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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3. 오패부 칼을 뽑다 /blog.naver.com/atena

1917~1919년까지 혼전 상황. 파란색이 안휘파(단기서), 보라색이 직예파(풍국장), 남쪽의 붉은 색이 서남군벌들로 사천성과 호남성에서 북양군과 대치중이었으며 섬서성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북양군이 진압에 나섰다. 또한 손문의 광주군정부는 광동군을 동원해 강서성을 침공했으나 북양군의 반격을 받아 격퇴당했다.

 

​* 단기서의 참전군

 

1919년 12월 28일, 전 대총통이자 직예파의 우두머리인 풍국장이 60살의 나이로 죽었다. 직예성 출신인 그는 직예총독 이홍장이 천진에 세운 북양무비학당을 졸업한 후 원세개의 수족이 되었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북양군 제1군을 지휘하여 무창에서 봉기한 혁명군을 격파하였다. 원세개가 죽은 뒤, 안휘파의 단기서와 직예파의 풍국장이 북경정부의 쌍두머리였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있을 수 없듯,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대총통 여원홍을 견제하고 장훈의 복벽사건을 진압하는데는 적극적으로 손을 잡았지만, 막상 권력을 손에 넣자 금새 원수 관계가 되었다.

 

단기서가 자신을 무시하고 멋대로 전횡하자 풍국장은 북경을 떠나 남경으로 내려가 양자강 유역에 있는 직예파 세력을 규합하고 광서성과 광동성의 지배자인 육영정과 몰래 손을 잡아 단기서의 실각을 꾀하였다. 단기서 역시 여기에 대항해 국회를 장악하고 안휘파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동북의 지배자 장작림과 손을 잡아 봉천군을 북경으로 출동시켰다. 또한 한때 러시아의 힘을 빌려 독립을 선언했던 외몽골(현재의 몽골)의 자치권을 취소시켜 중국으로 도로 복속시켰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차관과 무기를 획득하여 소위 "참전군(參戰軍)"을 편성하였다.

 

단기서는 이 군대를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보내어 독일군과 싸우겠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병력을 모집하고 군대를 편성한 것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19년 2월이었다. 참전군은 3개 사단, 4개 혼성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병력은 약 3만명 정도였다. 장교와 병사들은 모두 안휘파의 세력권인 안휘성, 산동성, 하남성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북경 주재 특무기관장인 사카니시 도시하지로(板西利八郞) 소장을 비롯한 일본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되어 사람만 중국인이라는 것을 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본군이나 다름없는 사실상 일본의 용병 군대였다. 일본제 최신 무기로 충실히 무장한데다 105mm, 150mm 대구경 중포를 보유했기에 장비와 화력에서만 본다면 명실상부한 중국 최강 부대였다. ​참전군의 편성으로 북양군에서 세력 균형은 단숨에 단기서에게 기울어졌다.

 

​직예파 입장에서는 "참전군"은 전적으로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당장 단기서에게 "참전군"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풍국장을 대신해 1918년 9월 4일 신임 대총통이 된 서세창은 두 파벌의 싸움을 무마하기 위해 단기서에게 참전군을 육군성 관할로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단기서는 단칼에 거부하고 오히려 "국방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자신의 직할부대로 삼았다. 그리고 앞화에서 언급했듯, 외몽골의 독립운동 진압을 위해 출병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변방군(邊防軍)"으로 개칭하여 자신의 심복인 서수쟁에게 맡겼다. 서수쟁은 그동안 단기서의 수족으로 일본과 밀약을 맺고 장작림의 관내 출병을 유도했으며 직예파의 중요 인물인 육건장을 살해하는 등 온갖 책략과 음모를 꾸며 왔다. 당연히 직예파로서는 단기서 이상으로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었기에 단기서의 결정은 안휘파와 직예파의 갈등을 최악으로 치닫게 하였다.


미국과 영국 역시 일본이 중국에 영향력 강화를 위해 무기와 차관을 지원하고 있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또한 단기서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남북화평회의의 개최를 권고하였다. 여기다 단기서가 이를 위해 제멋대로 일본과 밀약을 맺어 산동성의 독일 조차지를 비롯한 중국의 많은 이권을 넘기기로 약속한 사실이 파리 ​강화 회담에서 드러나자 중국 각계각층의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5월 4일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북경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가 점점 확대되었지만 오히려 단기서는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단기서는 반대파의 극심한 비난을 받아 점점 고립되었다.

 

한편, 단기서는 직예파를 분열시키려고 조곤(曹錕)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직예성장을 맡고 있었기에 풍국장과 함께 직예파로 분류되었지만 사실 풍국장과는 사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게다가 조곤 역시 야심가였다. 서수쟁은 조곤에게 단기서를 지지해 준다면 부총통의 자리를 주겠다고 미끼를 내밀었다. 조곤은 당장 풍국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단기서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서수쟁은 동시에 장작림에게도 같은 명목으로 부총통 자리를 주기로 약속하였다. 자리는 하나인데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다. 이는 조곤과 장작림을 서로 경쟁시키려는 교묘한 음모였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부총통 자리를 노리다 결국 양쪽 모두 포기하고 부총통은 공석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단기서에게 속았다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뒤도 생각지 않는 이 경솔한 행동은 당연히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 상승장군 오패부 

 

단기서와 조곤의 연합은 이로 인해 완전히 깨져버렸다. 단기서의 무력 통일과 남진정책을 지지하던 조곤은 단기서에게 등을 돌려 다시 풍국장과 손을 잡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강경한 입장으로 "타도 단기서!"의 선봉에 선 사람은 조곤의 부하이자 제3사단장인 오패부(吳佩孚)였다.

 

오패부는 1920년대 중국을 뒤흔들었던 수많은 군벌들을 통틀어 장작림과 함께 가장 강력하고 명망있는 군벌이다. 오패부는 1874년 산동성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곤과는 12살 아래, 단기서와는 9살 아래였다.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은 그는 22살에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료 대신 군인의 길을 선택한 그는 북양군벌의 양성소라 할 수 있는 보정육군속성학당에 들어갔다. 1907년 장춘에 주둔한 북양군 제3진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의 지휘관이 조곤이었다. 조곤은 유능하고 야심이 넘치며 명석한 엘리트인 오패부를 당장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대총통 원세개는 청조의 관제를 서구식으로 바꾸면서 육군 개편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제3진은 제3사단으로 개편되었고 오패부는 제3사단 예하 포병 제3단(연대)의 단장을 거쳐 제6여단장이 되었다. 조곤의 오패부에 대한 신임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오패부가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의 재현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제3사단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조곤이 아닌 오패부였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제3사단을 오패부에게 넘겨주었다. 조곤의 동생들이 "세상에 피붙이 만큼 믿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라며 제3사단을 탐내자 조곤은 "너희들은 지휘관감이 아니다. 오패부는 여지껏 단 한번도 전투에 패한 적이 없는 명장이다. 북양군에서 자옥(子玉, 오패부의 字)만큼 능력 있는 자가 있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오패부 역시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사천성과 호남성에서 연전연승을 하였다. 북양군의 여러 부대 중에서도 오패부의 제3사단의 전투력은 단연 최강이었다. 오패부의 승리는 바로 조곤의 승리였다. 조곤은 오패부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렸고 오패부에게 합당한 보답을 해주었다. 오패부 또한 야심이 넘치는 사나이였기에 권력을 쥐는데 조곤의 명성을 이용하였지만 조곤에게는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삼국지에 비유하자면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오패부는 조곤이 풍국장과 손을 끊고 단기서 쪽에 서자 "단기서는 우리를 안휘파로 생각할 것이고 풍국장은 우리를 직예파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도 좋겠습니까?"라고 은근히 질책하면서도 일단 선봉에 서자 장사를 단숨에 공략하였다. 육영정의 광서군은 오패부의 우회 공격을 받자 태반이 무너져 패주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그는 장사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북경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단기서가 장작림과 손을 잡고 독주하면서 직예파를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특히 호남성 공략에 가장 공이 큰 오패부 대신 심복인 장경효(張敬尭)를 호남성 독군 겸 성장에 임명하자 오패부는 심한 불만을 품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비롯한 직예파 군대는 단기서의 명령에 복종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호남성을 장악했는데 막상 전투에 발 한번 안 담군 안휘파가 공을 독차지했으니 당연하였다. 조곤 역시 불만이 컸다. 장작림은 장작림대로 안휘파가 내몽골과 열하성에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천하의 지배자를 꿈꾸고 있는 단기서가 직예파를 억누르는데 성공하여 북경정부를 완전히 장악한다면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그동안의 불화를 접고 비밀리에 손을 잡기로 하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북양군은 완전히 자중지란의 상황이 되었고 단기서의 무​력 남진 역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장작림의 봉천군은 서수쟁이 지휘권을 남용했다는 명목으로 호남성에서 철수하여 만주로 되돌아간 상태였고, 장사에 주둔하고 있던 오패부를 비롯한 직예파 지휘관들은 단기서의 남하 명령을 무시하고 전투를 중지하였다. 그리고 5월 25일 육영정과 화해를 선언한 후 오패부의 제3사단이 앞장 서서 경한철도(북경↔한구를 연결하여 중국 중부와 북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를 따라 북경을 향해 북상을 시작하였다. 단기서와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장사에는 호남 독군 장경효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합지졸에 불과한 그의 군대로서는 감히 오패부에게 맞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기다 육영정의 지원을 받는 조항척의 호남군 제1사단 휘하 3천명이 형양을 점령한 후 장사로 쇄도해 왔다. 장경효는 부하들에게는 무조건 사수를 명령하고는 자신은 가족과 재산을 챙겨 상해로 도망쳐 버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6월 12일 장사는 다시 호남군의 손에 넘어갔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장경효의 동생 장경양은 포로가 되어 총살당했다.


* 거듭되는 단기서의 자충수

 

직예군이 북상하자 단기서는 경한철도를 폐쇄하는 한편, 진로선상에 있는 하남성을 장악하여 이들의 북상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는 하남성장 겸 독군이었던 조척(趙倜)을 밀어내고 성장에는 안복계 참의원 비서장인 왕인천(王印川)을, 독군에는 자신의 처남인 오광신을 임명하여 하남성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원래 조척은 하남성에서 일어난 "백랑(白狼)의 난" 당시 단기서 휘하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덕분에 1914년 8월 하남독군에 임명되어 하남성을 다스려 왔다. 따라서 북양군이 안휘파와 직예파로 분열된 뒤에도 자신을 출세시켜 준 단기서를 일관되게 지지하였다. 그러나 단기서는 조척이 자신의 직계 부하가 아닌데다 오패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였다. 자칫 오패부의 회유에 넘어가 배신을 할 우려도 있었다. 따라서 호북성에 주둔하고 있던 오광신에게 하남성을 맡겨 오패부를 저지할 생각이었다. 그는 2개 사단 및 2개 혼성여단을 가지고 있었다.

러나 대총통 서세창은 성장 교체에는 동의하면서 막상 군의 지휘권을 가진 독군의 교체에 반대하여 어정쩡한 결과만 낳게 되었을 뿐더러, 조척은 단기서의 조치에 격분하여 스스로 反단기서 진영에 가담해 버렸다. 이건 단기서에게 치명타였다. 조척은 군대를 동원해 정주와 신양에 주둔하고 있던 안휘파 2개 여단에 대항할 태세를 갖추는 한편 오패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결국 오광신은 조척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도로 호북성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하남성에서 직예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던 단기서의 전략은 시작부터 엉망이 되었다.

 

이렇게 惡手를 거듭 두면서 사방을 죄다 적으로 만든 이유는 ​서수쟁의 무리한 책략과 전횡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단기서의 편협하고 외골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물론 군벌들이 의리도 충성심도 없고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단기서의 판단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조척은 직예파에 가담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오패부의 군대에 대해서도 하남성을 통과하는 것만 인정할 뿐 무기와 자금의 지원을 거부하고 즉시 하남성에서 나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즉, 조척은 처음부터 하남성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을 뿐 안휘파와 직예파의 싸움에 가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설령 단기서가 그를 믿어주었다고 해도 조척은 무력 충돌을 각오하면서까지 단기서를 위해 오패부의 북상을 저지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군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기서는 자신이 100% 신뢰할 수 있는 인척과 소수의 측근 이외에는 절대로 믿지 않았으며, 반면 서수쟁처럼 아무리 오만방자하게 권한을 남용하여 단기서의 입장을 몇번이나 난처하게 했음에도 심복이라는 이유로 눈 감아 주었다. 여기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그의 눈을 더욱 멀게 만들었다. 충분히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었던 조곤과 장작림을 적으로 돌리게 된 것도 결국 이 때문이었다. 이런 모습은 30년 뒤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고스란히 재현하여 몰락했다는 점에서 지도자의 독선은 스스로에게도 독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反 단기서 동맹의 결성 

 

풍국장은 단기서의 전횡을 미워하면서도 그나마 같은 북양군끼리 무력 충돌하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려고 하였다. 굳이 무력을 쓰지 않아도 단기서만 실각시켜 직예파가 주도권을 되찾는다면 굳이 피를 보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았다. 풍국장이 노환으로 죽자 오패부는 조곤을 직예파의 우두머리로 추대하는 한편, 직예파 독군들을 움직여 1920년 4월 9일 反단기서 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여기에 가담한 진영은 직예성, 강소성, 호북성, 강서성, 하남성,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총 8개 성에 달했다. 이른바 "8성 동맹"이었다. 오패부의 제3사단을 비롯한 직예군의 주력부대가 호북성 무한과 하남성 정주를 거쳐서 6월 15일 직예군의 사령부가 있는 보정에 도착하였다.


반면, 단기서 측은 북경-천진 외에 안휘성, 섬서성, 내몽골, 절강성, 산동성 등 5개 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단기서는 장작림이 조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기에 그의 생각으로는 쌍방의 세력은 백중지세였다. 여기다 일본의 후원과 변방군만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6월 17일 서수쟁이 고륜(울란바토르의 중국식 이름)에서 북경으로 급히 돌아와 변방군을 배치하는 등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 장작림, 중원으로 돌아오다

 

장작림은 부총통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대신 서세창은 그를 동삼성순열사에 임명하였다. 만주에서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이기는 했으나 자신을 마치 부하쯤으로 여기는 단기서와 서수쟁의 행태에 불신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단 군대를 돌려 봉천으로 돌아갔다. 다음 기회를 노리는 장작림 나름의 현명한 포석이었다. 만약 그가 북경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직예파와 안휘파의 경계심을 불러왔을 것이다. 자신의 실력은 이미 중앙에 충분히 보여주었다. 실력만 있다면 어차피 때가 되면 알아서 불러줄 것이었다.

 

봉천으로 돌아온 장작림은 먼저 길림성 독군에 자신의 사돈인 포귀경(鮑貴卿)을, 흑룡강성 독군에는 심복인 손열신(孫烈臣)을 임명하여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였다. 단지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으로 뭉친 단기서나 풍국장, 조곤과 달리, 장작림의 패거리는 장작림 특유의 포용력과 카리스마, 오랜 인간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에 의리와 충성심이 높았다. 그의 기반은 어느 군벌보다도 탄탄하였다. 이것이 장작림의 강점이었다.

 

직예군과 안휘군이 각각 보정과 북경에 주둔한 채 대치하면서 전운이 감돌자 서세창은 급히 장작림을 북경으로 불렀다. 양자의 중재를 맡긴 것이었다. 장작림이 계획했던 대로였다. 2년 전만 해도 일개 사단장에 불과했던 그가 이제는 북경정부의 3대 세력의 하나로서 누구도 무시 못하는 중요한 인물이 된 것이다.

 

6월 19일 장작림은 2개 연대에다 기관총 4정의 호위를 받으며 전용열차를 타고 북경에 도착하였다. 서수쟁을 비롯한 각부 장관과 안휘계 정치가, 군 지휘관들이 모두 나와서 그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장작림은 자신의 주가를 더욱 올리기 위해 서수쟁이 마련한 호화로운 숙소를 거부하고 일부러 봉군 사령부에 머물렀다. 이미 조곤과 손을 잡고 反단기서측에 가담한 그였지만 이를 숨기고 단기서와 조곤을 차례로 만나 중재하는 척 했다. 그리고 서수쟁의 병권 박탈과 재정, 교통, 사법, 농상, 외교, 교육 등 5명의 안휘파 장관들의 교체, 변방군의 폐지 및 육군부로 개편할 것을 중재안으로 내놓았다. 사실상 안휘파를 해체하는 최후 통첩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단기서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일개 사단장에 불과한 오패부 따위에게 중앙 정부가 휘둘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며 단호하게 말한 다음, 오히려 장작림을 회유하려고 부총통의 자리를 제안하였다.

 

6월 29일 서세창은 단기서와 장작림을 대총통 공관으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 서세창은 안휘계 총장을 교체하는 대신, 서수쟁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변방군 역시 단기서의 휘하에 두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곤과 오패부가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여기다 장작림도 직예파의 편을 들어 서세창에게 유혈충돌을 피하는 방안은 오직 서수쟁을 파면하는 것 밖에 없다고 건의하였다. 결국 7월 4일 서세창은 결단을 내려 "위원 장군(威遠 將軍)"이라는 이름뿐인 자리를 만들어 서수쟁을 임명하고 변방군의 지휘권을 육군부로 넘겼다. 직예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격분한 단기서는 휘하의 안휘파 군대에 동원명령을 비밀리에 내렸다. 쿠테타를 일으킬 셈이었다. 또한 서수쟁은 장작림을 찾아가 직예파와의 협상안을 명목으로 단기서의 관저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자리에서 장작림을 체포한 후 암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작림은 단기서의 환대를 받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지만, 낌새가 뭔가 이상하자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댄 후 재빨리 도망쳐서 천진의 군량성(軍糧城)으로 도주하였다. 이로서 장작림과 단기서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이르렀다. 장작림은 천진에서 조곤과 오패부를 만나 긴급회의를 가진 다음, 봉천으로 재빨리 되돌아 왔다.

 

* 안휘군, 직예군 출동하다

 

7월 8일 단기서는 북경정부의 안휘파 정치가, 관료, 군 지휘관, 북경 위수사령관, 경찰총감 등을 모두 소집하여 회의를 열어 직예파 토벌을 결의하였다. 다음으로 쿠테타를 일으켰다. 대총통 관저를 포위한 후 서세창을 협박해 조곤과 오패부의 면직을 강요하였다. "오패부는 적과 내통했고 60만원의 공금을 횡령했으며 맡은 임무를 방기하였다. 국가의 기강을 지키기 위해서 오패부를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또한 조곤 역시 책임을 물어 면직시킨다." 단기서는 자신이 총사령관에, 서수쟁을 참모장에 임명하고 북경 외곽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변방군 제1사단과 제3사단을 중심으로 병력은 약 5만5천명에 달했다. 단기서는 "정국군(定國軍)"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산동성 제남에 주둔하고 있는 변방군 제2사단도 직예군의 후방을 협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직예파 역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곤은 천진에 사령부를 두고 오패부를 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북경으로 가서 단기서를 몰아내고 서수쟁을 주살하자!" 직예군의 병력 역시 약 5만 5천명 정도였다. 오패부의 자신감은 넘쳤다. 조곤이 군사회의에서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 직예파는 끝장이다."라고 나약하게 말하자 오패부는 웃었다. "단기서가 믿는건 오직 변방군 뿐입니다. 하지만 이 군대는 무기만 좋을 뿐 실전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저 혼자서도 단기서의 군대 전부를 상대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조곤도 힘을 얻어 "오패부가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싸운다."라고 외쳤다.

 

7월 13일, 장작림도 봉천군에 출동 명령을 하달하였다. 병력은 약 7만명에 달했다. 이른바 "직환전쟁"이라 불리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벌어지는 첫번째 대전의 막이 열리는 참이었다.

 

ps. 처음에 간단하게 쓸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점점 살이 붙기 시작해서 어느듯 이렇게 되었네요...--;;;  이 시기 중국 군벌사와 관련해 국내에는 논픽션 소설인 "만주군벌 장작림" 정도만 출간되어 있다보니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 태반이죠. 그렇지만 아무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