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군벌 전쟁 "중원대전" 제6화 - 풍옥상과 장개석 천하를 다투다 /blog.naver.com/atena

중원, 혼전에 빠지다

중국에서 "중원(中原)"이란 크게는 산해관 이남의 중국 본토 전체를 의미하지만, 보다 좁은 의미에서는 고대 주나라 이래 황하 문명의 발흥지이자 한족들의 주된 생활 공간이었던 황하 중하류 일대와 회수 이북의 화북평원을 가리키며 하북성 이남과 남성, 안휘성, 산동성 일대를 포함한다. 중국 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으며 교통의 요충지라 중국이 혼란기에 빠질 때마다 수많은 군웅들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싸웠으며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중국을 차지하였다.

1930년 3월 말부터 장개석과 반장 연합군의 전초전이 하남성과 산동성, 호북성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장개석의 회유로 배반했던 한복구는 개봉에 주둔하고 있다가 석우삼, 손전영, 녹종린, 만선재 등의 협공을 받았다.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그의 부대는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 내렸고 개봉은 3월 27일 만선재 부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한복구는 잔존부대를 수습한 후 산동성 서남부의 제녕(濟寧)으로 퇴각하여 마홍규(馬鴻逵)의 제64사단과 함께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서북군에 가담하는 등 좌중지란이었다.

또한 북쪽에서는 산서군이, 서쪽에서는 서북군이 정주에 집결한 후 각기 산동성의 성도 제남을 향해 진군하였고, 번종수의 제8방면군이 허창을 점령하고 하성준의 제3군단과 대치하였다. 동관에 사령부를 둔 풍옥상은 주요 지휘관들을 모아서 "이번의 전쟁은 서북군의 사활이 걸려 있으니 공고히 단결하여 분투하라"라고 격려하였다. 풍옥상은 그야말로 장개석과의 일전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그의 계획은 무한과 서주, 제남을 일거에 공략한 후 남경으로 진군한다는 것이었다.

▲ 동관에 집결하여 사열 중인 서북군.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육성된 서북군의 포병과 기병은 중국 최강이었다.

5월 초 서영창(徐永昌)의 산서군 주력이 녹종린의 서북군과 연합하여 약 15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포병의 원호 아래 농해철도를 따라 각기 동진하여 산동성 서남부의 하택(菏泽)으로 진격하였다. 또한 북쪽에서는 석우삼의 제4방면군 4만명과 부작의의 산서군 10만명이 진포철도를 따라 제남을 향해 남하하였고 만선재의 서북군 제6로군이 귀덕(归德, 현재의 상구商丘)를 거쳐 서주의 관문인 당산(砀山)으로, 손전영이 박주(亳州)를 거쳐 숙주와 방부를 향해 남하하였다. 반장연합군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열차와 차량이 매우 부족하여 대부분의 병사는 도보로 진군해야 했고 군수품의 수송 또한 지연되면서 진격은 느렸다. 반면, 장개석은 철도를 통해 병력과 물자를 전장으로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반장연합군에 비해 가장 큰 유리한 점이었다.

5월 11일부터 양군의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되었다. 귀덕과 박주에서 각기 남하한 만선재-손전영 부대는 유치가 지휘하는 제2군단의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혀 며칠에 걸친 치열한 혈전 끝에 격퇴되고 말았다. 장개석은 서주에서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직접 일선에 나가서 독전하였다. 교도사단이 반격에 나서 귀덕을 포위한 후 격렬한 공격을 퍼부어 5월 20일 만선재 부대를 괴멸시켰다. 만선재는 북벌전쟁 당시 제2집단군 제1군을 맡아 산동군벌 장종창을 격파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워 풍옥상에게 "상승장군"이라는 격찬을 받았지만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남경에 연금되었고 1930년 10월 8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당하였다.

한편, 장정문의 제9사단이 근기(近杞)를 점령하고 란봉(兰封)을 포위하였다. 이로 인해 박주로 퇴각했던 손전영 부대는 고립되고 말았다. 산동성 북쪽에서는 석우삼 부대가 진조원에게 가로막혀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하는 등 전쟁은 혼전의 연속이었다. 란봉 방면에서는 유치의 제2군단 주력이 도착하여 포위를 강화하고 항공부대를 동원하여 연일 폭격하였다. 염석산도 란봉에 대한 결사사수를 다지면서 방어진지를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급히 증원하였다. 또한 맹렬한 포격을 퍼부어 중앙군의 전진을 막았다. 장개석은 진성(陈诚)의 제11사단을 우회시킨 후 산서군의 우익을 기습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란봉이 위태롭자 풍옥상은 정주에서 예비대로 남아 있었던 손양성, 길홍창(吉鴻昌)의 부대를 급히 전선으로 수송한 후 총반격에 나섰다. 이 두 부대는 서북군 최강부대인데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전력이 팔팔한데다 정대장(郑大章)이 지휘하는 기병집단과 장갑열차의 화력 지원까지 받아 진성 부대를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장개석 오호상장의 한명이자 뒷날 중화민국 2대 부총통이 되는 진성은 매우 유능한 지휘관이었지만 이들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고 십여일에 걸친 격전 끝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패퇴하고 말았다.

장개석군은 공격을 멈추고 일단 방어 태세로 들어갔다. 호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서북군 전적 총사령관 녹종린은 산서군 부사령관 서영창에게 전보를 보내어 산서군이 보다 적극적으로 진격하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심했다. "우리는 지키는데는 익숙하지만 공격에는 능하지 못하다" 마지못해 가담한 산서군은 장개석과 풍옥상이 서로 피를 흘려 기진맥진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불협화음이 반장연합군의 최대 취약점이었다.


한편 개봉, 란봉 방면에서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는 동안, 장개석은 서북군의 측면을 공격할 생각으로 호북성 방면에 배치된 하성준의 제3군단에게 허창을 공격하여 서북군이 증원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하성준 휘하의 부대는 서원천, 왕금옥(王金钰), 양호성 등 비직계의 군벌 군대가 주축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지반과 실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장개석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렇다할 원한 관계도 없는 서북군과 굳이 죽기 살기로 싸울 이유가 없었다.


5월 16일 하성준은 허창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왕금옥의 부대가 허창을 포위하고 번종수 부대를 공격하였지만 전투가 지지부진 한 가운데, 6월 4일 번종수는 전선을 순시하던 중 항공 폭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풍옥상은 급히 허창으로 손연중 부대를 증원한 후 반격에 나섰다. 한편, 남쪽에서는 이종인의 광서군이 호남군벌 하건, 사천군벌 류문휘 등과 연합하여 5월 27일 형양을 점령한 후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6월 5일에는 장사를 점령하였다. 남북으로 협공당할 판인데다, 그다지 전의도 없었던 하성준의 제3군단은 6월 10일부터 시작된 서북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주마점(驻马店)으로 퇴각하였다. 이제 무한의 방어마저 위태로울 판이었다.


▲ 1930년 3월부터 7월까지의 상황. 파란색이 반장연합군, 붉은 색이 장개석군의 진로.


장개석은 급히 장광내(蔣光鼐)의 광동군 제11군(이후 제19로군으로 개편되어 상해사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이게 됨)을 형양으로 급파하여 이종인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한편, 하응흠에게 장사 탈환을 명령하였다. 하응흠은 악주를 방어하는 제13사단에 결사 사수를 지시하고 제4로군, 제6로군 등을 증원하여 이종인의 북상을 저지하였다. 이종인은 6월 8일 악주를 점령하였지만 다음날 남쪽에서 장광내의 부대가 형양을 탈환하여 이종인 부대의 배후를 차단하였다. 이종인은 급히 장사로 퇴각했지만 하응흠의 추격을 받아 결국 완전히 괴멸하였다. 이종인은 잔존부대를 수습한 뒤 광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서 광서군과 협력하여 무한을 공략하려 했던 풍옥상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 풍옥상의 주머니 전술에 걸리다


전황이 지지부진하면서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자 장개석은 반장연맹의 정치적 지도자인 왕정위에게 전문을 보내어 전쟁을 중단하고 국민당 임시전국대회를 개최하여 내전을 해결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였다. 또한 국민당 원로인 이석증(李石曾)을 봉천으로 보내어 장학량의 출병을 독촉했지만 역시 거절당하였다. 란봉에서 패퇴하면서 장개석의 군대는 크게 사기가 떨어진 채 진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만큼 전황은 장개석에게는 불리하고 반장연합이 유리한 형국이었다. 장개석조차 고축동, 장정문, 진성 등 심복들 앞에서 "공격이 실패한 이후 병사들에게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졌고 병력도 부족하다. 나로서는 슬프고 분할 따름이다. 어찌 나의 혁명군인으로서 정신은 이토록 분발하지 못하게 되었는가.."라며 한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의지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장개석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였다. 유치 휘하의 장정문, 진성, 장치중(张治中) 등 직계부대 3만명과 포병부대를 동원하여 개봉 공략에 나섰다. 풍옥상 또한 장개석의 공격을 예측하고 장개석을 유인한 후 포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손양성, 방병훈(庞炳勋), 길홍창(吉鸿昌)에게 신속하게 퇴각하여 허점을 보일 것을 명령하였다. 장개석은 항공정찰을 통해 서북군이 서쪽으로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즉각 추격에 나섰다. 풍옥상은 손양성, 방병훈 부대가 전면을, 손연중, 장자충 부대가 배후로 진출하고 산서군은 수비를 맡으며 손전영의 부대는 장개석군의 후방을 교란하라고 지시하였다. 상대를 유인한 후 좁은 곳에 가두어 섬멸한다, 이것이 이른바 풍옥상의 "주머니 전술(口袋战术)"이었다.


깊숙히 진격한 장개석의 군대는 서북군의 포위망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쌍방의 전투는 그야말로 치열하여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난타당한 장개석 군대의 손실은 그야말로 막중했고 귀덕으로 후퇴하던 일부 부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완전히 괴멸하고 말았다. 장개석으로서는 뼈아픈 통격이자 북벌전쟁 이래 최악의 패배였다. 그나마 장개석이 신속하게 퇴각 명령을 내리고 엄호 작전을 펼침으로서 풍옥상은 포위망을 완성할 수 없어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손전영은 박주에서 고립된 채 왕균(王均) 부대에 포위당해 있었다. 서태후의 묘를 도굴하여 유명해진 손전영의 부대는 비적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의 잡군인데다 양식도 탄약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풍옥상은 녹종린에게 명령하여 이들의 구원을 위해 손연중 부대를 파견하였다. 손연중이 왕균을 공격하자 손전영도 호응하여 왕균을 격파하고 박주의 포위망을 풀었다.

풍옥상은 손전영-손연중 부대에게 진포철도를 장악한 다음 벙부를 거쳐 남경으로 남하하라고 지시하였다. 벙부에서 남경까지는 지척이었으므로 그야말로 위기였다. 하지만 식량과 탄약이 결핍된데다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던 이 두 부대는 결국 서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또한 서북군은 극심한 군비 부족으로 일선의 병사들은 극심한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별다른 전투를 하지 않던 산서군은 병사들의 급료도 매월 지급하고 식량도 풍족했다. 서북군 병사들은 산서군 병사들이 먹다 버린 빈 양철 통조림 더미를 보면서 힘든 일은 자신들에게 죄다 떠맡기며 방관만 하는 염석산을 향해 마구 욕을 퍼부었다. 서북군과 산서군의 모순과 불만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판이었다.

석우삼과 부작의의 산서군은 6월 3일 황하를 도하한 후 진조원을 격파하고 6월 25일에는 산동성의 성도 제남을 점령하였다. 염석산은 여세를 몰아서 산서군의 주력 부대를 동원하여 진포철도를 따라 공격에 나섰지만 장개석이 증원부대를 투입하고 진조원, 한복구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싱겁게 격퇴당하고 말았다. 또한 장개석은 호남성 방면에서 승리하면서 어느 정도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고 7월 중순부터 산서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염석산은 급히 풍옥상에게 탄약과 식량을 보내주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풍옥상의 막료들은 "염석산은 위기에 처하니까 그제야 부처님을 찾는구나. 좀 더 빨리 보내주었다면 손연중은 빙부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진포철도의 전황은 훨씬 유리했을 것이 아닌가"라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풍옥상 또한 염석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지만 염석산의 위기는 자신의 위기이기도 하였다. 그는 최후의 힘을 짜내어 서주에 대한 총공세를 준비하였다. 이미 이종인의 광서군은 패퇴한데다, 군비도 탄약도 바닥난 상황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마지막 도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