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대조국해방전쟁사 (1984)

- Part 1 -
- Part 2 -
오스트리아의 병합은 서구패권국들간에 아무런 반대를 가져오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를 위해 목소리를 낸 유일한 나라는 소련뿐이었다. 소련정부는 파시스트의 침략행위를 강하게 질타했다. 침략국들을 즉시 차단시킬 평화공조체제가 다시 요구되었다. 소련대표는 "내일이면 이미 늦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들, 특히강대국들이 허심탄회하게 뭉쳐서 세계를 구할 견고한 공조체제를 만든다면 그 오늘은 아직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발언한다. 하지만 이번 역시 소련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그 반대로 서방의 패권들은 계속하여 침략국들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제3세계국가들"에 직접 공작을 편다. 그것은 오스트리아 이후에 파시스트들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는 해인 1938년부터 확실하게 보여지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지역(Sudeten 주)은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나찌는 친-파시스트세력에서 극렬 파시스트인 콘라드 헨라인(Konrad Henlein)을 수뇌로 하는 비밀조직을 구성한다. 베를린으로부터의 지시에 의해 헨라인파는 수데텐주를 자치령으로 하는 요구를 하게 된다. 파시스트 독일은 수데텐의 독일인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이 요구를 요란하게 지지한다. 독일의 개입을 유도하하여 일환으로 헨라인파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충돌하기 시작한다.
1938년 5월에는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진군해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방어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것은 위기상황이었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충돌한다면 유럽에 전쟁이 번져나갈 것이었다.
사건의 발전에 놀란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은 파시스트의 침공을 거부하고 평화를 지키기를 요구한다. 소련,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상호공조의 약속을 하면 나찌즘의 계획을 포기하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소련은 소비에트-체코와 프랑스-소비에트의 상호방위 조약에 따라 움직일 뜻을 여러번 명백히 했다. 프랑스정부의 종잡을 수 없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프랑스가 조인에 따라 움직일 것을 거부{1}하더라도 체코를 지지할 것이었다.[18] 1938년 4월 26일 M.I 칼리닌은 공개석상에서, "...조약은 어느 나라도 프랑스를 기다릴 필요없이, 각기 체코를 도울 것을 금지하지 않습니다"고 말했으며,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수 Klement Gottwald에게 부탁하여 당시의 대통령이던 베네슈에게 소련은 프랑스없이도 체코가 공격받을 시에는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할 것이고 따라서 그를 돕기를 청한다.
소련은 단지 외교적 수단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군사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특히 서부지역의 국경에 30개의 군대, 10 기병부대, 7대의 탱크, 기관총, 12공수부대 7 강화지대를 준비했고 대공지원으로는 2 본대, 연대, 2 분대, 16 연대들, 4개의 대공포사, 15 대공포수, 그리고 전방은 물론 후방의 경계강화를 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군대를 소집한다. 32만 8천명의 병력이 소집되었다 또한 수만명의 지휘관과 병사들을 해제하지 않고 만일의 사태를 위해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서방패권들은 같이 파시스트의 또다른 도륙질을 방지하자는 소련의 호소에 귀를 막고 있었다. 침략행위를 부추기기 위해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제물로 바친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체코를 히틀러에게 거져 준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교환한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위선스럽게도 세계를 구한다고 선언하고 악랄한 음모를 짠 것이다. 프랑스가 체코와 대화를 시작하자 영국은 더 활발히 움직인다.
1938년 가을, 독일의 체코침공의 위협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속에 서방패권들은 '평화를 이룰 마지막 기회'라는 미명하에, 히틀러와 협상을 한다. 이 회담은 9월 29,30일에 뮌헨에서 있었는데 영국,프랑스,독일과 이탈리아가 참가했다. 그 운명의 대상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초대되지도 않았다. 대표단은 그 운명의 대상에게 문을 걸어닫은 것이다. 소련 역시 회담에서 배제되었다. 협상테이블에 소련이 있었다면 프-영와 파시스트 침략자들간의 '화평'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쳄버레인과 프랑스의 달라디에는 수데텐주를 독일에 양도하는데에 동의한다. 그것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과의 경계에 있어 방어지역을 잃고 산업에 필요한 상당한 대지를 잃는 것을 의미했다. 이 나라의 주권은 붕괴되고 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의 공격에 무방비상태가 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가 이 회담의 결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려고 하자, 영국대표는 냉소적으로 대답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독일을 홀로 상대해야 할거요. 프랑스인은 좀더 부드러운 표현을 쓰겠지만, 그들도 우리의 견해와 정확히 일치하오. 같은 의견이요..." 이렇게 영국과 프랑스는 뮨헨에서 체코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를 구할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들 정부가 소련이 내민 손을 잡는다면 말이다. 9월 20일 베네샤의 요구에 답하여 소련정부는 즉시 체코슬로바키아에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응답을 보낸다. 프랑스가 체코를 배신한다면 소련도 합의에 따를 의무가 없고, 소련은 연합규정 16조와 17조에 따라 국제연맹국의 회원으로서 도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가 그런 이유를 제시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틀뒤 9월 22일, 외무인민위원장 V.P.포춈킨(В. П. Потемкин)이 체코슬로바키아정부에 사신을 보내어 "독일이 체코를 공격하는 경우, 마지막 수단으로, 국제연맹의 결정을 기다림 없이 소련의 도움을 받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긍정적인 답을 받는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모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소련의 도움을 받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제국주의적 지배를 거부했다. 하지만 베네샤 대통령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배층은 그들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한 나머지 소련의 도움보다 굴욕적 항복을 택한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지키려는 공산당과 소련의 계속된 계속된 싸움과, 동맹국에 나쁜일이 있을 경우 가능한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자 하는 굳은 결단, 그리고 소련에게 국제적 빚,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인민들간의 형제애는 양국이 신뢰할 수 있는 깊고 넓은 기초를 마련하였다.
소련을 공격하는 대가로 체코슬로비아의 일부를 독일에 넘긴 영국와 프랑스는 자신들은 파시스트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뮌헨회담중에 챔버레인은 히틀러에게 공동성명을 제안한다. 1938년 9월 30일 영-독 선언은 기본적으로 영국과 독일간의 불가침조약이었다. 그것은 "절대로 더이상 서로간에 전쟁을 벌이지 말자"고 나머지 문제들은 양국의 상의로 결정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얼마후 1938년 12월 6일 프랑스도 비슷한 내용의 프-독선언에 조인한다.
뮌헨에서의 음모를 준비하는 것에는 미국의 역할이 상당했다. 겉으로는 체코침공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미국의 외교는 막후에서 활발하게 영국과 프랑스편을 든다. 미국의 대기업은 막후를 조종하며 새 전쟁의 기초를 만든다. 전쟁은 독점자본들과 군수산업들에 있어 호전적 세력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약속하였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미국의 독일과 일본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제국주의적 경쟁자들을 약화시키고 시장의 재분배와 영향권을 미국의 산업들하에 복속시키는 것을 기대한다. 그 계산은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분명히 소련이 전쟁에 끌려 들어갈 것이고, 그 결과로 '볼셰비즘'은 붕괴될 것이므로 미제국주의의 주요한 목표를 완수하고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었다.
뮨헨회담의 고안자들과 기획자들은 위선적으로 뮨헨회담이 세계에 "새로운 새대를 " 열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뮨헨회담은 유럽인민들에게 비극이었다. 새로운 전쟁에 한층 가까이 가게 만든 것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의 세계전쟁에 가는 길목에는 소련이 서 있었다. 소련과 함께 한 것은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자계급의 선두가 나섰다. 세계공산주의운동을 이끌던 티토를 비롯한 유럽의 공산당은 - I. Broz Tito, U. Gallacher, G. Georgiu-Dezh, K. By Gottwald, H. Dias, G. Dimitrov, J. Duclaux, A. Zapototsk, D. Ibarruri, M. Cachin, V. Kolarov, I. Koplenig, O. By Kuusinen, L. Longo, V. Pessi, V. Peak, G. Podpid, E. Thalmann, P. Togliatti, M.Torez, V. Ulbricht 등등 - 모든 평화적 방법으로 무산계급의 협동만이 세계를 파시즘으로부터 지킬 것이라고 강조하며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민중에게 모든 끔찍한 '불개입 정책'은 오로지 전세계의 무산계급이 단결하여 파시즘과 싸우는 것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에 나날이 발전한 사태는 공산주의자들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노동자들은 세계위에 심각한 위협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시즘과 전쟁을 거부하기 위하여 노동자계층이 더욱 공동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이미 오랫동안 노동자계급이 최전선에 나설 때 승리해왔다. 예를 들어 1934년 프랑스가 그랬다. 이 때 파리의 공산당의 지휘로 노동자들은 파시즘에 강력히 '아니오'를 표시했다. 따라서 파시스트혁명을 꾀하던 움직임은 전복되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파시즘에 대항한 단결이 세계의 노동자운동의 주 임무였다. 공산당들은 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그 힘을 쏟는다.
1935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 7 차 세계공산주의자 회의가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것은 전세계에 파시즘의 본질을 드러내고 "가장 행동적이고 가장 극우적이며 자본의 가장 제국주의적 요소를 띈 테러리스트의 독재로 이어지는' 것으로 선언한다. 회의는 부루주아가 파시스트들에게 지배를 시작할 도구를 넘긴 것은 곧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모든 국가들의 노동자들이 반-파시스트운동에 참가할 것을, 또한 평화와 인민의 자유의 요새인 소련을 지지할 것을 촉구한다. 7차회의의 결의안은 공산당들에 새로운 힘을 가져왔고 민중의 정치적 참가를 증가시켜 전쟁에 반대하는 그들의 싸움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는 것에 실패한다. 소련은 이 시기에 있어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자본주의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은 사회민주주의의 우익지도자들에 의하여 가혹한 정책으로 분열된다. 다른 패권국과 경쟁한 나머지 그들은 실제에 있어 침략자들을 돕게 된다.
유럽 위에 끔찍한 전쟁의 전운이 드리운다. 파시스트 침공자들은 서강패권을 편리하게 이용하여 좀더 대담해진다. 1939년 3월 15일 프라하를 침공하고 드디어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킨다. 1주 후 이들은 발트해 리투아니아의 Klaipeda항구로 입성한다. 동시에 독일은 루마니아와 경제합의를 강제하여 루마니아를 자신의 전쟁기계의 일부로 종속시킨다. 폴란드의 Danzig왕조에도 폴란드를 합병하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나치는 그렇게 한다면 폴란드인에게 바다로의 통로를 제공할 것이고 독일인의 교류를 증진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일-폴란드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4월 11일 히틀러는 폴란드침공계획인 "Weiss"계획을 인가한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더욱 대담해진다. 그 동료의 공격의 "성공"을 시기하고 아무런 제제받지 않음에 자극받은 이탈리아는 1939년 4월 7일 알바니아로 군대를 진격시킨다. 이제 이탈리아와 독일은 가면을 벗어던진다. 5월 22일 그들은 소위 '철의 조약'이라고 불리우는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이 제국주의의 맹수들은 "방어를위해서" 라든가 "공산주의를 막는다"라든가 하는 가면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치닫는 마지막 달들이 지나가자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은 파시스트패권들의 침략행위를 제압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소리높여 소련,영국,프랑스와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노력을 합치자고 열심히 요구하고 있었다. 소련정부는 프랑스와 영국와 다른 국가들의 뮨헨회담회담의 음모를 폭로했다. 1939년 3월 모스크바에서는 18차 AUCP회의가 열린다. (역주: 전공산당연맹-All Union Communist Party)레닌주의를 근본으로 평화적 공생의 원칙을 결론내린 회의는 모든 국가에의 결속과 평화정책을 수립하는 문제를 다룬다. 우리 국가가 휘말려들지 않기위해 전쟁을 조장하는 무리들의 요구의 위협에 각성을 요구한다. 18차회의에서 우리의 미래의 잠재적 적이 누구인지 규정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독일의 파시즘이었다.
히틀러가 1939년 3월 체코를 점령하자 서방패권의 지금까지의 정책이 모두 잘못되었음이 밝혀진다. 만일 뮨헨이후 즉시, 영국과 프랑스의 부루주아계급단체와 사회-민주주의그룹, 쳄벌레인과 프랑스의 달라디에가 평화일꾼으로서 만났다면 인민이 할 것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화평"책이 서방패권들에게 결정적 위험이 되고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정부를 질타하며 파시스트침략에 대하여 결단있는 행동을 취하라고, 또한 무엇보다도 소련과 같이 동맹을 하라고 요구한다. 인민의 이같은 의견과 히틀러의 행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층을 불안하게 한다. 만일 히틀러가 동쪽을 치는 대신 갑자기 서쪽을 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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