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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국공내전, 천하를 다투다 - 4. 마셜, 중국에 오다/blog.naver.com/atena

장장 43일에 걸쳐 진행된 충칭회담은 사실상 성과없이 끝났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진영의 지도자가 직접 얼굴을 맞대었지만 뿌리깊은 증오심과 이견을 좁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로의 입장만 고수하면서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헐리가 직접 나서서 "공산군을 최대 20개 사단까지 인정하되 장제스 정권 주도의 통일을 승인하라"라면서 양측의 타협을 종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앞에서는 평화를 말하면서 뒤로는 공격을 더욱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전투에서 더 많은 승리를 거두고, 더 많은 지반을 얻는 쪽이 회담장에서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칭회담은 실상 "여우와 두루미의 만찬"이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서로 샹당 전투를 지시하면서 "적을 철저하게 섬멸할수록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서 더 큰 힘이 생긴다"라고 강조했다. 어느 쪽이 먼저 총을 쏘았느냐, 는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는가였다.

9월 10일부터 10월 12일까지 약 한달에 걸친 전투에서 옌시산은 정예부대 13개 사단을 투입했지만 덩샤오핑의 맹렬한 공격 앞에 11개 사단 3만 5천명을 상실하는 대참패를 당했고 샹당지구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비록 전체 전황에는 큰 의미가 없는 국지전에 불과했지만 장제스로서는 참담한 결과였다. 반면, 공산당의 기세는 한층 올라갔다. 마오쩌둥은 의기양양하게 쌍십협정에 서명하였다. "평화, 민주, 단결, 통일을 위해 국공은 공동으로 노력하며 내전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따위의 알맹이도 없는 상징적인 선언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산전수전을 겪었던 장제스로서도 전에 없는 실패였다. 그는 지난 30여년간 수없이 많은 권력 투쟁과 내전에서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그 어떤 적도 굴복시켰다. "삐딱이 조"라 불리던 스틸웰 장군은 이 중국의 노회한 지도자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으려고 몇년 동안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불명예스럽게 본국으로 쫓겨가야 했다. 하지만 장제스도 마오쩌둥이 누구보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당근이나 회유책도 통하지 않았고 타협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채찍으로 누르는 것도 실패했다.

나중에 장제스는 마오쩌둥에 대해 "그는 의지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나의 강력한 맞수가 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라고 술회하였다. 반면, 마오쩌둥은 장제스에 대해 "그는 아직도 장래에 대한 원대한 계획이 없다. 민주주의를 할 지, 독재를 할 지도 분명하지 않다.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평하였다. 두 사람은 짧은 만남 속에서 상대의 허실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충칭회담의 성과는 없었지만, 적어도 마오쩌둥은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충칭은 여전히 중국의 임시 수도였기에 정부 청사와 정치 인사들 또한 충칭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충칭에 체류하는 동안 이렇다할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을 이용해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과, 중원대전에서 장제스에게 패배한 이후 정계에서 은퇴한 舊 서북 군벌 펑위샹, 민주동맹(국민당과 공산당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파 정치세력으로 주로 부유한 기업인과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장제스의 독재를 반대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의 지도자인 장란(張瀾), 명망있는 역사학자 궈모뤄(郭沫若) 등 평소 장제스와 사이가 나쁜 정치 지도자들, 재계, 학계의 인사들을 만나며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오쩌둥은 이들을 얼마나 포섭하는가가 향후 내전의 승패를 가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공산당은 결코 "적비(赤匪)"가 아니며, 오히려 장제스가 이중적인 행태를 모두를 기만하고 충칭회담은 그의 가짜 연기일 뿐이라고 비난하면서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전국 인민들은 관중이 되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낼 것입니다." 몇년 뒤 국공내전에서 전세가 기울자 이들의 대부분이 중공 쪽으로 넘어가 장제스 정권의 붕괴를 더욱 촉진했다는 점에서 마오쩌둥의 선전술은 충분히 효과를 본 셈이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에게 "거짓 연기자"라고 말했지만 거짓 연기자로서의 능력은 누가 보더라도 장제스보다 한 수 위였다. 쌍십협정이 체결되고 옌안으로 떠나기 전 마오쩌둥은 마지막 환송식에서 "우리는 장 위원장의 영도 아래 부강한 신중국을 만들어야 한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평화와 민주, 단결,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라고 연설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신중국 만세! 장제스 위원장 만세!"를 외쳤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조조 앞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숨김으로서 조조를 방심시켰듯, 장제스를 지나치게 도발하지 않으려는 마오쩌둥 특유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다는 뜻)" 전략이었다.

장제스는 마음만 먹으면 마오쩌둥을 체포하거나 암살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홍문의 연에서 전적으로 항우의 아량에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했던 유방과 달리, 마오쩌둥의 뒤에는 미국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칭에서 마오쩌둥의 신변을 보장했던 헐리 대사는 그의 안전 문제에 만전을 기했다. 저우언라이 또한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위험을 제거하고 마오쩌둥이 먹고 마시는 음식 하나하나까지 직접 검사하였다.

따라서 마오쩌둥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장제스와 미국은 국제사회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판이었다. 바로 한달 전(신화일보 1945년 7월 12일자 논평)만 해도 "헐리는 중국 반동파의 똥통"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마오쩌둥은 그 헐리 덕분에 태연스럽게 충칭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얻어낼 수 있을 만큼 얻어낸 채 옌안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하지만 "내전을 중단한다"라는 ​쌍십협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협정이 체결된지 이틀 뒤 산시성에서는 옌시산의 군대가 덩샤오핑에게 항복하여 3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국공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먼저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충돌 역시 점점 격화되었다.

10월 18일에는 내몽골에서 핑수전역(平绥戰役)이 시작되었다. 내몽골 방면을 맡고 있던 제12전구 사령관 푸쭤이(傅作义)는 핑수철도(平綏鐵道, 베이징에서 바오터우(包頭)를 연결하는 철도로 내몽골을 동서로 횡단)를 장악하고 친일 괴뢰 정부인 몽강국을 접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제35군과 제67군, 신편 제3군, 신편 기병 제4사단 외에 투항한 괴뢰군 등 약 6만명의 병력이 핑수철도를 따라 몽강국의 수도 장자커우(張家口)로 향했다.

중공 중앙위 역시 이를 지켜볼 리 없었고, 허룽(贺龍)의 진차지변구(晋察冀辺區)에 이들의 격멸과 핑수철도와 내몽골의 장악을 지시했다. 허룽은 예하 병력을 총동원하여 3개 종대 14개 여단 5만 3천명을 투입하였다. 내몽골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허룽은 10월 25일 국민정부군 신편 제26사단을 격파하고 11월 9일에는 쑤이위안성의 성도이자 요충지인 바오터우를 포위했다. 하지만 국민정부군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2월 14일 후퇴하였다. 무승부로 끝났지만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1만 2천여명에 달했다.

​같은 시기 진푸철도(津浦鐵道, 톈진과 난징을 연결하는 철도)와 핑한철도(平漢鐵道, 베이징과 한커우를 연결하는 철도), 퉁푸철도(同蒲鐵道, 산시성 다퉁大同에서 윈청运城을 연결하는 산시성 최대의 철도) 등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모두 중국 대륙을 관통하면서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간선철도로서 중국의 대동맥이나 다름없었기에 철도의 장악이 곧 내전의 승패를 가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황은 국민정부군에게 불리하였다.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한 채 주변의 농촌 지대와 간선철도의 태반을 장악하고 있던 중공과 달리, 국민정부군은 충분한 준비 없이 숫자만 믿고 성급하게 철도를 따라 맹목적으로 전진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국식으로 재편된 국민정부군 정예부대의 대부분은 여전히 창장 이남에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을 신속하게 화북으로 옮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장제스는 급한 대로 장비도 훈련도 빈약하고 사기도 낮은 현지 지방군을 졸속으로 투입했다. 따라서 현지 지형에 밝고 유리한 길목을 선점한 공산군의 전술 앞에서 이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제11전구 총사령 쑨롄중(孙连仲)과 덩샤오핑의 진지위루 변구는 핑한철도가 관통하는 허베이성의 요충지인  한단(邯郸)과 스좌장(石家莊) 일대에서 한단전역(邯郸战役)을 벌였다. 국민정부군 제30군, 제40군, 신편 제8군 등 7개 사단 4만명에 대해 덩샤오핑은 3개 종대 6만명과 현지 유격대 10만명을 동원해 퇴로를 끊고 사방에서 포위 공격하였다. 10월 21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된 전투에서 국민정부군은 사상자 3천여명에 제11전구 부사령관 겸 제40군 군장 마파우(馬法五)를 비롯해 1만7천여명이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한 채 극소수만이 포위망을 돌파해 도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신편 제8군 1만여명이 반란을 일으켜 집단 투항하였다. 공산군의 손실은 1만여명 정도였다.

이런 상황은 마오쩌둥에게는 자신감을, 장제스에게는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둘 다 내전을 피할 생각도 없었고 승부는 오직 총으로 내야 한다고 고집했다.

1945년 9월 당시 국공 양측의 군사력은 국민정부군이 정규군과 비정규군을 합해 370만명, 소총 160만정, 야포 6천문, 항공기 8백대에 달한 반면, 공산군은 90만명, 소총 16만정, 야포 600여문, 구식 항공기 소량을 보유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장제스 측이 4:1로 우세했지만, 국민정부군은 넓은 지역에 분산된데다 병력의 태반은 투항한 친일 괴뢰군이거나 지방 군벌 군대였다.

이들은 군대인지 토비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규율도 엉망이었고 장비도 매우 빈약한데다 사기도 훈련도 매우 낮아 전투력은 거의 없었다. 나머지도 갓 징집되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신병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100만명의 중앙군 중에서도 스틸웰과 웨드마이어에 의해 재편된 4개 방면군 산하 50만명은 미국식으로 빈틈없이 훈련되었고 장교들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갖추었으며 미군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공산군 역시 창장 중하류 일대에서 일본군과 국민정부군을 상대로 싸웠던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는 전투 경험을 쌓을 일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전쟁 말기 또는 일본이 항복한 뒤에 투항한 친일 괴뢰군과 신병들이었다. 무기와 장비 또한 90% 이상이 적군들로부터 노획한 것들이었다. 총알조차 맞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또한 간부들은 현대전을 경험한 적도, 현대적 교리를 훈련받지도 못했으며 소규모 유격전을 제외하고 대부대를 지휘한 경험도 없었다. 대신, 치열한 계파 싸움과 충성 경쟁에만 혈안이 된 국민정부군과 달리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공산군은 목표 의식이 분명하고 마오쩌둥을 정점으로 강력한 결속력을 갖추었다. 이 점이 스페인 내전 당시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지도자들끼리의 내분으로 몰락했던 인민 좌파 정부군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마오쩌둥은 군사적 열세를 고려해 "북쪽으로 발전하고 남쪽을 방어한다(向北发展,向南防御)"라는 전략을 수립하고 병력의 재배치를 지시하였다. 당시 공산군의 주력인 제8로군 60만명은 옌안을 중심으로 서북과 내몽골, 허베이성, 허난성에 주둔하였고, 신4군 28만명은 창장 중하류와 산둥성 일대에 포진하였다. 또한 2만명 정도의 유격대가 창장 이남의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중공의 목표는 동북이었다. 8월 7일 만주로 물밀듯이 밀고 내려온 소련군은 보름만인 8월 22일 만리장성 이북 전역을 장악하였다. 그 중에는 1930년대에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연해주 일대로 도망쳤던 구 동북항일연군 300여명도 있었다. 이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선양, 장춘, 하얼빈 등 주요 도시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당초 마오쩌둥은 소련군의 협력을 얻어 만주를 신속하게 장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와 중소우호조약을 체결한 스탈린은 장제스와의 마찰을 빚을 수 있다며 거절하였다. 소련은 중국 내전에 관여하거나 중국 공산당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전략을 바꾸었다. 일단 대도시의 점령은 포기하되, 중소우호조약에 구속받지 않는 선에서 중소도시와 농촌지대를 장악한다면 국민정부군을 대도시로 몰아넣은 채 고사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대도시에도 간부들을 몰래 침투시켜 지하 조직을 결성케 하면서 기회를 엿보아 반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마오쩌둥은 당 정치국 회의에서 "동북과 러허성, 차하르성을 장악하고 전국 해방구 및 전국 인민들과 협력 투쟁을 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창장 이남과 화중에 배치된 병력의 대부분을 신속하게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또한 동북 현지 지형과 사정에 밝은 구 동북항일연군 출신 간부들을 선견부대로 파견하고 뒤이어 주력 부대를 출동시켰다. 당 중앙위원 10명과 후보 위원 10명 등 전체 중앙위원의 1/4, 산동군구 9만명, 신4군 제3사단 3만 5천명 등 11월까지 동북에 들어간 인원은 간부만 2만여명에 병력은 13만명이 넘었다. 모두 중공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하고 내노라하는 기라성같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밤낮없이 행군하여 10월 말까지 동북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를 "또 한번의 대장정"이라고 일컬었다.

또한 10월 31일 동북중앙국과 동북인민자치군을 편성하고 총사령관에는 공산군 최고의 지장으로 꼽히는 38살의 젊은 장군 린뱌오를, 중앙위 북방국 서기인 펑전(彭眞)을 동북중앙국 서기 겸 제1정치위원으로, 산둥성 정치국 서기인 뤄룽환(罗荣桓)을 제2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가오강(高崗)이 동북중앙국 상무위원에 임명되었다. 내몽골과 화북, 산둥성 등 곳곳에서 공산군 부대가 수백, 수천여명 씩 꼬리를 물고 꾸준히 동북으로 진입하고, 또한 투항한 만주군과 현지 보안대, 자경단, 토비 등을 편입시키면서 세력이 급격하게 계속 늘어나 1945년 12월 말이 되면 10개 군구 27만명에 달했다. 중공으로서는 남방 근거지는 버리되, 동북에 그야말로 사활을 건 셈이었다.

물론 장제스도 눈뜨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중소우호조약을 내세워 스탈린에게 중공군을 지원하지 말 것과 국민정부군의 동북 진입을 최대한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8월 31일 동북 3성을 9개 성, 3개 시로 개편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전 장시성 주석이자 자신의 측근인 슝스하이(熊式輝)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동북행영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동북에 대한 행정, 군사, 사법 등 모든 대권을 맡긴 것이다. 또한 두위밍(杜聿明)을 동북보안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1기생으로 북벌전쟁부터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중일전쟁 중에는 중국군의 전략 예비대이자 최정예 부대인 제5군을 지휘하였다. 또한 중국 원정군 부사령관으로 미얀마로 파견되어 스틸웰과 함께 싸우기도 했다. 

 

서남부로 내려간 채 철도마저 도처에서 공산군의 방해로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던 국민정부군은 미국의 선박과 수송기의 지원을 받아 화북과 ​만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또한 9월 30일에는 미 해병 제1사단이 톈진 탕구항에 상륙하였고 10월 2일에는 미 제3사단이 친황다오에, 11월에는 미 해병 제6사단이 산둥성 칭다오에 상륙했다. 중국에 상륙한 병력은 11만 3천여명에 달했으며 베이징과 톈진 등 화북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덕분에 장제스는 산하이관 이남의 주요 도시에 대해서는 공산군의 방해 없이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다.

​또한 화중과 화남에서 공산군이 북쪽으로 철수하면서 국민정부군은 큰 전투 없이 이 지역을 모두 탈환하였다. 이로서 중국 전토는 중공은 옌안과 내몽골, 러허성, 산둥성과 동북의 대부분을, 그 나머지 지역을 국민정부군의 통제하는 형국으로 양분되었다.

하지만 발빠른 중공에 비해 장제스는 이미 한발 늦은 셈이었다. 스탈린의 속셈은 겉으로는 중국 내전에 관여하지 않겠다면서도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싸움을 부추겨 중국 내전을 장기화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로서는 만약 어느 한쪽이 승리하건 간에 통일된 중국이 소련과 국경을 맞댈 경우 과거 일본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희망은 중국의 분열이었다.

따라서 중소우호조약에 따르면 다롄항과 뤼순항은 엄연히 중소 양국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음에도 두 항구를 장악하고 있던 소련군은 조약을 무시한 채 국민정부군이 탑승한 미군 수송선의 입항을 거부했으며 국민정부군이 만주 철도를 이용하는 것 역시 방해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중공 동북국과 접촉하여 산하이관에 대부대를 배치하여 국민정부군의 동북 진입을 저지하라고 권유하였다. 다롄항을 이용할 수 없었던 국민정부군은 훨씬 남쪽인 친황다오에 상륙하여 산하이관을 넘어야 했고 이 때문에 병참선에 심한 부담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11월 5일에는 동북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소련군을 10일까지 철수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국민정부군의 동북 진입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군이 철수할 경우 동북 전체가 공산군의 손에 고스란히 들어갈 것이 불보듯 뻔했다. 따라서 장제스 정권은 급히 미국 정부에 요청하여 소련군이 철수를 연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미국이 강경하게 나오자 마찰을 우려한 스탈린은 한걸음 물러나 선양과 창춘 비행장에 대해 국민정부군 항공기의 이용을 허가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1월 3일까지 연장키로 약속하였다.

그럼에도 국민정부군의 준비 부족과 미국의 수송선 부족으로 인해 계속 지연되면서 1946년 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동북에 진입하여 남만주의 주요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 수개월은 중공이 동북에 강력한 근거지를 마련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국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국공의 내전을 반대하고 타협을 종용하면서도 모든 수단을 다해 장제스 정권의 내전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이었다. 이는 트루먼의 리더쉽이 결여된데다, 대중 전략이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웨드마이어 중장은 소련이 미-소의 갈등을 조장할 목적으로 중소우호조약을 무시하고 공산군을 지원하여 중국 내전에 관여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미 국무부 중국 과장인 드럼 라이트(Everett F. Drumright) 역시 1945년 11월 16일 보고서에서 "중공이 소련의 지원을 얻어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다"며너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장제스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중국을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국무부 극동국장인 빈센트(John C. Vincent)는 중국 문제가 소련과의 갈등을 유발하여 양국의 협력 체계를 파괴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은 중국의 안정은 내전이나 미국의 지원이 아니라 국공 양당이 정치적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번즈(James F. Byrnes) 국무장관과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차관 역시 소련과의 갈등을 우려해 중국에 과도하게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국은 소련의 전략이나 중국의 정치적 특수성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단순히 자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서 ​중국 문제를 근시안적이고 추상적으로 바라보는데서 모순이 있었다. 따라서 딜레마에 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땅한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처지였다.

지난 1년간 최일선에서 충칭과 옌안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국공의 조정을 맡았던 헐리 대사가 결국 11월 27일 갑자기 사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사임하는 이유로 미 국무부의 일부 외교관들이 중공과 결탁하고 있기에 자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실상 트루먼의 애매모호하고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이었다. 헐리가 사임하자 충격을 받은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인 조지 마셜 원수를 개인 특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적 수완을 갖추었으며 스틸웰과 웨드마이어와 마찬가지로 초급 장교 시절 중국에서 무관으로 복무한 적이 있기에 중국어도 유창하였다.

트루먼은 어떤 점에서 고려해도 마셜보다 더 적임자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트루먼 자신도 입장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과연 마셜이 중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헐리 대사의 후임으로 중국 사정에 가장 해박한 웨드마이어가 임명할 예정이었으나 중공의 강력한 반발로 중공과 친분이 깊은 스튜어트가 임명되었다. 웨드마이어는 자신의 일기에 "언제부터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는가"라면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1945년 12월 20일 마셜이 충칭에 도착했다. 그리고 1946년 1월 7일 마셜과 저우언라이, 장췬(張群)이 참여하는 이른바 "3인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중국 내전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