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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14. 제2차 직봉전쟁/blog.naver.com/atena

강절 전쟁


제2차 직봉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강절 전쟁은 9월 3일 제섭원의 강소군이 절강성 서북부의 의흥(宜興)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강소군의 병력은 5개 사단 6개 여단 5만6천여명에 복엽기 8대, 이군의(李君羲)가 지휘하는 장강함대(방호 순양함 1척, 포함 등 2,500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절강군은 4개 사단 3개 여단, 상해 경찰대 등을 합해 6만8천명, 복엽기 6대, 이건장(林建章)이 지휘하는 상해독립함대(방호순양함 2척, 구축함, 포함 등 6천톤) 등이었다. 절강군이 강소군보다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훈련과 실전 경험이 매우 부족한 오합지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섭원과 노영상은 이홍장이 세운 북양무비학당 출신이었고, 제섭원은 일본육사를 졸업했지만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무능한 청말의 구식 군인들이었다. 이 시기의 군벌들이란 대부분 이러했다.


▲ 출진 중인 절강군 병사들. 상해에 배치된 노영상의 직계 부대는 용맹하게 싸웠으나 대부분은 적을 보자말자 도주하거나 돈에 매수되어 부대째 투항하였다. 이 시기의 군인들이란 군벌에게 고용된 용병에 불과했기에 충성심이라고는 없었다.


절강군 진영 위로 강소군의 비행기가 날아와 선전 삐라를 뿌렸다. "노영상을 생포하는 자에게는 상금 5만원을 주겠다! 투항하는 자는 본래의 계급을 인정할 것이며 무기를 가지고 오는 자는 그에 상당하는 상금을 줄 것이다." 노영상도 이에 질세라 조곤 토벌령을 선포했다.


제섭원은 곤산(崑山)에 사령부를 두고 상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고전의 연속이었다. 절강군의 맹렬한 포격 아래 강소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격퇴당했다. 노영상은 즉시 반격에 나서 남경까지 단숨에 점령하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직예군 1개 여단이 호북성으로 급히 남경으로 증원되고 9월 8일 남쪽에서 손전방의 복건군 3만명이 북상하자 다시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다가 절강군 제2사단이 반란을 일으켜 직예군에 투항하였다. 9월 18일에는 항주가 포위되어 23일 함락당했다. 강소군의 사상자는 1천여명인 반면, 절강군의 사상자는 그 두배가 넘었다. 또한 상해에 조계와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는 열강들은 상해 주변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즉시 군함과 해병대를 파견하였다.

노영상은 전세가 불리하자 항주를 버리고 일단 상해로 퇴각하였다. 제섭원은 여세를 몰아 상해를 공격했다. 직예파의 장강함대와 복건함대가 오송의 절강군 진영을 포격했다. 노영상의 해군 역시 만만찮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경만 할 뿐, 응전에 나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예군의 공격은 절강군의 강력한 방어 앞에 실패했다. 절강군은 약 2만명의 병력으로 재차 반격에 나서 곤산을 공격했다. 곤산이 위험에 빠지자 제섭원은 소주로 사령부를 옮겼지만 절강군 역시 강소군의 저지로 곤산을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오패부는 제섭원을 지원하기 위해 안휘성과 호북성에서 병력을 계속 증원했다. 덕분에 병력면에서는 직예군이 월등히 우세했지만 군비와 탄약이 바닥났다. 식량과 군수품을 받지 못한 일부 직예파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약탈을 일삼았다. 게다가 산동군은 남하하던 도중 절강군의 반격을 받아 격퇴당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황은 도무지 누가 유리한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 가정 방면에 주둔한 절강군 제1혼성여단이 제섭원에게 매수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덕분에 직예군은 절강군의 배후로 우회하여 10월 9일 상해 남쪽의 송강(松江)을 공격해 점령했다. 퇴로가 막힌 절강군의 최일선 부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무너져 내렸다. 이로서 승패는 결정났다. 상해 함락이 시간 문제가 되자 10월 13일 노영상은 "더이상 전쟁을 하는 것은 인민을 괴롭힐 뿐"이라며 하야를 선언하고 재기를 꿈꾸며 일본으로 도망쳤다. 10월 23일 거창한 승전식과 함께 제섭원은 상해에 입성하였다.

절강전쟁의 전황도(1924.9월~10월) 

* 산해관으로!

절강성을 놓고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는 동안, 북쪽에서는 장작림의 대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장작림은 동북의 병력을 총출동시켜 오패부와 건곤일척의 결전을 다시 한번 벌일 참이었다. 병력은 4개 사단 13개 혼성여단 약 10만명. 주요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진위군 총사령(鎭威軍 總司令) 장작림, 참모장 양우정


제1군 군장 강등선(姜登選), 부군장 한린춘(韓麟春) 봉천군 제2사단, 제5사단 병력 1만 6천명

제2군 군장 이경림(李景林), 부군장 장종창(張宗昌) 봉천군 제1사단, 3개 여단 병력 2만 6천명

제3군 군장 장학량(張學良), 부군장 곽송령(郭松齡) 봉천군 제4사단, 2개 여단 병력 2만 6천명

제4군 군장 장작상(張作相), 부군장 정초(丁超) 길림군 5개 여단 2만7천명

제5군 군장 오준승(吳俊陞), 부군장 오광신(吳光新) 흑룡강군 제29사단, 열하 제1사단 병력 1만명

제6군 군장 허란주(許蘭洲) 흑룡강 기병여단 병력 6천명


주력부대는 봉천군 최강부대인 제1군과 제3군으로 산해관으로 남하하여 직예군 주력과 결전을 벌인다. 제2군과 제5군은 열하성을 공략하는 한편 산해관에서 측면을 지원한다. 길림군으로 구성된 제4군은 총예비대로 남는다. 제6군은 산해관을 우회하여 만리장성을 돌파, 북경으로 단숨에 남하하여 직예군의 배후를 위협한다. 또한 백여대에 달하는 전투기로 제공권을 확보하고 지상을 지원할 참이었다. 하지만 해상에서는 진황도에 주둔한 직예파의 발해함대를 매수하는데 실패하여 여전히 열세였다.

▲ 제2차 직봉전쟁 당시의 장학량 

봉천군의 전투력은 지난 2년 동안 비약적으로 강화되었지만 아직도 충실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화력에서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최신 장비를 갖춘 봉천군이 월등히 우세하다. 하지만 실전으로 단련된 막강한 직예군과 문무겸비의 명장 오패부는 여전히 만만찮은 상대였다.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원수부에서 열린 마지막 군사 회의에서 봉천군의 장령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라고 장학량은 훗날 회고하였다.

9월 13일 봉군 제2군의 선봉대가 열하성을 침공하였다. "봉천군 남하!" 급전이 북경의 대총통부로 들어왔다. 조곤은 급히 낙양의 오패부에게 전보를 쳤다. "상황이 시급하다! 빨리 와라! 빨리 와라!" 오패부도 지체없이 움직였다. 노영상, 손문과 삼각동맹을 맺은 장작림이 움직이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9월 17일 오전 8시 오패부는 2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북경에 도착했다. "그대가 온 이상 이제 걱정할 것은 없다" 조곤은 매우 기뻐하며 오패부를 토역군 총사령에 임명하고 봉천군 토벌을 명령하였다. 18일 밤 북경 자금성 서쪽에 있는 중남해(中南海)의 사조당에서 조곤, 오패부의 주재 아래 직예군의 장령들이 모두 모였다.

오패부의 병력 역시 10만. 직예군 전체 병력은 30만명이 넘었지만 사방에 적을 두고 있기에 봉천군을 상대하는데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이 정도였다. 주요 진영은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 오패부, 부사령 왕승빈

제1군 군장 팽수신 제9사단, 제15사단, 제23사단, 3개 혼성여단 병력 4만명

제2군 군장 왕희경 제13사단, 1개 혼성여단, 기타 잡군 부대 등 병력 3만명

제3군 군장 풍옥상 제11사단, 2개 혼성여단 병력 3만명

 

팽수신이 지휘하는 제1군은 산해관 정면으로 진격하여 봉천군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한다. 왕희경이 지휘하는 제2군은 열하성으로 진격하여 봉천군의 이경림, 장종창 부대에 대응한다. 풍옥상이 지휘하는 제3군은 열하성 적봉(赤峰)을 거쳐 봉천성으로 진격한다. 

 

오패부의 비책은 산해관에서 양군의 주력부대가 싸우는 동안 직예군 최강부대인 제3사단을 요동만의 호로도(葫蘆島)에 상륙시킨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퇴로가 차단된 봉천군은 분단된 채 단숨에 괴멸될 참이었다. 그 다음에는 동북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적은 산해관에서 반드시 섬멸될 것이다!" 오패부는 참모들 앞에서 큰소리쳤다. 그는 외국 기자들 앞에서도 자신만만하게 "나는 20만 이상의 병력이 있다. 두달 안에 동북은 평정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절강전쟁으로 직예군의 많은 부대가 절강성에 묶인데다 직예파의 분열과 갈등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그동안 오패부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장비와 무기는 극도로 피폐했고 병사들의 사기 또한 엉망이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군비였다. 조곤이 대총통 선거에서 막대한 돈을 물쓰듯 쓴데다, 북경 정부의 재정은 오래 전부터 파탄 지경이었다. 수송 열차를 대여할 돈이 없어 남쪽에서 병력을 증원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봉천군은 강해진 반면, 직예군은 약화되어 있었다. 제1차 직봉전쟁 당시 활약했던 공군력에서도 직예군이 보유한 항공기는 70여대 정도로 봉천군보다 오히려 열세였다. 우세한 것은 오직 해군이었다. 오패부는 제해권을 장악하여 바다에서 봉천군을 향해 포탄을 쉴새 없이 날린다면 대응할 방법이 없는 봉천군은 무너지리라 여겼다.


* 혈전의 시작


전투는 9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열하성을 침공한 봉천군 제2군은 조양(朝陽)의 직예군 진지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수비대는 열하성의 지방군이었기에 단숨에 패주했고 9월 23일 조양은 봉천군의 손에 들어왔다. 30일에는 능원(凌源)을 점령하였고 평천(平泉)을 거쳐 단숨에 만리장성까지 남하하였다. 또한 봉천군 제5군과 제6군이 열하성 북쪽의 적봉(赤峰)을 공격하여 10월 3일 점령하였다. 연전연승이었다. 하지만 직예의 대군 또한 산해관을 향해 속속 출동하였다. 그 중에는 제3군 군장 풍옥상이 지휘하는 제11사단도 있었다.

풍옥상에 대해 묵은 감정을 여전히 안고 있던 오패부는 군비도 지급하지 않고 식량도 현지 조달하라고 명령했다. 북방의 겨울은 빨리 온다. 풍옥상의 군대는 방한복도 부족했다. 조곤은 야포 18문과 소총 3천정, 탄약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지만 정작 풍옥상이 받으러 가자 경리처장은 10만원의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대총통의 허가를 받았다. 왜 돈을 내라는 것이냐?" 풍옥상이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경리처장은 떨뜨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무기를 창고에서 내왔다. 하지만 대포에는 조준기가 없어 무용지물이었다.


오패부에게 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9월 23일 풍옥상의 부대는 북경을 출발하여 고북구(古北口)로 향했다. 그러나 이동 속도는 느리기 짝이 없었다. 북경에서 고북구까지는 30km도 되지 않는다. 하루 10km의 행군속도라면 3일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하지만 풍옥상은 북경 북쪽 교외의 회유(懷柔)를 거쳐 28일에야 밀운(密雲)에 도착했다. 또한 행군연습을 한다는 명목으로 이동 중에 북경 방면으로 도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의 부대가 고북구에 도착한 것은 10월 1일이었다. 11일에는 열하성 서남쪽의 난평(灤平)에 도착하여 봉천군 제2군과 마주보게 되었다. 물론 싸우지는 않는다. 양쪽은 대치만 할 뿐 총 한발 쏘지 않았다.

이미 장작림과 반 오패부 동맹의 밀약을 맺은 풍옥상은 한방에 정권을 뒤엎을 생각이었다. 그는 북경을 떠나기 전에 조곤에게 "왕희경의 제13사단이 출동하면서 북경의 방위가 취약합니다. 북경 교외에 주둔한 손악(孫岳)의 제15 혼성여단에게 북경 방위의 임무를 맡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조곤은 옳다며 손악을 북경 경비 부사령에 임명하였다. 손악은 풍옥상과 신해혁명 당시부터 친분이 있었다. 물론 오패부에 대한 불만도 같았다. 풍옥상이 거사에 끌어들이자 손악은 즉석에서 찬성하였다. 희봉구(喜峰口)에 출동해 있던 섬서군 제1사단장 호경익(胡景翼) 또한 거사에 참여키로 약속하였다.

거사에 참여한 또 한명의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직예군 부사령 왕승빈이었다. 그는 봉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패부로부터 경원시당하고 있었다. 직환전쟁과 제1차 직봉전쟁에서 크게 활약했음에도 휘하 부대를 빼앗기고 직예성장이라는 이름 뿐인 자리를 맡아 조곤의 뇌물 선거에 필요한 돈을 바치기 위해 직예성을 쥐어짜야 했다. 그럼에도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10월 4일 독전을 명목으로 풍옥상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오패부는 풍옥상과 장작림의 밀약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풍옥상의 행동이 수상쩍다며 경계하고 있었다. 풍옥상을 감시하기 위해 왕승빈을 보낸 것이었다. 풍옥상은 왕승빈을 보자 오패부를 성토하면서 거사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후 단도직입적으로 협력을 요구했다. 왕승빈도 쾌히 승락하였다. 감시하라고 보낸 자가 되려 넘어가 버렸으니  오패부가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장작림의 능숙능란한 책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직예파는 싸우기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반면, 봉천군에서는 오패부의 편을 들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이러니 오패부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

이경림, 장종창이 지휘하는 봉천군 제2군이 열하성을 휩쓰는 동안, ​9월 18일 산해관에서 양군의 주력부대가 격전을 시작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산해관은 예로부터 중원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서쪽으로는 연산산맥(脈)을, 동쪽은 발해만(灣)을 접하고 있다. 산과 바다를 접하고 있다하여 산해관이라 부른다. 명나라 말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던 만주족은 천하의 요새 산해관을 넘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천하제일관이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투항하여 관문을 열어주자 비로소 청태종은 10만 철기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진격하여 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산해관의 수비부대는 제1군 군장 팽수신이 직접 지휘하는 직예군의 정예 제15사단이었다. 제1차 직봉전쟁 후 오패부는 장작림의 공격에 대비해 산해관 주변에 다수의 토치카와 포대, 보루를 설치하고 지뢰를 깔았다. 또한 100m 간격으로 중기관총 1정꼴로 배치하였다. 봉천군이 돌격한다면 무시무시한 탄막에 직면할 것이었다. 또한 산해관 북서쪽 15km 떨어진 구문구(九問口)에는 근운악의 제14사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구문구에서 냉구와 희봉구에 이르는 만리장성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봉천군은 제1군과 제2군, 제3군, 제5군 등 약 5만5천명, 직예군은 제1군과 제2군 일부 부대, 증원군을 합해 4만5천명 정도였다. 9월 27일부터 봉천군의 전투기들이 매일같이 날아와서 산해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또한 봉천군은 구문구 주변의 전초 진지를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10월 7일 장작림의 총공격 명령이 내렸다. "조곤과 오패부를 생포하는 자는 상금 20만원을 준다. 수급을 얻는자는 상금 10만원을 준다. 여타 직예군 장령을 사로잡거나 회유한 자 또한 합당한 상금을 줄 것이다!" 새벽 4시 봉천군 제1군과 제3군이 산해관 공격을 시작하였다. 봉천군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날아와 폭탄을 떨어뜨리고 중포가 불을 뿜었다. 직예군 진지는 작열하는 포탄과 폭염으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패부의 군대는 오랜 전투로 단련된 정예였다. 간단히 무너지지는 않는다. 봉천군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지만 직예군의 기관총 앞에서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나갔다. 잠깐 사이 봉천군의 사상자는 4백여명이 넘었다.

 

오전 9시경, 곽송령이 1개 여단을 직접 인솔하고 직예군의 진지로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직예군의 저항이 완강하자 곽송령은 500명의 결사대를 모집하여 재차 돌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팽수신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직예군이 후퇴하자 봉천군이 추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직예군의 함정이었다. 그들이 들어온 곳은 지뢰밭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지뢰가 터지고 사방에서 수류탄이 날아와 봉천군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사상자는 700명이 넘었다. 봉천군은 수십차례 돌격했지만 팽수신이 지휘하는 제15사단의 강력한 방어 앞에서 매번 격퇴당했고 전투는 교착 상태가 되었다. 봉천군의 상황은 그야말로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처참했다. 어느 쪽이 우세한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직예군은 점점 사기가 떨어졌다. 8일 아침 봉천군 제19여단이 구문구의 직예군 전초기지를 급습했지만 텅 비어 있었다. 전날 밤 1개 대대가 통째로 도망친 것이다. 며칠째 식량도 탄약도 없이 굶어가며 싸우는 실정이었지만 증원부대도 없고 물자 보급도 없었다. 1개 대대가 도망치자 다음날에는 2개 연대가 도망쳤다. 구문구는 싸우지도 않고 봉천군의 손에 들어왔다. 산해관의 한쪽 방위선이 무너진 것이다. 보고를 들은 팽수신은 격분하여 해당 여단장에게 3일안에 되찾으라고 호통쳤다. 하지만 어떻게 탈환한단 말인가? 절망한 여단장은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 오패부 나서다 


10월 10일 오패부가 특별열차를 타고 산해관에 도착하였다. 그가 늦은 이유는 군비 확보 때문이었다. 외세에는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하던 오패부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철도와 세금 수입을 담보로 영국에서 차관을 빌리고 군표를 발행하여 북경의 상인들에게 강제로 떠넘겼다. 절강성에서 제섭원이 승리하자 노영상의 재산을 몰수했다.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그렇게 모은 돈은 8백만원에 불과했다. 그가 당장 필요한 2천만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조곤이 대총통 선거에서 쓴 돈이 1300만원이 넘었으니, 오패부로서는 속이 쓰렸을 것이다.


전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지만, 오패부가 전선에 도착하자 직예군의 사기가 올라갔다. 하남성과 산동성, 섬서성, 호북성에서 출동한 증원군도 도착하면서 병력은 8만 이상으로 늘어났고 약 6만명 정도인 봉천군보다 우세해졌다. 오패부는 진황도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조곤 앞에서 "15일안에 반란군을 평정해 보이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 그는 봉천군을 일거에 무너뜨리기 위해 세워두었던 비책을 꺼냈다. 호로도 상륙작전이었다. 직예군 최강부대인 제3사단 7천명을 방호순양함 해기호 등 3척의 군함에 태우고 13일 진황도를 출발하여 호로도로 향했다.

하지만 작전은 시도도 하지 못한 채 실패했다. 바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채 쉴새 없이 날아다니는 봉천군의 비행기 때문이었다. 직예 해군은 봉천군 비행기들의 공습을 받자 겁을 먹고 당장 기수를 돌려 진황도로 되돌아 오면서 오패부가 세운 비장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산해관과 직예군 진지는 매일같이 폭격을 받았고 오패부 사령부는 물론이고 진황도에 정박한 군함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두번의 직봉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것이 공군이었다. 제1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 비행기의 폭격에 봉천군은 머리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장작림의 전용차도 폭격을 받았다. 공군의 위력을 절감한 장작림은 2년 동안 모든 수단을 다해 비행기를 확보하고 파일럿과 정비사를 양성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에서는 봉천군의 비행기만 보일 뿐 직예군의 비행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봉천군은 최일선에만 80여대를 배치했고 모두 최신 기체들이었다. 반면, 직예군은 30여대도 되지 않는데다 모두 심하게 노후화되었고 부품이 없어 쓸모가 없었다. 봉급을 주지 못하니 파일럿이고 정비사이고 모두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격은 커녕 정찰도 할 수 없었다. 가끔 한두대가 정찰을 위해 날아다닐 뿐이었다. 제2차 직봉전쟁의 승패는 바로 공군력에서 결정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직예군의 주력 기체 중 하나였던 프랑스제 Breguet 14 전투폭격기. 1917년에 개발되어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300마력 엔진을 탑재하고 최고 속도는 190km/h, 7.7mm 기관총, 폭탄 300kg를 탑재할 수 있었다. 조곤은 북경 교외의 남완에 항공학교를 세우고 외국인 교관을 초빙해 파일럿과 정비사를 양성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얼마가지 않아 문을 닫고 항공학교에는 수십대에 달하는 항공기가 고철이 된 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 봉천군의 주력 기체 중 하나였던 프랑스제 Potez 25 전투기. 1924년에 개발되었으며 475마력 엔진​을 탑재하고 최고 속도는 214km/h에 달했다. 직예군이 보유한 기체가 죄다 1차 세계대전의 골동품이었지만, 봉천군은 1920년대 초중반에 생산된 팔팔한 신형기체들을 보유하였다. 장작림과 장학량은 지속적으로 공군에 투자하여 만주사변이 일어날때까지 동북공군은 중국 최대 최강을 자랑하였다.

직예군의 형편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군비가 바닥난 탓이었다. 돈이 없으니 열차를 운용할 수 없고 물자와 원군을 제때 전선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방한복도 식량도 없었다. 직예군 병사들에게 하루 배급량은 만두 2개가 전부였다.


구문구가 함락되자 다음 전투는 석문채로 옮겨졌다. 이곳마저 돌파되면 산해관이 포위되고 진황도까지 단숨에 적이 몰려온다. 오패부는 결사의 각오로 석문채 방어에 3개 사단을 투입했다. 13일 새벽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항공기와 포병의 막강한 화력 지원 아래 봉천군의 대부대가 몰려왔다. 방어하고 있던 섬서 제2사단은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붕괴되었고 사단장 장치공(張治功)은 말을 타고 도망쳤다. 이로 인해 주변의 다른 부대들까지 혼란에 빠져 무너져 버렸다. 팽수신도 도망쳤다. 석문채는 함락되었다.

오패부는 급히 자신의 제3사단을 비롯해 5개사단에 달하는 증원군을 석문채로 보냈다. 장작림도 예비대로 두고 있던 장작상의 제4군을 투입하였다. 같은 시간 산해관의 상황도 급박했다. 장학량, 곽송령이 지휘하는 봉천군 제3군이 직예군 제15사단을 야습으로 돌파하였다. 곽송령이 병사들 앞에 서서 직접 돌격했다. 어둠 속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고 대지는 수많은 봉천군 병사들의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직예군의 저항도 봉천군의 끈질긴 공격과 강력한 중포 사격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산해관의 혈전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던 10월 19일. 풍옥상은 예하 제장들을 모두 모아 그들 앞에서 선언했다. "북경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이른바 역사에서 말하는 "북경 정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