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천군과 동북의 내정을 개혁하다
중국 내전기의 군벌들에 대해, 일자무식에다 거칠고 악랄하며 탐욕스럽고 기회주의적이고 강도떼와 다름없는 군대를 이끌고 민중의 고혈을 빨면서 외세와 결탁하여 국가에 온갖 해악만을 끼친 존재라는 것이 보편적인 이미지이다. 물론 실제로 이런 도적의 우두머리 같은 군벌들도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을 떨친 자라고 한다면 "혼세마왕" "구육장군" "삼부지 장군(三不知 - 자기 재산과 첩과 병사의 수를 모른다는 뜻)"이라 불리었던 장종창과 서태후의 묘를 도굴하여 "동릉대도(東陵大盜)"라는 악명을 떨쳤던 손전영(孫殿英)이다.
그러나 모든 군벌들이 오직 착취와 약탈에만 열을 올렸던 것은 아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군벌일수록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에서 나름대로 부국강병에 노력하였다. 인재를 모으고 토비를 몰아내었으며 철도와 도로를 닦고 근대적인 병원과 공장, 학교를 건립하고 교육을 장려하였다. 그래야 토호들의 지지를 받아 안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데다, 또한 다른 군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모범군벌'이라 불리었던 산서군벌 염석산, 사천성을 개발하여 항일전쟁의 물적 기반을 제공했던 사천군벌 류상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사람이 장작림이었다.
오패부에게 호되게 패배한 채 봉천으로 돌아온 장작림은 동3성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1922년 7월 16일이었다. 당시의 "독립"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과 분리하여 주권을 가진 자주 국가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중앙 정부에 복종하지 않고 자치를 행사한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독립이었다.
직봉전쟁에서 장작림은 직예군의 실력을 확실하게 절감하였다. 숫자와 무기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봉천군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원세개가 남긴 북양군의 적계부대인 직예군은 중국의 중앙군으로서 최강의 군대였다. 반면, 변방군인 봉천군은 군복을 걸친 도적떼일 뿐이었다. 지휘관의 역량은 더욱 컸다. 오패부와 직예군의 장군들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이었지만 장작림의 부하들은 대부분 마적 시절부터 함께 했던 자들이었다. 의리와 충성심은 있어도 군사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전투의 경험도, 지휘 능력도 없었다. 애초에 싸움이 될 리 없었던 것이다. 전투는 주먹구구식이었으며 기율도 엉망이었다. 봉천군의 지휘관들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부하들을 버린채 혼자 도망쳤고 많은 부대가 총 한발 쏘지 않고 투항하였다. 이로서 전군이 괴멸하였다.
그러나 장학량의 제3 혼성여단과 곽송령의 제8 혼성여단 등 일본군 교관들에 의해 훈련받았고 유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는 부대는 매우 강했다. 직예군의 우세한 공격을 막아내고 산해관을 지켜낸 것은 오직 이 덕분이었다. 만약 모든 부대를 이렇게 바꿀 수 있다면 봉천군은 틀림없이 중국 최강이 될 것이었다.
장작림은 마적 출신의 무식한 군인이었지만, 세상을 보는 눈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또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오패부를 이기기 위해서는 오직 봉천군을 뿌리부터 바꾸는 수 밖에 없다. 일단 결심한 이상, 그는 잠시라도 머뭇거림이 없이 강도 높은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오나라 임금 부차에게 복수하기 위해 쓰디쓴 쓸개를 씹었던 월나라 임금 구천의 모습이었다.
첫번째는 숙군 작업이었다. 그동안 봉천군의 핵심은 장작상, 장경혜, 탕옥린과 같은 졸병 출신, 마적 출신의 구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장작림은 젊은 시절부터 호형호제했던 이들을 차마 하루아침에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대신 군권을 빼앗고 명예직을 맡겨 세력을 약화시켰다. 구파를 대신해 봉천군의 새로운 실세가 된 이는 양우정과 곽송령이었다.
일본 육사 포병과 출신의 양우정(楊宇霆)은 오만하지만 주변에서 '小 제갈량'이라 불릴 만큼 유능한 자였다. 그는 봉천군 참모장 겸 봉천병기창 총감을 맡아 장작림의 오른팔이 되었다. 또 한사람은 북경 육군대학 출신의 곽송령(郭松齢)이었다. 곽송령은 동북 강무당(사관학교)의 교관을 맡았다. 그가 훈련시킨 제3, 제8 혼성여단은 봉천군 최강 부대가 되었다. 직봉전쟁에서 장작림이 완전히 패망하지 않았던 것도 오직 이 두 여단 덕분이었다. 또한 장학량과도 매우 가까워 장학량은 곽송령을 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곽송령 또한 장작림의 참모장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근대 전술에 능하였고 뛰어난 지휘, 행정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봉천군의 숙군과 동북 내정의 개혁은 둘의 업적이었다.
장작림은 전투에서 비겁했던 자는 총살시켰다. 잘못을 저지른 자, 능력이 부족한 자 역시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빈자리는 신식 군사 교육을 받은 인재들을 전국에서 초빙하여 채워 넣었다. 특히 일본 육사 출신, 육군대학 출신을 중용하였다. 또한 자체적으로 우수한 간부를 확보하기 위해 동북 육군 강무당(東北陸軍講武堂)을 개혁하였다. 봉천에 있는 동북 강무당은 중국에서 두번째로 만들어진 서구식 군관학교로, 1908년 동3성 총독이었던 서세창에 의해 설립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교관과 장비, 시설 부족으로 허울에 불과하였고 수준도 매우 낮았다.
장작림은 스스로 교장을 맡아 조직과 편제를 체계화하고 근대적인 군사 교육을 실시하는 등 봉천군의 핵심 간부 양성소로 바꾸었다. 장학량, 탕옥린, 손열신 등 봉천군의 고급 간부들도 줄줄이 입교하여 근대 군사 교육을 받았다. 동북 강무당은 황포 군관학교와 운남 강무당, 보정 군관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국의 4대 군관학교 중 하나가 되었고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폐교될 때까지 총 89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동북 강무당의 옛 전경.
병사들 중에서도 늙고 병들고 쓸모없는 자는 넉넉한 노잣돈을 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젊고 능력있는 자만 가려 남겼다. 이로 인해 봉천군은 20만명에서 7만명으로 2/3가 숙군되었지만, 그만큼 정예부대로 거듭난 것이었다.
두번째는 해공군의 확보였다. 직봉전쟁에서 약 40대의 항공기를 가지고 있던 직예군은 봉천군의 머리 위를 맴돌며 쉴새 없이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 사격을 가했다. 봉천군은 폭음을 울리며 날아오는 항공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황에 빠질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했던 항공기는 중국의 내전에서도 결정적이었다. 진황도 앞바다에서는 오패부의 발해 함대가 쏘아대는 포탄이 날라왔다.
물론 봉천군도 직환전쟁에서 노획하고 서구에서 구입한 십여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조종할 수 있는 파일럿도 없었고 훈련시킬 교관도 없었다. 정비 기술자도 없었다. 또한 동북 해군은 낡은 상선을 개조한 몇 척의 군함을 보유했지만 임시변통으로 함포를 달고 흑룡강의 순찰을 하는 정도일 뿐, 도저히 군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한때 아시아 최강의 해군이라 불리던 북양 해군의 후예로서, 4500톤의 해기(海圻)를 비롯해 2, 3천톤급의 방호 순양함 수척과 포함, 1500명의 육전대원을 보유한 발해 함대(渤海艦隊)에 맞선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해기함.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국 조정이 해군의 재건을 위해 영국 암스트롱사에 요청하여 건조한 방호형 순양함. 1899년에 취역하여 중국 군함으로는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다. 203mm 함포 2문과 120mm 속사포 10문, 47mm 함포 16문, 어뢰 발사관 5문을 탑재하였고 최대 속력은 24노트 정도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9월 15일 상해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일본군의 폭격을 받아 격침당했다.
장작림은 해공군의 건설을 마음먹었다. 공군의 건설은 장남 장학량이 앞장섰다. 장작림은 장학량을 육군항공처의 총감으로 임명하였다. 장학량은 비행기에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스로 조종술을 배울 정도였다. 또한 봉천 외곽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프랑스인 교관과 항공기 기술자를 영입하여 공군을 갖추었다. 파일럿의 훈련을 위해 동북 강무당 생도 중에서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35명을 프랑스의 항공학교로 유학보냈다. 이들은 제2차 직봉전쟁에서 장작림이 승리한 뒤에 귀국하여 동북 공군의 핵심이 되었다. 1920년대 말 동북 공군은 중국 최강으로, 약 300여대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였다.
해군의 건설은 심홍렬(沈鴻烈)이 맡았다. 일본 해군병학교 출신인 그는 당시 중국에서 몇 안되는 해군통이었다. 원래는 직예파에 속했으나 직환전쟁 이후 장작림의 초빙을 받아 봉천파로 전향하였다. 장작림은 해군의 강화를 위해 강방사령부 산하에 항경처(航警署)를 신설하고 그를 처장으로 임명하였다. 심홍렬은 요동반도 북서쪽에 있는 호로도에 동북항경학교(東北航警學校)을 설립하여 해군 장교를 훈련시켰다. 또한 일본에서 몇척의 소형 포함을 구입하여 해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당시 중국 해군은 오패부 휘하의 발해 함대와 복건 함대, 절강 독군 노영상 휘하의 상해 함대, 손문 휘하의 해군이 있었다. 모두 군비 부족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군함은 모두 신해혁명 이전에 청 조정이 구입한 것들이었다. 전력의 보강은 커녕, 군함의 수리조차 변변히 하지 못하는데다 장병들의 봉급은 몇개월씩 체불되었다. 하지만 장작림은 해군의 육성을 위해 다른 부처의 예산을 전용해서 지원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1927년에는 발해함대가 동북으로 귀순하였다. 이로서 동북해군은 중국 전체 해군의 70%를 차지할 만큼 확대되었다.
장작림이 육성한 해공군의 실력은 제2차 직봉전쟁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가 오패부를 꺾고 본격적으로 중원을 향해 남하하면서 막강한 함대와 공군력을 앞세워 단숨에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세번째는, 동북의 발전이었다. 동북은 중국 역사에서 항상 가장 낙후된 변방이었다. 청 조정은 동북에 대해 1870년 봉금령을 해제할 때까지 '청의 발상지'라 하여 약 200년에 걸쳐 한인의 출입과 거주를 금지시켰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한족과 조선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인구가 늘어나고 일본과 러시아, 영국의 자본으로 남만주 철도와 동청 철도가 건설되면서 발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동북의 태반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였다. 민중의 교육 수준도 가장 낮았고 변변한 공업시설도 없었으며 도처에는 토비들이 준동하였다. 길림 한성에만 20만명이 넘는 토비가 있었다.
군비를 확보하고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동북의 발전이 우선되어야 했고, 또한 내정 개혁이 시급하였다. 철도는 평시에는 물자를 유통시키면서 그로 인한 수입을 확보하고 전시에는 군대와 군수품을 수송하는 동맥이었다. 장작림은 철도 건설을 전담하는 동삼성 교통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차관을 빌려 중일 합작 형태로 철도망을 대대적으로 확충하였다. 1920년대 중국의 철도 건설을 보면 내전의 혼란에 빠져 있던 본토는 지지부진한 반면, 동북에 건설된 철도는 본토 전체를 합한 것의 두배에 달했다. 1927년의 동북의 철도는 중국 전체의 38%를 차지할 정도였다.
장작림이 특히 주목한 것은 근대 교육의 보급이었다. 그는 "나의 지금 지위는 말 위에서 얻었지만, 말 위에서 동북을 통치할 수는 없다"라며 인재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동북에만 만족하지 않고 중앙의 진출을 꿈꾸는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인재 확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같은 시기 다른 군벌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군비 확보에도 급급한 대다수 군벌들은 당장의 전쟁에 도움이 되는 군사 교육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따라서 학교 운영은 커녕 교사들의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것이 군벌 내전기의 모습이었다. 특히 교육에서 가장 열악한 지역이 동북이었다. 1923년 초를 기준으로 본토에는 대학이 35곳에 인원수는 1만3천명에 달했지만 동북은 대학은 단 한 곳도 없었고 고등교육기관이라고는 봉천에 전문학교 4곳과 길림성과 흑룡강성에 각각 1곳씩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장작림은 제1차 직봉전쟁이 끝난 뒤부터 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1916년에 5500여개 학교와 학생 22만명이었던 것이 1924년에는 학교 9200개에 학생수는 46만명으로 두배로 늘어났다. 또한 1923년 4월 동북 대학이 문을 열었다. 이는 생계 문제로 외국 유학을 가거나 본토로 나갈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장작림은 동북 대학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면서 미국, 독일 등 서구에서 최신 기계를 도입하여 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동북대학은 만주사변 이후 북경으로 이동하여 1949년에 폐교될 때까지 26년간 약 1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철도와 도로가 정비되고 봉천과 장춘, 하얼빈 등을 중심으로 근대 공업과 광산이 대대적으로 확충되면서 동북은 전례없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장작림의 통치가 어느 군벌보다도 안정되었고 또한 장작림의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여기에 투자된 돈의 태반은 일본의 자본이었다. 만주사변기에 오면 동북의 자본 70%이상은 일본이 장악하였다. 이는 뒷날 장작림에게 양날의 칼로 다가오게 되었다.
* 장작림의 포석
장작림의 최대의 적은 오패부였다. 그의 실력은 여전히 막강하여 북으로는 직예성에서 남으로는 강서성, 서로는 섬서성에 걸쳐 중원의 9개 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병력은 50만명에 달하여 서구의 언론들은 오패부를 '중국 최강의 남자'라고 부르며 중국 내전의 승자가 될 가장 유력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제아무리 봉천군을 혁신한다고 해도 장작림 단독으로는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신중하고 교묘한 그는 두가지 포석을 시작하였다. 첫째는, 단기서-손문-장작림의 반직예 삼각 동맹이었다. 제1차 직봉전쟁 직전에도 시도한 바 있었지만 장작림이 성급하게 전쟁을 시작하면서 동맹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장작림에 호응하여 북벌군을 출동시켰던 손문은 진형명의 반란으로 도로 회군해야 했고, 안휘파의 노영상은 단기서의 명령에도 중립을 지킨 채 지켜보볼 뿐이었다. 그 사이에 봉천군은 괴멸되었다.
하지만 북벌을 꿈꾸는 손문도, 단기서도 혼자서는 오패부를 이길 수 없다. 세 진영이 손을 잡아야만 비로소 오패부와 대등해 질 수 있었다. 또한 손문과 단기서는 오패부와는 맞지 않았지만 장작림에 대해서는 호감이 있었다. 사방이 직예 군벌에게 둘러싸여 압박을 받고 있던 노영상 역시 장작림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세 진영은 부지런히 연락을 하면서 합종 연횡의 재개를 추진하였다.
1924년 9월, 손문의 아들 손과가 아버지의 밀지를 들고 상해에서 배를 탔다. 요동반도 남단의 대련항을 거쳐 열차로 봉천에 도착한 그는 장작림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29살이었던 손과는 장작림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키는 크지 않았다. 생김새가 단아한 것이 도무지 마적 출신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집무실에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의 아침 식사는 좁쌀 따위를 끓인 검소한 것들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비서장이 공문을 수북히 들고 왔다. 보고가 끝나면 구두로 지시했다. 매일 100건이 넘는 문서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모두 처리했고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 그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정원의 문에는 신행(愼行, 행동을 삼가하라)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봉천에서 손과는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 노영상의 아들 노소가(盧小嘉)와 함께 이른바 '삼공자 회의'를 열었다. 세 사람 모두 20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여기서 공수 동맹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9월 15일의 일이었다.
두번째는 직예파의 내부에 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 대상은 풍옥상이었다. 하남독군이었던 그는 오패부의 눈밖에 나서 몇달도 되지 않아 북경 육군부의 검열사라는 한직으로 쫓겨났다. 검열사는 군의 훈련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이름만 거창할 뿐, 실권은 없다. 무엇보다 군대를 유지할 지반이 주어지지 않았다. 매월 120만원의 군비를 지급하기로 했던 오패부의 말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는 굶어 죽으라는 얘기와 같았다. 그나마 조곤이 호의를 베풀어 준 탓에 풍옥상은 군비의 일부라도 충당할 수 있었지만 속으로 오패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았다.
장작림의 심복 중에 마병남(馬炳南)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풍옥상의 심복인 장수성(張樹聲)과 매우 가까웠다. 게다가 풍옥상과 마찬가지로 카톨릭 교도였다. 마병남은 장수성을 통해 풍옥상과 오패부 두사람이 반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장작림에게 보고하였다. 장작림은 매우 기뻐하였다. 대군을 거느리고 북경에 주둔하고 있는 풍옥상을 한편으로 만든다면 그야말로 오패부의 등에 비수를 꼽는 것과 같았다. 장작림은 그를 풍옥상에게 접근시켰다.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1924년 2월, 풍옥상이 14살 연하의 같은 카톨릭 교도인 이덕전(李德全)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혼례를 올렸다. 참고로 이덕전은 뒷날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와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을 역임한다. 마병남은 혼례의 하객으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풍옥상을 몰래 만나서 장작림의 뜻을 전하였다. 풍옥상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런 막중한 일을 잘도 해치우는군." 수락의 의미였다.
물론 장작림은 말만 앞세우는 위인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이다. 구두 약속 따위는 언제라도 저버릴 수 있었다. 당대 군벌들을 매수하는데는 돈보다 더 한 것은 없었다. 장작림은 군비에 보태쓰라며 배포있게 200만원의 돈을 보내줬다. 자영 농민의 연간 수입이 50원, 병졸의 월급이 10원에 불과하던 시대에 200만원은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풍옥상만한 사나이도 그 돈 앞에서는 기가 죽었다. 가난뱅이 직예파와 봉천파의 재력은 천양지차였다. 이로서 그가 어느 쪽에 가담할지는 분명해졌다.
장작림의 기세가 욱일승천하는 것에 반비례하여 직예파는 점점 약화되었다. 조곤이 막대한 돈을 뿌리며 뇌물 선거를 벌이는 동안 오패부는 무력 통일의 야망을 불태우며 복건성과 사천성을 공격하고 진형명의 반란을 원조하였다. 하지만 진형명은 손문에게 참패하였고 사천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무리한 남방 원정은 직예군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봉급과 양식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탈영하여 토비가 되었다. 사기는 극도로 떨어졌고 무기도 탄약도 바닥났다.
더욱이 오패부와 직예파 제장들의 반목은 날로 더해졌다. 사람을 쓸 몰랐던 오패부는 그동안 자신을 위해 분골쇄신했던 소요남, 장복래, 왕승빈 등 역전의 부하들을 찬밥대우하면서 군권을 빼앗았다. 오패부는 모든 군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킬 생각이었으나 실상 자신의 수족을 스스로 자르는 것과 같았다. 그는 여전히 중원의 지배자였지만 사상누각일 뿐이었다.
* 장작림과 손문, 출병을 결의하다
절강 독군 노영상은 북양의 원로이자 안휘파 군벌이었다. 하지만 직환전쟁과 직봉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절강성을 굳게 지켜 자리를 보존하였다. 오패부도 강력한 군대를 가진 노영상을 쉽사리 건드릴 수 없었다. 그가 차지하고 있는 상해는 인구 250만명에 중국 금융과 상공업이 집중한 중국 최대의 도시였다. 연간 관세 수입만 1300만원이 넘었다.
이 먹음직한 노른자위를 이웃한 강소 독군 제섭원이 탐내었다. 게다가 직예파인 손전방이 복건성 전체를 장악하자 복건성에 할거하고 있던 1만명이 넘는 안휘파 군대가 쫓겨나 노영상에게 귀순하였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를 갖춘 정예부대였기에 노영상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또한 노영상은 조곤이 뇌물로 대총통이 되었기에 인정할 수 없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는데다 장작림과 손을 잡자 직예파로서는 그야말로 눈의 가시였다.
제섭원은 조곤에게 노영상 토벌을 상주하였다. 조곤은 안휘성, 강소성, 복건성, 강서성 4개 성에 노영상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9월 3일 제섭원은 상해의 공략을 명령하였다. 노영상 역시 병력을 동원하고 조곤 토벌을 선언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의 서막인 강절 전쟁의 시작이었다.
직예파의 절강성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장작림은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여단장 이상의 간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노영상에 호응하여 직예파 토벌의 깃발을 올릴 것인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그 자리에서 장학량은 "아직 군비가 충실하지 못합니다."라며 신중론을 펼쳤다. 대부분의 제장들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오패부의 대군에 맞서기에는 봉천군의 실력은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 장작림은 고심하였다. 자신의 결정 여하에 봉천군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
곧 장작림이 입을 열었다. "관내로 출동한다!" 이어서 말했다. "절강을 도와야 한다. 광동과 협력해야 한다. 동맹을 깰 수 없다. 직예파가 전국을 손에 넣는다면 동북도 무사할 수 없다. 그 때에는 군비가 완성되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단 장작림이 결심한 이상 봉천군에 이견을 달 수 있는 자는 없다. 장작림의 말 한마디에 봉천군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것이 여러 군벌들이 이해타산으로 뭉친 직예파에 비해 봉천군의 최대 강점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말자 지휘관들은 부대로 돌아가 신속하게 출동 준비를 마쳤다.
같은 날, 손문 역시 북벌의 재개를 선언하였다. "절강을 돕고 광동을 지키자!" 강절전쟁으로 시작된 싸움은 본격적으로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드디어 군벌 시대 최대의 혈전이 시작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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