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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1. 원세개의 죽음과 장훈의 복벽 /blog.naver.com/atena

1916년 6월 6일, 청말부터 민국 초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풍운아 원세개(袁世凱)가 북경에서 죽었다. 청조를 대신해 새로운 중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허황된 망상을 꿈꾸었던 그는 격렬한 여론의 반발은 물론이고 중국 전토가 내전에 휩싸이자 결국 포기하고 대신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대총통의 자리에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부하들마저 등을 돌리면서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요독증이 도지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도 끝났다. 그러나 그의 허황된 야심이 남긴 유산은 중국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원세개가 죽은 뒤, 북경 정부의 실권을 쥔 세력은 원세개의 사병집단인 북양 군벌들이었다. 전국의 군권을 쥔 23명의 도독 중에서 12명이 원세개가 직접 키워낸 북양군벌이었다. 또한 7명은 원세개의 부하이거나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원세개와 상관없는 사람은 겨우 4명밖에 없었으나 모두 신강성, 운남성, 광서성과 같은 중원과는 거리가 먼 서북과 서남의 변경지방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왕사진, 단기서, 풍국장 세명은 원세개의 최측근으로서, 사람들은 "북양 삼걸"이라고 불렀다. "북양의 용" 왕사진(王士珍)이 삼인방 중에서 "용(龍)"이라 불린 이유는 그만큼 능력에서 으뜸이라서가 아니라 "용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중국의 옛 속담으로 비꼰 것이다. 그는  위안스카이의 명령에 충실할 뿐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었으며 자기 휘하의 군대나 파벌도 없었다. 자기 신념이나 주장도 없이 정세에 따라 이리저리 붙으며 보신에만 급급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북양의 호랑이" 단기서(段祺瑞)는 이홍장과 동향인 안휘성 출신으로 원세개 못지 않은 야심가였으며 교활하고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지역 출신들을 모아 "안휘파"라는 파벌을 만들었다. 또 한사람은 "북양의 개"라 불리는 풍국장(馮國璋)이었다. 직예성 출신인 풍국장 역시 동향 출신을 모아 "직예파"라는 파벌을 만들었다. 그러나 풍국장은 왕사진처럼 실권 없는 명예직에 앉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호위호식에만 만족하는 위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적 야심이 넘치는 단기서와도 달랐다. 단지 보수적이면서 우직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그래서 개는 호랑이를 이길 수 없다며 풍국장을 "개"라고 불렀다. 

 

원세개 사후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원세개의 칭제에 반발해 토원전쟁을 일으켰다 패배한 손문은 1917년 7월 17일 요중개, 호한민, 왕정위 등 추종세력과 함께 광주에 내려와 광동성장 주경란과 광동독군 진병혼의 지지를 받아 광주 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북경정부 해군총장 정벽광과 상해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 제1함대도 반란을 일으켜 순양함 3척, 포함 6척, 보조함 4척을 이끌고 내려와 광주 황포섬에 도착하였다. 손문이 북경정부에 대항하는 광주군정부를 수립하자 서남군벌들도 가담하였다. 양광순열사로 광서성과 광동성을 차지하고 있던 계계군벌 육영정(陸榮廷), 운남 도독으로 귀주성과 사천성 남부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던 전계군벌 당계요(唐繼堯)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혁명에는 관심이 없지만 손문의 명성을 이용해 북경정부의 공격에 대항하고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군사력에서는 북양군벌들이 서남군벌보다 훨씬 우세했으며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고 있어 정치적으로도 유리하였다. 재정면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열강들, 특히 일본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손문의 세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데다 서남군벌들 역시 말로만 혁명을 지지한다고 할 뿐 손문의 명령에 전혀 복종하지 않았고  뒤로는 북경정부와 협상에 나서는 등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당계요는 사천독군 채악이 죽자 이를 이용해 사천성을 침공하여 사천군벌 류존후(劉存厚)와 싸워 성동과 중경 등 사천성의 태반을 점령하였고, 육영정은 광주를 공격해 손문 휘하의 광동군벌 진형명과 싸우는 등 좌중지란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원세개가 시대착오적인 황제병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몇년안에 손쉽게 반란세력들을 제압하고 신해혁명 이래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가 없는 북양군벌들 역시 개인적인 야심에 눈이 멀어 북경정부의 권력을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원세개를 대신해 임시 대총통이 된 사람은 여원홍이었다. 그는 청조 시절의 명망있는 군인이었으나 신해혁명에서 혁명군의 협박에 마지못해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을 만큼 혁명이나 공화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북양군벌 출신도 아니었고 강력한 리더쉽이나 카리스마도 없었다. 따라서 실권은 국무총리이자 육군총장인 단기서에게 넘어갔다. 여기다 직계의 우두머리이자 강서 독군 풍국장이 부총통이 되었다.

 

단기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과 대독 선전포고, 남방에 대한 무력 통일을 주장한 반면, 여원홍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내전 상황인 중국이 유럽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었다. 단기서의 속셈은 참전을 명목으로 열강들의 차관을 얻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고 북경정부를 완전히 장악하여 제2의 원세계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여원홍으로서는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1917년 6월 23일 여원홍은 단기서를 국무총리에서 해임하는 한편, 북양군벌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비북양계열인 장강순열사 장훈(張勲)과 그의 군대를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장훈은 청나라의 충신을 자처하는 위인이었다. 신해혁명 당시 남경 수비를 맡았던 그는 혁명군의 공격에 맞서 10일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에도 여전히 청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채 휘하의 군대를 산동성에 주둔시켰다. 그의 군대는 서구식 제복을 거부하고 청조시절의 구식 군복과 변발을 고집하였기에 "변자군(辮子軍)"이라 불리었다. 병력은 57개 대대 약 2만명 정도였다. 여원홍이 자신을 부르자 그는 여원홍과 단기서의 대립을 이용해 두 사람 모두 쫓아낸 다음 청조를 부흥시켜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위를 복위시킬 생각이었다.


7월 1일 새벽, 그의 구식군대인 "변자군" 5천명이 북경으로 들어와 정변을 일으켜 주요 관청을 장악하고 자금성에 들어가 푸이를 알현하였다. 그리고 청조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11살이었던 선통제 푸이는 용상에 다시 앉아 민국6년을 선통 9년으로 변경하고 만청관제의 회복을 발표하였다. 장훈은 직예총독과 의정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착오적인 정변은 당장 중국 전역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손문은 중화민국에 대한 반란이라며 "토역"을 선언하였다. 


장훈을 불러들인 장본인인 여원홍은 이 뜻밖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 쿠테타의 책임을 지고 총통 자리를 풍국장에게 넘겼다. 그리고 단기서를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장훈의 진압을 요청하였다. 단기서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정변이 일어난 1일 밤 11시 특별열차를 타고 천진을 출발하여 천진 남쪽 60km떨어진 곳에 주둔한 마창(馬廠)으로 갔다. 그곳에는 자신의 심복인 이장진(李長秦)이 지휘하는 북양군 제8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뒤질세라 남경에 있던 풍국장도 보정에 주둔한 오패부의 제3사단, 낭방에 주둔한 풍옥상의 제16혼성여단에게 단기서에 호응하여 북경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7월 5일 단기서는 토역군(討逆軍)의 조직을 선포하고 스스로 토역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토역군은 약 5만 7천명에 달했다. 변자군의 10배가 넘는 세력이었다. 토역군은 북경을 향해 남쪽과 동쪽, 서쪽에서 일제히 진격하였다.

 

그 날 자금성의 하늘에 한대의 복엽기가 나타났다. 푸이를 비롯해 비행기를 난생 처음 본 관료들과 시녀들은 신기한 새라며 어리둥절했지만 곧 경악하였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3발의 폭탄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수천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늘에서의 공격이었다. 피해는 1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충격은 컸다. 장훈은 여전히 "단기서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그의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잃은데다 5천명 중에서 3천5백명이 진영을 이탈해 단기서측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러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장훈과 함께 복벽운동의 주동자였던 강유위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잽싸게 변장하여 미국공사관으로 숨어버렸다.

 

장훈은 남은 병력 1천5백명으로 자금성을 중심으로 북경의 주요 요충지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반면, 단기서의 토역군은 갈수록 세력이 늘어나 약 10만명에 달했으며 대포 70문과 기관총 80정도 가지고 있었다. 한낱 오합지졸에 불과한 변자군이 실전으로 단련된 북양군에게 감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미 승패가 결정난 상황에서 단기서는 네덜란드 공사를 통해 장훈에게 목숨은 살려줄 테니 무장해제하고 투항하라고 권고합니다. 장훈은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고집하였다.

 

7월 12일 새벽, 어슴프레하게 날이 밝아오자 토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오패부의 제3사단이 북경 서쪽의 천단(天檀)을 공격하자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변자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북경정부의 국기인 오색기를 흔들며 항복하였다. 또한 풍옥상의 제16혼성여단이 국회의사당과 선무문을 단숨에 점령하였다. 제8사단은 조양문을 거쳐 장훈의 관저로 진군하였다. 여기서 장훈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진두지휘하던 대대장이 전사했다. 토역군도 맹렬하게 사격하는 한편, 포격을 시작하였다. 자기집 마당에 포탄이 떨어지자 장훈도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다. 토역군에게 휴전을 요청한 후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주하였다.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었다. 하루종일 북경 시내를 요란스럽게 했지만, 실상 변변한 전투도 없었기에 전사자는 고작 30명 미만이었다. 푸이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와 용상에 앉았다가 12일만에 도로 자금성에 감금된 신세가 되었다.

 

단기서는 장훈을 진압한 덕분에 일약 북경정부의 실권자가 되었다. 눈의 가시였던 여원홍은 하야하였다. 국회 역시 단기서파인 "안복계(安福系)"가 완전히 장악하여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또한, 풍국장은 정치적인 야심이 없는 사람인데다 건강도 좋지 못했다. 장훈의 복벽사건을 통해 환계와 직계의 군대는 단기서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나 직예파 중에는 능력과 야심이 넘치는 43살의 젊은 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오패부였다.

 

한편, 북경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만주에서는 장작림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봉천성 육군 제27사단장이었던 장작림은 라이벌인 제28사단장 풍덕린을 몰아내고 그의 군대를 장악하였다. 이어서 흑룡강성과 길림성까지 장악하여 "동북왕"이 되었다. 북양군벌과 맞먹을 만큼 막강한 세력으로 거듭난 그는 이제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의 패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장훈의 복벽은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군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단기서, 오패부, 장작림. 이 세 사람은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를 꿈꾸며 칼을 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