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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칼 래스키의 정의(justice) 담론으로서 종교연구 제안/박일준

A Methodology of Religious Studies After the Age
of the Postmodernism: Carl A. Raschke’s
suggestion of Religious Studies as a Discourse
wakening up Justice.
Iljoon Park*1)



Ⅰ. 들어가는 글
본고는 덴버 대학교 종교학부 학과장인 칼 래스키(Carl Raschke)
의 종교연구 방법론에 대한 종교철학적 제안을 소개하고자 한다. 래스
키의 이론적 제안을 도입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종교 연구 관행 안
에는 ‘정의(justice)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이
다. ‘세상의 없는 자들을 선택하여서 있는 자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
으로 만든다’1)는 신약 성서 바울의 이야기를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종교는 세상의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한다고 하
는데, 정작 종교 연구는 ‘정의에 대한 관심’을 결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의에 대한 무관심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무관심하
게 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여겨진다. 사실 소위 탈근대의 시대 이
후 우리에게는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관심이 사라진 듯하다.


1) 고린도전서 1:28 (개역개정).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23


그 물음과 관심의 상실은 비단 종교에 대한 정의(definition)에서만 문
제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 고유의 본래적인 어떤 것 마저 망각해 버리
게 만든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있다. 종교는 시대를 변혁하는 해
방의 “적극적 힘”(active force)2)을 담지하고 있다. 래스키는 이 종교
본연의 해방적 힘을 종교 이론의 구성을 통해서 복구하고자 하며, 그
해방적 힘의 복구는 바로 기존의 지적 담론 체계가 간과하고 있는 것
혹은 비존재로 간주하는 잉여적 존재들에 대한 유적 특이성(generic
singularity)을 이론화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최근 종교 연구들은 다양성에 치우쳐 각 분과들 사이에서 방황하
고 있다. 다양한 종교연구 분야들이 있지만, 정작 그들 분야나 개별
학자들이 생각하는 종교는 개념적으로 전혀 공유되지 않는다. 종교 연
구자들이 더 이상 보편적인 혹은 근본적인 의미의 종교에 대한 정의
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던 소위
포스트모던의 시대 이후 우리는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는 “기호학적 환상의 산물이거나, 모더니즘이 낳
은 문화적 환상의 창조물일 뿐이며,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종교체
계’(religious system)”이다.3) 외적 실체로서의 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혹은 종교의 의미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
들은 애초부터 잘못 설정된 물음들이다. 종교는 상징체계로서 의미를
배태하지만, 상징은 그 자체로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따라
서 종교의 의미란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이며, 오히려 종교는 ‘기의(記
意) 없이 부표하는 기표’와 같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종교적 상징
체계의 형식, 즉 그 기의 없는 기표가 조직되는 형식에 관해서 물어야
한다.4) 그래서 이미 오래전 막스 베버는 『종교사회학』 서문에서 ‘연


2) C.A. Raschke & V. Taylor, “From Alchemy to Revolution: a Conversation with
Carl A. Raschke,” Journal for Cultural and Religious Theory, vol.12, no.3(spring
2013), p.157.
3) 이창익, 「자연주의적 종교연구와 종교학의 죽음」, 『종교문화연구』제13호
(2009), pp.133-134.
4) 앞의 글, p.134.
124 ?종교연구? 제74집 1호


구 시작 초기에 종교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연구 말미에 가
서야 가능할 것’이라고 했지만, 책을 마칠 때까지 종교에 대한 어떤
명확한 정의도 내려주지 않았다.5) 종교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어려움
은 종교현상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는 역동적 현상이
고, 따라서 당시에 주도적이었던 관념적·논리적 그물로는 그것을 포착
할 수 없다”6)는 사실로부터 기본적으로 비롯된다.
종교연구는 그런 불/가능성의 것을 개념화시키는 이론적 작업으
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종교 연구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반란(의) 내재
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즉 “감히 물을 수 없었던 ‘초월’이며, ‘신성’이
고, ‘궁극적인 것’으로서의 종교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여 삶을 이루려고 할 경우 필연적으로 수용
되는 ‘그냥 믿어 버릴 수밖에 없는 차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7)한다
는 점에서도 분명 기존에 대한 저항 내지는, 더 나아가, 반란(rebellion)
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 연구는 종교에 대한 이론적 정의나 현상학
적 기술의 차원을 벗어나서 문화 비평 혹은 사회 비평으로서 역할을
가담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그래서 칼 래스키(Carl Raschke)는 종교에 대한 다양한 현상학적 기
술에 집중하는 풍토로부터 종교적인 것이라는 ‘유적 특이성(generic
singularity)’에 대한 이론 형성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먼저 래스키
는 ‘다양성’만이 존재하고, 정작 우리가 공통의 연구 대상으로 삼는
‘종교는 무엇인가’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종교
연구 풍토를 개탄하면서, 이를 통해 상실되는 바는 종교 자체의 근원
적 힘이라고 강조한다. 역설적으로 19세기의 근대 제국들은 식민지들


5) Max Weber, The Sociology of Religion (Boston: Beacon Press, 1963), p.1; 정태
식, 「종교의 정의(定義)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일고찰: 막스 베버의 이념 표
상적 구성을 바탕으로」, 『현상과 인식』가을호 (2008), p.174.
6) 신상형, 「비트겐슈타인과 제임스: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관점」, 『철학논
총』제67집 제1권 (2012), p.190.
7) 장석만, 「문화비평으로서의 종교학」, 『한국종교연구회회보』 2호(1990),
p.5.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25


을 통치하면서 바로 이 종교의 근원적인 힘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
은 새로운 식민지들을 개척해 나가면서,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종교’
와 그와 연관된 문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종교는 시대를 변
혁하고 바꾸어 나갈 역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종교적 다양성의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종교의 혁명적
역동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다양한 연구들 속에서 역설적으
로 종교는 이미 그러한 문화 변혁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
적 민족적 다양성을 체현하는 구조로서 현상학적으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래스키에 의하면, 종교의 이 근원적 힘은 기존 제도와 사회
현상들 안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바로 그렇기 때
문에 그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은 기존 제도권 ‘종교들’에 대한 현
상학적 관찰과 판단중지를 통해서 기술되지 않는다. 종교들에 대한 현
상학적 기술들은 기존의 질서를 깨부수며 난입하는 이 종교적인 힘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것, 그것은 지젝(S. Žižek)이
말하는 ‘실재(the Real)’과 같은 것으로서 비록 종교 연구라는 제도화
된 시스템이 포착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연구 시스템이라는 상
징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 실재를
우리는 직접 관찰하거나 대면할 수 없다. 그 실재는 우리에게 그래서
왜곡되고 뒤틀려진 모습으로 보여질 뿐이다. 역으로 우리 종교연구의
상징계 속에서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의 실재는 언제나 우리 사유
시스템이 결함을 보이고 오류를 일으키는 곳에 존재한다는 말이 되기
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종교 연구는 ‘다양성’을 이질적 다양성 혹은 그것
의 집합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을 의미적으로 지시하는 기표들의 끊임
없는 탈영토화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적 상징기호들의 의미화
작용(semiosis) 속에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의 끊임없는 차연(差延
différance)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8) 하지만 그 차연은 데리다(J.


8) 종교를 ‘기의없이 부표하는 기표’로 읽어낼 때, 이는 데리다의 차연과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게 된다
126 ?종교연구? 제74집 1호


Derrida) 식의 무한한 차이의 증식이 아니라, 기존 구조에 순응하지 않
은 혹은 기존 구조가 탈각시켜왔던 실재의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다. 따라서 종교적인 것의 실재가 가져오는 이질성은 기존구조가 자신
의 입맛대로 길들여 왔던 ‘정의에 대한 관심’이다. 즉 기존 세계 속에
서 온전한 것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들을 통해 종교는 기존 질서
의 부정의를 폭로하고 해체함으로써 정의를 향한 관심을 일깨우는 것
이다.9)
이제 소비자본주의가 전 지구의 계층들을 1:99로 나누어가면서,
우리를 무한경쟁으로 몰아 넣어, 그 소비자본주의의 소모품으로 쥐어
짜고 있을 때, 종교연구자들이 깊이 숙고해야 할 물음은 종교의 의미
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라는 기호 시스템이 그 작용을 통
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 물음이 바로 본고가 대답하
려는 물음이다.


Ⅱ. 종교연구, 존재적 잉여로서 실재(the Real) 연구
래스키(Carl A. Raschke)는 종교가 담지한 시대변혁적 힘에 주목하
고, 그 힘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통해 정의(justice) 담론을 다시금 우
리 시대에 일깨울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종교란 본래 부정의한
세상의 한 복판에서 하나의 존재로 온전히 대접받지 못하는 잉여같은
존재들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우선 래스키는 종교 이론(religious theory) 연구로서 종교철학
(philosophy of religion)을 제안한다.10) 래스키에 따르면, 종교란 “형식”


9) 참고 – 마크 테일러(Mark C. Taylor) & 칼 래스키(Carl A. Raschke), 「종교에
관하여: 마크 테일러와의 대담」, 이용범 역, 『종교문화비평』2권(2002),
p.245.
10) Carl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Toward a
Semiotics of the Event (Charlottesville and London: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27


이나 “문화적 배치” 혹은 “본질” 혹은 “현상들의 유적인 특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특이성(singularity)”로서, 그 주변에 “언어와 문화의 기호
들이 무리짓고 순환하는” 지점이다.11) 따라서 우리가 종교란 무엇인가
를 이해하려면, 종교현상이 드러내는 상징들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상징들을 가능케하는 종교적 기호들의 “현상-횡단적
(trans-phenomenal)”12)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를 그 시초점
즉 그라운드 제로에서부터, 다시 말해 제도 종교들의 현상과 유행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해야 한다
는 말이다. 종교(들)의 현상학적 연구에서 간과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
다. 현상-횡단적 특성을 갖는 것들은 주관적 구조로부터 ‘구성
(construct)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formalism)을 갖추고 있는데, 이
형식은 결코 손에 잡히는 어떤 것으로 물질화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실재적(eminently real)”13)인 것이다. 하지만
현상-횡단적(trans-phenomenal) 특성을 지닌 이 형식은 기존의 논증과
탐구와 발견의 분야들에서는 “비일관성들(inconsistencies)이나 변칙들
(anomalies)”로 간주되는 것들로서, 우리는 그것을 실체적으로 입증하
거나 포착할 수 없고, 퍼어스(C.S. Peirce)의 용어를 빌린다면, 겨우 “가
설유도적 추리(abduction)”를 통해서 “일련의 의미 있고 무한한 샘플이
나 예들의 연쇄들”로서만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14) 거기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의 실재’를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기호연쇄의 일부로 여겨지는 사건의 탐지”에 이르게 될 뿐이다.15) 그
모호하고 불분명한 사건 지평의 애매한 경계에서 의미는 “가상적인
것의 초-실재성(this sur-reality of the virtual)”에 의존하여 출현한다. 여
기서 가상이란 비실재적이거나 가설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2012), p.30.
11) Ibid., p.5.
12) Ibid., p.5
13) Ibid., p.6.
14) Ibid., p.6
15) Ibid., p.6
128 ?종교연구? 제74집 1호


실재(the real)의 효과를 드러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
체로는 ‘실재 자체’가 아닌 그래서 관찰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다.16)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의(justice)’를 요구한다. 낯선 이
방인과 타자에게 부당한 인식적 폭력이 휘둘러지지 않도록 말이다.


1. 문화주의자의 오류(culturalaist fallacy)
1990년 대 초 데리다(Jacques Derrida)와 바띠모(Gianni Vattimo)는
“종교의 귀환(the return of religion)”을 공표했고,17) 이는 2001년 9·11
사건으로 인해 새삼 주목받으며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그에 대한 다양한 현상학적 연구들은 정작 우리는 ‘종
교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할 이론적 틀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문화주의자의 오류(culturalist fallacy)”18) 때문이
었다. 래스키(C. Raschke)에 따르면, 이는 “기호적 표시들이나 팽창해
오르는 기호-기능들을 근원적 문화적 실재들로서 잘못 동일시하는 것”
으로서, 칼 맑스의 용어들을 차용하자면, “하부구조를 상부구조로 착


16) Ibid., p.8; 최근 사건의 철학이 바디우의 철학이 소개된 이래로 지구촌 여러
곳에서 호평과 득세를 얻고 있다. 하지만 래스키는 그 사건의 철학에는 핵심
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바로 “종교적인 것 자체”이다(the
religious per se; Ibid., p.8). 이미 바디우(A. Badiou)도 인정했듯이, 진리란 명
명불가능하고, 분별불가능하고, 결정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리 사건이란 그
비결정적인 것에 대한 운명의 도박을 요구하기 보다는 지속적인 재해석의
노력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바디우의 진리의 투사는 언제나 학인(學
人 savant)이기 때문에, 진리 사건은 언제나 특정 상황을 위한 진리를 폭력적
으로 전해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 사건 개념
은 그 진리의 기호적 중층성과 중첩성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래스
키는 종교적인 것의 진리 혹은 실재는 기호적 의미화작용(semiosis) 속에 드
러나며, 이 의미화 작용은 언제나 ‘사건의 특이성’(the singularity of the event)
이 아니라, 그 특이성의 폭발 이후 전개되는 사건 지평(the event horizon)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Ibid., p.212).
17) Ibid., p.1; John D. Caputo & Gianni Vattimo, After the Death of Go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pp.10-13 참조.
18)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2.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29


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19) 따라서 사회철학자 올리버 로이(Oliver
Roy)는 그것이 결국종교의 귀환이 아니라, 종교의 “변혁
(transformation)”이었다고 분석한다. 말하자면, 종교현상들이 우리 주변
에서 성행하고 있어서, 우리는 ‘종교의 귀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은 로이에 따르면 “단순한 시각적 착각(merely an opitical illusion)”20)에
불과하며,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종교적 현상들의 번성 속에서 종교적
인 것(the religious)이 어떤 근원적 변혁을 겪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연구는 이런 종교적 변혁의 흐름들을 포
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래스키는 진단한다. 그 이유는 종교 연구들을
뒷받침하는 종교이론이 “대륙철학과 종교학(Religionswissenschaft)의 유
산 그리고 20세기 초 에밀 뒤르껭이 주창한 사회학적 기능주의와 행
보를 같이하는 19세기 본질주의의 눈으로”21) 종교를 구성해 내고 있
기 때문이다. 근대 철학의 본질주의적 함축성을 극복하려는 최근의 시
도들은 “이론적 서술주의”나 “방법론적 특별주의(methodological
particularism)”에 빠져,22) ‘포스트모던’ 시대가 지향하는 다양성과 차이
에만 집중하느라, 종교 연구 전체를 이론적으로 결속시킬 수 있는 토
대를 상실해 왔다. 그러한 기존 이론들을 넘어서서 최근 종교 이론에
관심하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세속 신학, 약한 신학 혹은 종교
없는 종교”23) 등과 같은 용어들이 일종의 이론 체계인 것처럼 들려지
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이론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다.24)


19) Ibid., p.2.
20) Ibid., p.2.
21) Ibid., p.3.
22) Ibid., p.35.
23) John D. Caputo, The Weakness of God: A Theology of the Event (Bloomington
&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참조.
24)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3; 사실 데리
다의 철학을 신학적으로 적용한 신학들과 개념들 즉 ‘약한 신학’(weak
theology)이나 ‘종교없는 종교’같은 류는 적어도 래스키의 눈으로 보자면 데리
다가 시도했던 철학적 혁명 즉 소위 ‘해체’라고 불리는 혁명과 그를 추종하
는 “값싼 데리다주의(cheap Derridism)” 사이의 간극을 전혀 주목하지 못하고,
무차별적인 데리다 상표의 인용에 불과하다(Ibid.).
130 ?종교연구? 제74집 1호


종교연구는 오랫동안 엘리아데의 작업을 통해 증거되고 있는 서술
주의적 관념주의가 주도해 왔었는데, 이를 우리는 “동일성 이론”에 기
반한 종교 연구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동일성 이론을 기반으로 비
교 종교학의 시대를 통해 서술주의는 식민의 역사를 공유한다. 따라서
래스키에 따르면 서술주의적 방법에 근거한 종교 연구는 “문화적 제
국주의”를 다양한 종교 현상들에 대한 객관적 기술로 가장하였다.25)
즉 다양한 종교 현상들을 지구촌 문화의 다양성으로 진열해 놓고 서
구 지식인들의 지식-쇼핑을 기다리며, 지식-상품들을 더욱 더 “인지
자본주의”26)의 체제 하에서 서구의 지식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품목
으로 가공하고 있는 중이다. 이 인종-문화 다양성의 지식 상점에서 지
식상품을 구매하는 서구지식인의 모습은 “연민의 얼굴을 하고 있는
식민주의”27)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 다양성을 문화적 평등성
으로 읽어낸다는 것은 이상이지만, 자본주의적 지식 상품으로 진영되
는 문화-다양성의 하부 항목 상품인 종교-다양성 상품은 그저 지적 연
민의 소비상품일 뿐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관용의 태도
를 가장한 우월주의적 경멸의 태도가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28)
래스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중
시하는 종교연구 흐름은 다양한 경쟁 종파들을 가장 무도회처럼 전시
해 냄으로써 사실상 “기독교―대체로 개신교 기독교―고백 공동체를
다원화하려는 시도”29)였다고 비판한다. 결국 종교 연구는 개신교 공동
체의 획일성을 해체하려는 시도이면서도 여전히 개신교적 발상에 종


25) Ibid., p.17.
26) 이 용어는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
의 재구성』(서울: 갈무리, 2011)에서 차용한 것이다. 지식과 감정 마저도 자
본화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려 착취의 대상이 되어버린 21세기 자본주의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27)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17.
28) Ibid., p.18; Wendy Brown,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 전략』
(Regulating Aversion: Tolerance in the Age of Identity and Empire), 이승철 역
(서울: 갈무리, 2010) 참조.
29)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p.21-22.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31


속된 시도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앙적 기획 때문에 종교연구는 결코
학문이론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고 래스키는 진단한다.30) 철학적 신학
이라는 표제 하에 출발하였던 종교에 대한 신학적 관심들은 이후 ‘해
체 신학,’ ‘새로운 현상학’ 혹은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31) 등
의 이름으로 회자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정작 종교 연구 분야들을
태동케 만들었던 제1의 물음 즉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종교에
관하여 이론을 만들어 내는가?”의 물음들을 회피한다.32) 이 연구들이
이 물음들을 회피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물음들을 묻지 못한다면, ‘종교’ 연
구는 결국 현상학적 서술 차원을 넘어 몇 발짝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종교에 대한 현상적 기술이 갖는 한계는 특정 종교문화에 대한 객관
적 서술이 “의미라는 차원으로 접어들면 이 객관적 진술은 아무런 설
명과 해석을 가능케 하지 못 한다”33)는데 있다. 그리고 의미의 문제가
개입하는 한, 이미 우리는 의미를 가능케 하는 해당 종교문화의 의미
체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 의미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유적 일
반성을 가능케 하는 지적 횡단을 시도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론은 우
리가 경험적으로 그리고 현상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서, 사건
의 유적 횡단성을 이론화시킬 수 있을 때 힘을 얻는다. 이러한 유적
횡단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론은 가치가 없다. 이전의 (탈근대시대의)
종교연구들은 이러한 유적 횡단성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견지하였고,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다양성과 차이를 기치로 하는 문화운동
의 흐름 속에서 이론을 포기하고 말았다.


30) Ibid., p.22.
31) John Milbank, Catherine Pickstock and Graham Ward, eds. Radical Orthodoxy: A
New Theology (New York: Routledge, 1999).
32)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23.
33) 서문기, 「사회발전과 문화: 기어츠(Geertz)의 비교문화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고찰」, 『사회과학논총』제15집(2012), p.130.
132 ?종교연구? 제74집 1호


2. 기호학적 연구로서 종교 이론 연구
래스키는 종교 탐구 분야에서 이론적 사유는 “기호적 사유 방식
(semiotic way of thinking)”34)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주의자의 오
류는 우리가 현상적으로 접하는 각 사건들은 ‘기호(sign)’일 수 있고,
그 기호가 언제나 기표/기의의 이분법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데서 비롯된다. 기호적 탐구란 곧 “인간 경험
의 극장적(theatrical) 특성”35)에 대한 모험적 사유를 가리킨다. 여기서
‘극장적’이란 곧 인간경험의 ‘모방적(mimetic)’ 특성을 의미하는데, 이
때의 모방은 복제(replication)나 재현(representation) 혹은 상응
(correspondence)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방이란 묘사의 현
장에서 (본래적인 것의) “미관손상을 초래하는 다시 그리기”로서, 곧
“지시대상을 초과하고 극복하는 지시 행위(act of reference)”를 말한
다.36) 이는 기호 대상을 표상하거나 재현하는 기호와 그 기호를 통해
재현되는 기호 대상간의 기호-연관성이 설정될 때면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종교 연구와 종교 이론 연구는 결국 말과 사물 간의 연관성을
다루거나 혹은 “자연을 명석 판명한 관념들에 따라 거울처럼 비추
는”37) 일이 아니라, 여타 인문학의 작업들처럼 “모방의 ‘극장’에서 정


34)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29.
35) 여기서 ‘극장적(theatrical)’이란 말은 ‘이론적(theoretical)’이란 말과 함축성을 공
유한다고 래스키는 재치를 발휘한다(Ibid., p.29).
36) Ibid., p.29;이를 래스키는 위추(僞推 paralogy)라 이름하는데, 일종의 “담론적
비유의 남용(catachressis)”으로서, “전체적으로 새로운 기호 운동이 일어날 때
까지, 한 본문의 배치 구조 내에서 구문론적 관계들을 굽게 만들고, 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Ibid., p.39). ‘para-’라는 접두어는 “-을 넘어(beyond), -외에
(aside), 잘못된(amiss)”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는 개작이나 변동을 함축한다
(Ibid.).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para-’라는 접두어는 ‘post-’라는 접두어 보다
위험한 접두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체성의 규칙, 즉 연결의 규
칙을 반항(defy)”하고 있기 때문이다(Ibid.). 그럼에도 불구하고 ‘para-logical’은
마치 의사(medic)에게 긴급의료원(paramedic)이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언제나
우리의 논리에 필수불가결한 어떤 것이다(Ibid.). .
37) Ibid., p.29.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33


처 없는 방랑(a wandering in the ‘theater’ of mimesis)”38)이다. 하지만
이 모방을 통한 기호적 방랑은 무작정 정처 없는 방황이 아니라, “틈
새들을 메우는 문제”로서 언제나 “신학적”이다.39) 이렇게 우리가 기호
이론을 기호작용 이론으로 볼 수 있다면, 종교 철학은 곧 종교 이론
작업이 된다. 왜냐하면 종교란 그 자체로 “상식의 문법을 초월하는 기
호-작동들과 의미화 과정들의 견고한 구성작업”40)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기호작용(semiosis)의 관점에서 ‘성스러움(the sacred)’을 바
라보자면, 성스러움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거나 초감각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기호들의 운동 혹은 심지어 돌연변이과정으로
서, 그를 통해 의미화하는 다른 구성요소들 간의 모방적 관계가 비대
칭적으로 형성되어지게 된다.”41) 이 기호적 비대칭성은 궁극적으로 종
교 기호들이 지시하는 기호지시대상이 기표(들)에 의해 가시화되거나
인식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종교행위의
공연적(performative) 특성”42)을 고려할 때 도드라진다. 종교 행위는 종
교적 숭배의 대상을 ‘재현’하거나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본래적 ‘미관의 손상을 동반하는 새로운 혹은 다시 그리는 작업이다.
즉 종교 행위는 태고의 원초적 행위를 재현하거나 반복하는 것이 아
니라, 그 본래행위의 미관손상(disfigurement)을 통한 새로운 기호작용
을 배태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종교행위는 본래의 종교적 기호
지시대상을 초과하고 극복하는 행위를 통해 본래의 기호 안에 담겨
있지 않던 이질성(heterogeneity)을 도입하고, 더 나아가 그 이질적 “타
자의 부조화(incongruity of the other)”43)를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데
리다는 (종교적) 재현이 결코 현존의 “반복이 아니라 삭제”44)라고 말


38) Ibid., p.29.
39) Ibid., p.29
40) Ibid., p.29
41) Ibid., p.29
42) Ibid., p.29
43) Ibid., p.31.
44) Ibid., p.30.
134 ?종교연구? 제74집 1호


한다.45) 래스키에 따르면, 종교연구가 소위 “과학적” 혹은 “학문적”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기호학적 관점에 따르자면, 그 기호적 이질성 혹
은 타자성을 다룰 때, 즉 “불가능한 이름들의 이름짓기(a naming of
impossible names)”46)를 시도할 때 비로소 ‘학문적’이 되고, 이런 맥락
에서 래스키는 종교 연구는 ‘종교 이론’의 탐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래서 신앙(faith)을 “모든 기호운동들의 탈/구
성(de-constituting)적이고 탈/배치(de-posing)적인 의미화, 즉 모든 ‘세계
종교’의 경제 안에서 거대한 탈/기호(de-sign)”47)로 간주했는데, 이는
곧 종교를 기호학적 관점에서 조망한 의미있는 시도였고, 종교 연구를
종교 이론의 방향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즉 데리다
의 해체적 기호학의 전략은 종교 연구를 기호학적 관점으로 조망하려
는 래스키의 기획과 맥이 상통하고 있다.


3. 신학의존적(theology-laden)으로서 종교 연구
우리는 종교 연구에서 ‘신학에 대한 관심’의 중요성을 놓치면 안
된다. 물론 ‘신학(theology)’라는 말의 기존 용례가 기독교 교의학
(dogmatics)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용어를 기독교회와 연관
해서 연상하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신학’이란 말을 통해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교파적 함축성들을 벗겨내고 말 그대로 “신적인 것


45)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종교 연구를 ‘서술적 기술’이나 ‘현상(학)적 기술’에 한
정한 방법론들은 “지적인 비겁함”일 뿐만 아니라, “방법론적인 과실”이라고
래스키는 주장한다(Ibid.). 즉 현상학적 방식은 곧 인식의 상응 이론
(correspondence theory)이나 재현 이론(representation theory)에 근거하여, 종교
의 원초적 장면이 반복되거나 재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행위의 기호작용적 특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46) Ibid., p.31.
47) Ibid., p.31; de-constituting과 de-posing 그리고 de-sign이 함축하고 있는 뉘앙스
를 번역으로 제시하기는 무리가 있는 듯 하다. 특별히 ‘탈/기호’는 본래 ‘디
자인’ 혹은 ‘설계’라는 말을 가리키는데, 중간에 ‘-’를 넣음으로써 ‘탈/기호’라
는 뜻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이중적 함축성이 본래 단어가 의미하고자 하
는 바이다.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35


에 관한 학문(science of the divine)”으로서 ‘신학’을 의미하며, 이는 곧
“종교 이론이 지향하며 노력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48) 사실
각 종교전통을 각자의 자리에서 관찰하자면, 각 종교는 모두 “신학-의
존적(theology-laden)”49)이다. 신학은 우리의 기호상징 체계 안에서 의
미화 작용으로 건너오는 몸짓들을 우리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신학은 결국 ‘종교적인 것’을 언어의 구조로 변화하
는 일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은 우리 언어의 담론 구조에서
“유령(specters, 데리다)”이거나 “시차(parallax, 지젝)”이다. 기존 담론 구
조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유령같은 것, 그래서 전혀 기
존의 것과 시각을 공유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 기존 종교연구들
의 방법들이 결국 종교적인 것의 해명에 실패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 연구들은 종교현상이나 경험들과 연관된 자료들을 방대히
축적하고 쌓아놓고, 그 안에서 유사성이나 연관성 혹은 관계분석들을
통해 종교적인 것을 설명하고자 하지만, 정작 종교적인 것은 그러한
연관관계나 (비트겐쉬타인의 용어인) “심층 문법”을 벗어나, 일종의 종
교적 서술의 본문들 사이를 부유하는 유령으로 존재하면서, 의미의 차
이를 낳는 “타자성(alterity)”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것은 언제나 ‘부정
적인 어떤 것’으로 출현한다.
우리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언어 체계
안에서는 ‘비존재’ 혹은 ‘무’로 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바로 이
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것은 “위추(僞推)”를 통해 전해질 수 밖에 없
다.50) 이러한 ‘부정적 존재’를 기표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을 데리다
는 “탈/부정(denegation)”51)이라 하였는데, ‘탈/부정’은 물론 부정
(negation)에 대한 부정(de-)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을 무화시킴으로써 단
순한 긍정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부정을 부정할 뿐이다. 이


48) Ibid., p.29.
49) Ibid., p.29
50) Ibid., p.43; 아울러 본고 각주 30 참고.
51) Ibid., p.44.
136 ?종교연구? 제74집 1호


‘탈/부정’은 종교학의 근원적 지시대상인 ‘성스러움(the sacred)’과 신학
의 지시대상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묘사해 준다: 즉 “성스러움은 하
느님의 탈/부정이고, 하느님은 성스러움의 탈/부정이다.”52) 성스러움이
란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
다. 그것은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다. 그렇다고 성스러움은 “하느님 너
머의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타자”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53) 이런
의미 맥락에서 래스키는 성스러움을 하느님의 ‘탈/부정’이라고 언표한
다. 이는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the between)’이지만, 그렇다고 어정쩡
한 중간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54)
‘신’에 대한 사유에서 기독교 신학이 종교 연구 분야에 기여하는
바는 바로 ‘신성(the divinity)’이란 “기존 질서의 정상상태로부터 이탈
(out of kilter with established order)”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신이
진리와 함께 하는 것은 신이 진리를 보장하거나 확증하기 때문이 아
니라, 오히려 “진리는 방해하기”55) 때문이다. 분명히 진리는 기존 질
서의 보편성과 조화로움을 방해하기 위해 난입하고 침범한다. 지젝에
따르면, 진리는 “우주적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특별한 잉여
(idiosyncratic excess)가 아니라, 그러한 질서의 모든 개념을 유지하는
하나의 폭력적이고 특이한 잉여(violent singular excess)”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괴물스럽다(mostrous)”.56)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의미
는 언제나 “위반으로부터, 기반들의 붕괴로부터 그리고 정의를 향한
갈망으로부터”57) 출현한다. 진리의 실현으로서 정의가 갈망되어진다고
하는 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그 정의가 현재 이 기존 질서 속에서 결
여(lack)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결여’는 기존 질서의
관점으로 ‘부정적인 것’이지만, 바로 그 부정성(negativity) 혹은 무


52) Ibid., p.44.
53) Ibid., p.44
54) Ibid., p.44
55) Ibid., p.49.
56) Ibid., p.49
57) Ibid., p.50.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37


(nothingness)의 주위를 기표들은 선회하며 상징질서를 구성하고 해체
하기를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들뢰즈(G. Deleuze)의 말처럼 계
속적인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58)의 운동일수도 있고, 데리다의
끝없는 ‘차연(différance)’일수도 있다. 기존 영토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그 이질적 잉여가 우리를 모든 배치로부터 “탈배치(deposed)”시키며,
우리 삶에 “종교의 귀환”을 가져오는지도 모른다.59)
래스키에 따르면 종교 이론 연구는 바로 이 “부정적인 것에 관한
학문(science of the negative)”60)이 되어야 한다. 이는 곧 “계시의 신
(deus revelatus)”나 “숨어계신 하느님(deus absconditus)”이 아니라 “사라
지는 신”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deus evanescens)”을 기호학적으로
풀어나가는 학문이 종교이론 연구 혹은 종교철학이란 말이다.61) 눈으
로 포착하지만, 그러나 눈으로 잡아낼 수 없는 신, 이 신적인 것 혹은
종교적인 것이 바로 지젝의 실재(the real)이다.62) 분명히 존재하는 실
재이지만, 그러나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실재가 되는 이유는 우리
의 인식 구조가 그것을 볼 수 있는 인식 기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으로 출현(apparition)할 수밖에 없다. 이
를 그대로 차용하자면, 신의 출현은 혹은 성스러움의 출현은 언제나
이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유령(apparition)”, 즉 “부적절한 곳에(out of
place)” “부적절한 시간에(off schedule)” 나타나 우리의 정상적인 삶의
구조를 깨뜨리고 난입하는 유령적 존재로 출현한다.63) 이 기존의 구조
에 비존재로 간주되는 것, 그래서 유령 즉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것으
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은 우리의 기존 세계 구조의 진리를 담지
한다. 즉 우리 구조와 체계의 결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상을 지키기


58) Gi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y Brian Massumi (London: Continuum, 2004), p.157.
59) Ibid., p.51.
60) Ibid., p.46.
61) Ibid., p.48.
62) Ibid., p.49.
63) Ibid., p.49
138 ?종교연구? 제74집 1호


위해 외면하는 그 결함과 결핍을 이 구조는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바
로 이런 맥락에서 성스러움의 유적 횡단성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 연
구는 당 시대의 ‘정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왜
냐하면 시대의 기존담론으로부터 부정되는 것으로부터 ‘성스러움의 저
항적 몸짓’을 그려내는 작업은 결국 시대의 권력체제로부터 ‘불법적
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식민지 정부는 당대 사람들을
근원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종교에 대한 통제 즉 성스러움에 대한 통
제 곧 ‘불법적인 것에 대한 조직적 통제’를 통해 식민권력을 강화해
나아갔다. 종교는 그러한 부당한 권력에 의해 결코 ‘합법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이 불법성이 바로 종교
가 담지한 변혁(transformation)의 힘인 것이다.


4. 종교와 정의(justice), 그리고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으로서 종교
종교는 우리 기존 사회질서에 언제나 “유령적(spectral)”64)이다. 언
제나 기존 사유와 상상력으로 포착할 수 없는 ‘잉여’를 도입하기 때문
이다. 데리다는 칼 맑스(K. Marx)의 유령을 언급하면서, 이를 “불분명
한 것의 유령(apparition of the inapparant)”65)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언
표화하는 것은 곧 “정의에 대한 관심”이다. 존재로 세상에 기투되었지
만,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귀신처럼 사회 구석구석을
유리방황해야 하는 존재, 바로 그러한 존재에 대한 관심은 곧 이 기존
질서의 ‘정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종교의 문제는 언제나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부당하
고 부정의한 세계 속에서 종교는 그렇게 존재로 간주되지 못하는 비
존재적 혹은 잉여적 존재들에게 임하는 신(즉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의 관심과 사랑을 설파할 때, 종교는 곧 정의의 담론이 된다.


64) Ibid., p.52.
65) Ibid., p.53.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39


종교가 정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종교는 기존 체제의 수목
형 질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리좀적(rhizomic)”66) 질서를 통해,
상하체제의 위계질서를 결여한 구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래
스키는 ‘종교적인 것’의 출현을 지젝이 말하는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67)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 종교적인 것의 출현을 설명하
는 지젝의 이론적 모델이 바로 “시차 관점(parallax view)”68)이다. 이는
관측 위치에 따라 드러나는 물체의 위치나 방향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래스키는 이를 이론 물리학의 입자/파동 모델로 비유를 든
다. 입자 모델과 파동 모델은 전혀 다른 방정식과 전제를 가지고 대상
을 그려주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물질은 원자 이하의 차원에서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 성질을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동일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전혀 다른 두 개의 모델을 통해서만 대상 물질을 기술
할 수 있으며, 어느 하나만이 참인 것도 아니고, 그 두 모델을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종교는 ‘종교적인 것의 기존 질
서 세계로의 난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이다. 하지만 이 종
교적인 것의 난입은 흔히 인용되듯이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설명될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의 부활(resurgence of the real)”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다.69) 여기서 실재는 “예수의 말을 모방하자면, 우리가 언
제나 우리와 함께 갖고 있는 것”으로서, “욕망의 대상들을 유지하고
재생하고,” 그리고 “모든 언어적 개념적 구조들을 범람”한다.70) 실재
는 “상징 질서의 규칙들에 예외”이지만, 그러나 “결정이나 서술 행위
속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화의 순간 속에 정초되어 있다.”71)
이는 실재의 귀환이 어떤 규칙이나 패턴의 정형화를 정당화시켜주


66) Ibid., 56; “수목형 질서”와 “리좀적 질서”간의 구분에 대해서는 G. Deleuze &
F.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pp.3-28을 참고할 것.
67)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62.
68) Ibid., p.63.
69) Ibid., p.64.
70) Ibid., p.64.
71) Ibid., p.64.
140 ?종교연구? 제74집 1호


거나 도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경계의 이탈 말하자면
“종교의 탈/본문화(de-textualization), 즉 문법-논리적(grammatological) 모
델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종교 이론이란 곧 기존 종교
의 경계 혹은 기존 종교 이론들의 정착된 영토들을 벗어나서, 기존 영
토 체계 속에서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들 새롭게 품으려는 노력이고,
이는 한 번의 영웅적인 시도로서 종결될 일이 아니라, 탈영토화 이후
다시 재영토화가 이루어지고, 다시금 탈영토화의 시도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지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존 영토 체계 속에서 포괄
되지 못한 유령적 존재들을 다시금 새롭게 영토화하려는 노력을 동반
한다는 점에서 종교 이론은 ‘정의(justice)’ 문제와 불가분리하게 연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72) 이 맥락에서 카푸토(J.D. Caputo)
가 인용하는 데리다의 “종교 없는 종교”에서 “종교 없는”이란 곧 ‘기
존 제도의 종교들을 이탈하는’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는 우리가 기존 담론 구조에서 반복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것을 이탈한 종교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교
없는 종교는 기존 종교를 대치하는 새로운 종교나 종교성이 아니라,
모든 종교 기호들이 종교적 상징체계를 매 시대 매 상황에 따라 구축
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인 동시에 매번 기존의 (종교적) 상징체계
를 넘어 새로운 상징의 영토를 찾아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힘으로서,
이 힘은 기존 담론 안에서 불필요한 잉여로 취급받는 그래서 유령처
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품게 하는 힘이다. 바
로 이 점에서 반복하여 말하자면 종교의 실재는 ‘고대의 시원적인 것
의 귀환’이 아니라 일상의 정상성을 무례하게 일깨우는 “실재의 귀환”
으로서, 종교란 결국 “우리 세속주의자의 단잠을 산산이 부수어 흩어
버리는 시끄러운 소음”73)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것의 몸짓은
우리를 해체하는 타자의 몸짓이 아니라, 어쩌면 하이데거(M.


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justice) 문제를 논하는 것은 본고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종교와 정의 간의 상관성만을 언급하고, 그 관계 문제에 대한 상술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자 한다.
73) Raschke, Postmodernism and the Revolution in Religious Theory, p.69.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41


Heidegger)의 말처럼 “우리를 가장 깊이 소유한 참 존재의 몸
짓”(enownment-Ereignis를 이렇게 번역한 용례를 래스키는 따르고 있
다)74), 그의 중단 없는 의미화 작용(semiosis)가 바로 원초적으로 종교
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궁극적인 유령은 가장 깊은 소유(enowment)로
서 종교적인 것이다.”75)


Ⅲ. 정의 담론의 다중성과 중층성
종교연구는 기존 문화와 담론의 질서에 실재(the Real)를 귀환시키
기 위해 정의의 소음(noise of justice)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래스키의
주장은 다른 측면으로 보면, 해답보다는 물음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의(justice)’를 어떻게 정의(define)할 수 있을까? 즉 정의란
무엇인가?의 물음 말이다. 종교연구의 지향점으로서 ‘정의(justice)’를
작업가설적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힌트는 래스키의 종교이론 연구
방법론에 대한 두 주장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 종교연구는 기존
의 종교연구의 범위를 넘어 기호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을 아우르는
영역에서 다중적인 학문적 탐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2) 종교
는 그 다중적인 탐구를 통해 기존 지식담론 구조에서 정상(normal)로
간주되지 않는 비정상들에 주목하여, 그 일탈의 왜곡된 뒤틀림을 통해
종교적인 것의 실재를 소환하는 작업이라는 것. 이를 역으로 표현하
면, 시대에 부재하는 정의의 담론으로서 종교 연구는 당대에 비정상으
로 간주되거나 비존재로 취급당하는 잉여들과 유령들을 존재로 회복
시키기 위해 다중학문적(multi-disciplinary) 탐구를 통해 ‘정의의 경계들
을 새롭게 창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76)


74) Ibid., p.208.
75) Ibid., p.208.
76) 종교 연구는 본래부터 ‘종교와 철학과 신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혼종적
(hybrid) 영역을 창출해 왔다. 자신의 신학을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142 ?종교연구? 제74집 1호


바로 이 지점에서 보스턴 대학교의 와일드만(W.J. Wildman)은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연구를 넘어서서 ‘다중학문적(multidisciplinary)’ 연
구 프로그램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77) 종교 연구가 다중학문적 방
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종교의 관념들이 “극도로 복합적
이고 복잡하기”78) 때문이다. 그 복합적이고 복잡한 종교적 관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전문적인 학문분야들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
러기 위해서 종교 이론 연구자는 그 다양한 학문에 전문지식을 갖춘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종교연구가 ‘다중학문적 탐구’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
유는, 만일 우리가 래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종교연구가 종교적인 것
(the religious)의 본래적인 해방의 힘을 매 시대에 맞게 담론화 시켜내
는 작업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시대 정의(justice)의 문제가 다중학문
적 사유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로부터 유래하는 문명의 찬란
한 업적 이면에는 도저히 인간의 이성적 사유로 해결할 수 없는 문명
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예를 들어, 지구생태환경의 문제, 지구촌 자
본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부의 격차 문제,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유래하
는 생명의료문화의 자본화 문제, 전쟁, 기아, 기근, 에너지 파동, 식량


위해서든 혹은 종교라는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든 혹은 인간의
사유를 넘어 침노해 들어오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든 종교
연구는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시하고 칭하는 대상이 결코 인간의 학
문 경계 안에 박제되지 않는 대상임을 밝혀줘 왔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학문 분과 ‘사이’에서 기존 설명들이 결여하고 있는 측면들을 드러내며, 달
라진 시대 상황에 맞게 새로운 언어로 기존 문화에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 연구는 그러한 시도가 특정 교리나 신학에 얽매여, 종교 권력의 선전
기제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종교적 독단의 위험을 넘어 인간 이성의 진지
한 성찰이 이성을 넘어 존재하는 그래서 이성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 신비
한 영적 존재를 성찰하는 분야라고 광의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
락에서 종교 연구는 다시금 그 본연의 자리, 즉 종교“와” 철학 “사이”에 균
형을 잡으며 존재하기 위해 종교(적) 철학(religious philosophy)을 다시금 품어
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J.D. Caputo, Philosophy and Theology [Nashville:
Abingdon Press, 2006], pp.3-9.).
77) Wildman, Religious Philosophy as Multidisciplinary Comparative Inquiry, p.ix.
78) Ibid., p.15.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43


파동,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신종 바이러스 문제 등에 더하여 여성과
인종과 계급의 문제 등. 이러한 문제들의 근원에는 바로 ‘정의란 무엇
인가?’라는 근원적 물음들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그래서 생태정의, 경
제정의, 의료정의 등의 문구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이상
의 다양한 문제들이 수렴하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 난관에 봉착하는
것은 결국 그 정의를 실현해야 할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근대의 원자론
적이고 실체론적이고 그리고 특별히 개체적인 인간 이해에 근거하고
있어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정의의 범위는 한 개인에게 인간으로
서의 권리가 정당하게 보장되고 있느냐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원자론적으로 개체 혼자 떨어져, 주변
세계와 상황과 관계로부터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한 개인에게
보장되는 권리의 개념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요청하는 정의의
물음에 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시대 종교와 과학의 근원적인 문제점은 종교와 과학
이 각각 제시하는 세계상과 인간상이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시대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들이 제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생명
윤리의 현장에서 ‘안락사 논쟁,’ ‘인간복제 문제,’ ‘이종간 이식의 문
제,’ ‘줄기세포 연구 문제’ 등이 제기되는데 각 논쟁들은 단지 사실이
나 가치의 어느 한편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사실과 가치 영역이 혼재
되는 영역이다. 과학적으로 이해되는 생명과 종교적으로 이해되어지는
생명 개념 간의 갈등이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실과 가치가 혼
재된 현상으로 줄기세포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줄기세포는 이미
사실이자 가치이다. 이렇게 사실과 가치가 서로 혼종적으로 얽매인 가
운데 우리는 더 이상 사실과 가치, 자연과 사회를 구분하는 근대적 이
분법에 기반한 세계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부루노 라뚜어
(Bruno Latour)는 주장하기도 한다.79) 이미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
간, 사실과 가치가 뒤얽혀 발생시키는 혼종성(hybrid)은 우리가 근대
79) B. Latour, We Have Never Been Modern, trans. by C. Porter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pp.1-3.
144 ?종교연구? 제74집 1호
이래로 견지해온 생명의 경계들을 근원적으로 재구성할 필요를 제기
한다. 이 혼종적 존재들의 출현은 근대 시대 자연/문화 이분법이 기반
하는 순수성과 소위 ‘오리지널에 대한 신화적 희구’를 기반으로 하는
지구문화가 철저히 억눌러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 혼종적 존재들에
게 ‘정의로운 세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라뚜어는 “자연의 정치
(politics of nature)”라는 개념을 주장하기도 한다.80) 어떻게 보면 우리
는 이미 자연적 인간 상태를 넘어선 시대를 살아간다. 클라크에 따르
면,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이다.81) 클라크의 이러한 개념적 도발의 이
면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정의(defining)해 왔던 ‘자연’ 개념이 근대기계
문명의 출현과 더불어 변혁되어 외연이 확대되지 못하고, 기계문명 이
전의 통념적인 자연개념을 고수해왔다는 질책이 담겨있다. 기계론적
문명 이전의 ‘자연’은 모든 존재를 조화로 이끄는 공의로운 존재였다
면, 기계적 인공의 시대에 자연은 이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기계론적 문명의 한 복판에서 기계적이고 인공적인 것들도
이미 ‘자연적’이라는 라뚜어의 선포는 탈근대 시대 이후에 우리가 정
의(justice)를 어떻게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주
고 있다.
우리는 인공적으로 제작된 의복이나 혹은 안경, 스마트폰 등이 없
으면 삶의 영위가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스케줄러는 이미 우리의 외장 메모리 기능을 감당하고 있고, 안경은
우리의 눈이 자연 상태보다 더 편하고 선명하게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단지 보온 기능과 보호 기능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타인을 향한 우리의 몸의 메시지를 전달하
는 기능들도 감당하고 있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인(natural being)
이 아니다. 어쩌면 자연인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단지 근대가 자신의 지적 구성물을 쌓기 위해 인위적으로 가
80) B. Latour, Politics of Nature: How to Bring the Sciences into Democracy, trans.
by C. Porter (Cambrdi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p.53-90.
81) A. Clark, Natural-Born Cyborg: Minds, Technologies, and the Future of Human
Intelligence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p.8-11.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45
공해낸 개념이 자연인지도 모른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의 바깥
경계를 인위적으로 세우고, 그 안에는 유럽인들이 그 밖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있도록 하고, 인간은 오로지 내부의 사람들로만 즉 유럽중심
의 사람들로만 규정하기 위해 세운 개념 말이다. 문명과 자연의 구별
은 단지 객관적이고 중성적인 서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문명/자연
의 이분법이 유통되는 세계에서 가장 불온한 세력은 바로 문명과 자
연 혹은 인공과 자연의 혼종물들을 만들어내는 세력들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자연의 수준을 극복하고 문명의 수준에 도달한 이들이 여전
히 자연적 수준과 연속적일 뿐만 아니라, 문명의 기제라 간주되던 많
은 것들이 사실은 자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불순분자들 말이다. 여
기서 자연 개념은 근대 유럽의 권력배치 지형도를 핵심적으로 전시해
주고 있다. 이때 종교 연구가 정의 담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그것은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주변부로 쫓겨난 존재들에게, 그 혼
종적 존재들에게 존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그들도 동등하게 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문명은 그의 경제체제가 담지하
고 있는 경제적 재화의 양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아픔들을 함께 나누자는 담론을 전파하는 세력
이 바로 종교적 존재들이다. 그럼으로써 정의담론으로서 종교는 이분
법적 위계질서가 아니라, 존재론적 동등성(ontological parity)을 선포하
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종교의 진정한 삶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닐
까?
Ⅳ. 결론
부정의는 “명백(clear)”하지만, 정의는 “불명료(obscure)”하다고 바디
우는 말한다.82)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부정의란 현실이지만, 정의란
82) A. Badiou, Infinite Thought: Truth and the Return to Philosophy, trans. by Oliver
146 ?종교연구? 제74집 1호
현실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정의는
부재(absent)한다. 하지만 부재하기 때문에 도리어 정의의 현존이 요청
되는 것이다.83) 고대 그리스의 정치에서 “데모스(demos)”는 “사회적
서열 조직에서 명확히 정해진 자리가 없는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부
당한 처우나 불의에 대항하여 권력에 맞서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주
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은 스스로를 배제된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회 전체(진정한 보편성)의 대표자, 대변자”로 자처하였다.84) 즉 그
들은 “무”의 대표자 혹은 대변자로서 “체제가 셈하지 않는 [모든] 존
재”를 대변하며, 사회 구조와 그 부분의 일부이지만 일부로 셈하여지
지 않는 이들 사이의 긴장을 정치적 갈등으로 표출시키면서, 진정한
보편성을 대변하게 된다는 것이다.85) 말하자면 데모스의 정치로서 민
주주의는 그 본래의 자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을 포함한
다. 그들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문제만이 정의의 전부라면, 아마 정의
는 정치의 문제이지 종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의 담론으로서 종
교는 그 배제된 자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배
제된 자들의 아픔을 내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바로 이것이 종교의 자리이다. 타인의 아픔을 내 자신의 창
자가 끊어질듯 한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
수가 신약성서에서 보여주는 긍휼 즉 compassion의 핵심이다. 종교 연
구는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 정의를 어떻게 실현하는 것인
가?
최근 종교연구 분야에 과학적 연구방법이 새롭게 도입되고 있다.
그 중 인지종교학(cognitive science of religion)이 있는데, 이는 간략히
정의하자면, “종교를 ‘마음(mind)’의 작용으로 ‘설명(explain)’하는 객관
Feltham & Justin Clemens (New York: Continuum, 2005), p.52.
83) 그래서 정의는 ‘메시야적’이다 (C.A. Raschke, “From Alchemy to Revolution,”
p.160).
84) 슬라브이 지젝,『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김정아 역 (서울: 도서출판길, 2007), p.106.
85) 같은 책.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47
적이고 체계적인 접근방법”86)이다. 이러한 인지종교학적 연구들의 가
장 큰 공헌은 “종교라는 문화체계를 마음의 인지작용으로 설명함으로
써 그동안 특정한 전통의 자료의 해석에 매달렸던 종교학의 단점을
극복하고 보편적인 이론적 체계의 구성”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87) 기존의 종교를 바라보던 시각과는 다른 각도에서 종교 현상
을 조명하려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의 담론으로서 종교 연
구는 이 방법론에서 잘 설명되고 있는 것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오
히려 이 관점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것들을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
다. 예를 들어, 이상의 인지종교학은 “지나치게 서구 기독교 모델에
치우친 종교 개념을 전제”하고 있어서, “유교나 불교 등 동양종교에
적용될 때 일정한 오류와 한계를”88) 담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체계
적으로 배재되는 이들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종교 연구는 “마음과 사
회문화가 상호영향을 주는 역동적인 환류체계”89)로 종교를 온전히 이
해할 수 있는 균형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배제되
는 것들에 관심을 둘 수 있는 것은 종교 연구가 기존 연구방법의 경
계 너머를 지속적으로 탐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의
미에서 정의로서 종교 연구는 ‘다중학문적(multidisciplinary)’ 관점과 방
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 종교학의 위기는 우선 한국 종교학이 “신학과
교학과의 차별성에 집중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학문적인 고립을 자
초”90)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송현동의 지적은 마음에 크게 와 닿는다.
종교학 자체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의 종교학
은 “타학문과의 교류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것이 아
86) 박종천, 「종교와 마음: 인지종교학의 주제와 경향을 중심으로」, 『철학탐
구』24권(2008), p.191.
87) 같은 글, pp.196-197.
88) 같은 글, p.190.
89) 같은 글, p.190
90) 송현동, 「융복합 시대의 종교학: 인문과 실용」, 『종교와 감정: 한국종교학
회 2013년도 후반기 학술대회 자료집』, p.165.
148 ?종교연구? 제74집 1호
니라 철저한 배제를 통해서 정체성을 확보하려”91) 했기 때문에 한국
의 종교학은 학문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말이다. 배제된 존재들을 외면
하는 집단은 정의 담론에 무관심한 집단이며, 그 무관심은 결과적으로
집단을 부정의하게 만든다.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자행한다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정의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정의의 부재(absence)
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보편담론 즉 각 분과경계들
을 횡단할 보편성을 상실한 종교연구 담론들이 사회와 학계로부터 호
응을 얻지 못하고, 고립되어가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수도 있다. 언
제나 해답보다 ‘문제의 설정’이 더 중요하다. 해답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해답이 결정되는 까닭이다.92) 이런 맥락에서 본
고는 한국종교연구의 문제를 래스키의 문제 의식을 통해 설정해 보았
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종교연구 담론구조 속에서 ‘정의의 결여’라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를 사랑하고
위한다는 것, 그래서 종교학은 “인간론적(anthropological)인 학문”93)이
라는 주장 속에서 제국주의적 종교 정의에 저항하는 몸짓과 잉여로
간주되던 작고 구체적인 종교‘들’에 대한 주목이 정의의 외침으로 들
린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 연구는 정의(justice)에 대한 관심이라는 래
스키의 주장은 보다 구체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주제어: 칼 래스키, 종교의 유적 특이성, 문화주의자의 오류, 의
미이론으로서의 종교이론, 유사성, 실재의 귀환
투고일: 2014.2.3, 심사종료일: 2014.2.28, 게재확정일:2014.3.5.
91) 같은 글, p.165.
92) Gilles Deleuze, Bergsonism, trans. by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Zone Books, 1991), pp.15-16.
93) 이길용, 「한국 종교학 방법론의 과제와 전망」, 『종교연구』제70집(2013),
p.21.
탈근대 시대 이후의 종교연구 방법론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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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will introduce Carl Raschke’s religio-philosophical idea
about a methodology of religious studies. The reason why the author
introduces Raschke’s idea to Korean academic society is because the issue
of justice has been deficient in our current discourses of religious studies.
For Raschke, religion contains a potentially emancipating power in itself.
From the beginning, religion has concerned with those who are weak and
powerless. It means not that this kind of concern is all about religion and
religious studies, but rather that concern for justice is a very crucial
factor constituting a religious structure within a society and its culture in
question. It is associated with this question, what is religion? These days,
however, most scholars of religion do not have any interest in the
questions of justice and religion. It may be due to the postmodern
*1Iljoon Park is a Researcher of the Christian Research Institute for Integral
Studies,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mail:
iljoon85@naver.com
122 ?종교연구? 제74집 1호
awareness that definition is violence. However, when one forgets the
questions of religion and justice, s/he also loses sight of the inherent
liberative force of religion. Raschke believes that, when the methodology
of religious studies captures us on the generic singularity of excessive
beings in the existing structure of knowledge, our interest in a theory of
religion can lead to the emancipating power of the religious.
Key words: Carl A. Raschke, the generic singularity of the religious,
culturalist fallacy, the theory of religion as a theory of
semiosis, paralogy, the return of the r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