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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 전쟁 "중원대전" 제7화(完) - 천하 평정/blog.naver.com/atena

중원대전 최대의 격전

전황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풍옥상은 모든 전력을 기울여 서주를 공략하기로 결심하였다. 강소성 북서쪽에 있는 고도 서주는 중국 최대의 곡창지대이자 진포철도와 농해 철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지리적으로 산동성과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을 연결하는 정치적, 군사적 요지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서주를 놓고 군웅들의 치열한 쟁탈전이 반복되었으며, 중일전쟁 중에는 이종인이 지휘하는 중국군 50만명과 일본군 30만명이 격전을 벌였고 국공내전에서도 회해 전역(淮海战役)에서 인민해방군은 서주를 점령하면서 약 3년간 팽팽했던 내전의 승패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다.

풍옥상이 서주를 손에 넣는다면 남경까지는 지척이었다. 그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손양성-길홍창 부대가 좌익을 맡아 휴현(睢县)을 거쳐 저능(宁陵)으로, 손연중 부대가 중군을 맡아 태강(太康)을 거쳐 귀덕(归德)으로, 손전영 부대가 우익을 맡아 척성(拓城)을 거쳐 서주 북서쪽의 마목집(马牧集)으로 진격하여 삼방향에서 서주를 포위한다. 또한 북쪽에서는 진포철도를 따라 류춘영(刘春荣)의 산서군과 석우삼 부대가 서주를 향해 남하하고 정대장(郑大章)의 기병집단은 우회 침투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 송철원 부대는 정주에서 예비대로 남는다. 풍옥상으로서는 서북군 정예를 총동원한 셈이었다.

서북군의 공세는 8월 6일부터 시작되었다. 손연중의 중로군 선두부대는 장개석군의 최일선을 돌파했으며 저능과 마목집 부근에서도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서북군과 장개석 군 사이에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풍옥상은 좌로군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전진이 지지부진하자 예비대로 대기 하고 있던 송철원 부대를 즉각 투입하여 좌로군에 가세시켰다. 병력이 증원된 서북군은 저능을 향해 재차 공세에 나섰다. 연일 쏟아지는 비에다 병참의 곤란에도 불구하고 손양성의 좌로군은 저능을 점령하여 귀덕 서쪽을 제압하였다. 이로서 장개석군의 일각이 무너졌다.

전황은 급박하였다. 장개석은 일선 부대에 결사 사수를 명령하는 한편, 병력을 귀덕에 집중시켰다. 자신도 최일선으로 나와서 병사들에게 상금을 나누어 주는 등 전투를 독려하였다. 하지만 북군의 맹렬한 공격은 장개석에게도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귀덕과 박주를 포기하고 서주로 철수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총참모장 양걸(杨杰)과 군정부 육군처장 조호삼(曹浩森)은 철수는 자칫 전 전선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서북군은 병참이 취약하니 공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진지를 고수하면서 서북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한편, 서북군의 아킬레스건인 산서군과 석우삼 부대를 우선 격파할 것을 건의하였다. 장개석은 철수를 중지시켰고 지칠대로 지친 서북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채 결국 주저 앉고 말았다.

서주 주변에서 장개석과 풍옥상이 치열할 혈전을 거듭하는 동안, 산서군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풍옥상의 압력에 마지못해 가담하였던 염석산은 전의가 있을 리 만무하였고 전력을 보존하면서 어떻게든 발을 뺄 궁리만 하였다. 서북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와중에도 지원을 거부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오월동주와 동상이몽이 반장연합군이 제대로 보조를 맞출 수 없는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장개석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진우인, 한복구 부대와 함께 직계 부대 3개군 10만명을 투입하여 산서군을 공격하였다. 산서군은 대패하여 황하 이북으로 퇴각하였다. 8월 15일 장광정(蔣光鼎)의 제11군이 산동성의 성도 제남을 탈환하였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산서군의 후퇴로 북쪽의 위협을 제거한 장개석은 서북군에게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풍옥상에게 산동 전선의 붕괴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승리의 기회는 지나갔다. 그는 전군에 섬서성으로의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8월 24일 장개석은 반격을 명령하였다. 그는 낙양과 정주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자에게 100만원을 주겠다고 상금을 걸었다. 상해 노동자의 연 수입이 100원에 불과할 때이니 실로 큰 돈이었다. 장개석 군은 진포철도와 평한철도, 농해철도를 따라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한편, 장개석과 결별한 채 해외를 떠돌고 있었던 왕정위는 풍옥상, 염석산 등과 손을 잡기로 결심하고 7월 말에 천진으로 들어온 뒤 북평에서 신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9월 9일 북평에서 신 정부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염석산이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왕정위, 국민당 원로 사지(謝持), 풍옥상, 이종인, 장학량 등이 위원에 추대되었다. 또한 북평을 북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중국은 북경정부와 남경정부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이미 반장연합군은 도처에서 패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북경정부의 앞날은 불보듯 뻔했다. 게다가 또 한번의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동북이었다.

* 장학량 출병하다

관내가 내전에 빠진 동안 장학량은 장개석과 반장 연맹이 던지는 추파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고수하면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동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혼전은 8월말이 되자 승패는 장개석에게 점차 기울어졌다. 산동성에서 산서군은 거의 괴멸된 채 투항하거나 퇴각하였고 서북군 역시 귀덕, 박주 방면에서 패퇴하여 서쪽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장학량은 동북군을 점검하는 한편, 8월 30일에는 주요 지휘관들을 모아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는 자신이 북평과 천진 등 새로운 지반을 얻으면 장작상, 탕옥린 등 원로들에게 동북의 지반을 일임하겠다고 약속하여 출병의 동의를 얻어냈다. 장개석 역시 연일 장학량의 출병을 독촉하는 한편, 1500만원에 달하는 군비를 제공하였다. 장학량은 관내 출병을 결심하였다. 9월 18일 장학량은 "중앙을 옹호하고 내전을 반대한다"라는 "화평통전(和平通電)"을 선언하고 전국에 전문을 발송하였다. 출동 병력은 약 7만명.

장개석의 강력한 반격이 시작된 가운데, 동북군의 기습적인 관내 출병은 풍옥상, 염석산에게는 결정타였다. 비록 장학량이 중립을 지키면서 기회주의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장개석과 근본적인 모순 때문에 두 사람이 손을 잡는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모든 전력을 장개석과의 전투에 투입하면서 북평-천진 방면에는 변변한 병력도 없었기 때문에 우학충(于學忠)이 지휘하는 동북군 3개 여단이 산해관을 돌파하여 북경으로 진격하자 산서군은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다. 9월 22일 북평과 천진 두 도시는 장학량의 손에 들어갔다. 염석산과 왕정위 등 정부 수장들은 석가장으로, 정부기관은 염석산의 수도인 태원으로 이동했지만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경정부가 수립된지 고작 10일만이었다. 25일에는 동북군 제27여단 5천여명이 보정을 점령하였다.

▲ 1930년 9월 22일 천진에서 행진 중인 동북군


반장연합군의 최일선은 지리멸렬 상태였다. 제남에서 산서군이 패퇴하자 석우삼은 싸우지 않고 멋대로 황하 이북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장학량이 화평통전을 선언하고 출병하자 총 한발 쏘지 않고 투항하였다. 손전영 역시 장개석에게 투항하였다. 최일선이 무너지자 풍옥상은 송철원에게 낙양의 수비를 명령하고 서북군이 동관으로 안전하게 퇴각할 때까지 사수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서북군의 주력은 정주 방면에 묶인 채 장개석 군에게 포위당할 판이었고 남쪽에서는 양호성 부대가 낙양을 향해 북상 중이었다. 이대로 낙양이 함락될 경우 서북군은 고립되어 전멸할 판이었다.

염석산은 장학량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동북군의 하북성과 산동성의 점령을 인정하되, 대신 동북군이 산서성으로 철수하는 산서군을 추격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학량은 풍옥상, 염석산을 아예 몰락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장개석을 견제하고 새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이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염석산에게 자신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내란이 확대되는 것을 막고 진정한 화평을 실현하기 위함일 뿐이라면서 중앙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생각은 없다고 전달하였다. 덕분에 장학량은 총 한발 쏘지 않고 광대한 화북 전역을 장악하였고 염석산 역시 완전히 몰락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9월 30일 란봉이, 10월 3일 개봉이, 6일에는 정주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서북군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10월 7일에는 낙양이 함락되면서 농해철도를 따라 퇴각 중이던 손양성, 손연중, 장유새, 길홍창 등 서북군 주력 15만명이 완전히 포위당하여 항복하였다. 이들의 일부는 중앙군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무장해제되어 해산당했다. 황하 이북으로 철퇴할 수 있었던 것은 약 6만명 정도였다. 풍옥상은 태원에서 동관으로 돌아와 지휘관들을 급히 소집한 후 의견을 물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녹종린은 "물러나서 내부를 정비하고 힘을 키워서 다음을 기약해야 합니다."

​▲ 1930년 8월부터 10월까지의 전황.


10월 8일 풍옥상은 석가장으로 가서 염석산을 만나서 서북군의 철퇴와 정전 방안을 논의하였다. 장개석은 정전에 합의하려면 염석산과 풍옥상 두 사람이 즉각 해외로 출국할 것과 서북군과 산서군의 지휘를 각각 녹종린과 서영창에 맡길 것을 요구하였다. 염석산은 받아들였지만 풍옥상은 서북군의 잔존부대가 섬서성으로 퇴각할 수 있도록 끝까지 지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결정났다. 염석산은 낙양의 함락으로 퇴로가 차단된 서북군이 산서성으로 철수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10월 15일 송철원, 장자충, 유여명, 조등우(赵登禹) 등 서북군의 잔여 부대들이 장학량에게 투항하였다. 장학량은 이들을 제29군으로 개편한 후 송철원을 군장으로 임명하였다.

10월 25일 양호성 휘하의 제27여단이 풍옥상의 사령부가 있는 동관을 점령하였다. 장개석은 서안은 물론, 감숙성과 청해성까지 진격하여 이번 기회에 서북군을 완전히 결단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장학량의 중재로 정전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1월 4일 염석산과 풍옥상은 하야를 선언하였다. 이로서 군벌 최대의 내전이었던 중원대전은 막을 내렸다. 쌍방 합하여 장장 130만명이 참여하였고 전투는 20여개 성에 미쳤다. 사상자는 중앙군이 약 10만명, 반장연합군은 약 20만명에 달했으며 군비 지출만 5억원에 달했다. 또한 사천성에서는 반장연합 측의 류문휘와 장개석 측의 류상, 양삼이 서로 싸우고 운남성에서도 당계요(唐继尧)와 용운(龙云)이 패권 싸움을 하는 등, 중앙의 혼란을 틈타 변경에서도 지방군벌들 간의 치열한 영토 싸움이 벌어졌다.

​▲ 장학량의 관내 출병과 동북군, 장개석군의 진격.


* 중원대전은 끝나고


11월 12일 장학량은 남경으로 와서 장개석과 회담하였다. 장개석은 장학량의 화북에서의 주도권을 인정하되 염석산, 풍옥상을 무력 토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장학량은 이를 반대하고 무력 대신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장개석은 장학량이 남경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화북의 군정대권을 위임키로 하였다. 장학량은 하북성과, 수원성, 찰합이성을 차지하여 장개석 다음의 세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원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석우삼이 반란을 일으켜 동북군을 격파하고 석가장을 빼앗았다. 중앙군이 개입하고 산서군과 한복구 군이 가세하여 석우삼을 격파할 수 있었지만 지반을 점점 빼앗기게 되어 결국 북평과 천진만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학량은 신지반을 어떻게든 확보하려고 더 많은 병력을 출동시켜야 했고 정작 동북의 군사력은 공백 상태가 된데다 내부에서는 파벌 싸움마저 격화되었다. 동북 지배를 꿈꾸고 있던 관동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학량과 갈등을 빚고 있었던 구파들은 일본에 맞서는 대신 도리어 친일파로 전향하여 관동군의 동북 지배에 앞장 섰고 뒷날 만주국이 수립되자 요직에 올라 권세를 누렸다.

장학량은 군대를 돌려 반격하는 대신 관동군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부저항정책"을 고수하며 외교적 타협에 나섰다. 이는 관동군의 야심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데다 동북군 내부의 분열, 그리고 자신이 애써 확보한 신 지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학량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일본은 속전속결로 광대한 동북 전역을 차지하였다. 게다가 산동성을 차지한 한복구가 북상하여 북평, 천진을 위협하였다. 장학량은 동북을 되찾는 대신 남은 지반이라도 지키는 쪽을 선택하였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만주국을 세웠다. 장학량의 세력이 축소되자 주변의 군벌들이 승냥이들처럼 달려들었다. 수원성은 산서파 군벌 부작의가, 찰합이성은 서북파 군벌 송철원이 차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장학량은 무능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그의 권위는 완전히 추락하였다. 결국 장개석의 명령으로 섬서성으로 쫓겨가야 했고 공산당 토벌에 투입되었다가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을 일으킨다.

염석산은 하야한 후 요동반도의 대련(大連)으로 갔다. 이곳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관동군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만주사변 직전인 1931년 8월 5일에 몰래 산서성으로 돌아왔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장개석과 화해하여 다시 산서성의 지배를 허락받았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제2전구 사령관에 임명되어 산서성과 섬서성의 방어를 맡았고 국공내전 중에는 행정원장에 임명되는 등 장개석의 중요한 정치 파트너가 되었다. 그는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패배하여 "국부천대(國府遷臺, 대륙을 버리고 대만으로 피신했다는 의미)"를 할 때에도 함께 하여 대만에서 여생을 보냈다.

풍옥상은 산동성 태산(泰山)에서 은거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화북 침략이 본격화되자 이전의 심복들을 모아서 항일동맹군을 결성하고 일본에 대한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송철원, 한복구 등 대부분의 서북파 장령들은 일본과 싸우기보다 자신의 지반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더 이상 풍옥상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또한 장개석과의 불화가 거듭되면서 장개석은 풍옥상을 견제하여 어떠한 실권도 주지 않은 채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명목상으로만 서북군의 영수였던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잠시 제6전구를 맡았으나 일본군의 공세와 한복구의 적전도주로 화북전선이 무너지자 장개석은 그 책임을 물어서 해임하였고 더 이상 어떤 직책도 맡지 못했다. 국공내전 말기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장개석의 독재를 앞장서서 비난하면서 중공과의 타협을 추진하다가 흑해 오뎃사 근해에서 의문의 사고로 죽었다.


▲ 노년의 풍옥상. 만약 그가 좀 더 교활했다면 중국을 지배했을 사람은 장개석이 아니라 풍옥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천진으로 도망쳤던 왕정위는 1931년 5월 광동군벌들이 반란을 일으켜 양광사변이 발발하자 광동성 광주로 가서 합류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 은밀하게 일본과 결탁하려 했던 그는 장개석이 각 당파의 결속을 외치면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남경으로 돌아와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거듭된 침략이 반복되고 내부적으로는 여러 정파와 군벌들이 분열된 상황에서 그의 역량으로는 역부족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밀어내었던 장개석에게 복직을 요청하여 장개석-왕정위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이후에도 남경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몇번이나 장개석과 대립하였던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으로 전향하여 친일괴뢰정권의 수장이 되었고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치졸한 매국노로 이름을 남겼다.


한복구와 함께 민국시대 제일의 후안무치라 불리었던 석우삼은 풍옥상을 세번 배신하고 결국 장학량에게 투항하였다. 장학량은 그의 군대를 제13로군으로 개편하여 하북성 남쪽의 형태(邢台)에 주둔시키고 매월 60만원의 군비를 지급하였다. 하지만 야심 넘치고 변화무쌍한 그는 허황되게도 "하북왕"이 되기를 꿈꾸었다. 1931년 5월 장개석이 '훈정 약법(訓政約法)'의 제정을 놓고 국민당 원로이자 광동군벌의 영수인 호한민(胡漢民)과 대립하면서 그를 감금하자 광동군벌들이 반발하여 광주에서 반장투쟁을 선언하였다.(제1차 양광사변) 석우삼은 이를 호기로 생각하고 손전영과 함께 북상하여 장학량을 공격하였다.

장개석과 장학량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남쪽에서는 하응흠과 하성준, 유치가 이끄는 중앙군이, 북쪽에서는 우학충의 동북군이 양면에서 협공하였다. 석우삼은 한때 석가장을 점령하고 보정까지 위협하며 기세를 떨쳤지만 결국 8월 초 중앙군과 동북군의 총공격을 받은데다 산서군까지 가세하면서 완전히 괴멸당하고 말았다. 하루 아침에 몰락한 그는 한복구를 찾아가 한동안 신변을 의탁하다가 천진의 일본 조계에서 도히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등 일본 특무조직의 비호를 받으며 친일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그는 용서를 받아 제69군장과 제10군단장을 역임하였고 기찰전구(冀察戦区) 부사령관이 되어 화북의 일본군 점령지대에서 유격전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중공이 자신의 구역에 침투하여 해방구를 건설하자 공격에 나서지만 여지없이 패퇴하자 일본군에게 투항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장개석은 석우삼의 휘하에 있는 신편 제8군장 고수훈(高樹勲)에게 석우삼 제거를 지시하였고 결국 석우삼은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모래벌판에 생매장당한다. 사람을 산채로 묻는 것은 석우삼이 평소 즐겨 내리는 형벌이었는데 인과응보인 셈이었다.


​▲ 중원대전 이후 중국의 세력 재편과 주요 대군벌. 양광과 양호를 지배했던 이종인의 세력은 광서성 하나로 줄어들었고 염석산과 풍옥상은 하야하였다. 황하 이북은 장학량의 세력권이 되었다. 장개석은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중소 군벌들을 흡수하여 최대의 군벌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독립적인 군벌들이 상당한 세력을 가진 채 남아 있었다. 따라서 중원대전 이후에도 장개석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하는 군벌들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리되어 1936년 10월 양광사변의 종결과 함께 군벌 내전은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된다.

 

장개석이 중앙 집권화와 군벌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은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풍옥상과 염석산은 하야했지만 산서파와 서북파는 여전히 건재했고 화북의 지배자가 된 장학량은 사실상 장개석과 중국을 양분하여 남북으로 분할 통치하였다. 또한 광서성에는 이종인이 건재하였고 광동성의 군벌들은 중원대전에서는 장개석의 편을 들었지만 자신들의 독립성이 침해받을 경우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편견 문제도 흐지부지되었다. 1929년 12월 15일 열린 편견상무회의에서 편견회의 취소를 결의하면서 더 이상 군축은 논의되지 못했다. 게다가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장개석은 중국을 하루라도 빨리 재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군벌들과 타협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중원대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이 군벌들을 무력으로 완전히 누를 수 없었던 것은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의 직계 부대는 겨우 30만명에 불과하였고 이는 약 200만명이 넘는 군벌군대의 1/7에 불과하였다. 장개석은 단지 여러 군벌들 중에서 가장 강한 군벌일 뿐, 힘으로는 군벌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채찍을, 한편으로는 당근을 내밀면서 군벌들을 회유하고 타협해야 했다.

 

그렇다고 얻은 것이 전혀 없었던가. 북벌전쟁에서 장개석의 대등한 동맹자였던 염석산과 풍옥상, 이종인은 중원대전의 패배로 더 이상 장개석과 천하를 놓고 싸울 역량은 없었다. 누구도 더 이상 장개석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없었고 무력이 아닌 정치 투쟁과 여론전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광동군벌들만이 왕정위와 손을 잡고 두번의 양광 사변을 일으켰지만 결국 장개석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적당한 지분을 인정받는 선에서 항복하였다. 중원대전은 신해혁명 이래 20년에 걸쳐 진행되었던 군벌들의 마지막 천하 쟁탈전이었던 것이다.

중원을 평정한 장개석은 눈을 서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또 다른 적이 있었다. 모택동-주덕이 지휘하는 홍군이 강서성 서금(瑞金)을 중심으로 세력을 빠르게 확장하며 치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들은 중원대전이 한창이던 7월말에 장개석의 눈이 중원에 쏠린 것을 이용해 남창과 장사, 무한을 공격했다가 호되게 패배하였다. 하지만 세를 불려가는 속도와 조직력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그는 이 오합지졸 농민군대에 대한 토벌과 함께 사천성과 귀주성, 운남성 등 아직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서부 변경의 군벌들까지 완전히 복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30년 12월 19일, 강서성 주석 겸 제19로군 사령관 노조평이 지휘하는 5개 사단 4만 4천명이 홍군 토벌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앞으로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장장 20년 동안 계속될 장개석과 모택동의 첫번째 싸움이었다.

ps. 드디어 미루어 놓았던 것 중의 하나를 끝냈습니다. 늘 그러하듯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졌네요. 이제는 그동안 벌려놓은 것들(군벌사, 국공내전 등)을 정리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