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방 영감의 재등장과 정쟁의 시작
-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내각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임할 당시, 당초 보조함 전체 보유율을 대미 70%로 하길 희망했지만, 미국의 요구에 따라 0.025%가 모자란 6.975%로 하는 방안을 수락하였고, 해군성 내부에서도 이에 동의함에 따라 1930년 4월 22일,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은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 하지만 일본 해군의 강경파, 군령부(軍令部)는 중순양함 보유량이 대미 60%로 억제된 것과 잠수함 보유량이 원하는 비율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조약의 거부를 주장했다.
이것들아, 순양함이 모자라!!!
- 당시 이들 강경파들의 주장도 일견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긴 있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만약 조약대로 강행될 경우, 일본 해군은 보조함 부분에서 미국과 영국보다 큰 삭감율(12%)을 강요받은 반면(실제로는 노후 구축함과 구식 잠수함을 정리하면 되겠지만..), 미 해군은 전체 삭감율(8%)도 낮을 뿐만 아니라, 보유하거나 건조중인 것 이외에도 중(重)순양함(8인치 주포 탑재) 50,000톤과 경(輕)순양함(6인치 주포 탑재) 73,000톤을 신규로 더 보충할 수 있었다(그냥 딱 보기엔 그렇다는 얘기다..남의 떡이 아무래도 커 보인다..)
- 또한 워싱턴 조약으로 인한 주력함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점감 요격 작전의 주역으로 주목하며 건조에 안간힘을 쓰고 있던 어뢰 탑재 중순양함도 대미 60%로 억제되고, 잠수함 증강도 마음대로 되지 않게 되며 심사가 뒤틀리게 된다.
있는 것도 버려야한단 말이다! 사진은 건조 당시의 중순양함 하구로(羽黒..1928년)
- 이것들이 벨이 꼬이게 된 이유를 간단히 요약해 보면,
1.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결과 주력함(전함, 순양전함)은 이미 대미 60%가 되어 있다.
2. 그런데 주력함의 대항마인 중순양함마저 대미 60%가 되었다.
3. 거기다 더해 점감 요격 작전의 핵심, 잠수함도 요구 수량에 턱없이 부족하다.
워싱턴 조약과 런던 조약을 합산한 일본 해군의 대미 전력..
- 따라서 일본 해군 군령부는 자기들이 밤낮없이 온갖 잔머리를 굴려대며 작성한 점감 요격 작전의 시나리오가 휴지 조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가중되었고,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기존 계획을 유지해야겠다는 강박 관념이 팽배해졌다.
- 그리고 워싱턴 회담 이후 보조함 건함 경쟁에서 양적으로는 호각세에, 질적으로는 미국을 능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일본 해군은 개뿔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서는 바람에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완전히 농락당해 국방을 조져놓았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니네가 뭔데 나서서 개판을 치냐! 이것이 당시 일본 해군의 입장이었다..
- 한편, 런던 군축 조약은 체결 이후, 이의 비준을 위해서 의회의 승인, 군사 참의원(軍事参議院)의 동의, 추밀원(枢密院)의 자문이 필요하였고, 체결 직후부터 하마구치 내각 주도로 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 런던 조약의 체결은 당시 국민 대부분의 지지와 여론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당연히 해군 강경파의 의견은 죽자고 반대였다.
- 거함거포주의자 군령부 총장 카토 간지(加藤寛治)와 잠수함 옹호론의 거두, 군령부 차장 스에쓰구 노부마사(末次信正), 몽키킹 핏줄이자 해군 빠돌이, 후시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博恭) 등이 주축이 된 이 강경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마침내 정신적 지주를 옹립하기에 이른다.
- 이때 등장한 강경파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그 유명한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였는데, 그는 이미 1909년에 해군 군령부 총장을 끝으로 공직 일선에서 물러난 민간인 영감탱자 신분이었지만, 이후로도 그 명성을 바탕으로 시시콜콜 해군에 대해 감 놔라 대추 놔라하며 간섭하던, 일종의 막후 보스 플러스 비선실세였다.
- 사견으로, 비록 그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며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맞지만(병맛스러운 건 이 승리로 인해 일본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스스로 헬 게이트를 열어젖힌다는 거..) 단지 그 한차례의 승리(이것도 순전히 도고 한 사람만의 공인가?)로 인해 죽을 때까지 군신으로 추앙받고, 오늘날까지 영웅시되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다(우리나라에도 숱하게 있던데..이순신 제독을 존경했다느니 어쩌니 하면서..알려면 제대로 알자..)
두둥~ 그렇게 등장한 켄터키 닭집 할아범..
- 대표적으로 그는, 당시 일본 해군 내의 대표적 인사 병폐였던 항해 특기와 기관 특기사이의 차별 문제(항해과가 기관과에 대해 인사와 처우, 지휘권 등 모든 면에서 월등히 우월..)에 대해 그 개선 방안을 상담 받는 자리에서 “아직도 그딴 헛소리를 하나?”라며 일축하였다
- 결국 이 영감이 난리치는 바람에 이 문제는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까지 갈등의 불씨로 남아 일본 해군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대표적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그래서 항해과 대위가 기관과 장성에게 날라차기를..참조→ http://blog.daum.net/mybrokenwing/543.. 우리 해군, 아니 전군 모두 이런 출신 병과에 따라 차별하는 쓰레기 전통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는 걸로 안다..배울 걸 배우자..)
핥고 빠는 건 지네끼리 하게 걍 놔두자..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 어째든, 도고는 “주력함이 60%가 되어버린 지금, 중순양함은 80%가 필요하다. 그런데 70%도 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러한 조약은 맺지 않는 것이 나라와 해군을 위하는 것이다!”라며 조약 반대론자이자 강경파들에게 힘을 이빠이 실어주었다(우리도 이런 거 있었쟈나? 전직 공군 참모총장들의 반란..나는 F-35 지지자이지만 저런 모양새는 좀 그런 듯..)
- 하지만 이 영감이 웃기는 건, 앞선 워싱턴 군축 조약 체결 시에는 주력함 보유 비율이 대미 60%가 되며 희망하던 70%보다 낮아진 것에 격분하는 해군 장교들을 향해 “하지만 훈련은 비율도 제한도 없다.”며 설득했었다(그때그때 다른겨? 출처: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徳), <연합 함대의 최후(連合艦隊の最後)>, 2000)
- 아무튼, 이제 정신적 지주까지 생긴 군령부 중심의 해군 강경파들은 점점 그 목소리를 높여만 갔고, 이때까지만 해도 하마구치 내각의 대미 협조 외교와 전혀 의견이 맞지 않았던 조약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이런 식으로 조약이 체결되고 비준된다면 국방 전략상 해군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내용이었다.
- 하지만 런던 조약의 비준 과정에서의 갈등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며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까지 이어지는 일본 군부의 폭주에 엑셀레이터를 밟아주는 꼴이 되고 만다.
- 당시 민정당(民政党) 소속 하마구치 내각은 런던 조약 체결 직전에 벌어진 1930년 2월 총선에서 야당인 정우회(政友会)의 174석 대비, 273석을 획득, 거의 100석 가까운 차이로 선거에 승리했다.
런던 조약 체결 직전인 1930년 2월의 총선 결과..
- 그러자 선거에 대패한 정우회는 제 58 회 특별회기가 시작되면서 정부를 공격할 수단이 필요했고, 이 머저리 같은 것들은 정쟁의 수단으로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을 이용, 정부와 군령 부를 대립시켜 내각의 퇴진 여론을 불러일으키기로 획책했다.
- 이런 정우회의 계략은 의회에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외무장관의 연설이 그 도화선이 되었는데, 당시 시데하라는 “런던 조약으로 인해 일본의 군사비도 절감되고, 이 기간 내에는 국방도 충분히 보장된다. 정부는 군사 전문가의 의견도 충분히 참작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 협정에 조인했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 이에 대해 군령부는 “총리와 외무 장관은 군사 전문가의 견해와 완전히 상반되는 잘못된 판단을 하였고, 국방이 매우 안전하다고 단정하기에는 군령부를 무시하는 월권행위이며, 통수 대권(統帥大権)을 침범하는 것이다.”라고 맹비난 했다.
- 그러자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이름이 개사육이 머냐? 에라이..) 정우회 총재와 당의 중진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는 군령부 대가리들과 밀담을 가지고 정부는 군령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국방 계획을 변경했다며 해군 강경파들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정권 획득을 위해선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당시 야당 총재 개사육..
- 이에 대해 하마구치 총리는 군령부의 의견은 충분히 참작하였고, 국방에 관한 책임은 정부가 진다고 답변했지만, 이 지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 그것은 바로 병력 혹은 전력을 결정할 권한이 과연 내각에 있는지, 아니면 몽키킹의 통수권(統帥権)에 달린 것인지 하는, 일본의 쓰레기 헌법, 메이지 헌법상의 맹점이 표면화 된 것이었다.
드디어 곪은 곳이 터진다..통수권이란 무엇인가?!
- 메이지 쓰레기 헌법에서 사법, 입법, 행정이라는 삼권은 허름한 형태로 분리는 되어 있었지만, 제 11 조에 “몽키킹이 군을 통수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고 이는 대가리 원숭이가(똘똘하던 띨띨하던 관계없이..) 국회의 승인 따윈 거칠 필요 없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 이 헌법 하에서 보자면 전시의 모든 군사 작전은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 총장의 보필 하에 몽키킹의 행위로 이루어지고, 평시에는 육해군 장관이 이를 대신하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해되지 않는 별 거지같은 구조로 되어있었다(그럼 맨날 전쟁하면 어케 되는 겨? 바로 그걸 노리는 거지..캬캬캬캬)
저런 쓰레기 헌법 구조 때문에 요따우 일이 발생한다..각자 따로따로~~
- 원래 일본 군부가 통수권을 강조한 이유는 군사 문제에 국민이나 정당 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정당 정치인인 이누카이과 하토야마가 군령부의 주장을 지지하고 내각을 흔드는 행위는 어쩌면 정당 정치의 자살 행위였다(그렇게 정권을 잡아봐야 군부의 똘마니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
각자가 노리는 이익이 양립하면서 이합 집산이 이루어지고 결국 돗데기 시장이 열린다..
- 당시 일본의 매스컴은 일제히 정우회의 이 같은 태도를 비판하고, 마찬가지로 입장을 명확히 표시하지 못한 하마구치 내각의 모호성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 또한 정우회와 민정당 내부에서도 이 통수권 문제에 있어서만은 의회 정치 확립을 위해 군부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결국 소수 의견에 그쳤고, 그들은 그렇게 눈앞의 권력 쟁취와 이권으로 물든 정쟁 앞에 무기력해져 갔다(역시 권력 잡기가 우선! 다른 문제는 뒷전!)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www.imabaya.com/kankore/neko/?p=292
http://hosyuquality.blog.jp/archives/1064193437.html
https://ja.wikipedia.org/wiki/1930%E5%B9%B4%E3%81%AE%E6%94%BF%E6%B2%BB
http://p.twipple.jp/TtGNY
https://kknews.cc/history/9jvaq.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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