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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중원대전" 제2화 - 내전의 불꽃 전국으로 확대되다 /

기독교 장군 풍옥상

북벌전쟁기에 서북 5성(섬서성, 감숙성, 청해성, 영하성, 하남성)을 지배하면서 "서북왕"이라 불리었던 풍옥상(馮玉祥)은 군벌 내전기를 거쳐갔던 수많은 ​군벌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다채로운 인물이었다. 다른 군벌들이 일본 유학파이거나 보정군관학교, 운남군관학교, 북경육군대학 등의 국내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자기 고향에서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다졌던 것과 달리, 그는 변변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15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해 청군에 입대한 그는 졸병으로 시작했지만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면서 금새 장교로 승진하였고 직예파 군벌 육건장(陸建章)의 눈에 들어 처조카를 짝지어 주었다. 

또한 신해혁명 직전에는 직예성 난주(灤州)에 주둔한 제20진의 대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곧 혁명파에 가담하였고 무한 봉기가 일어나자 그 또한 호응하여 손악(孫岳), 한복구(韓復榘), 녹종린(鹿鍾麟), 이명종(李鳴鐘) 등과 함께 '난주기의(灤州起義)"를 일으켰다. 그의 봉기는 청군의 공격으로 진압당했지만 청조가 몰락한 후 곧 재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자신과 같은 농촌 출신의 청년들을 징모하여 군대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과거의 부하들 이외에도 손양성(孫良誠), 유여명(劉汝明), 석우삼(石友三), 풍치안(馮治安), 송철원(宋哲元) 등도 가담하였고 이들은 뒷날 풍옥상 휘하에서 거대한 서북파 군벌을 형성하게 된다.


1920년대 군벌 내전기에 풍옥상은 섬서성과 하남성을 전전하면서 점차 자신의 지반을 다지게 되었다. 다른 군벌들은 신사(神社), 지주 등 ​지역의 토착 세력과 결탁하여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하는데만 열을 올렸던 것에 반해, 풍옥상은 비교적 청렴하여 사재를 모으지 않았고 부하들에게도 약탈을 엄중히 금지하는 한편 엄격한 규율으로 군대를 훈련시켰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검소하게 살면서 부하들에게도 개종과 청교도적인 생활을 엄격하게 요구하여 "기독교 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22년 5월 하남 독군으로 부임한 그는 이재민 구휼과 불법적인 징수의 금지, 탐관오리의 처벌과 재산 몰수, 토비 척결, 의무 교육의 실시, 아편 금지, 변발 전족과 같은 낡은 전통의 폐지 등 개혁의 기치를 올렸다. 이는 결코 허울 뿐인 구호가 아니라 풍옥상의 주도로 매우 엄격하게 실시되어 하남성 전반을 개혁하였다. 당시 하남성은 특히 군벌들의 쟁탈지역이 되면서 치안과 행정이 심각하게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찰과 사당들이 폐단이 심하고 미신으로 농민들을 현혹시켜 착취한다며 군대를 동원하여 승려를 쫓아내고 불상을 훼손하였고 절과 재산을 몰수한 후 시장과 학교로 개조하기도 했다. 이는 농민들에게는 큰 지지를 받았다.


풍옥상이 한 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자금성에서 추방한 것이었다. 1924년 9월 장작림의 봉천파와 조곤-오패부의 직예파 사이에서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직예파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풍옥상은 전선으로 이동하던 도중 장작림과 결탁하여 북경으로 되돌아가 쿠테타를 일으켰다. 풍옥상의 반란은 오패부에게는 그야말로 치명타였기에 직예군은 그대로 붕괴되었다. 북경을 장악한 풍옥상은 조곤을 대총통에서 끌어내고 자금성으로 녹종린을 보내어 푸이과 청나라 황족들을 모두 추방하는 한편, 그동안 이들이 누리고 있던 모든 특권을 폐지하여 일반 시민으로 강등시키고 대부분의 재산도 몰수하였다. 푸이는 황후와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천진의 일본 조계로 도망쳐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작림과 싸우다 패하여 북경에서 쫓겨난 풍옥상은 소련의 원조를 얻기 위해 1926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그는 5월까지 약 2개월 간 소련에 체류하면서 스탈린을 만났고 또한 당시 소련에 유학와있던 등소평, 유백승(劉伯承) 등 훗날 중공의 지도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특히 등소평은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이른바 "4.12 정변"을 일으켜 국공합작을 깨뜨릴 때까지 풍옥상의 정치장교를 맡아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였다.

▲ 1928년 7월 2일자 타임지의 표지로 실린 풍옥상. 이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오패부, 장개석 다음이었다.

공산당에 대해 합작과 배신을 반복하며 철저한 기회주의적이었던 염석산, 성세재(盛世才) 등 다른 군벌들과는 달리(이 때문에 이들은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패했을 때 대륙에 남을 수 없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입장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장제스가 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풍옥상은 장제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부득이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을 추방하면서도 이들을 구금하거나 고문 학살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탄압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중공도 풍옥상을 높이 평가하여 훗날 1948년 8월풍옥상이 귀국 도중 사고사(장개석에 의한 암살설이 유력하다)하자 모택동의 주재로 추도식을 거행하고 국공내전에 승리한 뒤에는 산동성 태산에 풍옥상의 묘를 안장하였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풍옥상은 장개석의 광주에서 북벌을 준비하자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북벌 전쟁에 호응하여 ​제2집단군 총사령관이 되어 염석산의 제3집단군과 함께 장작림을 격파하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만약 북쪽에서 풍옥상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당대 최강의 세력이었던 장작림-오패부의 100만 대군을 상대로 고작 10만명에 불과했던 장개석이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북벌 직후의 풍옥상과 장개석, 염석산 


그러나 북벌 과정에서 풍옥상의 세력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장개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되자 장개석도 그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옥상은 무기 수입과 경제 지반의 확보를 위해 북평과 천진을 원했지만 장개석이 하북성을 통째로 염석산에게 주기로 정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이는 두 사람을 이간질 시켜 염석산으로 하여금 풍옥상을 견제시키기 위함이었다. 만약 풍옥상이 하북성을 차지한다면 사실상 중국 대륙을 남북으로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하북성을 빼앗긴 풍옥상은 장개석이 표리부동하다고 생각하고 격분하였다.

* 풍옥상 반장의 기치를 올리다

1929년 3월 이종인이 반장의 기치를 올렸다. 양광(광서성, 광동성)에서 중앙군과 이종인, 백숭희의 광서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풍옥상은 심복인 마복상(馬福祥)을 남경으로 보내어 일단 중앙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명하는 한편 한복구, 송철원, 손양성(孫良誠), 석우삼(石友三) 등 장령들과 함께 약 5만명에 달하는 서북군을 무한 방면으로 남하시켰다. 한복구가 지휘하는 서북군의 선봉부대는 4월 초 호북성으로 진입하여 무한을 방어 중인 광서군 측면을 위협하였다. 또한 하북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숭희 부대는 모두 투항하여 염석산의 관할 아래 들어가는 등 광서파의 전세는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품고 있었던 풍옥상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데다 남경정부로부터 이종인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자 결국 이종인의 반란에 호응하기로 결심하였다.

5월 초 풍옥상을 대신하여 서북군 대표로 남경에 체류하고 있던 녹종린, 마복상 등이 몰래 탈출하면서 장개석과 풍옥상의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또한 하남성 정주에서는 서북군 부대가 평한철도을 통제하고 전선으로 군수품을 수송하고 있던 수십대의 열차를 억류하였다. 장개석은 풍옥상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호북성과 산동성으로 진입하고 있던 서북군의 이동을 중지시키고 동태를 살피는 등 쌍방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또한 양광에서는 백숭희의 광서군이 진제당의 광동군을 격파하고 광동성의 태반을 점령하였다. 여기다 광동군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광서군에 호응하는 등 전황은 한치 앞도 내다 보기 어려울 만큼 혼전의 연속이었다.

5월 16일 서북군 장령들의 명의로 이른바 "장개석의 칠대 죄목"을 발표하고 풍옥상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호당구국군(護黨救國軍)의 조직과 장개석 토벌을 선언하였다. "장개석은 국민당과 전국의 공적이다. 그동안 불법적으로 당과 정무를 전횡하였고 독재를 했으며 비적을 원조하는 등 반혁명적인 행동을 하였다. 무엇으로 고 손문 대총통을 뵐 것이며 인민을 대할 것인가. 양심이 있으면 스스로를 책하고 하야하라" 풍옥상군은 동관과 정주, 개봉, 낙양에 주력을 집중시켜 안휘성과 강소성 방면을 위협하는 한편 염석산의 산서성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병력은 기병 2개 사단, 보병 20개 사단 등 약 30만명에 달했다.

장개석은 급히 남경으로 돌아와 풍옥상을 비롯한 서북파 주요 장령 20여명에 대한 국민당적을 파기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였다. 또한 서주와 산동 남부에는 방진무(方振武)의 2개 여단을, 안휘성에는 서원천(徐源泉)의 제48사단과 웅식휘의 제5사단 등을 배치하여 서북군의 남하를 요격하는 한편, 하응흠을 무한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무한과 정주 선로를 따라 중앙군 최정예 부대인 유치(劉峙)의 제1사단과 고축동(顧祝同)의 제4사단, 요배남(繆培南)의 제9사단, 장정문(蔣鼎文)의 제11사단 등 약 8만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하남성을 침공하려는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무한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서 본격적으로 광서성을 침공하려던 장개석에게 풍옥상의 배반은 큰 충격이었다. 장개석은 병력면에서 50만명에 달하여 월등히 우세했지만 상당수는 투항한 부대인데다 수도 남경을 방어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배치해야 했고 또한 백숭희의 광동 침입에 대항해 일부 부대를 광동성으로 보냈기에 막상 풍옥상에게 대항할 수 있는 병력은 10만~15만여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염석산 역시 태도가 불분명한데다 약 20만명에 달하는 산서군은 질적으로 매우 형편없어 신뢰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장개석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귀국한 당생지 또한 풍옥상에게 내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자칫 한발만 잘 못 내딛어도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양측의 상황은 백중지세나 다름없었다. 장개석은 5월 23일 정식으로 풍옥상 토벌을 선언하고 스스로 동로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또한 염석산을 북로군 총사령관으로, 하응흠을 남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풍옥상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풍옥상 역시 손양성을 제1로 총사령관으로 산동성을, 한복구를 제2로 총사령관으로 평한철도 남단을, 석우삼을 제3로 총사령관으로 평한철도 북단을, 그리고 송철원은 제4로 총령관으로 섬서성 방면을 맡아 장개석군과 대치하였다. 또한 동관에 총사령부를 두었다. 쌍방의 주력은 무한과 정주, 개봉 방면에 집결하였다. 5월 20일 류치의 제1사단이 공격에 나서 하남성과 호북성의 경계에 있는 신양(信陽)을 점령하였다. 한복구는 싸우지 않고 후퇴하였다. 또한 산동성 남부에서는 손양성군이 방진무군과 충돌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한복구, 석우삼이 중앙으로의 귀순을 선언하고 총부리를 돌려 풍옥상의 하야를 요구한 것이다. 두 사람은 풍옥상의 오랜 심복이었지만 동시에 배신이 판을 치던 군벌 시대에서도 가장 표리부동한 인물로 꼽힐 만큼 유리한 편을 찾아서 이리저리 붙으면서 대단히 탐욕스럽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풍옥상의 휘하에서 벗어나 자립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응흠이 각기 거액의 뇌물과 함께 하남성과 안휘성을 주겠다며 미끼를 내밀자 두 사람은 덥썩 물었다. 두 사람은 반란을 취소하고 풍옥상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의 배반은 풍옥상에게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손양성은 즉각 병력을 되돌려 한복구를 격퇴하고 낙양을 점령했지만 전황은 급격하게 불리해졌다. 또한 남쪽에서는 백숭희군이 패배하여 광동성에서 쫓겨났고 광서성까지 침공당하면서 패망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결국 5월 27일 풍옥상은 염석산의 권고를 받아들여 하야를 선언하고 스스로 태원으로 가서 염석산에게 신변을 맡겼다. 또한 손양성 부대 등 최일선의 풍옥상군은 모두 동관으로 급히 철수하면서 풍옥상의 반란은 보름도 채 되지 않아 어이없게도 끝이 나고 말았다.

장개석은 동관까지 진격하여 서북파 세력을 완전히 끝장내겠다고 선언했지만 염석산이 중재에 나서 풍옥상에 대한 체포령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염석산은 풍옥상과 사이가 매우 나빴지만 이종인의 광서파가 장개석의 토벌로 괴멸당하고 있는 판에 풍옥상마저 몰락한다면 다음 차례는 틀림없이 자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고 풍옥상 역시 하야를 번복하는 등 쌍방의 협상은 한동안 난항을 빚었지만 화평 해결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풍옥상이 해외로 출국한다는 조건으로 타협하였다. 7월 12일에 열린 남경정부 국무회의에서 풍옥상 체포령과 서북군 토벌을 중지하고 그동안 연금 중이던 이제심도 석방키로 하였다. 장계전쟁, 장풍전쟁을 통해 이종인의 광서파는 몰락하였고 풍옥상도 하야하면서 서북파 역시 분열되는 등 장개석의 위세는 한층 올라갔다.

그러나 근본적인 모순이 없어지지 않은데다 장개석의 중앙집권 정책과 군축 추진으로 군벌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다. 풍옥상은 하야를 선언했지만 일시적인 불리를 모면하기 위함이었을 뿐 결코 본심이 아니었다. 그는 서북파 장령들과 자신을 배신한 한복구, 석우삼, 그리고 이종인, 염석산, 장발규 등 다른 군벌들과도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다시 반장의 기치를 올릴 기회를 엿보았다. 또한 남경정부 내 반장 세력의 수장인 왕정위도 이들을 후원하면서 장개석을 끌어내릴 준비를 하였다. 내전의 불꽃은 점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