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했다. 9월 3일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외형상으로 그들은 폴란드를 '구출한다'는 명분이었다. 사실은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층은 폴란드의 인민들의 운명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독일을 제국주의적 경쟁자로서 과도한 힘을 갖는 것을 두려워 했을 뿐이다. 뮨헨회담자들의 계산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자본주의자들의 평화 한가운데 벌어졌다. [24]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한 것은, 영국도 프랑스도 폴란드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가능했다. 그 계산은 정확했다.
독일군은 폴란드를 대규모 병력을 이용하여 특히 공중과 지상에서의 짧은시간의 공격으로서 점령하였다. 5개의 군단이 폴란드를 3방향 - 동 프러시아,포메라니아,실레지아로부터 공격해 들어왔다. 11탱크와 기갑으로 무장한 62개 부대. 폴란드를 공격시에 2800대의 탱크, 2000대의 전투기, 100선이상의 전투함이 동원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폴란드군은 39개의 부대, 16기병부대, 2, 3산악부대들로 대항하였다. 폴란드군은 870대의 탱크와 소탱크들을 갖고 있었고 407대의 전투기와 13 전투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변변한 저항을 보이지 못했다. 이틀간의 집중공격으로 벌써 폴란드의 비행장들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철도이동은 무더웠다. 8월 31일 소집령이 내려진 때 사실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서쪽, 북쪽 남쪽에서 모두 독일은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는데 이쪽에 폴란드가 그다지 방어가 강하지 않게 구축되어 있었던 이유때문이기도 했다. 지배층은 방어를 모두 동쪽의 소련의 침입에 대하여 구축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병기고등은 서쪽에 위치해 있어서 철생산물들은 나치의 것이 되었다. 1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파시스트 독일군은 이 나라의 여러곳에서 깊숙히 침투해 있었고 초기부터 밀리기 시작한 폴란드군은 곧 혼란스런 후퇴로 이어졌다. 따라서 사령부에는 극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폴란드의 지배층은 인민을 배신하고 루마니아로 달아났다. 하지만 폴란드의 애국자들은 모국을 지키기 위하여 남는다. 많은 용사들과 장교들, 부대 전체들이 놀라울만한 용기를 갖고 맞서 싸웠다. 파시스트침략자들과의 싸움에 있어 자원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중 다수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바르샤바의 수호자들은 굴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준 화신들이었다. 수도를 지키는 전투는 9월 8일 시작되었다. 공중에서의 야만스러운 폭격과 히틀러의 거센 맹공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는 3주를 버텨냈다. 하지만 병력상 차이가 컸고 독일의 무리들은 시의 북쪽, 북서쪽과 남서쪽에서 들어왔다. 그들은 점점 폴란드군을 커다란 가마솥으로 몰아넣는다.
9월의 대재앙은 폴란드의 부루주아-지주계층의 완전한 몰락과 독립국가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 대재앙의 근본적 원인은 모험을 택한 것에 있었다. 폴란드의 지배계급의 반-소정책때문이었다. 소련의 도움을 마다하고 폴란드정부는 침략자에게 문을 열어주었으며 그들의 인민에게 재난과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국가의 독립을 잃게 되었다. 반대로 사회주의국가들의 연맹과 굳은 우애를 택했다면, 반-파시스트전선이 수립되어 폴란드는 안전했을 것이었다.
영국-프랑스의 지배계층의 배신또한 역할을 했다. 그들이 그 허울좋은 '보장'을 폴란드에게 해준 것은 오로지 독일의 제3제국과 외교게임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동맹국을 눈깜짝할 사이에 져버렸고 독일의 탱크들이 폴란드 땅을 깔아뭉개고 있을 때 덤덤히 지켜보기만 한 것이었다.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히틀러의 군대가 빠르게 동진하여 소련을 침공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폴란드가 피를 흘리는 것을 도왔을 뿐 아니라 더욱 빠르게 무너지길 바랬다. 그들의 행동들은 후방을 두려워 할 필요없이 히틀러는 동쪽을 칠 수 있다는 안심을 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뮨헨정책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서방은 전쟁의 방향을 돌이킬 수 있었다. 다음은 뉴렘베르그재판에서 이 작전의 총사령관[25] '요들'의 보고에 의한다: "...우리가 1939년 우리가 폴란드군과 싸우고 있을 때, 프랑스,영국의 약 110개 부대들은폴란드의 서부전선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꼼짝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국과 프랑스의 정책은 폴란드가 진 후에도 계속되었다. 군사작전은 바다에서는 특정한 작전으로 한정되었다. 독일의 서쪽전선에서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거대한 병력이 서로 맞보고 있는데 전투는 없었다. 오로지 간헐적인 소규모 전투만 있었다. 독일측 땅에는 폭탄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연합군의 비행기들이 독일군들 위에 공산주의와 싸우라는 반-소 삐라들을 살포하였고 독일군들은 따분해 했다. 그들은 이 전쟁의 느낌을 '정지되어'있거나 '얼빠진', '이상한' 단어를 써서 표현했다. 그들 다수는 전쟁이 없을 것이고 모두 평화롭게 끝날것을 기대했다.
영-프의 지배층은 히틀러가 서쪽전선을 치는 것을 서두르지 않을 것임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나는 독일이 우리를 칠 어떠한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챔벌레인은 몽고메리 장군에게 1939년 9월 말했다. 프랑스의 드골 역시 그의 회상록에서 프랑스정부가 마찬가지로 판단했음을 쓰고 있다. 계속 프랑스와 영국의 독점자본들은 중립국들을 통하여 독일에 자원과 광물을 대고 있었음은 동맹국으로 파렴치한 일이었다.
프랑스 부루주아들이 히틀러를 직접 지원한 사실은 곧 그들의 인민들에 전쟁을 쏟아부은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에 격렬히 반발한다. - 이들은 파시즘에 가장 강력히 싸우는 투사들이었다. 1939년 9월 26일 프랑스공산당은 불법으로 금지된다. 수천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감금되고 감옥으로 보내졌다. 수많은 민주적 단체들과 그들의 발언수단의 언론들은 짓밟혀진다.
독일과 정면대결하고 싶지 않은 서방의 동맹국들은 침략자들과의 합의를 모색한다. 그들은 룩셈부르그에서의 회담을 통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있어, 서쪽에서의 독일과의 전쟁에는 '관심 없음'을 나치에게 표시하고 그런 이유로 평화가 가능하다고 알린다.
독일침략자들의 발길을 소련으로 돌리기 위하여, 영국-프랑스의 지배층은 소련과 핀란드간의 군사분쟁을 이용하기로 한다. 핀란드, 영국, 미국과 다른 부루주아 국가들은 추잡한 반-소선전을 시작한다. 한 프랑스의 부루주아언론인이 쓰듯 "부루주아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나타냈다. 크루세이드[십자군원정]의 기운이 모든 곳에서 불타올랐다..."러시아와 전쟁을!"이라는 구호만이 들렸다" 반공주의의 열병은 끓어올라 최고조에 올랐다"
핀란드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영국과 프랑스는 같이 반소전선을 구성하고 거기에 독일을 끌어넣으려 한다. 그들은 핀란드에게 무기공급을 하여, 핀란드군으로 하여금 무르만스크와 레닌그라드를 치게 만들고 소련을 남쪽에서 칠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층은 독일과 싸우는 대신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에 골몰해 있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층의 소련정복에의 열기와 무방비상태의 전선은 나치에게 유럽침공을 계속할 넓은 가능성을 열어주게 된다. 파시스트 부대는 프랑스를 무너트리고 유럽대륙의 북서쪽을 싸움의 근거지로 잡고 직접 영국을 공격할 적당한 기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시기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만일 1939년 가을 독일군이 아직 서방을 침략할 결정적인 힘이 없었을 때, 만약 그들이 그에 충분한 무기와 탄약이 없고 산업이 Wehrmacht의 명령대로 생산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1940년 봄에는 전혀다른 형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제공력 역시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전투기의 숫자는 3800을 넘어서고 있었다.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탱크는 2580대에 달했다.
이때 서양패권들은 어떻게 독일에 대항하여 군대를 위치시키고 있었을까?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에 포진한 무장병력은 147개의 부대로 104은 프랑스, 10은 영구 23은 벨기에 10은 네덜란드군이었다. 탱크는 3000이상, 비행기는 약 4000이었다.
연합사령부는 독일이 네덜란드나 벨기에를 넘는 경우에 대비하여 'Dil'이라는 작전명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면 즉시 영-프 군대가 안트웨프-세단의 전선을 같이 방어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영국군은 1차대전의 구식 방식의 전략을 갖고있어서 군사학에 있어 급속한 발전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학의 새로운 전법 - 즉 탱크와 전투기를 앞세운 지/공의 빠른 전격전이나 군대의 지휘, 작전에 적합한 시간판단-을 놓치고 있었다.
연합군이 주병력을 북쪽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 히틀러의 사령부는 주공격을 남쪽의 아르덴(Arden)지역에 집중한다. 대규모의 탱크부대들이 여기의 세단(Sedan)지역을 통하여 아르덴으로 들어가서 대서양쪽으로 밀어서 북쪽에 위치한 연합군을 뒤에서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독일군은 이 계획에 따라 움지인다. 오른쪽에는 B그룹(29부대)가 벨기에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벨기에 깊숙히 들어갈 것이었다. 중앙부에는 7 탱크부대를 포함한 45부대들로 구성된 A그룹이 위치하여 주공격을 할 것이다. C그룹(19부대)은 왼쪽을 맡았고 마지노선의 프랑스군과 맞붙을 것이었다.
프랑스로 진격하기 전에 파시스트독일은 1940년 4월에 덴마아크와 노르웨이를 장악한다. 5월 10일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그를 친다. 이렇게 독일군은 서유럽에 포진되었다. 연합군사령부는 'Dil'작전을 시작한다.
그 동안 독일의 탱크군단은 룩셈부르그를 넘어서 아르덴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탱크들은 산악지형에 걸려 잘 움직일수 없었다. 이것은 연합군사령부가 성공적으로 공대지 반격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측의 이날 비행기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파시스트탱크들은 별 어려움 없이 Maas강에 도달한다.
프랑스사령부는 이 지역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오직 약한 2개의 군대만을 남겨 놓았다. 이들은 보충이 필요한 형편없이 무장된 군대였다. 시작부터 독일군은 탱크에 있어서 7배, 공군력에 있어서 20배를 넘고 있었고, 침투점에서는 25배, 50배였다. 상황은 나찌에게 극도로 유리한 위치였다. 5월 14일 파시스트독일군은 Maas지역으로부터 세단지역을 통하여 연합군의 방어안쪽으로 깊숙히 전진해 들어오는 것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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