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군축을 재개하다
풍옥상의 하야 선언, 이종인과 백숭희, 황소횡 광서파 수장 3인방이 해외로 도주함으로서 약 반년에 걸친 군벌들의 반란은 일단락되었다. 장개석은 반란에 가담한 지휘관들에 대해 군사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죄를 사면하였다. 그는 군벌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다. 만약 레닌이나 스탈린이었다면 정적들에게 최대한의 굴욕을 준 뒤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했을 것이다.
장개석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는 중국의 현실에서 끝까지 비타협주의를 고수할 경우 내전이 끝없이 확대되었을 것이기도 했지만,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은 굴복한 자에 대해서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훗날 국공내전기에도 공산군에게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국부군 지휘관, 고위 관료들 또한 대부분 용서를 받아 중공의 치하에서 실권 없는 지위나마 누리면서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중앙의 권위가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서 타협은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장개석은 이들의 무력과 기반을 국가로 모두 귀속시키고 중앙의 자리를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에서 할거하면서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기를 원했던 군벌 영수들은 장개석의 허수아비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국내의 모든 세력을 자신의 통제 아래 놓아 불안 요소를 없애고 진정한 통일을 꿈꾸는 장개석과 이를 거부하는 군벌들, 이것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근본적인 이유였다. 풍옥상이 반란을 취소하고 하야한 것은 한복구, 석우삼의 반란으로 내분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칠전팔기 인생에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보았던 그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단 물러난 뒤에 기회를 보아 장개석과 다시 승부를 벌일 참이었다.
1929년 8월 1일 남경에서 편견회의가 다시 열렸다. 내전으로 일시 중지되었던 군축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장개석으로서는 국내 통일을 위해서 군축과 군벌 세력의 해체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이 위원장으로, 각 집단군과 동북군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여기서 논의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편견의 기준으로 장교는 정규 사관학교 출신자, 경험과 공로가 인정되는 자는 남기며 사병은 20세부터 30세까지 체격이 좋고 무기를 갖춘 자는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제대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편견은 각 집단군에서 책임지고 추진하되 이를 감독하기 위해 중앙과 현지에서 각기 인원을 파견하여 점검키로 하였다. 해외로 도주한 이종인의 제4집단군에 대해서는 중앙에서 직접 개편을 담당키로 하였다. 이는 제4집단군을 중앙이 장악하겠다는 의미였다.
군대의 축소만큼이나 지휘권의 일원화나 편제에 대한 개혁도 중요한 문제였다. 20년에 걸친 군벌 내전기와 북벌 과정에서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지휘계통은 엉망인데다 인원과 편제, 장비는 군벌의 실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사단은 2, 3천명에 불과한 반면, 2만명이 넘는 사단도 있었고 야포와 기관총과 같은 중화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부대가 군대라기보다 사람들을 마구 끌어모아서 군복을 입히고 소총을 쥐어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머릿수만 많을 뿐 현대전에 걸맞는 부대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장개석은 "육군개편안"을 발표하여 군, 군단, 사단, 여단 등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는 편제를 모두 사단으로 통일하였다.
상비 사단이라 할 수 있는 "갑"종 사단은 보병 2개 여단 4개 연대 편제에 기병, 포병, 공병, 치충병, 특무대 각 1개 중대가 배속되었다. 그리고 지방군에 대해서는 을종 사단과 병종 사단으로 분류하여 각각 보병 3개 여단, 보병 2개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의 군대는 65개 사단으로 감축하되, 연대 이하의 편성을 충실히 하고 낡은 무기와 장비는 버리며 중화기를 보충하여 현대전에 걸맞게 충실히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군의 현대화는 중원대전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예산 부족과 공산군 토벌, 일본의 거듭된 침략 등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되어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장개석의 중앙군 30개 사단을 중심으로 일본의 강력한 공격에 대항할 역량을 갖추게 된다.
또한 편견회의에서는 모든 재정을 중앙으로 일원화하는 것과, 군 지휘관들이 성 주석이나 현장, 시장을 맡는 등 지방 행정을 겸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결정되었다. 이는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고 군벌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군벌들은 불만이 컸다. 풍옥상은 군비의 지급이 중앙군에게만 집중되고 서북군에는 한푼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늘어놓는 한편, 일본과 소련도 군구제를 실시하여 군정과 행정을 일치하고 있는데 중국에만 맞지 않는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장개석이 외유 경비에 보태쓰라며 돈을 보내왔지만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는 서북의 토벌을 중지한다는 조건으로 해외로 출국시키로 했던 약속을 번복하겠다는 의미였다.
염석산이나 다른 군벌들도 마찬가지였다. 군비 부족으로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킬 만큼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정난은 중앙도 마찬가지였다. 당초 편견회의에서는 군비를 매월 1600만원으로 정하였으나 이후 심의 과정에서 매월 1884만원으로 늘어나자 재정부장 송자문은 장개석에게 불만을 강하게 토로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편견 회의 폐막식에서 장개석은 군벌 영수들이 국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1929년 9월 1일부터 편견을 시작하여 1930년 3월 말까지 완전히 마무리짓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군벌들의 반발은 당장 폭발하였다. 9월 17일 호북성 의창(宜昌)에서 광동군벌 장발규(張發奎)가 반장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그는 제4사단을 이끌고 장개석 반대와 정부 개조를 외치며 호남성으로 남진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기반인 광동성으로 귀환하기 위함이었다. 병력은 약 2만명.
장개석은 무한에 주둔한 유치의 제1사단에게 즉각 출동을 명령하고 호남성, 안휘성에 주둔하고 있던 각 부대에 대해서도 장발규의 남하를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곧 광서성에서도 장발규를 호응하고 서북파 군벌들이 반장통전(反蔣通電)을 선언하는 등 한동안 진정되었던 상황은 장발규의 반란이 방아쇠가 되어 다시 것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또한 동북에서는 장학량이 소련이 소유하고 있던 중동철도(만주리와 수분하를 연결하여 북만주를 관통하는 철도로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어 있다)를 전격 회수를 단행했다가 1929년 8월 소련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 반장 연맹의 결성
광동성은 원래 손문의 오랜 정치적 기반이었다. 신해혁명 직전에 광주에서 "반청운동"을 펼쳤다가 진압당했던 손문은 신해혁명 이후 원세개가 칭제를 하고 공화파를 탄압하자 제2차 혁명을 일으켜 "토원전쟁(討袁戰爭)"을 일으켰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자 소수의 측근을 이끌고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로 내려왔다. 화남 최대의 도시인 광주는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고 기후는 아열대성으로 온난하며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동남아와 인접하고 있어 전통적으로 중국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근대에 와서는 천진, 상해, 무한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이자 물자와 산물이 풍부했으며 가장 자본주의화된 곳이기도 하였다.
손문은 진형명, 육영정 등 남방의 군벌들을 규합하여 북벌전쟁을 일으켰고 국공합작을 실시했으며 소련의 원조를 받아 광주 남쪽의 황포 장주도(长洲岛)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국민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황포군관학교"로 장개석에게는 권력의 기반이자, 이곳을 졸업한 많은 간부들은 훗날 중국의 핵심 지도자가 되었다. 손문이 죽은 뒤에도 국민정부는 광주를 기반으로 광동성 전역을 통일하여 북벌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광동성은 국민정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였다.
북벌 과정에서 장개석과 왕정위가 주도권 싸움을 벌이면서 양측은 각각 남경과 무한으로 정치적 중심을 옮겼고 중국을 통일한 뒤 국민정부는 새로운 중국의 수도를 남경으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광동성은 국민정부에게 여전히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고 호한민, 진제당, 이제심 등 광동파 군벌들은 국민정부 내에서 거대한 "광동파" 세력을 형성하여 장개석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자 뒷날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상해에서 우익군 총사령관을 맡아 일본군과 치열한 용전을 펼치게 되는 장발규는 광동성 북단의 시흥현(始兴县) 출신이다. 무창육군중학을 졸업한 그는 광동신군에 들어갔고 광주에서 손문이 호법정부를 수립한 뒤 손문의 경호와 이제심의 광동군 제1사단 독립연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광동군벌 진형명을 토벌하였고, 북벌전쟁에서는 제4군을 지휘하여 뛰어난 군사적 역량으로 오패부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의 부대는 북벌군 주력 중 하나로서 "철군(鉄軍)"이라 불리었다. 뒷날 공산군의 주요 간부가 되는 엽정(葉挺)이 그의 휘하에서 제24사단장을 지냈다.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된 뒤 화남일대에서 활동중이던 공산군 부대를 엽정이 개편할 때 "신4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 또한 장발규의 제4군에서 따온 것이다.
북벌 도중 왕정위의 무한정부와 장개석의 남경정부로 분열되자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던 장발규는 왕정위의 편을 들었고 제2방면군 총사령관이 되어 남경 공략에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정위와 장개석이 정치적으로 타협하면서 내분은 끝났지만 장발규는 남경정부에 복종하지 않고 대신 광동성을 수중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지원을 받은 이제심의 공격을 받아 그의 부대는 괴멸하였고 장발규는 해외로 도망쳤다. 장개석과 이종인이 군축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1929년 3월 장계전쟁이 발발하자 장개석은 장발규를 사면하고 제4사단장에 임명하여 호북성으로 진군시켰다.
한편, 남경정부의 이인자인 왕정위는 1927년 11월 공산당이 남창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그 책임을 물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프랑스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기민한데다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해외를 떠돌면서도 중국의 정세를 주시하였다. 장개석과 군벌들의 대립은 재기의 기회였다. 그는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등과 연락하고 당내 불만세력들을 모아서 반장연맹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산동성 주석 진조원(陳調元), 안휘성 주석 방진무(方振武) 등 장개석의 편에 서 있었던 군벌들도 대거 가담하였고 장발규도 왕정위에게 회유되었다.
8월 29일에는 장개석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상해 은행회와 교섭하여 편견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상해를 방문한 장개석은 프랑스 조계에서 머물던 도중 한밤중에 호위병의 습격을 받았다. 장개석은 복부에 한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9월 9월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에 연루된 20여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즉결 총살당했고 남경정부는 사건 배후에 왕정위, 풍옥상이 있다며 비난하였다. 또한 재정부장 송자문도 피습당하고 절강 재벌 연합회는 장개석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어 더 이상의 재정적 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 사태는 갈수록 일촉즉발이었다.
장계전쟁의 패배로 해외로 망명했던 백숭희가 귀주성으로 귀환한 후 군대를 규합하여 광서성 탈환을 꾀하였다. 유작백(俞作栢)은 장개석에게 귀순하여 그 대가로 광서성 주석이 되었지만 백숭희의 반란에 호응하였다. 그는 이명서(李明瑞), 여환염(呂煥炎), 양등휘(楊騰輝) 등 광서군 장령들과 함께 광서성의 독립과 장개석 타도를 선언하였다. 장개석은 이들을 파면하는 한편 광동성 주석 진제당에게 광서성 진공을 명령하고 중앙군 제3사단, 제8사단도 급파하였다.
* 제2차 장풍전쟁 발발
서북군도 움직였다. 9월 8일 섬서성 주석 송철원, 감숙성 주석 유욱분(劉郁芬)을 비롯해 풍옥상 휘하의 서북군 장령 20여명이 남경정부 재정부장 송자문이 군비 배분을 불공평하게 하여 서북군이 매우 궁핍한 지경에 빠졌다며 규탄하였다. 또한 외교부장 왕정정(王正廷)에 대해서도 소련군의 동북 침공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하여 중국의 주권을 땅에 떨어뜨렸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물론 비난의 화살은 장개석을 향한 것이었다.
17일에는 풍옥상, 염석산, 주배덕, 장발규, 방진무 등 전국의 군벌 영수들이 남경정부의 개조와 왕정위를 국가 주석으로 추대할 것을 선언하였다. 반란의 중심에는 풍옥상이 있었다. 그는 왕정위와 연락하면서 다른 군벌들을 회유하여 반장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장개석과 풍옥상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났고 반장전쟁은 한층 더 커진 셈이었다. 장발규의 반란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풍옥상이 일어나고 염석산과 장학량까지 가세한다면 회수 이북 전체가 반란에 가담하는 셈이고 상황은 그야말로 예측불허가 되는 것이었다. 형세는 급박하였다.
10월 11일 송철원을 비롯해 서북군과 산서군 장령 27명이 장개석 타도와 남경정부의 개조, 수도를 북평으로 옮길 것을 선언하였다. 또한 풍옥상에게 태원에서 서북으로 돌아올 것과 풍옥상, 염석산을 반장운동의 영수로 추대하여 함께 시국을 수습하자고 촉구하였다. 같은 날 장개석 또한 서북군 주요 간부들의 파면과 체포령을 발표하고 서북군 토벌을 결의하였다. 또한 염석산에게 전문을 보내어 반란에 가담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풍옥상을 즉시 체포하여 중앙으로 인도하라고 요구하였다. 여기다 반년 전 장개석에게 회유되어 풍옥상의 뒷통수를 쳤던 한복구, 석우삼도 서북군에 가담하였다. 장개석은 지극히 기회주의적인 두 사람이 언제 다시 배반할 지 모르므로 서북군과 떼어놓을 셈이었다. 한복구에게는 하남성을 떠나 산동성으로 이동할 것과, 석우삼은 안휘성에서 광동성으로 내려가 양광의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두 사람의 지반을 약화시키겠다는 뜻이므로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사정을 모를 리 없는 풍옥상이 "옛 잘못은 묻지 않겠다"라며 회유하자 용서를 빌고 다시 휘하에 들어갔다.
군사적으로는 어느 쪽이 우세한지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병력과 장비에서는 장개석 측이 60만명에 달하여 약 25만명 정도인 서북군보다 월등히 우세했지만 태반은 언제 배반할 지 모르는 군벌이었고 장개석이 실제로 신뢰할 수 있는 부대는 10만명 남짓이었다. 또한 양광의 반란으로 남북으로 협공당하고 있었다. 서북군은 잘 훈련되어 있고 결속력이 강한 반면, 화력에서 열세했고 무엇보다도 군비의 결핍으로 작전에 심각한 차질을 준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염석산은 반장연맹에 가담하고서도 여전히 장개석을 적으로 돌리기를 두려워하여 애매한 태도였다. 또한 한복구, 석우삼의 부대는 전투력이 매우 형편없는데다 언제 다시 등을 돌릴지 알 수 없었다. 이는 장개석도 마찬가지였다. 군벌들은 형세의 변화에 언제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결국 장개석과 풍옥상의 싸움은 전투가 아니라 모략과 매수의 싸움이었고 군벌들을 얼마나 회유하여 세력을 규합하는가에 승패가 달려 있었다.
하남성 개봉, 낙양, 정주 방면에서는 농해 철도 주변으로 이미 중앙군과 손양성의 서북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10월 16일 손양성은 중앙군의 당생지군을 격파하고 18일에는 정주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21일에는 요충지인 허창을 점령한 다음 평한철도를 따라 무한을 향해 남하할 준비를 하였다. 만약 이들이 백숭희, 장발규의 반란군과 합류할 경우 장개석은 상황이 대단히 불리해질 수 있었다. 장개석은 직계 부대를 호북성과 하남성 경계에 배치하는 한편, 하남성 동쪽에는 당생지 등 군벌 부대를 배치하여 서북군의 서진을 막았다.
하지만 신양에 주둔한 하두인(夏斗寅)의 제13사단이 반란을 일으켜 무한을 위협하였고 산동성 주석 진조원 역시 반장통전을 발표하고 남경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는 진포철도(천진과 남경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철도)를 장악하고 전선으로 군수품을 수송하는 열차를 억류하고 한복구 부대와 연합하여 남하하였다. 장개석은 군정부장 하응흠에게 남경 방어와 진조원 토벌을 명령하였다. 하응흠은 서주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여 진조원-한복구 부대를 저지하였다.
본격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군벌들은 장개석과 풍옥상을 서로 저울질하면서 어느 편이 유리한지 형세를 관망하기 급급하였다. 염석산은 내전 반대와 평화적 타협을 외치면서 중재에 나섰고 당초 반장연맹에 가담했던 당생지(唐生智)는 태도를 바꾸어 장개석을 지지하고 나섰다. 또한 호남성 주석 하건은 장개석의 출동 명령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건이 중립을 지킨 덕분에 장발규군은 별다른 전투없이 호남성을 통과하여 10월 15일에는 광서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광동성을 침공한 유작백, 이명서의 광서군은 진제당의 반격을 받아 격파당했다. 게다가 일부 부대가 광동군으로 전향하는 바람에 전열이 완전히 무너진 채 남녕을 빼앗기고 귀주성으로 후퇴하였다.
진제당은 채정개(蔡廷锴), 여한모(余漢謀) 등 4만명의 병력으로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장발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하지만 장발규는 숫적으로 우세한 진제당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11월 20일 광동성 북부의 요충지인 소관(韶關)을 점령하였다. 상황이 불리해진 진제당은 장발규과 타협하여 반장 진영에 가담할 기미를 보였고 하건 역시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남경정부 역시 분열되어 그동안 장개석의 권위에 억눌려 왔던 호한민, 허숭지, 손과를 위시한 서산파(西山派, 손문 시절의 국민당 원로들이 주축이 된 당내 주요 파벌 중 하나)들은 장개석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서북군을 지원하였다. 반장 기치는 하남성과 호북성, 호남성, 산동성, 광서성, 광동성,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등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장개석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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