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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국공내전, 천하를 다투다 - 7. 정전에 합의하다/blog.naver.com/atena

이탈리아와 그리스

같은 시기, 중국과 마찬가지로 좌우파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혼란에 빠진 대표적인 나라가 이탈리아와 그리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두 나라는 우후죽순으로 저항 세력들이 생겨나면서 여러 개의 파벌로 갈라졌다. 이들은 서로 정통성과 합법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기에 반목과 갈등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향방은 판이하게 달랐다.
1943년 9월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된 후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좌파 레지스탕스들이 결성되어 반 파시스트 저항 운동을 펼쳤다. 독일 패망 직전에 오면 무솔리니의 살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밀라노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의 태반을 장악하였다. 숫자는 약 40만명에 달했다. 스위스로 도망치던 무솔리니를 체포하여 현장에서 처형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서방 연합군의 지원을 받는 이바노에 보노미(Ivanoe Bonomi)의 왕당파 정권에 저항하여 내전을 일으키는 대신, 해산 명령에 복종하여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았다. 대신 지도부는 타협과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신 공화국 정부에서 정치적 지분을 나눠 가지는 쪽을 택했다.
이는 서방 연합군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데다 좌파 레지스탕스들은 현지 민중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하여 기반이 약했고 내부적으로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면서 결속력이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마오쩌둥이나 티토, 호치민과 같은 절대적인 리더쉽과 지도력을 갖춘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다.
반면, 1944년 말부터 이미 내전 상태나 다름없었던 그리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 내전의 축소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이탈리아군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요르요스 2세와 그리스 정부는 영국군과 함께 이집트로 탈출한 후 런던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정통성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은 그리스의 유일한 합법정부였지만 매탁사스 前 수상의 강압적인 독재 정치에 대한 반발과 국왕의 리더쉽 결여로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스 현지에서는 여러 개의 레지스탕스 단체들이 결성되어 이름 뿐인 망명정부를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은 그리스 공산당이 조직한 그리스 인민해방군(Greek People's Liberation Army, 약칭 ELAS)였다. 이들은 소련의 원조를 받으면서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크레타섬과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를 비롯해 그리스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추축군은 수도 아테네와 몇몇 대도시, 도로 주변만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파 계열인 그리스 민족공화동맹(National Republican Greek League, 약칭 EDES)은 그리스 공산당과 대립하면서 그리스 레지스탕스들은 공동의 적인 추축군과의 싸움에 협력하기보다는 오히려 같은 민족끼리 주도권 싸움과 상호 비난에 더 열을 올렸다. 또한 이들은 필요하다면 추축군과도 손을 잡아 서로를 공격하고 반대파 측 마을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학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1944년 3월 그리스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국민해방정치위원회(Political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 약칭 PEEA)라는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런던 망명정부 대신 그리스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런던 망명정부와 왕당파 세력을 비롯한 다른 저항 단체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더욱이 미국과 영국, 소련은 전후 동유럽과 발칸에 대한 지분을 나누었고 소련은 그리스를 영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그리스 문제로 서방과 충돌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스 공산당에 대해 타협하라고 지시했다.
1944년 5월 레바논에서 그리스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런던 망명정부가 주도하는 통일 정부의 구성에 합의했지만 그동안 쌓인 서로의 증오심과 불신감은 강대국들이 억지로 중재한다고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전황의 악화로 독일군이 발칸 반도에서 철수하자 영국군이 그리스에 상륙하여 10월 13일 아테네에 입성하였다. 영국은 런던 망명정부를 그리스 정통 정부로 인정했기에 좌파측의 국민해방정치위원회와 그리스 인민해방군의 해산을 명령했다.
영국군과 인민해방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거듭되는 가운데, 몇차례의 정치적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1946년 3월 전면적인 내전으로 폭발했다.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던 영국은 그리스 문제에 손을 뗐지만 미국이 대신 개입하여 그리스 정부를 적극적으로 원조했다. 그리스 공산당은 처음에는 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저항하면서 우세한 정부군을 괴롭혔다. 하지만 대도시를 공격한다는 무리한 작전 목표를 세우면서 희생이 커졌고, 지도부의 내분, 외부의 원조가 끊어지면서 점점 수세에 몰려 1949년 10월 16일 항복을 선언하였다.
​* 트루먼의 딜레마
동일한 시기, 동일한 방법으로 그리스 내전에서 우파 정부가 승리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어째서 중국에서는 실패했을까. 우선 중국 공산당은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그리스 공산당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1921년에 창설된 중국 공산당은 1927년 9월 추수 봉기 이래 이미 장제스 정권과 20년 가까이 싸우며 중국 서북지역에  매우 탄탄한 기반과 잘 조직된 무장 역량을 구축하고 있었다. 더욱이 8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일본이 항복한 뒤 동북과 북중국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의 강력한 결속력 덕분이었다. 마오쩌둥은 앞으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해야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따라서 지도부가 협상이냐, 전쟁이냐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어 갈등을 빚거나 시간을 낭비할 일이 없었다.
반면,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 내전에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고 있었다. 아예 손을 떼기에는 이미 너무나 깊숙이 개입했고 그렇다고 아예 장제스와 함께 마오쩌둥의 공산군과 싸우는 것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트루먼은 평소 자신이 경멸하고 있던 장제스 정권을 위해 미국 국민을 명분도 분명치 않은 새로운 전쟁에 내몰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다, 자칫 소련과도 정면 충돌할 수 있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내내 중국 서남부에 센놀트가 지휘하는 소규모 공군 부대를 배치했을 뿐, 미국은 중국 대륙에 별다른 기반도 군대도 없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에야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5만명 정도의 미 해병대를 상륙시켜 베이핑과 톈진, 칭다오 등 중국 동부와 북부의 몇개 도시를 장악했지만 충분한 전쟁 준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은 이탈리아나 그리스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광대했고 인구도 훨씬 많았다. 성급한 군사적 개입은 자칫 독일이나 일본과의 전쟁보다 더 어려운 수렁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것이 유혈 없이 평화적으로 해결한 이탈리아나, 우파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그리스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트루먼에게 또 다른 선택은 장제스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1944년 일본의 이치고 작전에서 치명타를 입은 장제스 정권은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인 군사고문단은 장제스의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장시켰으며, 이들은 미국이 제공한 수송기와 군함을 타고 중국 동북부로 진격하였다. 즉, 장제스가 내전을 결심할 수 있는 것도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가 제아무리 호전적이라도 미국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내전을 벌이거나 동북으로 진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한편으로는 장제스에게 공산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공산군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돕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었다.
루즈벨트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이 되었다가 82일만에 루즈벨트가 서거하면서 자신도 예상치 못한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게 된 그는 정치적인 경험과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이 부족했다. 게다가 아집과 편견이 매우 강했으며 주변과의 소통 능력도 부족했다. 맹목에 가까울 만큼 친소 유화적이었던 루즈벨트와 달리,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스탈린의 팽창주의를 경계하면서도 그렇다고 강력하게 견제에 나서지도 않는 등 집권 초기에는 원칙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이었다. 동북아에서 냉전이 시작된데는 일정 부분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가 초래한 결과이기도 했다.
중국 내전에 손을 뗄 생각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도 없었던 트루먼은 제3의 선택을 골랐다. 국공을 중재하는 임무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물러난 헐리 대사를 대신해, 새로운 인물을 중국으로 보내어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 국무부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극동 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는 중국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중국이 진정으로 안정을 찾으려면 국공 양당이 정치적으로 타협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만약 미국이 손을 뗀다면 장제스는 내전에 일본을 끌어들일 우려가 있으며, 반대로 미국이 원조를 늘리거나 무력 개입할 경우 소련과의 마찰을 빚을 수 있고, 그렇다고 현재의 정책으로는 현상 유지나 내전을 억제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란 중국에 남아 있는 일본군을 최대한 신속하게 본국으로 송환시키는 한편, 국공의 타협에 미국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낼 것인가. 앤더슨(Clinton P. Anderson) 농무부 장관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육군참모총장인 마셜 원수가 가장 이상적인 적임자라며 추천하였다. 트루먼도 동의했다. 그는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시련과 희망의 시간(Years of Trial and Hope)》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장제스가 승리할 수 있도록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전을 막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였다. 이 역할을 맡는 사람은 특별한 자격과 남다른 수완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나는 마셜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 조지 마셜, 중국에 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사실상 총지휘했던 ​마셜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전략가이자 조직가였다. 진주만 기습 당시만 해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미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어 내었고, 영국, 소련과의 군사적 협력 관계를 적절히 조율하면서 맥아더와 패튼,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등 개성 넘치는 고집쟁이 장군들을 통솔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1947년 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국무장관을 맡아 유럽 부흥 계획, 이른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실시하여 폐허가 된 유럽을 복구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역량도 발휘하였다.
1948년 6월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마셜은 과감하게 공수작전을 전개하여 소련을 굴복시켰으며 조지 케넌 주소련 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소 봉쇄 정책을 주도했다. 전후 서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처럼 정치적 혼란에 빠지지 않았던 것도, 공산주의자들의 발호와 소련의 서진을 막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마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를 통틀어 마셜만큼 강력한 리더쉽과 판단력, 추진력을 갖추면서 미국인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포츠담 회담 중 열린 만찬에서 스탈린조차 마셜을 가리키면서 "내가 존경하는 가장 훌륭한 장군"이라고 극찬하였다. 마셜은 트루먼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카드였다.
마셜은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더 이상 군인으로서 자신이 할 역할은 없다면서 트루먼에게 전역을 신청하였다. 그는 참모총장직을 아이젠하워에게 넘긴 채 40여년의 군 생활을 끝내고 1945년 11월 30일 퇴역하였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고향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트루먼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의 특사로서 중국으로 가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중재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수락하였다. 이로서 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최악이자, 1년 뒤 중국을 떠나면서 "이곳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며 심지어 육군에 재입대할 수도 있다."고 말하게 되는 임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의 가장 큰 오류는 당사자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들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구도나 근본적인 모순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자신들의 선입관과 편견으로 바라보며 자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위해 타국의 정치적 문제에 억지로 개입하려고 하는데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조차 내부적으로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였다.
번즈 국무장관과 애치슨 국무차관 등 미 국무부는 이전부터 대체적으로 중공에 동정적이었다. 그들은 마오쩌둥이 장제스보다 훨씬 온화하며 타협적인 인물이며, 국공이 타협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완고하기 짝이 없는 장제스 때문이라고 여겼다. 반면, 장제스의 참모장이었던 웨드마이어를 비롯한 군부와 공화당 의원들은 장제스를 더욱 적극적으로 원조하지 않으면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만주와 중국 북부지역 전체가 넘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단순히 소련을 견제하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중국과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건의하였다.
트루먼은 장제스를 불쾌하게 여겼다. 전통적인 중국식 전제주의적인 그의 정권은 미국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색채와는 어떤 면에서도 맞지 않았다. 봉건적이고 보수 반동적이며 부정부패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지만 조금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미국이 무엇을 위해 이런 정권을 애써 지탱해 주어야 하는가. 하지만 장제스 정권이 붕괴되어 그 대신 중국에 거대한 좌파 정권이 들어서고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는 것은 더욱 싫었다. 이것이 그의 딜레마였다.
그는 마셜에게 중국이 분열되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국공간의 내전이 확대되어서도 안되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라고 밝히면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기타 정당을 설득하고 타협을 끌어내어 모든 주요 정치 세력들이 참여하는 민주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라고 설명하였다. 이를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하여 국공 양쪽을 압박할 것과, 특히 비타협적인 장제스를 '설득'하기 위해 만약 정전에 합의한다면 그 대가로 5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한다는 당근을 제시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어떤 기술적, 경제적, 군사적 원조도 없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할 권한도 부여하였다.
또한 그는 미국의 공식적인 대중국 정책을 발표하였다. "미국과 모든 유엔 회원국은 중국이 강력하고 통일된 민주적인 국가로 발전하기를 바라며, 중국인들은 평화적으로 협상하여 내부적인 견해 차이를 조정해야 한다"

트루먼이 헐리를 대신해 마셜을 특사로 파견한다는 소식은 국공 양측의 환영을 받았다. 장제스는 마셜이 과거 자신과 적대적이었던 스틸웰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을 경계하면서도, 어쨌거나 미국의 계획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다는 전제 아래 통일된 연합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공산당과의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약 공산당이 마셜의 중재를 수락하여 독자적인 무력과 기반을 포기하고 자신의 정권 테두리 안에 들어온다면 그건 가장 바라는 바였고 '적절한' 수준의 정치적 지분을 내줄 생각도 있었다. 설령 협상이 결렬되어도 미국이 장제스 정권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이상 자신이 잃을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중공은 중공대로 장제스와 가까운 헐리보다는 과거 장제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었던 마셜 쪽이 더 우호적일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그가 장제스에게 억지로 양보와 타협을 종용하여 심각한 갈등을 빚는다면 자신들에게 더욱 유리해 지리라 기대하였다. 서로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는 가운데, 1945년 12월 15일 마셜이 충칭에 도착했다.
*  3인 위원회

마셜이 중국에 왔을 때,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겨우 두달 전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서명했던 쌍십협정이 무색하게 국공 양측의 충돌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또한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내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장제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가차없이 진압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건이 12월 1일 윈난성 쿤밍에서 일어난 "12.1참안(一二·一惨案)"이었다.
11월 25일부터 시난연합대학에서 여러 대학들의 교수들과 학생 대표들, 민주동맹 회원들이 모여 내전을 반대하는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회의장을 포위하고 즉각 해산을 명령했지만 듣지 않자 12월 1일 대학내로 강제 진입하여 이들을 체포하였다. 충돌 과정에서 4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장제스에 대한 비난은 더욱 고조되었고 쿤밍에서만 15만명이 추도 대회에 참여하는 등 반 내전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물론 중공에게는 아주 좋은 선전거리였다. 저우언라이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고 장제스 정권의 독재와 反민주성을 비난하였다. 일본이 항복했을 때만 해도 영광의 절정을 누리던 장제스는 부정부패하고 무능한데다 취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정권을 지탱하는데만 급급하여 갈수록 보수 반동화되면서 국민들로부터 괴리되었다.
마셜은 중국에 도착하자말자 현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웨드마이어를 만나 그의 견해를 들었다. 하지만 웨드마이어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국공 양당이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길은 없을 것입니다. 국민당은 정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공산당 역시 소련의 원조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웨드마이어는 장제스의 역량으로는 중국 북부를 신속하게 장악하고 안정시키는 것은 어려우며 우선 산하이관 이남을 장악하는데 주력하고 주요 도로와 철도를 확보해야 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셜이 오기 직전에 만주를 미국과 소련, 영국, 프랑스의 공동 신탁통치 아래에 두는 방안을 장제스에게 건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웨드마이어의 조언은 분명 군사적으로는 가장 합리적이었지만 혼자만의 생각일 뿐 트루먼 행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닐 뿐더러, 장제스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간신히 회복한 영토를 남의 손에 다시 맡긴다면 국민들의 비난을 더욱 고조시킬 뿐더러, 중국의 통일과 주권 회복이 자신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믿고 있던 그로서는 자존심이 용납치 않는 일이었다. 장제스는 오히려 현재의 군사적 우세를 적극 활용하여 중공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해야 하며 적어도 6개월 이내에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주력 병력을 동원하여 공산군에 대한 포위를 더욱 강화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셜 역시 웨드마이어의 충고를 한귀로 흘러넘겼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수를 쓰건 그걸 해내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마셜을 환대했지만 마셜은 그에게 미국 정부는 국내외적인 여론 때문에 내전을 지원할 수 없으며 국공이 타협하려면 우선 국민당이 양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요구했다. 물론 마셜은 그렇다고 중공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앉도록 끌어내면서 세부적인 사항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며 중국인들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 마셜과 장제스 부부 

그는 자신을 의장으로 국공 양측 대표가 각각 한명씩 참여하는 이른바 "3인 위원회"의 구성을 제안했다. 국민정부 대표는 장췬(張群), 중공측 대표는 저우언라이였다. 주된 의제는 쌍십협정의 연장선에서 중국의 주요 정당 대표들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의 소집과 국공 양군이 전투 행위를 중지하도록 합의하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7일 첫번째 공식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회의는 양측의 첨예한 대립으로 시작되었다. 장췬은 소련은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하고 있으며 중공은 소련의 앞잡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산당이 먼저 총을 내려놓고 군대를 해산시키지 않는 한 연합 정권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저우언라이 역시 장제스 정권의 목적은 중공의 완전한 파괴이며 그런 음모를 포기하지 않는 한 중공이 스스로 무력을 포기한다면 자멸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 3인 위원회. 왼쪽부터 장췬과 마셜, 저우언라이.

그럼에도 마셜의 거듭된 중재 끝에 결국 1월 10일 오후 3시 3인 위원회는 정전 협정에 일단 합의하였다. 그리고 1월 13일 자정을 기하여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명의로 모든 부대에 "전투행위 정지명령"이 하달되었다.
1. 일체의 전투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
2. 특별히 허용된 경우를 제외한 모든 병력 이동을 중지할 것
3. 철도와 도로, 통신에 대한 파괴 행위를 중지할 것

또한 정전 명령의 이행과 감시를 위한 실무팀으로 베이핑에 군사조처집행부(軍事調處執行部)가 설치되었다. 군사조처집행부는 3인 위원회와 별도로 미국 정부와 국공 양측을 각각 대표하는 세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국민정부측 대표는 군령부 제2청장 정졔민(鄭介民), 공산당측 대표는 팔로군 참모장 예젠잉, 미국 대표는 미 국무부 극동차관보인 윌터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이었다. 이로서 일본이 항복한 이래 반년 간 진행된 국공의 국지적인 내전은 일단락되었다.
또한 같은 날 충칭에서는 정치협상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총 38명이 참여하였다. 국민당측 대표가 8명, 공산당측 대표가 7명, 중국청년당 대표 5명, 민주동맹 대표 9명, 무당파 9명이었다. 장제스는 회의 개막식에서 각 당의 대표들 앞에서 평화와 민주가 이 회의의 목적이며 국가의 이익과 장래를 위해 솔직하고 기탄없이 의견을 내놓기를 바란다고 연설하였다. 또한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와 모든 정당의 합법적 지위를 허용하며 보통 선거의 실시, 투옥 중인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회의는 한달간 개최되어 정부 개편과 총선거의 실시, 헌법의 선포, 국민대회의 개최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마셜의 중재 아래 국공 양군대의 통합과 정편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정편 기간은 총 19개월이었다. 우선 12개월 안에 국민정부군은 90개 사단, 공산군은 18개 사단으로 축소하고 다음 6개월 동안 국민정부군은 50개 사단, 공산군은 10개 사단으로 줄인 다음, 마지막 한달 동안 하나로 통합한다는 내용이었다. 각 사단은 1만 4천명으로, 총병력은 20개군 60개 사단이었다. 또한 중국 전체를 5개 구역으로 나누고 다음과 같이 배치키로 하였다.
1. 동북 : 국민정부군 14개 사단, 공산군 1개 사단
2. 서북 : 국민정부군 9개 사단
3. 화북 : 국민정부군 11개 사단, 공산군 7개 사단
4. 화중 : 국민정부군 10개 사단, 공산군 2개 사단
5. 화남 : 국민정부군 6개 사단

마셜은 협정 조인식에서 말했다. "이 협정은 중국의 장래를 위한 희망의 표현입니다. 나의 간절한 희망은 평화를 갈구하는 중국 민중의 열망이 담긴 이 협정 문서가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눈이 먼 작은 집단에 의해 배반당하고 더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트루먼은 일본군의 송환과 국공의 정전 협정 이행을 위해 웨드마이어 중장을 비롯한 미군 군사 사절단을 중국에 주둔시키겠다고 발표하였다. 마셜은 1946년 3월 11일 자신의 임무를 이행했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면서 중국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떠나자 말자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동북에서의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철수를 시작하자 국민정부군과 공산군이 경쟁을 재개한 것이다.
▲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저우언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