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욕을 잊지 않겠다
중원을 놓고 벌어진 장작림과 오패부의 한판 승부는 겨우 십여일만에 끝났다. 하지만 파괴력은 2년 전의 직환전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양측은 20만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북경과 천진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봉천군은 전사자만도 1만 이상, 직예군의 사상자 역시 수천에 달했다. 봉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한달 전, 1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히 산해관을 넘었던 장작림은 참담한 모습으로 패잔병들 사이에 끼어 산해관을 향해 도망쳤다. 도주하는 봉천군의 머리 위로는 직예군 전투기들이 기총 사격을 가하고 바다로부터는 직예파의 발해함대가 쉴새없이 함포를 쏘아댔다.
5월 7일 장작림은 경봉철도를 따라 일단 란주(濼州)에 도착했다. 란주는 천진과 산해관 사이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곳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패잔병들을 모아 추격해 오는 직예군을 막는 한편 진용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장작림이 이곳에 버티고 있자 최일선에서 퇴각하는 부대가 차례로 도착하였다. 장작상의 서로군은 완전히 괴멸하였다. 대부분 마적 출신의 오합지졸이었기에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장작상과 장경혜 등 수장들만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형편없는 몰골로 돌아왔다. 당초 출병한 12만명 중 남은 병력은 2만도 채 되지 않았다. 장작림으로서는 오십 평생을 통틀어 가장 쓰라린 패배였다. 하지만 이경림의 제7 혼성여단과 장학량의 제3혼성여단, 곽송령의 제8혼성여단은 많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부대를 유지하였다. 안절부절하던 장작림은 희색이 만연하였다. 다른 부대는 아무래도 좋지만 봉군 최강의 3개 여단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었다. 하늘은 아직 장작림을 버리지 않았다.
한편, 승자가 된 오패부는 의기양양하게 봉군 총사령부였던 군량성에 입성한 후 천진을 거쳐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총통 서세창에게 압력을 가하여 장작림에게 엄벌을 내리라고 요구하였다. 서세창은 상전처럼 행세하는 오패부가 아니꼬왔지만 5월 10일 장작림이 맡고 있던 몽골경략사와 동삼성 순열사, 봉천독군에서 면직한다고 선언하였다. 봉천독군에는 오준승을, 흑룡강성 독군에는 풍덕린을 임명하였다. 이 인사는 만주에 남아있던 봉계 지휘관들을 회유하고 장작림과 이들을 이간질시켜 봉천파를 내부에서부터 와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오패부의 계략은 통하지 않았다. 군벌연합체에 불과한 안휘파나 직예파와 달리, 봉천파는 오직 장작림 한사람의 것이었다. 마적시절부터 의리로 똘똘 뭉친 그들은 수십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장작림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장작림 없이는 봉천파도 없다. 또한 장작림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다. 장작림이 건재한 이상 만주에서 그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오준승, 풍덕린 등은 직접 산해관까지 가서 장작림을 만났다. 장작림은 오준승을 떠볼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형님, 우리는 오랫동안 친구였습니다. 대총통이 형님을 독군으로 임명했으니 형님이 나를 어디로 보내건 무조건 따를 뿐이오."
오준승은 장작림보다 12살 위였다. 봉천파의 수장인 장작림이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자 오준승은 짐짓 화를 내는 척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동3성에서 당신의 위엄은 저보다 훨씬 큽니다. 뭘 하더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같은 사람은 하루를 하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이어서 말했다. "대총통이건, 조가이건, 오수재(오패부)이건 그들의 헛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됩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오준승이 딴 마음이 없다며 충성을 맹세하자 장작림은 기분좋게 웃었다. 만약 오준승이 분수 넘치는 야심을 품었다면 결단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오준승은 장작림의 심복으로서 승승장구하였고 훗날 장작림이 황고둔에서 열차 폭발로 죽었을 때 오준승 또한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
5월 12일, 장작림은 란주에서 동3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을 "봉천군 총사령"이라고 칭하였다. 북경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직군이 북상하여 5월 26일 란주가 함락되었다. 장작림은 전 병력을 산해관에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게다가 흑룡강성 동남쪽의 소련 국경과 가까운 수분하(綏芬河)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고사빈(高士賓), 노영귀(盧永貴) 등이 우두머리였다. 고사빈은 전 길림군 제1사단장으로 이전에 장작림의 책략으로 쫓겨났던 길림독군 맹은원의 사위였다. 그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그는 장작림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또한 옛 부하인 노영귀 역시 가담하여 제19혼성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수분하 주변의 중동철도를 장악하였다. 약 3천여명 정도였던 반란군은 주변의 철도 경비대와 치안부대, 마적들까지 끌어모아 1주일도 안되어 1만 5천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오패부는 고사빈을 길림성 토역총사령에 임명하였다.
장작림은 급히 봉천으로 돌아왔지만, 직군을 막기에도 급급한 그로서는 당장 이들을 진압할 병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둔다면 길림성 전체가 반란군에게 장악되어 만주가 두동강 날 판이었다. 장작림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 순간 장작림의 앞에 나선 자가 있었다. "이 장종창에게 어디든 죽을 자리를 주십시오. 저는 이 지역에 대해 잘 압니다.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서 그동안 어르신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나중에 산동왕이 되어 온갖 악명을 떨치며 "구육장군(狗肉將軍)"이라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던 장종창은 민국 초기를 거쳐간 수많은 군벌 중에서도 장작림만큼이나 이채로운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산동성 래주부(莱州府)의 가난한 취고수(관아에 속한 군악대 중에서 나팔을 부는 군사)의 아들로 태어난 장종창은 장작림, 오패부와는 8살 차이였다. 그는 소시적부터 중국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며 마적으로 활동하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국민혁명군에 가담하는 것이 대세라고 생각하고 상해에서 손문의 측근인 진기미의 휘하에 들어갔다. 특유의 수완으로 진기미의 눈에 들어 강소 육군 제3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손문이 원세개에게 패배하자 이번에는 원세개에게 붙어 풍국장의 부하가 되었다. 혁명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던 진기미가 상해의 프랑스 조계로 돌아왔다. 원세개로서는 손문 다음으로 눈의 가시였다. 장종창은 진기미의 은신처를 찾아낸 다음 부하를 보내어 암살하였다. 1916년 5월 18일의 일이었다. 이것으로 손문은 가장 유력한 혁명 지휘관을 잃었다. 얼마 뒤에는 또 한명의 혁명 지휘관인 황흥이 병사하였다. 모든 기반을 잃은 손문은 진기미와 황흥의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소수의 측근만을 데리고 남쪽의 광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풍국장은 이 공을 높이 사서 장종창을 강소성 제6혼성여단장에 임명하였다. 그에게는 오직 출세만 있을 뿐 은혜나 의리 따위는 없었다.
1917년 9월 손문이 남방군벌들을 규합하여 북양군벌 타도를 외치며 호법전쟁을 일으켰다. 혁명군이 호남성을 침공하자 장종창도 병력을 이끌고 호남성으로 출병하였지만 참담하게 패배하여 도망쳤다. 천진으로 가서 직예파의 우두머리인 조곤을 찾아가 많은 뇌물을 바치며 관직을 얻으려고 했다. 뇌물에 눈이 먼 조곤은 장종창에게 여단장 자리 하나 줄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는 오패부가 걸림돌이었다. 오패부는 조석으로 주인을 바꾸고 탐욕스러운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곤에게 장종창은 무능하고 난폭하며 주변의 인망이 없고 재물을 긁어 모으는데만 이골이 난 자라며 절대로 그를 써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문전박대당하여 쫓겨난 장종창은 1922년 11월 만주로 가서 장작림을 만났다. 장작림은 그를 크게 환대하였다. "우리는 같은 녹림대학 마적과 출신이 아니오?"
장종창은 젊은 시절 블라디보스톡에서 중동철도(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되어 만주리부터 블라디보스톡까지 북만주를 관통하는 철도)의 인부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를 맡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동만주의 지리에 밝았고 러시아어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장작림은 천군만마를 만난 셈이었다. 즉석에서 토벌군의 사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오준승에게 지시하여 무기를 내주도록 하였다. 장종창은 약 500여정의 구식 소총과 산포 1문, 중기관총 3정, 많은 탄약을 얻어 오백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열차를 타고 하얼빈을 거쳐 무단강으로 향했다.
고사빈의 반란군은 무단강 서쪽의 해림(海林)까지 진출하여 봉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주변 마을을 마구 약탈하였다. 반란군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에 정면 공격은 승산이 없었다. 장종창은 철도 인근의 숲속에 부하들을 매복시키고 산포와 기관총을 배치하였다. 6월 3일 반란군을 잔뜩 실은 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열차가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장종창은 침착하게 산포로 맨 앞의 기관차를 겨냥한 후 발사했다. 포탄은 기관차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화염에 휩쌓인 기관차가 제어를 잃으면서 열차가 통째로 뒤집어졌다. "쏴라!" 장종창의 명령에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반란군은 기습을 당하자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숫적으로는 1/10도 되지 않는 장종창에게 단 한번의 전투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고사빈과 노영귀는 도망치다가 배반한 부하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길림성은 토비로 전락한 반란군의 준동으로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장작림은 이것으로 한시름 덜었고 장종창을 길림군 제3혼성여단장 겸 중동철도 방위 부사령에 임명하였다. 드디어 출세의 길을 잡은 장종창은 이 기회를 이용해 병력을 모으고 노획한 무기로 무장시켰다. 대부분 투항한 반란군과 마적들에다 적백내전에 패배하여 만소 국경으로 쫓겨온 러시아 백군 출신 용병들까지 뒤섞인 잡탕 부대였지만 장종창은 하루아침에 봉천군의 유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장작림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왕승빈의 제23사단과 팽수신의 제26사단 등 직군부대가 란주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산해관으로 밀려왔다. 오패부는 이번 기회에 장작림을 완전히 끝장낼 생각이었다. 만약 산해관이 돌파된다면 장작림도 끝장이었다. 장작림은 휘하의 최정예부대인 장학량, 곽송령, 이경림 3개 여단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곽송령을 사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학량과 친분이 있는 미국인 목사를 진황도의 직군 사령부로 보내어 팽수신에게 강화를 청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 산해관에서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6월 9일부터 재개된 직봉의 전투는 그야말로 처절한 혈전이었다. 봉천군은 곽송령의 지휘 아래 결사적으로 직예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만리장성을 따라 배치된 기관총이 돌격해 오는 직예군 병사들을 향해 불을 뿜고 포탄이 양쪽 진지에 작열했다. 상공에서는 직예군의 전투기들이 폭격을 거듭했다. 하지만 봉천군은 전투기가 없었기에 맞설 방법이 없었다. 봉천군은 연대장만 3명이 전사하고 3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직예군 역시 손실이 4천명이 넘었다.
손실만 갈수록 늘어날 뿐 도저히 봉천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방법이 없는데다 일본이 불간섭 방침을 깨고 "직예군의 산해관 돌파를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였다. 만주에는 이른바 "관동군"이라 불리는 일본군이 여순에 사령부를 두고 남만주 철도와 봉천, 장춘 등 주요 요충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숫자는 약 1만명. 그 정예함은 장작림의 봉천군 따위와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당한 내정간섭이었지만 일본이 본격적으로 개입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남쪽에서는 손문의 북벌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패부는 강화에 응하기로 하였다.
부득이한 양보였지만 오패부는 장작림과 달리, 일본을 회유하려고 하거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만약 오패부가 일본에게 장작림 이상의 이권을 보장했다면 일본은 망설임 없이 장작림을 버렸을 것이다. 영, 미 역시 극동에서의 세력을 회복하려고 했기에 오패부가 요청만 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패부는 과거 청조나 원세개, 단기서 정권이 저질렀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외세를 끌어들이는 짓은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였다. 그 점이 오패부가 친일군벌인 장작림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조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뇌물군벌로 악명을 떨쳤던 그였지만 외세를 미워하기는 오패부와 같았다. 훗날 장작림과 장개석에게 패배하여 완전히 몰락했을 때에도 재산을 챙겨 외국의 조계로 도망치지 않고 빈털털이가 된 채 은거를 선택하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두 사람 모두 일본의 회유를 받았지만 가난할 지언정 일본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며 끝까지 거절하였다.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 나라도, 민족도 없던 것이 군벌들의 보편적인 행태였던 시대에 두사람의 절개는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 높이 평가받는다.
6월 17일 자정, 진황도역에서 봉천군 대표 장학량과 직예군 대표 왕승빈 두 사람은 휴전조약에 서명하였다. 서세창은 중립파인 왕점원과 송소렴을 보내어 양측의 철병을 감시하였다. 6월 24일 양군은 산해관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서 중원은 직예파가 차지하였다. 비록 장작림은 관내의 기반을 모두 잃었지만 동3성의 자치를 선언하여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늘 들고다니는 부채에다 '무망오치(毋忘吳恥)'라는 글을 썼다. 오패부에게 받은 치욕을 항상 명심하여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결의였다. 장작림이란 사내는 한번의 좌절 따위에 주저앉을 위인이 아니었다. 또한 오패부와의 전투를 통해 직예군의 강함과 자신이 자랑하던 봉천군이 얼마나 무기력한 오합지졸인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마적떼에 불과했던 봉천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일본의 원조를 얻어 동3성에 대한 근대화와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새로운 전쟁의 준비였다.
* 분열되는 직예파
중원의 패자가 된 오패부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낙양에 있는 그의 관저는 매일같이 그의 개선을 축하하는 사람들로 끊이지 않았다. 너도나도 오패부의 위용을 칭송하며 아첨을 떨었다. 서구의 신문들은 오패부를 "중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Biggist Man in China)"라고 대서특필하였다.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첫번째 중국인이기도 했다.
이 순간이 오패부로서는 절정의 순간이었다. 뒤로는 직예파가 분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첫번째는 조곤이었다. 그동안 조곤과 오패부의 관계는 수어지교였다. 조곤이 있기에 오패부가 있고 오패부가 있기에 조곤이 있었다. 조곤은 문무겸비의 명장 오패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러나 그 신뢰는 상하의 관계로서였다. 조곤은 오패부의 권세가 자신을 압도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기세등등해진 오패부가 조곤을 재쳐놓고 북경의 정치와 인사 문제에 개입하는 등 직예의 수장처럼 행세하자 조곤은 불쾌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직예파 지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패부는 직예파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단지 조곤의 부하이고 2년 전만 해도 독군은 커녕 사단장에 불과했다. 그러니 벼락출세한 주제에 거들먹거리며 천하의 지배자인양 구는 모습이 아니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이 풍옥상이었다. 그는 하남성장 조척을 토벌한 공으로 직봉전쟁에 승리한 직후인 1922년 5월 14일 하남독군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오패부는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는 풍옥상이 하남성을 장악하여 새로운 정치적 라이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풍옥상 또한 오패부의 부하가 될 생각이 없었다. 풍옥상은 하남 독군으로 취임하여 정주역에 도착하자 말자 자신을 마중나온 하남군무방변(河南軍務幇辨) 보덕전(寶德全)을 그 자리에서 체포한 후 반역죄를 씌워 총살시켰다. 보덕전은 원래 조척의 부하였지만 조척이 패망하자 오패부에게 붙었다. 오패부는 그를 풍옥상의 감시역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풍옥상이 선수를 친 셈이었다.
풍옥상은 하남성을 장악한 후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키는 한편 오패부의 내정 간섭을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주요 요직에 오패부가 추천한 인사 대신 자신의 측근으로 임명하였고 매월 20만원의 군비를 중앙으로 상납하라는 요구 또한 거절하였다. 오패부는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풍옥상에게 분개했지만 풍옥상 역시 사사건건 간섭하는 오패부에게 불만을 품었다. "예전에 나와 오패부는 같은 여단장이었다. 더욱이 나는 12개 대대를 지휘했지만 그 놈은 고작 8개 대대를 지휘했다. 어느모로 보나 내가 위였다. 이제와서 왜 내가 그 놈의 명령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풍옥상은 겨우 5개월만인 1922년 10월 하남 독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북경의 육군 검열사로 전보되었다. 육군 검열사는 병사의 훈련을 맡은 이름뿐인 명예직이었다. 신임 독군과 성장에는 각각 장복래와 이제신(李濟臣)이 임명되었다. 두 사람 모두 오패부의 사람으로 하남성 출신이 아니었다. 풍옥상은 오패부에게 앙심을 품으면서도 겉으로는 오패부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대신 하남성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남겨두어 장복래를 견제하는 한편, 약 2만명에 달하는 예하 부대를 이끌고 북경 교외에 주둔하였다. 모든 것은 훗날을 위한 포석이었다.
* 진형명의 반란, 손문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1922년 6월 15일 밤, 손문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이따금 벽에 걸린 지도에 시선을 돌렸다. 지도에는 강서성과 복건성을 침공한 북벌군의 진군 상황이 그려져 있었다. 오랫동안 벼르고 왔던 북벌의 사업은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장작림이 반 직예 깃발을 올린 것을 이용해 손문은 호남성으로 군대를 출동시킬 계획이었지만 진형명의 반대로 계속 지연되었다. 손문은 양광의 절반을 차지한 채 광서성 남녕에 주둔하고 있는 진형명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그는 약 2만 5천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진형명은 끝까지 병력은 물론이고 병참도, 자금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진형명의 도움 없이 손문은 광동, 광서, 운남 3성의 군벌들을 규합하여 5월 3일 광동성 북부의 소관(韶關)에서 북벌의 시작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대본영을 광동성과 강서성의 경계에 있는 남웅(南雄)으로 전진하였다.
병력 3만명에 총사령은 이열균(李烈鈞). 이열균은 강서성 난창이 고향으로 일본육사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산서독군 염석산과는 육사 동기였다. 일본 유학 시절 손문의 중국동맹회에 가담하였고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혁명군을 조직하여 북양군과 여러번 싸웠지만 매번 패배하여 상해와 홍콩 등지로 도망쳐야 했다. 광주에서 손문이 정부를 수립하고 북벌을 준비하자 이열균도 여기에 가담하여 대본영 총참모장이 되었다.
5월 21일, 북벌군은 3로로 나뉘어 강서성과 복건성을 침공하였다. 이열균이 중로군을, 허숭지가 우익군을, 황대위(黃大偉)이 좌익군을 맡았다. 북벌은 순조로웠다. 강서독군은 그동안 직예파의 원로인 진광원(陳光遠)이었지만 가혹한 통치로 인해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천진으로 도망쳤고, 그 뒤를 이어 채성훈(蔡成勲)이 맡고 있었다. 이열균의 중로군은 채성훈의 강서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남강(南康)을 점령한 후 숭의(崇義)를 공략하였다. 우익군과 좌익군 역시 협공하여 공주(贛州)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진형명이었다. 6월 13일 진형명이 4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령도 없이 광주 교외로 와서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손문은 일단 광주로 돌아왔지만, 진형명은 자신이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시절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손문은 진형명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16일 새벽 3시, 정적을 깨고 나팔소리와 요란한 총성이 광주 시가지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손문은 막 잠이 든 참이었다. 호위병이 손문의 침실에 허둥지둥 들어왔다. "각하, 적의 습격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손문은 아뿔사 탄성을 질렀다. 결국 이렇게 뒷통수를 칠 줄이야. 진형명은 손문의 북벌 구상이 비현실적이며 도리어 강대한 북양군벌의 반격을 받아 그동안 쌓은 지반마저 잃을까 두려워 했다. 북벌을 통한 중국 통일보다 군벌로서 광동성의 통치가 우선이었던 그는 연성자치를 주장하면서 북양군벌과 타협을 주장하였다. 또한 뒤로는 오패부에게 사람을 보내어 손을 잡기로 하였다.
손문은 진형명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북벌의 강행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진형명의 협조를 재차 간청하였다. 진형명은 손문에게 협조하는 대가로 자신을 북벌군의 총사령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손문은 이미 진형명의 속내를 믿을 수 없기에 자신의 측근인 이열균을 총사령으로 임명하였다. 격분한 진형명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진형명이 군대를 이끌고 광주로 오자 손문은 병력을 물리라고 경고하였지만 하지만 설마 정말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란군은 광주의 주요 도로와 관청을 신속하게 점령하였다. 다음 목표는 광주 외곽에 있는 손문의 총통부인 '월수루(越秀樓)'였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 기록된 '6.16 사변'이다.
총통부를 향해 총알이 날라오고 당장이라도 반란군이 총통부를 포위할 상황이었다. 부하들이 손문에게 피할 것을 권유했다. "이런 판국에 이곳을 버리면 어떻게 되겠소? 나는 이곳에 남을 것이오." 손문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위급해지자 부하들이 손문을 억지로 평복으로 갈아입힌 다음 중요 서류만 챙겨서 탈출하였다. 손문은 부인인 송경령(宋慶齡)에게도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지만 자신이 함께 간다면 반드시 반란군에게 붙잡힐 것이라며 50여명의 경비병들과 함께 총통부에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하였다. "중국은 제가 없어도 되지만 당신은 꼭 있어야 합니다." 총통부를 나선 손문의 주변에는 오랜 측근이자 비서인 임직면(林直勉)과 호위병 1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손문이 탈출한지 30분도 되지 않아 총통부의 사방에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듯 날라왔다. "손문을 죽여라!" 4천여명의 반란군을 향해 총통부의 경비병들도 필사적으로 응사했다. 하지만 총통부 건물은 불바다가 되었고 경비병의 대부분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송경령은 그 직전에 2명의 호위병과 함께 간신히 야산으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광동대학(현재의 중산대학) 총장 종영광(鍾榮光)의 집에 숨었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극도의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그녀는 유산하였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덧붙여, 이 때 목숨을 걸고 그녀를 호위한 사람은 설악(薛岳)이라는 젊은 장교로 십수년 뒤 일본과의 항쟁에서 "장사의 호랑이"라고 불리며 항일명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손문은 일단 총통부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호랑이 아가리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가지 전역이 반란군의 손에 있었고 숨을 곳이 없었다. 그 때 황포 강변에 한척의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풍함(永豊艦)이었다. 그 함에는 장개석이 타고 있었다. 한동안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던 장개석은 손문으로부터 광주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며 복귀를 청하는 전문을 받자 얼마 전 광주로 돌아와 있었다.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재빨리 영풍함을 지휘하여 손문 구출에 나선 것이다. 손문은 장개석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네를 보니 2만의 원군을 얻은 것보다 기쁘다." 장개석은 손문을 태운 다음 반란군이 장악한 광주 시가지를 향해 함포를 돌려 맹렬하게 포격을 가했다. 송경령 역시 영풍함에 탑승하여 손문과 재회하였다. 나중에 송경령은 이 날에 대해 "마치 남편을 잃었다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라고 말하였다.
영풍함에서 한숨을 돌린 손문은 일단 상해로 향하였다. 그리고 강서성의 북벌군에게 즉시 회군과 진형명의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참담한 기분이었다. 실패의 원인은 군벌 내전을 멈추겠다면서 군벌의 힘을 빌리려고 했던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깨달았다. 그 군대는 이익에만 눈이 먼 군벌 군대가 아닌, 진정으로 중국을 위하는 혁명사상으로 무장한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로 구성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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