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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11. 손문, 소련과 손을 잡다 /blog.naver.com/atena

* 진형명과 손문


흔히 중국 역사서에는 진형명(陳炯明)에 대해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나머지 비열하게 쿠테타로 손문을 위기에 빠뜨려 중국의 역사를 퇴보시키려고 했던 반(反)혁명 봉건 군벌로만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여느 군벌들처럼 그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광동성 남쪽 혜주(恵州) 출신의 진형명은 1878년생이니 손문과는 12살 차이이다. 스무살에 과거 초시에 합격하여 수재(秀才, 생원)가 되었고 자희신정(의화단의 난 이후 서태후의 주도로 실시된 개혁 운동)에 따라 1909년 각 성에 자의국(諮議局)이라는 지방의회가 설립되자 광동성 초대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또한 멸만흥한에 동조하고 있던 그는 상해에서 손문을 만나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황흥, 호한민, 요중개, 진기미 등과 함께 손문의 최측근이자 동맹회의 지도부의 한사람으로서 활동하였다. 

중국 최남단에 있는 광주는 광동성의 성도로서 고대 한나라 때부터 외국과의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연전연패하던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영국군이 패배한 곳이 광주였다. 영국군의 약탈과 만행에 참다 못한 광주 사람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광주 교외의 삼원리(三元里)에서 영국군 2천여명이 2만명이 넘는 농민들에게 포위당하였다. 광동 정부가 백성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지 않았다면 이들은 몰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후 영국에게 굴복한 청조는 홍콩을 할양하고 광주, 상해 등 5개 도시를 개항하였다. 광주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서구 문물이 유입된 도시이자 반청 반외세 혁명 사상이 가장 강한 곳이기도 했다.


1911년 4월 27일 광주에서 진형명은 황흥과 함께 160여명의 동맹회원을 이끌고 반청 봉기를 일으켰으나(황화강 사건) 실패하여 홍콩으로 도주하였다.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이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뒤에도 그는 혜주와 광주를 기반으로 손문의 혁명전쟁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광동성의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키고 전쟁을 명목으로 군비를 가혹하게 뜯어내지 못하도록 군비를 재정의 30% 이내로 제한시켜 광동성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진형명의 교육부장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이자 《신청년》의 편집장이었던 진독수(陳獨秀)였다. 많은 마르크스 신봉자들이 광주를 거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런 모습은 당대의 군벌로서는 드문 것이었다. 손문이 원세개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소수의 측근을 거느리고 광주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에는 진형명의 도움이 컸다. 만약 진형명이 원세개의 압력에 굴복하여 손문에게 등을 돌렸다면 손문은 갈 곳조차 없었을 것이다. 

북경에서 단기서의 안휘파와 조곤, 오패부의 직예파가 싸우는 사이, 손문은 진형명, 허숭지, 이열균, 등갱 등 광동군벌들에게 명령하여 양광순열사 육영정을 공격하게 하였다. 육영정은 남방군벌들 중에서 최강의 세력이었다. 하지만 손문군과 운남군벌 당계요의 연합공격 앞에서 대참패를 당하여 하루아침에 몰락하였다. 이로서 손문은 광동성과 광서성 두개 성의 태반을 차지하여 북양군벌에게 맞설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듯, 혁명동지로서 두 사람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십여년 이상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된 이유는 통일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손문은 중앙집권화된 중국을 원했다. 이를 위해서 무력으로 남쪽에서 북상하여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북양군벌들을 쓰러뜨리고 북경을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던 진형명의 입장에서 손문의 주장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일 뿐이었다. 원세개가 남긴 북양군벌의 군사력은 강대했으며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외세의 후원을 받았다. 병력도 10배 이상 우세한데다 장비와 화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슨 수로 쓰러뜨린단 말인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중국인이 죽을 것이며 외세의 개입과 침탈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는 청말 태평천국의 혼란을 다시 재현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손문의 '무력통일론'에 대해 ​진형명은 '연성자치론(聯省自治論)'을 내세웠다. 남방의 힘으로 북경을 지배하고 있는 북양군벌을 이길 수는 없다. 북양군벌이 통치하는 중앙정부의 권위는 인정하되, 지방은 지방 사람이 통치하자는 일종의 연방제 통일론이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지방의 힘이 강하고 중앙은 지방의 권력을 인정하였다. 신해혁명 역시 무창봉기 이후 각 성이 스스로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청조를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민주'와 '공화'의 원칙에서 무력이나 혁명이 아닌 현실의 정치 질서를 인정하면서 타협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문에게 진형명의 주장은 단지 양광의 통치에 만족하여 내전에 빠진 중국의 현실을 외면하겠다는 군벌식 사고 이상 아니었다. 이미 오호십육국 시대로 돌아가 군벌들이 여기저기 할거하는 상황에서 그런 이름 뿐인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중앙과 지방이 대립하여 분쟁이 일어난다면 지방은 독립을 선포할 것이며 다시 내란이 시작될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현실을 모른다며 비난하였다. 진형명은 손문을 공공연히 '허풍선이'라고 비웃었다. 

만약 손문에게 지도자로서 강력한 리더쉽과 권위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동맹회를 조직하고 중국 지식인들에게 반청 혁명 사상을 퍼뜨려 엉겁결에 '청조를 무너뜨린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능력은 없었다. 중화민국이 처음 건국되었을 때 원세개에게 초대 대총통 자리를 양보한 손문은 전국의 철도 건설을 담당하는 자리를 맡았다. 그가 한 일은 중국 대륙이 그려진 커다란 지도에다 연필로 도시를 연결하는 선을 여기저기 죽죽 긋고 지우기를 반복한 것이 전부였다. 지형적으로 철도가 지나갈 수 있는 곳인지, 비용과 기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의 외국인 고문들조차 손문의 무지함에 고개를 저었다.


오직 내전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중국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남에게 시원스레 넘겼다는 점에서 그가 분명 순수한 열정을 가진 혁명가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적어도 신해혁명이 일어난 시점에서는) 바로 그런 모습이 손문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은 이유이며 오직 자신만이 그 자리에 걸맞다고 여기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장개석이나 모택동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실망시키는 것 투성이었다. 검소와 절제보다는 사치와 향락을 즐겼고 혁명과 도주의 순간에도 그의 주변에는 많은 젊은 여자들이 있었다. 1915년 원세개에게 패배하여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손문은 상해의 유명한 부호이자 친구였던 송가수(宋嘉樹)의 둘째딸 송경령에게 청혼하였다. 두 사람이 27살이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도, 자신에게 오랜 조강지처인 노모정(盧慕貞)과 오랜 도피생활을 묵묵히 뒷바라지하였던 첩 진수번(陳粹芬)이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전족을 한 봉건 여성이었던 두 사람은 손문이 하루 아침에 이혼을 요구하자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당대 중국인들의 윤리에 그다지 어긋나지는 않았다고 해도 개화된 시대를 외치는 혁명가로서 존경받을 일은 아니었다. 손문의 두번째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손문은 지도자라기보다 사상가이자 변설가였다. 하와이에서 유학하여 의학 박사를 취득했음에도 그의 본질은 유교 경전으로 공부하고 낡은 봉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식 지식인이었다. 그가 제창한 삼민주의(민권, 민족, 민생)는 서구의 민주주의를 겉으로만 흉내낸 것일 뿐, 내용은 모순 투성이었다. 게다가 중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러했듯, 손문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식으로 변해갔다. 소수의 지식인이 다수의 우매한 민중을 끌고 가야 한다는 전통적인 유교식 선민사상을 고수하였던 그는 1919년 북경에서 5.4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지지하는 대신 "어린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간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라고 깎아내렸다.


그는 단기서, 장작림과 손을 잡고 반직예동맹을 맺어 1921년 말부터 계림에 대본영을 두고 본격적으로 북벌전쟁을 준비하였다. 손문은 두 사람이 공화주의를 존중하고 반외세적이며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형명의 눈에는 허황되기 짝이 없었다. 군벌들의 합종연횡은 보편적인 모습이었지만, 그것도 실력이 뒤따를 때의 얘기이다. 손문이 구성한 광주 정부는 오직 진형명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의 후원이 있기에 유지될 수 있는 껍데기였다. 그는 광주 정부의 명목상 우두머리일뿐, 그가 조직한 군대는 여러 군벌들의 힘을 빌린 것에 불과하였고 혁명사상은 커녕 규율도 없고 장비도 부족한 오합지졸의 무리였다. 실질적인 손문의 세력은 소수의 측근과 약간의 군함이 전부였다. 무슨 수로 강대한 직예파를 쓰러뜨릴 것이며 야심 넘치는 군벌들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인가. 레닌은 손문을 "도무지 비할데 없을 만큼 순진한 인물"이라고 비웃었지만, 실상 이런 평가는 손문의 정적이나 측근들조차 공통된 생각이었다. 주변의 측근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상해와 광주의 화려한 사교장에 모여서 공허한 구호만 외치며 헛되이 시간만 보낼 뿐,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을 능력도, 자금을 마련하고 군대를 조직할 능력도 없었다. ​​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다 군사적 재능도 없으면서 군벌을 모아 군벌을 정벌하겠다며 허세만 부리는 모습이 진형명에게는 가소로았다. 진형명은 '무력통일'을 외쳤던 단기서나 장작림은 원세개와 다를 바 없는 늑대들이며 도리여 직예파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직예파는 '무력통일 반대'와 '남북화평'을 내세우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진심이건, 타협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그에게 손문의 북벌전쟁이란 통일은 커녕, 남북화평을 가로막는 일이었다.



손문이 듣지 않자 진형명은 홍콩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광동군 참모장 등갱을 광주역에서 암살하였다. 일종의 경고였다. 등갱은 군사 역량을 갖춘 간부가 매우 부족했던 손문의 혁명군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광동군을 철저하게 훈련시켰으며 설악, 채정개, 장발규, 진제당, 이제심 등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뒷날 장개석의 북벌군의 핵심 멤버들이 되었다. 그 중에는 공산주의자로서 나중에 신4군 군장이 되는 엽정(葉挺)도 있었다. 등갱은 손문의 측근이면서도 진형명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손문에 대한 증오심으로 눈이 먼 진형명에게는 이미 그런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격분한 손문은 4월 21일 진형명을 광동성장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외교부장 오정방(伍廷芳)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북벌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미 북방에서는 장작림이 오패부에게 패배한 뒤였지만 그 사실 역시 손문을 가로막지 못했다.

​뜻밖에도 손문이 뜻을 꺾기는 커녕, 초강경으로 맞서자 진형명은 자신의 복직과 북벌군 총사령에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물론 손문은 거부하였다. 1922년 초부터 광주 시내에는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였다. 진형명이 병력을 동원하여 광주를 위협하자 손문은 급히 광주로 돌아와 "진형명군은 즉각 광주 30리 밖으로 철수하라"라고 명령하였지만 진형명은 웃어넘겼다. 장개석은 손문을 직접 면담하여 "지금은 북벌이 아니라 진형명을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손문은 오랜 친구에게 차마 총부리를 돌릴 수 없었다. 당시로는 그다지 대단한 위치도 아니었던 장개석은 화가 난 나머지 직을 던져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선수를 친 쪽은 진형명이었다. 1922년 6월 15일 그는 심복인 엽거(葉擧)와 홍조린(洪兆麟)에게 손문의 총통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손문의 목에 20만원의 현상금을 건다!" 이로서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광주를 공격한 ​진형명군은 4천명이 넘는데다 중포까지 보유한 반면, 병력의 대부분이 강서성 방면에 투입된 손문의 병력은 1천명도 되지 않은데다 무기 또한 빈약하였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광주 정부의 많은 간부들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손문의 측근으로 광주정부 재정청장을 맡고 있던 요중개(廖仲愷)도 붙잡혀 감금되었다. 그는 몇번이나 살해의 위협을 받았으나 운 좋게 탈출하여 손문과 합류하였다. 하지만 진형명은 손문을 결국 놓쳤다. 장개석은 영풍함을 지휘하여 광주를 가로지르는 주강(珠江)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문을 구출하였다. 다른 군함들도 속속 가담하면서 모두 7척으로 늘어났다. 손문은 반란군이 점령한 총통부와 광주 시내를 향해 포격하라고 지시하였다.

 

'6.16사변' 직후 영풍함에서의 손문 부부. 영풍함은 1910년 청나라가 해군재건을 위해 일본에 의뢰하여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총배수량 780톤에 승무원 140명, 최대 속도 13.5노트의 연안급 포함으로 102mm 포 1문과 47mm 부포 4문, 37mm 부포 2문 등으로 무장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손문의 호를 따서 '중산함(中山艦)'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개석은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국민당에서 공산당원들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중일전쟁 중 우한 전투에서 일본군의 폭격을 받아 파란만장한 역사를 뒤로 한 채 격침당하였다.

​손문측 군함들은 함포와 기관총으로 광주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지만 진형명군의 반격을 받아 결국 광주를 버리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손문은 북벌군에게 즉각 회군하여 진형명을 토벌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대본영이 있는 소관으로 가서 직접 지휘봉을 잡는 대신 영국령 홍콩에 갔다. 그곳에서 러시아 배를 타고 상해로 도망쳤다. 북벌군은 급히 병력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진형명이 소관을 점령하면서 퇴로가 차단되었다. 북쪽에서는 장작림을 무찌른 오패부가 직예군 최강부대인 제3사단을 이끌고 무한으로 왔다. 오패부는 진형명을 광동독군으로 임명하고 500만원의 군비를 지급하였다. 또한 오패부의 심복인 하남독군 장복래가 강서성으로 출동하여 채성훈의 강서군과 연합하였다. 북벌군은 남북으로 협공당할 판이었다.

이열균과 허숭지는 허를 찔렀다. 북벌군의 진로를 바꾸어 복건성을 침공한 것이다. 또한 주배덕(朱培德)이 지휘하는 또 다른 부대는 호남성을 경유하여 광서성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복건독군 이후기는 탐욕스럽기만 할 뿐 인기도 없었고 무능한 자로 허숭지에게 연전연패한데다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0월 17일 허숭지는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를 점령하였다. 이후기는 하문으로 후퇴하여 진형명과 채성훈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복건군의 태반이 북벌군에게 투항하고 북경정부 또한 이후기를 면직시키자 남경으로 도망쳤다. 복건성은 북벌군의 손에 들어왔다. 또한 진형명군을 격파하고 소관을 탈환하였다. 진형명 또한 군대를 복건성으로 보내어 허숭지군을 공격하였다. 1922년 말까지 쌍방은 복건성과 광동성, 광서성에 걸쳐 일진일퇴의 혼전을 벌였다.


* 손문-요페 선언


1922년 8월, 소련 특사 아돌프 요페가 북경으로 왔다. 제1차대전 말기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의 혼란에서 막 벗어난 소련은 1919년 7월과 1920년 9월 두차례에 걸쳐 이른바 대중국 선언을 발표하였다. 외무위원장(외무장관) 레브 카라한(Lev M. Karakhan)의 이름을 따서 '카라한 선언'이라고 불리었다. 주요 내용은 그동안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차지하고 있던 모든 권리와 의화단의 난 배상금, 러시아 조계, 각종 불평등 조약을 조건 없이 포기한다는 것으로, 정치적 혼란에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간섭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소련으로서는 反 제국주의 선언을 통해 세계 인민들의 지지를 얻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아편전쟁 이래 열강들에게 침탈당하고 있던 중국 민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중국은 카라한 선언을 지지하면서 열강들을 상대로 중국의 이권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내전과 간섭전쟁에서 승리하자 소련의 태도는 금새 바뀌었다. 1921년 12월 소련은 카라한 선언이 중-소간의 국교 정상화가 목적이지 중국에 대한 권익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중국은 외몽골이 중국의 영토이며 외몽골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은 즉각 철수하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오히려 외몽골의 독립을 승인하고 중동철도(러일전쟁 이전 제정 러시아가 만주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북만주에 건설한 철도)의 소유권이 소련에게 있음을 인정하라고 맞섰다.

 

요페가 북경으로 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북경정부의 실권자가 오패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패부는 반외세, 반일적이며 일본의 후원을 받는 단기서, 장작림을 격파하였다. 소련 역시 반 제국주의를 내걸고 있다. 요페로서는 오패부라면 말이 통할 것같았다. 낙양에서 오패부를 만난 요페는 "당신은 심모원려한 철학자이자 지혜로운 정치가이며 뛰어난 군사전략가입니다."라고 치켜 세웠다. 또한 직봉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그런 완벽한 승리는 여지껏 보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요페는 오패부에게 소련은 중국의 혁명을 지원할 의사가 있으며 양국이 협력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오패부는 소련과 손을 잡을 생각도 없고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는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는 우선 중동철도의 무상 반환과 외몽골에서 소련군의 철수가 선결 과제라고 주장했다. 결국 요페는 오패부의 설득을 포기하였다.

요페가 다음으로 눈을 돌린 상대는 손문이었다. 그가 광동성의 실력자인 진형명이 아닌 손문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손문의 장래를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였다. 또한 1년 전 네덜란드의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극동지부장인 마링(Hendricus Maring)이 손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링은 손문에게 소련 혁명과 신경제정책을 설명하면서 소련과의 연합을 제안하자 손문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였다. 사실 손문은 공산주의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자금과 무기였다. 손문은 먼저 미국과 영국에 원조를 요구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미, 영 등 서구 국가들에게 중국의 정통정권은 북경정부였고 손문의 광주정부는 한낱 지방정부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진형명에게 배신당하여 광주에서 쫓겨난 뒤로 더욱 초조할 수 밖에 없었다. 권위가 땅에 떨어진 손문은 북벌은 커녕 지도자로서의 자리조차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요페가 자신을 방문하자 구세주를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손문은 요페에게 잘라서 말하였다. "공산주의는 중국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소비에트 혁명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문제는 중국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며 소련 인민들이 열성적으로 지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요페는 손문에게 당장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소련의 방식이란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손문의 요구를 수락하면서 대신 어중이 떠중이 정객들의 작은 모임에 불과한 국민당을 소련식으로 체계적으로 개조할 것과 혁명군의 양성, 국민당의 주도 아래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제안하였다.

1922년 12월에 오면서 광동성의 정세는 점차 손문에게 유리해졌다. 오주(梧州)를 탈환한 손문파 군대는 진형명군을 격파하면서 삼방향에서 광주로 진격하였다. 손문의 군대는 6만 5천명에 달했다. 1923년 1월 12일, 진형명은 광주를 버리고 동쪽의 혜주로 퇴각하였다. 4일 뒤, 광주는 다시 손문의 손에 들어왔다.

1월 26일 상해에서 "손문-요페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는 연소, 용공을 기조로 군벌이 아닌 중국 민중에 의한 혁명을 제창하는 것이었다. 물론 소련과의 합작을 반대한 이들도 많이 있었다. 보수파는 소련과 손을 잡는 것은 영, 미와 손을 끊는 것을 의미하며 국내의 자본가들 역시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손문은 "어차피 그들은 우리의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오직 소련 뿐이다."라면서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1923년 2월 21일 손문은 광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광주 정부의 재조직과 대원수부의 설치를 선언하였다. 손문은 대원수의 자리에 올랐다. 소련은 미하일 보로딘을 손문의 고문으로 파견하였다. 보로딘은 라트비아 출신의 유태인으로, 1905년의 혁명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이 건국되자 귀국한 다음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유럽을 떠돌며 사회주의 혁명 전파에 나섰다. 그의 노력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사회주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제창한 것과 달리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보다 오히려 가난한 빈농의 국가에서 더 가능성이 있었다. 새로운 실험대는 중국이었다. 그는 도착한지 며칠되지 않아 손문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였다. 보로딘은 손문과 소련을 연계하는 중간 다리가 되었고 200만원의 군자금을 비롯해 많은 무기가 블라디보스톡에서 광주로 수송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공합작을 추진하였다. 이대조, 진독수 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손문의 국민당과 본질적으로 일치할 수 없으며 합작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지만 보로딘과 마링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8월 16일, 광주 정부 대표단이 모스크바로 향했다. 단장은 장개석이었다. 그는 국공합작과 연소용공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모스크바로 가고 싶습니다.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는 광주를 떠나겠습니다." 스스로도 인정했듯, 괴팍하고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 사나이는 어쨌거나 손문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았다. 손문은 장개석의 주제넘는 요청을 별 말 없이 수락하였다.

장개석의 일행은 9월 2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비록 병중에 있던 소련 지도자 레닌은 만날 수 없었지만(그는 다음해 1월 21일에 죽었다) 2인자였던 트로츠키를 만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답을 받아내었다. 그의 대표단은 3개월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체류하면서 소련의 당, 군, 관의 조직을 보고 배웠고 주요 공장과 소비에트 회의, 사관학교를 견학하였다. 그리고 11월 29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12월 25일에 상해로 돌아왔다. 이 여행은 장개석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모스크바 방문 중 공산당 입당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거절하였다. 귀국 후 손문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 "소련의 정치제도는 전제와 공포에 있습니다. 이는 삼민주의와 근본적으로 같지 않습니다."라며 소련과의 합작을 여전히 반대한다고 적었다.

* 뇌물 총통 조곤 


한편, 북경에서는 서세창이 대총통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직예파 독군들과 국회의원들이 서세창의 하야를 주장하면서 핍박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탓이었다. 그 뒤에는 조곤과 오패부의 선동이 있었다. 이홍장 이래 명성을 떨쳤던 북양의 원로 서세창은 울분을 참고 하야를 선언한 후 천진에서 은거하였다. 1922년 6월 11일 여원홍이 다시 대총통에 복직하였다. 그러나 직예파의 허수아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총통 자리를 원하고 있는 조곤이 잠시 맡겨 두었을 뿐이었다. 그는 의원들에게 돈을 마구 뿌렸다. 또한 공민단(公民團)이라는 어용조직을 만들어 여원홍을 압박하였다. 여원홍은 천진으로 도망쳤다가 오패부의 부하인 왕승빈에게 붙잡혀 대총통 인장을 빼앗기고 사직을 강요당했다. 여원홍은 1923년 6월 14일 사임을 선언하였다. 대총통에 오른지 1년만이었다.

1923년 10월 5일 북경의 국회의사당에서 제5대 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조곤은 의원 한명당 5천원씩 뿌렸다.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은 더 줬다. 두번, 세번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 많은 돈은 북경과 직예성의 주민들을 사정없이 쥐어짜 나온 것이었다. 개표 결과는 당연히 조곤의 압승이었다. 조곤은 즐겁게 웃었지만 결코 그 자리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남방에서는 소련과 손을 잡은 손문이, 북방에서는 와신상담하는 장작림이 칼을 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