기병
대를 한 명에게만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54)
이 술자리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선왕 필리포스 및 그와
함께 했던 노장군들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있는데 대해, 클레이토스는
취하여 그 점을 비아냥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제우스
의 아들이라는 신탁에 대해서도 조롱하였다.
몇몇 사람들이 〔알렉산드로스의 부왕인〕 필리포스의 업적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의 업적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폄하하고 알렉산
드로스를 추어올리자, 클레이토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필리포스의
업적을 칭찬하고 알렉산드로스와 알렉산드로스가 행한 업적에 대해서
낮추는 말을 하였다. 그는 완전히 술기운이 올라서 거듭 알렉산드로스
를 깎아내렸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에게 목숨
빚을 졌다고 하면서, 그라니코스 강에서 페르시아 인들과 조우했을 때
의 기병전투를 언급하였다. 게다가 그는 거드럭거리면서 오른 손을 들
어 올리고 이렇게 소리쳤다. “알렉산드로스 전하, 그 때 전하의 목숨을
구한 것이 바로 이 손입니다 !55)
알렉산드로스는 이 때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죽였고, 술이 깬 다음
에는 몹시 후회했다고 아리아노스는 전한다. 그러나 사실 아리아노스
도 바로 그 앞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알렉산드로스 혼자서 그 위업을
다 성취한 것도 아니고, 그중 대부분은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업적”이
라고 말한 부분에서 알렉산드로스가 결정적으로 기분이 상하게 되었
다. 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온의 경우와는 약간 다른 면이 있지만, 알렉산
드로스의 업적―알렉산드로스가 군권 및 절대권을 장악하는 가장 큰
53) Arrianos, 3.11.8
54) Arrianos, 3.27.4
55) Arrianos, 4.8.6-7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93
도구―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그토록
격분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클레이토스는 파르메니온을 변호하기
까지 했다.56) 파르메니온과 함께 싸웠던 이 역전의 노장군은 알렉산드
로스의 태도에 대한 장군들 중의 나이 많은 연배의 생각을 대변한 것
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자의적으로 군에
절대적인 지배권을 투사하려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거기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플루타르코스는 이 일은 “알렉산드로스가 운이 없
고, 또 취했기 때문”57)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이전에 필로타스를 죽일
때와는 달리 우연에 의한 것이고,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두 가지 사건을 끌어와 알렉산드로스의 의지가 아니라, 운명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는 식의 해석을 읽는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있다. 즉, 진상
받은 포도가 잘 익어서 이를 클레이토스와 나누어 먹으려 그를 불렀을
때, 희생제를 올리고 있던 클레이토스가 올 때 제물로 쓸 양 세 마리가
그를 따라왔다는 것이다. 마케도니아 군종 예언자인 아리스탄드로스
(Aristandros)와 클레오만티스(Kleomantis)는 이를 불길한 징조라고 보
았다. 또, 알렉산드로스가 이틀 전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는 클레
이토스가 검은 옷을 입은 파르메니온의 아들들과 같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들 이었다. 이상의 두 가지 일을 거론
한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이토스의 죽음은 알렉산드로스의 탓이 아니라,
운명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그
리고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술이 깬 알렉산드로스가 울며, 한숨만 내
쉬고 있었다고 기술하여 알렉산드로스가 반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독
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한편 쿠르티우스 루푸스는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은 범죄이며, 그것도 잔인한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58)
56) Quintus Curtius Rufus, 8.1.33
57) Plutarchos, Alexandros, 50.1
394 ∥역사와 담론 제61집
그 때 왕이 클레이토스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 말소리의 어조는
그가 생각하고 있던 범죄의 잔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클레이토스가 피를 흘
리며 죽어가고 있을 때, “이제 가서 필리포스, 파르메니온, 그리고 아
탈로스와 함께 하라!”라고 소리쳤다.59)
결론
알렉산드로스에게 필로타스, 파르메니온 그리고 클레이토스는 모두
다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 권력에 대한 장애물로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세 사건에서 보이고 있는 공통점은 군
에 오래 근무하였거나, 중책을 맡아 알렉산드로스의 절대적인 권력 행
사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제거이다. 물론 쿠르티
우스 루푸스는 파르메니온과 필로타스의 살해, 클레이토스의 살해가
모두 ‘자만심과 격정’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60) 이처럼 고대 작가들
은 세 명의 장군들에 대한 살해가 개인적인 성격 탓, 혹은 과도한 음주
에 의한 우발적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필로타스의 경우에
서도 그를 처단할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짙게 주는데다가, 바로 뒤이어 파르메니온을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살
해하는 등 우발적이었다기 보다는 오래 전부터 별러 오던 일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즉, 이집트 아문 신전에 가서 ‘제
우스-아문’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아낸 것이나, ‘부복’의 의례를 도입
하고, 이에 반대하는 칼리스테네스(Kallisthenes)를 필로타스와 비슷하
58) Curtius Rufus, 8.1.50
59) Curtius Rufus, 8.1.50-52
60) Curtius Rufus, 3.12.19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권력에의 의지’ ∥ 395
게 시동들의 음모에 연루시켜 죽인 것,61) 페르시아 식 관행이나 체제
를 채택한 것 등이다. 이 모든 것에 깔려있는 기본적인 공통점은 알렉
산드로스의 ‘권력에의 의지’였다.
[논문접수: 2012. 1. 3, 심사시작: 2012. 1. 3, 심사완료: 2012. 1. 19.]
주제어: 알렉산드로스, 파르메니온, 필로타스, 클레이토스, 권력에의 의지
61) 이 사건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윤진, 앞의 논문, pp.134-136 참조.
396 ∥역사와 담론 제61집
<Abstract>
Alexandros' Will of Power - focusing on the Cases of
Parmenion, Philotas, Kleithos
Yoon, Jin
In this paper, we suppose that Alexandros regards Philotas,
Parmenion, Kleithos as an obstacles to his seizure of absolute power.
We can see something in common in those three cases. That is,
elimination to persons that are elder generals or commander of elite
troops is taken place. Ancient writers - Plutarchos, Quintus Curtius
Rufus, Arrianos - says that his brutal acts are result of passion, pride,
or drunkenness. But in this paper, we suppose those cases are come not
from accidental occurrence but from elaborated intention. In philotas'
case, Alexandros shows several intentions of clearness of obstacle, as
in his saying with Dymnos or in speeches to soldiers. If we suppose
that all his peculiar acts - proskynesis, receiving the oracle of Amun,
proskynesis, adaption of Persian customs, marrage with Persian women,
execution of Kallisthenes - are the outcome of his will of power. In our
view, his will of power is stronger than any other his personality.
key words : Alexandros, Parmenion, Philotas, Kleithos, Will of Power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정 기 문*62)
1. 서언
2. 새 계명을 주었는가?
3. 정결례 논쟁
4. 율법의 개혁자
5. 결어
1. 서언
오랫동안 기독교는 예수가 유대교의 상징인 율법을 폐지하고 사랑
이라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서 인류 종교사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다고 가르쳐왔다. 2세기 이후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1)
그런데 이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하
는데 있어 해명하기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에
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유
대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2) 예수가 율법의 수명이 다했으니 이제 율
* 군산대학교 사학과 교수.
1) 존 드레인/서희연 옮김, ?성경의 탄생?, 옥당, 2011, p. 296, pp. 305-306.
2) 서동수, 「사도행전의 율법이해」, ?신약논단? 2, 2007, p. 422.
398 ∥역사와 담론 제61집
법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 즉 사랑을 준수하라고 가르쳤다면 왜 그들
이 율법을 준수했을까?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고민했던 인물인 2세기의 이단, 마르키온은
‘재유대화’라는 가설을 만들어냈다.3) 그에 따르면 예수는 율법을 폐지
하고 오직 사랑만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지만 예수가 죽은 후에 베드로
를 비롯한 유대인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유대 관습으
로 다시 빠져들었다. 마르키온은 이단으로 규정되어 역사의 무대로 사
라졌지만 그가 제안한 ‘재유대화’ 가정은 근대에도 계속 되었다.4) 근
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우어가 초기 기독교 역사의 중심축을 유
대의 관습을 준수하는 베드로와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는 바울 사이의
투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5)
그러나 바우어의 재유대화 가설에 대한 비판은 이미 그의 당대에 이
루어졌다. 원래 튀빙엔 학파에 속했던 리첼(Ritschl)이 이방인 기독교
와 유대 기독교의 대립이 바우어가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심하지 않았
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재유대화 가설을 극복하는
작업을 해왔다. 가령 바우캄(Baucam)은 베드로는 근본적으로 바울과
같은 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주장하였다.6)고 주장했고, 제임스 던은 유
대 기독교도를 모두 바울에 반대하는 단일 집단으로 파악할 수는 없고,
“엄격한 혹은 극단적인 유대주의자”와 ‘온건한 유대 기독교도’를 구분
해야 한다. 전자는 예루살렘과 연계되어 있던데 반해서, 후자는 베드로
와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7)
3) E. C. Blackman, Marcion and Hist Influence, (Wipf & Stock, 1948).
4) Jeffrey J. Bütz, The Brother of Jesus and the Lost Teachings of Christianity,
(Inner Traditions, 2005), 154-155.
5) F. C. Baur, Paul : the Apostle of Jesus Christ, (Hendrickson, 2003, orig.
1845), 7은 베드로를 ‘유대주의자들의 수장’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6) R. Bauckham, “James, Peter, and the Gentiles” The Missions of James, Peter,
and Paul, ed. B. Chilton & C. Evans, (Brill, 2005), 131-134.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399
그런데 재유대화 가설이 틀렸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
이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했던 사실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 것인가? 예
수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그들 또한 율법을 준수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율법 없는 믿음을 주장했던 바울은 예수의 가
르침을 버리고 새로운 신학을 창시한 것인가?
이 논문은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가르침을 재검토하면서 이런
문제들에 답해보고자 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견해, 즉 예수 운동이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개혁 운동이었다는 시각을
받아들여서8) 예수가 유대교 내의 개혁 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강조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개혁이 이미 유대교의 경계를 뛰어넘을
힘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가, 그리고 바
울이 그 잠재성을 구체화시켰다는 논지를 펼칠 것이다. 율법 문제가
유대교와 예수,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관계를 가늠하는데 핵심 관건이
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점검하는 것은 예수의 개혁 운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2. 새 계명을 주었는가?
예수가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계명을 주었다는 ‘교리’는 물론 당연
히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최후의 만찬
장에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
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
7) James Dunn, “Judaizers,”, A Dictiona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ed. R. J.
Coggins and J. L. Houlden, eds., (Trinity Press, 1990), 370-371.
8) 게르트 타이센/박찬웅·민경식옮김, ?기독교의 탄생?, 대한기독교서회, 2009, pp.
84-85.
400 ∥역사와 담론 제61집
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9)
라고 말하였다. 이 구절에서 예수는 분명 ‘새 계명’을 준다고 말하였다.
예수가 새로운 계명을 제시했다는 것은 다른 성경 구절들에서도 확
인된다. 마태복음은 요한복음과 조금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모
습을 전한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바리사이파와 논쟁을 하고 있
을 때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대답하였다.10) 요한복음
의 진술과 달리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먼저 주체적으로 새로운 계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율법학자가 물었을 때 대답의 형식을 빌려 자신
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달리 예수는 ‘서로 사랑하
라’라고 말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율법을 ‘사랑’으로 요약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마태복음의 진술은 요한복음의 진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수의 이런 가르침을 계승한 바울은 수없이 율법의 시대가 끝났다
는 것을 역설하면서11)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올바
른 믿음을 가짐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런 자료에 근거하면 예수가 율법의 시대를 폐하고 ‘사랑’의 시대를 연
것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가 과연 예수가 유대교를 폐지하고 기독교를
창시하기 위해서 새로이 제시한 가르침인가? 누가복음을 보면 이에 대
9) 요한복음 13 : 34-35.
10) 마태복음 22 : 37-40.
11) 에베소서 2 : 15.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01
한 근본적인 회의에 부딪치게 된다. 루가복음은 ‘새 계명’ 장면에 대해
서 이렇게 전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
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
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
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
셨다.12)
이 구절에서 이른바 ‘새 계명’을 제시하는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율
법교사이다.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제시해야할 새 계명을
‘독사의 자식’ 같은 율법 교사가 제시하고 있는가? 누가복음의 저자가
무언가 혼동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마가복음에도 평행구가 존재하고,
그곳에서도 새 계명을 제시하는 사람은 예수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저자가 혼동을 일으켰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13)
그러나 이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의 평
행구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
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
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
12) 누가복음 10 : 25-28.
13) 기독교의 이웃 사랑 계명이 유대교 내에서 발원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게르트
타이쎈/박찬웅〮민경식 옮김, ?기독교의 탄생 : 예수 운동에서 종교로?, 대한기
독교서회, 2009, pp. 138-140을 보라.
402 ∥역사와 담론 제61집
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
다."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
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14)
이 구절에서 새 계명을 제시하는 사람은 예수이다. 그런데 예수가
‘새 계명’을 제시하게 된 계기는 율법학자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가 ‘사
랑’이라고 말했을 때 율법교사는 반론을 펴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예수
의 말에 동감을 표현하였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성경의 저자들이
누가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제시했는가에 대해서 혼동했던 것은 예
수의 제안이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사이파
도 이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5)
이 장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예수 당시의 유대교, 특
히 바리사이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타당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우리는 흔히 유대인이 율법을 생명같이 여기며 613개에 이르는 규
정을 엄격하게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613개의
율법을 모두 지킨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다. 가령 생후 8일에
할례를 하라고 되어 있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할
례를 하게 되면 안식을 규정을 어기게 되고, 할례를 제 날짜에 하지 않
으면 할례 규정을 어기게 된다. 이렇게 율법이 상호 충돌하는 경우에
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고 좀 더 중요한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이다. 따
라서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어떤 계명이 더 중
요한지를 논쟁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할례가 더 중요하므로 안식일에
14) 마가복음 12 : 28-32.
15) Brad Young, Paul : The Jewish Theologian, (Hendrickson, 1997), 75-76.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03
도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16)
그런데 바리사이파의 문제 제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경에 규
정된 율법은 분명 규정된 대로 지킬 수 없는 것이 있다. 가령 레위기
24 : 19-20은 “누구든지 같은 동족에게 상처를 입힌 자에게는 같은 상
처를 입혀주어라. 사지를 꺾은 것은 사지를 꺾는 것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렇게 남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자신도 상처를 입어야 한
다.”라고 규정하고 있다.17) 이는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복수법
과 그 내용이 같은데 아직 국가의 공권력이 미약할 때 정해진 야만스
러운 규정이다. 나름대로 문명화된 1세기에도 이 규정을 그대로 행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은 그 규
정을 그대로 지켜서는 안되고 다만 그 정신을 살려서 손해를 입힌 만
큼 배상을 해주면 된다고 가르쳤다.18)
이렇게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는데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도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율법을 해석했으며, 민중들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 노력하였다.19)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자구에 얽매
이기 보다는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였을까? 최대한 자구대로 지키고 불가피한 경우만 정신을 살려서
지킨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세밀한 규정을 대체적으로 무시하고 율
법의 큰 줄기를 따져서 대원칙만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여기에는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였다. 사두가이파와 같은 보수주의자
들은 율법을 있는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계명을 묶어
16) 게리 윌스/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돋을새김, 2007, p.
116.
17) 출애굽기 21 : 23-25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18) Hyam Maccoby, Jesus the Pharisee, (SCM, 2003), 131.
19) John Bowker, Jesus and the Pharisees, (Cambridge Univ. Press, 1973),
30-31.
404 ∥역사와 담론 제61집
주는 하나의 대정신을 찾는 노력을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바리사이파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였다. 샴마이와 힐렐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는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느날 한 이방인이 샴마
이를 찾아갔다. 그는 ‘제가 한발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가르쳐주
신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샴마이는 손에 들고
있던 목수의 자로 그를 쫓아버렸다. 그러나 그가 힐렐에게 갔을 때 힐
렐은 그를 개종자로 받아들였다. 힐렐은 ‘네가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
게 시키지 하지 말라.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모든 것은 주
석이다.’라고20) 말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이방인은 율법의 순위를 매겨서 가장 철저하게 지켜
야할 몇 가지만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샴마이는 거절하였지
만 힐렐은 “‘네가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하지 말라.”라고 말
하면서 그의 요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토라의 전부이다. 나
머지는 주석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토라 전체를 대변할 하나의 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바리사이파 최고의 학자였던 힐렐이 율법 전체를 엄격하게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그 율법의 근본정신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토라 전체라고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바리사이파가 통념대로 율법의
자구 하나 하나를 생명처럼 여겼다면 힐렐의 태도는 불가능했을 것이
다. 그런데 율법의 정수를 찾아서 제시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힐렐 뿐
이 아니었다. 힐렐보다 조금 뒤에 살았던 아키바는 “네 이웃을 너 자신
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에 있어서 가장 큰 원칙이다.”라고 말하였
다.21) 이렇게 힐렐이나 아키바는 율법의 근본 정신을 제시하면서 율법
의 자구에 얽매이는 것보다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
20) J. Neusner, The Rabbinic Traditions about the Pharisees Before 70, vol. 1,
(E. J. Brill, 1971), 323에서 재인용.
21) Sifra kedoshim 4 : 12.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05
치고 있다.22)
따라서 율법의 최고 정신을 하나의 ‘새로운 계명’으로 제시하려는
시도는 예수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랍비 힐렐과 아키바 역시 그
런 시도를 했으며, 마가복음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율법사들이 그런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23) 결국 예수가 제시한 원리가 ‘새 계
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유대교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
대교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한편으로 새 계명
을 제시한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
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24) 말함으로써 율
법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모순적인 행위를 한 것이 해명가능하다. 힐렐
이나 아키바가 율법의 근본 정신을 제시하고자 했을 때, 그 누구도 두
랍비가 율법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고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랍비가 위대한 스승으로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정신을 망
각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받아들였다. 예수의 태도도 똑같은 잣대
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22) Elliot N. Dorff, Love Your Neighbor and Yourself: A Jewish Approach to
Modern Personal Ethics,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2006),
269 ; 최갑종 편역, ?최근의 예수 연구?,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p.
156-158.
23) 토라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토라 전체를 상징할 수 있는 말을 케랄(Kelal)이라
고 했다. 율법을 이렇게 하나의 정신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구약시대부터
계속 되어왔다. 이에 대해서는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Fortress Press, 1977), 114을 보라. 바리사이파 내에서
이렇게 정신을 강조하는 파와 세부 규정을 강조하는 파가 있었다. 이에 대해
서는 John Bowker, Jesus and the Pharisees, (Cambridge Univ. Press, 1973),
30-31을 보라.
24) 마태복음 5 : 17-18.
406 ∥역사와 담론 제61집
않았다. 다만 율법의 근본정신을 부각시킴으로써 율법을 지킬 때 그
정신에 두 무게를 두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3. 정결례 논쟁
앞장에서 예수가 율법의 최고 정신을 사랑이라고 제시한 것은 율법
을 폐지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살펴보았다. 이런 평가는 바리사이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20세기 중반 이전 기독교
신학자들은 바리사이파를 형식적 율법주의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의 신학자 가운데서도 예
수가 율법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가령 불트만은 구약의 율법의 대한 예수의 태도
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말은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해 예수가 개혁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
았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이 구절들은 구약 성서에
대한 자명한 권위적인 태도, 즉 비판적으로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 본질적인 것과 예사로운 것 사이를 구별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
예수가 구약 성서의 권위에 대해 논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공동체
의 후대의 태도, 즉 구약성서와 율법을 성실히 고수하고 바울과 충돌
한 태도가 증명해준다.25)
이 구절을 보면 분명 불트만은 유대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예수가 했던 작업을 제대로 평가하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예수는 구약에서 본질적인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을 구별하는 작업을 했
25) R. 불트만/허혁 역, ?신약성서신학?, 성광문화사, 1976, pp. 13-14에서 재인용.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07
다. 예수의 이런 태도는 구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가 모르
는 사이에 결국 구약을 부정하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구약에서 중요치 않은 것, 혹은 예사로운 것은 무엇인가? 여
러 학자들이 이를 정결례에서 찾았다. 이들은 여러 가지 논리나 분석
을 내놓으면서 예수와 바리사이파의 논쟁은 안식일 논쟁을 제외하면
모두 정결례에 관한 것이고, 바리사이파가 생명처럼 지키려고 했던 정
결례 규정들은 예수는 폐지하려고 했다고 주장하였다. 가령 현대 신학
자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크로산 은 이렇게 분석하
였다.
이제까지 논의한 단락들을 기초로, 나는 예수가 그런 제의들에 대해
공격을 하거나 아니면 인정을 하거나 할 만큼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
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런 것들을 무시했으며, 이것은 물론 가장 근
본적인 차원에서 그것들을 뒤집어 엎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일부 추종자들은 예수가 그 제의들에 대해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
수는 그 율법들을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추종자들은 예수가 그 율법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것에 반대했음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26)
여기서 크로산은 예수가 정결례를 명시적으로 공격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제자들은 양
가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27) 크로산의 이런 태도는
26) 존 도미닉 크로산/김준우 옮김, ?역사적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pp.
428-429.
27) 예수 세미나단의 창설자인 펑크 또한 로버트 펑크/ 김준우 옮김,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p. 311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복
음서 기록들을 통해 예수가 정상에서 벗어난 갈릴리 사람이었고 사회적으로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그의 일탈과 무차별은
그가 선포하도록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하느님 나
408 ∥역사와 담론 제61집
예수의 개혁이 유대교를 깨는 것이었고, 예수의 제자들이 ‘재유대화’했
다는 논리를 약화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근본적으로 그 논리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입으로 논쟁을 통해서, 혹은 명확한 지침
을 통해서 정결례를 폐지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시적
인 행동으로 정결례를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그 의미를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크로산은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면서 예수가 정결법을 무시하
고 폐지하려는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개방된 공동식사’이었
다. 크로산에 따르면 예수는 세리, 죄인, 창녀들과 어울렸으며, 그들 모
두를 함께 식사할 대상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그들 모두가 예수가 추
구하는 새로운 세상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정통 유대인은 그런 죄인들
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정결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나병환자 치료에 대한 기사이다.28) 마
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에게 치료를 간청했
을 때 예수는 그에게 손을 대고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환자의 병이 나았다.29) 크로산은 이를 설명하면서 “예수는 물론
나병 환자를 손으로 만졌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정결 규례에 개
의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고30) 말하고 있다.
라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정결
법 조항들과 금기사항들을 무시하였고 위반하였다.”
28) 크로산의 논의와 별개의 것이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예수 시절에
도 율법 준수에 대한 세부 규정이 완벽하게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바리사이
파 내부의 힐렐파와 샴마이파는 계속 대립, 논쟁하면서 적절한 규저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가령 안식일 날 예수는 안식일에 나병 환자를 기도하여
치료하였다. 그런데 힐렐파는 이를 허용하였지만 샴마이파는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Harvey Falk, Jesus the Pharisee, (Wipf & Stock,
2003), 149을 보라.
29) 마가복음 1 : 41.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09
앞에서 설명했지만 크로산의 이런 평가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베드
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이 정통 유대인이었고 예수가 병을 치료하
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을 터인데 그때마다 예수가 정결례를 지키지 않
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율법을 여기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들이 다시
율법 준수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필자는 크로산 역시 ‘재유
대화’의 가설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자면 우리는 유대교의 정결 규정에 대해서 근본
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유대법에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부정
한 것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예수가 나병환자를 만졌던 것은 유대법
을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만약 의사가 나병 환자를 비롯한 환자를
치료하려면 그를 만지는 것이 불가피할 수 있다. 아니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스러운 행위일 수도 있다. 병이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치료를 하기 위해서 환자를 만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가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이 ‘성스러운’ 행동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말
인가? 그것은 당시 바리사이파의 해석에 따르면 나병 환자를 비롯한
부정한 자를 만지지 말라는 계명보다 환자를 치료해주라는 계명이 더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나병 환자를 만졌던 것은 정결례 제도
나 유대 율법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도
당연히 예수가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31)
세리, 죄인, 창녀와 어울렸다는 것도 정결례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
율법에 부정을 야기하는 것은 시체, 나병, 생리, 성병 등으로 명시되어
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세리가 죄인인 것은 맞지만 죄인이 정결법상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가 죄인의 상태를 벗어나려면 회개를 해야지
침수할 일이 아니다.
30) 존 도미닉 크로산/김준우 옮김, ?역사적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p.
517.
31) Hyam Maccoby, Jesus the Pharisee, (SCM, 2003), 41.
410 ∥역사와 담론 제61집
물론 이런 자들이 정결법상 부정하다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의견일 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설령 그
들이 정결법상 부정하다고 해도 예수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정결해지기 위해서 침수를 하거나 혹은 그들과 어울린
후에 예수가 침수를 하면 될 일이다. 앞에서 나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분명 부정을 초
래한다. 따라서 그를 만진 예수는 부정해졌으며,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기를 원한다면 먼저 침수해서 부정을 씻어내야 한다. 바로 이점이 지
금까지 기독교 계통의 학자들이 근본적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은 모든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려고 했으며, 정결 규정을 형식
적으로 지키는데 골몰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시체를
만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정결 규정을 어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생리
를 하거나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다면 부정해
졌을 뿐이다. 그렇게 부정해졌다고 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그는 다면 부정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그가 하느님에게 의례를 행하고자 한다면 정결 의식을
치루면 그것으로 족하다.32)
결국 예수는 율법이나 율법의 하위 조항들인 정결법을 의도적으로
어기거나 폐지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그것
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후에 계속 율법을 준수하
는 유대인으로 행동하였다. 따라서 재유대화 가설은 근본적으로 잘못
32) Hyam Maccoby, Jesus the Pharisee, (SCM, 2003), 40-43. 이 문제를 고민하
는 사람들은 구약에 규정된 불결을 도덕적 불결과 의례적 불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분하고자 한다. 도덕적 불결은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것이며 회
개를 통해서 정화된다. 그러나 의례적 불결은 생리나 시체를 만지는 것에 유
래하기에 누구나 범할 수 있는 것이며 침수를 통해서 정화된다. 이에 대해서
는 R. Bauckham, “James, Peter, and the Gentiles” The Missions of James,
Peter, and Paul, ed. B. Chilton & C. Evans, (Brill, 2005), 92-94를 보라.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11
되었다.
4. 율법의 개혁자
나병 환자를 치료한 기사 말미에서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
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33)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유대
의 정결 제도를 준수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
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율법을 폐지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명확히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대로
예수가 율법의 폐지를 천명하지도 않았고, 정결례를 위반하는 행동을
일상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면, 율법의 수명이 다했다는 바울의 주장
은 어떻게 나왔을까? 그의 사상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었을까? 이는 참으로 난제이다.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기에 수많은 학자들이 예수가 정결법을 어김으로써 율법 폐지
의 길을 열었다고 해석해왔던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율법에 대한 신학을 전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 다만 한가지만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바울 시절까지 유대인
출신의 신자들은 모두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율법의 수명이
다했다고 주장했던 바울조차도 율법을 지켰다. 다음 구절은 율법에 대
33) 마가복음 1 : 44.
412 ∥역사와 담론 제61집
한 바울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
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
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34)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유대인 출신의 신자들에게, 혹은 기독교를
믿지 않은 유대인에게 ‘이제 율법의 수명이 다했으니 율법을 지킬 필
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만날 때면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 그렇지만 이방인을 만날 때면 유대의 율법에
구애되지 않고 이방인의 풍습에 따랐다.
바울은 자신의 이런 태도를 베드로와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를 비
롯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승인받았다.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율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공식
적으로 인정되었다. 이 회의에는 베드로는 물론 주의 형제 야고보 또
한 참가하였다. 그리고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교제함에 있어서, 또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유대인 출신 신자도 율법을 지키지 않
아도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 적어도 베드로가 동의했음에 틀림없다.35)
이는 이른바 ‘안티오키아 사건’에서 드러난다.
34) 고린도전서 9 : 21-22.
35) 베드로는 고르넬리우스 개종 사건 때부터 이미 이런 신학을 견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R. Bauckham, “James, Peter, and the Gentiles”
The Missions of James, Peter, and Paul, ed. B. Chilton & C. Evans, (Brill,
2005), 115-116, 133을 보라.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13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열린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베드로는 안티오키
아 교회에서 바울이 이끄는 그곳의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리를
떴다. 그러자 바울이 고함을 치면서 베드로에게 항의하였다. 이때 이방
인 출신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율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베드로가 그 자리를 뜰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야보고가 보
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와 바울은 율법을 어기고 있었음에 틀
림없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필요한 경우 율법을 어겨도 된다고 신학
적으로 동의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방인 출신 신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고 주장했을 때, 나아가 유대인 출신 신자라고 해도 이방인과 교제할
때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을 때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그의 주장을 승인할 수 있었을까? 베드로와 제자들의 생각에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그런 주장이 나올 수 없었다면 그들은 바울의
주장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바울이 그런 주장을 했을 때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재점검해 보았을 것이며, 그 속에서 바울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36)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바울의 주장을 승인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면, 과연 그 가르침은 무엇일까? 여기서 안식일 논쟁을 살펴보자. 공관
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다
가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다. 바리사이파가 이 사실을 알고는 “당
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37) 하고 말
하면서 항의하였다. 이 안식일 규범 위반은 성경에 전하는 이야기 가
운데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바리사이파가 규정한 율법을 어긴 유일
36) Martin Hengel, (tr.) T. Trapp. Saint Peter : The Underestimated Apostle,
(William Eerdmans, 2006), 52-65.
37) 마태복음 12 : 2 ; 마가복음 2 : 23.
414 ∥역사와 담론 제61집
한 사례이다.38)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비판을 듣고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데 당연히 제자들이 예수의 사전 허락을 받고 이
삭을 따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의 허락 없이 율법을 어기
는 행동을 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논리로 이삭을 따먹었다고 된다고 허락했을
까? 예수의 생각은 바리사이파의 질문에 대한 답 속에 있다. 예수는 옛
날 다윗도 시장하여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제단에 차려 놓은 빵’
을 먹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예수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만
들어진 것이 아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이런
생각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유내교의 틀 내에서 나
올 수 있는 것이었다. 랍비 시메온 벤 메나샤(Simeon ben Menasya)도
똑같은 취지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39)
이렇듯 예수는 율법의 형식이나 자구보다는 정신과 대강을 강조하
고 있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안식일이지만 몹시
배가 고프니 이삭을 따 먹어도 되는지’ 물었던 것이다.40) 만약 예수가
평소에 율법을 엄격하게 자구대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그런 상
황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제자들이나 바리사이파가 보기에 예수의 율법 준수방식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2장에서 설명했듯이 율법 전체를 관통하
는 정신을 강조하면서 개별 조항들을 유연하게 해석하곤 했던 것이다.
38) 정기문, 「바리사이파와 예수의 율법 논쟁」, ?서양고대사연구? 29, 2011, p.
137.
39) B. H. Young, Jesus : The Jewish Theologian, (Hendrickson, 1995), 106-
109.
40) 소유권 개념에 익숙한 현대인은 이삭을 따먹는 것을 불법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에게 시장하여 이삭을 따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 이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행동을 안식일에 해도 되는 가이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15
예수의 이런 해석법은 때로 율법 제도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여겨
졌다. 그래서 예수가 율법을 폐지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반대파
가 비난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는 자신이 율법을 폐하려
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런 소문이나 의심이 없었다면 예수가 굳이 ‘내가 율법이나 예
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강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
수가 율법을 이렇게 유연하게 해석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안식
일에 배가 몹시 고프면 안식일 규정들을 어기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
을 것이다. 그 때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고
답하면서 가능하다고 답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율법의 큰 줄기와 정신을 강조했고, 율법의 최고 원
리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쳤음에 틀림없다. 예수 당대에는
이런 가르침이 새로운 계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개혁적인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이 주장했듯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었다.
예수가 율법이나 정결례를 어겨도 좋다고 가르친 적이 없기에 예수가
죽은 후에 그의 제자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켰다. 따라서 ‘재유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예수가 죽은 직후에는 율법 문제가 주요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다. 예루살렘 교회 설립 직후 화두는 역시 예수
가 메시야였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이 새로운 사실
을 유대인에게 선교해야 했기 때문에 율법 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필요
가 전혀 없었다.
율법 문제가 교회의 뜨거운 화두로 등장한 것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
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이루어졌다. 디아스포라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
들이 그랬던 것처럼 최초의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은 대부분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41) 그들은 다른 유대인 공동체에 속했던
자들처럼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이들의 숫자
416 ∥역사와 담론 제61집
가 늘어나면서 유대인 출신 신자와 이방인 출신 신자 사이의 접촉이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바울의 신학이 탄생하였다. 바울의 신학에 동의
하는 자들은 예전 예수가 율법의 대강을 ‘사랑’이라고 했던 것을 떠 올
리면서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예수가 율
법의 의미를 새로이 설정했기에 바울의 신학이 가능했고, 예수 제자들
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는 율
법의 완성자이자 개혁자이다.
5. 결어
그동안 기독교의 탄생에 대한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거대한 ‘신화’
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의하면 예수는 유일무이한 신적 존재로서
수명이 다하고 형식만 남은 유대교를 단숨에 철폐하였다.42) 예수가 유
대교를 철폐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교의 핵심인 율법의 폐
지이다. 예수는 안식일과 정결례에 대한 율법을 명백하게 어김으로써
유대교와의 결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신화’를 그대로 믿을 경우에 해명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
다. 예수가 죽은 후 베드로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율법을 잘 지켰다
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서 명시되어 있기 때
문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떻게 스승이 율법을 폐지하라고 가
르쳤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서 율법을 어겼는데 그의 제자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이 될 수 있었는가? ‘신화’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41) J. Dominic Crossan & J. L. Reed, In search of Paul, (HarperSanfrancisco,
2004), 23-24.
42) Burton Mack, The Christian Myth : Origins, Logic, Legacy, (Continum,
2001), 59.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17
도 이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서 아주 기괴한 가설이 등장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둔하고 어리석어서 예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재유대
화’했다는 것이다. 2세기의 이단이었던 마르키온이 만들어낸 이 가설
은 근대 신학의 아버지 바우어를 거쳐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
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루어진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가가 이
가설을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뉴스너 등이 물꼬를 트고
샌더스가 발전시킨 새로운 평가에 의하면 유대교는 결코 율법의 형식
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 특히 예수의 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바리사이
파는 율법을 시대와 현실에 맞고, 인간에게 이롭기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힐렐을 비롯한 바리사이파는 율법의 기본원칙을 제시함으
로써 율법 준수의 유연화를 꾀하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율법에 대한 예수의 여러 행동은 이런 유연화 작업
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예수는 분명 정결례 규정에 얽매이기 보다는
병자나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흔히 생
각하고 있듯이 예수의 그런 행동이 당대에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여겨
지지 않았다. 바리사이파의 해석에 다르면 율법에는 경중이 있고, 또한
시대가 변화하면서 율법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정결례
규정은 그것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했다. 바리사이파의 이런 해석이 율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인
식되지 않았듯이 예수의 해석이나 행동도 율법을 폐지하는 것으로 비
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율법에 대해서 전혀 개혁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았
는가?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예수가 율법의 유연화 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일부 예수의 적이나 또는 제자들이 예수가 율법을 존
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비판에 대해서 예수는 자신은 율법
을 폐할 생각이 없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418 ∥역사와 담론 제61집
예수 당대에는 그의 주장이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율법을
유연하게 해석하기는 했어도 율법을 준수했던 예수에게서 배운 예수
의 제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수립 이후에 율법을 준수하였다.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 수립 이후 율법을 준수했던 것은 결코 ‘재유대화’가 아
니었다. 이들이 율법을 유연하게 해석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적
극적으로 밀고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 교회 수립 직후 당면과
제가 율법문제가 아니라 메시아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 선교가 실시되고 이방인이 교회 내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율
법문제가 교회의 화두로 등장하였다.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활
동하던 바울이 율법의 선택적 준수론을 들고 나왔을 때 주의 형제 야
고보와 베드로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바울의 주장이 예수의 가르
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일찍이 제시했던
율법의 대원칙은 ‘새 계명’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예수가 사
랑이라는 새 계명을 제시했다는 명제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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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 2011. 11. 4, 심사시작: 2011. 11. 5, 심사완료: 2011. 12. 5.]
주제어: 예수, 율법, 폐지, 바리사이, 유대교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는가? ∥ 421
<Abstract>
Did Jesus abolish the Law?
Jung, Gi-moon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Christianity Jesus, the Son of God
abolished the Judaism and founded the Christianity with one stroke. It
is the nullification of the Law that is the symbol of his abolition of the
Judaism. Jesus showed the worthlessness of the Law as he violated the
rule of Sabbath and several ritual laws.
But if we accept this doctrine as true we are faced with an inexplicable
question. Peter and the followers of Jesus who participated in the
Jerusalem Church observed strictly the Law. Why did the Jerusalem
Church observed the Law in disregard of the teaching of Jesus. Marcion
who took notice of this fact for the first time offered a strange
hypothesis. According to this hypothesis Jesus abolished the Law. But
the followers of Jesus backslided to Judaism after the death of Jesus.
The modern scholars of theology such as F. C. Baur revived this theory
of re-Judaization. The influence of this theory continued until now.
Since the middle of 20th century several efforts were carried out to
overcome this theory. The active and sincere study of Judaism changed
the prejudiced view that Jews in the time of Jesus pursued the strict and
formal legalism. For example E. P. Sanders showed that the 1st century
422 ∥역사와 담론 제61집
Palestinian Jews did not believe in works righteousness. Especially the
Pharisees, the opponents of Jesus tried to reinterpret the Law considering
the living conditions of common people and to alleviate the burdens of
the common people.
We should interpret the acts and teachings of Jesus described in the
New Testament in this new point of view. The contemporaries of Jesus
did not think the acts of Jesus such as touching a leper as disregard for
the Law. Because the Pharisees did not regard everything in the Torah
as equally significant. Contrary to the common view they didn't stick
to legalism but were interested in searching for fundamental truths in
the Torah. So the leaders of Pharisees, such as Hillel and Akiva,
regarded love for God and neighbors as the greatest principle of the Law.
Jesus gave emphasis to the spirit of the law like these leaders. Therefore
he didn't try to abolish but to perform the Law.
The followers of Jesus knew the teachings of Jesus. Their observances
of the Law in the early time of Jerusalem did not run counter to the
teaching of Jesus. on the contrary because they did remember the
teaching of Jesus on the Law, they could agree the opinion of St. Paul
who argued the abolition of Law for the Gentiles.
key words : Jesus, Law, abolition, Pharisees, Juda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