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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9. 용호상박, 제1차 봉직전쟁/blog.naver.com/atena

* 조가의 것은 풀 한포기 다치게 하지 마라

 

장작림은 드디어 이빨을 드러냈다. 봉군의 대부대를 실은 열차가 경봉철도를 타고 산해관을 넘어 천진을 향해 속속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조곤은 여전히 우물쭈물하면서 무력 충돌을 피할 생각으로 경봉철도와 천진 주변에 주둔한 직예군을 모두 보정으로 철수시켰다. 천진에 있던 직예성장 조예는 영국 조계로 도망쳤다. 4월 13일 봉군은 천진에 입성했다.

천진을 장악한 봉군은 둘로 갈라져 일부 병력은 진포철도(천진~남경을 연결하는 철도)를 따라 창주(滄州)를 거쳐 산동성으로 남하하여 덕주(德州)를 점령했다. 덕주에는 조곤의 일곱번째 동생인 조영(曹鍈)의 제26사단이 있었지만 조영은 도망쳤고 대리 사단장인 장국용(張國溶)은 군대를 이끌고 보정으로 후퇴했다. 남쪽에서는 안휘독군 장문생이 장작림에 호응하여 반 직예의 깃발을 올렸다. 장작림은 "원래 봉계와 직계는 한가족이다. 적은 오패부 하나다. 조가(曹家)의 것은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건드리지 마라."라고 지시했다. 조곤과 오패부를 이간질하여 직예파를 분열시키려는 술책이었다.

 

그래도 조곤은 장작림과 타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총통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지만 출세욕만 가득찼을 뿐 결단력이라고는 없었다. 게다가 사돈인 장작림이 정말로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그는 단기서나 왕점원처럼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청말의 구식 관료일 뿐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장작림은 이런 조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전보를 보냈다.

"나 장작림은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한다. 여기에 장애가 되는 자를 내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물론 장애란 오패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또한 장작림은 각성의 대표가 참여하는 전국 통일회의의 개최라는 것을 제안했다. 평화적으로 통일하되, 통일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이 가차없이 무력으로 처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나라를 생각할 뿐 사심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속이 뻔히 보이는 소리였다.

오패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지껏 나는 중앙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작림은 멋대로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양사이는 장작림의 비호만 믿고 외국에 아첨하고 나라에 해를 끼쳤다. 나는 3천만 직예인과 4억 인민을 대신하여 처벌하겠다." 양쪽의 선전포고인 셈이었다.

 

장작림과 오패부가 사생결단으로 상대를 매도하자 조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4월 20일, 그는 낙양의 오패부 사령부로 전문을 보냈다. "낙양의 오자옥 동생에게"라는 제목이었다. "그대가 나이고 내가 그대이다. 친척이 중요하다고 해서 어찌 내 몸보다 더 중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한달 전 장작림이 조예더러 "조곤은 친척이 중요한가, 부하가 중요한가?"라고 물은 것에 대한 답인 셈이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오패부는 그 말에 크게 감동했다. 조곤은 오패부에게 장작림 토벌에 대한 모든 것을 일임하였다.

이미 제3사단을 비롯한 주력부대를 보정으로 출동시킨 오패부는 풍옥상의 제11사단이 섬서성에서 낙양으로 들어오자 4월 26일 사령부를 낙양에서 보정으로 옮겼다. 그동안 쉽사리 낙양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하남성장 조척 때문이었다. 그는 장작림과 내통하고 있었다. 오패부가 낙양을 비우면 당장이라도 반란을 일으켜 직예군의 후방을 공격할 판이었다. 따라서 풍옥상을 낙양에 주둔시켜 조척을 감시하게 했다. 이로 인해 조척은 움직일 수 없었다.

 

반직예 포위망의 구축을 위해 온갖 술책을 부려온 장작림이지만 일은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안휘파 독군인 절강의 노영상은 장작림이 깃발을 올리면 호응하기로 약속했지만 되려 주변의 직예군벌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계림에 사령부를 두고 당장이라도 북벌을 시작할 것처럼 하던 손문도 움직이지 못했다. 광동군벌 진형명이 손문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북벌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오패부의 사주가 있었다. 장작림이 손문과 손을 잡자 오패부도 재빨리 진형명과 손을 잡은 것이다. 호남성의 조항척 역시 손문의 북벌군이 자신의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다. 진형명과 조항척 두사람 모두 신해혁명 이전부터 중국 동맹회 간부로 손문과는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었음에도 막상 국가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군벌은 어쨌거나 군벌인 것이다. 

게다가 3월 21일 손문의 측근인 광동군 참모장 겸 제2사단장 등갱(鄧鏗)이 광주역에서 총에 맞아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사 결과 암살의 배후에는 진형명이 있었다. 손문은 일단 북벌을 취소하고 병력을 계림에서 오주(梧州)로 회군시켰다. 진형명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어 북벌군의 참가와 군비 5백만원을 조달할 것을 명령했지만 거부당했다. 격분한 손문은 진형명을 광동성장과 광동군 사령관 직에서 해임하되, 진형명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으려고 육군부장의 직은 남겨둔 채 5월 4일 다시 북벌을 명령했다. 35살의 젊은 참모였던 장개석은 지나치게 조급해 하는 손문에게 "지금은 북벌이 아니라 후방을 단단히 해야 할 때입니다."라며 진형명이 언제 뒷통수를 칠 지 모른다며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하지만 손문이 "사람을 한번 의심하면 끝이 없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화가 난 나머지 직을 던지고 자신의 고향인 절강성 봉화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한달도 안되어 장개석의 말대로 진형명은 반란을 일으켰다. 장작림이 구상한 반직예 삼각동맹은 처음부터 삐걱된 것이다.

* 양군의 혈전

장작림은 천진 남쪽의 군량성에 사령부를 두었다. 총사령은 장작림, 부사령은 손열신(孫烈臣), 참모장은 "작은 제갈량"이라 불리는 일본 육사 출신의 양우정(楊宇霆)이었다. 장작림은 전군을 둘로 나누어 장작상이 지휘하는 동로군 5개 혼성여단과 2개 기병여단은 진포철도를 따라 천진 남쪽 70km 떨어진 전략적 요충지인 마창(馬厰)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장경혜가 지휘하는 서로군 3개 사단, 4개 혼성여단은 북경 남동쪽의 낭방(廊坊)으로 진출하여 북경을 위협하였다.

 

한편, 오패부는 보정 남쪽의 탁주(涿州)에 사령부를 두었다. 그도 부대를 둘로 나누어, 제23사단장 왕승빈을 서로군 총사령으로 하고 최정예인 제3사단 일부에다 제23사단, 제24사단, 제1혼성여단, 제15혼성여단을 북경 남쪽의 유리하(琉璃河)와 고안(固安)에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동로군은 장국용을 총사령으로 제26사단과 3개 혼성여단을 마창에 배치하였다. 제3사단은 예비대로서 보정에 남겨 두었다. 또한 풍옥상을 직노예 순열부사로 임명하여 병참과 후방의 방비를 맡겼다. 군사 역량에서 오패부와도 맞먹는 풍옥상은 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오패부는 모든 전력을 전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양군 합해 20만명이 넘는 대병력이 마창-고안-장신점에 이르는 약 이백여km에 걸쳐 직예 평원에서 대치하였다.

병력과 무기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봉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봉군의 대부분은 마적떼를 군대로 바꾼 것에 불과했기에 규율이 형편없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특히 장작상, 장경혜 등 주요 지휘관들은 장작림의 마적 시절 동료들로 매우 무능한 자들이었다. 다만, 장학량의 제3혼성여단과 곽송령의 제8혼성여단은 일본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받은 봉군 최정예 부대였으며 곽송령(郭松齡)은 북경 육군대학 출신으로 봉군 지휘관 중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하였다. 

직군은 숫적으로 다소 열세했고 장비도 열악했지만 규율과 실전 경험에서 봉군을 압도했다. 직환전쟁에서 안휘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명장 오패부가 지휘하는 북양군 최강의 직군을 상대로 과연 봉군이 이길 수 있는가. 장작림의 최측근인 장작상과 장경혜조차 "봉군의 실력으로는 북경을 장악하기는 역부족이다"라며 주화론을 주장하는 판이었다. 장경혜는 마지막까지도 북경과 보정을 오가면서 조곤을 상대로 화해를 주선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전쟁으로 치닫자 마지못해 북경을 벗어나 천진의 전선사령부로 와서 서로군의 지휘를 맡았다. 이러니 제대로 지휘가 될 리 없었다.

4월 26일 밤. 진포철도 방면에서 첫 총성이 울렸다. 봉군 제27사단과 제29사단, 1개 기병여단이 마창 교외의 직군 최일선 진지까지 진출하면서 팽수신이 지휘하는 직예군 제26사단​과 산발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제1차 직봉전쟁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장학량의 제3혼성여단과 허란주의 기병여단을 중심으로 봉군의 대부대가 고안을 공격했다. 방어하는 쪽은 직군 제3사단 1개 여단과 장복래의 제24사단이었다. 봉군의 공격을 받은 직예군은 금새 후퇴하기 시작했다. 직예군이 도주하자 신이 난 봉군이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함정이었다. 직군이 깔아놓은 지뢰밭에 걸려 도처에서 터지는 지뢰로 인해 봉군은 순식간에 수백여명을 잃었다. 장작상이 지휘하는 동로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퇴하는 직군을 추격하던 기병들이 지뢰밭으로 들어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여기다 직군의 반격을 받자 규율이 형편없는 봉군의 선두부대는 단숨에 무너져 멋대로 도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군은 전 전선에 걸쳐 직예군을 격파하고 4월 29일 고안과 대성(大城), 장신점(長辛店)을 점령하였다. 손실은 봉군이 컸지만 밀리는 쪽은 직군이었다. 봉군은 우세한 포병화력을 앞세워 직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4월 28일 하루동안 봉군이 쏘아댄 포탄만도 9만발이 넘었다. 북경과 보정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장신점이 함락되면서 북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개전 삼일만에 승리는 간단하게 장작림에게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전황은 불리했지만 오패부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정찰병들을 풀어 피난민 사이에서 봉군의 병력과 이동 상황을 시시각각 수집하였다. 적에 대한 정보 수집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바로 이것이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작전을 참관했던 오패부의 전쟁 방식이었다. 그가 보기에 장경혜가 지휘하는 서로군이 봉천군의 주력부대였다. 장경혜를 격파하면 나머지 봉군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었다.

30일 오전, 직군은 봉군의 전선을 몰래 파고 들어서 장경혜의 사령부 코앞까지 진출하였다. 약 70문의 야포를 배치한 후 맹렬한 포격과 함께 돌격했다. 기습을 당한 봉군은 장경혜가 직접 나서서 150문의 야포로 응사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의 격렬한 포격과 몇차례에 걸친 돌격으로 양군의 손실은 각각 천여명이 넘었다. 하지만 오패부가 총공격 명령을 내리자 처절한 백병전 끝에 봉군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이로 인해 서로군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전선의 급보를 받은 장작림은 급히 2개 여단을 급파하였다. 이들은 전속력으로 직군의 후방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오패부는 봉군의 증원부대가 온다는 보고를 받자 신속하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또한  추분(鄒芬)이 지휘하는 제16사단이 장경혜의 제1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장신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원래 청나라 시절 자금성을 지키는 금군을 풍국장이 서구식으로 개편한 부대였다. 따라서 오합지졸에다 전투력도 형편없는데다 장작림을 위해 직군과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추분이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자 병사들은 당장 반란을 일으켜 직군에게 항복한 후 제1사단을 공격하는 등 내분에 빠졌다.

 

5월 1일 오패부는 장신점 탈환을 명령했다. 공격병력은 약 2만5천명. 봉군의 진지에 포탄이 쉴새 없이 떨어졌다. 여기다 제16사단의 반란까지 겹치면서 장경혜의 서로군은 장신점을 버리고 노구교까지 후퇴했다. 전세가 역전되자 장작림은 자신의 직계부대인 제27사단을 장신점으로 급파하여 반격에 나섰다. 양군은 장신점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봉군은 장신점 탈환에 실패하고 전선은 일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포병화력에서 봉군이 두배 이상 우세했기에 직군의 공격은 매번 많은 희생을 내었다. 오패부는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연대, 대대 규모의 공격을 중단하라. 대신 중대, 소대 규모로 병력을 산개하라. 적이 포격하면 숲으로 숨어라. 대신 숲에 머물러 있지 말고 포격이 끝나면 다시 공격하라." 우군의 손실을 줄이고 봉군의 탄약을 소모시키려는 속셈이었다.

한편, 지지부진한 장작상의 동로군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에 배치된 장학량의 제3혼성여단과 곽송령의 제8혼성여단이 급파되었다. 여기에 이경림(李景林)의 제7혼성여단이 가세하여 봉군 최강부대인 3개 여단이 동로군의 선봉에 서서 직군 최강 부대인 제3사단과 치열한 혼전을 벌였다. 오패부는 이 틈을 타서 고안을 탈환하였다. 마적 출신의 봉군들은 직군의 공격을 받자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단숨에 패주하거나 투항했다.

* 장작림 패배하다

5월 3일 밤, 북경 교외의 풍태(豊台)와 남원(南院) 일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직군은 어둠을 이용해 병력을 소부대로 산개하여 봉군의 진지를 기습하였다. 적군이 여기저기서 나타나자 봉군의 포병은 마구잡이로 포격을 했다. 이를 관전하던 외국 무관들이 "저렇게 포탄​을 낭비하는 꼴은 처음 본다."라고 비웃을 정도였다. 포탄이 바닥난데다 봉군의 배후로 우회한 직군 2개 여단이 나타나자 혼비백산한 장경혜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추격에 나선 직군은 봉군이 버리고 간 식량과 무기, 탄약을 잔뜩 실은 보급 열차를 차지하였다. 게다가 노획한 야포도 수십문이었다. 장경혜는 열차를 타고 동쪽으로 정신없이 도주했다. 서로군의 붕괴는 봉군 전체의 붕괴였다. 장작상의 동로군 역시 직군의 총공격을 받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장학량과 곽송령 두개 여단만이 적진 한가운데를 강행돌파하여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였지만 병력의 과반수를 잃었다. 5월 4일 장작림은 전군에 총 퇴각 명령을 내렸다. 늘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서 처음 당해보는 쓰라린 패배였다.

 

장작림은 최전선에 나가있는 장남 장학량을 기다릴 틈도 없이 정신없이 산해관으로 도망쳤다. 천진에서 봉천으로 가는 도로는 패주하는 봉군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오패부는 진황도에 4,500톤급의 중국 최강 군함인 해기(海圻)를 비롯한 직군 함대를 배치하여 포격을 가했다. 포탄은 장작림이 탄 차에도 날라왔지만 구사일생으로 피할 수 있었다. 5월 5일 봉군 총사령부가 있는 군량성이 무혈 함락되었다. 그 과정에서 봉군 2개 여단이 총 한발 쏘지 않고 백기를 들었다.  당초 산해관을 넘었던 봉군의 부대는 12만명이 넘었지만, 되돌아온 병력은 2만명도 채 되지 못했다. 4월 26일부터 5월 5일까지 십여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봉군은 3만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2만5천명이 투항했으며 5만명 이상이 싸우지 않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이들의 태반은 다시 마적이 되었다.

 

왕승빈의 제 23사단이 봉군을 추격하여 산해관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그 이상 북상하지는 않았다. 만주는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일본이 "직군이 산해관을 돌파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겠다"라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대총통 서세창 역시 "봉군은 산해관 이북으로 철퇴하고 직군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라"라고 명령하였다. 장작림과 사이가 좋은 서세창은 오패부가 장작림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이것으로 제1차 직봉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오패부의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장작림은 단기서처럼 몰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정도로 무릎을 꿇을 위인이 아니었다. 비록 중앙에서의 세력은 잃었지만 그의 세력은 여전히 견고했다. 장작림은 패배를 경험삼아 재기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하남성장 조척과 안휘독군 장문생은 장작림만큼 운이 없었다. 봉천군이 완전히 붕괴된 날 하남성 정주에서 조척이 반직예의 깃발을 올렸다. 그는 어리석게도 "봉천군 대승리" "오패부 전사"라는 허위 정보를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풍옥상이 재빨리 반격을 하자 대패하여 봉천으로 도주하여 장작림의 휘하에 들어갔다. 장문생 역시 직군 지휘관 마연갑(馬聯甲)의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났다. 오패부는 광대한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그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