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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4. "북양의 호랑이" 단기서와 "상승장군" 오패부의 격돌, 직환전쟁 /blog.naver.com/atena

* 양측의 병력 배치와 전략

 

단기서는 베이징 남쪽 교외에 있는 단하(團河)에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정국군(안휘군)의 주력은 베이징에서 보정으로 향하는 경한철도(북경↔한구를 연결하여 중국 중부와 북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의 선로를 따라 배치된 서로군(西路軍)이었다. 서로군의 지휘는 단기서의 최측근인 단지귀(段芝貴)였다.

 

단지귀는 단기서와 마찬가지로 안휘성 합비 출신에다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한 후 원세개의 신건육군에 입대하였다. 광대한 대륙에서 사는 중국인들은 "동향사람"을 아주 중시한다. 그러니 원세개가 죽은 뒤 그가 단기서의 안휘파에 가담한 것은 당연했다. 단기서는 그를 누구보다 중용하여 육군총장과 북경위수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막상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형편없는데다 스스로 "풍류장군"이라 칭할 만큼 평소 향락과 마작에나 빠져 사는 위인이었다. 안휘파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전쟁에서 중책을 맡았음에도 자신의 전용열차 안에 들어박혀 값비싼 외국술을 마시며 자신의 마작 친구들과 함께 마작에만 열을 올렸다. 청조 말기의 낡은 군인에 불과한 단기서의 사람 보는 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로군은 변방군 제1사단과 제3사단, 그리고 제15사단으로 편성되었다. 변방군 제1사단의 사단장은 서수쟁, 근운붕(靳云鹏), 전랑좌(傅良佐)와 함께 단기서의 "사대금강(四大金刚)"이라 불리는 곡동풍(曲同豊)이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보정군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변방군 제3사단장 진문운(陳文運)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문제는 류순(劉詢)이 지휘하는 제15사단이었다. 이 부대는 원래 청조시절의 황제 친위대인 금군을 풍국장이 신식으로 재편성한 부대였다. 그러나 대부분 팔기군 출신인 이들은 무위도식하는 집단에 불과했으며 단지 해체할 수 없어서 그대로 둔 채 북경 경비와 치안 임무를 맡겼을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을 먹이고 입혀준 풍국장을 은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단기서를 위해 목숨을 바칠 리가 없었다. 

 

동로군(東路軍)은 단기서의 참모장인 서수쟁이 지휘하였다. 서북변방군 제2 혼성여단과 변방군 제3사단 일부, 제9사단 등으로 편성되었다. 단기서의 작전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주력인 서로군이 보정을 공략하고, 동로군은 직예군의 사령부가 있는 천진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산동성 제남에 주둔한 변방군 제2사단과 호북성 의창에 주둔한 오광신의 부대 역시 북상하여 직예군의 후방을 위협하였다.

 

한편, 조곤의 직예군 역시 오패부의 제3사단 등 주력부대를 보정방면에 배치하여 단지귀의 서로군과 대치하였다. 또한 조곤의 동생 조예(曺鋭)가 지휘하는 2개 여단이 천진 방면에서 서수쟁과 대치하였다. 조곤은 단기서의 안휘파를 "역적"이라며 자신들의 군대를 역적을 토벌하는 군대, "토역군(討逆軍)"이라고 칭하였다. 특히 오패부는 단기서를 일본과 결탁한 한간(漢奸=매국노)로 부르면서 "이번 싸움은 중국민족을 위해 도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전쟁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양군은 북경과 천진, 보정을 꼭지점으로 삼각형의 형태로 영정하(永定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쌍방의 전력은 비등했다. 무기와 장비에서는 일본의 막대한 군사 원조를 받은 단기서측이 우세했지만 지휘관들부터 말단병사들까지 하나같이 전투 경험이 없는 자들이었다. 훈련도 부족했고 사기 또한 형편없었다. 단기서의 군사고문인 사카니시 도시하지로(板西利八郞) 소장조차 "승산이 있을 지 의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반면, 직예군의 지휘관들은 오패부를 비롯해 모두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다. 

 

또 한가지 변수인 일본은 단기서를 뒤에서 후원하면서도 영국과 미국의 눈치 때문에 '내정간섭'으로 비추어질까봐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장작림 역시 단기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후원을 받고 있었지만 일본의 불간섭주의덕분에 눈치 볼 필요 없이 "경봉철도(베이징과 봉천을 연결하는 철도)을 보호한다"라는 명목으로 제27사단과 제28사단을 산해관으로 출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단기서는 장작림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일본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이미 장작림이 조곤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데다 서수쟁에 의해 죽을 뻔했던 그가 얼마나 이를 갈고 있을 것이 뻔한데도 단기서가 얼마나 안이했는지 보여준다. 장작림은 일본이 알아서 견제해 주리라 믿었을 뿐, 그의 모든 증오심은 장작림도, 조곤도 아니라 오직 오패부에 쏠려 았었다.

 

* 단기서 선제 공격에 나서다

 

먼저 공격에 나선 쪽은 안휘군이었다. 7월 14일 오후 3시, 단기서는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밤 8시, 안휘군이 영정하를 도하하여 고안(高安)과 축주(逐州), 양촌(楊村)의 직예군 최일선 진지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직환전쟁의 시작이었다.

 

사실상 조곤을 대신해 직예군의 총지휘를 맡고 있는 오패부는 일단 수세를 고수하면서 화력에서 우세한 안휘군을 끌어들여 교착상태로 만든 다음 기회를 보아 보정방면에서 단지귀의 서로군을 격파하고 북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작전의 승패는 전략적 요충지인 고안을 방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만약 이곳이 돌파된다면 보정과 천진 양쪽으로 나누어진 직예군은 분단되어 각개격파될 것이었다. 따라서 직예군 최정예부대인 자신의 제3사단과 제5혼성여단에게 고안의 수비를 맡기고 "절대 사수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오패부의 휘하 3명의 여단장들, 팽수신(彭壽莘), 소요남(蕭耀南), 동정국(董政國)은 하나같이 신해혁명 이래 오패부와 같이 호남성과 사천성을 전전했던 백전연마의 지휘관들이었으며 특히 팽수신은 방어전의 달인이었다. 따라서 안휘군의 변방군 제1사단과 제3사단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단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

 

양군의 주력부대가 부딪친 축주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직예군의 저항이 완강하자 안휘파의 변방군 제6혼성여단이 투입되었다. 제6혼성여단장 장부래(張褔來)는 일본으로부터 구입한 105mm, 150mm 유탄포를 끌어와 직예군의 진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중포의 사격이 끝난 뒤 안휘군이 공격하자 직예군의 제1선은 무너졌다. 그 여세를 몰아 안휘군 병사들이 직예군 진지를 향해 돌격하였다. 하지만 함성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토치카 뒤에서 직예군의 중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기 때문이었다. '준비포격 후 돌격'이라는 구태의연한 전술을 교육받은 안휘군 병사들은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하지 않은 일본군 군사고문단 덕분이었다. 무수한 시체의 산을 쌓은 안휘군은 붕괴되어 패주하였다.

 

15일 새벽 6시, 변방군 제1사단 주력과 제15사단이 우세한 포병화력의 지원 아래 축주를 재차 공격하여 결국 점령하였다. 직예군은 고비점(高碑店)으로 퇴각하였다. 직예군이 후퇴하자 곡동풍은 기병대를 투입해 추격하였다. 하지만 이는 함정이었고 이들은 매복하고 있던 직예군의 십자화망에 걸려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한편, 보조전선인 북경-천진방면의 전투도 점차 격화되었다. 서수쟁은 휘하 병력 1만 5천명을 셋으로 나누어 천진 18km 북쪽에 있는 양촌을 공격했다. 조예가 지휘하는 직예군은 약 1만2천명이었다. 숫적으로 안휘군이 우세했지만 야포의 지원을 받는 직예군의 방어도 만만치 않아 서수쟁으로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었다. 서수쟁은 결사대 300명을 조직하여 양촌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결사대는 필사적으로 직예군의 방어선을 뚫고 양촌에 돌입했지만 결국 직예군의 포위망에 걸려 전멸하고 말았다. 서수쟁의 무리한 작전의 결과였다. 쌍방은 피해만 늘어날 뿐 승패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수쟁에게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내려왔다. 일본이 경진철도(북경↔천진을 연결하는 철도)에 대해 의화단의 난 이후 청일간 체결된 조약을 내세워 "경진철도 주변 2마일 내에는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다"라며 조예에게 병력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한 것이다. 직예군 입장에서는 부당한 요구였다. 조약에 의거, 직예군이 철수해야 한다면 안휘군도 철도 주변에서 마땅히 철수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직예군에게만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는 내정간섭이나 다름없었다. 조예는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일본군이 이를 빌미로 무력 개입할지도 모른다. 결국 조예는 경진철도 주변에 배치된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양촌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고 천진의 직예군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서수쟁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양촌은 16일 함락되었다. 직예군의 한쪽이 무너진 셈이었다. 조곤의 사령부가 있는 천진까지 위기에 빠졌다.

 

* 전세 역전되다

 

보정 방면에서도 곡동풍의 변방군 제1사단이 직예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고비점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직예군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채 교착상태가 되었다. 이 와중에 직예군의 별동대가 단지귀의 사령부가 있는 열차를 습격했다. 열차 안에서 태평하게 마작이나 두고 있던 단지귀는 혼비백산했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서로군의 지휘계통이 마비되었다. 오패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공격으로 전환했다. 역습을 당한 변방군 제3사단이 무너졌고 제3사단장 진문운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여기다 16일밤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홍수가 안휘군이 있는 진영을 덮쳤다. 이로 인해 안휘군은 많은 물자와 장비, 탄약을 상실한데다 혼란에 빠졌다. 중포 또한 사용할 수 없었다. 오패부는  전세를 뒤집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악천우에서의 전투라면 실전 경험이 없는 안휘군보다 온갖 험난한 전장을 누볐던 직예군이 유리하였다. 또한 군량성의 봉천군 사령부에 있던 장작림의 봉천군 2개 여단이 천진을 거쳐 직예군 진지에 가세하였다. 오패부는 봉천군을 고안에 배치하는 한편, 소요남의 제3혼성여단을 비바람과 야음을 이용해 은밀하게 안휘군 서로군의 후방인 송림점(松林店)으로 진출시켰다. 이로 인해 고비점에 있던 변방군 제1사단의 후방이 차단되었다. 또한 오패부는 이어서 2개 여단을 추가로 송림점으로 급히 보내어 송림점에서 고비점으로 이동하고 있던 안휘군 제15사단의 측면을 기습 공격했다.

 

후방에 적군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곡동풍은 급히 송림점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하지만 한밤중에 비바람 속에서 관측장교도 없이 쏘아댄 포탄은 엉뚱하게도 아군인 제15사단에 떨어졌다. 난데없는 포격을 받은 제15사단은 그들 역시 포탄이 날아온 쪽으로 포격을 했다. 고스란히 변방군 제1사단에 떨어졌다. 여기다 제15사단장 류순은 홍수에 떠내려갔다가 겨우 구조되어 후송되는 등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였다. 사단장이 이렇게 되자 제15사단은 반란을 일으켜 직예군에게 투항한 후 그대로 안휘군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변방군 제1사단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오패부의 기지와 단지귀의 졸렬한 지휘, 아군끼리의 포격전의 결과였다.

 

이 날 단기서에게는 또 한번의 뼈아픈 보고가 들어왔다. 직예군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상 중이던 오광신이 무한에서 양호순무사 겸 호북성 독군인 왕점원(王占元)을 회견했다가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왕점원은 이전부터 풍국장을 지지했던 직예파였다. 원래라면 당연히 일전을 벌여야 할 상대였다. 하지만 같은 북양군벌이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적과 아군의 구분이 불분명했기에 오광신은 왕점원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급적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호북성을 통과할 생각으로 왕점원의 사령부를 태평스럽게 찾아갔다. 하지만 왕점원은 그가 무단으로 군대를 끌고 왔다며 꾸짖고는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오광신의 군대는 왕점원에게 무장해제되어 일부는 왕점원 휘하에 들어갔고 일부는 흩어져 토비가 되었다. 오광신은 호북성 군사법정에서 징역 15년형을 받았으나 다음해 10월 석방되어 장작림의 휘하에 들어갔다.

 

17일 아침. 변방군 제1사단은 직예군의 포위망을 간신히 돌파하여 축주까지 후퇴하였다. 큰 피해는 입었지만 곡동풍은 아직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변방군 제1사단이 재차 공세에 나서자 오패부는 일단 병력을 후퇴시켰다. 직예군이 퇴각하자 곡동풍은 재차 승기를 잡았다며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뢰였다. 오패부가 철수하면서 지뢰를 대거 매설한 것이다. 안휘군은 여지껏 당해본 적이 없는 상황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오패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방군 제1사단의 측면을 기습하였다. 변방군 제1사단 제1여단장이 전사하고 제2여단장은 도망쳤다. 변방군 제1사단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곡동풍은 항복했다. 이로서 서로군은 완전히 괴멸이나 다름없었다. 승패는 결정났다.

 

직환전쟁 전황도. 붉은 색이 안휘군, 파란 색이 직예군, 보라색이 봉천군.

 

* 단기서의 몰락

 

단기서는 서로군이 위기에 빠지자 그제서야 무능한 단지귀를 파면하고 곡동풍을 서로군 사령관에 임명한다는 전보를 보냈지만 이미 곡동풍은 포로가 되었고 서로군은 붕괴된 상태였다. 17일 밤, 아직 자신의 열차를 타고 있던 단지귀는 해임 통보를 받은데다 전황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대로 열차를 돌려 북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단기서 앞에 나타나 "이미 싸움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대총통(서세창)에게 휴전을 건의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서수쟁의 동로군에서도 보고가 들어왔다. 장작림의 봉천군이 직예군과 함께 공격해 왔다는 것이었다. 여기다 서로군의 참패가 동로군에게도 알려지면서 안휘군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탈주병들이 꼬리를 물었다. 안휘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오패부는 총공격에 나섰다. 서수쟁은 비겁하게도 부하들을 버리고 북경으로 도주했다. 사령관을 잃은 동로군은 직예군에게 투항하였다. 소수만이 북경 교외의 남완(南宛)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7월 18일 단기서는 대총통 서세창에게 휴전 명령을 요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모든 직위에서 하야한다고 선언하였다. 쿠테타를 일으켜 북경을 장악한지 고작 십일 천하였다. 그동안 단기서의 위세에 눌려살던 서세창은 단기서의 사직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단기서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애당초 생각도 하지 않았을텐데."

 

서세창은 즐겁게 웃었지만 단기서와 안휘파는 그렇지 못했다. 직예군과 봉천군이 북경에 입성하자 서수쟁을 비롯한 안휘파 주요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다. 그들은 재빨리 북경의 일본 조계에 있는 일본 공사관에 숨었다. 단기서가 장악하고 있던 국회 역시 해산되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은 단기서는 우선 변장하여 천진의 일본조계로 도망쳤다. 직환전쟁의 원인이나 다름없던 서수쟁은 한동안 숨어지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재기를 노리며 책략을 꾸미다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25년 12월 30일 직예파 군벌 풍옥상에 의해 암살당했다. 몰락한 군벌의 전형적인 최후였다.

 

오패부는 단기서의 처벌을 원했지만 장작림이 그를 옹호하면서 그나마 완전한 몰락은 피할 수 있었다. 교활한 장작림은 북경정부에서 직예파의 독주를 견제하려면 단기서가 필요했다. 직예파와 장작림의 오월동주의 관계는 오래 갈 수 없었다. 이미 중국의 지도는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산동성 제남에서 북상한 마량(馬良)의 변방군 제2사단은 산동성과 직예성 경계에 있는 덕주(德州)를 점령했지만 그 직후에 단기서가 패배하여 하야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량은 직예군에게 투항하였다. 그 외에도 직예군은 하남성, 섬서성,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호북성 등으로 진군하여 안휘파 군대의 항복을 받았다. 장작림 역시 이에 질세라 열하성과 내몽골 지역을 장악했다. 직환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절강성과 복건성, 상해만이 안휘파의 지반으로 남았다.

 

14일부터 18일까지 약 나흘간 벌어진 직환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를 내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다. 워낙 짧게 끝난데다, 중앙의 혼란으로 인해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쌍방 합해 10만명 이상이 동원한 이 전쟁에서 적게는 전사자가 겨우 수십명에 불과했다는 주장부터, 안휘군만 해도 2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었다는 주장도 있다.

 

단기서의 무모한 야심이 불러온 직환전쟁은 청조 멸망 이래 북경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첫번째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로서 단기서는 몰락했지만 앞으로 시작될 더 큰 혼란의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