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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7. 오패부와 조항척, 호북을 놓고 싸우다 //blog.naver.com/atena

조항척, 양호왕(兩湖王)을 꿈꾸다.

 

조항척(趙恒惕)은 호남성 형산(衡山) 출신이다. 일본 유학 시절 손문의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일본 육사 포병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광서신군의 훈련을 맡았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고작 서른의 나이에 광서신군의 협통(協統, 여단장)이었으니 꽤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셈이다.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그 또한 부대를 이끌고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좌익군 사령관을 맡아 무창에서 단기서의 북양군과 싸웠다.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육군 제8사단 제16 여단장을 거쳐, 고향인 호남성에 돌아와 호남군 제1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원세개가 칭제를 하면서 토원전쟁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했으나 북양군의 공격으로 패배하여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곧 원세개가 죽고 석방되어 호남성 제1사단장에 올랐다. 호남성의 유력한 군벌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단기서의 무력통일 정책으로 오패부가 이끄는 북양군의 공격을 받아 한때 호남성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북양군이 안휘파와 직예파로 갈라지고 오패부군이 호남성에서 철수하자 반격에 나섰다. 1920년 6월 손문파의 담연개(譚延闓)와 손을 잡고 안휘파인 호남독군 장경효(張敬堯)을 쫓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호남성의 권력을 놓고 담연개와 싸웠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시대의 방식이었다. 승자는 조항척이었다. 담연개는 광주로 쫓겨갔다.

호남독군이 된 조항척은 다음으로 호북성을 노렸다. 동정호(洞庭湖)를 사이에 두고 양호(兩湖)는 호남성과 호북성으로 나누어진다. 모택동과 류소기의 고향이기도 한 호남성은 장강 중류에 있으며 아열대의 기후라 연중 비가 많이 오고 농업이 발달하여 식량이 풍족하다. 성도인 장사는 월한철도(粤漢鐵道)를 통해 무한과 광주를 연결하며 상업이 발달하였다. 호남의 쌀은 철로와 강을 통해 호북으로 운반된다. 호북성은 무한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이며 중국에서 가장 근대공업이 발달된 지역 중 하나였다. 특히 무한 삼진의 하나인 한양은 양무운동 이래 주요 군수산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만약 양호를 차지한다면 군비와 무기도 자급자족할 수 있다. 더욱이 북양군벌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세력이 되어 천하를 노려볼 만하였다.

호북성은 호북독군 왕점원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조곤, 오패부와 함께 직예파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지만 탐욕스럽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왕점원에 대한 반발은 직예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호북성은 호북인의 손으로!" 호북자치를 외치는 민란과 병변(兵變)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반란군이 여러 현성을 장악하면서 호북성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조항척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항척에게 왕점원은 안중에도 없었다. 문제는 오패부였다. 그는 하남성 낙양에 대군을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었다. 조항척이 북상하면 그가 군대를 호북성으로 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오패부의 등 뒤에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장작림이 있다. 장작림이 있는 이상, 오패부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조항척은 그렇게 계산했다.

 

조항척은 사천독군 류상에게 추파를 던졌다. 류상은 중경을 중심으로 사천성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남쪽에서 호남군이, 서쪽에서 사천군이 양쪽에서 호북성을 공략하여 반으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류상 역시 야심을 품고 있다. 호북 출병은 바로 류상이 바라는 바였다. 그는 조항척의 제안을 수락했다. 1921년 7월 20일. 조항척은 "호북의 자치운동을 지원한다"라는 명목으로 호남군의 출동을 결정했다. 병력은 약 8만명. 호남군은 장경효의 안휘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얻은 막대한 양의 무기로 무장한데다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 손전방의 선전과 왕점원의 하야

 

"호남군 북상!" 사면초가에 몰려있던 왕점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랴부랴 병력을 출동시키면서도 막상 자신은 무한에서 여차하면 도주할 준비를 했다. 왕점원을 대신해 호북군 최일선의 지휘를 맡은 이는 직예군 제2사단장 손전방(孫傳芳)이었다. 왕점원과 같은 산동성 출신인 손전방은 조항척과는 일본 육사 동기(6기생)이기도 했다. 몇년 뒤에는 오패부, 장작림, 풍옥상과 함께 대군벌의 반열에 서는 그는 왕점원의 호남군에서도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아무리 상황이 불리해도 중앙군으로서의 자존심으로 호북성을 사수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뒤에는 오패부가 있다. 오패부가 호북성을 내줄 리가 없다. 손전방은 약 1만명의 병력으로 방어전의 준비를 갖추었다.

7월 26일. 양호의 경계에 호남군의 선두부대가 도착했다. 손전방이 사자를 보내어 화의를 제안하자 조항척은 코웃음을 쳤다. "잠꼬대같은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호북의 자치를 도우러 왔다. 너희 손으로 왕점원을 타도하던지, 아니면 도망치던지 두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조항척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왕점원의 군대 따위는 한방에 무너뜨릴 자신이 있었다. 오패부가 움직이기 전에 속전속결로 호북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무한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28일. 조항척의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른바 "상악(湘鄂, 상은 호남성, 악은 호북성을 가리킴)전쟁"의 시작이었다.

 

호남과 호북을 연결하는 월한철도를 따라 호남군이 공격에 나섰다. 공격만 하면 호북군 따위는 금새 무너진다, 라고 믿고 돌격에 나선 호남군은 곧 맹렬한 포격에 가로막혔다. 일본 육사에서 근대전술을 배운 손전방은 철도 주변에 수많은 토치카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고지에는 포병을 배치하였다. 빗발치듯 날라오는 포탄과 기관총탄 앞에 호남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나갔다. 토치카들은 교묘하게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어렵게 하나를 점령해도 치열한 탄막 사격을 받아 격퇴되어 도로 빼앗기기 일쑤였다. "호북군에 이런 자가 있었다니." 조항척으로서는 완전히 계산 착오였다. 공격하는 호남군도, 방어하는 호북군도 일진일퇴의 연속이었다. 이런 치열한 전투는 직환전쟁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호남군의 사상자는 1주일만에 2천여명이 넘었다. 손전방은 고작 ​1만명으로 8만명을 막아내고 있었다.

한편, 왕점원의 구원 요청을 받은 조곤은 오패부에게 출동을 명령했다. "조항척이 화의를 요청하면 받아들여라.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 오패부는 소요남의 제25사단과 근운악(총리 근운붕의 동생)의 제8혼성여단을 호북성으로 급파했다. 7월 31일, 직예군의 선두부대가 무한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양호의 경계에서 손전방군과 조항척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손전방군은 원군이 온다는 정보에 사기가 올랐다. 하지만 오패부는 손전방에게 진지를 지키고 공격에 나서지 말라고 지시했다. 오패부는 왕점원을 위해 병력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었다. 같은 직예파라도 어차피 경쟁자일 뿐이다. 오패부 입장에서 왕점원은 원조할 상대가 아니라 몰락시켜야 할 상대였다. 그게 군벌의 세계이다.

원군이 왔다고 기뻐했던 왕점원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오패부는 자신을 도우려 온 것이 아니라 호북성을 장악하려고 온 것이었다. 무한은 소요남의 군대로 넘쳐났다. 왕점원이 있을 곳은 없었다. 8월 6일 왕점원은 하야를 선언하고 사재를 실고 천진으로 도망쳤다. 근운붕은 오패부를 양호 순열사에, 소요남을 호북독군에 임명했다. 손전방은 장강상류총사령에 임명되었다. 일년 전 장작림에게 "일개 사단장"이라고 무시당했던 오패부는 이제 조곤, 장작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 오패부, 조항척을 격파하다

오패부가 무한에 온 것은 8월 12일이었다. 상황은 여전히 녹녹하지 않았다. 조항척의 호남군은 손전방군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는데다, 서쪽에서는 류상의 사천군 2개 사단이 호북성을 침공하였다. 만약 호북성의 싸움이 지지부진하여 수렁에 빠진다면 장작림이 움직인다. 직예군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패망할 것은 불보듯 뻔했다. 조곤이 조항척과 애써 싸우지 말고 화의하라고 지시한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소요남은 오패부의 명령에 따라 조항척에게 화의를 제안했다. 조항척은 군대를 철수시키는 댓가로 오패부가 양호 순열사에서 물러날 것, 호북성의 자치 인정, 500만원의 군비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는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오패부는 수락했다. 조항척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패부의 책략이었다. 오패부는 증원부대가 모두 도착할 때까지 지연전술을 쓴 것이었다. 유리하게 화의했다고 조항척이 방심한 사이, 최정예 부대인 제3사단에다 제24사단, 제25사단 등 직예군이 최전선에 속속 배치되었다. 병력은 약 10만명에 달했다. 압도적인 우세를 확보하자 오패부는 태도를 바꾸었다. "호남군은 당장 철수하고 병력을 멋대로 출동시킨 제2사단장을 처벌하라!" 8월 19일, 직예군은 호남군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오패부는 호남군의 정면을 공격하는 한편, 배후로 우회하여 보급선을 끊었다.

 

호남군 또한 실전으로 단련된 부대였다. 직예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받으면서도 간단히 무너지지 않고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예비 병력이 부족한데다 보급선이 차단되어 무기와 탄약이 떨어지면서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8월 26일, 조항척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오패부는 7척의 포함에 장복래의 제24사단 제48여단 병력을 실어 악주(岳州, 양호의 경계에 있는 항구도시)로 보냈다. "육군은 적의 후방에 상륙하라. 해군은 악주 근방의 적을 철저하게 포격하라. 호남군을 포위 섬멸시켜라!" 28일 새벽, 호남군의 사령부가 있는 악주 시가지를 향해 7척의 포함이 포격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기습이었다. 포함들은 아무런 반격도 받지 않고 유유히 악주의 강상을 떠다니며 포탄을 날렸다. 또한 직예군 제48 여단 병사들이 상륙하여 악주 성내로 돌격했다. 조항척은 감히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채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도주했다. 악주를 점령하자 장복래는 제24사단에게 방향을 돌려 북상하라고 명령했다. 호남군은 양면으로 공격을 받자 완전히 붕괴되었다.

조항척은 장사로 돌아와 오패부에게 화의을 구걸했다. 오패부는 여세를 몰아 호남성을 침공할 생각이 없었다. 자칫 궁지에 몰린 조항척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 수렁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항척의 화의 요청을 조건없이 받아들였다. 상악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오패부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9월 2일 류상의 사천군이 호북성 서쪽의 의창으로 몰려왔다. 의창은 호북성의 곡창지대이자 중경과 무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오패부는 즉각 방향을 바꾸어 사천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후퇴하는 사천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오패부는 호북성에서 한낱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필요 이상의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진짜 적은 다름아닌 장작림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