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초반의 군벌 할거 상황. 파란색이 직예파 군벌, 초록색은 직예파가 아닌 북양군벌 또는 북양군벌의 후원을 받는 군벌, 갈색은 非북양계의 서남군벌들. 또한 광주에는 손문의 광주군정부가 있었다. 직환전쟁 이후 중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군웅 할거의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 안휘파의 몰락 직환전쟁으로 단기서의 천하는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안휘파의 패배는 첫째로 지휘관들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청일전쟁때와 다를 바 없는 구태의연한 구식 장군들이었다. 단지 단기서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그 자리에 오른 자들이었기에 실전 경험도 없는데다 싸우는 방법도 몰랐다. 전장터에서 마작에만 빠져 있었던 단귀지는 물론이고 오광신은 어이없이 포로가 되었으며 호남독군 장경효는 오패부의 북상을 눈뜨고 쳐다만 보았다. 사실상 안휘파를 좌지우지했으며 직환전쟁의 원인이 된 서수쟁도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일본 육사 출신이었지만 야전 군인이 아니라 음험한 술책가일 뿐이었다. 조곤과 장작림을 적으로 돌린 것도 서수쟁의 무모한 책략의 결과였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단기서에게 있었다. 서수쟁에게 휘둘린 것도 그였고 무능한 부하들에게 일을 맡긴 것도 그였고 졸속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도 그였다. 그로 인해 단기서는 자기 직속의 변방군과 북경 주변의 부대만을 동원했을 뿐 안휘파 군대를 제대로 결집시키지도 못했고 최대의 후원자인 일본의 지원을 얻어내지도 못했다. 만약 일본이 장작림에게 중립을 요구했다면 단기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후원을 받는 장작림은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직예파의 승리는 전적으로 오패부의 몫이었다. 직예군의 명목상 수장은 조곤이었지만 실질적인 수장은 오패부였다. 오패부는 신속하게 직예군을 호남성에서 북상시켜 보정과 천진으로 집결시켰다. 이로 인해 하남성에서 결전을 예상했던 단기서의 전략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또한 전투에서도 뛰어난 지휘력으로 한때 안휘군에게 돌파될 뻔 했던 직예군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상대의 허를 찔러 전세를 단숨에 뒤엎어 승리를 거두었다.
천하의 지배자였던 단기서에게는 너무나 허무한 패배였지만 그것으로 전란의 시대가 끝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북양군벌들의 분열로 중앙이 혼란에 빠지면서 중국은 한층 혼돈으로 빠져들어갔다. 대총통 서세창은 자신을 핍박하던 단기서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국가 원수로서의 대권을 휘두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야말로 순진한 착각이었다. 단기서라는 호랑이 한마리가 장작림과 조곤 두마리 늑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물며 단기서를 쓰러뜨리기 위해 잠깐 손을 잡았을 뿐인 양자는 권력을 조금도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 두 사람은 북경으로 들어오자 말자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북경은 장작림의 봉천군과 조곤의 직예군으로 넘쳐났다. 양군은 경쟁적으로 전리품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항복한 안휘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이들을 자군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북경 주변의 무기고와 군수품 창고를 마구잡이로 약탈하였다. 국가의 재산이지만 그들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중국의 세력도 또한 재편되었다. 조곤은 직노예 순열사(直魯豫巡閲使, 직노예란 직예성과 산동성, 하남성을 가리킴)가 되었고, 오패부 역시 직노예 3성순열부사(直魯豫巡閱副使)에 임명되어 전략적 요충지인 낙양에 주둔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제3사단 외에 제7사단, 제23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30사단, 제8혼성여단 등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장작림 역시 열하성을 장악하였고 몽골을 넘보았다. 반면, 안휘파 군벌들은 승자들에게 빌붙거나 자리에서 쫓겨났다. 산동독군 전종옥(田中玉)은 직예파로 전향하여 잠시나마 자리를 보존한 반면, 섬서독군 진수번(陳樹藩)은 쫓겨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직예군의 토벌을 받아 패배하여 사천성으로 도주하였다. 안휘파로서 자리를 보존한 사람은 절강독군 노영상(盧永祥)과 복건독군 이후기(李厚基) 뿐이었다. 직예파의 세력이 장강 이남까지 미치지 않은 덕분이었다. 나머지의 빈 자리에는 조곤과 장작림은 서로 자기 파 사람을 내세웠다. 장강순열사 겸 안휘독군 예사충(倪嗣冲)은 이홍장의 회군의 출신으로, 북양군벌의 원로이자 단기서와 함께 안휘파의 우두머리로서 1911년 안휘포정사(安徽布政使)가 된 뒤 약 십여년간 안휘성을 좌지우지하였다. 건강이 악화되어 북경 근교의 북대하(北戴河)에서 요양중이었기에 직화전쟁에 참전할 수 없었지만 단기서가 몰락한 이상 그 또한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총통 서세창이 그를 면직시키자 조곤은 장문생(張文生)을, 장작림은 이전에 '복벽사건'을 일으켜 푸이를 복위시키려고 했던 장훈을 추천하였다. 장훈은 복벽사건에 실패한 뒤 북경의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주했다가 이후 사면되었다. 장작림이 장훈을 추천한 이유는 사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문생은 원래 장훈의 부하였다가 복벽 사건이 실패한 후 조곤의 부하가 된 자였다. 서세창은 직예파의 손을 들어 장문생을 안휘독군에 임명하였다.
강소독군인 이순(李純)은 직환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직예파의 원로라는 이유로 예사충을 대신해 장강 순열사에 임명되었다. 장강순열사는 강소성과 강서성 등 양자강 중하류의 여러 성들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그런데 그 직후에 남경에서 자살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그는 강소성에서 혹독한 통치를 해왔고 이로 인해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결국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쨌든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빈 자리가 된 장강순열사와 강소도독을 놓고도 조곤은 장강순열사에 북양군벌의 원로인 왕사진을, 강소독군에 직예파인 제섭원(齊爕元)을 추천하였고 장작림은 다시 장훈을 추천하였다. 서세창은 여기서도 직예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상식적으로도 장작림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었다. 공화정을 뒤엎고 청조를 부활시키려고 했던 자에게 어떻게 중책을 맡긴다는 것인가. 무식한 마적 출신에다 중앙에 진출한지 얼마되지 않은 장작림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장훈이 사돈이라는 이유만으로 밀어붙였다가 두번이나 묵살되자 속으로 심한 불만을 품었다. 단기서와 안휘파의 처리를 놓고도 양자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단기서는 쿠테타를 일으켜 대총통 서세창을 감금하고 협박했으며 직예파 토벌을 주도하여 내란을 조장하였다. 직예파로서는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할 인물이었다. 단기서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이는 오패부였다. 그러나 장작림은 "일개 사단장 따위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장작림으로서는 단기서에게 악감정도 없을 뿐더러 직예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단기서가 필요하다고 계산하였다. 그는 조곤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던 관계를 들먹이며 "형님은 부하가 중요합니까, 형제가 중요합니까?"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오패부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조곤은 장작림의 설득에 넘어갔다. 서세창 역시 단기서 처벌을 반대하였다. 한때 자신을 핍박하기는 했지만 같은 북양군벌의 동지로서 오랜 친분이 있었다. 또한 장작림과 조곤을 견제하는데 단기서가 필요하였다. 덕분에 단기서는 목숨을 부지하였다. 모든 직위에서 쫓겨난 채 전국에 수배당한 이는 서수쟁 등 몇몇 안휘파 간부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형식적일 뿐, 실제로 군법에 의해 처벌받은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20년 8월 근운붕(靳雲鵬) 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는 천진무비학당 출신으로 원세개 시절 북양군 제5사단장과 육군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원세개 사후 단기서의 최측근이 되어 이른바 "4대 금강"의 하나로 불리었다. 1919년 1월 육군총장, 1919년 9월부터 1920년 5월까지 국무총리를 맡았으나 서수쟁과 대립하면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수쟁에게 이를 갈고 있던 그는 직환전쟁 이후 직예파로 전환하여 조곤과 손을 잡았다. 동생 근운악(靳雲鶚) 역시 북양군 제8혼성여단장을 맡았으나 직환전쟁 후 오패부 휘하로 들어갔다. 충성심도, 의리도 없는 전형적인 군벌의 행태였다. 하지만 근운붕은 국무총리의 자리는 찾았지만 조곤과 장작림 사이에 끼인 채 서세창과 마찬가지로 한낱 허수아비 신세일 뿐이었다. * 군웅 할거의 시대 북양군벌들끼리 치고박는 동안, 중원의 정세는 더욱 혼전의 상황이었다. 서수쟁이 중국에 도로 복속시켰던 외몽골은 직환전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일시 감소한 사이, 1920년 10월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 남작이라는 정신병자가 천여명의 백군 패잔병들을 이끌고 외몽골의 국경을 넘어왔다. 그는 외몽골의 수도 후레(현재의 울란바토르)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몽골의 칸인 보그드를 체포한 후 폐위시켰다. 그의 군대는 지나는 곳마다 광기에 가까울 만큼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러시아인들이 외몽골을 장악하자 세서창은 장작림을 몽골 경략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내몽골을 안정시키고 외몽골에서 러시아 마적떼를 몰아내어 중국으로 다시 복속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장작림으로서는 몽골을 장악할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게다가 장작림에게 하남독군 조척이 손을 내밀었다. 조척은 직환전쟁 때 나름대로 정주와 신양에 주둔한 안휘군을 공격하여 무장해제시키는 등의 활약을 했지만, 직예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공도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오패부와 조척은 서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오패부가 단기서 토벌을 외치며 호남성에서 북경을 향해 북상했을 때 조척은 오패부군을 실은 기차가 하남성에 정차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무기와 자금의 지원 역시 거부하였고 오패부가 70만원의 위로금을 요구했지만 겨우 20만원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오패부는 기회주의자에 불과한 조척을 불쾌하게 여겼다. 오패부는 풍옥상의 제16혼성여단을 신양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조척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또한 오패부는 조척과 사이가 나쁜 하남육군 제1사단장인 성신(成愼)을 부추겨 1921년 4월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반란은 손쉽게 진압되었지만 조척은 오패부와 직예파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조척의 접근은 중원 진출을 노리고 있던 장작림으로서는 그야말로 호기였다. 호북성에서는 내란에다 호남군이 침공하였다. 호북독군 왕점원은 직환전쟁 중 안휘파의 오광신을 체포하여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호북성에서 매우 가혹한 수탈을 거듭하여 호북인들의 반발을 샀다. 게다가 병사들의 봉급이 밀리면서 반란이 거듭되었고 도처에서 토비가 준동하는 등 호북성은 반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호북성 출신으로 과거 손문의 중국 동맹회 회원이었던 이서성(李書城)이 호남독군 조항척의 후원을 받아 호북자치운동과 왕점원 추방운동을 벌였다. 참고로,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의 창당대회가 열린 상해 망지로 108호가 바로 그의 별장이다. 사실 이서성 자신은 공산주의에 관심이 없었으나 그의 동생인 이한준(李漢俊)이 중국공산당 상해 대표였기 때문이었다. 이 날 코민테른 극동지부 대표 마린(Hendricus Maring)과 진독수, 장국도, 진공박 등 전국대표 13명이 모였다. 그 중에는 호남성 대표로 온 모택동도 있었다. 이서성은 동생을 위해 집을 빌려주었을 뿐이지만 이날의 작은 모임이 앞으로 중국의 역사를 얼마나 좌우하는 사건이 되는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서성은 호북자치군을 편성해 조항척의 호남군과 손을 잡고 왕점원을 공격하였다. 결국 1921년 8월 싸움에 패한 왕점원은 우한을 버리고 천진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오패부가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는 부하인 소요남(蕭耀南)을 호북성으로 보내어 이서성의 호북자치군과 호남군을 단숨에 격파하고 호북성을 되찾았다. 그 공으로 오패부는 양호순무사에, 소요남은 호북독군이 되었다. 같은 달, 사천군 제2군 군장이자 중경 군벌 류상(劉湘)이 사천군벌들의 추대를 받아 사천성 총사령에 올랐다. 사천성 대읍현 출신인 그는 성도의 사천육군속성학교를 졸업한 후 사천육군에 입대하였다. 원세개가 죽은 후 북양군벌의 후원을 받는 사천독군 류존후(劉存厚)와 反북양파인 사천군 제1군 군장 겸 중경진수사 웅극무(熊克武)가 서로를 공격하여 내란이 벌어졌다. 웅극무는 류존후를 이겼지만, 1920년 5월에는 운남독군 당계요가 사천성을 침공하여 웅극무를 격파했다. 웅극무는 섬서성으로 도주했다. 당계요가 성도를 점령하자 류상이 웅극무와 손을 잡아 1920년 8월 운남군을 격파하고 성도를 탈환하였다. 덕분에 류상은 사천성장 겸 중경진수사에 임명되어 사천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호남성과 호북성을 노렸으나 이번에는 웅극무와 대립하면서 사천성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1920년 7월에는 광동성장 진형명(陳炯明)이 손문의 광주군정부, 당계요 간의 삼자 동맹을 잡고 '광동 자치'를 외치며 양광 순열사이자 광서독군인 육영정을 공격하였다. 이른바 "월계전쟁(粵桂戰爭, 월은 광동성, 계는 광서성을 가리킴)"이었다. 11월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육영정군은 패배하여 광동성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육영정은 전열을 정비하고 전 광동독군 진병혼(陳炳焜)을 앞세워 재차 광동성으로 진격할 생각이었으나 진형명이 선수를 쳐서 1921년 6월 광서성을 침공하였다. 육영정은 광서변방군 제1로군 사령관에 처남인 담호명(譚浩明)을, 제2로군 사령관에 침홍영(沈鴻英)을 임명하여 반격에 나섰다. 또한 진병혼이 오주(梧州, 광서성과 광동성 경계에 있는 도시)에서 진형명의 군대을 막았다. 그러나 류진환(劉震寰)의 광서군 제1사단이 반란을 일으켜 진형명과 함께 진병혼을 협공하면서 진병혼은 대패를 당했다. 이로 인해 육영정의 일선 방어선이 무너지고 광동군이 광서성에 들어왔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침홍영 역시 배신하여 육영정의 하야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진형명은 이를 믿지 않고 방심하고 있던 침홍영군을 기습하여 격파했고 침홍영은 호남성으로 도망쳐 호남독군 조항척에게 의탁했다. 육영정은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 그는 남녕으로 물러나 계속 싸웠으나 9월 30일 중월국경의 용주(龍州)에서 참패하고 수비대장인 마제(馬濟)가 항복하였다. 결국 육영정은 하야를 선언하고 상해로 도망쳤다. 광서성은 광동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 그나마 전란을 겪지 않는 곳은 염석산이 통치하는 산서성이었다. 1912년 산서독군이 되어 산서성을 통치한 그는 중앙의 혼란을 이용해 산서성을 사실상 자신의 독립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일본과 손을 잡고 성도인 태원에 근대공업과 군수공장, 발전시설을 짓고 산업 진흥에 힘을 쏟았다. 한편으로, 잔혹한 독재자인 그는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반대세력들을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그의 속셈은 산서성을 기반으로 힘을 기른 다음, 기회를 엿보아 중앙으로 진출하겠다는 것이었다. 각지에 군벌들이 준동하는데도 북경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총통과 국무총리는 한낱 군벌들의 허수아비일 뿐이었고 실세인 조곤과 장작림은 자기 세력을 키우는데만 광분하였다. 중국은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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