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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 전쟁 "중원대전" 제4화 - 반장(反蔣) 포위망 결성/blog.naver.com/atena

반란의 확대

장개석은 남북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 하응흠을 무한 방면에, 주배덕을 진포 철도 방면에, 당생지를 평한 철도 방면에 각각 총지휘를 맡긴 다음 스스로도 직접 한구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선으로 나와 독려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장연합에 가담하는 군벌들이 날로 늘어나면서 중립을 유지하거나 중앙을 지지하는 군벌들조차 어느 편이 유리한지 계산하는 등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쪽에서는 손양성이 지휘하는 서북군 14만명이 하남성으로 쇄도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양광에서 계계(광서파)-장발규 연합군과 중앙군-광동군 연합군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허창을 지키고 있던 서원천의 제48사단이 명령을 무시한 채 싸우지도 않고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10월 24일 허창이 서북군의 손에 넘어갔다. 장개석은 당생지에게 정주를 결사 수비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염석산을 움직이기 위해 하응흠을 산서성의 성도 태원으로 보내어 염석산을 방문케 했으나 염석산은 병을 핑계로 면담을 거절하였다.

10월 26일 손양성 휘하의 장자충(张自忠), 방병훈(龐炳勛) 등이 지휘하는 서북군이 포병의 지원 아래 흑석관(黑石關)을 점령하고 황허를 건너려고 했지만 당생지군의 강력한 반격과 항공 폭격으로 격퇴당하였다. 10월 한달 동안 낙양과 허창을 빼앗긴 채 하남성에서 물러나야 했던 장개석은 전열을 정비한 후 10월 28일 총공세로 전환할 것을 지시하였다. 무한의 중앙군과 정주의 당생지군이 양 방향에서 협격하는 형태로 서북군을 공격하였다.

서북군 역시 반격을 거듭하는 한편, 일부 부대는 낙양에서 남하하여 중앙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양양과 노하구 방면으로 진출하는 등 하남성 동부와 호북성 북부에 걸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동부전선에서는 당생지군이 서북군을 밀어내기 시작하여 11월 2일에는 여점진(呂店鎭)에서 서북군을 대파하여 서북군은 사단장 1명이 전사하고 2명이 포로가 되는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하였다. 반면, 호북성 방면에서는 노하구에서 유치의 부대가 패퇴하는 등 양측의 전황은 그야말로 백중지세였다.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치열한 혈전 끝에 중앙군은 하남성 동부의 등봉(登封)과 밀현(密縣), 숭산(嵩山), 임여(臨汝) 등을 차례로 탈환하면서 서북군은 낙양을 버리고 서쪽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11월 19일 왕선옥(王善玉)이 지휘하는 중앙군 제10군이 낙양을 무혈점령하였다. 하지만 전투는 어느 편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한 채 점차 지구전 양상을 보였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군비와 무기, 장비에서 우세한 장개석측이 유리해 질 것은 뻔하였다. 서북군의 일선 부대는 이미 탄약이 고갈되고 있었기에 승패는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다. 하남성 개봉에 주둔한 채 당생지를 후원하고 있던 한복구가 다시 풍옥상의 휘하에 들어가서 호당구국군 선봉 총사령관을 맡은 것이다. 12월 3일 새벽에는 강소성 포구(浦口)에서 석우삼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중앙의 군비 부족으로 급료가 몇달이나 밀린데다 광동성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포구는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남경을 마주보고 있는 곳이자 진포 철도의 종착점이기도 하여 교통의 요충지였다. 대부분 비적 출신인 석우삼의 반란군은 중앙군을 기습 격파하고 포구 시내를 마구 약탈한 다음, 풍옥상군에 호응하여 남경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급히 남경으로 돌아와 수도경비부대 6천여명과 중앙군관학교 생도들을 진압부대로 출동시키는 한편, 남경 방어를 위해 상해에서 헌병과 경찰 수천여명을 수송시켰다. 하지만 중앙군의 대부분이 최일선으로 출동하면서 남경에는 변변한 병력조차 없는 반면, 석우삼군은 숫적으로 우세한데다 무기와 양식도 풍부하였다. 따라서 석우삼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남경의 방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12월 4일에는 하남성 정주에서 당생지가 장개석 하야와 내전 중지를 요구하면서 반장 연합에 가세하였고 6일에는 산동성 주석 진조원이 독립을 선포하였다. 한복구, 석우삼의 반란에다 중앙군과 함께 손양성군과 싸우고 있었던 당생지마저 반란을 일으켜 총부리를 돌린 것은 장개석에게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대혼란에 빠진 정부군은 반란군의 총공격을 받아 전 전선에 걸쳐 밀려나기 시작했다. 손양성의 지휘 아래 서북의 대군이 농해 철도를 따라 남경을 목표로 산동성 남쪽과 서주 방면으로 동진하면서 정부군을 밀어내고 있었고 당생지군은 호북성을 침입하였다. 광동성에서는 광동군이 장발규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하면서 광주 함락도 초읽기였다.


포구에서는 석우삼군과 진압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면서 남경 시내까지 포성이 들리고 정부 요인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상해로 탈출하였다. 또한 각국 선박들은 양자강 진입을 중지하였고 일본 군함도 출동하여 남경-상해의 항로를 감시하였다. 남경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흉흉했다. 장개석으로서는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12월 6일 새벽에는 감찰원(監察院, 입법원, 행정원, 사법원, 고시원과 함께 중화민국 정부 5원 중의 하나로, 조사, 감찰, 탄핵 등 우리의 감사원에 해당) 원장을 맡고 있던 조대문(趙戴文)이 남경에서 탈출하여 상해로 갔다. 조대문은 제2집단군 참모장을 지내어 염석산의 최측근이었다. 따라서 그의 탈출은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는 염석산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전선 축소를 명령하는 한편, 우선 석우삼 부대를 격파하여 남경의 위기를 구하기로 하였다. 무한 방면에서 급히 직계군인 제2사단과 제22사단을 불러들인 후 공격을 명령했다. 석우삼은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된 형세인데다 전투력도 별볼일 없었다. 따라서 서북군 지휘관들은 서안에서 군사회의를 열고 석우삼 구원을 결정했지만 결국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석우삼은 안휘성 주석 자리를 받는 조건으로 장개석에게 귀순한 후 산동성의 진우인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위기는 지나갔다.


한때 불꽃처럼 타오르던 반장 연합군의 세력은 장개석의 발빠른 대응과 회유 공작으로 금새 꺼져나가고 있었다. 군벌들은 서로 보조가 제대로 맞지 않아 차례로 각개격파당하거나 장개석의 회유에 넘어갔다. 장개석은 하응흠을 광동행영주임으로 임명하고 대규모 증원부대를 해상으로 광주로 내려보냈다. 또한 부인 송미령은 진제당, 여한모 등 광동파 군벌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마구 뿌렸다. 뇌물의 힘은 컸고 흔들리던 광동군벌들은 장개석에게 다시 충성을 맹세하였다. 

하응흠은 광동성을 침입한 장발규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발규는 완전히 괴멸한 채 잔존병력 2천명을 수습하여 광서성 오주(梧州)로 퇴각했다. 진제당의 광동군 역시 퇴각하는 광서군을 추격하여 광서성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종인과 백숭희 등 계계 역시 베트남 경계까지 쫓겨갔다. 12월 말까지 남방의 반란이 거의 진압되면서 장개석은 하남성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 1929년 12월의 상황. 파란 색이 반장연합 측 군벌, 붉은 색이 장개석 측 군벌.


한편, 무한을 공격하기 위해 호북성을 침입한 당생지도 위기에 빠졌다. 함께 반란에 가담했던 서원천, 하두인은 장개석이 보낸 뇌물에 매수되어 도로 중앙으로 귀순하여 유치의 제1사단과 함께 당생지군을 협공하였다. 결국 1930년 1월 8일 당생지는 하야를 선언한 후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또한 염석산도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내어 하남성으로 병력을 출동시켜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자금력에서 풍옥상보다 월등히 우세한 장개석은 막대한 돈을 사방에 뿌려대면서 군벌들을 회유하였다. 이를 위해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고 자기 사재까지 털었다. 군비 부족에 허덕이는 군벌들의 약점을 이용한 장개석의 뇌물 공세는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위기를 적절하게 넘기는데 유용하기는 했지만 군벌들의 충성심을 살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기보다 결과적으로 가뜩이나 중국의 오랜 병폐였던 도덕적인 타락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는 국민정부의 타락과 부패, 무능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염-풍 연합하다


군벌들이 이탈하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풍옥상은 장개석을 누르기 위해서는 여전히 중립을 지키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염석산, 장학량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염석산은 두번에 걸친 풍옥상의 반란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두 사람이 오랜 원한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청조 시절 산서 신군 제86표의 표통(標統, 여단장)으로 산서성 태원에서 주둔하고 있던 염석산은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반청 봉기를 일으켜 태원을 점령하였고 이후 원세개 정권에 의해 산서독군으로 임명되었다. 산서성은 석탄과 철광석이 많고 탄광과 근대 공업이 발달하였고 태원에는 대규모 무기 공장도 있었다. 염석산은 산서성을 외부로부터 고립시키고 불간섭을 고수하면서 산서성의 근대화에 노력하는 등 "산서의 토황제"라고 불리었다.

▲ 1920년대 말의 태원병공창(太原兵工廠). 1만5천여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면서 월 평균 야포 35문, 박격포 100문, 소총 3천정, 포탄 1만 5천발, 박격포탄 9천발, 탄약 420만발을 생산하는 등 동북의 봉천병공창과 무한의 한양병공창과 함께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이었다.

중앙의 혼란과 내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서성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에만 만족하였다. 하지만 1926년 장작림-오패부 연합군과 풍옥상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장작림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로소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염석산은 풍옥상의 후방을 공격하여 수원성을 점령하였다. 뒷치기를 당한 풍옥상은 완패하여 서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후 장개석이 북벌전쟁을 시작하자 두 사람은 동맹자가 되어 장작림을 격파했지만 북벌이 끝난 뒤 논공행상을 놓고 하북성을 차지하는 문제와 편견 회의를 놓고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개석과 풍옥상이 대립하자 교활한 염석산은 겉으로는 중앙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면서도 한편으로 풍옥상 측에 무기와 양식을 몰래 제공하는 등 양다리를 걸친 채 양측이 던지는 추파를 지켜보고 있었다. 풍옥상과의 오랜 원한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이 중앙집권화와 군벌 해체를 추진하는 이상 아무리 중립을 고수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염석산 또한 비켜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염석산의 생각은 어느 한편이 완전히 몰락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대군벌인 염석산이 어느 편에 가세하는가에 따라 중국 전체의 전황이 변화할 수 있었기에 염석산을 어떻게든 끌어들일 생각으로 토역군 부사령관에 취임할 것을 제안했으나 염석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풍옥상도 태원으로 가서 직접 염석산과 회견하려 했지만 염석산의 거부로 아예 만나지도 못하였다.


▲ 1930년 5월 2일자 타임지 표지의 염석산.

1930년 1월 10일 정주에서 열린 회의에서 장개석은 하남성과 산동성을 염석산에게 주기로 하고 약 5만명에 달하는 투항한 당생지 군을 산서군에 편입토록 하였다. 또한 서북군 토벌에 참여할 경우 풍옥상을 평정한 뒤 그의 기반을 염석산의 몫으로 주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21일 서북군 지휘관들이 연명으로 염석산에게 반장에 참여하지 않으면 산서성을 침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앞서 장개석에게 귀순했던 한복구, 석우삼은 세력을 확충하는 한편 다시 태도를 바꾸어 장개석을 비난하고 염석산에게 반장연맹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다. 장개석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서주에 대병력을 포진시키고 진포철도를 따라 북상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풍옥상 만큼이나 장개석을 불신하고 있던 염석산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양측의 관계는 급격하게 경색되었다.

 

2월 9일 염석산은 장개석에게 전문을 보내어 자신과 풍옥상, 장개석 삼자가 함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서 해외로 출국하자고 제안하였다. 장개석이 받아들일 리 없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상 최후 통첩이었다. 장개석은 "아직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거절하였다. 

 

결국 염석산은 11일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풍옥산과 손을 잡기로 결심하였다. 3월 14일 태원에서 서북군과 산서군, 광서군의 주요 장령 57명이 모여서 반장연합군을 선언하였다. 총사령관은 염석산, 그리고 풍옥상과 이종인, 장학량이 부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반장연합군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1방면군 : 계군(광서군)은 이종인이 통솔하여 광서성에서 호남성으로 북상, 무한으로 진군한다.

제2방면군 : 서북군은 풍옥상이 통솔하여 하남성에서 농해, 평한철도를 따라 서주와 무한으로 각각 진군한다.

제3방면군 : 진군(산서군)은 염석산이 통솔하여 진포철도와 교제철도(산동성 청도와 제남을 연결하는 철도)를 따라 서주를 공략한 후 남경을 향해 남하한다.

제4방면군 : 석우삼 부대는 산동성 제녕(济宁), 연주(兖州)를 거쳐 산동성의 성도 제남을 공략한다.


그리고 장학량의 동북군은 제5방면군을, 사천성의 류문휘는 제6방면군, 호남성의 하건은 제7방면군, 하남군벌 번종수(樊鍾秀)는 제8방면군으로서 각각 전선을 맡기로 하였다. 


▲ 태원역에서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출동 중인 산서군 병사들.


전국의 병력은 거의 80만명에 달하였고 회수 이북과 양광, 사천성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토의 2/3가 장개석 타도를 외쳤다. 그야말로 거대한 반장 포위망의 결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