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군벌 전쟁 "중원대전" 제5화 - 중원대전 폭발 /blog.naver.com/atena

                                     

* 반장 연합군의 모순


태원에서 풍옥상과 염석산이 합종연횡을 맺는 동안, 장개석은 하성준을 보내어 하남성과 산동성, 호북성 일대의 중소 군벌들을 회유하여 풍옥상과의 관계를 끊게 하는 한편 진영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서주 방면은 유치의 지휘 아래 호종남(胡宗南)의 제1사단 제1여단, 고축동(顧祝同)의 제2사단, 진계승(陳繼承)의 제3사단, 이운걸(李雲杰)의 신편 제22사단, 팽진지(彭進之)의 제12여단 등 직계부대가 전개하였다. 무한 방면은 중앙군 외에 양호성(楊虎城)의 신편 제14사단, 서원천(徐源泉)의 제10군, 위익삼(魏益三), 유계당(劉桂堂) 등 반장 연합군에서 전향한 군벌들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또한 산동군벌 진조원도 장개석이 내미는 거액의 뇌물에 넘어가 서북군과 석우삼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장개석은 반장세력들을 각개격파한다는 방침으로 평한철도와 진포철도를 따라 북상하여 한복구, 석우삼, 손전영 등 잡패군대를 단숨에 제압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서북군을 공격할 참이었다. 그 와중에 염석산의 하야 권고와 염석산-풍옥상 연합은 큰 충격이었고 점차 안정되어 가던 화북의 정세는 다시 예측불허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동안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버리고 태원에서 반장 기치를 올린 염석산은 가장 먼저 북평에 군대를 보내어 정부 부처와 주요 기관, 국민당부를 신속하게 장악하였다. 북평에 체류하고 있던 장개석 측 인사들은 모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또한 하북성 주석 서영창(徐永昌), 찰합이성 주석 양애원(杨爱源)을 겸 부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손초(孙楚), 양효구(杨效欧), 관복안(关福安) 등 산서군 부대는 하남성 정주를 경유하여 하남성 동쪽의 요충지 란봉(兰封, 지금의 兰考县)로 진군하였다.

진포철도 방면에서는 부작의(傅作义), 장음오(张荫梧)의 지휘에 따라 산동성의 덕주(德州), 제남(济南)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출동 병력은 도합 15만명에 달했다. 또한 산동성 남부에는 석우삼 부대가, 하남성에는 한복구 부대가 있었고 각각 3만명 정도였다.  안휘성에는 손전영(孙殿英) 부대 2만명이 있었고 그 외에도 류춘영(刘春荣), 번종수, 류무은(刘茂恩) 등 하남성과 양호, 안휘성 일대의 군벌들도 가세하였다. 광서성에서는 이종인, 백숭희가 부대를 정비하고 세력을 규합하여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동관에 사령부를 둔 풍옥상은 녹종린을 전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장유새(张维玺)가 제1로를, 손양성이 제2로를, 방병훈(庞炳勋)이 제3로를, 송철원이 제4로를, 손연중이 제5로를, 만선재(万选才)가 제6로를 맡았다. 서북군은 병력을 크게 둘로 나누어 남로군은 무한 방면으로, 동로군은 개봉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감숙성 주석 류욱분(刘郁芬)이 후방 총사령 겸 섬서성 주석 대리를 겸하여 서북 4성의 후방 업무를 맡았다. 서북군의 군세는 6로군에 26만명이었다. 풍옥상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파부침주(破釜沉舟, 초한지에서 항우가 진나라의 대군을 맞아 싸웠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솥을 깨뜨리고 배를 불태워 배수진을 친다는 뜻)의 의지로 장개석과 사활을 건 결전을 할 생각이었다. 반장연합군의 총병력은 8개 방면군 80만명에 달했으니 그 위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4월 2일에는 태원에서 각 파의 대표들이 모여 반장 공동 선언과 장개석에 대한 토벌, 국민정부의 개조를 합의하였다. 또한 진공박(陳公搏), 추로(鄒魯), 왕법근(王法勤) 등 국민정부 내 왕정위파 정치가들은 염석산, 풍옥상과 회견한 후 군사는 염석상, 풍옥상, 이종인 세 사람이, 정치는 왕정위가 각각 맡아서 軍과 政을 분리하는데 합의하였다.

 

반장 연합군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내부에는 뿌리깊은 모순이 있었다. 처음부터 장개석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던 풍옥상, 이종인과 달리 염석산은 주변의 상황에 마지못하여 끌려들어간 면이 있었다. 원래 그는 중앙에 뜻이 없고 중국 대륙을 놓고 장개석과 일전을 벌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지반인 산서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이편, 저편을 오가면서 변절을 거듭하던 한복구, 석우삼은 또 한번 장개석을 배신하고 반장 선언과 함께 염석산에게 보호를 요청하자 장개석은 이들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염석산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하남성과 산동성으로 진출할 구실을 만들었다. 염석산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또한 남쪽에서는 장발규, 이종인의 군대가 패퇴하고 서북군도 점차 열세로 내몰리자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서군 내부에서도 장개석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었고 일부는 반란을 일으켜 염석산에게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은 염석산이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풍옥상은 장개석을 쓰러뜨린 뒤에 염석산까지 함께 정리할 생각이었고 염석산도 마찬가지였다. 오월동주의 관계이다보니 염석산은 일면 무력, 일면 교섭이라 하여 장개석을 자웅을 겨룰 태세를 갖추면서도 한편으로 남경과 거듭 접촉하면서 싸우지 않고 타협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의 호언과 달리 소극적인 탓에 실제로 최전선으로 출동한 산서군 부대는 일부였고 진군 속도 또한 매우 느렸다. 게다다 산서군은 대부분 오합지졸로 중앙군이나 서북군에 비해 전투력도 형편없었다.

​장개석 진영이나 반장 연맹에 가담한 다른 군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휘성과 호북성, 하남성, 산동성 등 중원에 산재한 여러 군벌들의 군대를 모두 합하면 30만명은 족히 넘었다. 장개석과 풍옥상이 중소 군벌들을 서로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도 이들의 세력이 결코 무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벌들은 장개석에 대한 불구대천의 원한이 있다거나 풍옥상과 깊은 관계가 있지도 않았다. 단지 형세에 따라 유리한 편에 붙어서 자신의 기반을 유지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싸울 이유가 없다보니 숫자는 많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자는 별로 없었고 보조가 맞을 리도 없었다.

쌍방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찰나, 한복구는 3월 22일 또 한번 변절하여 염석산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이는 장개석이 산동성 주석을 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복구, 석우삼은 그동안 장개석과 풍옥상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염석산이 반장 기치를 올리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아무리 눈앞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석으로 색깔을 바꾸던 것이 일상이었던 군벌 내전기에서도 그의 지조없음과 후안무치함(厚顔無恥)은 실로 독보적이지만, 이런 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장개석, 풍옥상도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덧붙여, 한복구는 중원대전이 끝난 뒤에도 승승장구하여 산동성을 통치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군이 산동성을 침입하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여 화북의 방어선 전체가 와해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총살당하여 소인배에 걸맞는 최후를 맞이하였다. 후안무치한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국가에게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는데 보여준다.

 

​장개석은 군벌들을 회유하여 반장 연맹의 분열을 꾀하는 한편, 남경에서 주요 지휘관들을 모아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토역군(討逆軍)은 총 4개 군단으로 나누었다. 한복구가 제1군단 총지휘를 맡아 황하 이남의 수비와 산서군의 침입을 저지한다. 류치는 제2군단을 맡아 강서성과 강소성, 안휘성을 지휘한다. 하성준은 제3군단을 맡아 하남성과 호북성을 지휘한다. 진우인은 제4군단을 맡아 산동성 서쪽에서 석우삼을 공격한다. 또한 양호성의 신편 제14사단이 하남성 남양(南阳)을, 범석생(范石生)의 제51사단은 양양-번성 방면을 각각 맡았다. 4월 5일 남경정부는 염석산과 풍옥상 토벌을 선언하였다.


* 동북의 영수 장학량


장개석과 반장연맹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는 동북 4성(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열하성)을 지배하고 있는 장학량이었다. 장작림 이래 탄탄한 기반과 막강한 장학량은 관내의 상황을 관망한 채 어느 편을 들지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장학량 역시 다른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장개석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풍옥상이 황하 이북을 장악한 다음 동북으로 진격하는 상황 또한 장학량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또한 젊고 야심만만한 장학량은 관내로 세력을 확대하여 과거 아버지 장작림이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풍옥상의 반란과 관내의 혼란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 장학량과 장개석. 장학량은 교활하고 야심 넘치는 젊은 군벌이었으나 분에 넘치는 야심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자신을 망치고 나라까지 망치고 말았다.


그는 중앙을 적극 옹호한다고 거듭 선언하면서도 장개석의 동북군 출동 요청에 대해서는 동북의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는 중립을 지키면서 기회를 보아서 관내로 진군하여 북평과 천진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장개석과 풍옥상, 이종인의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던 1929년 5월 17일, 장학량은 주요 지휘관들을 비밀리에 모아서 회의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전달하였다.


"이번의 전란은 우리 동북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관내로 세력을 확대하여 종래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풍옥상군은 장래 산동성 방면을 점령할 야심이 있으므로 우리는 방비를 엄중히 해야 한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동북의 안정에 주력하되 기회를 보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무기와 탄약의 제조에 힘써야 하며 양식을 확보해야 한다. 향후 모든 군사 행동은 반드시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


이는 그의 기회주의적인 야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학량은 군대의 파병을 요구하는 장개석의 요구를 거듭 거절하고 단지 약간의 군수물자를 제공하여 생색만 내었다. 하지만 장작상, 탕옥린, 원금개 등 동북군의 원로들은 장학량의 야심이 무모하고 자칫 중앙과의 관계만 악화시킬 수 있다며 관내 출동에 대해 반대하였다. 실상 동북군은 대부분 오합지졸인데다 군비가 부족하여 도무지 출병할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중동철도의 소유권을 놓고 소련과의 외교적 마찰이 격화되고 있었고 일본 역시 점차 거리를 두려고 하는 장학량 정권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남만주철도를 통해 큰 이권을 누리고 있었던 관동군은 장학량이 민족주의를 앞세워 장개석 정권과 결탁하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고하고 있는데다, 황고둔 사건(皇姑屯事件)에서 보여주었듯 어떤 모험적인 행동도 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이 와중에 장학량이 자기 지반을 굳히는데 노력하는 대신 관내 진출에 대한 야심을 품는다는 것은 분명 현실 착오적이었다.

▲ 만주사변 직전의 동북군. 일본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장학량 정권은 일본과 거리를 두려고 하면서도 관계를 끊을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동북군의 뿌리는 과거 장작림이 지휘하던 비적떼와 청조 시절의 신군(新軍) 연합이었기에 군기도 엉망이고 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북만주의 중소 국경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1929년 7월 10일 장학량이 소련으로부터 중동철도 회수를 전격 선언하고 강제로 중동철도의 소련인 간부들과 직원들을 체포한 후 추방하였다. 또한 하얼빈의 소련 영사관을 강제 수색하였다. 장학량은 소련이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지도부 간의 권력 투쟁 때문에 중국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낙관했지만 소련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1920년대에 장제스의 군사 고문이기도 했던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장군이 지휘하는 극동특별적기군(Separate Red Banner Far Eastern Army, OKDVA)이 조직되어 장학량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장학량과 소련 사이의 교섭이 최종 결렬되자 9월 19일 약 10만명의 소련군이 전격적으로 북만주를 침공하였다. 소련군은 모든 면에서 장학량의 오합지졸 군대를 압도하였다. 흑룡강과 송화강에서 동북군은 연전연패를 당했다. 11월 17일 만주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동북군 제17여단은 괴멸하였고 제15여단은 항복하였다. 동북군의 손실은 전사자 1500명에 포로는 9천여명이 넘은 반면, 소련군의 사상자는 겨우 600여명에 불과하였다. 같은 날 밀산(密山)에서도 대패하여 동북군은 1500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13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소련군은 하얼빈 진공을 눈앞에 두었지만 전진을 멈추었다.

 

▲ 만주리 전투에서 노획한 동북군 제15여단 독전기를 보여주는 소련군 병사들. 봉소전쟁은 단 두달만에 소련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고 장학량은 엄청난 피해만 입었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했지만 장학량은 자기 직계 부대의 출동을 거부하고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지방부대로만 싸우게 하였다. 또한 장개석의 중앙군 출동 제안도 거부하였다. 중앙군이 동북으로 들어올 경우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학량이 방관하는 사이, 일선의 동북군은 괴멸하고 말았고 결국 장학량은 중동철도를 소련에게 반환하였다. 사실상 백기를 든 셈이었다. 장학량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태는 동북군 장령들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뒷날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태반이 저항하는 대신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다.


1929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장개석과 염석산의 모순이 깊어지고 반장세력들이 재기하여 풍옥상, 염석산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기 시작하면서 정세는 갈수록 예측불허가 되었다. 장개석의 장래가 어둡다고 여긴 장학량은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풍옥상, 염석산과 삼각 동맹을 체결하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원로들은 장개석이 패배한다면 풍옥상-염석산이 동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 것이고 어느 편에 가담하건 관내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장학량은 마지못해 뜻을 굽혔지만 그렇다고 야심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30년 3월 풍옥상과 염석산, 이종인이 삼각 동맹을 맺고 반장​ 연맹의 결성을 선언하였다. 총사령관이 된 염석산은 장학량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반장 연맹의 부총사령관에 추대하였다. 이는 장학량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장학량은 "동북 4성은 일본, 소련과의 관계가 복잡하여 남경과 손을 끊을 수 없다"라며 양해해 달라는 비밀 전문을 보냈다. 또한 장개석의 관내 출병 요청에 대해서도 동북의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완곡하게 거절하는 등, 성급하게 휩쓸리기보다는 중립을 지키면서 형세를 보아 유리한 편에 붙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반년 뒤 장개석군의 공격으로 반장 연합군이 붕괴되고 관내의 승패가 확실하게 결정된 뒤에야 비로소 장학량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게 된다.

1930년 5월 초. 지난 수개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양 진영은 소강상태에서 벗어나 드디어 대군을 하남성과 산동성으로 출동시켜 본격적인 결전을 시작하였다. 유치가 이끄는 중앙군 제1사단, 제3사단, 제11사단 등 장개석의 주력이 서주에서 농해철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고, 허창 방면에서는 하성준의 제3군단이 반장 연맹의 번종수 부대를 공격하였으나 서북군의 반격을 받아 격퇴당하였다. 남방에서는 구 광서군, 장발규군을 개편한 제1방면군 3만여명이 이종인, 백숭희의 지휘 아래 진제당의 광동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