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軍閥志) - 6. 직봉의 반목, 오패부 호북으로 향하다 /blog.naver.com/atena

* 조곤과 장작림, 천하를 나눠갖다

 

직환전쟁이 끝난 뒤 북경정부의 수장은 대총통 서세창과 총리 근운붕이었지만 이들은 한낱 조곤과 장작림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북경정부는 직예파와 봉천파의 연합정권이나 다름없었다. 직예파의 세력은 직예성을 비롯해 화북과 화중 7개의 성(직예성, 산동성, 강소성, 강서성, 안휘성, 호북성, 하남성)을 차지하였고 장작림은 동3성과 열하성을 차지하고 외,내몽골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원은 이 두 세력에 의해 양분되었다.

 

절강성과 복건성에는 안휘파가 여전히 버티고 있었고 호남성과 사천성, 운남성, 광서성, 광동성, 귀주성 등 서남부의 6개 성은 여러 군벌들이 혼재하여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있었다. 그 외에 염석산이 산서성을 통치하였고, 영하성과 감숙성, 청해성, 신강성은 중원의 혼란과 상관없이 자기들만의 왕국을 이루었다. 신해혁명 이래 독립을 선포한 티벳은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는 사실상의 주권국이 되었다. 물론 북경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북경정부의 티벳 정벌 명령에 따라 1918년 사천 서부를 통치하는 군벌 류존후(劉存厚)가 약 3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티벳을 침공했지만, 1만명의 티벳군의 반격을 받아 여지없이 패퇴하였다. 티벳군은 그 여세를 몰아 창도(昌都)를 비롯한 사천성 서북부 일부지역을 점령하였다. 천하대란의 상황에서 중국은 미처 변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덕분에 티벳은 중국에 도로 강제 합병되는 1951년 5월까지 약 40년간 독립을 누릴 수 있었다.

 

직환전쟁이 끝난 지 보름 뒤인 1920년 8월 4일. 북경역의 플랫폼에 수많은 황색의 깃발이 펄럭였다. 황기(黃旗)는 황제의 깃발이다. 천진에서 올라온 기차가 멈추자 조곤과 장작림이 마치 황제라도 된 양 으스대면서 내렸다. 대총통부에서 조곤, 장작림, 서세창 세 사람의 회견이 열렸다. 물론 목적은 직예파와 봉천파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1. 조곤을 직예성, 산동성, 하남성의 행정, 사법, 군정을 총괄하는 직노예3성순열사에 임명하고 오패부를 부순열사에 임명한다.

2. 직예파인 강소독군 이순은 강소성, 강서성, 호북성을 총괄하는 장강3성순열사에 임명한다.

3. 봉천군 부사령관 장경혜(張景恵)를 찰합이성 독군 겸 제16사단장에 임명한다

4. 장작림에게 진위상장군(鎭威上將軍)의 칭호를 내린다.

5. 국가의 대계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조곤, 장작림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6. 동3성과 직노예 3성의 인사, 행정, 군정, 예산 등에 대해 중앙정부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7. 그 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조곤, 장작림은 관여하지 않는다.

8. 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조곤과 장작림이 권고한다.

 

한마디로 서세창과 근운붕은 허울뿐인 대총통이요, 총리였고 조곤과 장작림 두 사람이 대등한 위치에서 "상황(上皇)"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세창은 초라한 신세였다. 게다가 직예파와 봉천파의 영역은 중앙정부가 일체 관여할 수 없는 국가 속의 국가나 다름없었다. 안휘계에 대한 처분도 결정되었다. 단기서와 전 외교총장 조여림(曹汝霖), 전 교통총장 육종여(陸宗輿) 등 안휘파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사면을 내렸다. 조여림과 육종여는 원세개 시절 일본과 21개조 밀약의 체결을 주도하였고 막대한 차관을 얻는 댓가로 중국의 이권을 일본에 넘겨 국가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 대표적인 매국노였다. 5.4운동 역시 이들 때문에 일어났지만 아무런 죄도 묻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먼 군벌들에게는 그런 과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휘파 세력을 어느 정도 남겨두어야 3개의 다리를 가진 솥(鼎)의 형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리 하나만 없어져도 솥은 균형을 잃는다. 고래로부터 내려온 중국 권력자들의 사고 방식이었다.

 

조곤과 장작림은 겉으로는 동맹을 맺고 서세창을 대총통에 앉혀 놓았지만, 절대 그 정도로 만족할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야심은 점점 커져서 자신이 새로운 중국의 제왕이 되기를 꿈꾸었다. 똑같이 허황된 야심을 품고 있는 두 마리의 늑대가 한 우리에 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싸움밖에 없다. 두 세력은 세 불리기에만 광분하여 외세의 차관을 끌어들이고 민중의 고혈을 마구 쥐어짜 군사력을 경쟁적으로 확장하였다. 특히 장작림이 조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남완(南宛, 북경 동남쪽 교외의 마을)의 안휘군 병영을 약탈하고 복엽기 12대와 수십문의 중포, 소총, 기관총, 막대한 군수품을 가져갔다. 조곤과 오패부는 격분했다. "장작림 그 놈은 정말로 마적 출신이군."

 

게다가 장작림은 회의에서 오패부가 발언하자 "일개 사단장 따위가 감히 이 자리에 나오는가! 나에게도 사단장은 얼마든지 있다."라며 호통을 쳤다. 조곤의 오른팔로서 직예파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고 자부하던 오패부로서는 그야말로 면전에서 치욕을 당한 셈이었다. 장작림은 조곤에게 고작 부하에게 휘둘리냐고 몰아치자 조곤은 난처한 표정으로 어물거렸다. "나는 단지 그의 의견을 들어볼 따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패부에게도 따로 다독거렸다. "이제 전쟁이 끝난 참이다. 또다시 일전을 벌일 수는 없지 않느냐."

 

오패부는 이를 갈면서도 와신상담하기로 했다. 그는 군대의 훈련을 명목으로 휘하의 제3사단을 비롯한 직예군의 주력을 이끌고 하남성의 성도 낙양에 주둔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왜 중앙을 떠나 낙양으로 갑니까?" 오패부는 그냥 웃었다. 낙양은 동주 시대 이래 후한과 조비의 위나라 등 몇번이나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며 인구와 산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특히 중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지이자 농해철도(강서성에서 하남성과 섬서성까지 중국을 동서로 관통하는 철도)와 경한철도(북경과 무한을 연결하는 철도)를 통해 중국 군수공업의 중심지인 무한과 연결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기와 물자를 얼마든지 확보하고 병력을 확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천하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10만명의 병력으로 주둔하는 이상 두려워 할 것은 없었다. 그는 낙양에서 군대를 맹렬하게 훈련시키며 기회를 기다렸다.

 

* 장작림-단기서-손문 삼각동맹을 맺다

9월 4일. 조곤과 장작림은 사돈을 맺었다. 천진에 있는 조곤의 저택에서 화려한 결혼식이 열었다. 신랑은 장작림의 넷째 아들 장학사(張學思), 신부는 조곤의 여섯째 딸 조사영(曹士英)이었다. 중매는 근운붕이었으며 북경 정부의 내노라 하는 고관들이 하객으로 죄다 모였다. 하지만 8살짜리 신랑과 7살짜리 신부의 결혼식이니 오죽하겠는가. 누가 보더라도 속셈이 뻔한 정략 결혼이었다.

 

장작림이 근운붕을 내세워 조곤과 사돈을 맺은 속셈은 이를 명목으로 조곤에 접근하여 조곤과 오패부 두 사람을 이간질하기 위함이었다. 오패부만 없다면 직예파의 군대가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어차피 껍데기일 뿐이었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조곤은 다루기 쉽다. 하지만 그의 군사(軍使)나 다름없는 오패부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작림에게도 결코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교활한 장작림은 직예파를 무너뜨리기 위한 포석을 하나씩 준비하였다. 첫번째가 안휘파와의 동맹이었다. 오패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기서의 사면에 앞장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단기서는 장작림과 이전의 원한을 풀고 몰래 반직예 동맹을 맺었다. 이어서 장작림은 단기서의 측근이자 안휘파 독군인 절강 독군 노영상과 복건 독군 이후기에게도 접근하였다. 노영상은 상해와 남경 등 중국의 알짜배기 지역인 절강성을 통치하였다. 또한 휘하에는 제4사단과 제10사단이 있어 결코 만만찮은 전력이었다. 이후기는 직환전쟁 직전에 손문의 광주군정부를 공격했다가 실패했지만 손문군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복건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곤도 이 두 성만은 손을 대지 못한 채 안휘파의 세력으로 남겨두었다. 봉천파와 안휘파가 손을 잡는다면 직예파는 남북으로 협공받는 형세가 된다.

 

두번째는, 손문과의 동맹이었다. 손문은 단기서가 공화주의자라고 여겼다. 손문이 보기에, 단기서는 신해혁명 당시 무창의 혁명군에 대한 공격에 소극적이었으며 원세개의 칭제에도 반대한 경력이 있다. 장훈의 복벽도 단기서가 주도하여 진압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것은 손문의 일방적인 환상일 뿐이다. 누가 봐도 단기서 역시 장작림이나 조곤과 다를 바 없는 이기적인 군벌이었다. 일본과 밀약을 맺어 산동성의 독일 조차지를 멋대로 넘긴 것도 단기서였고 그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5.4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중국이 내전에 휩쌓인 것도 단기서의 책임이었다. 제 이익만 생각하는 군벌들과 손을 잡아 직예파를 제압한들 그걸로 무엇이 바뀐다는 것인가.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중국의 혼란을 잠재우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손문에게는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손문과의 중재에 나선 사람은 안휘파의 책략가 서수쟁이었다. 직환전쟁 이후 지명수배당한 서수쟁은 북경의 일본 공사관에 숨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조곤도, 오패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보호를 받는 이상 손 댈 수는 없다. 장작림의 묵인 아래 그는 11월 14일 밤 일본 공사관을 몰래 나와서 천진의 일본조계로 탈출했다. 그리고 상해를 거쳐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8일 광주를 거쳐 광서성의 계림으로 갔다. 그곳에는 3만명의 병력으로 북벌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손문의 대본영이 있었다. 서수쟁을 보자 손문은 반겼다. "당신이 오기를 오래 기다렸습니다."

단기서, 장작림과 동맹을 맺어 직예파를 협공하자는 서수쟁의 제안에 손문은 즉석에서 동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나의 참모장으로 삼고 싶으니 여기에 남아주시오." 손문의 서수쟁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서수쟁은 대답했다. "저는 북방으로 돌아가 손선생님을 돕겠습니다." 이렇게 반직예 삼각동맹은 결성되었다.

 

* 갈수록 반목하는 직예와 봉천

 

근운붕은 머리가 아팠다. 명색이 북경정부를 이끄는 총리지만, 조곤과 장작림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게다가 요구 사항은 나날이 늘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중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못했다.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방 성정부는 자신들이 쓸 돈도 부족하다며 오히려 중앙에 손을 벌리는 판이었다. "중국연감(China Yearbook. 1922)"에 따르면, 1922년 기준으로 북경정부의 월 수입은 고작 23만 1천원에 불과한 반면, 세출은 920만원에 달했다. 나머지는 공채를 발행하거나 외국에서 빌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전의 연속에 걸핏하면 정권이 바뀌는 판에 신용이 담보되지 않는데 빌려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북경정부가 발행하는 공채의 할인율은 무려 80%에 달하기도 했다. 이는 100원짜리 공채가 고작 20원에 팔린다는 말이다.

 

교육부같은 제일 힘없는 정부 부처부터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육군부와 참모본부의 군인, 관료들 역시 월급이 몇달씩 체불되었다. 공무원들이 동맹 파업에 들어갔다. 북경 정부는 올스톱이나 다름없었다. 장관들은 직원들의 불만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사직서를 내놓았다. 군대도 아우성이었다. 게다가 근운붕이 장작림에게만 우선적으로 군비를 주자 직예파의 불만이 폭발했다.

 

1921년 4월 27일, 천진의 조곤의 저택에서 이른바 "4거두회의"가 열렸다. 네명의 거두란 동3성 순열사 장작림과 직노예순열사 조곤, 내각총리 근운붕, 그리고 호북독군 겸 양호순열사인 왕점원이었다. 바로 북경정부의 실세들이었다. 첫번째 안건은 외몽골에 대한 것이었다. 외몽골은 운게른 남작이라는 러시아 백군의 패잔병들이 들어와 중국군을 몰아내고 수도 후레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을 몰아내고 외몽골을 다시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외몽골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네 사람의 입에서 돈 문제가 거론되었다. 제일 먼저 조예가 근운붕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조곤의 동생으로 직환전쟁 이후 조곤을 대신해 직예성장이 된 인물이었다. "직예군의 군비지급은 반년이상 밀려 있는데 봉천군은 겨우 이개월치만 밀려 있다. 그런데 얼마전에 봉천군에는 구호금 명목으로 200만원에다 이동경비로 100만원을 지급했다고 한다. 직예군은 겨우 50만원만 받았다." 근운붕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은 도무지 사람의 고생을 모르는군. 국세는 안 들어오는데 죄다 입만 열면 군비 타령이다. 당신이 직접 살림살이를 해 보면 어떤가. 쌀이 없는데 밥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다."

 

"이 병신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예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근운붕의 머리에 던졌다. 근운붕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누가 총리냐! 너희도 죄다 병신새끼다!" 유치한 애들 싸움을 하는 꼴을 보면서 장작림은 웃음을 참으며 부관에게 말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차를 가져와라. 나는 돌아가는게 좋겠다." 4거두 회의는 그렇게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격분한 근운붕이 사직서를 제출하자 이래서는 북경정부가 통째로 무너져 버리겠다고 생각한 장작림이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4거두가 모여서 며칠에 걸쳐 흥청망청 술파티를 벌였다. 근운붕은 3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작에서 일부러 져 주었다. 유흥에 들어가는 돈은 모두 정부의 금고에서 나왔다. 그런 곳에 쓸 돈은 있었던 것이다. 5월 5일 근운붕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장작림과 조곤, 왕점원은 근운붕 내각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근운붕은 흡족해 하였다.

 

다음 날에는 대총통 서세창이 조곤과 장작림, 왕점원을 북경으로 불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들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두 사람의 자리 또한 없기 때문이었다. 5월 25일 서세창은 장작림을 몽강 경략사에 임명하여 내외몽골의 전권을 맡겼다. 장작림은 "동북왕"에서 "만몽왕"이 된 셈이었다. 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직예파에 대해서도 제23사단장 왕승빈(王承斌)을 하남독군에, 제28사단장 염상문(閻相文)을 섬서독군에 임명하여 조곤을 흡족하게 하는 한편 양파의 균형을 맞추었다. 억울하게 된 것은 하남독군 조척이었다. 하남성의 성도인 낙양에는 오패부가 주둔하여 상전 행세를 하는데다 하남독군 자리까지 왕승빈에게 빼앗기면서 조척은 허울뿐인 하남성장 자리만 차지했을 뿐이었다. 격분한 조척은 장작림에게 몰래 접근하여 직예파와 봉천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가세하겠다고 밀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모두 오패부에게 탐지되고 있었다.

 

섬서독군이 된 염상문은 왕승빈처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섬서성은 그동안 안휘파인 진수번(陳樹藩)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환전쟁에서는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음에도 자리를 빼앗기게 되자 휘하의 군대를 모아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염산문의 제28사단에다 오패부는 풍옥상의 제16혼성여단을 급파하여 진수번의 군대를 단숨에 격파하였다. 근거지를 잃은 진수번의 패잔병들은 토비가 되어 섬서성과 사천성, 호북성을 떠돌다가 사천군벌 웅극무의 공격을 받아 괴멸하였다. 진수번은 빈털털이가 된 채 천진으로 도주했다. 진수번을 격파한 공으로 풍옥상의 제16혼성여단은 제11사단으로 확대 개편되어 하남성 신양에 주둔하였다. 이 또한 조척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하남성에 이어, 섬서성을 자신의 세력권에 넣은 오패부는 다음으로 호북성을 노렸다. 왕점원이 다스리는 호북성은 왕점원의 혹독한 정치로 민심이 들끓는데다 군대의 월급이 체불되면서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왕점원은 6월 3일 북경에서 무한으로 급히 돌아왔다. 그런데 6월 4일 의창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7일에는 무한삼진의 하나인 무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왕점원 직계부대인 제2사단 제7연대가 체불된 월급을 달라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무창은 폭병들에 의해 불바다가 되어 왕점원의 사령부까지 공격을 받았다. 왕점원은 이들을 달래어 밀린 봉급에다 퇴직금까지 주어 고향으로 가는 특별열차에 실었다. 1천8백여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잊은 듯 나는 기분으로 북쪽으로 가는 고향열차에 탔다. 열차는 무한 50km 떨어진 역에 정차했다. 그런데 열차의 주변에는 수천명의 군인들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모조리 사살당한 채 무수한 시체만이 남았다. 왕점원은 사체를 뒤져서 나누어 주었던 돈을 모두 되찾아 오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으로 왕점원에 대한 호북인들의 적개심은 폭발하였다.

 

여기다 호남독군 조항척이 호북성을 노리고 있었다. 이전에 북양군의 호남 침공에 맞서 강력한 저항전을 펼쳤던 조항척은 직환전쟁이 벌어지자 안휘파 군대를 단숨에 격파하고 호남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뛰어난 군사역량을 가진 그는 양호(호남, 호북)를 장악한 다음 천하를 노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손문파인 이서성이 반왕점원파 호북군벌들과 손을 잡고 호북 자치운동을 벌이자 호북성을 원조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호북 제1사단, 제2사단, 제1혼성여단 등 병력은 8만명에 달했다. 왕점원은 급히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낙양의 오패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직환전쟁 이래 또 한번의 혈전이 호북성에서 벌어질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