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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2. 단기서의 야심과 외몽골의 병합/blog.naver.com/atena

단기서 남정(南征)에 나서다

 

소위 "부원지쟁(府院之争, 총통부와 국무원의 싸움이라는 뜻)"이라고 불릴만큼 총통 여원홍과 국무총리 단기서의 대립은 뜻밖의 해프닝인 "장훈의 복벽"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여원홍은 북양군벌들을 견제하려고 장훈을 끌여들인 어설픈 자충수 덕분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단기서는 국무총리에 복귀하여 북경정부의 실권자가 되었다. 단기서는 자기 뜻대로 북경정부를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당면 문제는 첫째가 서남군벌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중국을 통일하는 것, 두번째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세번째가 신해혁명 직후 독립을 선언한 외몽골을 도로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앞 화에서 언급했지만, 원세개 사후 중국은 크게 남북으로 갈라져 양자강 중하류를 경계로 북양군벌들이 주도하는 북경정부와 손문의 광주 군정부를 중심으로 한 서남 군벌들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요 전장터는 사천성과 호남성, 호북성이었다. 운남군벌 당계요가 사천성을 침공하자 사천군벌 류존후와 능극무(能克武)가 단기서의 원조를 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광서군벌 육영정(陸榮廷)은 호남성을 침공하여 형양을 점령하였다. 또한 광주군정부의 참모총장인 이열균이 당계요와 연합해 강서성을 공격했다가 북양군의 반격으로 격퇴당했다. 호북성 양양에서는 병변(兵變,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복건성 역시 혼전 상태였다. 여기다 1918년 2월 26일에는 육영정이 부하를 시켜 손문파의 해군총장 정벽광(程壁光)을 암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군사적으로는 북양군벌이 월등히 우세했지만 세수가 청말의 1/10에 불과하여 북경정부의 재정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월세입은 1200만원인데 세출은 2000만원으로 한달에 800만원이 적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를 동원해 내전을 벌이겠다는 것은 결국 외세로부터 돈을 빌려서 해결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장훈의 복벽사건 전까지만 해도 협력관계였던 국무총리 단기서와 대리총통 풍국장이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단기서는 "안복구락부(安福俱樂部)"라는 자신의 정치적 사조직을 이용해 국회에 뇌물을 뿌려 장악하고 북경정부의 요직을 자기 측근들인 안휘파로 채워넣었다. 반면, 풍국장은 정치적 수완에서는 단기서에 미치지 못했지만 대신 그의 직예파가 북양군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풍국장이 단기서의 독주에 불만을 품자 단기서로서는 직예파의 쿠테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직속의 군대를 가져야 할 필요를 절감한 단기서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이었다. 원래 중국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이 거론된 것은 미국의 권유 때문이었다. 절대 유럽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월슨 대통령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짐머만 전보 사건으로 1917년 2월 3일 대독 국교 단절을 선포하였고 4월 6일 미 의회는 참전을 결정하였다. 또한 전세계의 중립국가들에게도 미국과 보조를 맞추어 대독선전포고와 참전을 요청하였다. 주중미국공사였던 파울 라인쉬(Paul. S. Reinsch)가 북경정부에 이 사실을 전달하자 단기서는 외국에서 차관을 획득하고 새로운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중국에 별다른 호감이 없는 반면 독일은 중국에 우호적이었으며 만약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강력한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기서의 속셈이 뻔히 보이는 풍국장과 직예파는 강력히 반대했지만 단기서는 "장훈의 복벽사건"에서 독일이 연루되었다는 핑계로 1917년 8월 14일 대독선전포고를 하였다.

 

물론 중국군이 유럽에 참전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산동성의 청도와 교주만의 독일 조차지는 이미 1914년 11월에 일본과 영국이 점령한 상태였다. 중국은 기껏해야 중국내 독일, 오스트리아의 몇몇 조차지를 별다른 충돌 없이 회복한 것이 전부였으며 식량과 물자를 연합국에 판매하고 17만5천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유럽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최일선에서 진지 공사와 병참 등에 종사하여 온갖 고된 노역을 해야 했으며 약 2만4천명이상이 전투에 휘말리거나 폭격, 사고 등으로 죽었다. 이것이 중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의 실체였다.

 

그럼에도 단기서는 일본과 비밀리에 교섭에 나섰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에 돈과 무기를 제공할 형편이 아니었고 중국의 참전을 권유했던 미국 역시 의회의 반대로 대중 차관이 무산되었다. 따라서 단기서가 접근할 수 있는 상대는 일본뿐이었다. 육군 대장 출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内閣)는 중국을 침탈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 호기로 생각하고 단기서의 요청을 적극 수락하였다. 데라우치 내각이 단기서에게 제공한 차관은 3억8천만엔에 달했는데 단기서는 그 댓가로 광산, 산림, 철도 등 온갖 이권을 제공하였으며 산동성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에게 넘기기로 몰래 약속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은 일본의 경제적인 반식민지로 전락하였고 그 폐해는 장제스 정권의 발목까지 붙잡아 1920~30년대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단기서로부터 얻은 이권이 하도 엄청났기에 데라우치 스스로도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내가 중국에 심어놓은 일본의 권익은 21개조 조약의 10배에 달한다." 물론 이 돈은 오로지 단기서 개인의 치부와 "참전군"이라 부르는 사설 군대의 편성에 활용되었다. 단기서의 매국 행위는 연운16주를 요나라에게 넘겼던 후당의 석경당과 맞먹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한편, 서남군벌에 대한 처리를 놓고 단기서는 무력통일을, 풍국장은 타협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육영정이 호남성을 점령하자 단기서는 풍국장의 반대를 묵살하고 남정을 결정하였다. 가장 먼저 호남성을 공략한 후 여세를 몰아 광서성과 광동성을 점령한 다음 사천성을 거쳐 귀주와 운남까지 진격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친척인 오광신(吳光新)을 사령관으로 직예파인 제8사단과 제20사단을 동원해 호남성의 성도 장사로 진군시켰다. 또한 호남독군 담연개(譚延闓)을 파면하고 자기 측근인 전량좌(傳良佐)를 그 자리에 앉혔다. 이런 일방적인 행동은 "호남성의 자치는 호남사람들이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던 호남성의 민심을 격앙시켰다.

 

북양군이 남하한다는 보고를 듣자 육영정도 광서성의 성도인 남녕에서 군사회의를 열고 일전을 벌어기로 결정하였다. 동원병력은 80개 대대 5만명에 달했으며 "양광호국군"이라고 불렀다. 이 병력은 3만명의 공격군을 훨씬 능가하는 숫자였다. 또한 육영정이 군대를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받은 호남성장 조항척도 단기서에게 반기를 들어 호남군 제1사단으로 형양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917년 10월 6일 북양군 2개 사단은 장사를 출발해 형양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8사단이 호남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방어선을 돌파하고 형양 북쪽 40km 떨어진 형산을 점령하였다. 형양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이 보고를 들은 단기서는 의기양양하면서 앞으로 서너달이면 남쪽의 반란을 모조리 제압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형양 공략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 급보가 들어왔다. "계군(광서군)이 호남에 들어왔다!" 육영정군은 숫적으로도 우세할 뿐더러, 단기서의 명령에 마지못해 싸우고 있던 직예파로서는 육영정과 사생결단으로 싸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풍국장은 몰래 육영정에게 접근하여 反단기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직예파 지휘관들은 단기서의 명령을 무시한 채 멋대로 전투를 중지하였다. 그리고 직예파 독군들인 강소독군 이순(李純)과 강서독군 진광원(陳光遠), 호북독군 왕점원(王占元)이 연명으로 남정의 중단과 전량좌의 파면, 호남에서의 철수하라는 건의서를 단기서에게 올렸다. 

 

위신에 먹칠을 한 단기서는 격분하여 남정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안휘파 부대인 장경효(張敬曉)의 제7사단을 호남성으로 급히 출동시키는 한편, 육영정을 양광순무사에서 해임한다는 명령서를 올렸으나 대리 총통 풍국장에 의해 거부되었다. 풍국장은 오히려 장사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결국 백기를 든 쪽은 단기서였다. 단기서는 하야하고 왕사진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 단기서와 장작림 손을 잡다

 

직예파에게 한방 먹은 단기서는 대신 "동북왕" 장작림에게 접근하였다. 장작림과 손을 잡고 직예파를 밀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를 성사시킨 사람이 그의 심복이자 육군부 차장이었던 서수쟁이었다.

 

서수쟁(徐樹錚)은 쉬저우 샤오현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통과하여 수재(秀才, 우리로 치면 진사에 해당)가 되었다. 산동순무였던 원세개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자신을 등용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그의 편지가 원세개의 측근이었던 단기서의 눈에 띄면서 단기서의 부하가 되었다. 1905년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육군사관학교 보병장교로 졸업한 후 귀국하여 북양군 제6진의 군사참의로 임명되었다. 신해혁명 중에는 제1군 참모장이 되어 혁명군을 격퇴하고 무창을 탈환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 덕에 단기서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이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원세개 사후 여원홍이 대총통에, 단기서가 국무총리가 되자 서수쟁은 국무총리 비서장이 되었다. 장훈​의 복벽사건 때에는 토역군의 참모장을 맡아 단기서를 대신해 작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매우 독선적이고 오만했으며 주인인 단기서의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월권을 행사하는 등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상 단기서는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서수쟁이 쥐고 있는 셈이었다. 여원홍과 단기서가 사이가 나빠진 것도 서수쟁이 여원홍 앞에서 고압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서수쟁은 장작림에게 단기서를 도와준다면 부총통의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단기서가 일본으로부터 구입한 무기를 중간에서 가로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종의 계약금인 셈이었다. 안그래도 중앙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던 장작림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북양군벌의 직계가 아닌데다 출신도 미천했던 그는 여지껏 한낱 변방의 촌놈으로 취급받으며 단기서의 비위를 맞추던 신세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역전된 셈이었다.

 

장작림은 당장 출병을 결정하고 1918년 2월 25일 심복인 장경혜와 정초를 지휘관으로 제27사단 53여단을 출동시켜 북경 동북쪽에 있는 란주(獻州, 현재의 란현)에 주둔시켰다. 또한 참모장인 양우정을 진황도로 보내어 항구에 쌓여 있던 일본제 소총 2만7천정을 탈취하였다. 단기서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명목으로 "참전군" 편성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이 무기는 참전군을 무장시키기 위해 수입한 첫번째 무기였다. 서수쟁이 단기서의 허락을 받고 장작림에게 넘긴 것인지 독단적인 판단으로 월권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볼 때 서수쟁이 장작림의 협조를 얻겠다는데 눈이 멀어서 멋대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기서로서는 이 무기가 굉장히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정부는 당장 장작림에게 무기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나라의 것이니 국군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라는 억지 논리로 묵살해 버렸다.

 

한편, 단기서가 하야한 것을 이용해 풍옥상이 호북성 무혈(武穴)에서 "남북화평촉진성명"을 발표하는 등, 풍국장의 직예파는 손문의 광주정부에 정전과 화해를 거듭 제안하였다. 만약 직예파가 손문이나 육영정 등 남방세력과 손을 잡는다면 단기서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 될 것이 뻔했다. 단기서는 서수쟁을 다시 장작림에게 보내어 직접 관내로 들어올 것을 종용하였다.


3월 6일 장경혜가 지휘하는 봉천군의 선봉부대가 북경 교외의 풍대(豐臺)로 왔다. 3월 12일에는 장작림이 천진으로 내려와 이른바 "남정봉군총사령부"를 설립하고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서수쟁을 부사령관, 양우정을 참모장, 정초를 참모부관으로 임명하였다. 병력은 봉천군 제27사단, 제28사단, 제29사단 등 3개 사단 및 1개 혼성여단 등 5만명에 달했다. 단기서와 장작림이 손을 잡고 풍국장과 왕사진을 압박하자 왕사진은 자리에서 물러났고 단기서가 다시 국무총리가 되어 북경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직예파의 세력이 위축되자 단기서는 일시 중단된 무력통일을 다시 시작하여 군대를 남진시켰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해관계에 의해 손을 잡은 단기서와 장작림의 밀월은 오래갈 리 없었다. 단기서는 장작림의 군사력을 남정에 앞세울 생각이었고 장작림은 단기서를 위해 자신의 군대를 희생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단기서와 갈등을 빚고 있던 직예파는 단기서의 남정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한구에서 단기서의 주관으로 지휘관 회의가 열렸지만 직예파 군대는 풍국장의 부하인 조곤이 멋대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직예군이 빠지자 서수쟁은 장작림의 승인도 받지 않고 멋대로 봉천군을 호남성 장사로 이동시켜 최일선에 배치시켰다. 자신의 지휘권을 침해당한 장작림이 격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당장 봉천군을 장사에서 철수시켰다.

여기다 단기서의 거듭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직예파 독군들이 군사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서수쟁이 직예파의 우두머리 중 한사람인 육건장(陸建章)을 천진의 봉천군 사령부로 불러낸 다음 암살해 버렸다. 육건장은 단기서에 사사건건 반대하는데다 대표적인 주화파인 풍옥상과도 인척지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장작림에게 일언반구 보고가 없었기에 장작림은 자신의 사령부에서 직예파 원로를 살해한 것에 격분하였다.

 

또한 서수쟁이 봉천성에서 멋대로 토비를 모아서 자기 휘하의 사병 군대를 만든데다, 봉천군에게 지급할 군비 515만원 가운데 절반이 넘는 335만원을 중간에서 가로채어 멋대로 유용하고 180만원만 장작림에게 주는 등 온갖 월권을 일삼았다. 단기서는 서수쟁을 호되게 질책한 후 장작림을 달래기 위해 100만원의 돈과 서수쟁이 편성한 "참전군" 5개 혼성여단 중 3개 여단을 넘겨주었다. 장작림은 만족했지만, 장작림을 얕보고 있었던 서수쟁은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장작림에게 극도의 앙심을 품었다.

 

1918년 9월 4일 제2대 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단기서와 장작림의 지지를 얻은 서세창(徐世昌)이 과반수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서세창은 청조 이래의 원로 정치가였지만 군인이 아닌데다 북경정부 내에 자신의 세력이 없었다. 따라서 단기서의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단기서와 서수쟁의 횡포를 아니꼽게 생각하던 서세창은 장작림을 동삼성 순열사로 임명하여 명실상부한 "동북왕"으로 인정하였다. 이는 호랑이를 키워서 단기서의 안휘파를 견제하려는 속셈이기도 했다.

 

* 몽골의 상황

 

한때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몽골족은 명나라의 건국으로 자신들의 고향으로 쫓겨갔다. 그들의 시계바늘은 초원에서 유목을 하던 수백년전으로 되돌아 갔으며, 그들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치열한 분쟁을 벌였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족이 부흥하자 몽골족은 만주족의 지배를 받았다. 청나라는 1636년 내몽골을, 1750년에는 외몽골을 장악하였다. 내몽골은 청나라의 직할령이 된 반면, 외몽골은 부족들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되 청이 파견한 도호사들의 감독을 받는 속국이었다가 19세기에 들어와 청조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진출하고 네르친스크 조약과 카흐타 조약이 체결되면서 외몽골 초원의 일부가 러시아에게 넘어갔지만 몽골은 청과 러시아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청의 압제가 점점 심화되고 가혹한 세금과 수탈이 반복되자 몽골 귀족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아편 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청일전쟁 등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몽골 독립운동가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이른바 "이이제이"전략으로 러시아와 일본에 접근하였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1년 7월 외몽골 귀족들은 회의를 열어 독립을 선포하기로 하고 다 라마 체렌치메드(Da Lama Cheringchimed)를 비롯한 대표단을 편성해 상테 페테부르크로 갔다. 러시아의 원조를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만주와 외몽골에 팽창주의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정부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몽골에 200명의 군인과 소총 15,000정, 탄약 750만발을 지원하였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 기의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청조는 마비되었고 중국은 혼란에 빠졌다. 몽골도 11월 30일 후레(Khüree, 현재의 울란바토르)에 몽골 임시 정부을 수립하고 12월 27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국호는 "몽골국(Mongolia)"이었다. 12월 29일 몽골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제8​대 보그도 집정(Bogd Khaan)을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몽골의 위대한 영웅인 칭기즈칸과 혈연적 관계는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칭기즈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다. 몽골에 체류하고 있던 청나라 도호사(都護使)와 관료 700여명은 쫓겨나듯 중국으로 돌아갔다. 몽골은 러시아로부터 원조받은 무기로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참고로, 현재 중국 학자들은 몽골의 독립을 이 지역에 제국주의적 야심을 품고 있던 제정 러시아와 구소련이 몽골귀족들을 사주하여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중국의 혼란을 이용해 분리독립했다고 설명하지만 몽골인들은 엄연히 독립 투쟁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자력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었기에 부득이 외세의 힘을 잠시 빌렸을 뿐 몽골은 결코 괴뢰국이 아닌 자주 독립국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몽골은 귀족들을 중심으로 수백년에 걸쳐 독립 투쟁을 벌여왔으며 독립 과정에서도 자신들이 주체였다는 점에서 일본 관동군이 만주족 귀족들을 매수하여 수립한 만주국과는 엄연히 다르다. 러시아는 신생 몽골에 대해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내정간섭을 일삼자 몽골 정부와 심한 갈등을 빚었고 몽골 정부는 "우리는 러시아의 신민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의 독립을 돕지 않겠다면 차라리 중국과 협상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편, 외몽골과 내몽골을 합하여 "대몽골"을 건설하겠다는 목적으로 일본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제정 러시아의 입장은 몽골을 정식 주권국이 아닌 중국의 속국으로서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생각이었다. 극동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할 경우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른 열강들이 간섭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어정쩡하게 중국과 몽골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채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받으면서 몽골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살려 달라고 손을 내밀 때 도와주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다(1912년 3월 18일 모스크비틴 주몽골 러시아 영사가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몽골은 러시아에 예속되지 않으려고 미국, 독일, 벨기에, 일본,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 각국 정부에게 몽골의 독립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어 승인을 요청했으나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대한 우려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어느 나라도 승인하지 않았다. 러시아만이 몽골의 독립을 승인했으나 1912년 10월 21일 몽-러 우호조약을 체결하면서 몽골의 독립보장과 몽골군의 육성을 원조하는 대신, 몽골에서의 러시아의 권익 보장과 최혜국 대우, 외교권을 러시아에게 넘길 것 등 노골적인 주권 간섭을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신생 몽골 정부에 2백만 루블의 차관을 제공하여 몽골 경제를 장악하였다.

 

한편, 중국의 대총통이 된 원세개는 몽골의 독립을 인정할 리 없었다. "힘도 약하고 가난하며 인구가 적은 몽골이 독립하려고 해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다. 분수 넘치는 희망을 버리고 중화민국으로 돌아오라"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거부당하자 1912년 11월 14일 몽골에 대한 무력진압을 결정하였다. 약 2만명의 중국군이 몽골로 진격했으나 러시아의 원조를 받은 5천여명의 몽골 기병들에게 여지없이 박살났다. 몽골군은 그 여세를 몰아 내몽골로 진격했으나 내몽골에 야심을 품고 있던 일본이 개입할 것을 우려한 러시아의 반대에 부딪쳐 도로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러시아는 원세개를 협박하여 "중국의 외몽골 침공은 러시아를 침략한 것과 같다"라며 외몽골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지하라고 종용하였다.

외몽골​의 독립과 참패는 중국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와 몰래 접촉하여 1913년 10월 23일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몽골의 독립을 취소하고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되 자치권을 보장할 것과, 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권익을 보장한다." 이것은 몽골에게는 그야말로 뒷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몽골은 중-러 비밀협정이 체결되기 3일전에야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당연히 몽-러 우호조약을 근거로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러시아는 "몽골인들이 '자치권(autonomy)'의 국제적인 의미를 잘 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몽골 정부는 총리 남낭수렝을 상트페트르부르크로 보내어 몽골의 독립 승인과 차관 지원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고 다른 국가들 역시 몽골의 승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수도인 후레에 중국인 도호사가 다시 파견되었다.

그 와중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여기다 볼세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레닌 정권은 만주와 몽골로부터 손을 떼겠다는 제스처를 중국에게 보냈다. 그나마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자치권을 보장받던 몽골로서는 유일한 보호막마저 없어져 버린 셈이었다.

* "서북왕" 서수쟁 외몽골을 정벌하다

단기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 몽골을 다시 중국으로 복속시키기로 결정하고 1919년 6월 24일 서수쟁을 서북변방군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내외몽골과 러허성, 신강성, 섬서성, 감숙성 등 여러성의 모든 민정과 군권을 통솔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참전군"의 이름을 "변방군"이라고 바꾸어 그 지휘를 서수쟁에게 맡겠다. 서수쟁은 안휘파 군사력의 대부분인 변방군의 지휘권을 장악했을 뿐더러 공채의 발행, 군대의 편성과 훈련, 군수품의 구입 등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었기에 사실상 국가 속의 국가나 다름없게 되었다. 원래 서수쟁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대총통 서세창은 교활한 야심가이자 분란 덩어리인 서수쟁을 중앙에서 멀리 보낼 생각으로 승인했는데 서수쟁 입장에서는 오히려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하루아침에 "서북왕"이 된 서수쟁은 외몽골에 군대를 보내는 한편, 몽골 자치 정부에 64개 조항으로 된 중-몽협약(中俄蒙协约)의 수락을 강요하였다. 몽골의 자치권을 포기하고 중국군의 주둔과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성장에 의해 통치할 것, 대신 보그도 대칸과 몽골 왕족, 귀족들에게 나름의 특전을 베풀겠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안락한 삶을 미끼로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지껏 몽골의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그들로서는 중국의 협박에 쉽사리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원조 없이 중국에 맞서는 것 또한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일단 의논해 보겠다며 어정쩡한 대답을 한 후 시간을 질질 끌었다. ​몽골 의회에서 고의로 논의를 지연시키자 11월 7일 서수쟁은 당장 1개 연대를 출동시켜 후이를 포위하고 14일 오전 8시까지 몽골 자치정부가 알아서 투항하지 않겠다면 보그드 대칸과 총리 바담도르지, 주요 각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수쟁은 허세를 부렸다. 1개 연대라지만 실제로는 1개 대대 600여명에 불과했다. 병력을 과장하고 거창한 무력시위를 한 덕분에 몽골측이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다. 결국 11월 16일 몽골자치정부는 모든 요구조건을 수락할 수 밖에 없었고 22일 중화민국 대총통 서세창의 이름으로 외몽골에 대한 자치국 지위를 철폐한다고 선포하였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외몽골을 되찾은 것은 전적으로 서수쟁의 공이었다. 몽골인들로서는 오랜 독립 투쟁의 노력이 한순간에 꺾인 셈이었고 중국 입장에서는 열강들의 침탈 속에 빼앗긴 영토를 처음으로 회복한 쾌거였다. 서수쟁은 일약 중국의 영웅이 되었으며 안휘파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안휘파의 독주에 대해 직예파와 봉천파가 불만을 품지 않을 리 없었다. 주도권에서 밀려난 직예파는 정권을 다시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여기다 장작림은 러허성과 내외몽골에 대해서도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서수쟁이 차지하자 분개하였다. 자연스레 직예파와 봉천파가 손을 잡았다. 또 한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1919년 12월 28일, 직예파의 수장인 풍국장이 죽은 것이다. 단기서와 갈등을 빚으면서도 북양군끼리의 무력충돌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부하들을 누르고 있었던 그가 이제는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반 단기서의 선봉에 선 인물이 바로 "상승장군"이라 불리던 문무겸비의 명장 오패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