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대조국해방전쟁사 (1984)

- Part 1 -
전쟁전야
제 1 장
제국주의자들의 2차대전 유도
1. 전쟁위협의 증가. 소련의 평화를 위한 싸움
20세기에 인류는 2차례의 세계전쟁을 겪었다. 그 원인은 제국주의시스템에 있다. 첫번째 제국주의전쟁은 1914-1918년으로 독일을 누르고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는 인민에게 견고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1919년의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으로 1차대전은 그치게 만들었으나 그것이 태어난 모순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 상품의 판매, 생산에 필요한 물자의 조달, 그리고 자본시스템에 종속시키려는 지배를 얻으려는 싸움은 여전히 제국주의 세력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두 세계대전의 기간 사이에, 그들의 발전의 불균형이 특별히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패권간의 간섭을 발생시켰고 자본주의세계는 1차대전의 결과를 베르사이유-워싱톤의 회담의 조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1차대전과 러시아에서 있던 대10월사회주의 혁명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전반적인 침체는 모든 제국주의의 모순을 더욱 심화되게 된다. 제국주의는 이제 전역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세계는 두 체계로 나뉘어지고 소비에트 연맹은 모든 국제정책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국주의의 모순은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1929-33년에 찾아왔을 때 첨예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모든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상 가장 깊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이 위기는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바로 다른 자본주의국가들까지 집어삼켰다. 1933년까지 미국에서 산업생산은 1929년 대비 64%까지 떨어졌고, 영국은 88%, 독일은 65%로 떨어진다. 이 위기는 대량실업을 발생시켰다. 미국은 1천7백만, 독일에서는 8백만, 영국에서는 3백5십만의 실업자가 생겨난다. 자본주의세계에서 실업자의 수는 3천만에 이르게 된다.
이 위기를 맞자 제국주의의 패권들의 시장과 패권의 확장, 식민지들의 재분배를 하기 위한 싸움은 첨예해지게 된다. 1931년 일본은 중국,영국,프랑스,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다. 일본은 북동쪽으로부터 중국을 침입한다. 이것은 극동의 무대가 된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그 위기가 가장 나빴다. 대량실업이 나타나고 노동환경은 극심해져서 경제위기는 곧바로 정치적으로 번져나갔다. 대부분의 부루주아 정당들은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대부분 부루주아계층으로 구성된 의회는 인민의 지지를 얻기에 부족했다. 1933년 1월에 국제적인 행동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파시스트들에게 권력을 준다. 권력은 가장 위협적이고 급진적인 그룹들에 떨어지게 되었으면 대중을 혁명에서 벗어나 복수를 원하고, 새로운 세계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만든다.
독일의 파시즘의 사상은 - 극단적인 애국주의와 인종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 이것은 당수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보여진다. 그는 '독일민족의 우수성'의 이론을 설파하였고 독일민족에게 충분한 '생존공간'이 부족하다고 증명하려 하였다. 베르사이유조약에 반대하고 불만에 찬 군중을 이용하여 무정부상태를 만들었다 히틀러지지자들은 오직 전쟁만이 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그들은 유럽을, 세계를 정복하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 계획의 기초는 소련을 점령하는 데에 있었다. "우리는 유럽에서 새 땅이라고 말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러시아뿐이 없습니다 그것을 주로 편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라고 히틀러는 설파했다. 독일을 독재로 파시스트들은 새로운 세계전쟁의 준비를 위해 국가의 정책을 종속시킨다. 이것이 또하나의 무대- 중앙유럽이 된다.
자본주의 세계는 두개의 축으로 나뉘는데 첫번째는 독일과 이탈리아,일본의 파시스트국가의 연합이었고 1936년 10월 독일과 이탈리아는 조인식을 작고 베를린을 그 Rome으로 한다. 독일과 일본은 11월에 반공주의 조약을 맞는데 그 목적은 국제공산주의에 반하여 양국간의 협력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지배를 위한 침략자들의 연합의 조약에 이탈리아는 1937년 합류한다.
점차적으로 다른 그룹이 형성된다. 그것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뛰어든다. 하지만 이 그룹이 형성은 미국과 영국간의 이해관계의 상충됨에 있어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이들 각국은 독일에 따로 접촉하려 노력하여 스스로의 위치를 강화하려 했다. 이 그룹의 형성은 이미 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이루어지게 된다.
30년대 후반은 파시스트들의 공격이 빠르게 확장된 시기였다. 1935년 이탈리아는 에디오피아를 침공한다. 1936년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내전에 개입한다. 극동에서 일본은 계속 공격을 확장하였고, 1937년에는 전 중국을 정복하는 전쟁에 돌입한다. 지구상에 전쟁이 휩쓸게 되었고, 파시즘의 망령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인민위에 떠돌고 있었다.
소련은 적극적인 평화정책을 추구한다. 침공자들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결고...공조위의 안정을 만들기 위하여 매진하였다. 소련정부는 지구위에 어떠한 전쟁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전 세계로 파급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침략국들에 대하여 평화적국가들이 공조안전체제를 구성하여 이들에 거부를 표시하는 것을 요구했다.
소련정부의 제안은 국제적으로 광범위한 민주적 대중의 지지를 얻어냈다. 소련정부의 합의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에 몇몇의 실제적인 의도를 갖은 서유럽의 부루주아지도자들도 나서게 되었다[16]
유럽에서의 공조안전체제를 만들자는 소련정부의 제안은 그들이 동유럽조약을 만들려는 프로젝트로 표현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유럽국가들의 상호공조가 약속되었으나 거부할 수 있는 위치의 독일과 폴란드 그리고 실은 영국까지 거부함으로써 이 조약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정부의 고집으로 1935년 소련은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상호공조의 조약을 얻어낸다. 협조시스템을 만듦으로써 이 조약은 평화적인 국가들을 파시즘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근간이 될 수 있었다.
사태가 더 발전하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세계에 유럽의 안전을 붕괴시키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분명히 파시즘이 그들의 이익을 위협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가 극동과 스페인의 홍해에서 우월한 전략적 위치를 점하는 것이 확실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가장 중시하기에 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과 자국의 인민들의 혁명을 가장 큰 상대로 생각하고 있던 서방의 제국주의 세력들에게도 적지않은 위협이 되었다. 이들은 나아가 파시즘을 소련과 싸울 도구가 된다고 생각하고는 그들은 오히려 조장하고 조금씩 부추겨서 소련을 침공하게 만든다. 지도자들은 그러기 위해 2가지를 목표로 하였다: 소련의 영향력을 거부하게 하거나 최대한 그 힘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독일,이탈리아, 일본을 제국주의적 경쟁자로 보고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기꺼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물론 극동과 남동유럽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의 발발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심각히 책임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된 미국은 침략국들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 반대로 행동한다. 알려진대로 1차대전의 종전 후 미국의 독점자본들은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독일에 경제적 지원을 하여 히틀러의 커다란 선결문제중 하나이던 중공업을 확장하게 하여 히틀러의 무장을 돕는다. 하지만 30년대 중반,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를 추월하고 미국과 함께 세계시장에서 견주게 되자, 미국과 독일의 경제협력관계는 긴밀해 진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히틀러지지자들의 확장야욕에 반대하는 대신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파시스트들의 침공을 오히려 부추기는 정책을 편다. 미국과 프랑스의 지배층은 자본주의세계의 모순을 풀려는 기대에 파시스트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연계한다.
물론 서방의 패권들은 위험하게도 전쟁을 추구하는 계획을 공개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모든 수를 써서 공격을 지지하는 것을 감췄다. 이탈리아가 에디오피아를 공격하기직전에 미국정부는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한다. 안전보장의 원칙에 따라 반대측에서 균형을 잡아줘야 할 영국의 외교는, 그렇게 하는 것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하며 "화평"정책을 취한다. 스페인내전에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개입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는 '불개입'정책을 편다. 이것은 침략자들에게 그들의 야욕을 펼치는 것을 허락해준 것이었다.
우 확연히, "중립"이나 "화평"정책이나, "불개입"정책은 서방패권들이 안전보장의 공조체제를 세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마치 그 침략행위를 인정하는 것처럼, 그들의 희생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파시스트 정부들은 점점 더욱 무례해져서 그 장악을 더 넓혀갔다. 그동안 침략자들은 이 서방의 패권들의 신호를 이해하고 그들의 반-소비에트 정서를 서방에서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이용한다.
1937년 가을, 나찌는 새로운 침공계획을 시작한다. 서양열강의 입장은 독일군대가 군사작전이 여러 전선에서 수행되지 않고 전쟁계획을 짤 수 있게 만들었다. 파시스트독일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희생이 적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파시스트들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전략적, 경제적 위상을 강화하고자 한다. 나찌는 중앙유럽과 동유럽의 작은 나라들의 일진-특히 오스트리아-를 거의 저항없이 점령할 것으로 생각했다.
1938년 3월 11일, 베를린의 라디오는 오스트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유혈 폭동이 발생했다는 거짓선전을 방송한다. 실제로는 이것은 히틀러 끄나풀들이 일으킨 파시스트의 폭동이었다. 그날 바로 파시스트의 군대는 혼돈을 제어한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한다. 3월 13일 오스트리아는 파시스트 독일에 전격적으로 병합된다.

'전쟁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대조국해방전쟁사 - 3/bit.ly/SovietBlog - 잊혀진 역사, 패자의 역사 (0) | 2018.01.02 |
|---|---|
| 대조국해방전쟁사 - 2/김영진/bit.ly/SovietBlog - 잊혀진 역사, 패자의 역사 (0) | 2018.01.02 |
| 군벌지(軍閥志) - 14. 제2차 직봉전쟁/blog.naver.com/atena (0) | 2018.01.01 |
| 군벌지(軍閥志) - 13. 장작림 와신상담하다/blog.naver.com/atena (0) | 2018.01.01 |
| 군벌지(軍閥志) - 12. 직예파의 분열/blog.naver.com/atena (0) | 2018.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