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기본적인 목표 - 독일과 소련을 충돌하게 만드는 것 - 는 변하지 않은채, 영국과 프랑스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취한다. 그 목표는 한측에서는 대중의 의견을 잠재우는 것이고 다른 측으로는 소련과의 군사동맹을 할 가능성을 가지고 히틀러를 겁먹게 하려는 것이었다. 서방패권들은 이렇게 하여 히틀러가 자신들의 말을 듣게 만들려고 기대했다. 독일에 대항하여 공조전선을 구축할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정부는 1939년 봄과 여름에 폴란드와 루마니아, 그리이스등 작은 나라들이 소련과 교섭할 외교채널의 '보장'을 선언하기 이른다.
소련정부는 침공에 대비할 수 있는 소련과 영국, 프랑스가 참가하는 효과적인 공조체계에의 합의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소련정부는 이들 국가의 인민들의 생존의 이익으로 공조한다면 평화의 기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소련의 제안은 서로간의 권익의 완전한 평등과 부응하는 의무를 골자로 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일방향의 의무만을 소련에 지우려 했다. 독일이 서쪽으로 진격할 경우 소련의 도움을 요구했으나 그와 상응하는 의무를 지려하지 않았다. 소련을 독일과의 전쟁에 밀어넣는 것으로써 그들은 전쟁에서 비켜나 있는 것을 서방패권들이 원했다.
약속이 효과적으로 이행되려면 그것이 상호간이 발동하는 군사지원의 정확한 규모과 기간등이 사전에 정해져야 했다. 따라서 이 세국가의 군사작전을 협상하기를 제안했다. 이 협상은 1939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소련의 군사작전[22]은 소련,영국,프랑스에 구체적인 지상군사작전을 제시했고, 유럽에의 침공의 모든 경우가 검토되었다. 소련은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 동맹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은 오직 폴란드가 뚫렸을 때만 가능하게 했다. 서방패권들은 그 협상의 처음부터 이야기의 심각한 핵심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 했다. 이후에 문서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동맹을 원해서 소련에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영국대표측에 그들 정부는 "구속받을"..."어떤 약속도 원하지 않는다"는 비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독일-폴란드 관계는 어느순간에서건 전쟁으로 이어질 시기에, 영국에 관한 협상은 '매우' 진전이 느린 상황이었다.
폴란드의 부루주아로 말하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었다. 모스시스크,뤼즈,스미글리,벡의 파시스트단체들은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았는데 그들은 전쟁발발을 유도하여 부패한 왕조를 구해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시스트독일을 소련과 싸우게 만들고 독일편에 서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편을 따지자면, 폴란드 내에서 소련군의 길을 막을 것이었다.
영국정부의 소련과의 대화에 보여진 지연전술은 실은 그들이 훨씬 더 중요시했던 런던에서 파시스트독일과 비밀협상때문이었다. 영국의 외교는 뒤에서 나치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전 세계를 놓고 서로의 영향권을 나누고 있었다. 이것은 영국총리 허드슨과 독일대표 Wohlthat간의 대화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허드슨은 양국앞에 "경제적 활동으로봐 매우 커다란 영역인 3개의 권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영제국, 중국과 러시아.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들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발칸에 대해서는 영국은 아무 경제적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치가 1차대전후에 영국인의 손으로 떨어진 식민지들을 달라고 요구하자 그 답으로 영국외교는 매우 명백히 독일의 소련측의 동쪽침공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노력한다. 이런 제안은 한번이 아니었다. Dirksen은 "...독일이 이런 제안을 수락한다면 영국은 독일의 관심영역에 대한 보장을 할 것이고 나아가 영국은 프랑스에게도 그렇게할 것입니다. 프랑스가 소련과의 동맹을 끊고 남동유럽에의 의무를 없애도록 할 것이며, 우리의 소련과의 약속 역시 끝날 것입니다."
이렇게 영국외교는 소련과의 회담을 항상 오로지 그들의 목적-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도록 압박하는 용도-을 위해 이용했다.
1939년 여름이 되자 우리나라는 곧 두 전선에서의 전쟁과 더 나아가 완전한 정치적 고립에 직면하게 된다. 서부에서 빠르게 소련으로 향하고 있는 독일의 위협은 동부로부터의 일본의 위협으로 가중되었다. 5월에 일본은 몽골인민공화국의 영역인 할킨-골 강유역을 침범한다. 소련과 몽골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었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침공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행동으로 발전했다. 소련에게 과제가 주어진다. 소련을 무너트리려는 국제적인 계획에 싸우는 것이었다. 것은 단지 소비에트 인민의 생존이 걸린 문제일뿐 아니라,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계급의 권익의 문제였다. 이것이 소비에트 연방정부가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맺어야 했던 이유다. 이 조약은 1939년 모스크바에서 조인된다.
그에 따라 모스크바에서의 군사작전공조의 협상은 결렬된다. 이당시의 소련측 협상대표였던 K. E. Voroshilov 1939년 8월 27일 쁘라브다지에 "소련이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의 공조체제가 결렬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프랑스, 영국과의 회담이 봉착했기 때문에 소련이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히틀러의 정부는 아직 소련과의 전쟁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협정을 맺었다. 그는 먼저 서유럽을 정복한 후에 그 자원을 갖고 소련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소련정부는 독일과의 협정을 맺었지만 조만간 소련에 선전포고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제국주의패권의 반-소연합전선측을 구성할 가능성을 없애는 한편 소련의 방어에 필요한 필수적인 시간을 벌게 했다. 소비에트의 외교정책은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모순을 소련을 이용해 풀려는 시도를 무산시켰다.{3}
소련의 적들은 소련과 영국, 프랑스의 군사협정이 깨진 책임을 소련의 책임으로 돌려왔다. 독일을 서유럽국가들을 침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련의 외교에 대한 근거없는 공격은 과감하고 너무 어이없는 것이라서 몇몇 부루주아 역사가들까지도 반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Jacque de Lone은 그의 책 "새로운 역사의 논쟁점들"에서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영국과 합의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고 ...러시아인들이 뒤에서 이면합의를 했다는 것은 근거 없다"고 썼다.
어떤 역사가들도 당시의 국제정세와 군사합의 기록들을 선입견없이 본다면, 필연적으로 그 제국주의적 의도를 갖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도록 만들도록 하기 위하여 이면합의를 하려 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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