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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12. 직예파의 분열/blog.naver.com/atena

* 서세창의 하야

 

아직 직봉전쟁이 끝나기 전인 ​1922년 6월 2일, 대총통 서세창(徐世昌)이 하야를 선언했다. 1918년 10월 4대 대총통(원세개-여원홍-풍국장-서세창 순)의 자리에 오른 지 3년 8개월 만이었다. 북양군벌의 원로이자, 중화민국 초기의 가장 명망있는 정치가 중의 한 사람인 그는 능력보다 운이 좋았다.

직예성 천진시 출신으로 원래는 명문가이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으면서 몰락하여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다. 26살에 향시에 합격한 후 이홍장, 원세개의 눈에 들어 측근이 되었다. 원세개가 신건육군(북양군의 전신)을 창설했을 때 서세창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원세개의 막료가 되어 도왔다. 덕분에 원세개가 실권을 잡자 서세창 역시 출세가도를 달려 동3성 총독을 거쳐 국무경(민국 초기 내각의 수장. 1916년 6월 정부 조직 개편에 따라 국무총리로 바뀌었다.)이 되었고 대총통의 자리까지 올랐다.

 

서세창의 40년 관직 생활을 평가한다면 전형적인 청말 관료의 그것이었다. 국가를 위해 한 일도 없고 남긴 것도 없다. 처세에 능하고 무리하지 않으며, 자기 의견 없이 남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할 뿐이다. 사람을 대할 때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띄웠다. 군벌이 발호하던 난세에, 유능한 관료일 뿐 뛰어난 정치력이나 카리스마도 없고 따르는 세력도 없는 그가 자신의 몸을 지키고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던 것은 오직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거의 20살이나 어린 까마득한 후배인 오패부의 핍박에 못이겨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작림을 만주로 쫓아내면서 직예의 천하가 되자, 오패부는 장작림과 가까웠던 서세창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우선 직예파 군벌들과 정치가들을 선동했다. 가장 먼저 장강 상류 경비 총사령관 겸 제2사단장 손전방(孫傳芳)이 서세창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양호전쟁에서 활약했던 그는 오패부의 눈에 들어 직예파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다. "혼란을 끝내고 분열된 남북이 통일을 하려면 가장 먼저 법통을 회복해야 한다! 법통이 회복되면 다른 깃발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여원홍 총통을 복위시키고 국회를 소집해야 한다." 즉, 단기서와 안복계에 의해 추대된 서세창은 적법한 총통이 아니며 지금의 혼란 또한 이 때문이니 스스로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오패부 역시 서세창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어 "이미 전국의 십여개 성에서 같은 뜻입니다."라며 물러나라고 종용하였다. 그리고 천진에서 직예파들을 불러모아 여원홍의 복직을 논의하고 주요 언론에 서세창의 비방과 퇴진을 요구하는 기사를 실도록 하였다. 서세창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와병을 내세워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분한 마음을 달래며 그가 향한 곳은 천진의 영국 조계였다. 천진은 수도 북경과 가까우면서 상해와 광주, 무한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이자 근대 공업이 집중되어 화북 경제의 중심지였다. 북양군벌 시절 몰락한 많은 정치가, 관료, 군벌들이 천진의 외국 조계에서 신변을 보호하면서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돈을 벌거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정계로의 복귀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서세창은 1939년 6월 84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정치에는 완전히 손을 뗀 채 이곳에서 독서를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노년을 보냈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화북을 점령한 일본이 그를 회유하려고 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아마도 10년 정도 더 살았다면 마오쩌둥의 공산군이 천하를 차지하는 것까지 지켜보았겠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았다는 점에서 역사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었다. 신을 쫓아낸 조곤과 오패부, 장작림이 차례로 몰락하고 남방의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던 장개석이 단숨에 중국 전토를 통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삼국지에서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고 탄식했던 제갈량의 마음이 실로 헤아려졌을 것이다.

* 조곤과 오패부의 갈등

 

​눈의 가시였던 서세창이 사라지자 조곤은 그 자리를 탐냈다. 하지만 오패부가 "아직은 불가합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오패부의 생각은 남북이 분열되고 중국이 혼란스러운 지금은 법통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지금 조곤이 대총통이 된다면 우선 남방의 손문이 가만히 있을 리 없는데다 사방이 적이 될 것이며 천하는 더욱 어지러워 질 것이다. 반면, 조곤은 자신이 대총통이 된 다음 직예의 깃발로 중원을 평정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오패부가 끝까지 자기 생각을 고집하자 조곤은 부득이 참을 수 밖에 없었지만 요사이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오패부가 불쾌했다. 단기서와 장작림을 꺾은 오패부는 위세가 하늘을 찌르면서 나날이 교만해졌다. 오패부는 원래 조곤이 키워준 사람이다. 오패부가 없으면 조곤도 없고 조곤이 없으면 오패부도 없다. 그동안 두 사람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였다. 하지만 권력이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오패부는 2대 대총통이었다가 장훈의 복벽사건으로 물러났던 여원홍(黎元洪)을 대총통으로 추대하였다. 겉보기에 풍체 좋고 위엄 넘치는 여원홍은 원래 ​북양계통이 아니다. 이홍장과 함께 청말 4대 명신의 한 사람인 장지동(張之洞)이 그의 후견인이었고 출신도 배경도 직예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해혁명 당시 그는 호북성 무한에 주둔한 제21협(여단)의 협통(여단장)이었다. 그런데 무창 봉기가 일어나자 혁명군에 의해 거의 반강제적으로 혁명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남경에서 손문의 임시 정부 부총통이 되었다. 덕분에 일개 군인에서 원세개가 죽자 그 자리를 물려받아 대총통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여원홍 또한 서세창과 마찬가지로 시운을 잘 탄 사람일 뿐, 일국의 지도자에 걸맞는 식견과 실력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민국 초기의 지도자였다는 것이 신생 중국의 가장 큰 불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오패부가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사람"이라며 추천한 이유였다. 다양한 파벌들로 구성된 북경정부는 물론이고, 광주정부를 이끄는 손문 역시 여원홍에 대한 반감은 없다. 또한 여원홍은 세력도 실력도 없으므로 조종하기 쉽다. 물러나야 할 때에는 말 한마디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대총통에서 물러난 뒤 천진에서 은거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던 여원홍은 오패부가 ​자신에게 대총통에 복직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먹고 사는데 궁핍하지 않을 뿐더러, 어차피 북경정부의 암투는 신물이 날 정도로 경험한 그였다. 북양군벌에 대한 반감도 컸다. 또한 조곤이 대총통이 되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예파 군벌들의 완강한 요청에는 견딜 방법이 없었다. ​6월 11일 여원홍은 북경에서 5대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조곤은 보정의 저택에 틀어박혀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 직후의 일이었다. 오패부가 조곤의 저택을 방문하여 이런저런 국사를 논하였다. 그런데 북경정부의 관료들이 조곤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조곤이 아니라 오패부를 만나러 왔다며 조곤더러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였다. 조곤은 당연히 화가 났다. "내 집에서 나보고 나가라니 어디로 가란 말이냐!"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그들이 온 목적은 이전에 양사이 내각이 임명했던 조여림의 체포 때문이었다. 그가 2천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횡령했다며 체포하는데 오패부의 동의를 받기 위함이었다. 장직림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조여림은 장작림이 패배한 이상 보호막이 사라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조곤이 알면 반대할 것이 뻔했다.

오패부가 즉석에서 수락하자 다음날 조여림은 체포되었다. 이 사실을 조간 신문을 통해 안 조곤은 격분했다. 오패부나 누구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완전히 무시당한 셈이었다. 직예의 수장을 자처하는 조곤은 수족으로만 여기던 오패부가 자신을 제쳐놓은 채 실세인양 행세하니 즐거울 리 없었다. 당장 오패부를 불렀다. 꼭두새벽에 자다가 불려나온 오패부 역시 기분이 나빴다. "어르신께서는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이렇게 부르십니까?" "흥, 너도 이제 출세했다고 나 따위는 안중에 없는가 보구나." 길길이 호통을 치는 조곤에게 오패부는 달랬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호되게 때려주십시오. 화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조곤은 고개를 돌린 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오패부는 화를 애써 참고 더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절을 한 후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두사람의 십년 지기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원래 직예파란 원세개가 죽은 뒤 권력을 잡은 단기서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북양군벌 내 여러 군벌들이 反 단기서의 깃발로 잠시 뭉친 것에 불과하였다. 그 선봉에 선 풍국장, 조곤 등이 직예성 출신이기에 직예파라고 통칭한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유대감도 없고 충성심도 없었다. 이 점이 장작림의 봉천파, 염석산의 산서파, 풍옥상의 서북파 등 한 사람의 수장을 정점으로 뭉친 다른 군벌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세력이나 군사력에서는 최강이었지만 합종연횡으로 뭉친 여러 군벌들의 느슨한 연합체일 뿐이었다.

직봉전쟁 승리 후 직예파는 조곤의 보정파와 오패부의 낙양파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조곤의 동생이자 직예성장인 조예는 오패부를 싫어하였다. 그는 조곤에게 걸핏하면 "오패부는 우리를 밀어내려는 흑심을 품고 있습니다"라며 참소하자 오패부는 그를 밀어내고 자신의 부하인 제23사단장 왕승빈을 직예성장에 임명하였다. 이는 영광스럽게 보이지만 성장은 군권이 없으므로 실은 휘하의 군대를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이는 오패부의 술책이었다.

왕승빈은 처음부터 오패부의 심복이 아니다. 몇년 전만 해도 제1혼성여단장을 맡아 오패부와는 동렬의 지위였다. 게다가 고향은 장작림과 같은 봉천성이었다. 제1차 직봉전쟁 이전 직예파와 봉천파가 갈등을 빚자 서세창은 직예파이면서 장작림의 동향인 왕승빈에게 조정 역할을 맡겼다. 눈치없이 양 진영을 부지런히 오가는 왕승빈이 오패부의 눈에는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조곤에게 "왕승빈이 장직림과 내통하고 있는 것같다."라고 참소하였다. 이로 인해 왕승빈은 공공연히 내통자라고 낙인찍히게 되었다. 게다가 오패부가 자신을 직예 성장으로 임명하면서 군대를 빼앗자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속으로 앙심을 품었다.

 


또 한 명의 불만분자는 풍옥상이었다. 그는 하남독군으로 개봉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낙양에는 오패부가 있고 정주에는 근운악(근운붕의 동생)의 제14사단이, 하남성 북쪽의 경한철도 연선에는 호경익(胡景翼)의 제24사단이 각각 주둔하였다. 모두 오패부의 측근이었다. 풍옥상은 오직 개봉만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풍옥상이 개봉으로 내려가자말자 오패부는 일시금으로 80만원에 매월 20만원의 군비를 상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풍옥상은 단칼에 거부하였다. "그런 명령은 들을 수 없습니다. 굳이 하겠다면 당신이 직접 하남성을 맡으시구랴." 오패부는 풍옥상의 전문을 보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남성은 중국에서도 가장 토비가 많고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심하였다. 풍옥상은 토비를 강력하게 척결하는 한편,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아편의 판매와 병사들의 약탈을 엄중히 금지시켰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는 그동안 관아와 결탁하여 주민들에게 온갖 피해를 주었던 사찰들에 대해서도 엄중히 단속하여 학교로 개조하였다. 당시의 군벌로서는 보기 드문 선정이었다. 풍옥상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오패부는 그를 질시하면서 "불교를 탄압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비난하였다.


풍옥상이 사사건건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는데다 하남성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 오패부는 근운악과 호경익을 부추겨 풍옥상을 고립시켰다. 풍옥상은 오패부의 압박에 못이겨 결국 1922년 10월 독군자리로서 물러났다. 독군에 임명된지 고작 5개월만의 일이었다. 새로운 독군은 오패부의 충복인 장복래가 되었다.

 

풍옥상은 내심 안휘독군을 원했다. 하지만 오패부는 그를 육군부 검열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북경의 육군부란 이름만 중국 육군 최고 기관일뿐, 군벌이 난립하는 현실에서 실권이라고는 없는 유명무실한 기관이었다. 풍옥상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지만 꾹 참았다. 그는 보정으로 가서 조곤을 만나 하소연하였다. 풍옥상은 직예파의 원로였던 육건장의 외조카였기에 조곤은 그를 좋은 말로 위로하였다. "북경 주변에는 쓸만한 병력이 없다. 그대의 군대는 강하다. 남의 눈치를 보며 하남성에 남아있기보다 병력을 이끌고 북경으로 온다면 훗날의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네. 또한 산동성은 독군과 성장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그대는 기회를 보아서 산동성을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군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경비는 숭숭문(崇文門, 북경 내성에 있는 성문 중 하나)의 통과세로 충당케 하여 편의를 봐주었다. 물론 1개 사단과 3개 혼성여단 약 2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먹여살리는데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풍옥상은 일단 감내하기로 했다. 기분 좋게 헤어졌지만, 이날의 조곤은 이 배려가 나중에 크나큰 비수로 자신의 등에 꽂힐 줄이야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풍옥상은 북경 교외의 남완(南苑)에 병력을 주둔시킨 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는 직예성과 하남성, 산동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중에서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들은 궁핍한 환경에 익숙했고 인내심과 끈기가 강하였으며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다. 풍옥상 자신부터 빈민 출신이었다. 부모는 그가 열살 남짓이었을 때 아편 중독으로 죽었다. 살던 집은 고리대금업자의 손에 팔렸다. 빈털털이가 되어 오직 먹고 살기위해 15살의 나이에 졸병으로 입대하였다. 오패부나 다른 직예파 군벌들처럼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그는 군벌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현실에 분노하였다. 그 분노로 병사들을 엄한 규율로 훈련시켰고 계급고하의 차별없이 똑같은 생활을 하며 동거동락하였다. 중국의 모든 군대를 타락시켰던 술과 아편, 담배, 사치품도 풍옥상의 제11사단은 모두 금지였다. 사소한 규율 위반조차 엄벌을 받았다. 그의 군대는 가난뱅이 오합지졸에서 직예파 최강의 군대로 탈바꿈하였다.


풍옥상의 명령이 한번 떨어지면 전군이 10분 이내에 도열하여 출동 준비를 끝낸다. 영하 10도 이하의 강추위에서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도 40km 이상을 쉬지 않고 강행군하여 공격에 나설 수 있고 꽁꽁 언 땅에 재빨리 참호를 파서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다. 중국의 어느 군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의 휘하에는 20년 이상 함께 했던 녹종린(鹿鍾麟), 장지강(張之江), 송철원(宋哲元), 풍치안(馮治安), 유여명(劉汝明) 등 뛰어난 지휘관들이 있었다. 이들은 뒷날 장개석의 북벌전쟁에 참전하였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도 항일명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 여원홍 쫓겨나다


여원홍을 대총통으로 추대한 오패부는 내각의 구성에도 관여하였다. 명망 높은 외교관 출신인 안혜경(慶)과 왕총혜(王寵惠) 등이 차례로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오패부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각료들 역시 태반이 오패부파였기에 소위 '낙파(낙양파, 오패부가 낙양에 주둔했기 때문) 내각'이라고 불리었다. 이렇다보니 여원홍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11월 18일 밤이었다. 재정부 장관 나문간(羅文幹)이 연회에 참석한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 체포당했다. 대총통 여원홍의 명령이었다. 여기에는 중의원 원장(당시 중국 국회는 미국의 양원제를 모방하여 중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뉘었다.) 오경령(呉景濂)의 관여가 있었다. 직예성장 왕승빈과는 족형(族兄) 관계인 그는 오패부와 사이가 나빴다. 오경령은 여원홍을 찾아가 나문간이 국회와 대총통의 허가도 없이 외국에서 차관을 빌려 오패부의 군비로 사용하고 일부는 횡령했다며 즉시 체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여원홍은 그 자리에서 북경시 경찰청장에게 나문간의 체포를 지시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안 오패부는 격분했다. 대총통은 각료를 체포할 권리가 없다며 즉각 석방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여원홍은 부득불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22일 나문간은 풀려났다. 그러나 오경령이 다시 여원홍의 사저를 찾아왔다. 그는 한통의 전문을 내밀었다. "나문간은 국가의 적이며 권한을 남용했다. 따라서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보낸 이는 조곤이었다. 조곤이 오패부에게 한방 먹인 것이었다. 나문간은 하루만에 도로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체면이 땅에 떨어진 오패부는 이를 갈면서도 차마 옛주인 조곤을 적을 돌릴 수 없어 물러났다. 직예파의 분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24년 2월 1일 하남성 정주에서 전국철도노조의 성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오패부는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경한철도를 비롯한 화북의 주요 철도에 대한 노조 결성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세력이 갈수록 커져 전국 노조를 결성하려고 하자 오패부는 대회 개최를 금지시키고 대회장 주변을 무장 경찰을 배치시켰다. 하지만 소련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고 있던 노조측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대회장에는 수많은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모인 숫자는 무려 2만명이 넘었고 그 중에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중의 한사람인 장국도도 있었다. 곳곳에서 태업과 파업이 일어나면서 화북의 철도는 태반이 마비되었다. 오패부는 군대를 출동시켜 철도 파업에 엄중히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2월 7일까지 다수의 주동자가 체포되고 40명 이상이 총살당했다. 철도 노조는 해산당했다. 소위 "2.7참안"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소련은 북경정부와 관계를 끊고 손문에 더욱 접근하게 되었다.


오패부의 오만함과 조곤의 야심에다 직예파 장군들은 경쟁적으로 자파의 세력 확대에 광분하면서 직예파는 갈수록 분열되었다. 손전방은 2개 사단(제2사단, 제12사단)으로 복건성을 침공하였다. 전해에 이후기를 격파하고 복건성을 차지하였던 손문파의 군대는 진형명을 토벌하기 위해 광동성으로 이동하였다. 덕분에 손전방은 이렇다할 저항도 없이 1924년 4월 12일 복주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손전방이 복건성을 장악하자 오패부는 손전방을 복건 독군에 임명하고 여세를 몰아 광동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모처럼 자기 기반을 차지한 손전방은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광동성에는 손문이 이끄는 남방 4개성의 대군이 모여 있기에 애써 위험을 감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역시 남북통일을 꿈꾸는 오패부의 권위에 큰 상처를 주었다.


여원홍이 취임한지 1년 가까이 되자 조곤은 슬슬 그를 쫓아낼 궁리를 시작했다. 4월 26일 풍옥상을 비롯해 북경에 주둔한 직예파 간부 85명이 총통부 앞에 모여서 그동안 밀린 군비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하였다. 국무총리 장소증(張紹曾)이 나서서 우선 140만원을 3번에 걸쳐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풍옥상은 자기 부대에 미지급된 돈만 139만원이라며 그 돈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또한 일부 각료들마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등 북경정부 전체가 마비되자 장소증은 사직서를 던지고 야반도주하듯 천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6월 7일 풍옥상 등 직예파 군인 500명이 총통부 앞에서 다시 소란을 피웠다. 다음날 천안문 앞에서 공민당 소속 회원 수백명이 모여 소위 "국민대회"를 열어 여원홍 퇴진을 외쳤다. 9일에는 북경 경찰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또한 여원홍의 저택을 경비하는 부대가 멋대로 철수하였고 수도와 전기, 전화까지 죄다 끊어버렸다. 다음날 여원홍의 집앞에서 수백여명의 군인과 경찰, 공무원들이 모여서 체불된 월급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북경 전체가 난장판이었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조곤이 있었다.


사방에서 돈 타령에다 신변마저 위협받은 여원홍은 "이래서는 대총통의 직을 수행할 수 없다. 부득이 정부를 천진으로 옮긴다."라고 선언한 후 6월 13일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북경역으로 가서 천진행 기차에 올랐다. 야반도주나 다름없었다. 여원홍이 북경을 떠나자말자 그동안 모르쇠로 일관하던 조곤은 파업에 들어간 모든 군인들과 공무원, 경찰들에게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소란은 일순간에 잠잠해졌다. 여원홍이 제발로 나가도록 만든 조곤의 음모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 직후 조곤에게 내무총장(장관) 고능위(高凌霨)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대총통의 인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곤은 아차 싶었다. 여원홍이 들고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만만찮은 인물이다. 조곤의 핍박에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대총통의 인장은 옛 왕조의 옥새와 같다. 중화민국의 원수이자 정부의 수반이며 육해군 통수권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게 없으면 여지껏 해온 것도 무용지물이고 조곤이 대총통의 자리에 오르는 꿈 또한 허사였다. 급히 천진의 왕승빈에게 전문을 보냈다. 여원홍의 특별열차가 천진 입구에 있는 양촌역에 도착했다. 완전 무장한 경찰들이 역사에 쫙 깔려 있었다. 그 앞에는 왕승빈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불쾌한 표정으로 묻는 여원홍에게 왕승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대총통의 인장을 내놓으십시오." "모른다.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을 말할 때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왕승빈의 협박에도 여원홍은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왕승빈은 무슨 수를 써더라도 대총통의 인장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대총통의 권위마저 무시한 오만불손한 행동에 결국 여원홍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총통의 인장을 돌려받은 왕승빈은 여원홍을 윽박질러 대총통의 직에서 물러날 것과 국무원에 권한대행을 한다는 선언을 하게 하였다. 다음날 새벽 비로소 여원홍은 풀러날 수 있었다. 장장 12시간 30분이 넘도록 붙들려 있었던 것이다. 276년 역사의 청조를 일거에 무너뜨렸던 혁명군의 원수가 정계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상해로 가서 손문의 국민당에 합류하는 것을 타진하기도 하고 대총통의 복귀를 꿈꾸기도 했으나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다. 결국 정계로의 꿈을 포기하고 천진에서 사업을 벌이고 학교를 짓기도 했다. 제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 풍옥상이 정권을 잡자 여원홍을 대총통으로 다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그 자신이 이미 정치의 뜻이 없었다.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을 보내다 1928년 6월 3일 천진에서 뇌출혈로 타계했다. 남경국민정부의 수장으로 북벌에 성공하여 북경과 천진을 장악한 장개석은 그의 장례를 중화민국 국장으로 치뤄주었다.


* 조곤 회선(賄選)


드디어 여원홍을 몰아낸 조곤은 대총통이 되려고 서둘렀다. 오패부의 심복인 소요남과 장복래가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조곤의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대총통이 되려면 우선 국회를 소집해야 했다. 조곤은 북경의 국회의원들에게 뇌물을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조곤이 국회의원들을 매수하자 손문도 천진으로 사람을 보내어 반 직예파 국회의원들을 매수하였다. 일시금으로 500원을 주고 상해로 오면 매월 300원씩 주기로 약속하자 당장 20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상해로 모였다. 안휘파 절강독군 노영상 역시 손문과 연합하여 조곤의 뇌물 선거를 반대하고 국회의원들에게 남쪽으로 내려올 것을 요구했다.


하나둘씩 북경을 떠나자 조곤은 더 많은 돈을 내걸었다. "일주일에 100원씩 주겠다. 대총통 선거에 참여하는 자는 5천원을 준다. 지방에 내려간 의원은 특별비로 1만원을 더 얹어주겠다." 그가 총통선거까지 쓴 돈은 무려 1350만원에 달했다. 가뜩이나 적자에 허덕이는 북경정부의 반년치 세수와 맞먹는 돈이었다. 그 돈은 직예성장 왕승빈이 직예성 170개 현을 사정없이 쥐어짠 결과였다. 현마다 적게는 1만원에서 3만원씩 내놓아야 했다. 그래도 부족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막대한 돈을 빌리고 기업가들로부터 이권을 댓가로 뇌물을 받았다.


낙양에서 그 꼴을 보고 있는 오패부는 불만이 많았다. 허울 뿐인 총통따위 누가 되어도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돈이 있다면 군대를 양성하여 중원을 평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직예군은 몇개월씩 월급이 체불된데다 장비도 피폐했다. 장작림과 손문이 남북에서 부지런히 칼을 갈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감투 따위에 매달리는 조곤의 행태는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지만 오패부는 모른 채 했다.


10월 5일 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그동안 그렇게 돈을 뿌렸는데도 참석자는 총 의원 874명 중 고작 400여명에 불과했다. 조곤은 "무조건 출석만 시켜라. 그럼 수고비로 5천원을 주겠다."라며 사람들을 닥달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모인 사람은 555명이었다. 대총통을 뽑으려면 전체 의원의 2/3(583명)가 모여야 한다. 30명이 모자른 것이다. 중의원 의장 오경령은 593명이 모였다고 허위로 기재하였다. 대총통 선거가 시작되었다. 개표 결과 조곤은 480표, 손문은 18표였다. 10월 10일 조곤은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젊은 시절 천진에서 옷감을 팔던 가난한 장돌뱅이가 난세를 만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역사서에는 이른바 "조곤 회선", 즉, 조곤의 뇌물선거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